728x90
반응형
SMALL

더 좁은 의미에서의 문화-즉, 사상/정서/상상력-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바바리안적 요소들이 덜 중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요소들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로마와 다른 이교주의의 파편들이 고대 노르드어/앵글로색슨어/아일랜드어/웨일스어에 남아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런 파편들이 많은 아서 왕 로망스(모험담)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세의 연애시는 바바리안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발라드는 아주 최근까지도 (늘 반복되는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는) 선사 시대의 전래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들려주는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고대 노르드어와 켈트어 텍스트들은 오랫동안 아주 제한된 지역 바깥으로는 전혀 알려지지 않다가 근대에 와서야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언어가 달라지면서 앵글로색슨어는 금세 잉글랜드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고대 게르만족과 켈트족 세계의 여러 요소가 이후의 자국어들에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려면 참으로 힘들여 찾아야 합니다.!

 

웨이드(Wade)(게르만 신화의 등장인물. 웨일랜드의 아버지)나 웨일랜드(Weland)(게르만 신화와 북구 신화에 나오는 전설적인 대장장이)가 한 번 등장할 때 핵토르, 아이네이스,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는 쉰 번이나 등장합니다.

 

중세의 책에서 켈트족 종교의 유산 후보 하나를 캐낼 때 마르스와 베누스와 디아나는 스무 번씩 등장합니다.

 

연애시에 담긴 바바리안들의 영향을 희미하고 추측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연애시가 그리스-로마 고전이나 심지어 아라비아인들에게 영향을 받은 요소는 훨씬 더 분명합니다.

 

바바리안들의 유산이 정말 적다기보다는 몸을 숨기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몸을 숨기는 데 아주 능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요. 로망스와 발라드에 있어서는 이것이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둘이 어떤 의미에서, 어느 정도나 중세 특유의 산물인지 물어야 합니다.

 

18세기와 19세기 사람들은 중세에서 로망스와 발라드가 차지하는 비중을 실제보다 크게 봤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중세 로망스를 직접 계승한 아리오스토(Ludovico Ariosto, 1474~1533)(이탈리아의 시인. 대표작 <광란의 오를란도>), 타소(Torquato Tasso,1544~1595)(이탈리아의 시인. 대표작 <해방된 예루살렘>), 스펜서(Edmund Spenser, 1552~1599)(영국의 시인. 대표작 미완성 장편시 <선녀여왕>)의 작품들은 허드(Richard Hurd, 1720~1808)(영국의 주교. 대표작 <기사도와 로망스에 관한 문학>(Letters on Chivalry and Romance) 와 워턴(Thomas Warton, 1728~1890)(영국의 계관시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순문학(polite literature)'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Letters on Chivalry and Romance

허구 작품에 대한 그런 취향은 '형이상학파' 시대(17세기)와 문예 전성기(Augustan Age)(18세기 전반)에도 줄곧 살아 있었습니다. 발라드(이야기를 담은 민요) 또한 종종 다소 격이 떨어진 형태로 등장하기는 해도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유모에게서 발라드를 들었고, 저명한 평론가들이 가끔씩 발라드에다 찬사를 보냈습니다.

 

따라서 18세기의 중세 '부활'은 완전히 죽지 않은 것을 살려 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로를 따라 우리는 중세 문학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 앞에 흐르던 개울을 따라가다 수원에 이른 셈입니다. 그 결과, 로망스와 발라드가 중세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과도하게 채색하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을 제외하면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보는 사람의 머릿속에 중세의 이미지를 떠올리고자 하는 대중적 도상화 - 포스터, <펀치>(Punch) (영국에서 발행된 만화 위주의 주간지)의 농담 - 는 모험을 찾아 떠난 기사를 그려 놓고 성과 도움이 필요한 처녀, 용 같은 것을 배경에 잔뜩 배치합니다.

 

이런 대중적 인상에 대해서는 흔히 변호가 가능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로망스와 발라드는 중세 특유의 작품 또는 중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힐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중세인들이 남긴 문학 작품 중에서 로망스와 발라드가 가장 많은 이들에게 계속해서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여러모로 정도 차이가 있는 비슷한 장르들을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기는 하지만, 로망스와 발라드는 총체적 효과 면에서 독특하고 대체 불가합니다.

 

-[폐기된 이미지], C.S LEWIS -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우리가 중세를 권위의 시대라고 말할 때는 흔히 교회의 권위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세는 교회의 권위만이 아니라 여러 권위가 공존하는 시대였습니다.

 

중세 문화를 환경에 대한 반응이라고 볼 때 중세 문화는 환경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필사본들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중세의 모든 저술가는 가능한 한 이전의 한 저술가를 토대로 삼고 한 고전 저자(auctour) (작품들이 당대 문학적 지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고한 고전의 저자)를 따라갔는데, 라틴어 작가이면 더 선호했습니다.

 

이는 중세 시대와 야만 상태의 차이점이자 근대 문명과의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야만인 공동체에서 문화를 습득하는 방법이라면 유구한 행동 양식에 참여하는 것과 입에서 나오는 말, 즉 부족의 나이 든 사람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지식이 결국 관찰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중세에는 주로 책에 의존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독서는 전체 문화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 진술에 유보 조항을 하나 달아야 하겠습니다. 중세의 뿌리는 책을 통해 주로 전해진 그리스-로마 전통뿐 아니라 북부와 서부에 위치한 '바바리안'들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바바리안'이라는 단어에 작은따옴표를 붙인 것은 오해의 소지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표현은 자칫하면 로마 제국의 국경을 압박했던 이들과 로마 시민들 사이에 인종과 예술과 자연적 역량 면에서 고대에 실제로 존재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차이가 있었다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지기 오래 전부터 시민권은 이미 인종과는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역사 내내, 인접해 있던 게르만족과 켈트족은 일단 로마에 정복당하거나 동맹 관계가 되면 로마 문명에 동화되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어려움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켈트족이 그 일에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지체 없이 토가를 입었고 금세 수사학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중절모까지 다 갖춰 입고 유럽인인 척하는 호텐토트(Hottentot)(남아프리카공화국 원주민 코이코이족을 가리키는 네델란드어로 '열등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동화는 매우 실질적이었고 흔히 영구적이었습니다. 몇 세대 만에 그들은 로마의 시인, 법률가, 장군들을 배출하게 됩니다. 두개골의 형태와 이목구비와 피부색과 지성 면에서도 그들은 그리스-로마의 기존 구성원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이해된 의미에서의) 바바리안들이 중세에 기여한 바는 그들을 연구하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평가될 것입니다. 법과 관습과 전반적 사회 형태에 관한 한, 바바리안적 요소들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특정한 예술이 특정한 방식으로 중요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문학의 그 어떤 것도 문학이 사용하는 언어보다 더 본질적일 수는 없습니다. 언어는 고유의 개성이 있습니다.

 

다른 어떤 언어와도 다른 시각을 함축하고 정신 활동을 드러내며 울림을 갖습니다. 

 

어휘만이 아니라 - 영어의 'heaven'이 프랑스어의 'ciel'가 같은 의미일 수는 없습니다. - 구문의 형태도 독특합니다.

 

따라서 잉글랜드를 포함한 게르만족 국가들의 중세(와 근대) 문학에는 바바리안들의 언어에서 유래한 것이 만연합니다. 

 

라틴어에 밀려 켈트어들과 게르만 침략자들의 언어들이 거의 사라진 다른 나라들에서는 상황이 상당히 다릅니다.

 

중세 영문학의 경우, 프랑스어와 라틴어의 영향을 모든 면에서 충분히 감안하고 나면, 모든 문장이 그 어조와 리듬과 '느낌'에서 여전히 바바리안들이 남긴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와 앵글로색슨어의 관계를 문학과 무관한 "언어학적 사실일 뿐"이라고 무시하는 이들은 문학이 존재하는 양식 자체에 대해 충격적인 무신경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폐기된 이미지], C.W LEWIS -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생각한다는 것은 타인을 배려하는 일이다. 이점은 한나 아렌트 이전, 무려 2500년 전 동아시아 사람, 공자가 말한 바 있다. 

 

흔히들 공자라고 하면 어짊, 곧 인으로 그의 사상의 핵심을 꿰려고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충과 서라고 한다. 그것은 제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고, 스승이 재가하였다.

 

먼저 공자가 자신의 도는 하나로 관통된다고 말한다. 그 말은 퍼뜩 알아차린 제자인 증자가 "예"라고 반응한다. 그러자 공자는 일어서서 나간다.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선문답에 나머지 제자들이 증자에게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증자 왈,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뿐입니다." (<이인편> 15장)

 

충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서는 '헤아리다', '용서하다' 등의 뜻을 지녔는데, 주자의 해석에 따르면 '자기 자신을 헤아려 남에게 베푸는 것'이다. 

 

유학자들은 저기서 충과 서를 각기 다른 두 단어로 볼 것인지, 하나로 볼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 중이다.

 

'전심과 진심을 다하여 남을 헤아리고 베풀라'고 풀이해도 되고, '매사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남의 몸과 마음을 헤아리고, 그에 맞게 베풀며 살라'는 말로 풀어도 되겠다.

 

남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 자신을 유심히 관찰하면 된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할 테니 그것을 행하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할 터이니 마땅히 만나는 사람에게 행하라는 것이다. 

 

산상수훈의 황금률(마7:12)과 닮았다. 공자에게서도 생각은 과학적 합리성에 있지 않고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하는 마음에 있었다.

 

 

내게,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모델은 요셉이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아닌, 예수의 육친 요셉 말이다. 그는 자신과 정혼한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그것은 간음이었다. 파혼은 물론이고 돌로 쳐서 죽일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충성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는 율법에 신실한 유대인으로 자신의 무죄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망신 주고, 마을 어른들에게 끌고 가야 했다.

 

그런데 그는 "생각"한다(마 1:20). 요셉의 생각은 삼단논법과 같은 논리적 규칙을 따르는 사고가 아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느라 사랑하는 여인의 머리에 돌을 던지는 방법을 고안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원래 의미에 맞게 사랑하는 방법에 골몰한다. 

 

사랑하는 아내의 잘못을 무작정 덮지도 않지만, 그를 다치게  하지도 않는다.

 

요셉의 생각함은 마리아를 배려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적으로 생각한다고 했을 때의 생각함은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말씀의 영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나는 우리 한국 사회에 기독교적 지성이 좀 더 많아지길 바란다. 대중적으로 주목받는 작가들은 대부분 무신론자 아니면 불교 계통이다. 기독교인의 활약이 없지 않지만,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능력을 갖췄으면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지능 지수가 높고 공부도 잘해서 문제를 척척 잘 푸는 것보다는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다.

 

의로운 사람 요셉의 사유 방식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라고 바란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김기현 저-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공감과 연민의 사고가 상상력이다.

 

앞서 인용한 문장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생각'은 타인의 처지에서 배려하는 상상력을 말한다.

 

잔혹한 살상 행위를 국가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서류를 꾸미고 보고하며 제대로 실행되는지를 꼼꼼히 점검하면서도 아이히만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들의 목소리를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히만이 무심히 자기 일을 수행한 것을 '상상력의 결여'라고 짚어 냈다.

 

여기서 아렌트는 예수를 소환한다. 그가 보기에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자들에게는 '상상력의 결여'라는 원천적인 잘못이 있다. 가상칠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정작 자기 자신은 알지 못한다. (눅 23:34)

 

한나 아렌트

 

이 말을 역추적해 보면 동일한 결론을 얻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류 최악의 사형 도구인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있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가 당하는 고통을 미루어 짐작하려는 연민도 없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성찰도 하지 않았다. 상상력이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역지사지의 자세다. 

 

그런 상상력 결핍이 최선을 다해 아주 성실히 유대인을 죽이는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어떤 죄책감이나 후회도 느끼지 못하게 했다.

 

그러고 보면, 생각한다는 것은 타인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나는 저 생각하는 능력의 부족을 '무사려'라고 고쳐 읽는다.

 

'무사려='무배려'다. 

 

사려 깊지 못함과 배려하지 못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내 처지만 생각하고 나를 우선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될 공산이 크다. 

 

그 극단적 사례가 아이히만이다.

 

예일대 신경 과학 석좌 교수인 이대열 교수는 지능을 문제 해결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한 인간이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 자신에게 발생하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 것이 지능이다. 반면, 점수로 매긴 지능 지수(IQ)는 그저 인지적인 능력을 수치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서, 지능을 지능 지수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인류가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가려면 타인의 마음과 선택을 예측해야 하고, 그러자면 스스로 자신의 마음과 선택을 파악해야 한다. 뇌 과학자 이대열 교수는 그것을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 능력이라고 했다.

 

아이히만에게 생각이란 지능 지수 차원의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하는 능력은 내가 아프면 남도 아플 것이고, 남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 공감과 연민이 다름 아닌 사유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종종 예측을 빗나가는 상황과 맞닥뜨려 당황하기는 하지만, 그런 지성과 지능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나은 사회가 되어 간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김기현 저-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의 비범함을 느낄 때가 많다. 우리의 일터에서, 우리의 주변에서 비사유로 인해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을 얼마나 많이 보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이히만에 대한 아렌트의 진단은 악인에 대한 기존 상식을 부숴 버린다.

 

아이히만은 악인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이다. 잘못의 원천은 바로 생각의 무능력이다.

 

가히 충격적이다. 수백, 수천만의 양민을 가혹한 죽음의 땅으로 내몬 살인 기술자가 정상적인 인간이라니.

 

그가 저지른 악행의 원천을 생각하는 능력의 부족에서 찾다니, 지극히 평범한, 그래서 내 이웃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나 친구일 수도 있고, 어쩌면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는 그런 인간이 아이히만이라니.

 

아렌트의 진단과 해명을 들어 보자.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106쪽)

(기본적으로 역지사지, 타인에 대한 감정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이들....그들은 공부하지 않고, 읽지 않고, 생각하지 않은 자들이다....사용하는 언어도 빈약한 경우가 많다. 이건 가정에서도, 친구 관계에서도, 두루두루 적용이 가능하다.)

 

아렌트가 관찰한 아이히만은 어휘력이 빈약했다. 그가 사용한 어휘는 나치의 선전 문구나 관공서 공문의 상투적 언어를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와 어휘까지가 나의 세계다. 자신의 언어 세계가 궁색하기에 그는 타인의 세계를 감히 상상하지 못했고, 따라서 타인의 아픔이나 슬픔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거다.

 

한 사람의 사고력은 그의 어휘력으로 가늠할 수 있다. 가용 가능한 단어가 빈약할수록 그는 제 생각과 감정을 설명할 수 없고, 역으로 그런 언어가 부족할수록 그의 생각과 감정도 초라할 수 밖에 없다.

 

그가 문장이 아닌 단어로 말하는 것, 논리적으로 말을 구사하지 못하는 것에서 사유의 가난함이 드러난다.

 

그런데 언어와 사고가 저리도 중요한 것일까?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인간됨은 행위와 말이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동물은 삶의 생존을 위한 노동이나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한다는 점에서 그리 다르지 않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것은 말과 행위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말과 행위를 떠나서 인간은 인간일 수 없다.

 

그렇지만 저 인용구가 드러내는 생각은 통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생각과는 좀 다르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아무리 의심을 해도 의심할 수 없는 단 하나가 있다. 바로 의심하는 행위다.

 

유동하는 세계에서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기초를 통해 확실한 인식 체계를 구축하고, 그 기반 위에서 세계의 평화를 모색한 이 사람, 데카르트에게는 이성적 인간이 희망의 단서였다.

 

그러나 아렌트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생각이 아니라 내가 아닌 남의 처지를 고려하는 것, 내가 함부로 어찌할 수 없는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고 고통에 연민을 품는 것이 진정한 생각이고,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나는 나이고, 너일 수 없다고 말하는 데카르트와 달리 아렌트는 나는 너의 아픔을 알 수 있고, 나의 아픔인 양 공감하고 참여한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바로 사고하는 능력으로!

 

-[2부]에서 계속-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김기현 저-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김기현 목사님 책은 워낙 좋은 저서들이 많지만, 이 책도 강력 추천합니다.

글도 잘 쓰시고, 깊이도 있고, 합리적이고, 균형감도 좋은 편입니다. / 몇 가지 부분에서는 약간 견해가 다르긴 합니다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가서 행하라, 그러면 살리니" (눅 10:28, 37 참조). 읽기의 최종 목적지는 '실천'이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 읽기란 정보 습득(information)으로 지성이 확장되고, 세계관이 갱신(reformation)되며, 종내는 삶과 세계의 변화(transformation)를 가져오는 것이다. 무릇 읽기에서 저 셋은 항상 같이 있을진대 그중에 제일은 '변화'다.

 

그러면 읽기가 왜 실천이고, 변혁인가? 문제는 '어떻게'다. 나의 대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냥 주야장천 '읽기'다. 읽은 것이 내가 될 때까지 무작정 읽어대는 것 뿐. 내가 책에 풍덩 빠지고, 책이 내 안으로 흠뻑 스며들기까지 읽는다. 으레 반문한다.

 

"읽고도 안 변하던데요?" 그래도 읽으라.

 

그래도 안 변했다고 느끼면, 이렇게 물어보라.

 

'안 읽었다면 어땠을까? 읽고도 이 정도인데, 읽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다른 하나는 '사랑'이다. 나 아닌 너에게로 향하는 길, 그리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은 사랑의 여정이다.

 

사랑하기에 너를 읽고자 하고, 나를 나로 사랑하기 위해 나를 읽는 거다. 읽기의 최초 출발점이자 최후 도달점은 사랑이다.

 

만남을 지속시키는 힘은 사랑에서 나온다. 사랑이 없으면, 읽기는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읽기에 관한 나의 마지막 말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것이다. 아무리 성경을 읽었어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안다고 할 수 없고, 반대로 성경을 잘 알지 못해도 사랑한다면 그는 성경을 읽은 것과 진배없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듯, 성경 읽기의 최종 규준도 사랑이다.

 

성경 읽기가 사랑에 이르지 못한다면, 사랑으로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없는 율법이고 만다.

 

해서, 그런 읽기는 문자에 묶여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예수를 비난하는 데 골몰한다. 사랑 없는 읽기는 자기 과시 아니면 타인 무시다. 이제야 알겠다, 왜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랑하라, 그리고 네 멋대로 해라"고 했는지. 사랑은 모든 것의 완성일지니, 사랑하면 모든 것을 이룬다.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고, 사랑이 있다면 모든 것이 있다.

 

읽는다는 것, 그것은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사랑하기에 읽는다. 읽으니까 사랑스럽다. 오죽하면 "사랑하다가 죽어 버리라"고 했겠나. 그래, 나는 사랑하다가 죽으련다.

 

그래서 나는 읽고, 읽고, 또 읽는다, 사랑하니까. 

 

읽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을, 너를, 나를, 사랑하니까.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김기현 저-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과연 신흥 강대국 중국이 미국을 세계 패권국가 자리에서 밀어낼 수 있을까.

 

독자들은 이후 전개될 이야기를 통해 미중 패권 경쟁의 미래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앞서 현재 두 나라의 국력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쏟아져 나오는 상당수 보도와 연구에서 미국은 흔히 '지는 해'로, 중국은 '떠오르는 해'로 묘사된다.

 

그러나 세계은행의 집계에 따르면 이는 사실과 동떨어진 견해다.

 

한 국가의 하드파워, 즉 전통적 의미의 국력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은 경제력과 군사력이다. 

 

경제력으로 볼 때 중국은 분명 '떠오르는 해'다. 중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개혁 개방 초기인 1980년에 2%에 불과했으나 2020년에는 17%까지 치고 올라왔다.

 

그런데 '지는 해'는 미국이 아니라 유럽과 일본이다. 1950년대 세계경젱의 40%를 차지하던 미국의 비중은 다른 나라들이 성장하면서 1980년에는 25% 수준으로 하락했다. 그럼에도 이 수치는 세계경제를 호령하는 데 충분한 규모다.

 

세계 금융위기 직후인 2010년에는 23%까지 떨어지기도 했지만 2020년엔 다시 25% 선을 회복했다. 온갖 종류의 쇠퇴론에도 불구하고 지난 40년간 미국 경제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몫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얘기다.

 

반면에 1980~2020년 사이 유럽연합(EU)의 비중은 29%에서 18%로, 일본은 10%에서 6%로 크게 줄어들었다. 

 

 

다시 말해, 세계 경제에서 미국의 비중은 그대로인 가운데 중국이 급부상하고 유럽, 일본이 추락했다는 것이다. 다만 미중 간 격차는 급격히 축소되었다.

 

군사력 측면에서는 미국의 우월적 지위가 더 공고하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집계한 자료를 보면, 2021년 기준으로 미국의 군비 지출은 8010억 달러로 세계 전체 군비의 38%를 차지했다.

 

이 액수는 2~11위 국가의 군비 총액과 맞먹는 수준이다.

 

2위인 중국은 2930억 달러(14%)였다. 다만, 최근 10년간 추세를 보면 중국의 추격이 무섭다. 2012~2021년 미국의 군비지출 증가율은 -6%를 기록한 반면에 중국은 72%에 달했다.

 

미국과 중국의 국력 비교는 이렇듯 짐작보다는 팩트를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

 

통계와 추세를 고려한 냉정한 평가가 미중 패권 경쟁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미국은 현재의 위상과 경로를 상당 기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두 나라 경쟁의 판도는 중국이 지금까지의 급격한 발전을 얼마나 더 지속할 것인지, 혹은 어느 수준으로 둔화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의 발전 경로는 미국의 강력한 대중국 경제 제재와 코로나 19 팬더믹, 중국공산당의 기업 통제와 시장 개입, 인구 고령화 등의 문제에 적잖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기술의 충돌], 박현 저-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근대 이후의 역사에서 기술 변혁과 세계패권은 뗄 수 없는 인과관계를 갖는다.

 

18세기 이래 산업의 기반이 되는 기술 개발에 성공한 국가는 생산력의 비약적 증가를 이뤄냈고, 이는 국제 무역의 주도권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그렇게 쌓은 국부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키워 세계패권을 거머쥐었다.

 

18세기 후반 증기기관을 개발해 1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영국이 대표적이다. 증기기관은 전례 없는 대량생산체제와, 철도를 비롯한 수송, 교통망을 탄생시켰다. 이를 토대로 융성한 국제 무역과 세계 최강의 해군력이 대영제국 100년의 영화를 이끌게 된다.

 

19세기 후반 미국은 전기와 내연기관을 기반으로 한 제2차 산업혁명의 물결에 올라타며 영국의 경제 구모를 넘어섰다.

 

1차 세계대전(1914~1918)과 대공황(1929년~1930년대) 이후 영국의 퇴조를 틈타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1939~1945)을 거치며 명실상부한 세계 패권국 자리에 올랐다.

 

미국은 1980년대 제조업 공동화와 쌍둥이 적자(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 시달리며 휘청거리는 듯했으나, 20세기 말 컴퓨터와 인터넷 등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 3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면서 패권 유지에 성공한다.

 

21세기 초 세계는 다시 인공지능과 통신망, 그리고 신재생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맞고 있다.

 

중국이 노리는 것도 바로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기회의 창이다. 

 

기술 격변기에 대도약을 이뤄 세계 최강국 자리를 넘보겠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시진핑 국가주석이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 2013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해 9월 공산당 핵심 권력집단인 정치국은 IT 산업단지인 베이징 중관춘에서 집단학습 행사를 열었다. 정치국 집단학습이 중국 지도부의 집단 거주지인 중난하이 밖에서 열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정치국 위원들은 반도체 장비와 바이오, 우주항공 산업 전시 구역을 주의 깊게 둘러봤다.

 

또한 빅데이터, 나노 재료, 생체칩, 양자통신 분야의 기술 개발과 응용 수준에 관해 연구원들과 긴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시 주석은 연설에서 "우리는 위기 의식을 갖고 새로운 과학기술 혁명과 산업변혁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 (...)

 

기다려서도, 관망해서도, 나태해져서도 안 된다."

 

라고 말했다. 이듬해인 2014년부터 중국은 '대중창업 만중혁신'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대대적인 창업장려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후 시 주석은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포부를 국제 무대에서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2018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브릭스(BRICS)(중국, 러시아, 브라질, 인도, 남아공) 정상회의 연설에서 "18세기 1차 산업혁명의 기계화, 19세기 2차 산업혁명의 전기화, 20세기 3차 산업혁명의 정보화까지 과학기술 혁신은 사회생산력의 대해방과 생활수준의 대도약을 가져오면서 인류 역사의 발전 궤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라고 말했다. 

 

이어 "오늘날 우리는 더 크고 더 깊은 과학기술 혁명과 산업변혁을 겪고 있다.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이 속속 등장하고, 신기술/신업태/신산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라고 말했다.

 

당시 별도로 열린 비즈니스 포럼 연설에서 그는 "지금 세계는 100년 동안 보지 못한 대격변에 직면해 있다"라고 진단하며 이렇게 말했다. 

 

"향후 10년은 세계 경제에서 신구 성장동력이 전환되는 시기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양자정보, 바이오 등 새로운 과학기술 혁명과 산업 변혁이 신산업, 신업태, 신모델을 양산하고 글로벌 발전과 인류의 노동과 삶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는 신흥시장국과 개발도상국의 비약적인 발전을 위해 이 중대한 기회를 잡아야 한다."

 

중국 등 브릭스 국가가 힘을 모아 미국 등 서구 선진국들을 대체하는 기회로 향후 10년을 활용하자는 주장이다.

 

-[기술의 충돌], 박현 저-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