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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때, 아도르노는 지적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유럽 인문학 전통과 이론적 전쟁을 벌였다.

 

이 내부전 역시 진정한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파시즘 정권이 물러간 독일에 아도르노는 인큐베이터에서 발효시킨 이론적 성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의 생애는 독자에게 사회와 역사의 발전에 관한 이론적 전망이 지식과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연구자의 의식'이 개입된 존재판단에 근거한다는 '비판이론'의 형성과정을 추체험하도록 해준다.

 

나는 앞으로 아도르노를 소개하면서 이론이 어느 지점에서 진정한 실천력을 확보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를 제공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의 전투는 그가 죽었음에도 종료되지 않는, '끝없는 전투'가 되었다.

 

아도르노 자신의 사상적 모토인 '끝없는 부정'이 인격으로 환생한 경우라 하겠다.

 

첫 번째 전투 미국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 파시즘과 자본주의에 저항 [계몽의 변증볍]
두 번째 전투 독일에서 68 학생운동 세력과 벌인 전투 [부정변증법]
세 번째 전투 '언어적 전희'를 단행하여 유럽중심주의로 후퇴한 제자 하버마스와 무덤에서 벌인 전투 [미학이론]
유산 우리가 치러야 하는 전투
-신자유주의와 과학주의(핵기술)
 

1969년 아도르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그가 새롭게 제시한 보편이론의 가능성은 확고한 체계로 완성되지 못하였다.

 

68학생운동 진영과 갈등 중이었던 까닭에 아도르노의 사망은 그 자체로서 '이론적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무엇보다도 아도르노가 '현실적인' 갈등을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으로 돌파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로노가 현실의 '변증법적' 만남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의 사망은 그의 이론적 무기력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생물학적 한계에 기인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가 죽음으로써 자기 사상을 체계화하지 못했다는 것이 오히려 그가 제시한 철학방법론과 테제들을 현실관계의 구속성에 대입해 사유하도록 이끄는 자극제가 된다. 

 

망명과 귀환의 경험은 아도르노로 하여금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내부구조를 통찰하도록 하였고, 그 통찰의 핵심은 현대 자본주의가 파괴를 통한 축적의 메커니즘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68학생운동 진영은 이 사실은 소홀히 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져다주는 풍요를 누리려는 마음이 더 앞섰다.

 

68학생운동은 무엇보다도 유럽사회에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대중적으로 실현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대중 운동을 거쳐 본격적인 소비사회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이 '사건'을 고찰할 때 주목해야 할 결절이다.

 

아울러 68학생운동은 독일이 분단체제로 진입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처음부터 폭력성을 내장한 거리투쟁은 당국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급속하게 급진화되었다.

 

서독의 정권담당자들은 전투적인 운동세력을 폭압적으로 진압하고 격리하는 한편으로 학생운동 이념이 공론화 한 민주적 요구들과 평등권을 일부 수용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통합해나갔다. 

 

동독 역시 베를린 장벽을 막는 등의 조치로 그들 나름의 사회통합을 추진하는 발전방향으로 나아가면서 패전국 처리 차원에서 연합군에 의해 나뉘었던 지역이 분단체제로 발전해나갔다.

 

분단체제가 성립되면서 독일 계몽의 전통은 이데올로기에 깊이 침윤당한 채 진영논리에 갇히게 되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서로를 타자로 삼아 자신의 존재기반을 확대하는 논리를 발전시켜 시간이 지날수록 포스트모더니즘 등 세련된 이론을 내놓았지만 보편성을 확보한 이론은 창출하지 못하였다.

 

이데올로기 차원에 머물고 물적 토대를 직시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제 분단체제가 종식됨으로써 이론은 물적 토대를 다시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 아도르노는 여전히 현재적이다.

 

아도르노는 타고난 능력을 잘 간수하고 발전시켜 사회적으로 실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복받은 인생이기도 했다. 성악가인 어머니에게서 예술적 자질을 물려받았고, 성공한 유대인 상인인 아버지에게서 적대적인 사회 속에서 자신을 보존하고, 자긍심을 획득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어려서부터 배웠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교양을 통해 보편인으로 자신을 구성한다는 독일 시민사회의 고전적인 이념도 종말을 고했다.

 

소비사회의 대중들은 자기형성(Ich-bilden) 이념인 교양(Bildung)을 거추장스러워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교양을 소비재로 만드는 놀라운 솜씨를 발휘했다.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서는 소비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아도르노, 현실이 이론보다 더 엄정하다], 이순예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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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과 연민의 사고가 상상력이다.

 

앞서 인용한 문장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생각'은 타인의 처지에서 배려하는 상상력을 말한다.

 

잔혹한 살상 행위를 국가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서류를 꾸미고 보고하며 제대로 실행되는지를 꼼꼼히 점검하면서도 아이히만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들의 목소리를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히만이 무심히 자기 일을 수행한 것을 '상상력의 결여'라고 짚어 냈다.

 

여기서 아렌트는 예수를 소환한다. 그가 보기에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자들에게는 '상상력의 결여'라는 원천적인 잘못이 있다. 가상칠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정작 자기 자신은 알지 못한다. (눅 23:34)

 

한나 아렌트

 

이 말을 역추적해 보면 동일한 결론을 얻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류 최악의 사형 도구인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있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가 당하는 고통을 미루어 짐작하려는 연민도 없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성찰도 하지 않았다. 상상력이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역지사지의 자세다. 

 

그런 상상력 결핍이 최선을 다해 아주 성실히 유대인을 죽이는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어떤 죄책감이나 후회도 느끼지 못하게 했다.

 

그러고 보면, 생각한다는 것은 타인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나는 저 생각하는 능력의 부족을 '무사려'라고 고쳐 읽는다.

 

'무사려='무배려'다. 

 

사려 깊지 못함과 배려하지 못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내 처지만 생각하고 나를 우선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될 공산이 크다. 

 

그 극단적 사례가 아이히만이다.

 

예일대 신경 과학 석좌 교수인 이대열 교수는 지능을 문제 해결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한 인간이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 자신에게 발생하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 것이 지능이다. 반면, 점수로 매긴 지능 지수(IQ)는 그저 인지적인 능력을 수치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서, 지능을 지능 지수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인류가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가려면 타인의 마음과 선택을 예측해야 하고, 그러자면 스스로 자신의 마음과 선택을 파악해야 한다. 뇌 과학자 이대열 교수는 그것을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 능력이라고 했다.

 

아이히만에게 생각이란 지능 지수 차원의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하는 능력은 내가 아프면 남도 아플 것이고, 남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 공감과 연민이 다름 아닌 사유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종종 예측을 빗나가는 상황과 맞닥뜨려 당황하기는 하지만, 그런 지성과 지능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나은 사회가 되어 간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김기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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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의 비범함을 느낄 때가 많다. 우리의 일터에서, 우리의 주변에서 비사유로 인해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을 얼마나 많이 보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이히만에 대한 아렌트의 진단은 악인에 대한 기존 상식을 부숴 버린다.

 

아이히만은 악인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이다. 잘못의 원천은 바로 생각의 무능력이다.

 

가히 충격적이다. 수백, 수천만의 양민을 가혹한 죽음의 땅으로 내몬 살인 기술자가 정상적인 인간이라니.

 

그가 저지른 악행의 원천을 생각하는 능력의 부족에서 찾다니, 지극히 평범한, 그래서 내 이웃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나 친구일 수도 있고, 어쩌면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는 그런 인간이 아이히만이라니.

 

아렌트의 진단과 해명을 들어 보자.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106쪽)

(기본적으로 역지사지, 타인에 대한 감정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이들....그들은 공부하지 않고, 읽지 않고, 생각하지 않은 자들이다....사용하는 언어도 빈약한 경우가 많다. 이건 가정에서도, 친구 관계에서도, 두루두루 적용이 가능하다.)

 

아렌트가 관찰한 아이히만은 어휘력이 빈약했다. 그가 사용한 어휘는 나치의 선전 문구나 관공서 공문의 상투적 언어를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와 어휘까지가 나의 세계다. 자신의 언어 세계가 궁색하기에 그는 타인의 세계를 감히 상상하지 못했고, 따라서 타인의 아픔이나 슬픔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거다.

 

한 사람의 사고력은 그의 어휘력으로 가늠할 수 있다. 가용 가능한 단어가 빈약할수록 그는 제 생각과 감정을 설명할 수 없고, 역으로 그런 언어가 부족할수록 그의 생각과 감정도 초라할 수 밖에 없다.

 

그가 문장이 아닌 단어로 말하는 것, 논리적으로 말을 구사하지 못하는 것에서 사유의 가난함이 드러난다.

 

그런데 언어와 사고가 저리도 중요한 것일까?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인간됨은 행위와 말이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동물은 삶의 생존을 위한 노동이나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한다는 점에서 그리 다르지 않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것은 말과 행위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말과 행위를 떠나서 인간은 인간일 수 없다.

 

그렇지만 저 인용구가 드러내는 생각은 통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생각과는 좀 다르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아무리 의심을 해도 의심할 수 없는 단 하나가 있다. 바로 의심하는 행위다.

 

유동하는 세계에서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기초를 통해 확실한 인식 체계를 구축하고, 그 기반 위에서 세계의 평화를 모색한 이 사람, 데카르트에게는 이성적 인간이 희망의 단서였다.

 

그러나 아렌트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생각이 아니라 내가 아닌 남의 처지를 고려하는 것, 내가 함부로 어찌할 수 없는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고 고통에 연민을 품는 것이 진정한 생각이고,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나는 나이고, 너일 수 없다고 말하는 데카르트와 달리 아렌트는 나는 너의 아픔을 알 수 있고, 나의 아픔인 양 공감하고 참여한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바로 사고하는 능력으로!

 

-[2부]에서 계속-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김기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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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철학의 본질은 명제와 이론이라는 병적인 거짓 외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행위의 영역에 있다는 선언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 4.112에서 주장하는 바인데, 그로 인해 무의미한 전래의 철학과 자신의 반철학 사이에 모호한 기류가 감돌게 된다.

 

"철학은 이론이 아니라 활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의 욕망을 과학의 활동과 관련 지을 경우 이런 주장의 전반적인 가치는 분명해진다.

 

누구나 철학은 궁극적인 목적에, 더 높은 무엇에,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어떤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론적 활동, 이를테면 명제의 형식을 취하는 활동(의미가 부여된 명제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참된 명제, 즉 "참된 명제들의 전체는 자연과학 전체를 형성한다"([논고],4.11]라는 진술에서 언급되는 과학)은 이 모든 것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는 실망스러운 일일지 모르지만 특히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실증주의자의 모습을, 혹은 심지어 분석철학자나 합리주의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에게), "명제는 더 높은(eminent) 어떤 것도 표현할 수 없다" ([논고], 6.42)라는 점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비트겐슈타인

 

이는 다음의 구절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우리는 설령 모든 가능한 과학적 질문이 답을 찾는다 하더라도 삶의 문제들은 조금도 손대지 않은 채 그대로 남는다고 느낀다." ([논고], 6.52) 그 자체의 실존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 일반적인 열망 가운데, 철학은 "삶의 문제들"에 전념하며 모든 과학적, 이론적 형상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철학은 명제와 의미의 권위에서 벗어나며 동시에 행위의 형태에 전념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런 행위에는 두 가지 유형이 실존할 것이다.

 

[1] 하나는 비사유를 강제로 이론적 명제에 굴복시키려 하기에 하위 과학적(과학 아래에 있는)(infra-scientifique)이자 무의미한 유형으로, 이는 진정한 의미의 철학적 질병이다.

 

[2] 다른 하나는 상위 과학적인 (과학 위에 있는)(supra-scientifique)유형이며, 이는 실재를 "건드리는" 것으로서의 비사유를 침묵 속에 단언한다.

 

이것이 바로 반철학의 전리품인 진정한 "철학"이다.

 

-[반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알랭 바디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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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철학은 모든 이론적 오만을 박탈당하는데, 그 이유는 철학이 어림짐작과 오류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이 정도만 되어도 철학에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하는 셈이 될 것이다- 철학의 의도 자체가 무효화되기 때문이다.

 

"철학 저술들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명제와 질문들은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한 것(absurdes) 이다." ([논고], 4,003)

 

반철학의 전형적인 특징은(철학자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자가 전시대나 동시대 사람들을 반박할 때와는 달리) 철학적인 논제들을 논의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런 식의 논의를 하려면 반철학이 철학의 규범들(예를 들어 참과 거짓의 규범들)을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철학자가 의도하는 것은 그런 철학적 욕망을 통째로 방황과 유해한 것의 영역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질병의 은유는 이러한 반철학적 의도에서 좀처럼 빠지지 않는 주제이며, 확실히 비트겐슈타인의 "무의미한 것"이라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무의미"라는 말이 "의미의 결여"(depourvu de sens)를 의미하는 한, 심지어 철학은 사유가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실제로 사유의 정의란 바로 이런 것이다. 

 

"사유란 의미가 부여된 명제이다."([논고], 4)

 

비트겐슈타인

 

따라서 철학은 비사유(non-pensee)이다. 심지어 -이는 미묘하지만 동시에 중요한 사안인데- 철학은 말할 수 없는 실재를 포착해 내기 위해 의미가 부여된 명제의 한계를 넘어서는 긍정적인 비사유조차 아니다.

 

철학은 퇴행적이며 병적인 비사유인데, 왜냐하면 철학은 그 자체의 무의미함(absurdite)을 명제와 이론의 영역 안에 제시하려 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질병은 무의미가 그 자체를 의미로 드러낼 때, 비사유가 그 자체를 사유로 상상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우리는 철학을 마치 거짓된 사유인 양 논박하는 것이 아닐, 오직 사유를 위해 정해진 규약들(명제들과 이론들)에 부당하게(absuredement) 자기 자신을 기입해 넣는 가장 중대한 과오로, 즉 비사유의 과오로 판결하고 단죄해야 한다. 

 

철학은 긍정적인 비사유의 궁극적으로 탁월한 존엄성(의미의 장벽을 뛰어넘는 행위의 존엄성)의 견지에서 볼 때 유죄인 것이다.

 

-[반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알랭 바디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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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반철학을 구성하는 세 가지 작업을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찾을 수 있으며, 이 점이 비트겐슈타인이 이 사안에 관한 한 그의 중요한 선배 격인 니체의 저작에서 "진리의 일부"를 발견했다고 한 바를 해명해 준다.

 

이러한 진리의 일부는 다음과 같은 명백한 차이들과 함께 변증법적 관계에 들어선다.

 

[1]니체의 철학적 진술들에 대한 계보학적 파괴에, 철학적 진술을 지탱하는 권력 유형에 대한 규명에, 이에 따라 그 기만을 삶의 도약(elan vital)의 형상으로 보는 분석에 상응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편에서, 무의미(non-sens)를 언어적인 의미의 영역에 강제하는 부조리(absurdite)에 대한 규명이다. 

 

니체에게 형이상학은 무에 대한 의지이며, 비트겐슈타인에게 형이상학은 의미로 모습을 드러낸 의미 없음이다.

 

니체에게 그 질병의 이름은 허무주의이며, 비트겐슈타인에게 그것은 어쩌면 허무주의보다 더 나쁜 것, 즉 지껄임이다.

 

 

[2] 니체에게 은닉된 철학적 행위란 유형학적인 사제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그 행위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 사유할 수 있는 것과 사유할 수 없는 것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을 지우는 일이며, 한계들의 불명료성(non-clarte)을 향한 의지이다.

 

따라서 이는 또한 - 니체도 이에 동의 할 것인데- 어떠한 규칙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고 어떠한 차이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는 꿈결에서나 말해질 수 있는 언어를 맹목적이고 격정적인 방식으로 실행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도 하다.

 

[3] 니체가 고지한 행위는 원정치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그 순수한 긍정[단언](affirmation)은 결국 사제가 지닌 세속적 권력의 파괴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고지된 행위는 원미학적인 것인데, 이는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 관련된 모든 명료성의 원리(그 자체가 말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가 예술적 패러다임에 대한 접근법이자 내면적 아름다움으로서의 신성한 삶에 대한 접근법이기도 한 순수한 보여줌(monstration)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윤리학과 미학은 하나이다."([논고], 6.421)

 

이는 한참 뒤에 나온, 거의 유언에 가까운 선언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많은 단념과 방황을 겪은 후에 본질적인 것이 되돌아오는 법이다.)

 

"철학이 시로 쓰여야만 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철학에 대한 나 자신의 태도를 요약했다고 생각한다."

 

-[반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알랭 바디우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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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야기하는 반철학자를 쭉 들어보면 왠지 모를 동의가 되면서도 막상 반철학을 정의하고, 설명하려 하면

어려운 게 사실이다. 알듯 모를 듯...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반철학은 그 기원 이래로 (나는 그 기원이 헤라클레이토스라고 말하고자 하는데, 파스칼이 데카르트에 대한 반철학자였듯이 그는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반철학자였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결합된 작업으로 식별된다.

 

1. 철학의 진술들에 대한 언어적, 논리적, 계보학적 비판, 진리라는 범주의 폐기, 그리고 스스로를 이론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철학적 야망의 해체,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한편으로, 반철학은 흔히 소피스트적 사유가 활용하는 자원을 끌어온다.

 

니체엑 이 작업은 "모든 가치들의 전복", 플라톤 병(maladie-Platon)에 대한 투쟁, 기호와 유형으로 이루어진 전투적 문법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2. 철학이 최종적으로 담론적 외양으로, 명제들로, 거짓된 이론적 외양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 대한 인식. 철학은 하나의 행위이며, 철학이 "진리"에 관해 꾸며 낸 허구적 우화들은 장식이자 선전이며 거짓말이다.

 

알랭 바디우

 

니체엑 관건은 이 제의복(ornements) 이면에 감춰진 강력한 사제의 형상을, 반동적인 힘의 강력한 조직자를, 허무주의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자를, 원한을 향유하는 우두머리를 식별하는 것이었다.

 

3. 철학적 행위에 맞서는 철저한 새로움을 지닌 다른 행위의 호소, 이는 철학적이라는 말("하찮은 철학자"가 자기 몸을 뒤덮는 훈장에 들떠 더욱 동의할 어떤 것)의 모호성만큼이나, 보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초철학적인 혹은 아예 몰 철학적인 모호성 가운데 있는 철학의 행위에 대항할 행위에 대한 호소이다. 

 

이 전례없는 행위는 철학적 행위의 유해한 특성을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철학적 행위를 파괴 한다.

 

이 행위는 철학적 행위를 단정적으로 극복한다.

 

니체의 경우에 이 행위는 본성상 원정치적(archi-politique)이며, 그 구호는 "세계의 역사를 둘로 쪼개기"라고 말할 수 있다.

 

-[반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알랭 바디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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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론 믿음을 파기하는 상황이 전혀 없는가?>

 

물론 우리 대부분은 귀도 드 브레와 같은 영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

 

우리 가운데 고통 앞에서도 위로와 만족을 누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칼뱅이 지적하듯이, 우리 대부분은 때로 하나님이 정말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고 생각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심지어 영적인 삶의 위대한 스승들도 때로는 영적인 어둠에 빠진다.

 

그리스도인은 인식적이며 영적인 상황이 사람마다 천양지차임을 인정해야 하며, 같은 사람조차 때에 따라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악을 보여 주는 사실이 기독교 혹은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가 되는 상황이 전혀 없는가?

 

나는 "십중팔구 없다"가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신의식이 잘 작동하지 않는 사람, 아무 생각 없이 수박 겉핥기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 믿음에 실상 아무런 활기나 깊이나 생기가 없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어쩌면 그런 사람은 악을 보여 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면 유신론 믿음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곧 이 사람이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를 가졌음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이런 사람이 그런 파기자를 가질 때는 오로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계속 믿는 것이 올바른 인지 기능에 반하여 비합리적일 때뿐이다. 이런 사람은 그런 파기자를 가질 때는 오로지 그런 상황에서 유신론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 우리의 인지 기능의 설계 계획의 일부일 때 뿐이다.

 

-> (이래서야 논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려나..... 기독교적 답변으로는 최상의 답변이긴 한데....)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설계 계획이 그런 상황에서 유신론 믿음을 포기할 것을 명령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이 설계 계획에는 신의식이 올바르게 기능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인지 과정이 올바르게 기능하지 않을 때 일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설계 계획의 일부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설계 계획의 일부라기보다는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럼에도 우리는, 단지 논증을 위하여, 실제로 그런 사람에게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가 정말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 중요하게 알아야 할 점은, 만일 그런 사람에게 파기자가 있다면 다만 그의 지성 구조 어딘가에서 일어난 합리성의 고장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신의식이 오작동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가 처음에 다루었던 질문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라는 인격체가 존재한다고 믿는 S라는 사람은 악을 보여주는 사실에서 파기자를 가지는가?

 

우리는 이제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없음을 알 수 있다. S가 게속하여 유신론 믿음을 가진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 안에서 적어도 어느 정도는 신의식이 올바르게 작동함을 보여 주는 증거다. 어쩌면 이런 사람도 (이런 상황에서 믿는 데 실패하는 것이 설계 계획의 일부라면) 파기자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면 설령 악을 보여주는 사실에 관한 지식에서도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를 가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결론 짓는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물론 나는 기독교 혹은 유신론 믿음을 무너뜨리는 파기자가 전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런 파기자의 위치에 오를 만한 가장 그럴듯한 후보 셋 -역사 비평, 다원주의, 그리고 고통과 악-이 사실은 파기자로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강력히 주장한다.)

 

-> 역사 비평 쪽이나 다원주의 쪽은 뒤에 강영안 교수님 해설 보면 나름 이해하기가 쉽다. 그의 보증 3부작 전체 책을 다 읽어봐야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긴 하다......c.s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 이나 [기적] , [고통의 문제] 등의 책이 얼마나 귀한지 다시 한번 알 수 있다.......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긴 하다. 나중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책을 읽고 보완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지식과 믿음] , 앨빈 플랜팅가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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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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