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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약이 연구되면서 이런 개념은 더욱 굳건해졌다.

1954년 스위스 제약회사인 가이기에서 소라진의 화학 구조를 살짝 바꾸어 G22355라는 화합물을 만들고 ​이미프라민​이라고 불렀다. 최초의 삼환계 약물이었다.(삼환계 약물은 화학적 구조가 고리 세 개로 되어 있다)

 

더 우수한 수면제를 개발하려고 연구 중이던 스위스 정신의학자 롤란드 쿤이 이미프라민을 환자들에게 주었다. 소라진과 이미프라민은 화학적으로 비슷하기 때문에 (원자 두 개만 다르다) ​쿤은 이미프라민도 소라진처럼 진정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환자들이 잠들게 하는 대신 활력을 주고 기분을 돋워주었다.

 

​500명이 넘는 환자들에게 이미프라민을 투여해본 쿤은 1957년 취리히 국제 정신의학 회의에 심한 우울증을 겪던 환자들도 이미프라민을 수 주 투여한 뒤에 엄청나게 호전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논문을 제출했다. 기분이 좋아지고 활력이 솟고 '건강염려증'이 사라지고 '전반적 억제'가 해소되었다고 밝혔다.

"완치도 드물지 않았다. 환자 본인이나 가족들이 이렇게 좋은 상태는 정말 오랜만이라며 효과를 확인해 주었다." 라고 쿤은 보고했다.

가이기는 이미프라민을 창고에서 꺼내어 1958년 ​토프라닐​이라는 이름으로 유럽 시장에 내놓았다.

1959년 9월 6일, 이미프라민이 미국 시장에 나온 날, <뉴욕 타임스>는 [약과 우울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어 ​마르실리드(이프로니아지드, 최초의 MAOI)와 토프라닐(이미프라민, 최초의 삼환계 우울증 약)​을 다루었다.

 

<뉴욕 타임스>는 이 약을 '항우울제'라고 불렀는데, 아마 언론이나 대중 문화에서 이 용어가 사용된 게 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항우울제를 먹는 사람이 4000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도 있지만, 1957년 롤란드 쿤이 국제 정신의학 회의에서 발표할 때에는 항우울제라는 게 없었다.

 

그런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MAOI와 삼환계 우울증 약이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 낸 셈이다.

​1960년대 초 미국 국립보건원 연구자이자 스티브 브로디 실험실 출신인 생화학자 줄리어스 액설로드는 이미프라민이 뇌 안의 여러 화학물질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는 연구를 했다.

 

액설로드는 이미프라민이 시냅스에서 ​노르에피네프린 ​ 재흡수를 막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몇 년 뒤 세로토닌 재흡수 역시 막는다는 사실도 발견한다).

 

액설로드는 항우울제가 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기분이 밝아지고 우울감이 사라진다는 이론을 세웠다.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이미프라민이 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를 막고 환자들의 불안과 우울을 줄여준다면, 노르에피네프린과 정신건강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마르실리드나 토프라닌, 또 비슷한 효과를 내는 코카인은 시냅스의 노르에피네프린 수치를 높임으로써 불안과 우울을 치료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 무렵 매사추세츠 정신건강 센터 의사였던 조지프 실드크로트는 불안과 신경증은 어린 시절의 외상이나 해소되지 않은 심리적 갈등 때문에 일어나므로 프로이트 식 심리 치료를 해야 한다고 믿던 사람이다.

그런데 환자들 몇에게 이미프라민을 주어보았다. "이 약이 마법처럼 보였다." 실드크로트는 나중에 이렇게 밝혔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약학이 연 정신의학의 신세계가." 1965년 실드크로트는 <미국 정신의학 저널>에 [정서장애에 대한 카테콜아민 가설:근거 검토]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스티브 브로디와 줄리어스 액설로드의 작업을 기반으로 해서 뇌 안의 카테콜아민 수치가 올라가면 우울증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카테콜아민은 노르에피네프린 등 싸움 또는 도주 반응과 관련이 있는 호르몬을 총칭하는 말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부신에서 분비된다.

실드크로트의 논문은 정신의학 역사상 가장 많이 인용되는 논문이 되었고 불안과 우울이 화학적 불균형 때문이라는 이론을 이 분야 중심에 당당히 올려놓은 논문이기도 했다.

생물학적 정신의학의 첫 번째 기둥이 세워진 셈이다. ​프로이트 모델은 무의식의 심리적 갈등을 해소하여 불안과 우울을 치료하려 했다. 항우울제가 등장하면서 ​정신병과 정서장애는 점점 더 특정 신경전달물질 시스템의 장애 탓으로 돌려지게 되었다. ​조현병과 약물 중독은 도파민 시스템 문제 때문으로 생각되었고, 우울증은 부신에서 분비되는 스트레스 호르몬 때문이고, 불안은 세로토닌 시스템 결함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약리학이 불안의 역사에 가장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 사건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정신의학계에서 불안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변화는, 이미프라민 연구에서부터 시작된다.

 

P.S: 이미프라민 역시 우연 덕에 시장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이 우연이 없었더라면 생물학적 정신의학의 역사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쿤의 말에 따르면 국제 정신의학 회의에서 이미프라민에 대한 보고를 했을 때 "회의적인 반응이 엄청나게 강했다."고 한다. "그 때까지는 우울증을 약으로 치료한다는 데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다. 사실 정신과 약에 관심이 얼마나 적었던지 취리히에서 쿤이 발표를 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열두 명 밖에 되지 않았다.

(나중에 쿤의 발표는 약리학의 게티즈버그 연설이라고까지 불렀다.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역사에 남게 될 사건이라는 뜻이다.)

 

가이기 사도 시큰둥해했다.

 

정신의학계와 마찬가지로 정서장애를 약으로 치료한다는 생각에 회의적이었고 이미프라민을 판매할 계획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쿤이 로마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가이기 사의 대주주인 로베르 보링거를 만났다. 보링거가 지나가는 말로 제네바에 사는 친척이 우울증이 깊다고 얘기했는데 쿤이 이미프라민 한 병을 손에 쥐어주었다. 보링거의 친척은 약을 먹고 며칠 만에 호전되었다. "쿤 말이 맞습니다. 이미프라민은 우울증 치료제입니다." 보링거가 가이기 이사회에서 단언했다. 가이기 중역들도 마음을 바꾸고 약을 시장에 내놓기로 했다.

 ​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이미프라민=Imipramine-> 삼환계 항우울제=T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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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스티브' 브로디는 2차 세계대전 때 ​말라리아약을 만들어 생화학자로 명성을 높였다. 1950년대 소라진과 밀타운이 시판되기 시작했을 때 브로디는 메릴랜드 주 베서스다에 있는 미국 국립보건원 심장 센터 실험실을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그 뒤 10년에 걸쳐 이 실험실은 정신의학에 혁명을 가져온다.

 

 

 

그 획기적인 실험의 시작은 ​레세르핀 실험​이었다.

 

레세르핀은 ​라우월피아 세르펜티나(​뿌리가 뱀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물질로 천 년도 넘는 옛날부터 인도에서 ​고혈압부터 불면증, 뱀독, 영아 산통까지 온갖 병에 만병통치약으로 쓰였다.

 

 

 

그런데 힌두 문헌에 보면 "광기" 치료에도 효과가 있었다고 나와 있다.

 

그 전까지는 서구에서 레세르핀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소라진이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는 걸 보고 스큅 사 경영진이 레세르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스큅 사는 네이선 클라인에게 자금을 대주었고 클라인은 이 물질을 로클랜드 주립병원에 있는 환자들에게 시험 삼아 투여했다. 여러 명이 현저하게 호전되었고 불안 때문에 생활에 '장애'를 겪던 환자 몇몇이 퇴원하여 일상으로 돌아갈 정도로 긴장이 크게 완화되었다.

대규모 연구가 시작되었다. 1955년 뉴욕 주 정신위생국장 폴 호크가 뉴욕 주지사 W. 애버렐 해리먼과 협의하여 주 안에 있는 정신병원의 환자 9만 4000명 전부에게 레세르핀을 투여하는 15억짜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오늘날이라면 이런 연구는 FDA 규정에 따라 시행될 수가 없다)

 

결과는 이랬다.

 

​레세르핀은 일부 환자들에게 효과가 있었지만 소라진만큼은 아니었다. 게다가 심각하고 때로는 치명적인 부작용도 있었다. ​그래서 레세르핀은 임상에서 정신과 약으로는 부적절하다고 간주되었다.

그렇지만 스티브 브로디와 국립보건원 동료들은 레세르핀을 통해 생화학과 행동 사이에서 뚜렷한 관련성을 발견했다.

 

존 개덤이 LSD와 세로토닌의 관계를 통해 발견한 것에 힌트를 얻어 브로디는 토끼에 레세르핀을 투여해 세로토닌 수치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살폈다. 브로디는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토끼에게 레세르핀을 투여하면 뇌 안의 세로토닌이 감소하고, 그렇게 되면 토끼들이 마치 우울증이 있는 사람처럼 '무기력'하고 '무심'해지는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 토끼의 세로토닌 농도를 조절하여 '우울한' 행동을 일으키거나 없앨 수도 있었다. ​브로디는 1955년 <사이언스>에 이 발견을 보고했는데, ​특정 신경전달물질의 농도와 동물의 행동 변화를 연결 짓는 최초의 논문이었다.

한 의학사가는 브로디가 ​신경화학과 행동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고 표현했다.

브로디의 레세르핀 연구는 당시 정신의학자들이 MAOI에 관해 알게된 것과 연결된다. 좀 심하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1950년대 뇌과학자들은 '상류'의 뉴런이 신경전달물질을 시냅스(신경 세포 사이의 아주 작은 공간)로 방출하여 '하류'의 뉴런이 발화하게 한다는 사실을 막 알아낸 참이었다.

 

신경전달물질은 뉴런에서 뉴런으로 빠르게 이동하며 나중 뉴런의 세포막에 있는 수용체와 결합하여 신호를 전달한다.

 

신경전달물질이 시냅스후 뉴런의 수용체에 결합할 때마다 (세로토닌은 세로토닌 수용체에, 노르에피네프린은 노르에피네프린 수용체에 결합한다) 신호를 받는 뉴런의 형태가 바꾸니다.

 

세포막에 구멍이 생겨 뉴런 바깥의 원자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하여 뉴런의 전압을 바꾼다. 그러면 나중 뉴런이 발화하여 자기 신경전달물질을 주위 시냅스로 방출하게 된다. 이 신경전달물질이 또 다른 뉴런의 수용체에 닿는다.

 

 이런 ​연쇄 반응(​뉴런 발화, 신경전달물질 방출, 다른 뉴런이 발화하게 함)이 우리 뇌 안의 ​수천 억 개의 뉴런과 수조 개의 시냅스 사이에서 이루어져 정서, 지각, 사고를 일으키는 것이다. ​뉴런과 신경전달물질은 정서와 사고의 물질적 재료이고 아직도 많은 부분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이프로니아지드​에 관한 초기 연구에서 이 항생제가 ​모노아민 산화 효소(MAO)​라는 효소를 불활성화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MAO는 시냅스에 쌓이는 ​세로토닌과 노르에피네프린을 ​분해하여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신경전달물질이 시냅스에 분출되면 ​보통은 MAO가 금세 치워서 다음 전달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한다. ​그렇지만 이프로니아지드를 먹어 MAO가 억제되면 신경전달물질이 신경 말단에 더 오래 남아 있게 된다. 브로디 연구팀은 이프로니아지드가 시냅스에 신경전달물질이 쌓이게 하기 때문에 항우울 효과가 있다는 이론을 펼쳤다.

 

토끼에게 레세르핀을 투여하기 전에 이프로니아지드를 주면 그냥 레세르핀만 투여했을 때처럼 무기력한 상태가 되지 않았다. 브로디 연구팀은 이프로니아지드가 시냅스의 노르에피네프린과 세로토닌 수치를 높여서 토끼가 '우울해지지' 않게 막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제약업계가 새로운 생각에 눈뜬 순간이었다. ​정신과 약을 '화학적 불균형'을 바로잡는다거나 특정 신경전달물질 결핍을 보충하는 약이라고 선전하여 판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호프만라로슈는 1957년 이프로니아지드를 처음 광고하면서 이 약이 '세로토닌, 에피네프린, 노르에피네프린 등의 아민 대사에 영향을 미치는 아민 산화효소 억제제'라고 선전했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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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신약리학의 정신적 선조는 그보다도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기원전 4세기에 병리적 불안은 생물학적, 의학적 문제라고 규정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이렇게 썼다.

 

 

                                -히포크라테스-

"[정신병이 있는 사람의] 머리를 갈라 보면 뇌에 습기가 많고 땀으로 가득하고 역한 냄새가 난다."

히포크라테스는 '체액'이 광기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담즙이 뇌로 갑자기 몰려가면 불안이 일어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히포크라테스의 뒤를 이어 담즙의 온도에 중대한 비중을 두었다. 담즙이 따뜻하면 온화하며 열정적이고 담즙이 차가우면 불안하고 겁이 많다.)

히포크라테스는 불안 등 정신장애는 체액이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면 나을 수 있는 의학적, 생물학적 문제라고 봤다.

그러나 플라톤과 그 추종자들은 정신세계는 생리학과 구분되는 자율성을 지닌다고 생각하여 불안이나 우울이 신체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플라톤-

 

어느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정신병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린애 이야기처럼 허황하다."​ 고 했다.

 

플라톤은 사소한 심리적 문제는 의사가 치료할 수 있지만(정서적 문제가 신체를 통해 나타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깊은 곳에 근원이 있는 정서적 문제는 오직 철학자들만 치유할 수 있다고 했다. 불안 등의 정신적 문제는 생리적 불균형이 아니라 영혼의 부조화에서 오며 여기에서 회복하려면 깊은 자아성찰, 자기통제, 철학을 따르는 삶이 필요하다.

플라톤은 "어떤 사람의 몸과 마음이 대체로 건강한 상태라면 배관공을 불러 집수리를 하듯 의사를 불러 사소한 질환을 고칠 수 있다. 그렇지만 전체적 구조가 망가졌다면 의사는 쓸모가 없다."고 했다.


따라서 영혼을 치료하는 데 적절한 방법은 철학 뿐이다.


히포크라테스는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저 철학자들이 자연과학에 대해 쓴 글들은 미술과 무관한 만큼 의학과도 무관하다." 히포크라테스가 말했다.


병적 불안은 히포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현대 약학자들의 생각처럼 의학적 질환인가?


아니면 플라톤과 스피노자, 인지행동 치료사들 생각처럼 철학적 문제인가?


프로이트와 그 추종자들이 생각하듯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성적 억압에서 비롯된 심리적인 문제인가?


혹은 쇠렌 키에르케고르와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정신적인 병인가?


아니면 W.H 오든, 데이비드 리스먼(미국 사회학자, 교육자로 [고독한 군중] 등의 저서를 남김), 에리히 프롬, 알베르 카뮈, 또 무수히 많은 현대 사상가들이 선언했듯 문화적인 병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 구조의 한 기능인 것일까?


사실을 말하자면 불안은 생물학적 기능인 동시에 철학적인 기능이기도 하고, 육체와 정신, 본능과 이성, 개성과 문화 모두와 관련 있다.

 

우리는 불안을 정신적, 심리적으로 경험하지만, 분자나 생리학적 층위에서도 불안을 측정할 수 있다.


불안은 유전에 의해 만들어지는 동시에 양육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


심리적 현상이면서 사회적 현상이다. 컴퓨터 용어로 말하면 하드웨어의 문제(배선이 엉망이다)이면서 소프트웨어의 문제(논리적 오류가 있는 프로그램을 돌려서 불안한 생각을 일으킨다.)이기도 하다.


기질은 어느 하나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위험 유전자라든가 어린 시절의 상처 같은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스피노자와 두드러지게 침착한 성품이 본인의 철학 덕분인지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스피노자가 유전적으로 자율신경 각성 정도가 낮기 때문에 고요한 철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닐 수도 있지 않나?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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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물의 발견은 정신병과 인간 본성에 관한 생각에 충격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리의 성격, 지성, 문화 자체를 한 자루의 효소로 축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에드워드 쇼터, [프로작 이전] (2009)에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980년대에 잠시 동안 나는 모노아민 산화효소 억제제(MAOI)인 페넬진을 먹었다. 상표명은 ​나르딜​이다. MAOI 는 나에게 별로 효과가 없었다. 불안이 줄어들지 않은 데다가 오히려 이 약의 부작용 때문에 죽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아주 많이 했다.

 

  MAOI가 특정 성분과 결합하면 매우 위험하고 치명적일 수도 있는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MAOI를 먹는 환자가 와인 등의 발효주, 오래된 치즈, 피클, 특정 종류의 콩,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여러 약 등 아미노산에서 유래한 티라민 함량이 높은 것을 같이 먹으면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심한 두통, 황달, 혈압 급상승, 심한 내출혈을 일으킨 경우까지 있었다. 그러니까 이 계열 약은 건강 상태가 아주 좋을 때에도 ​건강염려증과 건강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적당하지 않다.

 

​  환자에 따라서는 우울, 불안 치료에 MAOI보다 나은 방법이 없는 사람도 있지만, ​부작용 때문에 여러 해 전부터 기분장애 치료에 일차적 치료 방법으로 고려하지는 않는다. ​MAOI가 내 정신병 치료 역사에서는 카메오 출현에 그쳤지만 불안의 과학 문화사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신경화학적 정신병 이론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초기 약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MAOI와 이미프라민 등 삼환계 약물이 등장하며 우울과 불안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기반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MAOI 계열 약은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등장했다. 독일 공군이 영국 도시를 V-2 로켓 미사일로 포격하다가 사용하던 연료가 떨어져서 대신 ​히드라진​이라는 연료로 로켓을 발사해야 했다. 히드라진은 독성이 있는 폭발성 물질이었지만 과학자들은 히드라진을 변형해서 의학적으로 쓸 수 있음을 알아냈다. 전쟁이 끝난 뒤 남은 히드라진을 제약회사에서 헐값에 사들였다. 1951년 뉴저지 주 너틀리에 있는 호프만라로슈 사에서 일하던 화학자들이 히드라진을 변형해서 만든 화합물 ​이소니아지드와 이프로니아지드가 ​결핵균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임상 시험이 뒤따랐다. 1952년에는 이소니아지드와 이프로니아지드 둘 다 결핵 치료제로 판매되었다.

 

  그런데 이 두 항생제에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있었다. 이 약을 투여 받은 뒤에 일부 환자들이 "​행복감에 빠져" 결핵 병동 복도에서 춤을 추는 일이 있었다고 신문에 실렸다. ​이 보도를 읽은 정신과 의사들은 이소니아지드와 이프로니아지드에 기분을 좋게 하는 효과가 있으니 정신과 약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1956년 뉴욕 로클랜드 주립 병원에서 여러 정신질환이 있는 환자들에게 5주 동안 이프로니아지드를 투여하는 연구를 했다. 5주 투약 기간이 끝날 무렵 ​우울증이 뚜렷이 호전되었다. ​이 병원 연구 책임자인 네이선 클라인은 "정신에 활력을 주는" 효과를 보았고 그래서 자기 개인병원의 우울증 환자들에게도 이프로니아지드를 처방했다. 네이선 클라인은 일부 환자들에게서 "증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고했다.

 

  클라인은 "​정신의학 역사에서 이런 약효를 발휘한 치료제는 이프로니아지드가 처음"​이라고 단언했다. 1957년 4월 호프만라로슈 사는 이프로니아지드를 ​마르실리드​라는 상표명으로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 약은 <뉴욕 타임스>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마르실리드는 MAOI 계열 약 1호이자 ​항우울제로 알려진 첫 번째 약​이기도 하다.

 

  20세기 중반은 신경과학의 역사가 일천할 때다.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한 지식이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불꽃"이냐 "국물"이냐를 두고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뉴런 사이에서 자극이 전기적으로 전달되느냐 아니면 화학적으로 전달되느냐를 두고 과학계의 의견이 나뉘었다. 옥스퍼드 대학교 약리학 교수 레슬리 아이버슨은 1950년대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케임브리지에서 학부생일 때에는 뇌 안에 화학적 전달은 없고 뇌는 전기 기계와 같다고 배웠다."

 

  19세기 후반 영국 생리학자들이 뇌 안의 화학물질에 관한 기초적 연구를 해 놓았다. 그렇지만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오스트리아 그라츠 대학교 약리학 교수 오토 뢰비가 ​처음으로 신경전달물질의 존재를 밝혔다. ​뢰비는 1926년에 ​아세틸콜린​이라는 화학물질이 신경 끝에서 다른 신경으로 자극이 전달되는 과정을 중재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  소라진과 밀타운 ​판매가 가속화하는데도 뇌세포 사이에서 자극을 전달하는 물질인 신경전달물질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확실히 입증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이 약을 처방하는 의사들이나 이 약을 개발한 생화학자들이나 약에 왜 이런 효과가 있는지는 오리무중이었다.) 그 때 스코틀랜드에서 두 연구자가 발견한 사실이 평형추를 "국물" 쪽으로 강하게 기울게 했다.

 

  1954년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독일 신경과학자 마르테 포크트가 ​노르에피네프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있다는 증거를 처음 발견했다. ​그해 말 포크트의 동료인 존 헨리 개덤이 여러 변칙적 실험을 통해 이전까지는 소화와 관련된 장내 물질이라고 생각되던 ​세로토닌이 신경전달물질임을 발견​했다.

 

  개덤은 스스로 LSD를 먹어 실험을 했다. 개덤은 48시간 동안 제정신이 아니었고 또 실험실에서 측정한 바에 따르면 뇌척수액 내의 세로토닌 대사 물질 함량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개덤은 이런 애매한 결론을 내렸다. 세로토닌은 정신건강을 유지하게 도와준다. 따라서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정신병에 걸릴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신경전달물질과 관련된 정신건강 이론이 탄생하게 되었고 의학계나 문화 전반에서 불안과 우울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지게 된다.

 


 

p.s 세로토닌의 역사

초기 세로토닌 연구 역사를 간략하게 살피면 이렇다. 1933년에 이탈리아 연구자 비토리오 에르스파메르가 ​위에서 화학물질을 발견하였고 ​이 물질이 장 수축을 촉진하여 소화 작용에 관여하는 듯 보였기 때문에 ​엔테라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47년 미국 클리블랜드 병원에서 고혈압을 연구하던 생리학자 두 명이 혈소판 안에서 엔테라민을 발견했다. 엔테라민이 ​혈관 수축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되어 세로토닌이라고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세로는 라틴어 세룸(serum)에서 나온 말로 '피'를 뜻하고 토닌은 그리스어 토니코스(tonikos)에서 온 말로 근긴장을 가리킨다). ​1953년에 처음으로 뇌에서 미량의 세로토닌이 발견되었지만 연구자들은 위에서 나와 혈류를 타고 뇌로 이동한 잔존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세로토닌이 신경전달물질 역할을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MAOI=모노아민산화효소 억제제=Monoamine oxidase inhibitor

세로토닌=seroto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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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증 환자의 인슐린

 

 

-1953년 프랑스 정신의학자 장 지그왈드가 새로 개발된 약 클로르프로마진(소라진)을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함.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프랑스에서는 의학과 문화에 밀타운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될 약리학적 발견들이 역시 우연하게 이루어졌다.

 

  1952년 파리에서 외과 의사 앙리 라보리는 자기 환자들을 대상으로 클로르프로마진이라는 화합물을 실험해보기로 했다.

 

  클로르프로마진​은 19세기 후반 독일 직물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며 나온 부산물인데 현대에 쓰이는 향정신성 약물 가운데 같은 기원을 가진 약물이 무척 많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880년대부터 화공회사에서 개발한 산업용 염료에서 나왔다.

 

  1950년에 프랑스 연구자들이 페노티아진에서 새로운 화합물을 합성해내며 탄생했다.

 

  원래는 ​더 강한 항히스타민제​를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그런데 ​클로르프로마진이 기존 항히스타민제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폐기해버렸다. 라보리는 클로르프로마진이 항히스타민제 역할보다도 감염 위험을 줄이고 신체의 자가면역반응을 억제하여 수술로 인한 충격을 경감하는 데 효과가 잇지 않을까 생각하고 제약회사 롱풀랑에 이 약물을 요청해서 받았다. 효과가 있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환자들을 ​진정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몇몇 환자는 긴장이 크게 풀려서 곧 겪어야 할 중대 수술 절차에 대해 "무관심"한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라보리는 말했다.

 

​  "와서 좀 보세요." 라보리가 발드그라스 군병원에 있는 정신과 군의관 한 명에게 말했다고 한다. 라보리는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지중해 사람 유형 환자들"이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아주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고 했다.

 

  병원에 소문이 퍼졌고 라보리의 동료 의사 하나가 자기 매제인 정신과 의사 피에르 드니케르에게 새로운 화합물의 약효를 알려주었다. 관심이 동한 드니케르는 자기가 일하는 파리 정신병원 뒤쪽 병동에 있는 특히 증상이 심한 환자들에게 이 약을 투여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심하게 동요되어 있던 환자들이 차분해졌다. 미친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드니케르의 동료 의사 하나는 몇 해 동안 아무 반응이 없던 환자에게 이 약을 투여했는데, 환자가 멍한 상태에서 깨어나서는 다시 이발사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의사가 환자에게 면도를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꼼꼼히 면도를 했었다. 그래서 퇴원시켰다.

 

  환자들이 모두 다 이런 극적인 변화를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약의 진정 효과는 강력​했다. 병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정신병원에서 들려오던 괴성이 현저하게 줄었다고 했다. 다른 곳에서도 소규모 실험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뚜렷한 효과가 나타났다. 1953년 파리에서 정신과 의사 장 지그왈드가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던 환자 여덟 명에게 클로르프로마진을 주었더니 다섯 명이 호전되었다. 지그왈드는 클로르프로마진이 "신경증 환자의 인슐린"이라고 단언했다.

 

  클로르프로마진이 북아메리카로 건너오게 된 것은 1953년 봄 어느 일요일 저녁 몬트리올 맥길 대학교 정신의학자 하인즈 에드거 레먼이 목욕을 즐기면서 어떤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클로르프로마진이 프랑스에서 정신병에 어떤 약효를 발휘했는지에 관한 기사로, 제약회사 영업 사원이 레먼의 연구실에 두고 간 것이었다.("얼마나 좋은 약인지 이 글만 읽어봐도 설득이 될 거예요." 영업사원은 레먼의 비서에게 이렇게 말했다.) 레먼은 목욕을 마치고 나와 약을 주문했고, 이 약을 자기가 임상 관리자로 일하는 베르됭 신교 병원의 정신병 환자 일흔 명에게 투약하여 북아메리카 최초의 클로르프로마진 시험을 시작했다.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몇 주만에 조현병(정신분열증), 주요우울증, 오늘날 양극성장애라고 부르는 것 등을 겪던 환자들이 거의 나은 듯 보였다. ​증상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평생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던 환자들 몇몇이 퇴원하게 되었다. 레먼은 나중에 말하기를 "한 세기 전에 마취제가 발명된 이래 의학 분야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명이 이루어졌다." 고 했다.

 

 


​  미국 제약회사인 스미스, 클라인 앤드 프렌치에서 클로르프로마진 판매 허가를 받아 1954년에 ​소라진​이라는 상표명으로 시장에 내놓았다. 소라진 등장으로 정신병 치료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1955년에는 수십 년만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정신병 입원 환자의 수가 줄어들었다.

 

 


​  소라진과 밀타운은 문화 전반에 스며들던 새로운 생각을 더욱 강화했다.

 

​  정신병은 잘못된 양육이나 해소되지 않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라 생물학적 불균형이나 생리적 교란 때문에 일어나므로 화학 요법으로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CPZ=클로르프로마진=chlorprom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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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타운은 1955년 5월 9일 조용히 시장에 등장했다.

 

​  처음 두달 동안은 매출이 한 달에 7500달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불안, 긴장, 정신적 스트레스"에 효과가 있다는 광고가 먹혔는지 곧 판매량이 급증했다.

 

​  12월에는 미국에서 밀타운 매출이 50만 달러에 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해 수천만 달러어치씩 팔렸다.

 

  1956년에는 밀타운이 문화 현상의 하나가 되었다.

 

  영화배우 등 유명 인사들이 새로운 안정제를 칭송했다. "영화계에 꼭 필요한 게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안정이다." 로스엔젤레스 어느 신문에 실린 칼럼이다. ​

 

  "영화계에서 일단 '알 만한 인물'이 될 만큼 올라왔다면 긴장감과 정신적, 감정적 스트레스에 무릎까지 빠진 기분일 것이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고군분투하며 느꼈던 불안감은 정상에 오르고 나면 여기 계속 머무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불안감으로 바뀐다. 그러니 유명 배우건 무명 배우건 하나같이 약통에 조그맣고 신비로운 알약을 가득 채운다."

 

  루실 볼의 매니저는 시트콤 [왈가닥 루시] 세트장에 늘 밀타운을 구비해 놓았다. 루실 볼이 실제 남편이자 시트콤 속 남편이기도 한 데시 아나즈와 티격태격하고 난 뒤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는 잡지 인터뷰에서 집필과 [이구아나의 밤] 제작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버텨내려면 "밀타운,술,수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영화배우 털룰라 뱅크헤드는 자기가 밀타운을 이렇게 많이 먹으니 윌리스 실험실이 있는 뉴저지 주에 세금을 내야 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지미 듀랜트와 제리 루이스도 텔레비전 시상식에서 공식적으로 이 약을 찬미했다. 코미디언 밀턴 벌은 자기가 진행하는 화요일 밤 텔레비전 쇼를 이런 말로 시작하곤 했다. "안녕하세요, 밀타운 벌입니다."

 

  ​유명인들의 적극 지지를 받으며 밀타운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잡지에는 "행복 알약", "마음의 평화를 주는 약", "행복을 처방하다." 운운하는 글이 실렸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아내 갈라 달리는 밀타운의 열렬한 애호가여서 밀타운을 주제로 한 10만 달러짜리 설치미술 작품 제작을 남편에게 의뢰하라고 카터 사를 설득하기도 했다.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약에 취한 디스토피아를 그리기도 했으니 약물의 위험성을 준엄하게 경고할 것 같은데 오히려 메프로바메이트 합성이 "핵물리학 분야의 최근 발견보다 더 중요하고 더욱 혁명적"이라며 열렬한 전도에 나섰다.

 

  밀타운은 시판 18개월 만에 역사상 가장 많이 처방되고 (아마도 아스피린을 제외하면) 가장 많이 소비되는 약이 되었다.

 

 미국인 가운데 최소 5%는 이 약을 먹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인구의 불안을 집단적으로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신경학자 리처드 레스탁은 나중에 이렇게 평했다.

 

​  밀타운은 불안의 개념 자체를 바꾸어놓았다. 1955년 이전에는 일단 안정제라는 게 없었다. 불안 자체를 치료하기 위한 약은 존재하지 않았다.(영어로 "안정제(tranquilizer)"라는 말을 처음 쓴 기록은 의사이자 독립선언문 서명에 참여한 벤저민 러시의 글이다. 벤저민 러시는 이 말을 정신병자를 구속하는 용도로 만든 의자를 가리키는 뜻으로 썼다.) 그런데 몇 년 만에 미국에서 수십 종의 안정제가 나와 약국 판매대를 가득 채웠고 제약회사에서는 수억 달러를 들여가며 또 다른 약 개발에 매진했다.

 

 

 

  신약에 대한 정신의학계의 믿음은 좀 지나친 감이 있었다. ​프랭크 버거의 친구 네이선 클라인은 1957년 의회에서 증언을 하면서 정신과 약물 등장이 ​"인류 역사에서 원자폭탄 개발보다도 더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런 약들이 인류의 숙원이었던, 사람의 화학적 기질과 심리적 행동 사이 관계의 비밀을 풀 열쇠를 제공하고 병리적 욕구를 교정할 효과적인 수단이 되어준다면 핵융합 에너지를 파괴할 목적으로 사용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  클라인은 <비즈니스위크>기자에게 메프로바메이트는 경제적 생산성에도 (사업가들이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므로), 예술적 창의성에도 (작가나 화가가 신경증을 물리치고 "정신적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므로) 도움이 된닥 말했다.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인 전망이다 싶었지만 약물이 더 나은 삶을 가져다주리란 생각이 널리 퍼졌다. 1960년이 되자 전체 미국 의사의 75%가 밀타운을 처방했다.

 

정신분석가의 소파에서 이루어지던 불안 치료가 이제 가정의학과 진료실로 옮겨졌다.

 

이드와 초자아의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은 곧 뇌 안의 신경화학 조성을 미세 조정하는 문제로 바뀌게 될 것이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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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에도 군은 전투로 신경이 망가져 무너져 내린 군인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두고 아직 고민이다.

 

  이라크 전쟁 중에 비겁함을 이유로 불명예 전역한 미군의 이야기를 다룬 기사가 <뉴욕 타임스>에 실렸다. 이 군인은 명예 전역으로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반발했다. 자기는 겁쟁이가 아니라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일 뿐이라고 했다. 전쟁 스트레스 때문에 공황장애가 생겼고 불안 발작 때문에 제대로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변호사는 이 군인은 겁쟁이가 아니라 홙ㅏ라고 주장했다. 군은 처음에는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나중에는 비겁함이라는 죄목은 취하하고 직무 태만이라는, 강도가 약한 위반으로 바꾸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불안에 시달리는 군인은 언제나 있었다.

 

  결정적 순간에 신경이 무너지고 몸이 배신하곤 했다. 남북전쟁 때인 1862년 연방군인 펜실베이니아 자원군 68사단 소속 병사 윌리엄 헨리는 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렸다. 군의관들이 그것 말고는 건강 상태가 좋다고 판단하여, 윌리엄 헨리는 공식적으로 "군인의 심장(soldier's heart)" 진단을 받은 최초의 사례가 된다.

 

​  전투 스트레스 때문에 일어나는 증후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2차 세계 대전 동안에 미군의 실금률을 조사했는데 장의 통제를 잃는 군인이 5~6% 정도 일정한 비율로 나타났고 일부 전투 분대에서는 20% 가 넘기도 했다. 1945년 6월 이오지마에 상륙하기 직전 미군은 설사병에 시달렸다. ​일부 군인들은 설사를 핑계로 전투에서 빠지려고 했다. 1944년 프랑스에 주둔한 미군 전투여단을 조사했더니 군인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전투 중에 식은땀을 흘리고 현기증을 느끼거나 실금을 했다.

 

  2차 세계 ​때 보병대를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은 7% 밖에 되지 않았다.

 

  75%는 손이 떨린다고 했고 85%는 손바닥에 땀이 고인다고 했다. 12%는 대변을, 25%는 소변을 참지 못했다고 말했다 .(설문에 응한 사람의 1/4이 전투 중에 소변을 지렸음을 인정했다는 말을 듣고 한 육군 대령은 이렇게 말했다. "맙소사.... 그렇다면 네 명 중 세 명은 거짓말쟁이라는 말이네!") 얼마 전 미 국방부에서는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 중 전투 지역에 정찰을 나가기 전에 불안 때문에 구토를 한 군인이 매우 많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나중에 저명한 미국 역사가가 되는 윌리엄 맨체스터는 2차 세계대전 때 오키나와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내 턱이 씰룩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작동 이상 신호를 보내는 불빛처럼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윌리엄 맨체스터​가 직접 전투에 처음 나서서 판잣집에 숨은 일본군 저격병에게 다가갈 때의 경험을 회상하며 쓴 글이다.

 

"배 속에서 여러 밸브들이 열렸다 닫혔다 했다. 입이 바싹 말랐고 다리가 덜덜 떨렸고 눈은 초점이 맞지 않았다."

 

  맨체스터는 일본군 저격병을 쏘아 죽였다. 그러고 나서 구토를 하고 오줌을 지렸다. "이게 사람들이 '혁혁한 무용'이라고 부르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는 맨체스터가 불안 속에서 일으킨 생리적 반응에는 ​도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맨체스터는 상황의 ​실존적 무게감​을 의식했다. ​고맙게도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여러 사람들이 불안을 도덕성과 연결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생리적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은 냉혈한 살인자다. 작가 크리스토퍼 히친스 (거침없는 소신 발언으로 유명해 겁쟁이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사람이다)의 말을 빌리면 "​압박감 아래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훌륭한 군인이 될 자질을 갖춘 것으로 보이겠지만, 전투 피로나 외상 후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는 장교는 무감한 뒤에 사이코패스와 같은 침착함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소대 전체를 철조망으로 가득한 구렁텅이에 몰아넣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고대로부터 문화적으로 용기와 남자다움을 연결 지어왔다. 극한 상황에서 신체 기능을 통제하는 능력에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한 것은 물론이다. 전설에 따르면 나폴레옹이 위험한 작전을 앞두고 "철심 같은 신경줄"을 지닌 군인이 필요해서, 지원자 몇 명을 총살형하는 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공포탄이 발포되었을 때에 "변을 지리지 않은" 지원자를 선택했다.

 


 

  내 동료인 제프는 전쟁 특파원으로 세계 곳곳 전장에 파견되었고 테러 단체에 납치된 일도 있는데, 신참 전쟁 특파원은 다들 처음으로 총구 앞에 섰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궁금해 한다고 말한다.

 

"포화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가장 궁금한 게 바로 이거다. 나도 바지에 변을 지릴까? 어떤 사람은 지리고 어떤 사람은 안 지린다. 나는 안 지렸다. 그래서 그 때 괜찮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겪어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행히도 나는 한 번도 포화 속에 있어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내가 어느 쪽일지는 알 것 같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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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에서 겁쟁이를 비난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불안이라는 병은 당사자뿐 아니라 그 군인이 속한 군에도 재앙이 될 수 있다.

 

 


​  [앵글로색슨 연대기]에는 1003년 영국과 덴마크 사이에 벌어진 전투 기록이 나온다. 이 때 영국 지휘관 앨프릭은 너무 불안해져서 토하기 시작했고 부하들을 지휘할 수가 없었다. 결국 덴마크 군에게 살육당하고 말았다.

 

  불안은 전염되기도 쉽다. 그래서 군에서는 적극적으로 불안을 억누르려고 한다. 미국 남북전쟁 때 연합군은 겁쟁이처럼 구는 병사에게 문신을 새기거나 낙인을 찍었다. 1차 세계대전 때 전쟁 외상 때문에 신경증에 걸린 영국군은 "좋게 봐주어야 기질적으로 열등한 인간이며 나쁘게 말하면 엄살꾼에 겁쟁이다." 라는 소리를 들었다. 당대 의학서에서는 불안해하는 군인을 "도덕적 병자"라고 불렀다. (일부 진보적 의사들 (시인 시그프리드 서순을 치료한 W.H.R 리버스 등)은 전투로 인한 신경증은 도덕적으로 확고한 군인들도 걸릴 수 있는 병이라고 했지만 이런 의사들은 드물었다.).

 

  1914년 <아메리칸 리뷰 오브 리뷰스>에 실린 글에는 "장교가 자기 사병에게 발포하여 공황을 억제할 수 있다."라고 적혀있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영국군에서 탈영병은 사형에 처했다.

 

​  2차 세계대전 때 처음으로 전쟁에서 심리학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투 전에 군인을 선별하는 데에도 참여했고 그 뒤에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는 일도 했다. 미군 100만 명 이상이 전투 후유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입원했다. 그렇지만 일부 고위 장교들은 군인들을 이렇게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게 전투 효과를 높이는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불평했다.​

 

  나중에 미국 국방부 장관이 된 육군 장군 조지 마셜은 ​전선에서 겁쟁이나 꾀병군으로 간주될 병사들이 정신과 환자 취급 받는 상황을 개탄했다. ​정신과 의사들의 "지나치게 배려하는 전문적 태도" 때문에 군대가 응석받이 겁쟁이로 가득하다고 불평했다. 명망 있는 의학 저널에 전투 도중 공포증에 질리는 군인들은 불임 시술을 해야 한다는 영국 장군들의 의견이 실렸다.

 

​"이런 조치를 취해야만 군인들이 공포를 드러내는 걸 막을 수 있고 또 정신적 나약함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일도 막을 수 있다."

 

​  영국과 미국 양쪽에서 고위 장교들은 "전쟁 신경증" 진단을 받은 병사들이 비겁함으로 유전자 풀을 오염시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우리나라가 나약함을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 아무 쓸모없는 자들을 과보호하는 프로그램을 중단해야 한다."

 

  영국군 대령의 말이다.

 

  미 육군 소속 조지 패튼 장군은 전쟁 신경증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조지 패튼은 "전투 피로"라는 용어를 즐겨 썼고 이런 게 단지 "의지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패튼 장군은 전투 피로의 확산을 막기 위해 당시 사령관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전투 피로를 사형으로 처벌 가능하게 하라고 제안했다. (아이젠하워는 거부했다.)

 

 

-3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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