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타운은 1955년 5월 9일 조용히 시장에 등장했다.
처음 두달 동안은 매출이 한 달에 7500달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불안, 긴장, 정신적 스트레스"에 효과가 있다는 광고가 먹혔는지 곧 판매량이 급증했다.
12월에는 미국에서 밀타운 매출이 50만 달러에 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해 수천만 달러어치씩 팔렸다.
1956년에는 밀타운이 문화 현상의 하나가 되었다.
영화배우 등 유명 인사들이 새로운 안정제를 칭송했다. "영화계에 꼭 필요한 게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안정이다." 로스엔젤레스 어느 신문에 실린 칼럼이다.
"영화계에서 일단 '알 만한 인물'이 될 만큼 올라왔다면 긴장감과 정신적, 감정적 스트레스에 무릎까지 빠진 기분일 것이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고군분투하며 느꼈던 불안감은 정상에 오르고 나면 여기 계속 머무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불안감으로 바뀐다. 그러니 유명 배우건 무명 배우건 하나같이 약통에 조그맣고 신비로운 알약을 가득 채운다."
루실 볼의 매니저는 시트콤 [왈가닥 루시] 세트장에 늘 밀타운을 구비해 놓았다. 루실 볼이 실제 남편이자 시트콤 속 남편이기도 한 데시 아나즈와 티격태격하고 난 뒤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는 잡지 인터뷰에서 집필과 [이구아나의 밤] 제작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버텨내려면 "밀타운,술,수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화배우 털룰라 뱅크헤드는 자기가 밀타운을 이렇게 많이 먹으니 윌리스 실험실이 있는 뉴저지 주에 세금을 내야 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지미 듀랜트와 제리 루이스도 텔레비전 시상식에서 공식적으로 이 약을 찬미했다. 코미디언 밀턴 벌은 자기가 진행하는 화요일 밤 텔레비전 쇼를 이런 말로 시작하곤 했다. "안녕하세요, 밀타운 벌입니다."
유명인들의 적극 지지를 받으며 밀타운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잡지에는 "행복 알약", "마음의 평화를 주는 약", "행복을 처방하다." 운운하는 글이 실렸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아내 갈라 달리는 밀타운의 열렬한 애호가여서 밀타운을 주제로 한 10만 달러짜리 설치미술 작품 제작을 남편에게 의뢰하라고 카터 사를 설득하기도 했다.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약에 취한 디스토피아를 그리기도 했으니 약물의 위험성을 준엄하게 경고할 것 같은데 오히려 메프로바메이트 합성이 "핵물리학 분야의 최근 발견보다 더 중요하고 더욱 혁명적"이라며 열렬한 전도에 나섰다.
밀타운은 시판 18개월 만에 역사상 가장 많이 처방되고 (아마도 아스피린을 제외하면) 가장 많이 소비되는 약이 되었다.
미국인 가운데 최소 5%는 이 약을 먹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인구의 불안을 집단적으로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신경학자 리처드 레스탁은 나중에 이렇게 평했다.
밀타운은 불안의 개념 자체를 바꾸어놓았다. 1955년 이전에는 일단 안정제라는 게 없었다. 불안 자체를 치료하기 위한 약은 존재하지 않았다.(영어로 "안정제(tranquilizer)"라는 말을 처음 쓴 기록은 의사이자 독립선언문 서명에 참여한 벤저민 러시의 글이다. 벤저민 러시는 이 말을 정신병자를 구속하는 용도로 만든 의자를 가리키는 뜻으로 썼다.) 그런데 몇 년 만에 미국에서 수십 종의 안정제가 나와 약국 판매대를 가득 채웠고 제약회사에서는 수억 달러를 들여가며 또 다른 약 개발에 매진했다.
신약에 대한 정신의학계의 믿음은 좀 지나친 감이 있었다. 프랭크 버거의 친구 네이선 클라인은 1957년 의회에서 증언을 하면서 정신과 약물 등장이 "인류 역사에서 원자폭탄 개발보다도 더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런 약들이 인류의 숙원이었던, 사람의 화학적 기질과 심리적 행동 사이 관계의 비밀을 풀 열쇠를 제공하고 병리적 욕구를 교정할 효과적인 수단이 되어준다면 핵융합 에너지를 파괴할 목적으로 사용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클라인은 <비즈니스위크>기자에게 메프로바메이트는 경제적 생산성에도 (사업가들이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므로), 예술적 창의성에도 (작가나 화가가 신경증을 물리치고 "정신적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므로) 도움이 된닥 말했다.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인 전망이다 싶었지만 약물이 더 나은 삶을 가져다주리란 생각이 널리 퍼졌다. 1960년이 되자 전체 미국 의사의 75%가 밀타운을 처방했다.
정신분석가의 소파에서 이루어지던 불안 치료가 이제 가정의학과 진료실로 옮겨졌다.
이드와 초자아의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은 곧 뇌 안의 신경화학 조성을 미세 조정하는 문제로 바뀌게 될 것이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 모든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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