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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논리정연하고 동의되는 내용이 많아서 함께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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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읽으면 진보가 된다?

 

조금 놀랐다. 성경 사랑하고 많이 읽기로 알려진 한국교회 성도들이 실제로는 그다지 읽지 않는단다. 일주일에 성경 한 번 보지 않은 이들이 무려 68%이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매일 또는 한 주에 서너 번은 읽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열에 한둘일 게다.... 이래서는 ‘그 책의 사람들’이라는 호칭이 무안하고, 한국교회가 선교사가 아니라 성경번역과 읽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전통이 차마 무색하다.

 

 

한국교회는 정말 보수적이다. 정치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특히 그러하다. 성경의 권위를 열렬히 옹호한다. 어찌하든지 간에 성경을 읽도록 장려한다. 유교의 독서문화와 한국사회의 공부 열풍과 맞물려 개신교회의 성경 읽기 열심은 유별나다. 일주일에 QT를 몇 번 했는지, 성경을 일 년에 몇 번 읽었는가로 신앙의 수준과 정도를 가늠할 정도다.

그래서 더 놀랍다. 성경을 읽으면 더 진보적이 된단다. 미국의 라이프웨이 리서치와 베일러 종교조사연구에 따르면, 성경을 자주 읽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정치적으로 진보적 성향이 더 나타난다. 예컨대, 테러리즘과 싸우는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고,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고, 과학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사회 경제적 정의를 더 추구하며, 검소한 생활을 위해 소비를 줄이자는 것에 보수적 성향의 신자에 비해 훨씬 높게 나타난다.

 

놀랄 일이 아니다. 성경이 진보적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와 계시록을 간단히 훑어보아도 알 수 있다. 모세오경은 애굽과 바벨론의 제국에 저항하는 불온한 문서이다. 제국은 말한다. 왕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모든 사람, 심지어 노예라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는 제국 이데올로기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왕의 통치 권한과 근거가 오로지 그만이 신의 형상이기 때문에 신을 대리하여 다스린다. 그걸 모두에게 나누어주었으니 반체제적일 수밖에.

 

계시록은 또 어떤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한다는 것 자체가 제국의 질서에 대한 불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는 눈물이 없고, 애통하고 애곡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 그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한다는 것, 그것은 지금의 제국이 천국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이들의 프로파간다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기고만장한 로마제국도 알고 보면 별 것 아니라고 피식 웃어버리는 성경은 진보적이다 못해 급진적이다.

 

그러니 이런 성경을 자꾸 읽으면 기득권에 안주하기 보다는 새로운 세상,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된다. 하여, 나는 안 변할 거다, 내가 움켜잡은 것은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기성 질서는 몸에 맞지 않다. 테러에 대해서도 당연히 반대하지만, 테러를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야 더 거부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제국의 논리고 생리이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쟁취하려고 애쓴다. 성경의 사람들은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고, 나누고 베풀고자 노력한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는 위의 조사 결과를 보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성경을 자주 읽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해 안 읽는 반면, 실제 성경을 자주 읽는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가치관과 생각이 성경대로 변화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성경을 읽으면 자연스레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한다. 그 결과 생각과 행동이 성경처럼 바뀌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성경대로 사는 거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진보적이 된다는 말보다는 성경대로 산다고 말해야 옳다. 그게 그거다. 성경은 도덕적 사안들, 예컨대, 폭력과 전쟁, 가난과 부, 과학에 대해 진보적 색채를 띠게끔 만든다. 하여, 성경 읽으면 진보적이 된다는 말은 맞다.

 

성경만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이 진보적이다.

 

안식년과 희년을 제정하신 하나님은 보수적일 수 없다. 남의 것을 제 것인 양 빼앗기를 일삼고, 버젓이 정당화하는 세상을 희년은 정죄한다. 안식년의 하나님은 죽어라 일하다가 죽어버리는 우리를 바보라고 놀린다. 만나로 먹이시는 하나님은 더 많이 벌려고 아등바등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질서와 가치를 뒤집는다. 역전의 하나님이다. 마리아는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고 비천한 자를 높이는 하나님을 노래한다.(눅 1:51) 그분은 모두 빼앗겨 주린 자를 배불리 먹이고, 떵떵거리며 살면서 가난한 자들을 거들떠보지 않던 부자를 기어이 빈손으로 만든다. 위험천만한 정치적 찬송가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의 권력이 헛되다고 하나님은 선언하신다. 세상의 가치를 전도한다. 세상의 질서를 전복한다. 성경을 읽으면 진보가 아니라 혁명적이 된다.

 

칼 바르트는 묻는다. 성경 안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성경 안에는 낯설고(strange) 새로운(new) 세상이 있다고 대답한다. 그 세계는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다. 바르트의 멋진 말을 날 것 그대로 보면 좋겠다. “성경의 내용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인간적 사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올바른 사상이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를 일러준다.”

 

그 속의 언어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다. 내 생각을 확인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듣는 자리다. 내 생각에 하나님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나를 밀어 넣는다. 그러니까 네 생각과 언어를 닥치고,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을 듣고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삶을 뜯어고치는 하나님은 죽어라 안 변하는 보수적인 우리를 당신 자신이 죽어서까지 우리를 개혁한다. 참, 하나님은 너무 진보적이다.

 

하나님과 성경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은 사람들이 진보적임에 틀림없다. 80년대 대학을 다닌 탓에 나름 열심히 데모하느라 바빴다. 총학생회도 기웃거리고, 동아리 연합회에서도 한 자리 차지하고, 학습도 얼추 해보았다. 나름 관찰한 바에 의하면, 운동권의 절반 가까이가 기독교인인 듯싶다. 내 추측이고, 정확한 통계가 아니라 빈 구석이 많다. 그래도 기독교인 비율이 상당한 것은 분명하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기나 멀어지기는 했어도 어려서부터, 자라면서 교회를 다닌 이들이 수두룩하다.

 

아무리 보수적인 교회이고, 사회 참여에 대해 꽉 막힌 목사이고, 성공과 성장에 목을 매고, 가난한 자보다는 불신자에 더 관심이 많다손 치더라도, 그 설교에는 결국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담겨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번영신학을 떠들어도 성경이 본디 그러하니 정의와 사랑을 말하게 된다. 그걸 듣고 자라면서 본 현실은 강도 만난 자로 득시글거리니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거다. 성경 속의 약자와 빈자, 소수자의 울부짖음을 이미 들었는데, 그들에게 어찌해야 하는지 들었는데 어찌 외면할 수 있으리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성경과 진보의 상관관계는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도리어 성경을 떠받드는 이들이 갈수록 보수화가 되는 것이 이상할 뿐이다.

 

그건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이지 싶다. 하나는 그렇게 성경, 성경 하면서도 실제로는 성경을 거의 안 읽거나, 다른 하나는 읽기는 읽되 하나님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내가 하나님에게 쉴 새 없이 말하거나 일 것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빼앗아야 한다고. 소위 바이블벨트의 기독교인들이 성경 읽으면서 전쟁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개탄하며 한 말이다.

 

나는 예전부터 이 부분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의 논지는 우리가 성경을 따라 살 의사나 의지가 없는 성경 읽기는 자기만족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본다. 간단하다. 성경의 변혁적 능력을 믿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읽어도, 나는 절대로 안 변할 거야, 라고 다짐하고 읽어도, 성경은 여지없이 우리를 무너뜨리고 굴복시킨다. 그러니까 성경이다. 그러니 그냥 읽으라.

 

또 하나 보탤 것은 읽는다는 행위와 진보와의 관계이다. 본래 책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개방적일 수밖에 없다. 조사가 말한 진보라는 것도 기실 타인의 고통과 타인의 소리를 듣고 공감하고 반응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반 독서도 그러하거니와 성경 읽기는 듣기를 무척 강조한다. 로마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믿음은 말씀에서 비롯된다. 말씀을 읽는 것에서 믿음이 생긴다.

 

믿음은 말씀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 받은 이스라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고통 받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의 소리를 듣는다. 그분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하여,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개방적이 되고, 사회적으로 진보적 어젠다에 찬성하는 비율과 비중이 높아진다.

 

 

의외로 성경을 안 읽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규칙적으로 성경을 묵상한다면, 아마도 교회 내 문제의 대부분이 없어질 것이다. 적어도 절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난데없는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닌가 보다. 갈수록 보수화되는 교회는 갈수록 성경을 안 읽어서 그렇구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 진보가 아니라도 좋고, 딱히 진보적이 될 필요도 없다. 성경을 읽자. 그럼 놀라운 일이 생길 것이다. 내가 생각지 못한 새롭고 낯선 일들 말이다. 놀랄 준비하고 성경을 읽자. 성경을 읽고 놀라게 하자.

 

몇 년 전에 올린 글을 페북이 알려줘서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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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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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가 정확하지 않으나 다른 사이트에서 퍼온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이 유학생으로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은데 그 속에서 답을 찾아 나갈 때 참고할 만한 좋은 글인 것 같아서 공유합니다. 원 글의 출처를 아시는 분은 제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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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미국 유학생 1위 국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이 8만 명을 넘고, 동반한 가족만도 3만 명이 넘는답니다. 올해만 해도 5만 건의 유학 비자가 발급되었다니까 앞으로도 계속해서 미국에서 한국 유학생을 아주 많이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유학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학을 하는 것은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아는 사람들을 떠나서, 의지할 곳도 없고, 시스템도 다르고, 재정적 어려움이 있고,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외국에서, 또한 어설픈 영어로 공부하는 것 자체가 광야입니다. 더구나 가족까지 함께 유학을 한다면 광야는 더욱 깊어집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광야를 더 거칠고 황량하게 만드시지 않아도 외국에서 공부하며 산다는 것이 이미 충분히 힘들고 어렵습니다.


 

경험이 잘 통하지 않고, 알고 있는 지식은 한계가 있고, 문제 해결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제한된 곳에서 답답함과 한계를 뼈 속 깊숙이 느낍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이렇게까지 바보 같지 않았는데,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실수한 적이 없는데….’라는 한탄을 쏟아냅니다. 나이가 들면서 정말 멍청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생존을 위해, 한국에서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을 하면서 왜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유학을 왜 나왔을까 하는 후회를 합니다. 도대체 유학을 마치면 갈 곳이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유학을 하면서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가족이 없는 청년들은 외로움 때문에 몸부림을 칩니다. 그래서 유학생들 가운데 포르노에 중독된 형제들을 아주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또한 남녀 학생들이 동거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커플들이 며칠씩 함께 여행을 떠납니다. 아무도 말하는 사람도 없고,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외로움이 유학하는 청년들의 가치관과 관계를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그렇다고 가족이 있기 때문에 유학이 더 쉬워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생은 시간이 지나고 가족이 늘어갈수록 복잡해집니다. 가족의 생존에 대한 걱정과 적응의 어려움은 유학생 가장이 짊어진 큰 짐입니다. 나이 들어 공부하는 것도 힘든데, 아내와 아이들이 아빠의 시간과 관심을 요구할 때 난감해집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학생의 아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남편보다 훨씬 심합니다. 아내가 영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경우 함부로 밖으로 다닐 수도 없습니다. 언어와 환경에 대한 무능함과 무력함의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집에 갇혀 아무의 도움도 없이 애만 키우는 유학생 아내들은 감기처럼 쉽게 우울증에 걸립니다.


 

 


 

이런 한계와 상황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몸부림을 칩니다. 이것을 극복해 보고자 더욱 열심을 내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밤을 새워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현실을 도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땅 넓은 미국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답답함을 잊고자 합니다. 친구들을 찾아 이 모임 저 모임을 기웃거려봅니다. 하지만 현실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산과 같은 한계의 벽 앞에 울게 됩니다. 실제로 소리 내어 울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영혼 깊숙이 가득한 눈물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외로움과 생존의 눈물이 가득한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불안, 불만족, 분노, 긴장, 두려움이 시도 때도 없이 눈물로 가득한 영혼을 요동케 하며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적응력이 참 뛰어납니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점점 유학 생활에 적응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외로움 때문에 소리 내어 울지 않습니다. 누군가 한국에서 도와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접습니다. 독해지자고 마음을 먹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사귑니다. 한국을 잊어버리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미국에서 평생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찾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적응의 양상은 비슷합니다. 신학생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광야는 인간의 본질, 한계, 그리고 적나라한 인간의 무능함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물론, 광야에서 본질과 한계가 드러났다고 해서 성장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어려움을 많이 겪은 사람이 항상 더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 자체가 영적 성장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광야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반응했는가가 한 사람의 성장과 미래를 좌우합니다. 그렇다면 유학이라는 광야에서 본능과 한계대로 살아가지 않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로 자신의 한계에서 시작된 탄식과 눈물을 하나님 앞에서 쏟아내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유학생이 흘리는 눈물이 외로움과 생존과 한계 때문이더라도 그 눈물을 하나님 앞에서 쏟아내는 것을 기필코 배워야 합니다. 전화를 붙들고 엄마와 친구들에게 아무리 마음을 쏟아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외로움은 영적입니다. 한계는 우리의 본질 안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생존은 현실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외로움을 채워줄 수 없고, 한계를 넘어서게 해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이 무엇인가 잘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로움과 한계와 생존이 가져다주는 강력한 눌림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보통 사람보다 더 울 일이 많은 유학생은 이 기회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영혼에 가득한 우리의 눈물을 쏟아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하나님 앞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던 것처럼 이것을 머리가 아닌 온 몸과 영혼으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통곡을 배운 사람만이 외로움과 한계와 생존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만이 우리보다 더 많은 슬픔과 눈물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강과 바다처럼 많은 눈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눈물이 하나님 앞에서 다 쏟아져 마르게 되면, 그제야 하나님의 눈물이 우리 안에 채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땅을 보시며 아파하시고, 쏟으시는 그 눈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게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를 어루만지시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시는 그분의 눈물을 알게 됩니다. 유학을 하며 흘려야 할 눈물은 바로 이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하나님의 눈물을 배우지 못한 유학생은 유학을 성공적으로 마쳤더라도 여전히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살아갑니다. 한계를 가리기 위해 위선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생존을 위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학을 하면서 이 땅을 위해 그리고 인생들을 위해 하나님이 흘리시는 눈물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유학을 허락하신 거룩한 소명을 붙드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아무런 생각 없이 유학을 온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유학을 떠난다는 것 자체가 많은 희생과 용기와 도전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단 유학을 온 다음에는 생존에 지쳐, 적응하느라 피곤해서, 삶의 계속되는 요구들을 처리하느라 점점 왜 유학을 하는지 잊어버리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선택된 특권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회와 시간을 특별히 허락하신 것입니다. 유학을 허락하셨다면 그곳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반드시 있습니다.


 

명확한 소명은 우리의 모든 선택에 영향을 미칩니다. 명확한 소명은 밤을 새워 드라마를 보지 않을 수 있는 선택, 외로움을 위해 이성을 선택하지 않는 선택, 사소한 이익 때문에 인테그러티(integrity)를 버리지 않는 선택, 현재적 생존이 아닌 미래적 비전을 위한 선택을 명확하게 할 수 있게 만듭니다. 거룩한 소명이 이끄는 삶을 살 때만이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여기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거룩한 목적에 합당한 것만을 집중하여 선택할 수 있습니다.


 

소명은 현재의 모든 상황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만듭니다. 소명이 확실한 사람은 어려움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쉽고, 편리를 보장하고, 이익을 보장되는 상황이 아니어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무명의 시기를 살며,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나 환경이 삶의 주관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명이 있는 자는 그의 생존의 문제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소명을 주신 자의 삶을 인도하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소명은 우리의 미래를 확고하게 보장합니다. 소명이 우리의 살 곳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녀의 교육 때문에, 삶의 질 때문에, 봉급 때문에 자신이 살 곳을 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이 한국에 있다면 유학을 마친 후에 반드시 한국에 돌아가야 하고,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소명이 아프리카에 있다면 그곳에 가야만 하고 가게 될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길을 만드실 것입니다. 소명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소명이 우리가 가야할 곳을 정합니다. 소명이 확실한 사람은 유학을 한 뒤에 자리가 있을까, 어디에서 살게 될까, 무엇을 하게 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소명을 주셨다면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생명을 다해 붙든다면, 유학을 마쳤을 때 하나님이 그가 가야만 하는 곳으로 그 사람을 반드시 보내실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이 유학을 오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좀 더 풍성한 섬김을 베풀 수 있는 사람들로 잘 준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이 외로움의 눈물, 생존을 위한 눈물을 하나님 앞에서 흘려버리고 하나님의 눈물을 배우게 되길 소망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을 회복해서 유학을 마친 뒤에는 그들이 있어야만 하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성취하는 사람들로 섬길 수 있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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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신뢰를 잃고,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고 있는 상태다. 다시 회생할 수 있는 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1. 율법주의 신앙관 2. 아르뱅주의 3. 정치와의 잘못된 결탁으로 한국 교회의 문제를 진단했었는데, '3번' 항목과 '경제'와 관련된 부분을 접목시켜서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정의의 문제'를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 교회가 한국 정치와 맞물리면서 유독 반공주의를 좋아하고, 보수적인 정치관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는 건 많이들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에스더 기도 운동 본부처럼 국정원 등 뒷 세력의 선동이 섞여 있는 경우도 있으며 한국 근현대사/교회사 공부를 하다 보면 그들이 왜 서로를 형제처럼 아끼는지 이유를 알 수 있다. 다른 지면을 통해서 더 자세히 나누도록 하겠다.) 

교회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 사이에서 그리고 목회자들의 설교를 통해서 늘 자주 언급되는 이슈들은 동성애 이슈, 무슬림 이슈, 종교 혼합주의, 인본주의 등에 대한 부분이다. 물론 기독교가 지닌 배타성을 감안했을 때, 옳고/그름이라는 기준이 존재하며 이에 대해 성격적인 대답을 하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는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영역들에서 경각심을 가지는 건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더욱 많이 강조되어 있는 '가난한 자의 구제', '압제받는 자들의 자유함', '억울한 자들의 한을 해소해 주는 일', '부당한 착취'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정말 신경을 안 쓴다. 한 두번의 교회 구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정도, 한 두 번의 후원에 참여하는 정도로 자신의 몫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직접적으로 물어 보면, 자신들은 그런 문제에 정말 관심이 많고 늘 기도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지만 실상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가난', '압제', '억울함' '부당한 대우' 등에 대해 상대적으로 둔감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인정하는 순간이 성경이 말하는 '정의와 함께 가는 참된 사랑'의 개념을 비로소 제대로 보기 시작한 때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일단 이 문제에 있어서 필자는 누구보다도 그들의 입장을 잘 이해한다. 나 스스로가 그런 입장의 선두주자였기 때문에 그렇다.

 

 

또는 무슨 일에든 깊게 개입하지 않고(*특히 정치적인 사안에서는) '중립'을 유지하자는 입장이 강하다 보면 관련 이슈에 개입을 안 하려 하거나 아니면 위에서 언급한 stance를 유지할 확률이 크다.

​(하지만 "중립성이라는 편견" 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험한다면 '중립'의 허상을 깨닫게 된다.)

 

 


대부분 이 stance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가난, 압제, 억울함, 부당한 대우, 차별 등 소위 '정의의 문제'에 있어서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그러려면 통계적으로 극심한 가난에 처한 경험은 없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아니면, 경제 수준은 낮으나 교육 수준이 현저히 낮아서 길을 잘 못 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피부로 그런 문제가 와닿지 않는 상황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위선]이라는 책에 나와있는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스라엘'이 '비교적 경제적으로/사회적으로 여유로우면서 정의를 망가한 일부 그리스도인'(매스컴에 보도되는 저명한 정치인,전직 대통령, 일부 목사님들 등 포함)과 매칭이 되었다.

이런 논의를 할 때 중요한 건 '재물이 많은 것' = '나쁘다' 라는 공식을 적용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라는 것이다. 

비록 일반 대중들에겐 보수니, 진보니, 자유주의니, 복지국가니 말들이 많지만 최소 그리스도인에게는 명확한 기준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바와 현재 기독교인들의 방향

성을 빗대어 살펴보는 게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면서 그들의 삶과 예배 속에 드러나는 위선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권영경 교수님의 [위선]이라는 책을 보면서, 인용할 만한 내용들이 많아서 함께 나눠 본다.

 

 

"당시 여로보암 2세 치하의 북왕국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약세를 틈타 솔로몬 시대에 버금가는 정치적,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3:15, 5:11, 6:13, 왕상:22:39). 아모스는 당시 하나님의 선민을 자처하던 이스라엘 상류층("백성들 중의 머리", 6:1)의 호화롭고 여유로운 삶을 적나라한 희화적 언어로 풍자한다.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 양을 잡아먹고 우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먹는다. 수금 소리에 따라 되잖은 노래를 불러 대고 다윗이나 된 듯이 악기들을 만들어 낸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6:4~6a, 가톨릭 성경)

사회 상류층을 향한 이런 비난은 물질적 풍요나 삶을 즐기는 태도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다. 예언자들이 날카로운 사회비평가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경제적 번영 자체를 악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이스라엘 지도층을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 이유는 그들이 누리던 번영과 안락이 하나님이 복으로 내리신 진정한 샬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풍요에 젖은 사람들에게서 확인하곤 하는 무서울 정도의 무감각 혹은 냉혹함은 아모스 당시 이스라엘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회경제적 풍요와 권력은 가진 자에게 자신감을 준다. 이 자신감은 그렇지 못한 이들을 쉽게 차별하는 오만으로 이어진다. (6:1). 여기서 '나보다 못한' 계층의 힘겨움에 대한 무관심과 무감각이 생긴다. 아모스의 표현을 따르면 이들 상류층 사람들은 더없이 호화로운 삶을 즐기면서도 정작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않았다."(6:6b)

 그렇다. 자신의 삶이 안락하고 편했다면 단돈 1000원이 없어서 괴로운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도 별로 큰 부자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돈 없음'의 기준 자체가 다른 경우들이 있다. 돈이 없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이 없다 하지만 1주일에 한번씩 외식 할 정도의 여유가 있는 이들도 많다. 빈부 격차의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당연시 누리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누군가는 분명 누리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그리스도인은 항변할 것이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착취해서 부자가 된 것도 아니잖아요? 왜 우리를 나쁜 사람 취급하나요?"


하지만 세상 살이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정당하게 번 돈은 당연히 그 사람의 몫이겠지만, 최소 그리스도인 아니던가. 지금 가난한 사람들이 다 게으르고 공부 안 하고 일 안해서 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많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의 욕망을 단순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손해가 되는 요구사항이 제시될 때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내리고 남을 돕기 힘든 존재들이다. 인간의 실존적 한계와 대립하면서 상대를 바라봐야 하기에 세상 살이가 어려운 것이다.  


아모스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인들은 가난한 계층을 소외시킴으로써 자신들의 풍요를 획득했다. 또한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부와 권력을 축적했었다. 한국의 대형교회, 전 대통령들 중에도 교회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경제적 부를 잔뜩 지닌 이들이 있다. 그들 중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이들을 겨냥한 말씀들이 있다.

('부정한 방법의 축적'이 중요한 포인트다. 또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의 풍요가 우리의 노력과 열심 만으로 이뤄진 게 아님을 인정한다면 타인의 곤궁함을 쉽게 좌시하기는 어려워야 마땅하다. 그리스도의 참된 은혜로 자신이 과분한 것을 누리고 있음을 인정하는 자는 '정의'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정의(히브리어: 미쉬파트)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히브리어:체다카)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5:7)


정의(미쉬파트)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체다카)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며 (6:12) 

책의 내용을 다시 인용해 본다.

그들의 풍요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사회경제적 부정의 열매였다. 예언자는 정의와 공의를 팽개치는 악행의 실태를 생생한 언어로 고발한다.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세 가지, 네 가지 잘못 때문에 내가 끝까지 그 죄를 묻겠다. 그들은 은을 받고 의인을 팔고, 신 한 켤레에 가난한 자를 판다. 힘없는 사람의 머리를 땅의 흙 속에 짓밟고 억눌린 사람을 억울하게 만든다 .(2:6~7a)

너희가 힘없는 자를 짓밟고 그에게 밀의 세금을 부과하였다.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한다 .(5:11~!2)

쪼들리는 자를 짓밟고 땅의 가난한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는구나. "언제 초하루가 지나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 안식일이 끝나 밀을 내놓지? 용량은 줄이고, 가격은 올리고, 거짓 저울로 속이자.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고,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고, 질이 나쁜 밀도 내다 팔자." (8:4~6)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특별히 선택해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정의로워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했으나, 그들의 행실과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거리가 멀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했을 것이다. 매일 예배도 잘 드리고, 헌금도 잘 내고 종교 의식에도 열심을 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들이 경건할 줄 착각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정의가 회복되는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셨다. 그들이 '삶'으로 그 길을 걸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참된 선택받은 민족임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대신, 정의를 물처럼 공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5:24) 


결국 한국 교회의 현 사태는 '정의를 잃어 버린 모습' 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이면에는 옛적 이스라엘 민족이 그랬던 것처럼 '선민의식', 즉 '영적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은연 중에 자신들이 믿지 않는 자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지 않는 이상, 이토록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동성애, 무슬림 등 공포를 조장하고, 누군가를 배제하는 영적 지침에는 과도하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칭 보수 정권'을 지지하고, 북한에 대한 과도한 공포심을 조장하며 자신들은 '선민', 상대방은 '악마'로 이분화 시켜서 신앙을 지키려 한다. 그들이 지속적으로 강단에서, 카카오톡으로, 모임 자리에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는 그들과 다르다. 나는 구별된 그리스도인이다." 라는 인식이 무의식 중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러한 자신들의 주장을 보증해 준다고 자부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기도모임에도 잘 참석하고 하루에 몇 시간씩 중보기도도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설교 시간에 졸지도 않기 때문이다.

내 경험상으로도 내가 경건한 예배, 참된 성경의 가르침에 푹 빠져 있을 때 '나의 영성 상태'는 아주 좋은 수준이며, 그렇기 때문에 불경건한 자들을 걸러내는 작업에 혈안이 되었던 것 같다.

(만약 그 영역의 비중이 크지 않다면, 막연하게 주변의 이야기에 현혹되고 지적으로 무지한 상태에 안주해 있는 경우가 나머지를 차지한다.어느 쪽이 되었든 결코 좋은 상태는 아니다.)

하지만 다양한 '종교적 장치'들은 우리의 삶이 죄악의 길을 걸을 때 이를 가리는 역효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예배와, 믿음의 고백 등은 그 자체로는 값지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제사' 가 아니라 '순종'이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회생 불가능한 늪으로 빠져 들어가나 [위선]이라는 책이 이야기하는 '신앙과 욕망 사이에서 고투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참으로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사랑과 정의]를 함께 보면서,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시 재정립하고 있다.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을 회개하며 다시 한번 성경이 이야기하는 기독교가 회복되길 바란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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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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