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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뇌 속에 들어 있는 감정을 담당하는 캐릭터들을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

(우리나라 웹툰 [유미의 세포들]도 참신하지만, 인사이드 아웃을 위시한 픽사의 명작 애니들을 보면 소재의 참신성에 있어서는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픽사다운 창의력이 돋보이는 영화다.

 

무엇보다 이러한 창의력을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표현해내는 그들의 저력이 대단하다.

 

Joy(기쁨), sadness(슬픔), disgust(혐오,까칠), anger(분노), 소심(fear) 5가지의 성격이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며 귀엽게 캐릭터화 된 모습은 정말 사랑스럽고 훈훈하다.

 

 

대상이 느끼는 '감정'들이 구슬 같은 모양으로 '입력'이 되고 이게 '장기 기억소'로 가서 보관된다는 발상이나 우리의 삶 속에서 아주 중요한 핵심 기억이 있어서 이러한 '핵심 기억'이 '인격'이라는 '섬'을 형성한다는 해석은 특히  심리학적으로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emotion, long-term memory, core memory, personality 등 주요한 개념들이 어린 아이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전달 능력은 정말 대단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라일리의 '핵심 기억'은 주로 joy(기쁨)으로 기억되었고, 이러한 핵심 기억 덕분에 주인공인 라일리의 마음 속에는 인격을 형성하는 다양한 섬이 만들어 진다.

 

친구와의 우정을 다루는 '우정섬', 가족간의 친밀함이 만들어낸 '가족섬', 그 이외에도 엉뚱하고 유쾌한 삶을 좋아하는 '엉뚱섬', 자신이 자신있게 즐길 수 있는 활동인 '하키섬', 잘못한 것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정직섬' 등 말이다.

 

그러나 마냥 행복하게만 보이던 라일리의 삶은 아빠의 직장 문제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급변하게 된다.

 

이젠 미네소타에 살았던 때처럼 넓은 정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밀감을 쌓았던 친구들도 없고, 집도 허름해졌다.

 

 

 

Joy 가 주를 이루던 라일리의 마음 속에는 다른 마음이 틈타기 시작한다.

그리고 처음 전학간 학교에서 학우들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면서 그만 눈물을 흘리며 다른 감정들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러한 작다면 작을 수도 있는 사건이 감정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났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라일리의 성격을 이루는 인격의 섬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표현해 내는 라일리의 머릿속은 정말 다채롭다.(환상적이다라고 말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각 캐릭터의 개성도 적절하게 살아 있고, 꿈에 대한 묘사라든지 어린 시절 상상 속에만 등장했던 코끼리와 고양이와 돌고래를 섞어둔 동물의 등장은 creativitiy 의 절정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추상화시키는 공간' 속에 joy sadness와 상상의 동물이 들어 갔을 때 '형태'를 잃게 되고, 3차원에서 2차원으로 번형되어서  이 되어버리는 scene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상상 속에서 라일리가 자신만을 좋아해 주는 가상의 남친을 설정해 둔 점. 그리고 그 남친들을 쭉 타고 낭떠러지를 건너는 부분은 와~ 대박! 이라는 탄성을 내지르게 해줬다. 연출이 기가 막힌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 중 중요한 부분은 슬픔에 대한 재고이다.

 

기쁨 만을 라일리에게 주고 싶어하는 joy 는 도중에 ‘sadness’을 놔두고 자신만 라일리에게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상상의 동물이 자신이 아끼던 로켓(수레)을 잃어버려 낙심하고 있을 때 그 동물을 위로해 줄 수 있었던 건 joy가 아니라 sadness였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 결국 joy sadness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라일리는 슬퍼야 할 때 그 슬픔을 표출함으로써 가족들로부터 다시 용납을 받는다.

 

이 때 무너져 내렸던 '가족섬'은 다시 생기를 되찾게 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때 ‘핵심기억’이 형성되는데 이건 순전히 ‘기쁨’으로만 구성된 구슬이 아니라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새로운 종류의 구슬’이었다.

(이런 부분들은 '파괴는 진화의 시작이다'라는 문구를 표방한 에반게리온 극장판의 문구라든지, 정/반(테제,안티테제)가 부딪혀 합을 만들어 내는 헤겔의 변증법을 떠올리게 만든다.)

 

 

결국 5가지의 감정들이 더욱 조화를 이루게 되면서 다양한 색이 섞인 구슬 기억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다시 라일리의 인격을 형성하는 들이 더욱 다채로운 모습으로 추가, 진화되어서 라일리라는 존재를 이루게 된다.

 

놀라운 발상이고, 환상적인 표현력이며 재미와 감동이 고루 갖춰진 흠 잡을 게 별로 없는 수작이다.

 

어린이가 이해하기엔 좀 어려울 수 있긴 한데, 그러다 보니 어린이를 데리고 온 어른들이 더 감동을 받는 영화 같기도 하다.

 

그러나 픽사가 워낙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제작진들이다 보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 나오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만들었으니 너희들은 영원히 철들지 말아달라 라는 말 한마디 만으로도 아이들은 이 영화를 이해하기 보다는 가슴으로 느꼈을 거라고 믿는다.

 

이 영화가 시사해 주는 부분들을 짤막하게 나누고 싶다.

 

1.     라일리처럼 사랑을 많이 받고 부족함 없이 자란 가정의 자녀들도 이사’, ‘새로운 친구 관계’, ‘경제적 문제 등의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클 수 있는 이슈들로 인해 얼마든지 감정의 격변을 겪을 수 있고, (라일리 본인의 감정만 놓고 본다면) 죽음에 가까운 고비를 넘길 수 있다는 걸 부모 세대들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절정의 순간, 라일리가 가출을 하고 다시 미네소타로 돌아가는 차를 탔을 때, 그녀의 감정을 control 하는 계기판은 검게 물들어 버리고, 감정이 죽어 버리는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슬픔이 적절하게 표현되고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때 그녀는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두운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2.     마지막에 라일리가 울면서 다시 예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아빠도, 엄마도 힘든데 꼭 그렇게 말해야 겠니? 이 집이 어때서? 이 만한 집도 못 얻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라고 말하며, 가르치려 드는 모습이 아니라, “아빠도 예전 집이 그립구나 라고 말하며 안아주는 부모의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이렇게 성숙하게 자녀들의 감정을 받아주는 부모가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라일리가 복이 많은 것 같다. (부모들이 배울 점이 많은 작품일지도..)

 

3.     감정 캐릭터들의 표현들이 참 놀랍고 재미있었다. 특히 anger 같은 경우는 분노를 표출하면서 자신을 지키려 하고, 충동적인 가출을 실행에 옮기게 만들면서 끊임 없이 자신의 불행을 타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말을 한다.

(ex) 이게 다 부모님 때문이야 라든지.). 분노가 지닌 단점들이 꽤 드러나긴 했지만, joy sadness가 없던 빈 자리에서 그나마 라일리를 지켜줬던 감정이었기에 역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4.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이 '기억'으로 '저장', 그 기억 중에 정말 중요한 기억은 ‘핵심 기억’으로 보관되어 '인격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부분을 멋지게 표현한 점은 이번 [인사이드 아웃]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그 '기억의 구슬'을 보면, 생각보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추억들이 라일리의 '인격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왔음을 알 수 있다. 

 

어릴 때 꽈당 넘어지면서 우연히 넣었던 하키의 첫 골! 이 때 부모님이 아낌없이 칭찬해 주며 잘했다고 말한 덕분에 그녀의 인격에는 하키섬이 생겼다. 

 

또래 친구와의 즐거웠던 시간들이 우정섬을 만들어 주고, 부모님과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 덕분에 가족섬이 생겨났다. 이러한 묘사가 쉽게 이해도 되면서 굉장히 realistic 한 부분이다 보니, 더욱 집중해서 보게 되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생각보다 큰 게 아닐 수도 있다. 

 

특히 유아기, 아동기 시기에 부모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할 것이다. 다양한 섬이 아름답게 조성될 수 있게 힘을 써야 할 것 같다. [오카다 다카시의 서적들을 함께 본다면 이 작품은 단순한 오락영화가 아닌 매우 중요한 심리,발달 영화가 될 것이다.]

 

 

5.     감정 캐릭터들 중에서 주로 부각되었던 건 joy sadness일 것이다. Joy는 행복했던 기억으로만 회상하고 있던 특정 기억이 사실 알고보니 sadness가 힘을 써준 덕분에 발현될 수 있었던 기쁨이었음을 깨닫는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미네소타 주에 있을 때 하키 팀이 플레이오프전을 치뤘는데 라일리가 골을 놓쳤던 적이 있었다. 이 때 상심해 있던 라일리를 부모가 와서 같이 슬퍼해 주고, 위로해 줬기에 라일리는 다시 웃으며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이 기억이 기쁨으로 기억될 수 있었다. 

 

이렇듯, 사람의 감정은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다. 

 

어쩌면 라일리가 어릴 때 형성했던 '인격섬'들은 완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불완전함'들은 '시련' 속에서 '슬픔' 속에서 무너지고 깎이면서 결국 '복합적인 감정들'이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며 통합되는 그 순간, 진정한 라일리 인격체에 맞는 ‘완전한 인격섬’들이 그녀의 존재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다양한 감정이 아우러진 구슬들 중 핵심기억이 생겨나고 이러한 핵심기억들이 인격섬을 형성하게 되자, 어릴 때 단일한 색상의 구슬로 만들어졌던 인격섬보다 훨씬 더 풍성한 인격이 형성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인생의 희노애락이 이 영화에 다  담겨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픽사의 에니는 참 버릴 게 없는 것 같다.

작품의 완성도로 본다면 10점 만점에 9점 이상을 너끈히 줄 수 있는 명작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가족을 돌아보고, 주변 이웃을 돌아보는 좋은 시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특히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양육할 때 참고할 부분이 많다.) 

 

p.s1: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에서 표현하는 joy(기쁨)와는 차이가 있지만 '웃김'만 있고, 우울과 슬픔이 배제되어 버린 세상의 모습은 미티 작가의 네이버 웹툰인 [야부리맨] 15화를 보면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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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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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5 1일 전주 국제 영화제가 열렸었다.

*(이 글은 당시에 남긴 감상문이다.)

 

타임이 3시간 40분에 달하는 영화였다.

 

이 영화의 감독인 안도 모모코는 영화의 여자 주인공인 안도 사쿠라와 친 자매라고 한다. 

 

실제로 노인을 간병해 본 경험이 있는 감독은 그런 부분의 애환을 잘 그려내고 있다. 또한 세계에서 손꼽히는 고령화 국가인 일본에서 노인을 향한 공경심이 사라지고 있는 것에 대한 분노를 응축시켜서 영화 속에 담아 내고 있다.

 

(특히 전쟁을 경험했던 세대들이 사라져 가는 이 과도기적 시점에서 그 시대의 정신과 의지를 잘 이어 나가자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 같은데 이 부분은 마카베 요시오라는 전직 교사였던 할아버지가 나오는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실제로 감독이 만났던 전 해군인 어떤 할아버지가 했던 말들을 대사로 그대로 인용한 거라고 하는데, 이 부분부터 이 영화는 이전에 보여주던 따뜻함을 잃어 버리고 뭔가 갈팡질팡 하는 것 같다.)

 

(막판에 참 묘한 느낌을 주던 영화다) 

 

이 감독은 일본에서도 상당히 주목받고 있고, <0.5mm>는 영화는 일본 영화제에서 늘 10위권 안에 들 정도로 수작이라고 한다.

 

스포일러 성 글이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들은 아래 글은 안 읽는 것이 좋겠다.

 

주인공 사와는 간병인인데, 어떤 집의 여자 주인이 자기 아버님과 하루만 같이 누워서 자 달라고 부탁한다. 섹스를 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냥 같이 누워만 달라고 했는데 막상 누워 보니 그 할아버지는 성욕이 충만했었다. 

 

어쩌다가 실수로 난로가 넘어져서 불이 났는데 아래층에 내려와 보니 그런 부탁을 한 여자 주인(며느리)은 목을 메서 자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집에는 말을 못하는?(안하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여자 주인의 자식이 한 명 있었다.

 

이런 트라우마를 겪은 후에 사와는 3명의 노인을 만난다.

 

노인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첫 번째 노인과는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부르고 논다. -> 이 노인은 자식들이 자기 죽을 날만 기다리며 유산 다툼을 하고 있어서 가지고 있는 돈을 다 써 버리려고 떠돌고 있었던 건데 누군지도 모르는 이 젊은 여자와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 부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마음의 기쁨을 얻는다.

 

 

아마 여자 주인공인 사와도 알게 모르게 같은 연령대의 노인으로부터 힐링을 받았을 것이다.

(이 할아버지는 떠나기 전에 사와의 엉덩이를 만진다.;;)

 

두 번째는 자전거 훔치기를 좋아하고 자존감이 낮은 차 수리 정비공 할아버지가 나온다.

 

이 할아버지의 집에 머물면서 이 할아버지가 훔쳤던 자전거를 다시 원래 자리에 갖다 놓고, 사기꾼에게 돈을 뜯길 뻔 한 것도 사와가 막아준다.

 

이 할아버지도 사와가 옷을 갈아 입을 때 힐끔힐끔 보려고 하긴 하는데, 노골적으로 묘사되진 않는다.

 

그리고 이 할아버지는 자진해서 노인 요양원에 들어가고 자신의 117 쿠페 차를 사와에게 선물로 준다.

 

 

세 번째 만난 노인(마카베 요시오)은 명망 높은 교사라고 하는데 세일러복 입은 소녀를 좋아하는 fetish를 지닌 사람이다. 

 

사와는 이 집에서도 머물면서 여러 가지 도움을 주는데...

 

이 할아버지의 아내는 일찍이 치매가 와서 누워서 지낸다. 젊을 때 성악을 했던 것 같은데 이 할아버지는 아내인 할머니 만나기를 껄끄러워 한다. 이 할아버지는 고집도 세고, 자존심도 세서 자신이 이미 퇴직했다는 것을 집에 숨기고, 늘 출근을 하지만 갈 곳이 없어서 방황하고 있다. 하지만 사와와의 만남 속에서 서서히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는데....

 

 

세 번째부터 해석이 난해해진다. 

 

자다가 이 할머니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고 그러면 그 모습이 부끄러워서였는지, 아니면 자신보다 일찍 정신이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차마 볼수 없어서 그런지 그 할머니의 입을 막으려 하기도 하고..... 그 스트레스로 세일러복 입은 젊은 여자에 대한 fetish 가 생긴 건지, 아니면 이 fetish 가 먼저 생겨서 그 죄책감으로 아내인 할머니를 잘 보질 못하는 건지.......

 

 

 

이 할아버지는 사와가 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흥분하고, 사와의 펜티를 보고 역시 흥분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죄책감이 들었는지 욕실 문 밖을 나서면서 자기 마누라의 환영을 보기도 한다. 그리고 사와를 데리고 갑자기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더니 섹스신이 난무한 이상한 영화를 보여준다. 그러자 사와는 갑자기 허망하게 웃어대면서 영화 보는 도중에 뛰쳐 나가 버린다.

 

그러다가 그 할아버지도 치매가 온 걸 알게 된다. 

 

갑자기 헛소리를 하더니, 사와에게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 부분은 2~3, 많게는 5번 정도 반복되는 말들이 나오는데 전쟁은 무의미하고, 인간은 참 이상한 존재들이고..... 너무너무 죄송하다는 말을 얼굴을 클로즈 업 하면서 보여주는 부분을 보면 일본 감독이 전쟁에 대한 회개를 담은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걸 핵심 주제로 삼기에는 너무 생뚱맞고, 당혹스러운 흐름이다. (내가 영화를 전혀 잘못 이해한 걸까?)

 

그러면서 갑자기 철학적인 나레이션이 길게 이어진다.

 

인간이 자신의 문제, 사적인 감정에 함몰되어 타인을 돕지 못하고 타인을 파멸시키는 이 상황... 어서 이런 모습을 떨쳐내고 모두 한 마음이 되어서 산을 움직이는 위력을 발휘하자는 등의 계몽적이고 진취적인 말들은 이 영화가 섬세한 상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더 큰 실존적, 철학적, 범 집단적인 열심히 이 회복을 감추려고 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일본 특유의 제국주의적, 상명하달, 전체주의적 느낌이 난다고나 할까? 구태의연한 모습의 반복?)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이 영 시원찮다.

 

하지만 이렇게 단정짓기에는 이르다.

 

사와는 다시 처음 말 못하는?(안하는?) 마코토? 라는 남자?(여자?)를 만나게 되고, 걔가 살고 있는 집에 머물게 된다. 그러다가 그 녀석의 아버지와 갈등을 벌이게 되고 뛰쳐 나오는데...

 

결국 마코토는 여자로 밝혀졌고, 말도 할 수 있었던 걸로 밝혀졌다.

 

어린시절 할아버지가 성적으로 더러운 사람이었다 보니 그 며느리이자 마코토의 어머니는 마코토의 머리를 다 밀어 버리고 말도 안 하는 쪽으로 훈련을 시켜서 여자라는 걸 감추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 비극 속에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말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화 속에서 뱉어내는 마코토...

 

이 극심한 트라우마를 지켜보면서 사와는 역설적인 회복을 경험했는지도 모른다.

 

사와는 마코토에게 빨간색 원피스를 건네준다. 이 원피스는 영화 초반에 집 여자 주인이 사와에게 할아버지와 한 밤 잘 때 입어달라고 부탁한 옷이다. 원래는 하얀 옷이었는데 염색을 시켜서 빨갛게 된 거다.

 

그 옷을 받아든 마코토는 엄마를 부르면서 오열하고, 117 쿠페 차 트렁크에서 100만엔을 발견한 사와도 역시 오열한다.  100만엔은 두 번째로 만났던 차를 선물해준 할아버지가 남겨준 깜짝 유산이었던 것이다.

 

이 때 사와는 왜 오열했던 걸까?

 

나는 성적인 해석을 해 봤다. 나이 지긋한 노인으로부터 성적인 트라우마와 학대를 경험했던 사와가 만났던 모든 노인들은 전반적으로 성적인 공격을 사와에게 했었다.(그게 해학적이든, 크든, 작든). 마지막에 마코토의 아버지도 술 취해서 사와의 다리를 만져대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나 두 번째 만난 할아버지는 사와가 느낄 만한 수치심을 주지 않았고, 끝까지 그런 성적 어필 없이 관계를 마무리 지어줬다.

 

이 부분이 떠오르면서 사와는 오열했던 게 아닐까?

 

그리고 마코토와 포장마차에서 우동을 먹으면서 나오는 나레이션에서는 우리는 어린 세대부터 윗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까지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가 겪지 못한 세대를 살아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우리가 알 수 없는 시대가 있었음을 어필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런 식으로 나이든 사람들도 성적으로 비틀려 있을 수 있음을 주인공은 서서히 수용하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극적인 치유가 임한다.

 

그런데 갑자기 과거 회상신이 나오면서 여자 며느리가 흰 원피스를 붉게 물들이는 장면과 마코토가 생리혈을 노출시키면서 여자임이 밝혀지고 생리가 묻은 흰 팬티를 다시 하얗게 만드는 장면을 대비시킨 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이 복잡한 의식의 흐름도 존중하고, 나름의 가치가 있어 보이긴 하는데 한 편으로는 애석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진리는 좀 더 simple 하고, vivid 하고, 명확한 구석이 있는데 말이다.

 

이것이 예술이라면, 난 예술과 별로 친해질 운명이 아닌 것 같다.

 

(p.s: 그래도 안도 사쿠라(여자 주인공)의 연기와 할아버지들의 연기는 아주 훌륭했다. 그래서 몰입감이 높고,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p.s2: 내겐 너무 어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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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테이션 게임]은 상당히 잘 만든 작품이다.

 

마치 존 내쉬의 이야기를 다룬 [뷰티풀 마인드] 와 같은 느낌의 영화인데, 사실 이 영화를 통해 이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게 된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도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바로 [앨런 튜링]이라는 책을 사서 읽었다. 너무 매력적인 인물이고, 이 인물을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했다는 게 더욱 반갑기도 했다)

 

그는 키가 180 c m 정도로 크고 몸집이 컸다고 한다. 

 

그는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뭔가 범상치 않은 구석들이 있었다. 일단 그를 가까이서 알게 되면 재미있고, 도전적인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관계적 친밀함을 맡본 적은 거의 없었던 걸로 보인다.

 

그는 4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타임지]는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되던 때에 그를 라이트 형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DNA 구조를 알아낸 크릭과 왓슨, 페니실린의 발견자인 플레밍 등과 함께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100명 안에 포함시켰다.

 

 

 

그가 도대체 누구이길래, 이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꽤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튜링이 이룬 업적은 실로 굉장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1939~1945년의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의 가장 비밀스러운 코드인 Enigma 일부를 해복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이와 같은 업적으로 인해 전쟁이 2년 정도 일찍 종결될 수 있었고, 통계학적으로 1400만명 정도가 목숨을 건지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천재 수학자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영화 속에서 이와 같은 지구 영웅은 쓸쓸한 말로를 겪어야 했지만, 그가 이룬 업적은 사실 상상 그 이상이었다.

 

또한 이 영화에서는 집중적으로 조명되지 않았지만 튜링은 현대 컴퓨터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응용프로그램을 저장한다는 혁신적 개념이 튜링으로부터 창안되었고, 프로그램이 컴퓨터의 메모리 안에 들어 있어서 우리가 원할 때 바로 일할 수 있게 된 것도 튜링 덕분이다.

 

 

이 영화의 제목인 [이미테이션 게임]은 무엇일까? 일단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점을 알아내는 실험인 튜링 test’라는 것이 있는데 이 천재적인 테스트를 튜링이 개발한 것이다.

 

 

여기서 실험자는 피실험자와 인공지능을 지닌 컴퓨터에게 Questions을 던지는데, 이 때 실험자가 컴퓨터와 피실험자중 누가 컴퓨터고, 누가 인간이지를 구분하지 못할 때 이 인공지능 컴퓨터는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게 된다. 이 부분을 이미테이션 게임’(모방 게임) 이라고 부른다.

 

일단 짤막한 영화 감상문을 나누고(튜링이 이룬 IT 측면의 업적은 잠시 접어두고) 그의 생애와 인간 존재에 대해 짧게 나마 나눠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자.

 

영화는 전반적으로 훌륭하다. 

 

튜링 연기를 맡은 베네딕트 컴버배치라는 인물이 워낙 연기를 잘해 줘서, 영화 전체의 퀄리티를 높여준 것 같다. 영국 드라마 [셜록]에서 열연을 했다고 하는데 필자는 [셜록] 1화 보다가 말아서 그 진가를 알지 못했는데, 이 영화를 통해 잠재력이 터진 것 같다.(요즘은 마블의 닥터 스트레인지로 훨씬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키이라 나이틀리는 우리 나라에서 워낙 사랑받는 여배우이기도 하고, [비긴 어게인] 등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2차 세계 대전을 무대로 하고 있다 보니 분위기가 음울한 편이고, 딱히 Dynamic 한 진행이 나오기 어려운 역사의 한 측면, 인물의 한 시기만을 다루고 있을 뿐인데도 군더더기 없이 유쾌한 요소와 적절한 진지성이 가미되어 이야기의 전개가 매끄럽다.

 

사실 상당히 좋은 작품이고, 몰입도가 높아서 긴 시간 집중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5가지 테마를 가지고 그를 조명해 보자.

 

 

 

[1]‘특별함, 다름의 미학

 

그는 뭔가 남들과 다른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의 수학 선생인 도널드 에퍼슨은 기억하기를 튜링은 가르치기 어려운 학생이었는데, 왜냐하면 자신만의 독자적인 방법들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튜링이 살던 기숙사 사감은 튜링에게 연금술사라는 별명과 함께 명백히도 반사회적이라는 딱지를 붙여줬다. 

 

어릴 때부터 비사교적이고 공상에 잘 빠지던 튜링은 9살의 어린 나이에 기숙학교로 보내졌고, 그 때 괴롭힘과 상급생의 횡포 속에서 사춘기를 보냈다. 그는 직접 개발한 만년필로 부모에게 편지를 쓰곤 했고, 심지어는 그의 발명품에 대한 세부 도면을 보내기도 했다.

 

뭔가 괴짜 같기도 한 그는 영화 속에서는 마치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랬던 그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지적인 안식처를 얻게 되자 노를 젓는 취미 생활도 가지고, 카드 놀이, 테니스도 즐기고 사람들을 사귀기 시작한다.

 

​여기서 '다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사람은 자신과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의 질문이 감정을 배제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을 때가 많고, 엉뚱한 방향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받아야 했던 수 많은 괴롭힘들은 인간이 지닌 씁쓸한 폭력성을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해 준다.

      

그는 분명 뛰어난 구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때론 질투’, ‘시기의 일환으로 그와 같은 공격을 당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거머쥘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해 막연한 분노를 느끼곤 한다.

 

 

분명, 튜링이 사회성이 부족하고, 관계를 맺는 법을 잘 몰라서 수 많은 이들에게 불쾌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도 천천히 배우고, 경험하고, 훈련할 시간을 허락해 주고, 여건을 마련해 준 이들은 과연 어디 있는가?

 

그의 ‘다름’은 삶을 살아가고, 관계를 맺는데 많은 제약을 줬을지 몰라도 결국 그였기에 그와 같이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1939년에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되던 첫 날, 그는 블레츨리 대저택이라고 부르던 버킹엄셔에 있는 빅토리아 시대의 저택으로 거처를 옮기고 타자기처럼 생긴 독일군의 암호화 기계인 Enigma 가 만들어 낸 암호문을 해독하는 전투의 핵심 인물이 된다. 

 

그는 기계를 써서 기계와 맞섰는데 그가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히틀러에 대항한 연합군의 승리를 이끈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었다는 건 그의 다름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결실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이후에 그가 AI(인공지능)에 대한 개척자적 연구를 진행하면서 기계들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세계 최초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체스를 두는 프로그램)을 만들기에 이른다.

 

그는 짧은 인생을 살았다. 때론 오만해 보이기도 하고, 천재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으며, 때론 순수하게, 때론 괴짜같던 그의 인생은 남들과 많이 다른 모습을 지녀서 힘겨웠겠지만 많은 업적을 남기면서 진가를 드러냈다.

 

그 사람은 너무 일반적이지 않아. 그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어. 뭔가 이상해~ 왜 그렇게 살까?” 라고 말하는 범인들 속에서 그는 영화 속 대사처럼 이렇게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이룰 수 있다.’

 

 

[2] 고독, 소외

 

그는 학창시절 타인에게 받아들여 질 수 없었던 인생이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인 1912 6 23일에 런던의 패딩턴 역에서 반 마일 정도 떨어진 워링턴 크레센트 2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인 사라 스토니는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이 많은 집안 출신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줄리어스는 인도의 도시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앨런은 일찍이 특권층의 삶을 누렸기에 요리사도 있었고 하녀들도 있었고 휴가 때는 해외에서 시간을 보냈다.

 

물질적인 어려움은 없었다는 점은 다행이었지만 그의 삶은 거의 고아나 다름 없었다.

 

 

그는 부모가 휴가 때 인도에서 돌아왔을 때만 같이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부모 없이 자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그의 어머니인 사라는 자신이 휴가를 받아서 영국에 돌아왔을 때 하루가 다르게 비사교적이고 공상에 빠져 가는 튜링을 보면서 안타까워 했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의 어머니인 사라는 일을 위해 다시 인도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멀리 사라지는 택시를 쫓아오면서 튜링이 팔을 크게 흔들고 학교 길을 따라 달려 내려오던 기억이 가슴 아프게 남아 있다 고 했다.

 

그가 영화 속에서 유독 기계에 집착하고, 수학과 지적 논의에 집착했던 이유도 그의 선천적인 지적 능력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고독이 영향을 미쳤던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혼자서도 너끈히 살아갈 것 같고, 마치 혼자 살아야 될 것처럼 행동했던 그였지만 결국 영화 속에서 전쟁이 끝난 후 홀로 남겨진 그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외로워 보인다.

 

 

 

그리고 한 때 약혼한 사이였던 조안(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이 방문하자 혼자가 되기 싫다고 절규하기에 이른다.

 

기계와 인간 사이의 Humanoid 같은 그였지만 그는 지극히 인간적인 한 사람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기숙학교에서도 상급생에게 괴롭힘 당하고, 괴짜 같은 기질과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질 못하는 성격 때문에 친구도 없고(어린 시절 부모와의 친밀한 유대가 결여되어 감정 공감 능력이 개발되지 않았던 건 아닌지...), 부모도 멀리 계셔서 거의 고아 수준이었고, 군대 상급자도 그를 쫓아낼 궁리만 했던 걸 보면 그의 인생은 참 외롭다.

 

물론 영화 속에선 같이 비밀리에 일하는 사람들과 초반에는 반목이 심했으나 나중에 가서는 rapport가 어느 정도 형성되면서 사회성이 길러지고, 뭔가 안정감이 느껴지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러나 결국 전쟁이 완료된 후 비밀 유지를 위해 서로 만나기 어렵게 되면서 튜링은 다시 소외와 고독 속으로 침잠하게 된다.

 

그의 전기문을 읽어보면 상당히 쾌할하고, 잘 지냈다는 표현들이 나오긴 하지만 그건 그의 깊은 실존적 공허 외로움을 달래주진 못했던 것 같다.

 

 

[3] 동성애

 

왜 그에게 다음과 같은 성향이 생겼을지 생각해 봤다.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를 이해해 보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라고 받아들여 보자.

 

그는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었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인간으로부터 소외 한 존재에게 처음 다가와 준 (Sex)’ 남성’(Male)이라면,  남성에게 I love you 라는 암호를 보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처음 태어나서 마주하게 된 존재에게 애착이 형성되는 (동물에게 사용하는 표현인) 임프린팅(imprinting, 각인)과도 비슷한 느낌 아닐까?)

 

Male, Female을 구분하는 사회적 규약을 떠올리기 이전에 함께 있음’, ‘타인과의 관계 라는 측면이 제대로 영글지 못한 상태에서 후자가 먼저 채워지는 느낌을 받는다면 전자인 사회적 규약이나 약속’, ‘도덕 등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느낌을 주지 않을까?

 

그리고 그 유일했던 남자 친구가 결핵으로 죽어 버리면서 다시 고립되어 버린 앨런은 자신이 만든 기계에 크리스토퍼라는 그 사랑했던 남자 친구 이름을 붙여서 그 기계와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영화의 장면들이 그의 고독의 깊이가 얼마나 컸으며, 사랑하던 남자의 죽음이 얼마나 큰 상실감을 줬을지를 암시해 주는 것 아닐까?

 

 

동성애 문제로 2년간의 감옥살이와 호르몬 치료를 통한 화학적 거세 중 한 가지를 선택 받아야 할 상황에서 그는 크리스토퍼(컴퓨터 기계)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 화학적 거세를 당한다. 겉으로는 꽤나 잘 나가고, 천재적인 면모를 갖췄을지 모르지만 그의 내면은 초라하고 외로웠기에 그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게 아닐까?

 

[4] 잊혀짐과 드러남

 

튜링의 생전에는 비밀 Enigma 해독으로 인해 알려지지 않았고 영국 정부도 50년간 함구했지만, 드디어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암호 해독으로 인해 2차 세계대전을 2년 앞당겨서 종결할 수 있었고, 1400만명이 생명을 구했다.

 

키이라 나이틀리(조안)가 폐인이 되어 버린 앨런을 찾아 가서, 넌 특별한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너를 보러 오기 위해 기차를 타고 올 때 거쳐온 도시도 너가 아니었으면 다 파괴되었을 것이고, 승무원도 죽었을 것이다. 그런 너가 평범해 지려 하다니.... 라고 말하며 위로해 준다.

 

(여담이지만 영화 속 조안은 조안 클라크라는 실존 인물을 연기한 것이다. 그녀는 잠시이긴 했지만 튜링과 약혼을 했던 대단히 지적인 여성이었다고 한다. 암호해독의 매력에 너무 푹 빠져서 결국 그녀는 1970년대에 은퇴를 할 때까지 계속 이 분야에 남아 있었다)

 

비록 그는 살아 생전에는 제대로 된 영광을 누리지 못했지만, 21세기에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기에 그는 우리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누구도 해낼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해냈지만,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한다는 건 참으로 불행할 것이다. 세상 속에는 그런 모습을 묵묵히 감당해 내는 이들도 드물게나마 있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모든 경우에 튜링처럼 드러남을 맛보게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진정 잊혀져 버리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그들이 흘린 희생 노력 그리고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데 일조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결국 2009년 영국 총리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드러나게 해 줬다.

 

비록 튜링이 그 당시의 법에 따라 다루어졌고 우리가 시계를 뒤로 돌릴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한 치료는 물론 명백히 공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나를 포함하여 우리가 얼마나 깊이 미안해하는지 말할 기회를 가져서 기쁩니다.’

[5] 숙명

 

불꽃처럼 살다 가버린 그의 삶은 어떻게 종결된 것일까?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튜링이 독이 든 사과를 깨물어 먹고 목숨을 끊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사과 속에 청산가리가 들어 있었다고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는 말했는데 실상 당국에서는 청산가리가 들어 있는지 검사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Gossip을 만들어 내기 위해 가상의 이야기가 덧붙여 진 것이라고 그의 전기 잔가인 B. 잭 코플랜드는 이야기 한다.

 

그리고 튜링이 죽기 전 가장 마지막으로 업무 시간을 함께 보냈던 오언 이프라임은 1954년 초부터 멘체스터 컴퓨팅 연구소에서 튜링과 같이 일해온 컴퓨터 엔지니어였는데 튜링은 여느때와 다름 없이 잘 가요라고 말하며 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검사관이나 경찰 중 그 누구도 자신에게 튜링의 태도나 죽기 전 행동 양상에 때해 물으러 오지 않았었다고 진술했다.

 

사인을 밝히려는 조사가 이루어졌다면 자살이라는 결론이 나왔을까?

 

코플랜드는 그렇지 않을 것 같다고 주장한다.

 

사인을 밝히는 조사의 공식적인 자료들은 검시관의 사무실에서 폐기되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튜링의 어머니인 사라가 다양한 문서들의 사본과 병리학자가 만든 보고서의 사본을 가지고 있어서 이를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청산가리 중독은 평화로운 죽음이 아니라 경련을 동반하곤 하는데 그가 죽은 모습은 상당히 정돈되어 있었고, 신발도 가지런히 침실 문 바깥에 놓여져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튜링은 이런 습관을 지닌 적이 없었다고 하니 의혹이 커지게 된다.

 

[1] 자살

[2] 사고사

[3] 모르는 사람 혹은 사람들에 의한 살해

 

일단 자살의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많은 증언들이 있었고, 사고사 또는 살해 등의 가능성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살해 당했다는 [3]번 보기가 상당히 황당해 보일 수 있지만 튜링이 워낙 깊은 영역의 보안을 담당했었다 보니,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와 같은 음모가 계획되었다고 생각해볼 여지는 있을 것 같다.

 

1950년에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미국의 신경질적인 매카시 시대를 열었고 1953년 말경에 매카시즘은 최고조에 달했던  매카시는 국가 안보에 접근하는 것이 허용된 동성애자들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고 선언했는데 그 안보 조직들이 영국에서 비밀 암살을 수행한 건 아닐까?

 

데이비드 콘웰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MI5 MI6에서 일했었는데 2010년에 [선데이 텔레그래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직접적인 작전을 많이 했습니다. 바로 눈 앞에서 하는 암살들.’.....‘우리는 약간은 몹시 나쁜 일도 했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비약일 수 있지만, 이 고백과 튜링의 운명을 연결지어 보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결국 명확한 그의 사인은 미궁으로 남겠지만, 그가 일반적인 한 사람이 이루지 못한 놀라운 일을 감당해 주고 쓸쓸히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했다는 점에서 뭔가 숙명 적인 느낌을 강하게 남겨준다.

 

그의 선천적 기질과 환경적 요인 등이 그리고 알 수 없는 수 많은 상호작용으로 인해 그로 하여금 결코 순탄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남들이 누렸던 소소한 행복은 박탈당한 채 살았을지 몰라도, 그는 남들이 이룰 수 없었던 거대한 업적을 지닌 채 떠났는지도 모르겠다.

 

한 인간을 향한 숙명이었던 걸까?

 

생각이 깊어지는 영화다.

 

(여담 2: 영국의 체스 우승자였던 휴 알렉산더도 영화 속에 등장하는데 그는 실제로 저속한 유머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여담 3: 영화 속에서 튜링이 달리기를 하는 모습이 중간 중간 나오는데, 튜링은 실제로 올림픽 수준의 달리기 주자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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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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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우리 나라 영화 2019년도 작 나를 찾아줘 [Bring Me Home] 과 제목이 같으니 검색에 주의.

(참고로 데이빗 핀처 감독의 여러 작품 중에 [세븐], [파이트 클럽] 은 정말 수작이었다 생각한다. 그의 역량을 믿는다면 일단 믿고 봐도 좋을 것이다.)

 

(벤 애플렉은 요즘 DC에서 배트맨으로 활약 중이고, 로자먼드 파이크는 내겐 생소한 배우였으나 연기력이 정말 압권이다. 이 영화의 가장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을 보시면 영화의 스토리를 다 알게 되어 버리니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은 절대로 보시 마세요-

 

[Amazing Self]

 

데이빗 핀처 감독의 신작이 나왔다. 

 

놀라운 완성도와 치밀한 구성, 배우들의 열연으로 인해 전세계적인 흥행 가도를 달렸던 작품이다. 

 

이 감독의 전작들인 [세븐], [파이트 클럽] 등이 워낙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다 보니 이번 작품도 어느 정도 믿고 본 경향이 강하다

 

이 작품을 보고 나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일단 전체적인 총평을 해보자면, 

 

'단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치 않게 만들고, 짜임새 있는 구성과 연출력이 일품인 영화였다. 또한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정도가 될 것 같다.

 

그러나 필자는 이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인 에이미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을 해보고, 그 이후에 간략하게 고찰해 볼 만한 부분들을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아내의 머릿속을 생각한다. 그녀의 생각, 그녀의 뇌...

 

나는 그녀의 두개골을 열고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그녀의 생각들을 잡으려고 애쓰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에이미,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이와 같은 문구는 영화의 처음과 끝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사랑하는 아내와의 5주년 결혼기념일을 보내려던 찰나에 그녀는 사라져 버린다.

 

이 영화는 초반에는 남편인 닉이 아내를 살해한 게 아닌가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중반 이후에는 충격적인 반전이 시작된다. 그녀는 자신이 살해당한 것처럼 가장하고, 닉을 벌주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생각 없이 봐도 그녀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용어인 사이코패스에 가깝다.

이 영화의 간단한 감상평들을 살펴보면 싸이코 패스 무섭다.”, “결혼이 다 이런건가?” 등의 감상평이 남겠지만 우리는 여기서 에이미의 행동을 좀 더 깊게 들여다 봐야 한다.

 

여기서 키워드로 삼고 싶은 것은 ‘Self’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Self)이 흔들리면 상처를 입고, 그에 따른 reaction을 취하게 된다.

우리들의 인생사란 이 비루하고 연약하기 그지 없는 self를 지키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인 에이미의 self는 어떠한가?

 

 

일단 그녀의 self는 주변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싶어 한다. 

 

모든 사람이 나 이외의 타인이나 주변 환경을 control 하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있지만 에이미는 그게 너무 과도하여 한계점을 넘어선 것 같다. 

 

이는 마치 자신이 신이 되어 모든 것을 다스리고 조종하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극단적으로 발현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또한 그녀의 self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의 self는 한 편의 드라마, 한 편의 연극처럼 꾸며져 있고, 보여주기에 익숙해져 있고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 즉 거짓된 천국과 진실된 지옥이 있다면 과감히 거짓된 천국 속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그녀의 성향이 영화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녀의 self는 자기 감정에 비정상적으로 충실하며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를 드러낸다.

 

이는 경계성 인격장애를 지닌 여성들의 그것과 같은 노선을 보여주는 것인데 자신의 감정이 행복해야 하고, 그게 충족되지 않는 삶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그녀의 태도는 균형감을 잃고 극단으로 치달아 있는 그녀의 기질적 틍성이 잘 반영되어 있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ideal 한 모습을 보여주는 남편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존경하다가도 남편의 작은 허점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남편을 평가절하하기 시작한다. 

 

물론 남자 주인공인 닉이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면서 그녀의 실망과 분노는 극에 치닫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철저히 '아군 아니면 적' 두 가지 뿐인 것처럼 느껴진다.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와 같은 self를 지니게 만든 것일까?

 

영화에서 보여지는 힌트 이외에 우리가 달리 유추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굳이 원인을 찾자면 어릴 때부터 부모가 자신의 딸의 삶을 팔아서 돈을 벌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Amazing 에이미 의 여주인공이었기에, 그녀는 소설 속의 에이미와 현실 속 에이미 사이에서 늘 괴리를 느끼며 살아왔을 것이다.

이러한 삶이 에이미에게 미친 영향력은 철저한 통제 그 자체였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에이미는 소설 속 에이미는 늘 자신보다 한발 더 먼저 나아갔다.“ 라는 말을 한다.

   

그녀의 삶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녀의 부모가 그녀의 삶을 통제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하고 있었고, 더 근본적으로는 소설 속 에이미가 그녀의 existence(실존)보다도 더 존재론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결국 겉으로는 부족함이 없어 보이고 많은 인기를 누리며 살아왔지만 모두가 기본적으로 행사하는 자신만의 free-will(자유의지)이 박탈당한 그녀는 누구보다도 병적으로 주변을 통제하고픈 욕망에 휩싸였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와 같은 life가 펼쳐지다 보니 그녀에게 있어서 삶은 진실 matching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삶은 일종의 연극이자 ‘show’ 였을 것이다.

자신의 내면은 공허하고, 철저하게 초라할지라도 사람들 앞에서 웃어주고, 소설속 에이미를 흉내내면 어린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모두들 그녀를 사랑해줬을 것이다.

 

이러한 show에 익숙해진 에이미는 사이코 같은 모습을 닉에게 잔뜩 보여준 영화가 끝날 시점에서도

 

난 당신을 해치지 않아. 그렇지만 자기도 동참해야 돼. 자기 역할을 해줘야 해.”

 

이라는 소름 끼치는 말을 하며 이와 같은 역할 놀이를 남편에게 제안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닉과 에이미는 그저 보여주기 식의 쇼윈도 부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결혼 생활은 원래 이런 것이다.’를 보여줬다기 보다는 결혼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지닌 사람, 또는 삶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지닌 사람이 '결혼과 삶'이라는 숭고한 개념을 얼마나 무참하게 짓밟을 수  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고, '극단적인 이분법적인 사고관'은 그녀를 둘러싼 환경적인 요인들과 선천적이고 기질적인 원인으로 인해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싸이코 같은 계획으로 자신의 남편을 세계에서 가장 초라한 남자로 추락시켜 버리고, 그의 목숨도 교수대에 올릴 뻔 했던 계획이 들통난 이후에도 자신의 남편에게 예전의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오라는 황당한 제안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비정상적일 정도의 '통제 욕구'와 함께 '자신의 감정이 행복해지는 지점'만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제안하는 그녀의 모습은 사실 정상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자기 감정이 무너져 내렸다고 전 국민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이면서까지 복수를 꽤한다는 것 자체도 극도로 ‘자의식’이 강해져서 그 정도가 pathologic(병적인) 한 지점까지 가 버린 것이라고 해석 가능하다.

 

이러한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에이미는 그녀 만의 amazing self를 획득하게 되는데 결국 이 모든 self의 특성들은 ‘anger’로 귀결되고 만다.

  

영화 도중에 그녀는 자신이 살해 당했다는 언론 보도가 퍼져 나가도록 유도하고, 전혀 다른 지역에 숙박하면서 자신만의 치밀하고 광적인 계획을 즐긴다.

 

그곳에서 골프를 치며 하는 말은 나는 슬프지 않다. 단지 화가 나 있을 뿐이다.’'  .

 

그녀를 형성하는 독특하고 기이한 self들은 결국 ‘anger’로 수렴해 버리고 이는 뛰어난 그녀의 지능’(하버드대 졸업)과 접목되어 잔혹하고 끔찍한 살인 계획을 저지르게 만들어 버린다.

 

이와 같은 치밀한 살인 계획가 충격적인 사기극이 가능했던 것은 기이한 self’들이 anger로 수렴됨과 동시에 그녀의 사이코패스 적인 기질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그녀의 사이코패스(또는 소시오패스 또는 반사회성 인격장애) 기질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녀만의 독특한 self를 형성했던 주변 상황들도 원인이 될 수 있겠고 선천적인 그녀의 성향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소 닉이 바람을 피웠다든지, 결혼 초창기처럼 닉이 그녀를 사랑해 주지 않아서 그녀가 사이코패스가 된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녀는 전 남친인 토미를 강간범으로 모함해서 그의 인생을 망가뜨린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DSM IV 기준으로 반사회성 인격장애의 정의를 살펴보도록 하자.

 

미국 정신의학계에서는 전문가의 진단을 위한 DSM-IV-TR 진단기준, ICD-10 진단기준 등을 가지고 있다. 반사회성 인격 장애의 진단에 관한 DSM 4 진단기준은 다음과 같다.

 

A.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무시하는 패턴이 15세 이후로 전반적으로 나타나며 다음의 특성 중 3개 이상을 충족시킨다.

법에서 정한 사회적 규범을 준수하지 않으며 구속당할만한 행동을 반복함

개인의 이익이나 쾌락을 위한 반복적인 거짓말, 가명 사용 또는 타인을 속이는 사기 행동

충동적이거나 미리 계획을 세우지 못함

빈번한 육체적 싸움이나 폭력에서 드러나는 호전성과 공격성

자신이나 타인의 안전을 무시하는 무모성

꾸준하게 직업 활동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지속적인 무책임성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학대하거나 절도 행위를 하고도 무관심하거나 합리화하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자책의 결여

 

B. 적어도 18세 이상에게 진단한다.

 

C. 15세 이상에 품행 장애를 나타낸 증거가 있어야 한다.

 

D. 반사회적 행동이 조현증 또는 조증 삽화의 경과 중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변을 철저하게 짓밟으면서도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에이미의 모습을 보면 영락 없는 사이코패스다. 

 

DSM-IV 상으로는 그들은 꾸준하게 직업 활동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미리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에이미와 약간 다르다. 

 

그녀는 굉장히 스마트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울 줄 안다. 물론 자신의 실수로 돈을 다 강탈당한 이후에는 옛 남친을 찾아가서 그의 별장에 있는 CCTV를 십분 활용하여 즉흥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녀는 치밀하다하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치밀하고 스마트한 지능을 바탕으로 높은 위치에 오른 사이코 패스들이 많다고들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해석함에 있어서 사이코패스 였다 라는 제안은 매우 설득력이 높다.

 

그리고 약간 다른 관점으로 그녀를 분석해 본다면 에이미는 경계성 인격장애와 히스테리성 인격장애과 뒤엉켜서 광적으로 표출된 case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Self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고, 극적인 감정의 전환을 보이기도 하며 자신과 소설 속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은 흡사 depersonalization과 흡사하기에 경계성적인 면모도 다분히 보인다.

 

그리고 끊임없이 언론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미지를 체크하고 한적한 곳에 은둔하며 자신의 계획이 진행되는 양상을 TV로 지켜볼 때도 옆에 있는 여자의 Feedback 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그녀가 자신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자 그녀가 마시던 음료가 담긴 컵에 침을 뱉는 행동을 하는 걸로 봐서는 자신이 (좋은 쪽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상황을 극도로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히스테리성 인격장애의 기준 중 하나이다) 또한 옛 남친인 토미와 사귈 때에도 먼저 sex를 하자고 유혹하고 나중에 그를 강간범으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라든지 자신의 외모와 같은 sexual 한 부분을 기회만 되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솜씨를 봐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부적절할 정도로 성적으로 유혹적이거나 자극적이다’, ‘자신에 대한 관심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외모를 이용한다라는 히스테리성 인격장애의 정의에도 어느 정도 부합해 보인다. 

 

또한 자신을 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연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감정을 과장해서 표현한다’, ‘피암시성이 높아서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도 인생을 show처럼 살아가는 그녀와 어느 정도 유사한 구석이 있다. 그리고 남편은 자신에게 질릴 대로 질려 있는데도 닉에게 끊임 없이 이렇게 살아 달라는 제안을 하고, 요구를 하는 모습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실제보다 더 친밀한 것으로 생각한다.’ 라는 히스테리성 인격장애의 요소와 일치한다.

   

그녀는 극적인 감정 변화의 면모가 느껴질 때는 ‘경계성+히스테리성 인격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철저히 자신의 감정을 가린 채 잔인한 행동을 서슴치 않는 모습을 보일 때는 ‘사이코패스’ 그 자체다.

 

지금까지 에이미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에 집중해 봤는데 사실 그녀의 사이코패스 적인 기질을 activate(활성화시키다)시킨 요인을 고민해 본다면 결국 닉과 에이미의 '공동 책임론'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쯤에선 결혼 생활의 중요성을 한번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결혼은 서로를 조종하고,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용납해 주고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살아간다는 이타적인 마음가짐이 선행되어야 하며 많은 갈등들을 ‘communication’(소통)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해결해 나가야 한다.

 

닉이 실직하고 나서 서서히 자신이 원하던 ideal 한 모습을 잃게 되자 에이미는 그런 닉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서히 소통이 흐려지기 시작하는데 거액의 돈을 친정에 보내 드릴 때도 에이미는 닉에게 상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뉴욕에서 미주리로 이사갈 때도 닉은 에이미에게 제대로 상의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소통이 단절되고 서로를 향한 통제욕구가 활성화 되기 시작하면서 보이지 않는 균열이 시작된다. 

 

서서히 상대방의 욕구가 아닌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픈 생각이 강해지기 시작하다 보니 매일 매일의 결혼 생활은 실망과 공허 그 자체였을 것이다. 전과 같이 아내가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게 된 닉은 어느 순간 젊은 여제자와 바람을 피우게 되고, 그 모습에 극도의 배신감과 실망이 폭발하면서 에이미는 사이코패스 적인 기질을 발동시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설 속 에이미처럼 이상적이고 모두에게 사랑 받는 인물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누구와 결혼을 해도 상대방은 내가 원하는 100%를 다 지닐 수 없다는 점을 에이미도 인정하고 들어 갔어야 한다. 그런 배우자를 영화가 끝날 때까지 기대하는 그녀는(그게 진실이 아닌 연극이자 show라 하더라도) 일종의 delusion(망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 없다.

 

 

 

우리에겐 건강한 Self가 필요하다.

이 영화 속 에이미와 같은 반어법적인 Amazing self’ 가 아니라, 상대방의 부족함도 용납해 주고,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한번 더 배려하며 갈등이 생겼을 때 소통에 힘을 쓰는 이 시대의 진정한 ‘The Amazing self‘가 절실하다.

 

그리고 Self Anger로 귀결되지 않고 Self Love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의 노력이나 고행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The Higher existence 로부터 그 축복을 부여받는 것 뿐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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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물이며, 우리에게 배트맨 시리즈로 친숙한 조커다. 대표적인 빌런인 조커가 주인공인 영화라니.... 고담시를 피바다로 만들고, 폭탄을 터뜨리고 군단을 끌고 와서 학살하는 내용일까?

조커가 주인공이라면 누가 조커를 막는단 말인가??

다양한 추측들을 하며 관람하게 된 이 영화는 실로 놀라운 영화였다.

일단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가 어마어마하다. 히스 레져의 조커가 잔상처럼 남을 줄 알았으나, 어느새 호아킨 피닉스는 조커 그 자체였다.

 

 

조커가 조커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일련의 이야기를 담아 내고 있는데, 빌런임에도 마음이 쓰이는 캐릭터다.

이 영화를 본 이들 중 두 가지 관점이 대표적으로 등장할 수 있다.

 

"어떻게 저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느냐, 자신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타인을 해치는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다. 살인은 나쁜 행위이며, 도덕과 질서, 법은 중요하다."

 

"조커의 기분을 알 것 같아. 조커를 이해할 것 같아."

당신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가.

 

첫 번째 관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조커의 행위는 잘못 되었으며 벌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그렇게만 보고 끝내기에는 얻어낼 것이 너무도 많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섬세함을 지닌 이들이 사회 속에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조커가 지닌 '분노'를 깊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늘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한 인간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 주변에 많다.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도 없고, 지위도 없다. 의지할 수 있는 가족도 없다.

TV에 나오는 웨인 같은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은 노력을 안해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니, 가진 자들의 지도, 감독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정말 가난한 모든 이들이 다 그렇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나마 다니고 있던 직장에서도 쫓겨난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다. 괜히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얻어 맞고, 물건도 빼앗긴다.

 

하나 남은 혈육인 어머니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 의지할 친척도 없다.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할 단 한 사람이 없다.

 

 

 

살아가는 단 1분도 행복하지 않은데, 주변에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즐거움'에 맞춰서 자신들을 웃겨 달라고 요구한다. 정신과 약을 먹고, 상담도 받고 싶은데 지원이 끊겨서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대상도 없어진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괜히 시비가 붙어서 또 얻어 맞는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으며 망상 장애에 빠진 엄마는 웨인이라는 TV에 나오는 시장 후보가 자신의 남편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엄마의 망상 속 가짜 남편인 토마스 웨인을 찾아가 보지만 돌아오는 건 조소와 주먹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처럼 동경하던 TV 쇼 진행자 머레이는 TV 에서 자신을 조롱하고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 급격히 무너져 내리는 아버지 상 속에서 그는 아버지로 대변되는 세상, 사회를 향해 광기를 드러내기에 이른다)

 

영화는 갑작스럽게 조커라는 빌런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잔잔하면서도 매우 무겁고,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조커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나간다.

 

그의 어머니는 조커를 해피라고 부른다. 늘 웃으며 살기를 요구하며, 자신의 광대가 되기를 요구하는 어머니는 사실 망상장애+자기애성 인격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집에서 학대를 당하고 있어도 방관했던 사람이며 그 이후에도 자신의 뒷바라지나 맡겨 놓는 '자기 밖에 모르는 엄마' 였던 것이다. 자기애성 인격장애가 있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자신의 존재감을 지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엄마는 자신이라는 무대 위 주인공을 빛내 주고, 존재하게 해 줄 여러 소품 중 하나로서 아들을 대했을 것이다.

 

(늘 아들에게 웃는 모습을 강요하고, 화 내거나 자기 주장을 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엄마의 모습 속에서 엄마가 지닌 지독한 자기애가 확인된다.)

(엄마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나서, 조커는 분노하게 되고 엄마를 죽이기에 이른다. 엄마를 죽인 날은 조커의 마음에 평안을 주는 날이었다.)

영화는 조커의 불안정한 심리를 잔잔하지만 점진적으로 묘사하는데 그의 삶에서 나타나는 망상에 대한 부분은 나름 반전도 있고, 조커의 삶에 슬픔을 가중시키는 요소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성과 관련된 망상은, 그가 처한 절대 고독을 더욱 가중시키며 그녀와 나눴던 대화가 모두 환청이었다는 에서 그는 망상장애를 넘어선 '조현병'과 비슷한 정신증적 증상을 앓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자신이 동경하고, 좋아하던 TV 쇼 진행자로부터 조롱과 놀림을 당하는 그....

자존감이 낮아질 대로 낮아지고, 아무도 기댈 수 없으며 자신에게 요구만 하는 세상을 향해 그의 분노는 갈수록 높아져만 가고 자신을 무례하게 대하고 자신의 깊은 어두움을 들여다 보려 하지 않는 (들여다 볼 능력도 없는) 세상을 향해 행복한 웃음이 아닌 조소를 날리기에 이른다.

 

그가 바라보는 코메디는 주관적이다. 말도 안 되게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며, 공정하지 못한 세상. 자신의 인생을 지옥으로 밀어내기만 하는 세상과 상황 자체가 코메디인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색하게 폭소하는 그의 웃음은 세상을 향한 경멸, 조롱, 회의가 가득 담겨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코메디의 일부일 수 있다.

 

이 영화는 한국 영화 <기생충>과도 일면 겹치는 부분이 있다. 늘 일정 선을 넘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소위 가진 자들의 행동.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선심 쓰듯이 베푸는 아량.

 

 

 

가지지 못한 자들의 피해 의식, 열등감으로만 이 영화를 해석한다면 그 사람은 조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마지막에 조커가 타인의 질문에 대해 "재미있는 조크가 떠올랐는데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답했던 것처럼......

 

웨인 부부가 비참하게 살해 당하고 그 자리에 남겨진 브루스 웨인은 훗날 베트맨이 된다. 브루스 웨인도 사실 피해자다.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할 나이에 부모를 허무하게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브루스 웨인도 부모로부터의 애착 결핍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았을 것이며, 마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커의 입장도 단순하게 보기는 어렵다. 시스템의 문제, 사회 구조적, 제도적 개선이 반드시 필요한 주제임에도 조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깊이 있는 사람들이 너무 희박한 세상이다.

 

브루스 웨인과 같이 물질적 부족함이 없는 삶, 사회적 위치가 낮아본 적 없는 삶만 살아본 이들은 조커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조커' 가 되기 전 '회복된 조커'(나는 이를 'joy' 라고 부른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기독교적 표현으로는 '상처 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 라고도 볼 수 있다.

(타인의 기분에 맞춰 웃는 연기를 하는 '해피', 세상을 향한 분노와 조소가 가득 차버린 냉소적인 '조크' 를 넘어선 참된 기쁨이 가득한 상태로서의 'joy')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며, 물질과 도덕, 법률, 제도의 이면에 감춰진 인간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베트맨이 아니라 '회복된 조커'에게 있다. 하지만, 결국 영화 속 조커는 비슷한 아픔을 지닌 이들에게 모종의 카타르시스만 남긴 채 흑화하고 만다.

 

이 세상 속에 만연한 조커들이 더 break down 되기 전에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조커와 비슷한 삶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삶을 버텨내고 있는 이들이 생각나는 영화다.

 

굉장한 수작이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정말 압권었으며 끔찍한 절망 속에서 추는 조커의 춤은 지독하게 슬프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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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피트의 첫 SF 영화이다.

믿고 보는 명품 배우인 그이지만, 이번 작은 특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SF 영화, 우주라는 배경을 활용한 지극히 심리적인 인간 탐색 영화다.

애착과 자기애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바라봤을 때, 남기는 유산이 상당하다.

상당히 염세적이며, 인간에 대한 알레르기를 지니고 있는 주인공 로이 맥브라이드

그는 마치 감정이 일부 결여되어 있는 로봇과 같이 자신의 일에 열중하며, 주변 사람들을 향한 정서 활동이 철수되어 보이는 유능한 우주비행사다.

 

어머니에 대한 정보는 현저히 적으나, 이 영화는 '아버지' 라는 인물의 중요성을 한껏 부각시킨다.

 

일찍이 자신의 꿈과 야망을 위해 새로운 생명체를 찾아 떠난 그의 아버지는 오랜 기간 가정에 있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주인공 로이는 father hunger 를 지닌 사람으로 자라나게 된다.

 

 

 

애착의 측면에서는 다소 회피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세상을 향한 사회성을 가르쳐 주는 아버지라는 존재의 부재로 인해 그는 세상으로부터 철수된 모습으로 어색하게 살아간다.

사람들을 향해서는 웃는 모습을 보이는 페르조나를 드러내지만 늘 탈출구(exit)를 향해 나아가는 그의 모습 (1인칭 시점으로 영화 초반에 보여주는 카메라 시점이 압권이다.).

심지어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는, 더 나아가 '지구'라는 우리의 삶의 터전 전체에 대한 환멸과 거부를 남기게 된다.

 

그로 인해 주인공 로이는 지구라는 물리적 공간을 벗어나 달을 넘어 화성을 넘어 해왕성까지 뻣어 나가는 우주 비행사의 삶을 살게 된다. 사람들은 이를 꿈과 비전이라 이야기 하지만, 주인공 로이에게 이는 거대한 도피에 불과하다.

심지어 달로 도피 했으나, 지구와 다를 바 없는 시설, 사람이 즐비한 모습을 보며 치를 떠는 주인공의 모습 속에서는 아버지의 환영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하는 처절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로이는 양가감정이 분명하다.

아버지를 그리워 하면서도, 아버지를 증오한다.

자신의 옆에 부재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 하지만 그 분노의 껍질을 벗겨 보면 그 속에는 깊은 상처가 존재한다. 결국 그 상처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려 버린 삶을 살았던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애착의 문제와 자기애의 문제로 씨름하는 로이는 결국 영화의 말미에 아버지와 재회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 또한 애착의 문제, 자기애의 문제가 있었겠지만 영화에서 애착의 문제를 정확히 확인하기는 어렵다. 단지, 자신의 grandiose self(과대 자기)가 충분히 해결되지 않으면서 다소 광적으로 '프로젝트'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묘사될 뿐이다.

 

주인공 로이와 아버지가 끈으로 연결되어 망망한 우주 속을 유영하는 모습은 상징적이다. 물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진 생활을 했으나, 로이의 내면은 늘 아버지와 심리적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부재에 대한 증오, 그로 상징되는 세상을 햠한 환멸, 그를 떠올리게 만드는 타인을 향한 불편한 감정 등이 뒤엉키면서 로이는 끊임없이 싸워 왔다.

인간에 대한 환멸이 가득함에도, 절대적으로 혼자가 된 상태를 견디기 힘들어 하는 그의 모습은 회피적 인격을 지닌 사람의 전형을 보여준다. 강인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묘사되던 그도 아버지 이슈에 흔들리고, 자신이 잘해주지 못했던 옛 연인에 대한 회한을 끊임없이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쯤에서 숙고해 볼 수 있는 건 세대 간의 이슈이다. 그의 아버지는 결국 자신의 이슈(자기애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다.

 

나이는 어리지만, 더욱 성숙한 심리적 성장을 이룬(아버지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주인공 로이는 아버지를 더 성숙한 방향으로 인도해 주려 애쓰지만 결국 그의 아버지는 '자기를 찾는 여정'에 함몰되어 자신의 가족을 포기하게 된다.

 

혹자들은 내리사랑이 가장 고상한 사랑이라고들 하지만 오카다 다카시(일본의 정신과 의사)의 말처럼 자식들의 부모를 향한 사랑은 부모들의 자식들을 향한 사랑을 뛰어넘는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예외들은 분명히 있지만서도 부모들은 더욱 결핍된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욕구를 자식을 통해 푸는 경향이 그 다음 세대보다 더 노골적이고 강한 경우들이 많다. 하지만 자녀들에겐 부모는 우주와 다름 없다. 아버지, 어머니라는 두 우주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와 우주를 지키려 한다. 이 부분은 이후에 관점이 바뀔 여지도 있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로이는 '아버지 이슈'를 극복하게 된다. 아버지를 떠나 보내면서 그의 삶에서는 새로운 눈이 떠진 것이다. 그 동안 삶에 대한 의욕을 전혀 보이지 않던 그는 2번째로 얻게 된 지구에서의 삶에서 새로운 삶의 목표와 방향성을 찾게 된다.

아버지의 관점으로 바라보던 세상이 비로소 자신의 눈으로 바라봐 지게 되면서 그는 일상의 소중함, 옆에 있는 존재의 소중함에 눈을 뜨게 된다. 우주에서 지구에 도착했을 때 처음 손을 내밀어준 타인의 손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로이의 모습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된 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된다.

 

 

때론 미움,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타인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삶, 일상에서 사랑을 나누며 사는 삶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는 귀중한 영화다.

아버지라는 이슈를 극복하고, 아버지를 건강하게 떠나 보내는 훈련이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을 통제하거나, 바꿀 수 없다는 점도 받아들여야 한다.)

혹자들은 영화 [그라비티][인터스텔라]가 합쳐진 놀라운 작품이라고 이 작품을 평가한다. 그라비티에서 보여준 우주의 영상미와 인터스텔라가 보여준 인간에 대한 성찰이 융합된 작품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는 두 영화가 보여준 영역과는 또 다른 인간의 깊은 내면을 성찰하게 만들어 준 보기 드문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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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최초 유화 애니메이션으로 재조명되는 반 고흐의 이야기.

유화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고? 그것도 단편이 아닌 장편 영화를?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정보를 확인해 보니, 제작 기간이 총 10년이 걸렸으며 100명 이상의 아티스트가 참여를 했고, 60000점 이상의 유화 프레임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로 결심한 시점부터 그들의 용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42초 짜리 컷을 스크린에 내보내기 위해 6개월 간 작업을 했다는 인터뷰도 기억이 난다.

 

 

도대체 반 고흐(Van Gogh)가 어떤 인물이기에 수 많은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일부분'을 내어주면서까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려 하는가?

필자가 아는 반 고흐는 약 10년 전에 읽었던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라는 작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작품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들이 가득 담겨 있는데 [러빙 빈센트]와 함께 본다면 감동이 배가 될 만한 작품이다.

 

책에서 반 고흐가 쓴 글을 읽고 나면 그가 얼마나 동생을 아끼고, 마음이 따뜻하고 '그림'에 대한 소명의식과 열정이 강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반 고흐의 이름은 대중들에게도 상당히 친숙하다.

 

[별이 빛나는 밤], [카페테리아] 등의 작품들은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어디선가 한번 쯤은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스릴러와 같은 느낌을 풍기는데, 반 고흐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명확히 결정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죽고 난 이후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영화는 유화 필치로 고흐의 주요 작품들을 보여주면서 전개되기 때문에 매우 독창적이고 참신하다. 기존에 본 적 없는 화면이 구현된다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에는 가산점을 높게 줄 수 있다.

 

배경 음악도 상당히 좋아서 몰입도가 상당하다.

이 작품은 영화표를 구입한 비용이 미안해질 정도로 값어치가 높은 예술이었다.

 

수 많은 아티스트들의 강박적인 집념과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야만 완성될 수 있는 작품이기에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고흐의 명작들이 스크린에 그대로 구현되며, 그의 깊은 내면이 애니메이션 속에 스며들어 있다 보니 이보다 더 멋진 고흐 관련 영화가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다.

 

 

고흐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건 바로 '그림'이다. 그가 남긴 수백 점의 작품들 속에는 그가 걸어온 발자취가 남겨져 있고, 그가 만나왔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95분이라는 시간 속에 상당량 농축되어 담겨져 있다.

고흐는 어떤 사람인가?

수 많은 학자들이 고흐에겐 정신 질환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혹자는 경계성 인격장애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측두엽 간질과 양극성 장애(조울증)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후자에 무게를 두는 편이긴 한데 ([조울병으로의 여행] 참고), 고흐의 말마따나 그는 우울하고 차가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영화에서도 나타나듯 first caregiver인 엄마로부터 충분한 애착 관계를 경험하지도 못했으며 무뚝뚝하고 엄격한 아버지로 인해 제대로 된 인정을 받거나 사회성을 훈련받지도 못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 당하고 매춘부와 얽힌 복잡한 사연도 존재한다.


고갱과의 갈등으로 인해 정서적 고통을 경험하기도 했다.(고흐의 정서 불안정이나 조증 증상으로 인해 고갱이 힘들어 했을 수도 있고, 고갱과의 'fit'이 안 맞았을 수도 있으며, 고갱 쪽 문제가 컸을 수도 있다. 가능성은 여러 가지다.)

 

 


 

수 많은 전문가들은 고흐가 우울증 시기일 때는 작품이 어둡고 음침한 경우가 많았으나 인생 말기에 조증이 오고 나서는 화려한 색채에 과장되고 왜곡된 사물 표현을 하여 격렬한 감정을 표현했다고 분석한다.


자신의 귀를 자르고 나서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으나 당시에는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고 치료제도 변변치 않았다.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자살 하기 전 10년 정도의 기간 동안 대부분의 유명한 작품들을 연달아 그렸으니 이 시기는 경조증, 조증 시기가 주를 이루지 않았나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조증 상태일 때는 몸의 에너지 수준이 증가하고, 활동량이 증가하고, 다양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할 의욕이 상승하곤 함)


[러빙 빈센트]에서도 나왔듯이 그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이다. 하지만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등의 작품에 드러난 그의 편지를 읽어 보면 그는 분명한 노력파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더 나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하고 기존의 '틀'을 판박이처럼 따라가는 그림이 아니라 영혼을 불어 넣은 '그림'을 그리려고 고뇌한 흔적들이 글 속에 가득 담겨 있다.


그는 조증 상태일 때의 광기에 가까운 천재성과 음울하면서도 진중한 노력파이기도 한 두 얼굴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을까?

 

감정의 극심한 요동 속에서 두 가지의 모순된 모습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씨름했을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가슴이 아프다.

 

당시엔 그를 도울 수 있는 의학적 기술도 없었으며, 정신 건강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귀를 충동적으로 자르거나, 극단적인 자살을 선택할 정도로 '충동적인' 일화들과 달리 그는 그림을 통해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어 했고, '깊이가 있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 으로 기억되길 소원했다.


'그림' 속에 영혼을 불어 넣는 '영혼의 화가'이기를 소원했으며, 자신으로 인해 동생 테오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느끼게 된 점에 대해 죄책감과 미안함 마음을 가득 지닌 여린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 속에 위로를 주길 원했던 그의 꿈은 그가 죽고 나서 비로소 실현되었다.


살아 생전에는 가난에 허덕이고, 명성을 얻지 못했던 그의 삶, 충분한 애착을 형성하지 못하고 자신을 지지해주거나 공감해 줄 만한 대상(Object)을 찾지 못해 공허함이 가득했을 그의 정신 건강.

그럼에도 그는 밤 하늘의 '별'이 되리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과 싸우고, 자신의 내면과 투쟁했던 인물이다.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그가 그림 속에 남긴 '깊이와 따뜻함'은 전 세계 수 많은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과 위로를 주고 있다.

 


반 고흐를 기억한다. 그의 지독했던 외로움과 고통들을 위로한다.

그리고 그의 깊이와 따뜻함을 존경한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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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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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봤던 더 리더(The Reader) 라는 영화입니다. 당시에 심리학적으로 접근해서 리뷰를 남겼습니다.

지금에 와서 다시 영화를 본다면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연기도 훌륭하고, 스토리도 깊게 다가오는 부분이 많더군요.

한번 쯤 보시는 걸 추천 드립니다.

 

 

 

1.       남자의 삶의 의미

남자 주인공 마이클에게 있어서 , 삶의 의미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사랑을 했고 , 처음으로 육체적,정서적 친밀함을 누려 봤다. 무뚝뚝한 아버지와 , 아들이 하는 일이라면 늘 싸고 돌기에 바쁜 엄마 , 그리고 살 얼음 같은 남매 지간 그 모든 것들이 식탁 에서의 식사 장면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한 , 정서적 결핍을 누려 오던 주인공이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배우게 되었고 , 15세와 30대의 어찌 보면 경계선에 서 있는 듯한 아슬아슬한 연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 마이클의 마음은 진실성’(authenticity) 이 가득했다.

혹자들은 마이클을 아직 어리고 , 뭘 모르는 사춘기 시절을 삐딱하게 보낸 한 아이로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 하기에 마이클의 태도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도중에 여자 주인공인 한나가 보여주는 이상한 행동 때문에 ,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 그 때 남자의 핵심 질문은 이러한 부분을 잘 나타내 준다. ‘Do you love me’? 라는 질문을 한나에게 던짐으로서 , 사랑을 확증받고 싶어 하는 마이클의 태도가 좋은 예이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면서 몇 가지의 의미가 이에 더해지는데 , 중점적으로 나누고 싶은 부분은 비밀이다. 영화 속에서도 나오듯이 , 학교 수업 시간에 비밀에 대한 개념을 배우는 시간이 있다. 마이클에게 있어서 , 이모 뻘 되는 여인과의 불 같은 정사를 나누는 몇 주간의 시간들은 , 결코 공개할 수 없는 비밀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 학교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 가족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으며 은밀하게 움직이곤 했던 것이리라…. 나중에 이 비밀사랑이 결합된 , ‘비밀스런 사랑이 마이클이라는 주인공에게 미친 영향은 가히 엄청나다. 이 부분을 나누기에 앞서서 , 한 가지 더 덧붙여야 할 남자 주인공의 삶의 의미가 있다면 , 그것은 배신감일 것이다.

왜냐하면 , 그토록 열정을 다해 사랑했던 한나가 말 없이 사라져 버렸을 때 , 남자 주인공이 느꼈을 분노와 배신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컸을 것이기 때문이다. 옷을 다 벗어 버린 체 , 물 속으로 들어간 마이클은 수 많은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아마, ‘생애 최초로 경험해 본 애뜻한 사랑을 물 속에 가라 앉혀 죽이는 시간이었을 것이고 , 커다란 배신감과 분노라는 을 그 은밀한 마음에 덧씌워 놨을 것이고 , 겉으로 보여지는 그의 모습 속에는 , ‘사랑의 감정이 전면적으로 차단되어 버린 ‘emotionless man’ (무감정의 사람) 만 남겨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처음 시작되었던 1995년도의 이야기를 보면,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 버린, 감정이 결여된 휴머노이드와 같은 느낌이 난다. 심지어 그의 딸에게도 그는 무뚝뚝하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아버지였을 뿐이다.

또한, 마이클이 법대에 들어 가게 된 과정들도, 그가 감정을 다루는 일련의 활동들이 아니라, 옳고 그름이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는 (실제적으로 이게 말처럼 되진 않을 수 있겠지만, 표면적으로 봤을 때), ‘감정을 섞지 않아도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부터 이 아이의 모습은 위의 3가지가 결합, ‘사랑이 깊숙한 곳에 억압되어 버린, 분노와 배신감으로 얼룩진 비밀스럽고 알 수 없는 남자라고 볼 수 있다. 법대 안에서, 매력적으로 자신을 유혹하는 여학생이 있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 뭔가를 감추고 있는 사람처럼 살아간다.

그러다가, 법정 재판에 견학 차 방문하여 수년 만에 한나를 만나게 되는 마이클…. 그 순간, ‘비밀’ , ‘배신감’ , ‘사랑이 미묘하게 뒤틀리면서, 복합적인 감정 변화를 경험하고 만다. 사실, 한나가 보고서 작성의 핵심 주모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필체 확인 과정을 하는 장면에서 한나가 주저하는 모습을 통해 마이클은 직감했을 것이다.

 그 동안, 한나가 보여줬던 일련의 모습들….. 가령, 책을 늘 읽어 달라고 하고, 여행을 가서도 메뉴판을 잘못 읽고, 쩔쩔 매던 모습들 속에서, 그녀가 문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손을 들고 그녀를 변호해 주지 못하는 마이클한나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되는 순간, 굵은 눈물 방울이 마이클의 뺨을 타고 흘러 내린다.

 왜 마이클은 그렇게 행동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비밀을 지켜 주고 싶은 것이리라. 철저히 숨기고 싶어하는 그녀의 자존심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까지 그 부분들을 지켜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사랑비밀이 결합되었을 때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비밀로 남을 수 있었겠지만 , ‘배신감이라는 불순물이 개입되고 나서 , ‘사랑은 억압되어 버리고 , ‘비밀무감각’ , ‘무반응으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상처를 , 똑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고 , ‘배신감을 억압해 두고 , ‘비밀스런 사랑만을 떠올리며 그 여인의 선택을 지지해 준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아직 이 남자의 배신감 , 완전히 치유된 상태가 아니다.

또한, 한 가지 더 추가되는 남자의 삶의 의미는 바로 정의’(justice) 일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보여준 배신 행위 , 그녀가 보여준 불의의 모습들이 법대생이 되어 있는 이 남자에게는 분명 내면의 갈등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을 억압 시켜 두고, ‘비밀스런 사랑의 힘을 가지고 다시 한번 옛 열정을 불태워 보는데….. 자신이 예전에 읽어 주던 호머의 <오디세이>,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등의 책을 직접 녹음해서 , 테이프로 만들어 한나에게 보내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한나는 변화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스스로 글을 공부하여, 언어를 깨우치고 마이클에게 편지도 보내기 시작하는데…..

그리고 20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를 몇 주만 남긴 상황에서, 마이클은 한나와 재회를 한다. 이 때, 마이클은 수 많은 갈등 속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한나에게 편지를 받아도 답장을 하지 못하던 그의 모습 속에서 아직도 비밀스런 사랑배신감’, ’정의의 문제가 미묘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신경질 적으로, 편지 보관함을 닫아 버리는 모습이라든지, 그 갈등이 가득 드러나는 표정을 보고 있으면 이 남자의 내면적 싸움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마이클은 한나에게 물었으리라.. ‘옛날 생각을 하느냐?’(나찌 시절)….. 하지만, 한나에게는 그 때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 같다. 한나는 오직 마이클과 보냈던 행복했던 시절들만을 회상했을 뿐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마이클과의 관계를 마이클이 생각하는 것 만큼 크게 여긴 것 같진 않다….. 그 만큼, 마음 문을 닫아 둔, 자기에게 갇혀 살아가는, 어찌 보면 순수한, 어찌 보면 무지한 여인이었으리라.).

글을 깨우치고, 세상을 바로 보기 시작하면서, 이 여인은 비로소, ‘진실한 사랑을 알게 되고, ‘도덕과 정의의 문제를 알아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비록 할머니가 되어 버렸지만, 그녀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 있던 외로운 시절들을 벗어나, 비로소 진실된 나로 새로 태어나, ‘사랑’,  정의’,  도덕을 정립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 이런 내막을 다 알 수도 없고 , 설령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용납하기가 쉽지 않았던 마이클은, 한나와 맞잡았던 손을 놓게 되고 , 그녀의 모습 속에서 , ‘회개’ , ‘용서’ , ‘후회의 모습을 보길 원한다.

이것은 자신에게 행한 배신 행위에 대한 용서와 함께, 어리숙 하지만, 어쨌든 수백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그녀의 행위에 대한 용서도 함께 녹아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의 자살로 이 모든 만남은 마무리가 지어지고, 그 이후에 마이클은 자신의 딸에게 한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자신의 비밀을 공개한다.

더 나아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생존자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공개함으로써 스스로의 치유를 경험한다. 이게 완전한 의미의 치유가 될 수 없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벌어진 사건들과, 이미 겪었던 일들에 대해서 돌이킬 수 없는 인간 존재이기에,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수용하고, 있는 자리에서 그 모든 것들을 견뎌내고자 하는 생의 의지’ , ‘회복으로의 발로가 엿보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자살을 통해 마이클은 배신감의 감정을 작게 나마 치유 받고(그녀는 자살을 통해 용서를 구한 측면도 있을 것 같다.), ‘비밀스런 사랑만은 끝내 변질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남겨 두는 길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2.       여자의 삶의 의미

여자는 순수했다. 그녀의 이름은 한나다. 30대가 되어서도 문맹인 걸 보면, 아마 변변찮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도 일반 사람들과 똑 같은 자아를 지니고, ‘자존심을 지니고 , ‘감정을 지니는 동일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분명 솔직하고, 따뜻한 구석도 많이 있다. 그러나 폴 투르니에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되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자신이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상처를 받게 되어 있다.

이 여인의 삶도 분명 그러한 상처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어리디 어린 꼬마 아이들도 자기가 보지 못하는, 음식점 메뉴판을 잘 읽어 내며 깔깔 거리며 웃고 있는데, 아무것도 볼 수 없고 ,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한나의 모습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마치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 등장하는 어머니가 글을 읽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모습과도 흡사해 보인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끊임 없이 던졌을 그녀에게 있어서, 배우지 못함에 대한 한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나 보다.

그녀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배움’, ‘계몽이 아니었을까…. 더 나아가서는 이 영역이 자신의 정체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말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배움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나였다. 그렇다. 그녀는 이미 시작부터 마이클과 달랐다. 마이클은 사랑을 배움으로써, 상대방을 배려하고 , 생각해 주는 마음이 큰 동력이 되었지만 , 그 당시 한나에게 있어서, 마이클은 수단에 더 가까웠다.

 

 

 ‘배움에 대한 한과 열망을 지닌 나를 위해, 그 아이를 도구로 삼은 것이다. ‘섹스는 그녀가 자신을 찾아 가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래서, ‘책을 읽어 주면, 그 뒤에 잠자리를 같이 하자라는 식으로 rule 을 바꾼 것이리라자신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영역을 십분 활용하여, ‘를 채워 가려는 욕망. 지독하게 에게 집중되어 있던 그녀에게, ‘도덕’ , ‘사회’ , ‘타자’ , ‘에 대한 의미는 희미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어찌 보면 그녀는 경계선에 서 있는 성격 장애를 지닌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도, 지독한 예민함이 바닥에 깔려 있으며, ‘에게 집중되어 있기에 상황을 해석하는 방식도 지독하게 자의적이다.

그래서, 세상과 소통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더군다나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크나큰 상처가 덧붙여져서, 자신의 존재를 바르게 인식하는 게 너무도 약했던 여자…. 그래서 영화 도중에, 마이클이 왜 나만 늘 사과를 해야 하는 거야?” 라고 외쳤을 때, 그녀는 아무도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다.” 라는 말로 응수를 한다.

를 바로 보지 못하고, ‘에 대한 끊임 없는 의문을 품고 있는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 ‘나의 결정그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결과등을 인지하고 수용하기가 쉽지는 않았나 보다. 어찌 보면 지독하게 순수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만큼 무지했고, 또 위험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글을 읽을 수 없다는 게 노출되는 게 두려워, 사무직으로 승진했을 때도 저 멀리 도망가 버렸고, 수용소의 경비원으로 일했을 때도 깊은 사유와 고민을 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철저히 잘 하면 되는 줄 믿고 있었다.

어찌 보면,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 하는, ‘자아 의식’ , ‘자존감이 지독하게 낮은 한 여인일 것이고, 그로 인해 자신이 낮게 평가 받는 것을 두려워 했을 것이며, 그래서 그녀의 삶은 일종의 완벽주의기질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맡은 일에 있어서 만큼은 철저하고, 성실하게 움직였던 것이리라…. 그러한 기질은 결벽적으로’, 자신의 몸을 샤워하고, 씻곤 하는 중간중간 장면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또한 그녀는 시종일관 순진했다. 다른 5명의 경비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부정하고 뒤로 뺄 때도, 그녀는 너무도 천진난만 한 표정으로 자신이 그 일을 했노라고 말하고,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 하는 주장도 펼친다. (도덕적 난제가 담긴 질문일 수는 있지만, 일반적인 상식을 가지고 봤을 때는 너무 기계적이고, 생각 없는 답변이다.).

그러다가, 5명의 경비원들이 한나가 주동자라고 몰아 붙일 때, 그녀는 자신이 문맹인 것이 밝혀지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심정으로 자신이 주동자였음을 시인해 버린다. 그녀의 삶의 의미는 끝까지 . ‘배우지 못한 나’ …. 그게 자신의 인생을 끝까지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것을 중심으로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그러했기에 순수했을지는 몰라도, 그녀의 행동은 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도 능통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타자의 목숨세상의 질서는 그녀에게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배우지 못한 나가 회복되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심지어, 마이클과 불 같은 사랑을 나눴던 것도, 그 당시에는 마이클이 느꼈던 것 만큼 진실한 사랑을 한나는 지니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Do you love me?” 라는 마이클의 질문에, 한나는 아니라고 고갯짓 하려다가, 마이클의 슬퍼하는 표정을 보고 마지못해 끄덕거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또 한번 스스로를 자책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느냐, 그들에게 버림 당하느냐에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데, 또 그러기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자신을 수그리고 남의 감정과 기분을 맞춰 줬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혐오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러한 복합적인 감정 속에서, ‘사랑의 참 의미를 잘 모르던 그녀는 친밀했던 관계를 순식간에 정리하고 너무도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더 이상, 마이클과 친밀해 지다가는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어, 상대방으로부터 버림당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분명한 이유가 존재했고, 그 이유에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행동으로 보이곤 한다. 그녀에게 마이클의 마음은 너무도 부차적인 문제다. ‘배우지 못한 라는 감옥은 그 만큼 단단하고, 두텁다. 그런 그녀가, ‘자기라는 감옥을 깨 부수는 순간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감옥 속에서 녹음 테이프를 받기 시작한 때부터다.

스스로가 글을 깨우치기 시작하면서, ‘배우지 못한 나라는 한과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하고, 감옥을 나오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하기 시작한다. 그녀 스스로는, 수 십년 간 자신을 괴롭혀 온, ‘지독한 정체성 문제가 해결되어서 새롭게 태어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수십 년 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마이클과의 사랑도 새롭게 느껴지고, 풍성하게 와 닿았을 것이고, 자신이 수용소에서 행했던 부도덕하고, 불의한 일들에 대한 깊은 반성의 시간도 가졌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가 원했던 건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지난 과거들을 다 청산하고, 새롭게 인식하고, 처음으로 깨달은 진정한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열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건, 그녀가 지독한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녀가 저지른 수 많은 행각들이었다. 마이클이라는 한 남자가 받은 상처와, 수용소 생존자들이 겪었던 아픔들, 사회의 혼란 등…… 이 모든 것들이 깨끗하게 정리되고 다시 원점에서 시작될 수 있는 세상이라면, 그녀의 다시 태어남은 기쁜 결실을 맺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기에는 그녀가 행한 에 대한 대가’, ‘책임이 너무 무거웠다. 그러면서, 마이클은 끝내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사랑은 했지만,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한나로서도 마지막 희망의 원점이 좌절되는 느낌과 함께,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죄책감도 함께 올라왔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녀에게 있어서 그 죄책감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인식은 했을 것이다. 수용소 생존자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가져다 달라는 말을 통해, 이런 부분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난 죄책감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서 자살을 한 것 보다는, ‘희망이 좌절되어서 목숨을 끊었다고 해석하는 것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그 만큼, 그녀는 자기에게 갇혀 있던 사람인지라, 남을 배려하고, 주변을 돌아보는 의식이 어린 아이와 같았기에, 그런 거창한 도덕적 함의를 지니고 자신을 희생했을 것 같진 않아 보인다.

이제 막 타자’, ‘이웃’, ‘사회를 보기 시작한 그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지독한 희생적 사랑을 가진 한 남자가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희망의 원점은 전능자 하나님께 둬야 마땅했을 것이다. 사람에게 그것을 요구하기에는, 너무 감수해야 할 부분이 많지 않겠는가..). 마이클이 그 희생을 받아 들이길 거절한 부분에 대해서 난 아무런 비난도 할 수 없다.

오히려, 마이클의 선택은 충분히 정당했다고 생각한다. 마이클의 입장에서도, 그녀의 죽음이 시원하게 다가왔을 리가 없다. 그리고 마이클은 알았을 것이다.

그녀가, ‘속죄의 의미보다는, ‘자신의 희망이 말살된 것에 대한 실망이 더욱 컸던 것을…. 하지만, 한나라는 여자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속죄 형태가 된 것이기도 하기에, 마이클은 이 모든 것을 끌어 안고 , 이 삶을 수용한 것이리라….

결국 한나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자기를 찾는 것’. 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하나님에게서 찾았더라면, 이 여자의 삶은 크게 바뀌었을 텐데 ….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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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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