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에 쓴 글입니다.]
*이 글을 쓴지 8~9년 뒤에 다시 읽어 보니, 당시의 신앙관이 상당히 경직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상당히 보수적인 느낌으로 쓰여져 있는데요. 전반적인 기조는 여전히 동의하고 있으나 작품의 완성도나 재미는 정말 높은 작품이니 너무 야박한 느낌의 기독교적 비평에 시험에 들지 않으시길 바라며...
(퍼옴)
<데스노트 감상문>
-앞으로 보실 분은 보지 마시길…-
<흔하디 흔한 감상평>
일단 내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설정에 높은 점수를 줘야 겠다. 많은 이들을 열광시킬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춘 것 같다. 필자는 만화책을 끊었기 때문에 보지 못했고 , 영화와 애니로만 봤었다.
애니의 섬세한 그림체 (뒤로 갈수록 좀 이상한 면도 있었지만..) 와 ,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이 애니의 가장 큰 강점은 역시 ‘소재의 특이성’ 이라고 볼 수 있다. ‘Death Note’ 라는 놀라운 소재를 개발해 낸 것부터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듯한 , 물건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내가 그토록 증오하던 ‘악’ 을 처단할 수 있게 해주는 노트다. 그것도 ‘나의 힘’ 으로 말이다.
더군다나 이 ‘소재의 특이성’ 을 가장 탄탄하게 뒷받침 해주는 이 애니의 핵심적인 요소는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 들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캐릭터들도 물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 줬지만 , 역시 주인공인 ‘야가미 라이토’ 와 ‘L’ 의 ‘두뇌 싸움’ 은 이 애니의 거의 모든 것을 지탱해 준다고 봐도 무방하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법한 ‘치열한 신경전’ .. 더군다나 일본 애니의 특성 답게 ‘선과 악의 모호함’ 이 압권이다.
양쪽 다 나름의 논리가 있고 , 나름의 ‘진리’ 가 있다. 둘은 진지하며 , 둘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이 캐릭터들이 벌이는 ‘두뇌 싸움’ 의 ‘짜임새’ 도 굉장하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 약간 억지인 구석이 있다곤 하지만 ‘소년 탐정 김전일', ‘ 명탐정 코난’ , ‘탐정학원 Q’ 를 뺨 치는 치밀한 스토리 전개는 애니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애니는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한 많은 ‘욕구’ 를 대신 충족해 주는 부분이 많은 듯 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야가미 라이토’ 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 그가 벌이는 행동을 보면서 “넌 안돼… 넌 내가 잘못된 성향이라고 결정 지어버린 영역을 붙들고 , 너무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어” 라고 말하며…. L 이 모든 문제를 종결 짓기를 바랬었다.
야가미 라이토는 현실에 지극히 있을 법한 사람이라고 난 말하고 싶다. 만약 ‘Death Note’ 와 같은 물건이 정말 현실에 떨어진다면 , ‘제 2의 야가미 라이토’ 는 분명 넘쳐날 것 같다. (물론 L 과 대등한 ‘두뇌’ 는 허구적이다…L 은 애니만이 창조해 낼 수 있는 독특한 가상 인물이고…)
(그래도 , well-made Ani 답게 ‘친구간의 우정’ , ‘사랑’ , ‘ 부모와 자식의 사랑’ 등은 나름 빼 놓지 않고 다 이용해 먹고 있는 나름 치밀한 구성을 보라….. .. 중간에 아가페적인 사랑도 나름 나오는 듯 하니….. 4가지 사랑의 개념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기독교 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Death Note>
여기서부터 진짜 이야기를 풀어 나가보자. (기독교인이 아니면 읽기 불편할 수 있습니다.)
일단 ,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라’ (데살로니가전서 5:22) 라는 말씀을 기억해 본다면 , 등장하는 중심 캐릭터가 ‘사신’ 이다 보니 좀 꺼림직한 면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또한 여기서는 ‘죽음’ 이 중심적인 요소로 등장하는데 , 이 애니가 말하는 ‘죽음’ 은 [인생수업] , [상실 수업] 을 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등이 말했던 ‘삶의 한 과정으로서의 죽음’ 아니라 , 말 그대로 ‘사신’ 이 떠오르는 ‘비참한 생의 마감’ 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 가장 핵심적인 소재를 주목하자. ‘Death Note’ 다. 사람이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도록 만들어 주는 Note 인 것이다. 굉장히 신선한 소재이고 , 세상 속에서 ‘악’ 이 팽배하기에 수 많은 ‘자칭 정의의 사도’ 들은 이러한 Note 에 열광할 것이다.
그리고 , 꿈꿔 볼 것이다. “내게 만약 Death Note 가 있다면 , 나도 이 세상의 악을 다 처단하리라…”…“내가 바로 정의다!” 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마치 애니 속의 주인공인 ‘야가미 라이토’ 처럼….
하지만 , 난 이러한 인간의 심리 속에서 큰 문제점을 발견해 보고자 한다.
이 영역은 한 마디로 신의 영역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에게는 , 그저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에 불과하겠지만 , 신의 존재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 애니에 등장하는 ‘Death Note’ 가 어떤 힘을 지닌 것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것이다.
‘완전한 신’ 의 힘이라고 보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 이 있긴 하지만 , 신의 유일한 특권이라고 알려져 있는 ‘생’ , ‘사’ 를 좌지우지 하고 있기에 이 Note 는 ‘신의 힘’ 을 상징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인간이 이 Note 를 가지고 싶어하고 , 키라를 동경하며 지지하는 이유는 넓게는 ‘교만’ 이며 작게는 ‘질투’ 와 ‘탐심’ 이 그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고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질투와 탐심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 어쩌면 그 전부터 우리와 함께 했다. 사탄은 이들을 유혹할 때 이들의 교만에 호소했을 뿐 아니라 이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보다 많이 원하라고 부추김으로써 이들의 질투와 탐심에도 호소했다.
성경에는 질투와 탐심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질투했던 것은 아버지가 그를 편애했기 때문이었으며 , 이들은 탐심 때문에 그를 노예로 팔고 말았다.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으며 , 결국 왕후 이세벨로 하여금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는 계략을 꾸미게 했다. 유다는 탐심 때문에 은 30 냥에 예수님을 배신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마음에 탐심이 들어와 땅을 팔고 받은 돈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숨겼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서 질투와 탐심은 파괴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의 악행이 드러나자 두려움 가운데 살았다. 아합 왕은 전쟁터에서 죽었으며 ,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다. 유다는 자살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꼬꾸라져 죽었다. 성경은 이렇게 경고한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잠언 14:30)
질투(시기) 와 탐심의 대가는 언제나 끔찍하다. 나는 질투하거나 탐심이 가득한 사람이 평안을 누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질투와 탐심은 동일한 게 아니지만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질투할 때 그가 가진 것에 마음을 쉽게 빼앗긴다.
질투와 탐심은 돈에 초점을 맞출 때가 많지만 우리는 아름다움 , 지위 , 소유 , 명예 , 권력 등 다른 것들에도 탐심을 품을 수 있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의 한 형태로 본다.
탐심과 질투는 이기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없는 것을 미친 듯이 추구하게 만든다. (이 애니에서는 라이토가 이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키라(Death Note 를 사용하여 악을 심판하는 신) 가 되고 싶어하고 , 키라를 신으로 떠 받드는 모습들을 보면 세상의 악에 질려 버린 수 많은 사람들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 나 자신이 ‘키라’ 와 같이 되고 싶어하는 , 즉 신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어하는 은밀한 ‘탐심’ 이 숨어 있다.
‘악을 처단하는 권능’ 을 자신이 지녀 보고 싶은 것이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 어떻게 이런 ‘악’ 이 만연할 수 있는 것인가?” 라고 ‘자칭 거룩한 분노’ 를 표출하며 , “그 ‘권능’ 을 내게 주면 내가 더 잘해볼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마음까지로도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 그 공백을 이 가상의 애니가 매꿔 주는 것이다. 애니 속의 ‘라이토’ 가 대신 키라가 되어줘서 세상의 ‘악’ 을 처단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은 대리 만족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 긴박감 넘치는 애니의 구성을 위해 ‘라이토’ 의 행위가 점점 광기 어린 모습으로 변해 가면서 그가 ‘사신’ 으로 묘사되기 시작하고 , 그와 경쟁하고 있는 L 의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도 많이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 분명 ‘악’ 은 없애야 한다고 라이토의 의견에 동의했었으면서 , 어느 덧 뭔가 이상하게 흘러 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 슬그머니 나름 경찰 세력인 L 에게 붙어보는 것이다.
캐릭터의 개성이 워낙 뚜렷하며 , 양쪽 다 나름의 논리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양쪽의 캐릭터로 양분 되면서 각자의 캐릭터를 지지하는 토론 그룹이 형성될 만한 여건이 조성된다. (이런 부분들이 이 애니의 인기를 한 차원 끌어 올려 주는 것이리라..)
이 쯤에서 다시 이야기를 이러한 애니가 탄생 가능케 해주는 ‘인간의 본능’ 으로 모아보자.
아까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 이러한 애니가 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인간의 ‘교만’ 이 모든 죄의 뿌리라는 것을 알려준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오래 전 , 교황 그레고리 대제는 죄를 교만 , 분노 , 질투 , 정욕 , 탐심 , 게으름 , 탐심의 일곱 가지 범주로 나누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들은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 라 불리게 되었다. 성경은 이것들을 정확히 이런 식으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하나하나는 성경에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레고리 대제가 교만을 가장 먼저 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기중심적인 교만은 거의 모든 죄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교만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했다. 이사야가 묘사한 바벨론 왕의 교만한 모습은 사탄의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같아지리라” (이사야 14:13~14) , <여기서 ‘내가’ 라는 말이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에 주목하라. 왜냐하면 교만(Pride) 의 본질은 ‘I’ 라는 중간 철자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 사탄은 자신의 말대로 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아담과 하와의 교만에 호소했다. (창 3:5). 하나님처럼 된다! 얼마나 대단한 유혹인가? 이 운명적인 날 이후로 , 인류는 교만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며 그 결과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다. 성경은 이렇게 경고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6:18)
왜 교만이 그렇게도 파괴적인가?
첫째 , 교만은 우리 눈을 멀게 하여 우리 잘못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교만은 우리가 실제보다 낫다고 말하며 ,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거나 자신의 방법을 고쳐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교만하고 독선적인 바리새인은 “나는 다른 사람을 곧 토색 , 불의 ,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기도했다. 가까운 곳에서 세리는 전혀 다른 태도로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눅 18:11 , 13) 하나님은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지만 교만한 자의 기도는 듣지 않으셨다.
라이토도 동일한 실수를 범하고 있다. 그는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바리새인과 같았던 것이다. 결국 , 초반부에서는 우리가 보기에 그가 선인지 악인지 모호했을지라도 , 스토리가 종반부로 치달을수록 라이토 스스로가 결국 자신이 ‘악의 화신’ 이 되어 가고 있음을 반증해 주지 않았는가? ….
자신은 ‘절대 선’ 이고 , 자신이 생각하는 ‘악’ 은 모두 ‘악’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 “나는 신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의’ , ‘선’ 이고 , 나를 떠나는 모든 것은 ‘악’ 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는 , 결국 죄 중의 가장 큰 죄인 교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둘째 , 교만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단절시킨다.
우리가 교만한 데는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우리의 소유 , 신체적 외모 , 능력 , 사회적 지위 , 성취 등이 그 이유일 수 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 교만은 언제나 우리를 다른 사람들보다 위에 두며 , 그 결과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단절시킨다. 그 누구도 오만하고 교만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 이 애니 속에서 라이토가 키라라는 이름으로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그가 더 이상 나와 동등한 인간이 아닌 한 명의 ‘신’ 으로 탈바꿈 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애니를 제작한 제작진들의 사고는 인간과 신 간의 ‘극명한 차이’ 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오류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꽤나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 가령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 이나 ‘원령공주’ 등을 보면 ‘신’ 이 등장하는데 , ‘전지전능한 신’ 이 아니라 , 무슨 무속 신앙에 나올 법한 ‘잡 신 ‘ 정도로 밖에 묘사되지 않고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해 주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사야 55: 8~9)
계속 ‘신’ 을 ‘인간의 사고’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저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들은 극적이고 흥미로운 애니를 만들기 위해 ‘사신’ 을 등장시키고 , 신의 능력 중 일부라고 볼 수 있는 ‘Death Note’ 를 등장시켰지만 , 그들은 ‘진정한 하나님’ 을 모르고 있다.
그들이 만드는 애니 , 그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관에는 ‘특정한 한계를 지니는 신’ 만이 존재할 뿐이다.
L과 라이토가 한창 두뇌싸움을 벌이고 있을 무렵 , L 은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키라를 생각하면서 “그는 거의 신과 같이 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대목이 나온다. 그 만큼 키라(자신의 라이벌)의 능력이 굉장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사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보다 크게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런데 자신이 두뇌싸움을 하여서 도저히 상대 조차 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전지 전능한 신’ 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적극 부정한다.
‘사신’ 정도의 능력을 지닌 신은 허용하고 , 사람의 목숨을 Note 에 기록만 하면 (그리고 얼굴만 알면) 그 사람을 쉽게 죽여 버릴 수 있는 Death Note 의 존재까지 알게 되었으면서도 (이 정도 영역까지만 믿어도 , 전지전능한 신을 안 믿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 차라리 모든 영적인 세계를 부정하는 유물론자들이라면 부정할 만 하지만 말이다…..
자신이 믿고 싶은 특정 영역까지의 현상 , 상태 만을 인정하고 있는 꼴 아닌가…. 그 limit line 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 , 그들에게 모든 인간을 창조하는 ‘신’ 은 애니의 흐름을 방해하는 재미 없는 캐릭터일 뿐 아니라 , 이 애니를 직접 만든 자신들도 납득하기 어려운 (자신의 사고로는 이미 허용해 줄 범위를 넘어서 버린) … 말 그대로 말이 안 되는 캐릭터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신의 영역’ 을 애니의 흥미를 위해 이용하면서도 , 정작 ‘진정한 신’ 을 믿을 생각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인간에 대한 회의가 있었으리라… 2기 OP song 과 ED song 에 묻어 나오는 인간에 대한 환멸 , 인간에 대한 시니컬한 관점들을 보라. 그렇다. 인간에게서 구원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나 보다.)
셋째 , 교만은 우리를 하나님과 단절시킨다.
이 부분은 , 이 애니의 전제 자체가 ‘하나님’ 을 염두해 두지 못하고 있으며 , 오히려 ‘하나님의 영역’ 에 사람을 개입시켜서 이상하게 꼬여 버린 상황을 계속 끌고 나가고 있기 때문에 pass 해야 겠다.
그 다음으로 이 애니 속에 나오는 주인공이 보여주는 ‘분노’ 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라이토가 주장하는 ‘거룩한 분노’ 는 이 애니를 만든 감독의 가치관이 어느 정도 묻어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생각도 반영되어 있을 것이고 말이다.
“선 이 아닌 ‘악’ 이 존재한다면 당연히 분노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뜨거운 남자의 로망을 느끼게 해 준다고나 할까…)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분노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고 분노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대신 일어난 일에 분노하면서 그분을 비난한다.
그 결과 , 이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평안과 기쁨을 잃어버린다. 그렇다. 이런 시나리오가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 분노는 정당할 수 있는가? 물론이다. 우리의 이기심이나 상처 입은 자존심이 아니라 불의로 인한 분노는 성경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의’ 가 무시당할 때 분노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냉혹하게 돈을 착복하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격하게 몰아내셨다. (마 21:12~13).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소위 우리의 ‘의분’ 은 때로 사랑 없는 마음과 독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야가미 라이토가 보여준 ‘의분’ 은 사실 , 사랑 없는 마음과 독선으로 점철되었다고 보여진다. 이것이 인간이 보여주는 ‘의분’ 의 한계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은 ‘거룩한 분노’ 는 라이토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도 시작은 굉장히 의롭지 않았던가?... ‘악’ 을 제거하고픈 순수한 마음도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 그 힘을 손에 쥐어줬을 때 , 그가 보여준 모습을 보라…. 이게 라이토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아마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이 이런 형태의 모습을 취했을 것이다. 아마도…. (성격이 극도로 소심하고 , 겁이 많지 않은 이상은…. 그리고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있다면 이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리고 분노와 비통은 동일한 게 아니지만(이들의 결과인 증오와 시기와 원한 등도 같은 게 아니다)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비통은 상해버린 분노 , 즉 우리의 영혼에 독을 끼치며 우리의 평안을 파괴하는 깊은 불만의 태도이다.
비통하며 맛이 간 그리스도인 = 사탄의 큰 전리품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해 주고 있다.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히브리서 12:15). 분노나 비통이 나 자신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 이 되지 못하도록 막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렇다면 , 하나님을 믿으면 어떻게 분노에 지는 대신 분노를 이길 수 있는가?
성경 속에 좋은 사례가 있다. 베드로의 분노는 그리스도를 위한 담대함으로 바뀌었다. 그리스도인을 향한 바울의 분노는 복음을 전파하려는 불타는 열정으로 바뀌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3~24) …
라이토가 이러한 메시지를 알고 있었다면 , ‘자신조차 제어 못할 광분’ 을 , ‘더욱 건설적인 의분’ 으로 승화시켜서 , 그 열정과 지혜를 가지고 ‘정당한’ 방법으로 세상을 ‘선’ 하게 만들어 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이건 비단 애니 속 캐릭터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할 만한 이야기인 것 같다.
<마지막 여담>
여성 캐릭터를 너무 비하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너무 싫다. 특히 주연급 캐릭터인 ‘미사’ 는 너무 복종적이고 , 너무 맹목적이다. 일본인의 특성이 그렇긴 하지만 , 볼수록 답답하고 , 짜증이 나는 건 나 뿐일까? …. 세련된 그림체와 멋진 음악 , 짜임새 있는 스토리 속에서 남성과 여성을 묘사하는 느낌이나 , 화면 구성이 수준 이하로 비춰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구 시대적 발상이 아닐까?
WRITTEN BY
-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