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이야기 호머의오디세이를 보면, 오디세우스와 그의 전사들은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그리스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들은 위험한 에게해를 항해한다. 수많은 위험을 마주하면서 항해하지만 아마도 사이렌의 섬을 지나는 것보다 더 도전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사이렌은 미래를 알려주겠노라고 약속하는 노래를 부르며, 해안선을 따라 있는 바위 속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노래는 각각의 선원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유혹적이지만, 노래에 도취되어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은 불가피하게 불행한 숙명을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러한 급박한 위험에 대해서 미리 키르케의 조언을 들었기 때문에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에게 밀랍으로 자신의 귀를 막으라고 명령한다.
사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었지만, 그는 부하들에게 자신을 돛대에 묶으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배가 그 섬의 해안선을 무사히 다 지나갈 때까지는 자신을 풀 수 있는 그 어떤 상황도 없게 만든다.
배가 그 섬을 지나가는 동안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의 노래에 완전히 매혹되어서 부하들에게 자신을 풀어달라고 간청하지만 부하들은 오디세우스가 배 바깥으로 뛰어들어서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거절한다.
오디세우스와 사이렌의 노래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은 스스로의 정신력이 갖고 있는 어두운 측면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사람들은 언어적인 지식과 뒤얽혀 있다는 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창세기 이야기처럼 그 이야기는 언어적 지식의 양면성에 대해서 경고한다.
우리는 2개의 핵심적인 과정인 인지적 융합과 경험적 회피, 즉 인간 괴로움에 대한 '사이렌의 노래(Strosahl & Robinson, 2008)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경고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괴로움이 인간 상태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자살이다. 고의적 선택에 의한 죽음은 분명 인간이 살면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놀랄 만큼 많은 사람이 한두 번쯤은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하며, 그들 중 충격적일 만큼 많은 수가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다.
자살은 의식적이고 계획적이며 목적적으로 자신의 삶을 종결짓는 행위이다.
자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사실이 아주 분명하다.
[1] 자살은 인간 사회에서 어디에서나 발생한다.
[2] 자살은 인간이 아닌 다른 살아 있는 유기체에는 분명 없다.
자살에 관한 기존의 이론들은 이 두 사실 모두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랬고, 자살은 모든 인간 사회에서 다 보고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100,000명당 대략 11.5명의 사람이 실제로 매해 자살을 한다. (Xu, Kochanek, Murphy, & Tejada-Vera, 2010)
2007년의 경우 자살 사망자가 거의 35,000명이었다. 자살은사실 유아나 아주 어린아이들에게는 발생하지 않으나, 학령기 초기에는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살생각과 시도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꽤 흔하다. 물질남용 및 정신건강서비스국(Substance Abuse and Mental Health Services Administration)에 의해 위탁된 최근 연구는 8,300만 명에게서 심각한 자살 생각에 대한 연간 귀속 비율을 조사해냈는데, 청소년들의 연간 자살 시도가 약 1.2%에 달했다.
물질남용과 관련된 발생 비율보다 더 높은 수준이었다.(Substance Abuse and Mental Health Services Administration, 2009).
평생 발생률에 대한 연구는 모든 사람의 약 10%는 어느 땐가는 자살 시도를 할 것이며 다른 20%는 자살생각과 싸우다가 결국은 자살을 성공시킬 수 있는 계획과 방법을 생각해낼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 다른 20%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이 자살생각과 싸울 것이다. 그래서 전체 인구의 약 절반은 살아가는 동안 중간 정도에서 심각한 정도에 이르는 수준의 자살 위험성을 겪게 될 것이다. (Chiles & Strosahl, 2004).
자살 위험성을 '비정상'으로 본다면 이 수치는 설명이 잘 안 될 만큼 충격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우리 논의와 관련되어 있는 또 다른 사실은 자살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서는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일반화에 대한 몇 가지 과장된 예외가 주목되기도 하였지만,조사해보니 그러한 예들은 맞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노르웨이 나그네쥐는 아마도 가장 고전적인 사례일 것이다. 나그네쥐는 개체수가 더 이상 유지 불가능한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집단 전체가 혼란스러운 양상으로 달리기를 시작하고 결국은 그 달리기로 인해 다수가 물에 빠짐으로써 죽음에 이른다.
자살은 단순한 죽음뿐만 아니라 그 행동의 의도된 결과로서의 개인적 죽음을 향해 마음을 움직이는 모든 심리적 활동까지도 다 포함한다.
나그네쥐가 물속에 빠지면 그 쥐는 기어나오려고 애를 쓰며, 기어나오는 데 성공하면 살아남는다. 그러나 다리에서 뛰어내리고 살아났다가 그후 곧바로 다시 뛰어내리는 사람에 대한 수많은 입증 사례가 있다.
이 책에서 기술된 접근은 수용 참여 치료(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 또는 ACT 라고 불린다.
ACT는 항상 한 단어로 말하지, 개별 글자로는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도 A-C-T가 우호적인 연상을 거의 떠올릴 수 없는 E-C-T(전기 충격요법의 약자)와 비슷한 소리가 나기 때문일 것이며, 보다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ACT 라는 용어는 이 접근이 자기 삶 속으로의 적극적인 관여를 격려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ACT 관점에서는 인간의 괴로움이 통상적인 심리적 과정들, 특히 인간 언어를 포함하는 심리적 과정들에서 대부분 나타난다고 본다.
생리적인 측면에서의 기능장애가 있을 때조차도 (EX) 당뇨병이나 간질에서의 경우에서처럼), "좋은 의사는 질병을 치료하고, 위대한 의사는 질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한다."는 금언은 유효한 교훈이다.
전술한 의견이 비정상적인 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비정상적인 과정은 분명 존재한다.
누군가가 뇌손상으로 괴로움을 겪고 그 결과로 기묘하게 행동한다면, 통상적인 심리적 과정만이 원인이 되어서 그 행동이 나타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뇌손상으로 발생한 결과를 다루는 데 그러한 통상적인 심리적 과정들이 여전히 관련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더라도 말이다.)
언젠가 조현병, 자폐증, 양극성 장애 등에 대해서도 위 의견이 맞는 것으로 입증될 수도 있다.
그 질환들에 대한 특유하고 민감한 생물학적 표지자가 없다는 점으로 입증되고 있는 바와 같이, 그 영역들에서 유기체 내 단일 병인론에 대한 실제 증거가 매우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심각한 정신질병들과 관련될 때조차도 ACT의 근간이 되고 있는 모형은 자기 반성적 언어와 생각 속에 박혀 있는 일상적 과정들이 실제로는 그러한 질병들과 연결되어 있는 핵심적 어려움들을증폭시킬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더욱 자세한 증거가 필요하면 제13장 참조).
한 개인이 듣는 목소리가 아무리 많을지라도 혹은 그 사람이 경험하는 공황발작이 아무리 여러 번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하는 인간이다.
환각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하고 어떻게 말을 하든, 이를테면 환각은 환각 그 자체에 대해서보다는 건강하게 기능하는 것에 있어 더욱 중요할 수 있다. 그리고 ACT 관점에서는 그 반응이 통상적인 심리적 과정에 의해서 주로 결정된다고 본다.
실제 환자를 진료해 보면, DSM-5 분류체계과 매우 유용할 때도 있지만 상당히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진단 체계라고 느껴질 때도 있다. 칼 포퍼가 말한대로 심리학에 기반한 지식들은 과학의 반열에 올리기가 어려운 건 아닐지 우려가 될 때도 있다. 유용성은 있으나, 이것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다. 이게 정신의학 분야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 답은 틀렸다. 다음 소견들은 DSM-5 판에 대한 미국정신의학회 계획위원회 보고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Kupfer et al., 2002). 이 조직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벨탑을 세운 바로 그 조직이다.
보고서는 이보다 더 나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우리는 가장 혼란스러운 고백의 일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고딕체를 사용하였다.
그러한 증후군들을 타당화하는 일 그리고 공통된 원인론을 발견하는 일의 목표는 여전히 파악이 안 된 채이다. 여러 후보가 제안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DSM 에서 정의한 증후군 중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그 중후군을 확인해내는 데 특화된 실험실 표식을전혀발견할 수 없었다. (p. xviii)
각각의 증후군은 서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원인론을 대표하고 있다는 가설을 훼손시킬 정도로, 역학 연구와 임상 연구들은 장애 간에 극단적으로 높은 정도의 동반이환 비율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역학 연구들은 많은 장애의 경우 단기적인 진단적 불안정성의 비율이 아주 높음을 입증해 왔다. 치료가특이성을 가지지 않는 것은 예외라기보다는 오히려 통례이다. (p. xviii)
대다수는 아닐지라도 조건과 증상은 정상적 행동과 정상적 인지 과정에 대해 다소 임의적으로 정의된 병리를 남발한 것인 경우가 많다. (p. 2)
DSM-IV 정의들을 연구자들이맹종적으로 채택한 일은 정신장애의 원인론에 관한 연구를방해해 왔을 수 있다. (p. xix)
DSM-IV 에 나오는 하나하나의 질병들이 실재하는 질병들이 맞다고 간주되는 순간이 오기 전에는, DSM-IV 안에서 질병들을 더 구체화시키는 것이 연구 발견들을명료화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모호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 (p. xix)
현행 진단 패러다임 안에서의 그러한 모든 제한점은 DSM 에서 정의하는 증후군들을 다듬는 것에만 전적으로 초점을 두고 있는 연구가결코그 증후군들의 근원적 원인론을 밝히는 데는 성공하지 못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근본 원인을 밝히기 위해서는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은 방식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할 수 있다. (p. xix)
보고서는 정직했지만 DSM-5 초안이 발표된 것을 보면 정신과적 질병분류학을 통제하고 있는 DSM 이 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음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Frances, 2010)
진정으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는 점에서는 DSM 작업 집단은 옳았다. 이 책은 그들이 필요로 하던 패러다임 전환을 촉진하기 위한 방법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패러다임 전환은 우리의 내담자들 안에서의 우리의 분야 안에서의 그리고 우리 자신 안에서의 패러다임 전환을 말한다.
그러한 전환은 부분적으로는 추정적인 것이고, 행동적인 것이고, 경험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지적인 것이기도 하다.
더욱 유용하고 통합된 통합된 심리학을 만들어내기 위한 더욱 넓은 범위의 과학적 노력과 연결되어 있는 초진단적 통합 모형을 현장은 필요로 하고 있다.
심리적 괴로움에 대해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접근은 지형학적인 특징들(EX) 징후, 증상, 증후)을 살펴보다 보면 정말로 기능적인 의미의 질병체에 도달하게 된다는 생각에 기초해 있다.
질병에 대한 기능적 접근은 그러한 지형학적인 특징들이 나타나게 된 이유와 그 특징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모두 포함한다. 심리치료 분야는 그러한 가정과 그 가정에서 나온 분석적 책략들에 의해서 완전히 지배되어 왔다.
그런 가정과 책략들의 채택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심리학 연구자나 정신의학적 연구자는 거의 없다. 어떻든 간에 정신의학적 질병이란 것은 실제로는 어떤 실재라기 보다는 신화에 가깝다.
심리학과 정신의학에서 비정상 모형(abnormality model)에 아낌없이 준 터무니 없는 관심을 생각한다면 정신건강 증후군들을 정당한 질병군으로 확립하는 데 있어서 사실상 전혀 진척이 없었다는 점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전신 마비의 진부하고 오래된 예를 이용해서 설명한 후에는 내놓고 말할 만한 그 어떤 다른 성공 사례도 사실상 없다.
불행히도 성공 사례가 없다고 해서 그러한 심리적 증후군들이 곧 개별적인 질병군을 대표하게 될 것이라고 과학자들이 주장하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 막 고비를 넘겼고, 정신의학적 장애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 신경전달물질 혹은 신경조절물질을 발견하기 직전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이젠 수십 년이 지났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런 접근에 회의적이었던 사람들은 그 회의론의 정당성에 대해서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질병 목록을 빠르게 살펴보면 그 이야기가 얼마나 신기루 같은 이야기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가장 흔한 정신건강 증후군 중 그 어느 것도 아직까지 질병 상태로 정당하게 간주될 만한 가장 기본적인 기준조차 충족시키지 못했다.
심지어는 조현병이나 양극성 장애처럼 눈에 확 띄는 장애조차도 가장 기본적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지금까지 나온 DSM의 모든 새로운 개정판은 '새로운' 정신 상태의 조건들, 하위 조건들, 병리의 차원들을 넘치게 포함해 왔다. DSM-5의 초안은 그러한 확장적 경향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인류의 점점 더 많은 수는 주요한 정신의학적 질병분류학의 범위 아래에 계속 있게 될 것이다.
진단적인 확장주의는 그것이 만일 우리의 정신건강 체계가 가지고 있는 전반적 효과성을 증가시킨다면 수용할 만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진단적 확장주의는 그러지를 못했다. 대신에 우리는 바벨탑과 직면하게 되었다. 전반적인 기획 실패들을 위장하기 위해서 엉성하게 기능하는 질병분류학에다가 새로운 차원, 개념, 증상 목록들을 그 탑 안에서 덧붙였다.
현재 사용하는 진단 체계에는 너무나 많은 결함이 있어서 여기서는 일부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장애 간의 '동반이환' 비율은 어마하게 높아서 전체 체계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정의적 통합성을 위협할 정도이다.
예를 들어 주요우울장애는 80%에 달하는 동반이환 비율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놀랄 만하게 높은 비율은 진정한 동반이환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잘못된 진단 체계의 상징이다.
더구나 그러한 범주들이 가지고 있는 치료의 유용성은 현저하게 낮다.
동일한 치료가 여러 증후군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찰 결과는 진단이 가지고 있는 주요한 기능적 목적, 즉 치료 결정의 효과성을 증가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훼손시킨다.
그 체계는 중요한 형태의 심리적 괴로움(관계적 문제, 실존적 위기, 행동적 중독 등)을 묵살하고 있으며 비탄, 두려움, 슬픔 등과 같은 정상적인 삶의 과정조차도 종종 병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같다는 데에 심지어는 그 체계의 옹호자들조차도 동의한다.
사전 지불 정신건강 관리 환경에서 (보험 적용을 받기 위한 '진단'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상황), 심리학적 처치를 받고 있는 내담자의 대다수는 진단이 가능한 조건들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 내담자가 '광장공포증을 가진 공황장애' 혹은 '강박장애'라는 진단명을 받게 된다면 치료는 직장, 아이들, 대인관계, 성적 정체성, 직업상의 경력, 분노, 슬픔, 음주 문제 혹은 삶의 의미와 같은 다른 문제들을 여전히 따로 다루어야만 할 것이다.
슬프게도 인간의 괴로움을 보는 DSM의 시각이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정상적인 어려움들을 점점 더 많이 병리화함에 따라서 행동적 및 사회적 기능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괴로움을 다루는 비서구적 문화의 능력은 향상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빠졌다.
증후에 초점을 두는 접근은 우리로 하여금 증상 감소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심리적 건강의 기능적 및 긍정적 표지들을 경시하게 만들었다.
심리치료의 효과가 기능적 지위와 삶의 질에 대해 일반화되는 정도는 작을 때가 많으며, 증상의 심각성을 측정하는 척도에서만 최대의 효과가 관찰되는 경향이 있다.
증상의 빈도와 심각성이 감소되는 정도는 사회적 기능이나 삶의 질에 대한 광범위한 척도들에서는 중간 정도만의 향상을 보이고 있다.
아직까지는 정신병리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거의 모든 증후군 범주의 거의 모든 특징을 알게끔 의무적으로 훈련받는다.
임상심리학과 정신의학에 관한 연구 저널들은 거의 대부분 증후군에 대한 연구만을 포함하고 있다.
정신건강과학에 투자를 하는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그러한 증후군들에 대한 연구에 대해서만 지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