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예술은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수 많은 예술가들은 음악,그림,조
각 ,건축 등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왔고, 자신이 지닌 신념이나 사상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그와 같은 매체를 활용해 왔다.
예술에 대한 관점들은 시대에 따라 변천해 왔는데 특히 헤겔(Hegel:1770~1881)이 예술을 철학(학문), 종교와 더불어 인간의 고등 정신활동의 하나로 간주한 이후로 예술의 권위는 격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한 예술의 ‘길’을 논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술의 변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실존이 지니는 감춰진 의미를 발견하기도 하고, 삶의 복잡다단함이 예술을 통해 말끔하게 서술되는 듯한 경험들을 하기도 하며, 우리의 감정과 마음이 예술이라는 수단을 통해 때론 강렬하게, 때론 부드럽게 회복되는 걸 느끼기도 한다. 그 만큼 예술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심대하다.
하지만 너무 방대한 지식을 함께 나누기는 어렵기 때문에 ‘미학’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미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작게나마 소통해 보고 싶다.
우리가 어떠한 그림 작픔을 해석함에 있어서 개개인마다 해석하는 방식이 다를 터인데 그렇다고 해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그림의 해석을 맡길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해석에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다양한 견해들이 공존할 수는 있지만, 그와 같은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논리와 합리성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때론 미술은 과학과 교묘하게 손을 잡는다. 일반적인 견해처럼 미술가들은 영감이나 직관, 감정에만 의지해 작업하고, 과학자들만이 지성과 이성으로 탐구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미술과 과학은 역사적으로 상당한 동맹을 맺던 시절들이 있었다.
중요한 미술사의 역사를 언급하는 것도 정보를 제공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르네상스 시대 때미술은 중세 시대로부터 벗어나 창의성과 나름의 독창성을 내세우는 ‘모더니즘’의 길로 입문하게 되었고, 자연을 더욱 합리적이고 이상적으로 구현하고자 노력했기에 수학적인 사고와 지식이 근간이 되는 원근법이나 인체에 대한 생리학적 지식으로 연결되는 해부학의 발전이 미술가들을 통해 이뤄졌었다.
대표적인 미술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술을 과학과 동일시 했으며, 당대의 지도적인 인문학자들도 미술을 응용과학으로 정의하거나 자연철학과 수학에 포함시켰다.
레오나르도는 미술가로서도 천재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과학에 있어서도 시대를 앞선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지식은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해서 지동설을 예측하기도 했으며, 뉴턴의 중력의 법칙이나 하비의 혈액순환이론도 예견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회화는 화가의 마음을 자연의 심성 그 자체로 전환시켜 그를 자연과 미술 사이의 해설가로 만든다. 그것은 자연이 그 법칙에 따라 현현하는 원인을 설명한다”라고 말하며 실상 미술을 과학처럼 취급했다. 이 시기는 16,17세기 즈음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와 같이 미술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인식되던 당대의 분위기는 18세기 이후에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이 즈음을 기점으로 해서 순수미술 개념이 태동하기 시작하면서 작가의 주관성이 강조되고 미학과 낭만주의 사조가 대두되어 지금의 시대에 이르렀다고 보면 될 것이다.
특히 현대에 와서는 좀 더 다양한 해석학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같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류를 따른다고도 볼 수 있겠고, 수 많은 이성주의, 합리주의의 논의 속에 염증을 느낀 학문의 반란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조금이라도 규정되고, 규율화 되고, 제도화 되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하는 현대 사조 속에서 하이데거의 제자이기도 했던 가다머라는 철학자는 “예술작품 앞에는 무한한 해석이 펼쳐져 있기에, 단 하나의 절대적으로 옳은 해석을 내리려 하는 것은 작품의 영원한 생명을 끊어 버리는 짓”이라고까지 말했다.
합리성과 단단한 동맹관계를 유지하며 굳건히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있던 미술은 이런 식으로 심판대에 오르기 시작한다.
가령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등장하면서, ‘무의식’을 활용하여 그림을 해석하는 방식도 등장하게 되었다. 정신분석학적 해석의 전제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면에 감추어진 인간의 무의식이 그림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이론을 펴기 위해 먼저 예술가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곤 했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다빈치가 지닌 기질적 특징인 ‘왕성한 호기심’을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성욕의 변형으로 해석해 버린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다재다능함’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강한 성적 욕구(동성애)가 예술적으로 승화된 형태라는 것이다. 결국 다빈치는 강한 정력의 소유자로 규정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다빈치가 여자를 많이 그렸지만 그들에게서 성적 매력을 느끼지 않았고, 여인과 정신적 혹은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다는 기록도 없으며 단지 선생인 베로키오 집에 머무는 동안 다른 젊은이들과 동성애를 누렸다는 기록만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프로이트의 해석이 묘한 설득력을 지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16~17세기로 다시 돌아가서 다빈치의 그림을 해석하라고 한다면 어느 누가 감히 이와 같은 해석을 꿈꿀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 정도의 변화는 급진적이라고 표현할 수 조차 없다. 그 이후에 전개되는 미술사의 변모는 더욱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좀 더 수려한 비유를 빌려 보자면, 과거의 미술은 세계를 ‘창조’하려 했다면, 현대의 미술은 세계를 빨아들여 블랙홀이 되고 싶어 한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1915년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라는 화가는 하얀 바탕 위에 검은 사각형 하나만 그려 넣고 이 작품을 미술 작품이라고 버젓이 내밀었다. 이와 같이 회화 속에 ‘대상성’이 사라져 버리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진리 미학’은 힘을 잃게 되었고 고전 회화와 달리 현대 회화는 ‘내용’ 자체를 지니지 않는 방향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대상성’이 사라진 추상적인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그림의 본질을 ‘내용의 올바름’에서 찾기 보다는 ‘형식의 아름다움’에서 찾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추상이 극한에 이르다 보니 칸트의 형식미학으로도 서술될 수 없는 ‘모양’과 ‘색’의 끝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곳에는 하얀 바탕 위에 검은 사각형만 남을지도 모른다. 그림 속에서 세상을 끌어 내고, 의미를 부여 하고, 해석을 하려는 모든 시도는 해체되고 그저 모든 세상이 사라지고, 의미는 소멸되며, 해석은 부질 없는 짓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물론 19세기 즈음인 현대 미술사의 역사 속에서 과학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려 했던 ‘신’인상주의와 같은 분파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문자언어’로 쓰인 과학이론을 미술이라는 ‘메타언어’로 옮겨서 세계를 재현해 보려는 그들의 작업은 가상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 자체는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거부했으며, 일상의 사물과 예술작품의 경계는 모호해 져만 갔다.
요제프 보이스는 “모든 사람이 다 예술가다.” 라는 대담한 주장까지 한 걸 보면, 이젠 미술을 바라보는 관점도 크게 바뀌어야 하는 건 아닐까?
미술의 역사, 그리고 미학은 철학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화가들이 자신들의 머릿속에 체계를 미리 정해 놓고 그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려는 ‘표상주의’, ‘재현주의’를 지니고 그림을 그려왔었던 과거와는 달리, 쟈크 데리다나 질 들뢰즈와 같은 해체주의 철학자들은 ‘표상주의적 태도’ 자체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표상주의는 현실의 모든 존재에 잠재해 있는 저마다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목소리’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이미지를 도식(Scheme)이라고 불렀다.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라는 원의 정의가 ‘개념’이라면 그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머릿속에 떠올리는 동그란 형상의 이미지가 바로 ‘도식’이라고 볼 수 있다.
들뢰즈 같은 철학자들은 개념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도식을 새롭게 바꿔 주면 기존의 개념은 파괴되고 새로운 개념이 들어설 것을 기대했다. 그리고 진부하고 일정한 ‘개념’을 거부하는 그의 철학이 미학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쟈크 데리다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학자들은 칸트가 근대 미학을 대변하는 철학자라고들 말한다. 그는 다빈치의 그림처럼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는 예술 작품을 보고도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떤 편견이나 사념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었다. 칸트에겐 나름의 기준이 있었고, 절대성이 있었다.
-쟈크 데리다-
또한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그 작품 자체를 에르곤(ergon)이라 부르고, 그 작품을 둘러 싸는 장식들이나 액자 등을 파레르곤(parergon)이라 부름으로써 이 두 가지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바로 칸트를 포함한 전통적인 사상가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데리다는 미술작품의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을 반대한다.
데리다는 결국 파레르곤이 에르곤에 포함됨을 나름의 방식으로 증명해 낸다. 이와 같은 철학적 논의는 결국 미술 작품 그 자체를 구성하는 어떠한 고정된 의미도 쉽게 ‘해체’시켜 버린다. 이와 같은 ‘해석학적 기법’이 또한 미학 속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일찍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에서 이런 구절로 끝을 맺었었다.
“말할 수 없는 것, 그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이렇게 언어가 침묵하는 곳에서 예술은 시작되며, 언어가 세계에 대해 말을 한다면, 그림은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세계를 ‘보여준다’ 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모든 ‘이해’는 결국 언어적 이해라고 볼 때, 우리는 언어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림을 감상하며 미적인 경험을 강렬하게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언어로 돌아온다.
하지만 해체주의 앞에선 모든 텍스트 또한 그림 작품이 해체되듯이 해체될 것이 자명하다.
이와 같은 ‘해체주의 철학’이 ‘미학’에 미친 영향을 염두에 두면서 다시 현대 미술의 포스트 모더니즘적 분위기로 돌아가 보자.
앞에서도 서술했던 것처럼 현대 미술 그 자체는 너무도 추상화 되어 버리고, 주관성이 강화된 나머지 비평가의 근사한 해석의 도움을 받든지, 아니면 예술가 스스로 이론가가 되어 자기 작품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해 줘야지만 이전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드넓은 바탕 화면에 점을 하나 찍어 두고, 이게 바로 놀라운 미술 작품이라고 주장한다면 어찌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
결국 현대 미술에선 단 하나의 진리가 강요되기 어렵다. 미술 작품을 보는 ‘나’란 존재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 ‘미술 작품’은 ‘완성’되는 것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고정되고 고착되는 것을 거부하는 ‘미학의 길’. 더 나아가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는 것 조차도 ‘언어’의 빚을 지고 엉거주춤 움직여야 한다면 그 ‘해석’ 마저도 ‘해체’시켜 버릴 수 있는 시대.
그게 바로 작금의 미학이 걷고 있는 ‘길’이 아닐까 싶다.
미술이 걸어가고 있는 ‘길’은 과연 이전보다 더 발전된 것일까? 아니면, 더욱 퇴보하게 된 것일까?
모든 것이 ‘해체’되고, 모든 진리가 상대화되고 나면 우리는 진정한 미학의 아름다움에 심취할 수 있게 될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WRITTEN BY
- 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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