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우리네 교회와 목사들에게서 종종 듣는 말이다. 

 

설교 본문만 뽑아놓고, 성령의 음성을 기다려 인도하심을 따라 설교하면 그만이라고.

 

설교 전체 원고를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작성하고 억양과 몸짓을 연습하는 것은 인본주의라 매도한다.

 

이에 대해 이 위대한 사람의 반박은 통쾌하기 그지없다. 

 

성령의 음성을 직접 듣고 인도받는다면, 왜 "굳이 남들에게 해설하려고 나서[는가?]"

 

이는 자기 게으름을 뻔뻔스럽게 포장하려 드는 것으로, 조에 죄를 더하고 만다.

 

기본적으로 청중이 내 말을 알아듣도록 말해야 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횡설수설을 성령의 가르침이라 호도하지 말지니.

 

아우구스티누스는 2권에서 일반 학문의 유용성을 길게 설파한다. 성경도 언어로 기록되었기에 우리식으로 말하면, '국어', '한글' 실력이 있어야 한다. 다른 종교 경전과 달리 성경 66권은 가히 도서관에 해당할 방대한 지식과 학문 분야와 관련되어 있기에 다양한 학문이 성경을 읽는 데 요긴하다.

 

역사학, 음악, 지리학, 식물학과 동물학, 천문학도 필요하고, 논리학과 수학도 쓸모가 많다.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붙는다. 바울의 말을 빌려 하나를 말하면 이렇다.

 

"설사 모든 학문이 허용되나, 모든 학문이 유익하지 않으며, 설령 모든 학문이 나름으로 일리가 있어도 모든 학문이 덕을 세우지는 못한다." (고전 10:23). 대표적인 것이 점성술과 미신 등이다.

 

다른 하나도 바울의 말을 가져와서 말해 보자. 

 

"지식이 많을수록 교만하기 십상이니, 참된 지식이라면 사랑으로 이끌고 덕을 세울 것이다." (고전 8:1)

 

또는 "교만하게 하는 지식보다는 덕을 세우는 사랑을 더 구할 것이다."

 

모든 학문의 도움을 받더라도, 그것은 성경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자는 것이지 성경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아, 책 제목에 쓰인 '교양'의 말뜻을 짚어야겠다. 모든 책은 제목만 보면 단박에 어떤 종류와 주제를 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저자와 편집자는 지나치게 명확히 밝히거나 때로는 은근한 암시로 독자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그리스도교 교양]이라고 했을 때의 라틴어는 'Doctrina'(독트리나)다. 여기서 'doctrine'(교리) 이라는 영어가 파생되었다. 한 때 '교육'이라고도 번역되었는데, 일차적인 의미는 '학문'이다. 또한 그 학문을 '가르치는 것'도 포함한다. 기독교를 학문적으로 설명하고 청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교양'이다.

 

당대 문화에서 저 단어는 '교양'에 가깝다. 이때 교양은 '고전'을 읽고 이해하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기독교 교양'은 기독교의 고전, 즉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고 가르치는 기술을 다룬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1~3권은 텍스트를 읽는 법, 4권은 텍스트를 가르치는 법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그러니까 기독교적으로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를 '읽는 법'에 관한 책이다. 나도 이 책으로 '읽는다는 것'을 말해 보려 한다.

 

중년의 성숙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책에서 발전시킨 탁월한 성취 중 하나는 '향유'와 '사용'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개념이 그의 신학과 윤리학의 요체라 한다. 나는 그것을 이 책의 핵심 주제와 연결하여 '읽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말해 보려 한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김기현 저-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2000년 교회사에서 단 한 사람의 신앙인을 고르라면 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꼽는다.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많은 해설서나 논문에서 "최고의 신학자요 신자"라는 문구를 흔히 본다. 그러니 한 개인에 대한 숭배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허나, 그는 그런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그는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 큰 바위 얼굴이다. 그의 얼굴을 보고 그의 가르침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의 집 마당의 참새처럼 집을 짓고, 제비처럼 새끼를 칠 보금자리를 얻을 테다.

 

그는 사이에 낀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이교도인 아버지와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 사이,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길목, 로마 제국의 해체와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질서 사이, 진리에 대한 무한한 열망과 더불어 세속적 성공과 육체적 욕망에 대한 탐닉 사이에서 쩔쩔 매면서도 어느 하나를 버리지 못한 사람, 하나님을 만나면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라는 선언에 합당한 삶을 산 사람, 그렇지만 이전 것을 버리기보다는 새것의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통합해 낸 기독교 신학의 아버지가 된 사람, 그가 성 아우구스티누스다.

 

그랬기에 그는 [그리스도교 교양]에서 이전 것이 필요 없다고, 버렸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그 흔적과 영향력이 완연하다. 

 

 

4권에서는 설교자에게 성경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성경을 읽고 또 읽는 것만으로 말하는 기술을 습득하는 데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 곳곳에 '수사학의 예문'이 매우 많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귀찮을 정도이며, '수사학의 표본'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런데도 당대 최고 수사학자의 실력을 십분 발휘하여 그 수사학이 기독교 안에서 수용되고 변용되는 탁월한 재구축의 모델을 보여 준다. 고전 수사학이 말한 웅변의 목적은 셋인데, '가르치고, 매료하고, 설득하는' 것이다. 그는 순서를 살짝 바꾼다.

 

아무래도 진리 전달이 초점인 기독교 설교의 특성상, 설득이 매료보다 앞선다. 전달이 우선인 까닭이다.

 

읽는 것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문자를 해독하는 능력이 없으면, 그러니까 국어 실력이 떨어지면 성경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다는 것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혹자는 바울 사도의 말을 인용하면서 문자가 아닌 영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허나, 성경은 언어로 기록된 이상, 그 말과 글을 읽어 내는 능력과 독해 방식을 무시하면 오독하기 십상. 그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 안으로 깊숙이 치고 들어간 다음,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김기현 저-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생각한다는 것은 타인을 배려하는 일이다. 이점은 한나 아렌트 이전, 무려 2500년 전 동아시아 사람, 공자가 말한 바 있다. 

 

흔히들 공자라고 하면 어짊, 곧 인으로 그의 사상의 핵심을 꿰려고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충과 서라고 한다. 그것은 제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고, 스승이 재가하였다.

 

먼저 공자가 자신의 도는 하나로 관통된다고 말한다. 그 말은 퍼뜩 알아차린 제자인 증자가 "예"라고 반응한다. 그러자 공자는 일어서서 나간다.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선문답에 나머지 제자들이 증자에게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증자 왈,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뿐입니다." (<이인편> 15장)

 

충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서는 '헤아리다', '용서하다' 등의 뜻을 지녔는데, 주자의 해석에 따르면 '자기 자신을 헤아려 남에게 베푸는 것'이다. 

 

유학자들은 저기서 충과 서를 각기 다른 두 단어로 볼 것인지, 하나로 볼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 중이다.

 

'전심과 진심을 다하여 남을 헤아리고 베풀라'고 풀이해도 되고, '매사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남의 몸과 마음을 헤아리고, 그에 맞게 베풀며 살라'는 말로 풀어도 되겠다.

 

남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 자신을 유심히 관찰하면 된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할 테니 그것을 행하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할 터이니 마땅히 만나는 사람에게 행하라는 것이다. 

 

산상수훈의 황금률(마7:12)과 닮았다. 공자에게서도 생각은 과학적 합리성에 있지 않고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하는 마음에 있었다.

 

 

내게,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모델은 요셉이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아닌, 예수의 육친 요셉 말이다. 그는 자신과 정혼한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그것은 간음이었다. 파혼은 물론이고 돌로 쳐서 죽일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충성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는 율법에 신실한 유대인으로 자신의 무죄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망신 주고, 마을 어른들에게 끌고 가야 했다.

 

그런데 그는 "생각"한다(마 1:20). 요셉의 생각은 삼단논법과 같은 논리적 규칙을 따르는 사고가 아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느라 사랑하는 여인의 머리에 돌을 던지는 방법을 고안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원래 의미에 맞게 사랑하는 방법에 골몰한다. 

 

사랑하는 아내의 잘못을 무작정 덮지도 않지만, 그를 다치게  하지도 않는다.

 

요셉의 생각함은 마리아를 배려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적으로 생각한다고 했을 때의 생각함은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말씀의 영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나는 우리 한국 사회에 기독교적 지성이 좀 더 많아지길 바란다. 대중적으로 주목받는 작가들은 대부분 무신론자 아니면 불교 계통이다. 기독교인의 활약이 없지 않지만,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능력을 갖췄으면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지능 지수가 높고 공부도 잘해서 문제를 척척 잘 푸는 것보다는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다.

 

의로운 사람 요셉의 사유 방식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라고 바란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김기현 저-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김기현 목사님 책은 워낙 좋은 저서들이 많지만, 이 책도 강력 추천합니다.

글도 잘 쓰시고, 깊이도 있고, 합리적이고, 균형감도 좋은 편입니다. / 몇 가지 부분에서는 약간 견해가 다르긴 합니다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가서 행하라, 그러면 살리니" (눅 10:28, 37 참조). 읽기의 최종 목적지는 '실천'이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 읽기란 정보 습득(information)으로 지성이 확장되고, 세계관이 갱신(reformation)되며, 종내는 삶과 세계의 변화(transformation)를 가져오는 것이다. 무릇 읽기에서 저 셋은 항상 같이 있을진대 그중에 제일은 '변화'다.

 

그러면 읽기가 왜 실천이고, 변혁인가? 문제는 '어떻게'다. 나의 대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냥 주야장천 '읽기'다. 읽은 것이 내가 될 때까지 무작정 읽어대는 것 뿐. 내가 책에 풍덩 빠지고, 책이 내 안으로 흠뻑 스며들기까지 읽는다. 으레 반문한다.

 

"읽고도 안 변하던데요?" 그래도 읽으라.

 

그래도 안 변했다고 느끼면, 이렇게 물어보라.

 

'안 읽었다면 어땠을까? 읽고도 이 정도인데, 읽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다른 하나는 '사랑'이다. 나 아닌 너에게로 향하는 길, 그리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은 사랑의 여정이다.

 

사랑하기에 너를 읽고자 하고, 나를 나로 사랑하기 위해 나를 읽는 거다. 읽기의 최초 출발점이자 최후 도달점은 사랑이다.

 

만남을 지속시키는 힘은 사랑에서 나온다. 사랑이 없으면, 읽기는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읽기에 관한 나의 마지막 말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것이다. 아무리 성경을 읽었어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안다고 할 수 없고, 반대로 성경을 잘 알지 못해도 사랑한다면 그는 성경을 읽은 것과 진배없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듯, 성경 읽기의 최종 규준도 사랑이다.

 

성경 읽기가 사랑에 이르지 못한다면, 사랑으로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없는 율법이고 만다.

 

해서, 그런 읽기는 문자에 묶여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예수를 비난하는 데 골몰한다. 사랑 없는 읽기는 자기 과시 아니면 타인 무시다. 이제야 알겠다, 왜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랑하라, 그리고 네 멋대로 해라"고 했는지. 사랑은 모든 것의 완성일지니, 사랑하면 모든 것을 이룬다.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고, 사랑이 있다면 모든 것이 있다.

 

읽는다는 것, 그것은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사랑하기에 읽는다. 읽으니까 사랑스럽다. 오죽하면 "사랑하다가 죽어 버리라"고 했겠나. 그래, 나는 사랑하다가 죽으련다.

 

그래서 나는 읽고, 읽고, 또 읽는다, 사랑하니까. 

 

읽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을, 너를, 나를, 사랑하니까.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김기현 저-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목회자이면서도, 해박한 지식과 인문학적 소양, 합리적 사고, 논리적 토론의 중요성을 잘 설파해 주시는

한국의 마크 놀 같은 분. 책 자체가 재미있다. [가롯유다 딜레마] 는 김기현 목회자의 초기 서적이면서 그의

진가를 볼 수 있는 주옥같은 작품이다. 그의 다른 저서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상당히 좋다. 

 

깊은 사유와 자신의 삶, 생각이 함께 적용된 그의 독서법의 예시, 적용편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의 독서법은 나도 굉장히 비슷하게 하는 편이고, 이와 같은 실질적인 팁들은 다독, 깊은 독서, 나를 돌아보는 독서를

하는데 실로 유용하다. 

 

이번 글에서도 '마틴 부버'의 '너와 그것'을 활용한 비유.......취향저격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읽다'라고 했을 때, 읽기 대상은 일차적으로 텍스트다.

 

요즘은 '영화'도 읽는다고 하고 '세상'을 읽는다고도 하지만, 읽는다는 것의 일차 대상은 무엇보다 '책'이다.

 

읽는다는 말에 가장 적절한 목적어는 책인 것이다. 책은 내가 아닌 '남'이고 '너'이다. 그렇기에 읽기의 신학적 의미는 '타자'와의 만남이다.

 

읽어야 할 대상으로서 '너'는 누구이고, 무엇일까? (마르틴 부버를 빌자면) 다름 아닌 '너'(Thou)와 '그것'(it)이다.

 

결코 물질화될 수 없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당신'인 책과, 우리가 생존하고 존립하기 위한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사물'인 책이다.

 

마틴 부버 개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향유'와 '사용'으로 구분한다. 반면 '사용'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사물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목적인 책도 있고, 특정한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한 책도 있다.

 

나는 책을 '사람'이자 '사물'이라고 정의한다. '사람'이라 함은 죽은 사물이 아니라 살아서 말을 한다는 뜻이다.

 

책은 내게 말을 건네는 하나의 인격이다. 나와 대화하는 하나의 주체이자 목적이다.

 

'당신'이고 '향유'해야 할 존재다. 책은 내가 달리 어찌할 수 없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인 게다.

 

성경이 그렇다.

 

책은 사물이다. '사물'이라 함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존재 가치뿐만 아니라, 이용 가치도 있다. 내 주인인 동시에 나를 섬기는 종이다.

 

내가 할 말을 위해 인용되고 소환된다. 설교에 '써먹기' 위한 재료요 출처다. 내 필요를 위해 소용되는 하나의 객체이자 대상이다. 내 의도에 따라 굴절되고 편집된다.

 

사람과 사물이라는 이중 속성을 잘 활용하면서 책을 읽어야 한다.

 

나보다 더 권위있고 신뢰를 확보한 텍스트의 말에 그럭저럭 동의가 되면 (약한 것은 연필로, 좀 더 강하면 빨간색 볼펜으로) 밑줄을 긋는다.

 

그분의 말에 지적 충격을 받거나 문장에 감탄하여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뎍여지면 노란색 형광펜으로 그 문장 위에 덧칠한다.

 

 

이건 숫제 외워야 할 문장이다 싶을 땐, 그 둘레에 몇 가지 표시를 해둔다. 나중에 찾기 쉽게 포스트잇도 붙여둔다.

 

저자 혼자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나 역시 반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읽기는 저자와 독자의 대화라는 점에서 책을 사람 대하듯 읽는 방식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밑줄을 긋고 표시하는 것은 설교하거나 글을 쓸 때 쉽고 빠르게 찾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책을 사물로 대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당신'이자 '그것'인 책을 '향유'하고 '사용'하는 법이다. 어떤가, 책과 마주 앉아 몇 시간 데이트를 즐기는 것은.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김기현 저-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심리 치료 전통은 철학 및 신학 저술가들이 '용서'라는 말로 표현한 것과 사뭇 다른 과정 혹은 활동을 용서라고 명명함으로써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용서의 도덕적, 사회적 차원을 강조해 왔다.

 

일반적으로, 용서란 부당 행위자 측의 회개 표현에 대한 피해자의 반응이다.

 

회개와 용서라는 짝은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관계 방식이다. 그에 반해, 심리 치료 문헌에서 '용서'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피해자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비사회적이고 도덕과 무관한 과정이다.

 

심리치료사는, 피해자가 부당 해위자와 어떤 식으로도 관계를 맺지(engage) 않은 채 그와 그의 잘못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피해자가 극복하도록 도우려 한다.

 

피해자의 마음 속에서 마침내 부당 행위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들이 사라지게 되면, 심리 치료사는 피해자가 용서했다고 말한다.

 

부당 행위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극복하는 것이 용서의 구성 요소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부정적 감정들을 극복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앤서니 배쉬(Anthony Bash)는 용서 치료를 다루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안도감과 내면의 평화, 변화되고 재배열된 관계는 용서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도 생겨날 수 있다. 망각, 봐주기, 공모, 부인, 묵인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용서의 전부가 아니다. 용서의 본질은 용서를 못하게 하는 도덕적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다. '용서'라는 용어가 그저 관계적이고 실존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이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들과 그 일을 함으로써 생겨나는 죄책을 다루어야 한다."

 

용서 치료는 지난 일을 그냥 묻어 버리게 한다. 이것은 자신이 당한 일을 잊어버리는 것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용서가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날 때는 지난 일을 묻어 버리거나 떠나보내는 것이 최선이다. 때로는 이런 차선책이 삶을 이어 가기 위한 필수 방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제기했던 도덕적 질문이 어김없이 나타난다.

 

그 일을 그저 지나간 일로 치부해 버리면 그 일과 그 일을 한 사람을 도덕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자신을 비하하고 부당 행위자를 모욕하는 일이 아닌가?

 

부당 행위자의 회개를 용서의 조건으로 삼으면 계속 부당 행위자가 지배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하는 꼴이 된다고 흔히들 말한다. 분명히 그런 부분이 있다.

 

용서가 불가능한 경우, 부당 행위자의 행위를 지나간 일로 묻어 버리는 것으로 부당 행위자의 심리적 지배에서 벗어나려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부당 행위자의 심리적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가 부당한 일을 당했으며 부당 행위자가 여전히 자신이 정당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뉘우치지 않는 부당 행위자는 피해자에게 그런 종류의 도덕적 지배력을 여전히 행사한다. 피해자가 그 일을 잊어버릴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뉘우칠 줄도 모르는 인간에게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도덕적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사랑과 정의]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허버트가 뉘우치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가 자신이 한 일을 여전히 정당하다고 여기는 듯 보이는데도 그 일로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우리를 부당하게 대우한 사람이 뉘우치건 뉘우치지 않건 용서하라는 것이 예수의 명령이라고 내가 믿는다고 해 보자. (신약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은 그렇게 명하신 적이 없다고 책의 저자는 부연 설명을 해 둠)

-> 이 책의 난하주를 읽어 보면 제법 도움 되는 설명들이 부가적으로 나와 있다.

 

나는 뉘우치지 않은 가해자를 그가 내게 한 일로 나쁘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믿는 바에 따라 품고, 그 결심대로 행동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본다.

 

그를 용서하고 싶은 의향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회개가 먼저 있어야 한다. 

 

나는 그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부당 행위자가 여전히 자신의 행동을 정당하게 여기는 듯 보이는 상황에서도 그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려면 용서에 필요한 도덕적 진지함 없이 그 행동이나 그 사람을 대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상황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지 용서는 아니다.

 

"나는 그가 나를 부당하게 대했다고 생각해. 하지만 요란을 떨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봐."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내가 틀렸다고 가정해 보자. 부당 행위자가 어떤 사람을 잘못 대하고도 여전히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음을 잘 아는 경우에도, 그를 온전하고 완전히 용서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해 보자.

 

 

첫째로, 나는 그런 행동이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자의적이라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용서하는 이는 자신을 부당하게 대우한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나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당한 모든 부당한 대우를 다 모른 척할 만큼 도덕절으로 무력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다른 부당 행위자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나쁘게 생각하면서 이 잘못의 경우에는 부당 행위자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가? 도덕적으로 유의미한 어떤 차의점이 있는가?

 

보다 중요한 두 번째로, 부당 행위자의 뉘우침이 없는 상태에서 그의 잘못에 대해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그를 모욕하고 자신을 비하하는 행위요, 그로써 자신과 부당 행위자 모두를 부당하게 대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라. 허버트는 자신이 한 일이 자신의 도덕사에 속한다는 내 생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는 나의 반대로 무릅쓰고 자신이 한 일이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내게 한 일에 책임이 있다는 데는 동의하면서도 그 일에서 무엇이 잘못인지는 모르는군요. 난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내게 한 일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그 일로 더 이상 당신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제부터 나는 내가 당신을 봐줄 경우에 할 만한 방식으로 당신을 대하겠습니다."

 

이것은 나 자신을 비하하는 행위이자 허버트를 모욕하는 처사다.

-> (음.....감정적으로 좀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표현이긴 하지만....허버트가 가해자라는 걸 기억하자)

 

그와 그의 행위를 제대로 도덕적으로 온전히 심각하게 다루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받아친다.

 

"용서는 아껴 두시죠. 난 잘못한 거 없으니까"

 

이 경우에는 허버트와 마찬가지로 그가 저지른 일을 그의 도덕사의 일부로 여기고서, 그가 한사코 부인한다 해도 그 일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편이 훨씬 낫다.

 

리처드 스윈번은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사소한 잘못이 아닌 한, 피해자가 "하다 못해 사과의 형태를 띤 최소한의 보상마저도 없는 상태에서 그 [행위를] 없었던 일처럼 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내가 당신의 아내를 살해했는데 당신이 내 범행을 모른 체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나와 어울린다면, 그 태도는 "인명을 경시하는 일이고 당신의 아내 사랑과 올바른 행동의 중요성을 하찮게 취급하는 일이다. 그것은 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며 내 행동으로 표현된 당신에 대한 나의 태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다.

 

그런 태도는 인간 관계를 하찮은 것으로 취급한다. 서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도 좋은 인간관계가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2부]에 계속-

-[사랑과 정의]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저 -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결국 왜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기독교적 숙고가 없이는 이런 회개니, 용서니 하는 개념이 큰 의미가 없다. 굳이 상담 심리적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괴롭지 않기 위해 용서하기로 했다." 정도의 답변이 최선인데 그것도 케바케다.)

 

 

허버트를 용서하는 것이 내가 말한 바와 같다면, 왜 그런 일을 하는가?

 

우리 사회는 허버트가 내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 그를 탓할 수 없다면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그러나 내가 그를 탓할 수 있다고 믿을 경우라면, 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봐줄 때 할 만한 방식으로 그를 대하려 하는 걸까?

 

나는 내가 당한 일을 기억하고, 계속해서 그 일을 나쁘게 여기고, 분하게 생각한다.

 

나는 그 일을 한 사람이 허버트임을 기억하고, 그가 한 일을 여전히 나쁘게 여기며, 그런 일을 한 그에게 화가 난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대할 때, 그가 한 잘못 때문에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실행에 옮겨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왜 그를 용서한단 말인가?

통상, 내가 허버트를 용서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한 일과의 관계를 그가 도덕적으로 의미심장하게 바꾸었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한 일로 인해 여전히 비난받을 수 있고, 그 일은 그의 도덕성의 오점으로 남아 있다. 그는 그 사실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가 자신이 한 일을 잘못이라고 여겨 나와 생각을 같이함으로써, 그 일로부터 도덕적으로 거리를 두었다고 믿게 된다.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내게 진심으로 말했다.

 

그 잘못이 배상이 가능한 일이라면, 그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배상하겠다고 했다.

 

 

허버트의 도덕적 상태 전반은 그가 회개하기 전과 크게 달라졌다.

 

그는 나를 부당하게 대우한 사람과 도덕적으로 다른 사람, 중요한 측면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일로 더 이상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부당 행위자의 잘못이 심각하지 않고 피해자가 너그러운 사람이라면, 부당 행위자가 뉘우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경우에 용서가 수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했다시피, 흔히 용서에는 수고가 필요하고, 많은 이들은 그 수고를 감당하지 못한다.

 

많은 피해자들이 부당 행위자가 뉘우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도무지 용서하지 못한다. 마음 한 켠은 용서하고 싶어 하지만, 아무래도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할 수가 없다.

 

혹은 용서하기로 마음먹어 보지만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용서는 종종, 어쩌면 대체로, 부분적이며 종종 느리고 어렵다.

 

-[사랑과 정의]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저 -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