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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주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행한 모든 그릇된 일이 그의 도덕성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허버트의 행동이 누군가를 부당하게 대우했다면, 그 일은 허버트의 도덕사에 속한다.

 

그의 도덕성에 오점을 남긴다.

 

봐주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런 사회가 아니다.

 

부당 행위자를 용서하는 것은 그를 봐주는 것과 다를 뿐더러 봐주면 그를 용서할 수 없게 되지만, 용서와 봐주기에는 닮은 부분이 있다.

 

부당 행위자의 행위가 그의 도덕사에 부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개인사에서 남에게 해를 끼친 요소일 뿐인 경우에 대할 만한 방식으로 그를 대하겠다는 결심을 실행에 옮긴다는 점이다.

 

부당 행위자를 봐주지 않으면서도 그를 봐준다고 할 때 기대할 법한 방식으로 그를 대한다는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것인데, 물론 용서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부당 행위자가 한 일에 대해 그를 봐주면 안 된다고 믿는다는 차이가 있다.

 

 

철저하고 완전한 용서는 실제로는 그를 봐주지 않으면서도 봐줄 때 할 만한 방식으로 그를 대하는 일과 아주 비슷하다.

 

-> (이것이 바로 똘레랑스의 정신 아닐까? 그냥 쉽게 관용하는 게 아니라 혀를 깨물고 피가 날 정도로 이를 꽉 물면서 저 괴물같은 자를 견디며 보통인 것처럼 대하는 것...... 미쳐버리게 힘든 일이긴 하다.)

 

누군가를 봐주는 것은 그의 행동이 그의 도덕사에 속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그가 한 일이 그의 도덕사에 속한다고 생각할지라도, 그 일로 그를 나쁘게 보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부당 행위자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꾸며낸 행동인가?

 

허버트가 내게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 일로 더 이상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일이 그의 도덕사에 속하지 않는 척 꾸미는 것인가?

 

아니다. 사법부의 공무원들이 누군가가 법률을 위반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사람을 고발하지 않기로 한다고 해 보자.

 

그렇게 되면 국가는 그의 법률 위반을 문제 삼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국가나 국가의 권한을 행사하는 공무원들이 그가 법률을 위반하지 않은 것처럼 이후에 꾸미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아니면 어떤 국가원수가 법률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누군가에 대해 사면을 결정한다고 해 보자. 해당 국가나 국가원수도 그가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것처럼 이후에 꾸미지는 않는다.

 

-[사랑과 정의]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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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으로는 제법 깊고, 그럴싸 하다....그러나 실제 내가 피해자고 용서해야 할 가해자가 있는 상황에서 개인사와 도덕사를 구분하는 작업은 말장난 같기도 하고 굉장히 당혹스럽기도 하다...이 마음을 극복하는 게 가장 관건일 듯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기에 보충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부당 행위자를 그의 잘못으로 인해 나쁘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어떤 부분에 대해서만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라는 면에서 부분적인 것일 수 있다. 용서의 실행도 그 결심을 특정한 방식으로만 행동에 옮긴다는 면에서 부분적일 수 있다.

 

또, 그 결심의 범위는 시간이 갈수록 넓어질 수 있고, 실행의 범위 역시 그렇다.

 

우리의 향후 논의를 위해, 용서는 대개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방식으로 부분적이며, 그 결심이 즉석에서 온전하고 완전하게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과정의 형태를 띤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누군가를 그가 내게 저지른 일에 대해 더 이상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더 이상 그의 죄과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그는 그 일을 했고, 나는 그가 그 일을 했음을 기억하며, 여전히 그 일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렌트는 이미 일어난 일을 무효화할 수 없는 곤경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엄격히 말해, 그 곤경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잘못을 무효로 만들 수도 없고, 죄책을 없애 버릴 수도 없다.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누군가를 그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 잘못을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취급하는 것이라고 어떤 저자들은 주장한다.

 

나는 이것이 맞지 않다고 본다.

누군가가 한 일에 대해 그를 봐줄 때도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용서는 그 행위를 없었던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부당 행위자를 그 행위자로 인해 나쁘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허버트를 그가 내게 저지른 일로 인해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그 일이 그의 도덕사(moral history)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이 그를 대하는 것이다.

 

그 일은 분명히 그의 도덕사에 속한다. 나는 그 사실을 안다. 그 일을 기억하고, 그 일을 정죄하고, 그 일로 허버트를 탓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제 그 일이 그의 개인사(personal history)일 뿐 그의 도덕사의 일부는 아니라고 믿는 양 그를 대하기로 결심하고 그 결심을 행동에 옮긴다.

 

-> (약간 말장난 같기도 하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꽤 힘들다. 그래도 진정한 '용서'를 하려면 이런 인지의 구획화 작업이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하다.)

 

개인의 도덕사라는 말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도덕적 상태에 기여하는 일들의 총체다.

 

그가 한 일들 중에서, 그가 어떤 면에서 어느 정도나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며 어떤 면에서 어느 정도나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인지 결정하는 데 기여하는 일들 말이다. 개인의 도덕사 개념을 도입한 이유는 한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을 그의 도덕사의 일부로 여길 필요가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허버트가 나를 부당하게 대했어도 그것이 비난할 수 없는 무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그를 탓할 수 없게 되면, 그를 나쁘게 생각하는 대신 그를 봐주게 된다.

 

그를 봐준다는 것은 그 행동이 그의 도덕사의 일부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개인사의 일부다. 그는 그 일을 했다. 그러나 그 일이 그의 도덕사의 일부는 아니다. 그의 도덕적 상태에 오점을 남기지는 않는다.

 

-> (사소한 잘못은 이렇게 치부한다 치고, 거대한 범죄 앞에서도 이런 구분으로 그를 살려내야 한다는 게 괴롭다. 이게 맞나? 싶긴 하다. 그래도 계속 고민해 봐야하지 않을까?)

 

-[6부]에 이어서-

-[사랑과 정의]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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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식의 재규정 같은 정교한 과정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런 재규정이 용서의 전제 조건(또는 구성 요소)이라면 용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우리의 목적상 중요하지 않다. 주목해야 할 중요한 부분은 따로 있다.

 

그리스월드는 피해자가 가해 행위가 아니라 부당 행위자에 대해서만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가 제시하는 용서는 가해 행위로 생겨난 모든 부정적 감정을 털어 버리겠다는 결심을 포함하며, 모든 부정적 감정이 실제로 사라졌을 때만 그 용서가 온전히 완성된다 .

 

-> 그리스월드의 저서를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번역본이 없는 것 같은데, 물론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그리스월드의 의견이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이 책에서 하고 있긴 하다. 이런 주제를 깊게 서술해 준 철학 이론서적이 별로 없다 보니.....

 

이 분석에는 다음과 같은 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월드도 용서가 망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용서를 하려면 이와는 정반대로 자신이 당한 일과 그 일을 한 사람을 기억해야 하고, 계속해서 그 일을 그릇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당한 일이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받아들인다면, 그 일을 기억하고 계속 그릇되었다고 여기면서 그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조금이라도 느끼지 않는 일이 가능한가?

 

 

부정적 감정을 완전히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당한 일을 잊어버리거나 더 이상 그 일을 그릇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용서가 가능하려면 부당 행위자의 잘못을 기억해야 하고 그 일이 그릇된 것이라고 계속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이 부분에 대해 잘못 판단했다고 해 보자.

 

자신이 당한 일을 기억하고 여전히 그릇된 것으로 여기면서도 그 일에 대한 일체의 부정적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고 말이다.

 

물론 용서는 잘못된 행위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제거하기로 결심해야 가능한 것이 아니며, 철저하고 완전하게 용서하는 동시에 자신이 당한 일에 계속 분노할 수 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부당 행위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놓아 보내야 하지만, 그 행위에 대한 부정적 감정까지 놓아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용서에 대한 만족스러운 이론은 그리스월드가 분명하게 거부하는 바와 달리, 자신이 당한 잘못에 대한 부정적 감정과 부당 행위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구분해야 한다.

 

부당 행위자를 온전히 용서하면서도 그가 한 일에는 계속 분노할 수 있다.

 

만족스러운 용서의 이론이라면 이런 까다로운 균형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하고, 이 균형잡기가 필요한(혹은 필요치 않은)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이러한 균형잡기를 어떻게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피해자가 부당 행위자를 바라보는 시각의 특정한 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그리스월드의 제안은 옳은 것 같다.

 

그러나 이 시각의 변화, 그의 표현대로라면 '재규정'에 있어야 할 요소를 그는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 (그리스월드의 '용서' 개념의 한계를 지적하고 새로운 이론을 제시)

 

내가 생각하는 용서는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일로 부당 행위자를 더 이상 나쁘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더 이상 그의 죄과를 따지지 않겠다는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용서는 결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결심을 실행에 옮겨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부당 행위자를 그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로 피해자가 결심하더라도, 그 과정이 너무 어려운 나머지 혹은 곧 혼수상태에 빠진다거나 하여 그 결심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면, 용서할 의향이 있더라도 실제로는 용서를 하지 않은 것이다.

 

-[5부]에 이어서-

-[사랑과 정의]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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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나를 부당하게 대우한 허버트를 용서하려면 그가 한 일과 그 일을 한 사람이 허버트라는 사실을 계속 기억해야 하며, 그 일을 계속 나쁘게 여겨야 한다.

 

내가 그 기억을 떨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해서 또는 기억이 서서히 희미해져서 내가 당한 일을 잊거나 허버트가 그 일을 했다는 사실을 잊는 것은 용서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용서는 망각이 아니다.

 

망각은 오히려 용서의 발생을 막는다. 잊어버리면 용서할 수가 없다. 용서는 지난 일을 그냥 묻어 두는 것과 다르다.

 

지난 일을 묻어 두는 이유가 그 일의 진정한 배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건, 그 일이나 그 일을 한 사람을 더 이상 적극적으로 기억하지 않아서건, 아니면 그 일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변해서건, 그것이 용서가 아니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셋째, 누군가에게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믿으면서도 그 일이나 그 일을 한 사람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 행위나 행위자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의 모욕 따윈 개의치 않아."

 

이런 식의 무심한 무시는 용서가 아니다. 이런 태도는 용서를 원천봉쇄한다. 용서를 하려면 그 행위나 행위자를 도덕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허버트가 내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 그를 용서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현재 유효한 용서에 대한 철학적 이론 중에서는 찰스 그리스월드(Charles L. Griswold)가 [용서](Forgiveness: A Philosophical Exploration)에서 제시한 것이 가장 정교하고 자세하다.

 

그리스월드는 용서와 관련이 있는 부정적 감정은 부당 행위자를 향한 분노뿐이라는 관점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내가 제시한 용서의 전제 조건 목록의 네 번째 항목, 즉 부당 행위자의 행위에 대해 갖는 분노 및 그와 유사한 부정적 감정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거부한다.

 

그리스월드는 용서가 다음 네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1] 복수의 포기

 

[2] 분노의 완화

 

[3] 남아 있는 분노를 털어버리겠다는 결심

 

[4] 용서한다는 사실을 부당 행위자에게 전달함.

 

여기에 그리스월드가 용서의 구성 요소로 제시하는 두 추가적 요소는 용서의 구성 요소보다는 전제 조건으로 보는 편이 나아 보인다. 두 요소는 부당 행위자가 자신과 피해자를 재규정(re-framing)하는 것과 피해자가 자신과 부당 행위자를 재규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월드가 말하는 재규정이 무슨 뜻인지 그의 말을 인용해 보겠다.

 

가해자가 용서받을 자격을 얻으려면, 동감하는 마음으로 피해자의 처지에 자신을 대입해 보았다는 것과, 그 관점에서 피해자의 이야기를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가해자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경위와 자신에게는 그 잘못 외의 다른 면모도 있다는 점, 그리고 달라졌다는 인정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용서를 청하는 가해자는 죄책감과 후회와 회환의 감정을 털어놓고, 자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그로 인해 느꼈던 도덕적 감정들을 묘사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신뢰를 주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바라보는 시각과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을 재규정해야 한다....가해자에 대한 시각을 재규정하고 그로 인해 결국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재규정하려면 분노에 찬 '이야기들'을 .... 수정해야 한다.

 

더욱이, 원수나 압제자들을 적대하던 마음이 자기 인식에 영향을 끼친 경우라면, 자신에 대한 견해까지도 재규정해야 한다.

 

-[4부]에 계속-

-[사랑과 정의]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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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다른 철학자 만큼 어렵진 않다. 그래도 철학자 특유의 이성 논증과 집요함으로 이 물음을 가지고 깊게 씨름하는 자세가 훌륭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람은 자신이 직접적으로 받는 대우뿐 아니라 자신이 동일시하는 이들이 받는 대우에 의해서도 부당한 일을 당한다. 내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면, 삼촌이 아버지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고 나는 삼촌을 용서할 위치에 놓인다.

 

내가 우리 대학 필드하키 팀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면, 대학 당국이 그 팀을 부당하게 대우할 때 나도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고 나는 대학 당국을 용서하거나 용서하지 않을 수 있는 위치에 선다.

 

확신은 없지만, 이 생각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옳다면, 여기엔 동일시에 대한 대단히 포괄적인 이해가 깔려 있다.

 

나는 어떤 성직자가 어린 소년을 학대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그 성직자에게 분개했다가 마침내 그를 용서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소년을 알지 못하고 그가 어떤 어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해보자.

 

그런데도 내가 소년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며, 그 때문에 나도 그 성직자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인가?

 

우리가 말하는 바가 그 소년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나도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이라면 우리는 '동일시하다'(identify)라는 단어를 독특한 방식으로, 내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면 나는 직접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이거나 직접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이라는 설명이 뜻매김상 옳은 말이 되어 버리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용서에 대한 나의 이론을 두 가지 단계로 제시하려 한다.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주장이 이제부터 나오기 시작함)

 

우선, 용서가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맥락을 묘사하겠다.

 

그 후에 그런 맥락 안에서 용서가 어떤 일을 하는지 말할 것이다.

 

부적절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 직접적 피해 당사자가 용서를 하는 경우만 한정해서 다룰 것이다.

 

용서의 전제 조건이 되는 맥락은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한 가지 예외 말고는 이것들이 용서 발생의 조건이라는 주장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그 예외에 대해서는 곧 다루겠다.

 

나는 허버트가 내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 다음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그를 용서할 수 있다.

 

[1] 허버트가 나를 부당하게 대우했다.

 

[2] 나는 그의 부당 대우에 대해 그를 탓할 수 있다는 정당한 믿음이 있다.

 

[3] 나는 그 행위와 그것을 누가 저지른 것인지 계속 기억하며 그 행위를 계속 정죄한다.

 

[4] 나는 그 행위에 대해 분노 또는 그와 유사한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

 

[5] 나는 그 일을 저지른 허버트에 대해 분노 또는 그와 유사한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

 

이런 조건들이 채워질 때 비로소 나는 허버트가 내게 저지른 부당한 행위에 대해 그를 용서할 수 있다.

 

나는 이 중 첫번째 요소를 용서의 전제 조건으로 여러 번 인용한 바 있다. 그럼 나머지 요소들이 용서의 전제 조건이 되는 이유를 간략히 설명해 보자.

 

내가 나를 부당하게 대우한 허버트를 용서할 수 있으려면 그가 한 일에 대해 그를 탓할 수 있다고 내가 믿어야 하며 그 믿음이 옳아야 한다. 내가 그를 탓할 수 없다고 믿을 때, 즉 그가 강압에 못 이겨서나, 허물할 수 없는 무지 상태에서, 또는 뿌리 뽑을 수 없는 심한 의지박약 상태에서 행동했을 때 나는 그를 봐준다. 그를 탓하지 않는다.

 

용서는 여러 중요한 면에서 봐주기(excusing)와 비슷하지만 봐주기와 분명히 구분된다. 그뿐 아니라, 봐주기는 용서의 발생을 막는다.

 

-[3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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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사랑'과 '정의' 사이에서 고민한다. 용서라는 개념이 '정의'를 침해하는 것 같을 때...우리는 고민을 해 봐야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용서의 본질에 대한 합의가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곧장, 용서가 정의의 침해라는 주장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런 합의가 없다. 용서에 대한 20세기의 철학, 신학 문헌을 대충 살펴보기만 해도 근본적 의견 불일치가 드러난다.

 

제프리 머피(Jeffrie Murphy)는 이렇게 말한다.

 

"용서는 주로 내가 당신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당신을 어떻게 대해는가가 아니라)의 문제다. 따라서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당신을 용서할 수 있고, 당신이 죽은 후라도 용서할 수 있다."

 

리처드 스윈번(Richard Swinburne)은 이와 정반대인 주장을 말한다.

 

당신이 나를 용서한다는 것은 "앞으로 당신은, 당신을 부당하게 대우한 행동의 원인으로 나를 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감정이 개입할 필요는 없다."

 

 

머피는 버틀러 주교(Joseph Butler)를 인용해, 용서는 분노와 분개의 감정을 극복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진 햄튼(Jean Hampton)은 여기에 한 가지 구분이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용서는 부당 행위자에 대한 증오를 극복하는 것이지만, 자신에게 가해진 일에 대한 분노와 분개의 감정을 극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저런 의견 차이를 고려하면, 용서의 본질을 이해하는 작업에 이번 장의 나머지 부분을 할애할 수 밖에 없다.

 

용서의 본질을 이해한 다음에야 용서가 정의를 침해하는지 여부를 다룰 수 있다.

 

용서에 대해서는 내가 앞으로 말할 내용보다 훨씬 많은 말을 할 수 있지만, 나는 용서가 정의를 침해하는지의 여부를 고려할 수 있을 만큼만 이야기하려 한다.

 

용서는 여기저기에 무차별적으로 나눠 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부터 지적해야겠다.

 

4장에서 주장한 것처럼, 용서는 누군가가 부당한 대우를 당했고, 자신에게 정당한 권리가 있는 무엇인가를 빼앗긴 상황을 전제한다. 용서는 불의가 벌어진 상황을 전제한다.

 

더 나아가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이 누군가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음을 인식하고 불의가 벌어졌다는 것을 인식하는 상황을 전제한다. 이 문제를 다룬 대부분의 저자들은, 용서를 피해자 본인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당연시한다.

그렇건 아니건, 내겐 중요하지 않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고 본다.

 

-> (충격적이다. 이거 아주 고민되는 지점이다. )

 

우리는 이런 말을 한다. "아버지를 이용해 먹은 삼촌을 마침내 용서했다." "우리 필드하키 팀을 그렇게 부당하게 대우한 대학 당국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누군가는 이런 발언들이 의미하는 바가 '본인만이 용서할 수 있다'는 명제를 폐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부당한 대우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말할 것이다.

 

-[2부]에 계속-

-[사랑과 정의]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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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자체가 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께서 뜻하시는 바만이 홀로 정의롭고, 주께서 뜻하시지 않는 바는 불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이들은 구원하시고 어떤 이들은 구원하지 않기로 하신다.

 

따라서 전자의 구원과 후자의 정죄 모두가 하나님에 대해서 정의롭다.

 

"오, 정의롭고 자비하신 하나님, 주께 대해서는 벌하심도 용서하심도 정의롭습니다."

 

참으로, "주께서 벌하시고자 하는 이들이 구원받는 것은 정의[롭지 않을 것]이며, 주께서 사하시고자 하는 이들이 정죄 받는 것도 정의[롭지 않을 것]입니다."

 

-> (이건 안셀무스 개인의 주장이다....이것이 진짜 기독교일지에 대해서는 각자 고민해 보자. 어떻게든 하나님의 '의'를 변호하려는 모습은 가상하지만, 사실 직관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납득 안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정의의 관계는 "주의 긍휼이 주의 정의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선하신 주님이시기에 용서하실 때도 선하시며 그것 자체가 정의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그가 보여 준 수준에 못 미친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를 상대로 정의롭게 행하시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상대로 정의롭게 행하시는 것을 구분하라고 말한다.

 

전자를 우리에게 합당한 것을 돌려주심으로 이해하고, 두 가지 모두가 하나님이 그분의 선한 뜻에 일치하게 행하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다음, 그는 일부 범죄자들이 용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일이라는 데 주목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합당한 몫을 돌려주지 않으신다는 점에서 그들을 상대로 정의롭지 않으시다 해도, 하나님이 어떤 악인들을 용서하심은 그들에 대한 처벌 못지않게 하나님의 선한 의지에 일치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분 자신에 대해 정의로우시다고 결론 내리라 말한다.

 

이런 논리는 원래의 당혹스러움을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된다. 안셀무스를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심으로써 정의가 금하는 바를 행하시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안셀무스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악인을 용서하시는 것을 악인을 상대로 불의하게 행하신 것이긴 해도, 하나님 자신을 상대로 불의하게 행하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상대적 정의가 미심쩍어 보이지만 일관됨 개념이라고 인정한다 해도, 안셀무스의 방식은 원래의 당혹스러움을 그와 진배없는 당혹스러움으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하다.

 

안셀무스가 제안하는 개념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맞닥뜨리게 된다.

 

하나님이 잘못을 저지른 자를 용서하시는 일이 그들을 상대로 불의를 행하신 것이라면,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시는 것이 어떻게 선한 일일 수 있겠는가? 인간에게 불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선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을 그렇게 대하시는 것이 하나님 자신을 상대로 불의하게 행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은, 그들을 불의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선하실 수 있는지 설명해 주지 못한다.

 

여전히 우리는 어느 때 못지않게 당혹스럽다.

 

안셀무스의 해결책에는 인간의 용서에 대한 어떤 적용점도 없다는 사실을 덧붙여야겠다.

 

용서가 처벌의 포기를 요구한다면, 그리고 악인의 처벌을 포기하는 것이 정의를 침해하는 일이라면, 예수가 우리에게 서로 용서하라고 명령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사랑과 정의]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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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용서가 정의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용서의 동기가 사랑이라면, 용서는 정의와 사랑 사이의 실제 또는 외관상의 갈등이 벌어지는 자리가 된다. 안셀무스가 어떤 식으로 용서가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는지 살펴보자.

 

그는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여쭙는다.

 

주께서 온전히 정의롭고 더없이 정의로운 분이라면 어떻게 악인들을 살려두십니까?

온전히 정의롭고 더없이 정의로운 분이 어떻게 불의한 일을 하십니까?

영원한 죽음을 받아야 마땅한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다니, 그것이 무슨 정의입니까?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선을 베푸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여, 악인을 구원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고 주께서 정의롭지 않은 일을 하지 않으시니 어떻게 악인을 구원하십니까?

아니면, 당신의 선하심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어서 당신이 거하시는 다가갈 수 없는 빛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까?

-> (많은 이들이 고민하고, 절규하는 메시지)

 

안셀무스는 용서가 형벌의 포기를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의의 요구는 잘못한 자가 벌을 받는 것이다.

 

정의에 관한 고대의 가르침은 "각자에게 그가 받아 마땅한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잘못한 자가 받아 마땅한 것은 형벌이다. 따라서 그를 용서하는 것은 정의를 침해하는 일이다.

 

안셀무스의 해결책은, 그걸 해결책이라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많은 잠정적 시도 끝에 다음과 같은 제안을 내놓는다.

 

하나님이 정의롭다고 말할 때는 우리에게 정의로우신 것과 하나님 자신에 대해 정의로우신 것을 구분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합당한 것을 주실 때, 그분은 우리에 대해 정의로우시다.

 

하나님이 궁극의 선으로서 하나님의 본성에 걸맞게 행하실 때, 그분은 하나님 자신에 대해 정의로우시다. 안셀무스는 하나님이 악인들을 살려 주시는 것을 두고 그분께 이렇게 말한다.

 

"주는 의로우십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우리 몫을 주셔서가 아니라, 궁극의 선으로서 자신에게 걸맞은 일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을 살려 주실 때 주께서는 우리와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에서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이 잘못한 사람을 벌하실 때 뿐만 아니라 용서하실 때도 하나님 자신에 대해 정의로우시다는 안셀무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하나님이 그분의 뜻에 맞게 행하시는 모든 일은 그분의 선하심에 걸맞다.

 

-[사랑과 정의]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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