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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5분 뚝딱 철학'에서 다루는 서양철학사를 쉽고 간결하게 요약한 책이다.

 

만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데 큰 부담이 없고, 책으로 나온 [5분 뚝딱 철학]의 요약판, 간단 버전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렇게 개괄적으로 철학을 소개하는 책들은 여러 권을 같이 읽어 보는 게 도움이 된다.

 

어려운 철학자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저자들에 따라서 강조하는 이론이나 포인트들이 제각기 다르다.

 

이 책의 장점은 많은 개괄서적에서 잘 다루지 않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부터, 현대 철학자들을 제법 다뤘다는 점이고, 읽기가 쉽고 핵심 개념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적다는 점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특정 철학자로부터 배워야 할 방대한 개념을 제대로 포괄하기는 어렵다 보니, 철학자의 특정 이론/면모만을 강조해서 소개하고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이건 책의 구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서 단점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긴 하다.

 

책의 말미에 부록으로 QR 코드를 인식하면 유투브로 바로 해당 내용을 볼 수 있도록 구성해 둔 점 등은 최신 트렌드에 맞춘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다른 2차 서적들을 하나하나 찾아 보고 그 뒤에 자신감이 붙으면 관심가는 철학자들의 1차 서적을 읽는다면 순서상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청소년기에 읽었던 [소피의 세계]와 같은 책은 이런 철학을 개괄적으로 다룬 측면에서 정말 역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인이 되서 다시 한번 읽어 봐야 할 정도이다.

 

그 책에서 아쉬운 부분은 다른 훌륭한 철학자들이 많이 누락되었다는 점과 현대 철학자들이 다소 부실하다는 점인데 이런 부분들이 보완되어서 2편이 출간되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든다.

 

철학은 딱딱하고, 어려워 보이고, 현학적으로 보여도 현실 사회를 살아가는데 매우 필수적인 학문이다.

 

철학이 갖춰진 사람은 삶을 대하는 방식, 사람과 관계맺는 방식이 다르다. 그런 측면에서 어린 시절부터 이와 같은 양서로 공부를 해 나갈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귀여운 일러스트도 있지만, 각 챕터마다 짤막하게 나와 있는 5분 뚝딱 인터뷰다.

 

가령 논리 실증주의자, 분석철학자, 실존주의 철학자 등 분류에 맞춰서 몇명의 철학자를 묶어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형식인데 나름 재미도 있고, 통합적으로 학자들을 이해하고, 분류하고, 범주화 하는데 도움이 된다. 열심히 공부하자.

 

-[철학툰], 김필영 지음 /김주성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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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지라르의 이론에 대입해서 해석해 보자.

 

"희생양의 선택은 적절했다. 나사렛이라는 변방 마을 출신의 한 청년, 스스로 선지자인 척하며 어부, 세리 등과 같은 주변적 인물들을 제자로 데리고 다니는 청년에게 희생양의 역할을 맡기는 일은 너무나 간단하다.

 

문제는 이 희생양에게 집단의 모든 갈등의 책임을 떠안기는 것, 즉 유죄화 작업이다.

 

그런데 고맙게도 예수라는 청년은 유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폭력을 한 데 모으기에 적절한 언행을 일삼는다.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제 모든 준비는 다 갖추어졌다. 어찌 보면 이보다 더 쉽고 더 완벽한 조건을 갖춘 희생양도 드물 것이다.

 

공동체는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 자체로 여러 갈등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청년에게 민족의 해방자가 되어줄 것을 기대했지만 정작 청년은 정치적 해방 따위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완벽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사람들이 청년에게 가졌던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결정적인 한 가지 죄명을 덧붙인다면 간단하게 만장일치적 폭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일신교와 선민사상에, 특히 오랜 세월에 걸친 율법주의에 물들어 있는 이 군중들에게 신성모독보다 더 큰 죄는 없다. 사탄은 다시 한 번 성공적으로 일을 수행한다.

 

이번에는 그가 한 일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쉽게 일이 진행되었다. 군중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희생물이 된 존재가 스스로 사탄이 원하는 방식대로 움직여주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사탄은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작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라는 청년의 십자가 처형이 자신의 왕국에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탄의 계산을 철저히 좌절시키게 될 것이다."

 

그가 보기에 신화와 성서는 극명한 차이가 존재했는데

 

성서는 집단적 폭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고, '희생양'을 변형시키거나 왜곡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성서는 희생양의 무고함을 드러내며, 폭력의 책임이 박해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신화가 박해자들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라면, 성서는 철저히 희생양의 입장에서 기록된 텍스트이며 신화가 박해자들의 폭력을 정당화한다면, 성서는 희생물의 무고함을 입증하고 박해자들을 단죄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신화가 공동체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온 근간으로 집단적 폭력을 칭송한다면, 성서는 처음부터 집단적 폭력을 금지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결국 성서는 신화적 희생양 메커니즘의 해체를 가르치고 있으며 무고한 희생양의 위치를 복권시킨 후 박해자들에 대한 '용서'와 '복수 금지'를 한결같이 주장한다. 특히 구약성서는 한결같이 인간 공동체가 숨겨진 희생자들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이 희생자들에게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희생양 이론

 

그리고 성서는 복수가 아닌 '용서'를 통해 폭력의 연쇄고리를 끊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신화와 구별된다.

 

그러다 보니 지라르는 인류 역사에서 유일하게 신성과 집단적 폭력 사이의 철저한 거리가 유지되고 있는 경우는 성서 뿐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성서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2차 변형 작업처럼 희생양을 신격화하는 일도 없었다.

(기독교는 일신교이기 때문이다.).

 

성서 속 희생양은 처음부터 무고한 존재로 그려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화 속 희생양은 1차 변형 작업으로 유죄화 되고, 2차 변형 작업으로 신격화 된다.)

 

결국 지라르의 이론은 종착점에 다다르는데 '복음서'의 승리가 결론이 난다.

 

예수는 인간의 종교와 문화가 초식적 폭력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 폭력은 진짜 좌 있는 자들, 즉 박해자들의 책임임을 분명히 폭로하면서 세상 설립 이후부터 감추어져온 것에 대한 금기를 단번에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기존의 신화적 성스러움에 종지부를 찍는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여느 희생양의 신성화 작업과는 다른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에게 폭력을 행사한 박해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박해자들을 '용서'한다. [누가복음 23장 34절]

 

예수 그리스도는 폭력에 전혀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폭력의 굴레를 해체시킨다. 그는 폭력의 규범에 따라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항상 '용서'와 '사랑'에 집중했다.

(더군다나 희생양 메커니즘 파트에서 공부했듯이 희생양의 조건은 '복수를 할 수 없는 자'여야 하는데, 예수는 스스로 복수의 가능성을 포기해 버린다. 그가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고 선언한 이상, 복수는 이미 포기된 것이다.)

 

지라르는 이러한 놀라운 결론에 이르고 나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의 마지막 말들을 좀 더 들어보고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겠다.

 

요약하면 인간의 욕망은 모방적인데 이를 통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과 폭력을 막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대상에 대한 금지, 욕망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모방 경쟁에 귀착되지 않는 다른 욕망 모델을 제시하는 것인데 이 때 지라르가 제시하는 결론인 '좋은 모방'의 모델이 바로 그리스도다.

(사탄에서 그리스도로 모방 모델을 갈아타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철저히 기독교의 영향이 일부분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무고한 자에 대한 일방적인 왜곡 작업과 집단적 폭력은 사실상 불가능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있다면 기독교인은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희생양 메커니즘이 통하지 않는 시대라는 건 모방 경쟁으로 인해 초래되는 폭력과 갈등을 미봉책으로나마 막아줄 수 있는 보호책이 사라진 것을 의미하므로 이 시기를 조심해야 한다.

 

결국 이 불안하고 위험한 상황을 타개하려면 다시 결론으로 돌아가서 좋은 모방을 모델로 삼는 것인데 이 때 '그리스도'를 모방하면 된다.

 

소유 욕망과 경쟁적이고 상호적인 폭력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남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모델인 그리스도를 모델로 받아들이고 그의 욕망을 모방할 때 우리는 희생양 메커니즘 자체가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공동체 질서를 확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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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희생양 메커니즘의 한계점을 정리하자.

 

1. 폭력에 의해 폭력을 제어하는 방식이다.

2. '선한' 폭력도 문자 그대로 '선한' 폭력은 아니다.

 

결국 희생양 메커니즘은 인류가 안고 있는 폭력적 속성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건 단지 '임시방편'일 뿐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나아가기 전에 '희생양의 조건'이 몇 가지 나오고, 그 조건에 부합하게 만들기 위한 '변형 작업'이 이뤄지는데, '희생양'은 복수할 수 없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 희생양을 유죄로 만장일치 정죄할 수 있도록 변형시킨다면 그 다음에는 그 유죄성을 씻겨 버리는 변형 작업을 거친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이렇다.

 

"갈등과 위기의 원인으로 여겨졌던 희생물이 희생당한 뒤, 즉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한 뒤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단합을 통해 희생물은 역설적으로 사회를 위기에서 구원하고 화해를 가져오는 존재로 신성화 된다."

 

결국 위기와 극복, 갈등과 화해, 희생양과 신성한 존재, 폭력과 성스러움은 하나의 메커니즘의 양면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폭력이 근거 없는 폭력이었다는 사실, 무고한 자에 대한 폭력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기 위해서, 그리고 희생양에 대한 폭력이 실제적인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서 희생물에 대한 두 번째 변형, 즉 신성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사람들은 모두 이 작업에 참가하여 실제로 희생물을 신성한 존재로 받들게 되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남는 건 '폭력' 뿐이다.

 

그리고 지라르는 이러한 폭력의 반복적 메커니즘을 '사탄'의 존재에 비유한다.

 

이제 지라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결론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다.

 

그는 신화는 박해자들의 관점에서 폭력을 정당화하고 진실을 숨기려고 했지만, 성서, 특히 복음서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희생양의 관점에서 희생양 메커니즘의 진실을 드러내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 그 진리성을 믿는 프로세스 자체가 상당히 파격적이다) 

 

잠시 요약 정리하면 지라르는 모방 욕망 -> 희생양 메커니즘 에 이르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뒷받침 할만한 다양한 문학 작품, 인류학 자료, 신화 등을 활용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대-기독교의 성서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일부 비평가들은 지라르가 이미 '기독교'라는 답을 정해 놓고, 그에 맞는 내용들만 추려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 건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지라르는 자신은 결코 그런 식으로 작업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지적인 발검음이 결국 유대-기독교의 성서에 이르게 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 점이 정말 인상깊다.)

 

르네 지라르-작업하는 모습-

 

"제 연구 결과들이 저를 기독교로 향하게 했고, 그 진실을 믿게 했습니다. 제가 이러한 사유를 펼친 것은 제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이러한 사유를 펼치고, 또 기독교인이 된 것은 연구 결과 덕분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실제 신학의 눈으로 지라르의 이론을 바라보면, 성서 해석이 특정 이론에 치우쳐 있어서 불완전한 부분도 있고, 그 영역 이외의 기독교에 대해서는 지라르가 주목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한계점도 보일 수 있지만, 최소 지라르는 현대 세계에서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를 알렸고, 세상의 모든 법칙과 역사를 초월하는 유일한 계시로 기독교 복음을 제시했으니 긍정적인 측면도 많다고 볼 수 있다.

 

(ex) 사탄에 대한 해석은 성서와 많이 다르다. 지라르는 박해자와 희생양에 대한 진술을 숨기고 끊임 없이 반복되는 폭력의 실체, 그 자체를 사탄으로 본다. 즉, 사탄은 희생양 메커니즘의 무의식이자 그것의 구조 자체, 경쟁적 모방 시스템 자체를 의미한다.)

 

그는 성서 속에 나오는 인류의 원죄는 타인의 욕망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모방적 속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즉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자체에 대한 욕망보다는 그것을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욕망에 빠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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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부터 그는 민족학, 신학, 고전 비극, 성서 등 광범위한 영역을 근거로 활용하기 때문에 그의 연구의 폭이 넓어진다.

 

그는 현대 사회의 문화 형성, 학습에도 모방이 중요한 기여를 하지만 '폭력'을 초래한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차이의 상실'로 인해 더 큰 폭력이 초래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차이는 모든 자연적, 문화적 질서의 원칙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관계속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주고, 조직화되고 위계질서를 갖춘 총체 가운데에서 사물들이 의미를 갖도록 해주는 게 바로 '차이'인데, '폭력'은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모방 경쟁' -> '차이 소멸' -> '전염된다' -> '집단 전체의 위기'

 

이 도식을 막아야 '폭력의 메커니즘'이 예방된다고 지라르는 주장한다.

 

차이의 소멸, 유사성으로 인해 '잠재적 폭력'이 표출되는 수 많은 예시로서 그는 성서 속 카인과 아벨이나 신화 속 오이디푸스, 이오카스테의 근친상간을 근거로 든다.

 

모방이론-퍼옴-

 

여기서 근친상간은 차이 소멸의 극단적인 양상이 되는데 그것은 한 가족 내에서의 중대한 차이, 즉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차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프로이트의 이론과 대립되므로 지라르는 프로이트를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비판한다. 프로이트가 직관적으로 자신의 이론에 근접해 왔지만 아쉽게도 그걸 끝까지 끌고 나가지 못하고, '모방 욕망'과 '콤플렉스 이론' 중 후자를 선택했다며 지라르는 안타까워 한다. 그리고 프로이트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된 이유까지도 설명해 낸다.) 

 

그 다음 [경쟁, 짝패] 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다시 정리하면

 

차이의 소멸 -> 경쟁적 폭력 야기 -> 전염되어 -> 차이 소멸이 더 심화된다.

 

그런데 경쟁에 빠져 있는 이들은 서로가 '쌍둥이'와 같은 존재가 된다는 사실, 즉 차이 소멸과 경쟁의 동일한 희생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지라르는 말한다. 그들은 차이 소멸의 주역이고, 폭력 전염의 주범이면서 동시에 상호적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즉, 경쟁자들 사이에 차이가 전혀 없어지면 모든 차이가 사라져 '동질성'만 남게 되어 그 둘은 완벽한 '짝패'(double)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지라르는 이 '짝패'는 항상 '괴물'의 존재와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화에서 묘사되는 '괴물'도 어떤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묘사라기 보다는 차이 소멸과 짝패에 대한 상징아라고 말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좀 부족하지 않나?)

 

이제 그의 이론 체계 전반부인 '모방 욕망' , '경쟁' 이라는 개념을 파악했으니 후반부 이론인 '희생양 메커니즘'을 살펴보자.

 

저자의 표현을 빌려보자.

 

모방 이론2 -퍼옴-

 

"차이 소멸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는 욕망, 즉 상호적 폭력에 의해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 집단과 그 구성원들을 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은 구성원들 모두의 폭력을 단하나의 대상에게로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의 모방 이론도 훌륭하지만, 희생양 이론은 실제적으로 와닿는 부분이 많다. 특히 가정 내에서 한명의 희생양을 만드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므로 잘 공부해 보자.)

 

"희생의 진정한 성격은 사회적이다. 그것은 폭력의 집단 전이를 의미한다."

 

"희생은 폭력을 일정한 방향으로 배출시키는 일종의 '대체 폭력'이다."

 

결국 인간에게서 '모방 욕망'은 근본적인 속성이다 보니 필연적으로 갈등, 폭력에 봉착하게 되고 이 폭력은 이러한 필연적 조건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기도 하는데 그게 바로 희생의 폭력, 대체하는 폭력이다.(폭력의 이중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결국 희생양에 대한 집단 전체의 폭력은 한 공동체가 파멸에 이르지 않고 번영해 나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하나의 단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좋은' 폭력, '대체하는' 폭력이 '나쁜' 폭력을 막는 이상한 모양새가 생겨 버린다. '폭력으로 폭력을 제어하는 것'이 희생양 메커니즘의 정의가 되다 보니, 이 희생양 메커니즘은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엄청난 딜레마 속에서 지라르는 '폭력 자체를 극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다가 기독교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자면 희생양을 만들 때도 모든 인간은 만장일치의 태도를 보여야 하는데 한 명이라도 이 규칙을 거부하면 전체 틀이 깨지고 말기 때문이다.

 

즉 위기를 맞이한 인간이 희생양에게 모든 책임을 전이시키는 과정에서도 모방이 개입되어 '저 녀석은 벌을 받아야 한다' 라는 유죄성에 대한 확신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린다. 그러면서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그 희생양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이다.

 

이러한 모방과 차이소멸은 희생물에 대한 폭력적 만장일치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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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멋진 사상가다. 이 책은 설명이 굉장히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추천한다.​

 

수년 전 어디선가 들어서 주목하게 되었고 가장 처음 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2차 서적을찾던 중 발견한 책이다.

 

김우현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등에도 등장했었고, 라캉 등의 정신분석학자와 비교 연구되기도 하는 그는 아주 독특한 사상가다.

 

알아두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서 그의 생애와 작품 활동은 이 책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따로 글로 올릴 예정이다.

 

대략적으로만 나누자면 그는 '욕망의 삼각형'과 '희생양 이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문학 및 문화 연구가다.

 

그의 이론은 난점이 많은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그는 하나의 주제를 논증하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다 보니 그가 문학 평론가인지, 문화 인류학자인지 철학자인지 정신분석학자인지 신학자인지 분류하기가 애매해 진다.

 

그의 분석은 문학작품-세르반테스부터 도스토예프스키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의)에서부터 원시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자료들, 신화, 성서 현대사회의 여러 현상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인류 역사를 다 포함한다. (대단하다)

 

그의 이론을 몇 가지 나눠 보면 그는 '인간의 욕망'은 결코 자연 발생적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욕망은 항상 제 3자와의 '관계'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욕망의 주인은 내가 아니게 된다. 어떤 대상을 욕망한다고 할 때 그것은 나의 내부에서 생겨난 감정이 아니라, 나의 외부에서, 그 누군가로부터 빌려온 감정이 된다.

 

-> 그래서 그는 욕망을 '매개자'라고 하는 제 3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대상과의 관계로 정의한다.

 

 

그러다 보니 욕망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직선적인 도식이 매개자를 사이에 둔 삼각형 도식으로  대체되게 되는데 그 근거를 여러 군데에서 찾아낸다.

(가령 돈키호테가 광기 어린행동을 하는 것은 그가 전설의 기사인 아마디스를 은연중에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아마디스는 '매개자', 즉 욕망의 '모델'이 되며 돈키호테는 '추종자'가 된다)

 

이런 식으로 지라르는 모방 경향이 인간 욕망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욕망의 모방적 속성은 인류의 역사와 문화 전체의 근간으로 제시된다고 주장한다.

 

 

[잠시 용어 정리]

모방 욕망: 타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 타인의 속성을 자기 것으로 삼음으로써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타인의 위치에 이르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욕망

 

지라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모방 욕망을 통해 동물적인 본능에서 벗어날 수 있고, 정체성을 만들 수 있다. 인간의 정체성은 결코 무에서 나온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더 나아가 인간을 환경과 문화에 적응하게 해주는 것도 욕망의 모방적 속성으로 본다. 

 

'적응한다는 것'이 인간이 문화에 참여하고 그것을 누릴 수 있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는 능력이라고 할 때 결국 우리는 "인간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모방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는 '낭만적 거짓'이라는 개념을 주창하기도 하는데 이는 욕망의 자율성이라는 환상(욕망은 그의 주장대로라면 자율적일 수 없으므로 그것은 '환상'이다), 자율적인 주체성과 자연발생적인 욕망이라는 환상을 이르는 표현이다.

 

이 책은 다양하고 풍성한 예시로 지라르의 이론을 뒷받침하는데 가령 한국 사회의 키워드인 명품 찬양, 외모 지상주의, 성형 열풍 등도 모방 욕망에서 그 원인을 찾아낸다.

 

여기서 그는 논의를 좀 더 심화시켜서 우리는 그 욕망의 매개자 자체보다는 그 이면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우러러 보게 된다고 말하며 그러다 보니 모방은 항상 모델이 되는 존재의 우월성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매개자의 우월성은 자연스레 주체를 열등감으로 던져 넣게 되고, 그로 인해 모방의 추종자들은 자신이 누군가를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 한다.

 

그리고 그는 매개자를 외적 매개, 내적 매개로 구분하는데 주체와 대상이 직선 관계가 아니라 매개자를 통한 삼각형 도식을 이루므로 중요한 건 매개자와 주체의 거리인데 이게 너무 멀면 이를 외적 매개라고 부른다.

 

이렇게 매개자와 주체의 거리가 멀어지면 매개자가 주는 형이상학적 위력이 약해지므로 이 자리는 뭐든 대체 가능해 진다. 대신 멀리서 그저 바라만 보고 흠모하면 되기 때문에 주체는 한결 부담 없이 편하게 매개자를 즐길 수 있다.

(마음에 안들면 다른 걸로 대체하면 되고)

 

내적 매개는 단지 주체와 매개자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면에서 외적 매개와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이 때는 모방 욕망이 지닌 부정적 요소들이 많이 부각된다. 왜냐하면 주체와 매개자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고, 경쟁이 심화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집단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폭력'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라르는 내적 매개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소설 속 인물을 인용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대상'이 풍족하다 해도 '욕망'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체에게 중요한 건 그 '대상'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매개자, 모델, 경쟁자를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외적 매개: 주체의 형이상학적 욕망은 위대한 모델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는 것

내적 매개: 모델을 넘어서는 지점까지 가는 게 내적 매개에 해당하는 '욕망'이다.

 

외적 매개: 주체가 매개자에 대한 모방을자랑스럽게 여긴다.

내적 매개: 주체가 모방의 진실을 감추려 한다.

 

르네 지라르

 

삼각형을 그려가면서 이해하면 지라르 이론이 이해하기가 쉽다.

 

외적매개에선 매개자와 주체의 거리가 내적매개일 때보다 더 멀다. 이 때는 대상을 다른 것으로 대체 가능하고, 매개자를 존경, 도달하기 힘든 존재로 본다. 반면에 내적 매개에서는 주체와 매개자의 거리가 짧고, 대상은 대체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이 때 대상의 형이상학적 위력이 높기 때문이다.

(실상은 대상보다는 매개자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이 더 커지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내적 매개에서는 주체가 매개자를 존경도 하지만 대개 매개자와 경쟁하려 하고, 이길 수 있다고도 본다.

 

그리고 매개자가 가까워질 수록 대상에 대한 욕망은 집착으로 변하는데 이 때 대상을 향한 욕망은 대상이 지닌 실제 가치와는 무관하게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주체의 욕망이 향하는 진정한 목표는 바로 매개자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소설 속 인물과 사회 현상을 가지고 자신의 이론을 멋지게 해석해 내며 욕망의 삼각형 도식을 가지고, 더욱 실천적인 적용을 모색하기도 한다. 저자의 해석을 들어 보자.

 

"욕망의 삼각형이라는 도식 하에서 주체와 타자, 즉 추종자와 모델 사이의 궁극적인 화해의 가능성, 합일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 경우에도 경쟁자들 가운데 한 명이 자신의 욕망을 고백하고 자만심을 꺾으면 투쟁은 곧 끝나게 된다.

 

하지만 그때부터 모방의 역전, 즉 주인과 노에 사이의 관계 역전은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노예의 표명된 욕망이 주인의 욕망을 파괴하고 그의 실제적인 무관심을 확고하게 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주인의 무관심은 노예를 절망에 빠뜨리고 그의 욕망을 배가시킨다. 이 두가지 감정은 동일한 것인데, 왜냐하면 서로를 복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감정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더욱 강화될 수 밖에 없다."

 

그는 사디즘과 매저키즘(SM)도 자신의 이론으로 해석해 낸다.

 

지라르에 따르면 이 두가지 이슈는 정신 분석학적 문제나 성적 도착의 문제가 아니라 삼각형의 욕망에 따른 결과가 된다.

 

사디즘: 매개자의 역할 놀이에 해당하는데 욕망의 주체가 매개자의 역할을 연기하기 시작할 때, 추종자가 아니라 타인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내려다 보기를 선택할 때 그는 학대의 주체인 사디스트가 된다.

 

매저키즘: 싫증을 느낀 주인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모방의 모델이 되는 주인은 자신의 연속적인 성공에 싫증을 느낀다. 지라르의 이론에서 '주인'은 자신의 욕망을 적절히 숨기고, 무관심을 가장하여 대상을 사이에 둔 경쟁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 그리고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매개자의 자리에 위치한 자를 의미하는데 주인은 곧 '실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상을 소유해도 그 대상은 그의 존재에 충족감을 안 주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 주인은 자기보다 훨씬 우월한 매개자가 가지고 있는 대상, 그리고 추종자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대상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지라르의 크고 작은 이론들을 더 공부해야 한다. 그는 세부적인 term을 만들어서 그 용어에 definition 을 만듦으로써 자신의 이론에 살을 붙여 나간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은 잠시 생략하고 '모방 욕망'의 결과를 알아보자.

 

결국 모든 것은 모방 욕망에서 시작되었다는 지라르의 주장대로라면, 끊임 없이 인간 사회를 괴롭히는 크고 작은 폭력, 갈등, 집단의 흥망성쇠의 기원에는 인간의 욕망이 가진 '모방적 속성'이 자리잡고 있게 된다.

 

또한 욕망은 '전염성'이 강해서 주체나 매개자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욕망이 누군가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욱 그 욕망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모방 욕망이라는 속성이 어떤 한 개인, 혹은 한 집단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게 된다.

 

여기까지가 그의 초기 작품들을 이용한 이론이자 분석이다. 여기까지는 그가 문학 비평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 줬다면 (다양한 문학 작품을 분석함), 그 이후에 [폭력과 성스러움]을 쓸 때부터는 그는 문화 비평가, 문화 인류학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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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봐도 궁금해 지는 책이다.

 

20세기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두 거장인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다.

 

책의 저자가 고등학교 사회 선생님임을 고려할 때, 이 책은 정말 대단하다.

[비트겐슈타인도 학교 선생님의 위치에 있었던  경력이 있다는 점이 떠오른다]

 

저자는 하이데거는 '현상학'이라는 방법론으로 철학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갔다면, 비트겐슈타인은 '분석철학'이라는 방법론으로 철학적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구성이 깔끔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필요한 '선지식' 들을 미리 학습시킨 뒤에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이라는 두 인물의 생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각 철학자의 대표 이론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며 마지막으로 두 철학자를 대결 구도로 만들어서 이야기를 융합시키며 마루리한다.

 

둘의 차이점이 드러나는 몇 구절을 나눠보자.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의미'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의미하고는 거리가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의미를 그것이 표현되는 언어로 국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에서 그것을 밝히려고 애썼다."

 

"하이데거 철학에 등장하는 시구와 같은 언어들은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많은 단계의 명료화를 거쳐야 하는 애매모호한 문장이었을 테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을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신비로운 영역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비트겐슈타인이 하이데거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영역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마르틴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이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해 남긴 유일한 글이 있다.

 

"나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불안으로 무엇을 의미하려고 하는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은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하는 충동을 가지고 있다. 가령 무엇이 존재한다는 어떤 경이로움을 생각해보라. 이러한 놀라움은 질문의 형태로 표현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답변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느끼는 모든 것은 이미 경험에 앞서서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언어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은 바로 윤리이다.

(필자 의견: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개념이 윤리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양심이나, 영혼, 신비주의적인 무언가, 누미노제의 체험 등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윤리에 대한 한담을 멈추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지식이 존재하는지, 가치가 존재하는지, 선은 정의될 수 있는지 떠드는 것은 윤리에 대한 한담에 지나지 않는다. 윤리에서 우리는 그 문제의 본질에 관계하지 않고 또 관계할 수도 없는 것에 대해 말하려고 시도한다.

 

선에 대한 정의를 제시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본래적인 것에 대응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마치 무어가 그랬듯이 언제나 오해이다. 그것은 진실로 논리적으로 확실하다. 그러나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경향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가엾은 인간이여, 너희들은 무의미한 것을 말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원하는가? 무의미한 것을 말하라. 그것이 어떤 차이도 만들어내지 않는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을 때, 그는 바로 이 점을 알고 있었다."

 

다시 저자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을 논리실증주의로 오해했던 카르납이 하이데거 철학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과는 달리, 오히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경이로움의 세계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언어의 한계로 보았다."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이 하이데거 철학에 가까이 다가간 것 같은 구절이 있다.

 

"세계 안에서 사물들이 어떤 방식으로 있는가 하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비스러운 것은 하여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경험은 어떤 것이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튼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험이 아니다. 논리는 모든 경험에 앞선다. 즉 무엇이 그렇게 있다는 경험에 앞서 아무튼 무엇이 있다."

 

이 책의 제목처럼 하이데거는 존재의 차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의 차원에서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 하이데거는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분석을 통해 그 철학적 문제를 해명하고자 했다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그들의 관심 영역이 다르다 보니 하이데거 철학은 나중에 실존주의 철학의 다양한 분파를 만들어 냈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분석철학의 다양한 흐름을 만들어 냈다.

 

결국 결론은 하이데거는 경이와 신비로움으로 가득 찬 삶의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고,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와 자아가 뒤엉킨 삶의 양식을 철학으로 설명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세계의 내용을 드러내려 했고, 비트겐슈타인은 드러난 내용의 형식을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해 다듬으려고 했다.

 

결국 내용과 형식을 각각 추구한 두 철학자의 사유를 잘 융합시키면 더욱 풍성한 '삶'을 해석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저자는 철학하기의 의의를 말미에 남겨둔다.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처럼 일상 생활이나 과학이 가져오는 정보를 알기 위해 철학은 그것이 왜 가능한지를 정확히 분석해서 그 정보에 사용되는 의미를 밝힐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이나 과학이 설명하고자 하는 세계의 경이로움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이나 과학이 추구하는 진리를 외면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현대 과학지상주의가 불러일으키는 여러 현상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철학임에 틀림 없다."

 

 

두 철학자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이해를 돕고, 사유를 확장해 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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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인문학 붐이다. 그래서 다양한 인문학 묶음, 요약, 정리 서적들이 서점가에 난무하고 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이며 포문을 제법 잘 열어준 책이다. 시리즈가 잘 팔려서 후속작들도 잘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인문학 바람'이 불고 나서, 너도 나도 '교양'을 쌓기 위해 '인문학' 책을 찾아 두리번 거리던 중, 전반적인 분야를 한꺼번에 설명해 둔 유용하기 짝이 없는 책이 있음을 알고 많이들 구입해서 봤을 것이다.)

 

이 책은 '심리학, 회화, 신화, 역사, 철학, 글로벌 이슈' 라는 방대한 주제를 담아내는 기염을 토한다.

 

저자의 박학다식함, 다독에 놀랍기도 하고 그의 전공이 사회복지학+심리 치료 쪽임을 알고 나서 자신의 전공을 넘어 '학문하기'에 힘쓰는 저자의 모습에 존경심이 생긴다.

 

 

이 책은 마치 백과사전 같은 느낌이다. 역사면 역사, 심리학이면 심리학, 철학이면 철학 [철학에 특히 많은 힘이 실려 있다] , 글로벌 이슈면 글로벌 이슈.

(역시 굵직하고, 탄탄한 철학적 베이스가 잘 깔려 있는 사람들은 어떤 학문을 설명해 내도 깊이가 있고 깔끔한 맛이 있다.)

 

뭐 하나 버릴 것 없이 밑줄 쫙쫙 그으면서 읽어도 될 만한 유용한 책이니 뭔가 세상을 이해하는 폭을 넓히고 싶다면 당장 사서 읽어봐도 좋다.

 

생각보다 내용이 많고 두꺼우니 다 읽는데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인문학'을 이 한권으로 개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정도의 시간 투자는 아깝지 않을 것이다.

 

googling

 

너무 많은 인물과 주제를 한 권에 담으려고 하다 보니, 때론 철학 파트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 아쉬울 때도 있고 뭔가 이해될 듯 하면 다음 인물로 넘어가 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 정도는 너끈히 감수해 주고 읽자.

(결국은 개별적인 학자들의 1차 서적을 이 책을 토대 삼아 정복해 나가야 한다는 과제가 남을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은 저자의 주관적인 해석이나 분석에 대해 심도있게 다른 의견을 개진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이 책의 후편인 [PERFECT] 가 써 있는 2편도 있다고 하니, 내친 김에 거기까지 읽어 두면 든든할 것이다.

 

(책에 알찬 내용이 많아서 기회가 된다면 세부적인 내용들은 따로 글로 올릴 예정이다.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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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부버의 대표 저서인 [나와 너]는 유럽 대륙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며 프롬, 베르쟈예프, 만하임, 데일리, 니버와 같은 철학자, 교육학자, 신학자 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책이 두껍거나 글이 많지는 않지만 쉽진 않다. (왜 깊이 있는 책은 늘 어려울까)

(언어 장벽만 없으면 원서로 읽는 게 최고인 듯 하다.)

 

쉬운 듯 하면서도 쉽지 않은 책이다.

 

 

일단 나-그것(I- it) 으로서의 만남이 아닌 나-너(I - Thou) 로서의 실존적이며 인격적인 만남을 강조하는 그의 고백은 서로를 대면하는 방식이 피상적이 되어가고, 객체화 되어가는 이 시대 가운데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 준다는 점을 결론적으로 말해 두겠다.

 

그의 이야기를 조금씩 들어 보면서 이야기를 해 나가자.

 

근원어 '나-너'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해질 수 있다. 온 존재에로 모아지고 녹아지는 것은 결코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너로 인하여 '나'가 된다.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이와 같은 고백은 기독교에서 중요시 여기는 귀결점과도 유사하다. 나우엔도, 투르니에도 궁극적인 지점에서 '만남'을 강조했었다)

-> 실제 삶을 살아보면 그 '관계', '만남'이 가장 큰 인생의 장애물인 것도 사실이다. 도저히 사랑하거나, 용납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타자를 용납해 보려는 시도. 이것이 바로 가장 큰 용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지점을 받아들일 때 기독교의 십자가에 대한 해석도 가능해질 것이다.

 

"제멋대로 사는 사람은 믿지 않으며 만나지 않는다. 그는 맺어짐을 모르며 오직 밖에 있는 열에 들뜬 세계와 그것을 이용하려는 자기의 열병같은 욕망밖에는 모른다. 이용에 대하여 사람은 하나의 고대의 이름을 붙여줄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그것은 여러 신 중의 하나로 변한다. 이 같은 사람이 '너'라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너,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이여'라는 뜻이다."

 

 

(이 시대는 진정한 만남이 결여되어 가고 있다. 수 많은 군중 속에 소속되어 있지만 각각의 실존은 고독하기 짝이 없다. 나를 이용해 먹으려 하고, 자신의 유익만을 좇는 불나방 무리와 같은 세대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참다운 '만남'을 갈망하게 된다.)

 

"예수가 말하는 '나'는 얼마나 강력하고 거의 압도적이며 그 얼마나 정당한 것일까! 왜냐하면 이 '나'는 절대적 관계의 '나'이며, 그 관계 속에서 예수는 그의 '너'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자신은 오직 아들이고 아들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가 '나'라고 말할 때의 그 '나'는 언제나 그에게 있어서는 오직 절대적인 차원으로 올라가 있던 성스러운 근원어인 '나'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영원한 너'는 아름답다. 이 개념 속에 인격적인 하나님을 대입해서 읽어보면 참으로 멋진 고백이 나온다.

 

"모든 낱낱의 '너'는 영원한 '너'를 들여다보는 틈바구니다. 낱낱의 '너'를 통하여 저 근원어는 영원한 '너'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영원한 너와의 관계를 위해 '나'란 존재를 포기하지 말아라고 그는 말한다. 성경에 나오는 '자기 부인'이라는 개념을 해석하는데도 도움이 되는 설명이다.

 

"'나'는 모든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관계에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계는 '너'와 '나' 사이에만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포기해야 하는 것은 '나'가 아니라 저 그릇된 자기 주장의 충동, 즉 의지할 수 없으며, 엉성하고, 지속성도 없고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험한 관계의 세계로부터 사물을 소유하는 것에로 인간을 도피하게 하는 자기 주장의 충동인 것이다."

 

 부버의 '신 관념'에 대한 설명은 그의 '만남'에 대한 '실존의 참 의미'에 대한 해석과 절묘하게 어우러져서 멋진 해석들을 도출해 낸다.

 

"신을 '그' 또는 '그것'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언제나 비유(Allegorie)이다. 그러나 우리가 신을 '너'라고 부른다면, 그때에는 우리들 유한한 인간이  세계의 완전한 진리를 올바르게 말한 것이 된다."

 

-> 이는 마치 "진리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진리는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으로 수정해 주는 기독교적 도전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진리는 사물이나 개념이 아닌, 인격이다. 

실존적 고뇌, 고립으로 방황하는 인간

 

"이 세상에 있는 참된 관계는 배타적이다. 관계에서 배제된 타자는 그 관계에 뚫고 들어와 배제된 데 대한 복수를 한다. 오직 신에 대한 관계에서만은 무조건적인 배타성과 무조건적인 포괄성이 하나가 되며, 그 안에 만물이 포괄된다."

 

"사람은 그의 삶을 '신과 맺는 참된 관계'와 '대상 세계와 맺는 '나-그것의 관계'의 둘로 나누어 놓고 한편으로는 신에게 진실로 기도 드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상 세계를 이용하면서 살 수는 없다. 세계도 이용하여야 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가진다. 그런 사람의 기도는 다만 자기의 짐을 벗으려는 방편에 지나지 않으며, 그 기도는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신을 알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이다. 밤의 어둠 속에서, 그리고 초라한 다락방의 창을 내다보며 그리움에 젖어 '이름 모를 자'를 부르는 무신론자는 결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니다."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종교인보다는 깊은 갈망을 지니고, 참된 만남을 갈망하는 신비주의자, 열린 마음을 지닌 자들에게서 더 큰 희망을 찾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타슈를 섬기던 기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러한 부분에서 문자적 해석과 보여지는 틀을 중시하는 보수 기독교에서는 '실존 철학'을 매우 싫어하지만, 이와 같은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귀하고 멋진가?

(이것이 쉐퍼의 한계이며, 칼빈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점 아닐런지..)

 

이 책의 말미에는 역자의 후기가 담겨 있다. 이 속에서 부버의 사상에 대한 몇 가지 깔끔한 정리를 들어보도록 하자.

(부버의 말 자체는 상당히 어렵고 난해할 수 있다. 그러니, 이러한 해설서를 같이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부버는 예언자다운 형안으로 고도의 기술 혁신에 의한 기계화가 인간의 비인간화, 자기 상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님을 꿰뚫어 보았다.

 

위기의 핵심은 오히려 이러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그의 이른바 근원어 '나-그것'의 지배 아래 스스로를 매몰해 버리는 데 있으며, 이미 사람이 근원어 '나-너'를 말하는 기쁨을 잃어버린 데 있다는 것이다."

 

"나는 절대자에 대한 여러 가지 확실한 설명을 갖춘 '체계'의 평원에서 휴식한 적이 없다. 아니, 내가 가는 앞길은 언제나 좌우에 깊은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좁디좁은 바위등성이뿐이었다. 이와 같은 등성이에 있는 자는 절대자에 대한 확실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 아니, 이 등성이에서 확실한 것은 다만 아직까지 아무에게도 드러나지 않은 그 무엇과 만난다는 것 뿐이다."

 

결국 그는 '만남"(Meeting)이라는 것을 사상의 핵심으로 삼고 있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부버를 '만남'의 철학자, '관계'의 철학자, '대화'의 철학자라고 부른다.

 

마틴 부버

 

그가 [나와 너]를 6년여에 걸쳐 쓰는 동안 그의 철학은 '신비주의' 에서 '실존주의'로 이행하면서 모양새를 갖춰 나간다.

 

"'나-너'는 내가 '나'의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비로소 말할 수 있는 데 반해, '나-그것'은 '나'의 온 존재를 기울여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그것'의 관계는 인간의 객체적인 경험 - 지식 세계의 것이요. '나-너'의 관계는 인간의 주체적인 체험 - 인격 세계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나-그것'이 아닌 '나-너'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나'의 온 존재를 기울인 행위를 힘써야 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성이 상실되어 버린 이 시대에 우리는 다 '그것'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그것'의 존재가 나쁘거나 필요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적 관찰, 지식의 획득, 종교적 교리 설정, 철학적 인식 등에서는 '나-그것'의 관계를 설정하고 살아야 할 때가 있다.

 

Googling

 

결국 '나-너' 의 세계와 '나-그것'의 세계는 전혀 다른 별개의 세계가 아닌 이중적이고 상호적인 세계이다.

 

단지, 너무 많은 영역에서 '그것'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점에 대해 우리는 '나-너'의 관계 회복에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버는 '나-너'의 관계는 결국 '나-그것'으로 바뀔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너'를 더욱 강하게 끌고 가서 '영원한 너'를 대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곧 하나님이다.

 

그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나-너'의 관계를 온전히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삶은 혹시 '나-그것'의 관계로만 점철되어 있진 않은가? '나-너'의 인격적인 만남이 그리운 이들이라면 '영원한 너'를 만남으로써 그 참된 관계들도 지켜 나가는 행복을 누려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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