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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마음으로 시달리나느 사람들이 힘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시련이 현실과 인생을 남들보다 오히려 더 깊이 체험하는 '좋은 우울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만난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은 참으로 선량한 사람들, 아주 좋은 사람들, 아주 아름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양심을 지키고 이상을 버텨 내고 순수한 사랑을 꿈꾸기에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는 때로 황당하리만큼 크기만 합니다.

 

그들이 남몰래 아파하는 시간들이 얼마나 길고 불안하고 고독한 것일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러나 힘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극도로 성가시게 보이는 현실이지만 이 현실에도 우리 손에 의해 매만져지고 사랑 받을 권리를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아픔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영원과 무한의 의미가 시련들을 빼곡이 채웠으면 좋겠습니다.

 

아픔들 자체가 현실을 처절하게 담고 있는 진솔한 인간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픔에 하나님이 새겨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와 같은 과르디니 신부의 마음이 잘 반영된 책자다.

 

 

얇지만 상당히 깊은 철학 서적이며 앞 챕터에서는 '우울한 마음의 의미'를 깊게 고찰해 보고 두 번째 글인 [키에르케고르 사유 여정의 출발점]에서는 우울한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의 여러 가지 중요 사상과 개념들을 잘 정리해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울한 마음'에 대한 깊은 사색과 동시에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이 얇은 책자는 유용하다. (사실 키에르케고르의 1차 서적도 만만치 않게 어렵기 때문에 2차 서적으로 사용하기 좋다.)

 

선천적으로 우울한 기질을 타고나는 이들이 있다. 때론 환경적인 요인이 그에 힘을 실어주기도 하는데 그들이 치열하고, 성과를 내야 인정 받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다.

 

그 속에서 과르디니 신부는 '좋은 우울감'을 지니고, 그 기질을 잘 활용할 것을 촉구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긍정 받고, 그 속에서 '존재'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을 더해준다.

 

종교철학 교수로 오래 활동했었던 만큼, 그 글이 생각보다 쉽게 읽히진 않지만 천천히 곱씹어 보며 읽는다면 가벼운 '위로'를 던지는 다른 심리학 서적보다 훨씬 더 깊은 힐링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중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상처 나기 쉬운 내면은 상처를 입히는 것을 피해 달아나려고 애씁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러나 또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울감에 젖은 사람의 심리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이 아주 철저한 이타주의적 기질을 가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입니다)"

 

"우울감에 빠진 사람은 혼자 있을 때에 비로소 마음이 편해집니다. 우울감에 빠진 사람만큼 정적과 고요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울감은 우리가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데 대한 표현이고, 우리가 - 이제부터는 여태껏 사용한 너무 조십스럽고 추상적인 단어 '절대자'를 버리고, 그 대신 실제로 적절한 단어인 '하나님'을 사용합시다 - 하나님과 벽을 맞대고 아주 가까이 살고 있다는 데 대한 표현입니다.우리가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이라는 사실, 당신을 우리 삶 안에 모셔들이도록 부르신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울감은 영원한 것이 인간 안에 태어나는 그 탄생의 아픔입니다."

 

"좋은 우울감은 영원한 것이 태어날 수 있도록 그에 앞서가는 우울감입니다."

 

"인간의 의미는 살아 있는 한계로서 살아가는 것이고, 그런 한계의 삶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것을 끝까지 짊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실존 철학적 세계관을 가지고, 그는 '우울감'의 근원을 추적한 뒤, 하나님 안에서 '존재'의 받아들여짐을 고백한다.

 

그 뒤에 나오는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설명도 도움이 많이 되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글을 올리겠다.

 

(사실, 이 의미를 삶으로 체득하면서 버텨내는 작업이 본격적인 싸움의 시작인 것 같다. 이와 같은 이론의 진실을 머리로 학습하고 세상 속에서 그 우울감 속에 몸을 한번 더 내어던져야 살아지는 세상이기 때문에 실제 마지막처럼 아름다운 고백으로 여생을 마치는 건 만만치 않은 여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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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는 [제 3의 물결]로 잘알려져 있는 저자다.

 

그는 지식이 권력이 되는 고도 정보화 사회의 도래를 예견했었음을 상기해 보자.

(십수년이 지난 지금 시대를 돌아보면 소름 돋을 정도로 맞는 말이다.)

 

그와 비견되는 쟈크 엘륄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역사학자, 신학자로서 현대 기술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는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쟈크 엘륄의 대표적인 기독교 저서들은 상당히 주옥같은 작품들이 많다.)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전개다.

 

내겐 친숙한 손화철 교수님이 글을 쓰셨는데, 지식인 마을 시리즈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믿고 보는 부분이 있다.

(쉽게 접근 가능하고, 얻을 내용도 제법 있는 시리즈다. 시리즈 간의 편차가 좀 있긴 함.)

 

이 책에 나와 있는 화두를 그대로 옮겨 보겠다.

 

"기술의 주인이 될 것인가, 하인이 될 것인가?

 

 

우주 여행과 인간 복제 그리고 유비쿼터스의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토플러는 [제3의 물결]로 농업혁명이 몰고온 제 1의 물결과 산업 혁명이 일으킨 제2의 물결에 이어 정보가 곧 권력이 되는 지식정보화사회의 도래를 예견하고 재빨리 그 변화의 물결을 탈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한편 엘륄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 되어버린 현대 기술 속에서 인간 역시 기계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한 채 기술의 하인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경고한다.

(소설 [듄] 에서처럼, 과학의 발달 자체를 버려 버리고 다시 원시적인 느낌으로 돌아가야 할까?)

 

지금까지 인류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술사회라는 특수한 상황을 맞이한 우리는 어떤 시각을 가지고 미래를 준비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저 양 극단을 조심하면서, 현재 주어진 기술을 적절히 선용해 보는 게 최선이 아닐까 생각은 해 본다.

 

엘빈 토플러

 

그러나 극단의 주장들이 필요하고, 중요할 때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들어봐야 한다.

 

지식인 마을 시리즈는 앞에 컬러로 된 지도가 있다. 이 마을에는 플라톤가, 다윈가, 촘스키 가, 아인슈타인 가가 있고 다양한 철학자, 과학자, 정치학자 들이 포진되어 있다. 새로 분양을 받고 있는 새싹마을도 그려져 있어서 깨알같은 재미가 있다.

 

이 책은 다른 지식인 마을 책들보다 더 분량이 적다. 대신 영화나 다른 도서, 인물에 대한 재미있는 설명이 겻들여져 있어서 접근하기가 수월하다.

 

'기술'에 대해서 확실히 이해를 시킨 다음에 '복제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계속 할지, 말지에 대한 가상 토론'을 통해 두 학자의 입장을 정리하는 구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같이 토론해 볼 만한 내용들을 여러가지 실어놨기 때문에 특정한 길을 제시하는 책이라기 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현대 기술 문명'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보고, 비판적인 사고를 기를 수 있게 도와준다고 볼 수 있다.

 

쟈크 엘륄

 

기술이 경제발전을 이끄는 건지, 경제발전이 기술을 이끄는 건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 , 그리고 생명 공학의 발달이 우리에게 오직 행복만을 보장해 줄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 ,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와 같이 평소에 고민해 보지 않았던 문제들,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 쉽게 '기술의 혜택'을 누리다 보니 간과하고 있던 영역들을 재점검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가치가 있다.

 

엘륄과 토플러의 1차 서적으로 접근하기에는 딱딱하고 재미 없을 테니, 이 책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그 다음 공부를 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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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참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과학과 신학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이 시대의 몇 안되는 신학자이기 때문에 그는 중요하다. 

 

이 책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9.11 테러 이후에 등장하기 시작한 New Atheism (새로운 무신론) 운동에 대한 설명서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그들의 행보가 어떤 측면에서 문제가 많은지를 조명해 주고 있다.

 

이 책은 일종의 역사서, 인물서라고 봐도 무방하다.

 

서두에서 새로운 무신론의 선두주자들에 대한 인물 설명이 제시되어 있다.

 

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대표적인 인물들로 소개되어 있는데, 맥그라스는 도킨스의 여러 주장들 중 '밈'의 개념에 대해서 그 실체를 전혀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을 반박하고, 대니얼 데닛의 어설픈 철학에 대해 비판을 시도하며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황당 무개한 주장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반박한다.

(에드워드 윌슨, 칼 세이건 등 다른 주류 유물론적 자연주의자들도 함께 주목해 보자.)

 

'밈'의 '허구성'에 대한 부분은 나도 동의하는 바이고, 대니얼 데닛의 논증이 유신론적 철학자인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 처럼 정교해 보이지 않고 고작 몇 페이지 만을 가지고 어설픈 논증을 마무리 짓는 그의 모습에서 당혹스럽다는 점에서도 의견이 같다.

 

 

히친스의 저서는 읽어보진 않았지만 맥그라스가 인용한 내용에 따르면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히친스는 자신의 책에서 일부 핵심 종교 사상에 대한 자신의 분석이 빈약하다면 그것은, 그 사상을 제대로 다룰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사상이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제시하는데 황당하기 그지없다.

 

사실,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저서 중에서 제대로 된 철학이 가미된 변증서를 도통 찾기가 어렵다.

 

히친스는 역사적인 지식도 많이 부족해서인지 히틀러의 나치즘에 반대해 죽음으로 저항한 본회퍼 목사의 자세를 두고 "가상하긴 하나 모호한 휴머니즘"에 입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본회퍼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행했는지에 대한 사전 조사도 안 해 봤음을 반증한다. (참 지성인이 맞는 건가..)

 

그리고 히친스는 미국 인권운동 지도자인 마틴 루터킹이 실질적인 의미에서 기독교인이 아니었다고 말하는데 그 증거는 없다.

 

더 나아가 히친스는 테레사 수녀를 "광신도, 근본주의자, 사기꾼"이라고 혹평하며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녀로 인해 비참해졌다. 그 매춘부가 가야 할 지옥이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 이 부분은 히친스가 실수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했다고 한다. (OMG)

 

알리스터 맥그라스

 

이 책은 최근에 등장한 새로운 무신론을 기존의 온건한 무신론이나 열렬한 무신론과 구분하는데 왜냐하면 후자의 두 가지는 반드시 반유신론 적인 것은 아닌 반면에 새로운 무신론은 반드시 반유신론이어야 한다.

 

온건 무신론자들은 유신론자들과의 대화에 기꺼이 참여하려 하는데 그 예로 움베르토 에코와 로마 추기경인 카를로 마르티니의 대담을 들 수 있다. (이 둘의 대화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읽어볼 만 하다)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종교는 괴이하고 위험해 보이지만 실상 그 증거는 불명확해 보인다.

 

그들의 공격성은 하늘을 찌르기 때문에 맥그라스도 이들로부터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직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고 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때 맥그라스를 지지해 준 건 온건한 무신론자들이었다고 한다. 자신과 다른 관점을 지닌 이들을 향한 일말의 공간도 남겨두지 않고 그저 타자를 조롱거리로 만들고, 비참하게 만드는데만 에너지를 쓰는 '새로운 무신론 운동'은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새로운 무신론은 흥왕하고 있을까?

 

이 책에서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이야기 한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북미에서 100만부 가까이 팔리는 기염을 토했지만 릭 워렌 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삶]은 북미에서만 3천만부가 팔렸다. (도킨스 책보다 더 많이 팔린 그들의 대표 저서는 없을 테니, 나름 생각해 볼 만한 수치다)

 

그리고 2007년 말 설문 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무신론자로 분명히 규정하는 미국인은 4퍼센트에 불과했다.

 

새로운 무신론의 참신한 면은 종교에 대한 비아냥에 더 심해진 것 뿐이지 비판의 본질이나 내용의 질은 전혀 참신할 게 없다는 점도 이 새로운 운동의 한계점이다.

 

New Atheism 의 주인공들

 

재미있는 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노르웨이의 휴머니스트 잡지인 "자유 사상"(Fri Tanke)에 바지니란 사람이 글을 실었는데 그 제목은 "새로운 무신론 운동은 파괴적이다" 였다. 왜냐하면 새로운 무신론 운동은 자신의 긍정적 신념이 아닌 종교에 대한 공격에 더 힘을 쏟으며, 이성에 대한 독점권을 오만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보이지만 이 글로 인해 바지니는 RichardDawkin.net의 여러 비평가들에 의해 이단자로 낙인찍혀 화형 당했고, 벌레, 머저리, 든 거라고는 공기 밖에 없는 에어백이라는 평가를 들어야 했다.

 

이성과 증거가 자신들의 신념을 뒤엎는다 하더라도 이를 중시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이 보여줄 만한 행동은 아니지 않는가?

 

이는 마치 종교 근본주의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교조주의 적이고, 편협하고, 앞뒤가 꽉꽉 막혀서 도무지 대화하기가 어렵다.

 

이 책에서 맥그라스는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해 주면서 동시에 신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분명한 비판을 가한다.

 

잠시 맥그라스가 신무신론 운동의 대표주자인 도킨스에 대해 남긴 평가를 들어보자.

 

"도킨스는 무신론의 어두운 면을 너무나 쉽게 부인하는 경향이 있기에, 우리는 그를 믿을 만한 종교 비판자로 간주하기 어렵다. 그가 내세우고 표방하는 바, 엄정한 증거에 입각한 추론을 그의 분석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도킨스는 무신론의 보편적 유익을 열렬하고, 경건하고, 무비판적으로 믿는 나머지 자기 자신은 비판적 검토 과정을 거치려고 하지 않는다."

 

이 책은 마지막 부분에 가면 "종교는 폭력적이다" " 종교는 비이성적이다" "종교는 비과학적이다" 라는 신무신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하나 하나 반박을 해 나가는데, 맥그라스의 진가가 잘 드러나는 깔끔하고 논리적인 반박이 이뤄진다.(따로 정리해서 올릴 수 있으면 올리겠습니다.)

 

그 내용에 대해 재반박이 가능하다면 시도해 보는 것도 무신론 측 진영에서는 시도해 볼 만 할 것이다.

 

그러나 최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신무신론 운동의 위험성과 문제점들을 잘 알고, 그에 적절히 대처해야 한다는 점을 환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상당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관련된 저서들을 많이 읽어온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깔끔한 정리와 요약, 그리고 새로운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맥그라스는 맥스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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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에 선 신학자로 소개되었던 폴 틸리히의 명저다.

'존재'의 용기'. 제목만 가지고도 은혜가 되는 책이라고 보면 된다.

(제목에서 그치는 게 더 은혜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인이 읽었을 때 쉽게 읽히는 책은 절대 아니다. 

 

제목에서만 위로 받고, 내용에서는 시험 들 수 있는 책이라고나 할까?

(진중한 이야기 하는 어르신들 책은 하나같이 다 이런 식이다.)

 

그러나 꼼꼼하게 철학 읽기를 훈련해 온 독자들이라면 그의 글이 상당히 깔끔한 필체로 잘 읽히며, 논리적으로도 쫓아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다. (사람마다 상대적이리라 생각한다)

 

폴 틸리히는 루터교회에서 목회 안수를 받았고, 나치에 의해 교수직을 박탈당했었다. 그러다가 세계적인 신학자인 라인홀트 니버로부터 뉴욕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쳐 달라는 제의를  받고 그곳에서 교수로 재직하였고, 퇴임 후에는 하버드 대학교 석좌 교수로 초빙되었다. 마지막으로 시카고 대학으로 옮겨서 신학을 가르치다가 사망하였다.

(그는 워낙 세상과 소통을 고민하는 신학, 교회 밖을 향한 신학을 지향했다 보니 그가 설교를 할 때면 무신론자들도 채플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최고로 존경스러운 분이다.)

 

yes24 사진

 

이와 같은 이력에서 보다시피 그는 신학자로서, 철학자로서 상당한 학식을 갖추고 있었고, 신학을 하는 사람으로는 드물게 무신론적 철학자들에게도 존경을 받았었다.

 

그는 20세기 중엽, 사려 깊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사로잡고 있던 영혼과 마음의 위기에 대하여 설득력 있는 논지를 펼친다.

 

그의 다른 별명은 '지식인들의 사도', '신학자들의 신학자'이다.

 

그만큼 그는 넓은 독자층을 지녔었고, 많은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 책은 꽤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조금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책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면 종교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세상 속에 혼란과 절망이 가득차 있을 때 틸리히는 자신만의 이론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에게 있어서 '실존주의'는 단순한 태도가 아닌 내용으로 이해되었고, 그 용어를 3가지로 세분화 시켰다.

 

[1] 관점으로서의 실존주의

[2] 의식적인 저항으로서의 실존주의

[3] 표현으로서의 실존주의

 

그에게 있어서 실존주의는 이러했다.

(쉐퍼는 폴 틸리히가 실존주의를 신학에 가져왔다고 강하게 비판했었다. 일견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 있긴 하지만, 틸리히로부터 배울 수 있는 요소들도 많이 있다는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어찌 보면 세상을 녹여내는 깊이는 쉐퍼보다 폴 틸리히가 훨씬 깊다고 본다.)

 

"실존주의는 보헤미안적 철학자나 신경이 예민한 소설가의 창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이익이나 명성을 얻기 위해 만든 선동적인 과장도 아니고 부정적인 것에 병적으로 집적거리는 것도 아니다. 앞에서 제시한 그런 모든 요소들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으나, 실존주의 자체는 그것들과는 다른 무엇이다. 실존주의는 무의미함으로 인한 불안의 표현이며, 이러한 불안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 안으로 포섭하려는 시도의 표현이다."

-> 내가 그동안 들어왔던 실존주의에 대한 해석 중 가장 마음에 와닿는 정의다.

 

 

그는 비판적인 절망과 비창조적인 방종으로 빠지려는 유혹을 받으며 실존주의에 직면한 존재의 용기는 "용납될 수 없는데도 용납된 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용납하는 용기"라고 말하며 "이것이 바울과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의 진정한 의미이다." 라고 말한다.

->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가장 최고의 해석 아닐런지....

 

상당히 심오하고 깊다.

 

그러나 존재론적인 위로가 있는 표현들이다.

 

그는 신학에만 능숙한 게 아니라 탁월한 설교가였다고 한다.

 

'흔들리는 터전'? 같은 명설교들은 꼭 읽어보라는 추천을 받았었는데 끝내 읽어보지 못했다.

 

그 이외에도 You are accepted.(당신은 받아들여졌다) 라는 설교도 유명한데 그는 이 설교에서 죄가 '소외 혹은 분리'라는 유명한 정의를 내렸고, 인간의 상황을 하나님으로부터, 자아로부터, 이웃으로부터의 분리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은혜를 '용납'으로 재정의하기까지 한다.

 

틸리히는 새로운 신학 용어도 잘 만들어냈고, 새로운 정의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또한 틸리히는 운명과 죄의식의 불안에 대한 반응으로서 '확신의 용기'를 지니라고 촉구한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이론적인 주장이 아니었고, '용납됨을 용납한다고 하는 역설적인 태도의 특징'(본문 209page)이었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렇지 않다'고 알고 있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며, 받아들이기 힘든 교회적인 선포의 모음도 아니며 믿음은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의 용납을 받아들이는 용기로 재정의하였다.

 

그의 신학이 인생 후기에 동양 종교에 관심을 기울이고, 너무 세속적인 색채로 흘러갔다는 비판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신학 전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인간을 억누르는 세상이 지닌 힘의 궁극성을 부인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가 끊임 없이 무너져 가는 현대 사회와 소통하려고 했다는 점도 그의 멋진 점이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한 '존재의 용기' 또한 깊게 숙고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최소 쉐퍼가 비판했던 것처럼, 읽을 가치도 없고 위험하고 그저 피해야 할 취급을 받아선 안된다고 믿는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하버드 대학교의 동료 교수인 제임스 루터 아담스는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틸리히는 평생에 걸친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서, 로마의 지배력이 서방에서 쇠퇴해 가던 절망적인 시대에 어거스틴이 시도하던 바로 그 일을 수행하려고 애썼다.

 

즉, 찌꺼기들만 잔뜩 쌓여 있는 고갈된 믿음을 회복하고 신앙적인 상징들의 능력을 새롭게 하려는 희망을 품고서 적대적인 모든 사상들과 마주 대했다.

 

그리하여 흩어지고 소원된 마음들이 참된 믿음을 나눔으로써 다시 한번 진정한 '궁극적 관심'으로 회귀하기를 원했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됨을 깨달은 루터의 믿음이며,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을 모두 알고 있는 믿음이고, 인간의 지적 그리고 도덕적 양심을 모두 '의롭게 하는' 믿음이다.

 

논란도 많고, 경계도 많이 하는 신학자이지만 우리는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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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냥 눈으로 보고 끝내지 않고, 천천히 사유하면서 보고 싶어질 때 이 책을 통한 학습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진중권 전 교수는 정치판에 나가는 것보단 미학 관련 책을 쓸 때 가장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1장: 그림을 형식에 따라 분석한 역사를 짚어 본다.

2장: 미술작품을 내용에 의해 해석하려고 하는 '도상학적 관점'을 소개한다

3장: 작품의 내용을 그것을 창조한 예술가의 심리의 산물로 간주하여 분석하는 '정신분석학적 해석'의 방법을 소개한다.

4장: '사회학적 방법'을 다룬다.

5장: 여성주의적 관점에 따른 작품 분석으로 지금까지 예술의 영역에서 제외되었던 여성의 역사를 살펴본다.

6장: 기호학적 관점에 따라 작품을 분석하는 예를 보여준다.

7장: 이제까지 살펴본 방법으로 해석하기가 곤란한 '현대 미술'이라는 문제아를 다룬다.

 

1,2장: 형식과 내용의 대비

3,4장: 개인의 심리와 사회의 대비

5,6장: 가장 최근에 생긴 새로운 대안적 흐름

7장: 기존의 이론으로 해석하기 힘든 현대 미술을 감상하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

 

 

이와 같은 구성을 눈에 발라두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면 굉장히 재미 있다.

 

컬러가 살아 있는 생생한 미술 작품들을 눈으로 보면서 글을 읽어 내려가면 되기 때문에 술술 잘 읽히는 편이다.

(평소 예술 작품을 좀 더 깊게 들여다 보고, 해석하는 재미와 분석하는 재미를 추구하는 성향을 지녔다면 이런 류의 책들은 제법 구미가 당길 것이다.)

 

이미 <미학 오딧세이> 로 필력과 전달력, 창의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진중권 교수가 직접 참여해서 그런지 몰라도 일단 이 책은 참 재미있다.

(그러나 10여년 전 읽다가 중단한 <현대 미학 강의> 책은 너무 어려웠다. 한 차원 더 진화된 '미학'을 경험하게 되는데 깊게 들어가면 너무 어려워서 대중성이 확 내려가는 것 같다. 모든 학문이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넓고 얇게 경험하는 게 때론 도움이 되기도 한다.)

 

정신분석을 이용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분석한 부분이라든지 현대 미술에서 철학적 함의와 언어 활용을 적극 고려한 점 등 참신하고 구미를 당기는 다양한 읽을 거리로 가득한 이 책은 '미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워낙 책이 자체적으로 주는 시각적 만족감 등이 커서 직접 구매해서 읽어보는 게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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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이기도 한 자크 라캉의 대표 저서 [에크리]를 김석 님이 분석해 둔 책이다.

1차 서적으로 라캉의 저서를 접하기엔 너무 난이도가 높아서 2차 서적으로 살펴봤다.

(철학자들의 1차 서적은 왜 이리도 읽기가 힘든걸까?)

 

심리학을 다루며 스스로를 프로이트의 온전한 계승자로 주장하는 라캉이지만, 그럼에도 철학자적인 마인드가 강하게 박혀 있다 보니, 분류를 할 때 '철학자'로서의 라캉이 더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도 자신의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해서 정신 치료도 하고 임상적인 부분을 아얘 놓진 않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정신 분석 치료는 어떠했을지 상당히 궁금해 진다. 실제로 치료 받으면 치료가 될까?)

 

 

프로이트의 딸인 안나 프로이트 등이 자아 심리학에 경도되어 있을 때, '진정한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주창했던 그는 정신분석협회에 반기를 들고 정신분석이론에 새로운 혁신을 주장한다.

 

그는 철학, 언어학, 인류학의 성과를 접목시켜 정신분석을 '말하는 주체'의 과학으로 재창조시켰다.

 

그리고 무의식의 '언어적 본성'과 '욕망'을 새로운 시각으로 설명함으로써 정신분석이 오늘날 인문학과 예술비평의 토대이론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한 성깔 하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이론을 인정 받고자 세미나에서 발표를 열심히 했으나 그 세미나의 의장이 도중에 중지를 시켜 버리며 제대로 인정을 해 주지 않자, 세미나 도중에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리기도 했다고 하는데..

 

요즘들어 라캉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이 시리즈 책들이 다 읽기가 좋고, 재미도 있다.

 

뭔가 너무 과하다 싶은 푸코나 데리다의 철학이 싫은 이들이, 참신한 이론적 토대 위에서 실천과 삶을 배제하지 않는 라캉의 이론이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일까?

 

그러나 그의 저서는 너무 어렵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저서를 '읽을 수 없는' 저서라고 평했을 정도이니 말 다하지 않았는가?

 

구조주의 선구자로 등극한 라캉.

 

상징계, 대타자, 시니피앙 등의 개념을 가지고 전통적인 주체 개념을 전복시키는 혁신을 드러냈지만 도무지 그의 1차 서적은 읽히질 않는다.

 

그 사람의 성격이 반영된 듯한 괴짜같은 문체는 어떻게 설명할 방도가 없다. (물론 잘 이해되고, 지적인 희열을 느끼는 이들도 있긴 할 것이다.)

 

기존의 정신분석적인 마인드를 넘어서 철학적인 사고로(언어 철학적인 요소 가미) 무의식을 탐구하다 보니 그의 무의식에 대한 서술은 언어적 유희를 통해 반복되고 빗나가며 고정된 의미화를 벗어나는 시니피앙의 논리 지배를 받게 되는 건 아닐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대상으로 삼아 사유하고, 그것을 설명하고 싶지만 언어에 의해 왜곡될 소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리 저리 피해가고 비틀어 가면서 쓴 책 [에크리]를 알고 싶다면 이 책으로부터 시작했으면 한다.

 

텍스트는 텍스트로 머무는 게 아니라 '나의' 욕망의 언어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에크리]가 던지는 메시지라고 하는데... (이게 뭔 x 소리야! 라는 유명한 GIF 짤이 생각난다.)

 

그는 특이한 성격, 특이한 삶, 특이한 이론을 지니고 맹위를 떨쳤는데 그러다 보니 구조주의자이면서도 구조주의자로 분류되기 애매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기존의 구조주의자들은 주체 혹은 의미적 차원보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영역인 상징적 질서가 더 본질적이라고 주장하는데, 라캉은 '주체'라는 개념을 버리지 않는다는 특이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리고 주체와 상징계의 관계에 욕망을 위치시키고, 욕망의 윤리를 강조함으로써 여타의 구조주의자들과는 다른 특이성을 보여 준다.

 

그리고 [에크리] 이후에는 상징계를 벗어나고 그것에 저항하는 실재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론적인 전환을 보이기도 한다.

 

[에크리는] 는 '상징계와 주체의 관계'를 핵심주제로 삼으면서 욕망, 충동, 결여, 반복, 죽음, 대상 등의 용어들로 이 관계를 설명한다.

 

그는 서두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철학과 언어학을 중요시함으로써 철학에 거리를 두려고 한 프로이트와 대조를 이룬다.

 

그가 철학, 인류학, 언어학 이론의 새로운 성과들을 결합시켜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을 다듬고 이를 통해 프로이트를 재해석하면서 정신분석을 새로운 학문적 위치에 올려 놓는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라캉이 여러 사상들을 적당히 조합하거나 맹목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라캉은 다양한 광물들을 녹여서 새로운 합금으로 제련하는 용광로 같은 사람이라고 저자는 표현한다.

(라캉 같은 완성형 퓨전 학자가 나오니, 라캉에 마르크스에 헤겔도 접목된 슬라보예 지젝도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그는 자신을 언제나 프로이트의 자유로운 독자로 소개했지 프로이트의 제자나 충실한 주석가로 평가하진 않았었다.

 

독자는 작품을 비판할 권리를 지닌다. 그리고 비판적 지성은 독자의 미덕이기도 한다.

 

이 책은 [에크리]에 제시된 라캉의 필수 개념들에 대한 이해도 도울 뿐더러 라캉이라는 사람을 공부하는 데도 친절한 텍스트다.

읽는 재미가 상당하고, 역사적인 배경이나 부연 설명도 재미있으니 꼼꼼하게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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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이야기 나누는 게 어려워진다.

 

젊은 20대 초반 시절에는, 혈기 왕성하게 내가 '진리'라 믿는 것들을 열심히 떠들기 바빴으나...

 

여러 앞서 간 선배들의 글을 읽고,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 가지 길을 잡아 내는 게 거의 불가능

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하다 보니 누군가는 언어 그 자체를 해체시켜 버리려 하고, 어떤 이들은 모든 인간의 토대, 구조

자체를 근본부터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

 

이전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그들의 괴짜같고 기이한 행동들이 지금은 조금은 이해가 되는 듯 하다.

 

아직도 갈 길은 멀 것이다.

 

결국은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를 믿는 자들로서는 이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

 

기나긴 여정이 될 것이다.

 

답은 친절하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향한 철없는 고민이 언제쯤 영글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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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적 자연주의자의 트로이카라 불리는 리처드 도킨스, 애드워드 윌슨, 데니얼 데닛.

 

이 3인방 중 한 명인 데니얼 데닛의 저서다.

 

그가 공략하고자 하는 분야는 바로 '마음'이다.

 

그 동안 자연계의 유물론적 설명, 우주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에 이어 이번에는 정신과 마음의 영역까지도 그와 같은 서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책은 포인트 자체도 대담하고, 상당히 고 난이도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일단 책이 지닌 색깔 자체가 강경한 유물론적 자연주의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전제로 깔아둔다.

 

 

"우리는 자기 복제 로봇의 직계 자손이다" 라는 견해에는 더 이상 심각한 반론이 제기되지 않는다.

우리는 포유류고 모든 포유류는 파충류 조상에서 나왔으며 파충류의 선조는 어류였고 어류의 조상은 벌레와 비슷한 해양 생물이었으며 그 해양 생물은 다시 몇 억 년 전에 단순한 다세포 생물로부터 나왔고 그 다세포 생물은 지금부터 약 30억 년 전에 자기 복제하는 거대 분자에서 유래한 단세포 생물에서 나왔다.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 조류, 세균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지구에 살았던 모든 생명체가 등장하는 계통수를 이런 식으로 그릴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침팬지, 모든 벌레, 모든 풀입, 모든 삼나무와 조상이 같다. 우리의 선조 중에는 거대 분자도 있었다."

 

극단적인 유전자 결정론의 전형이 아닌가 싶다.

 

과연 이런 삶을 살고 싶은지 반문해 보고도 싶으며,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한 근거는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

(*창조를 납득하기 어렵더라도, 그와 동등한 수준, 그 이상의 수준으로 이 논리들도 동의가 어려운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이 과학계를 주도하고 있으니, 주류라고 주장하는 게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논리를 극한으로 끌고 나가다 보니 이런 주장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는 다른 식의 설명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로봇의 후예라고 해서 우리가 곧 로봇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로봇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몇 조개에 이르는 거대 분자들의 집결체다."

 

이런 논증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싹틀 만한 여지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한결같이 도덕론을 세우고, 윤리관을 지킬 수 있으며, 이와 같은 논증이 가장 '과학적'이고 깔끔하다고 말하는데, 과연 그런가?

 

 

"수십억 년 동안 이유는 늘 있었지만 이유를 세우는 존재, 이유를 떠올리는 존재, 심지어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유를 헤아리는 존재도 없었다."

 

일관성 있는 논지를 따라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결론에도 도달할 수 있다.

 

"아무 재료로든 인공 심장처럼 인공 마음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마음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 핵심만 파악하면 기준에 맞는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마음 (또는 마음의 구성 요소)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도 이러한 논증이 성공적인 '사실'에 도달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유물론적 세계관'을 기정 사실화 해 놓고, 접근하다 보니 이런 일반인이 보기엔 재미난 결론이 계속 도출된다.

 

대담하다고도 볼 수 있고, 이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아주 쇼킹한 방식으로 세상이 설명된 건데, 설득력이 그렇게 큰 책은 아닌 것 같다.

 

그의 이야기는 흥미로우니 몇 군데를 더 살펴보자.

 

"마음과 몸에 대해 데카르트가 천명한 악명 높은 이원론의 유산은 상아탑을 넘어 보통 사람의 생각에도 깊숙이 박혀 있다. "이 선수들은 몸도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 , "네 몸에는 탈이 없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라는 표현이 좋은 예이다.

 

데카르트와 격투를 벌이는 우리 같은 사람 안에도 마음(다시 말해서 뇌)을 몸의 주인 내지는 배의 선장으로 이해하려는 습벽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이런 통념에 젖다 보면 마음을 수많은 신체 기관의 하나로 보는 중요한 관점을 놓친다.

 

음이 주도권을 잡은 것은 진화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마음을 우두머리가 아니라 부리기 까다로운 일개 하인 (자신을 보호하고 먹여 살리며 자신의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몸을 위해 일하는 존재)으로 여겨야만 마음의 기능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타파되었다 해서, 모든 설명이 진화 생물학과 진화 심리학적 해석을 따라가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안일하고 극단적인 주장이 아닌가 싶다.

 

3장에서 감지력과 감응력을 구분해서 설명하는 부분은 상당히 참신한데, 이와 같은 참신함을 가지고 이와 같은 대담한 논증을 완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끝까지 밀어 붙여 보자.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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