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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은 미, 미적 체험, 미의 창조, 그리고 교육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심미 활동의 기원, 미적 경험의 심리, 미학 활동의 구조와 형태 등을 학습하고 탐구하는 것을 통해 철학적 시야와 이론적 소양을 넓히고 미학적 관점으로 세계를 보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설명부터 어렵다.;;;)

 

-저자의 말-

 

 

말 그대로 미학을 시간 순서에 따라서 쭉 둘러보는 산책용 책이다.

 

소크라테스부터 소쉬르 까지 넘어 오는 이 책은 미학사 전반을 두루 살펴 볼 수 있는데 이 속에는 서양 고전 이성주의 미학, 중세 미학, 계몽주의 미학, 현실주의 미학이 모두 녹아져 있다.

 

컬러풀한 사진들과 짤막짤막한 설명들이 이 책을 조금씩 읽어도 완독할 수 있게 도와준다.

 

미학이 철학과 많이 겹치기 때문에 철학 서적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철학자들의 '미학적 관점'을 집중적으로 탐구해 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철학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재미있고,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강점은 다양한 철학자들의 주장을 깔끔하게 습득하기 좋다는 점이고, 같은 이유로 짤막짤막하게 다양한 인물을 역사의 흐름에 따라 개괄해 두다 보니, 각각의 인물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아쉽다는 단점도 지닌 책이다.

 

그러나, 미학 전공자가 아닌 이상 이와 같은 흐름을 잡는 게 국지적인 특정 분야를 깊게 아는 것보다 도움이 될 때가 많기 때문에 이 책은 한번쯤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그 영역을 더 깊게 들여다 보는 눈을 기르고 싶다면 이 책을 들고 산책을 떠나보는 게 어떨까?

 

미학 공부를 하고 나면 미술관을 가거나, 예술 작품을 볼 때도 훨씬 더 풍성한 사유가 가능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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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존슨'이 돌아왔다.

'다윈주의 허물기', '위기에 처한 이성' , '진리의 쐐기를 박다' 와 같은 훌륭한 유신론 변증서를 내면서 주목 받기 시작한 필립 존슨. (지적설계 등을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그의 신간에 열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과학적 무신론이 팽배한 시대에 유신론이라는 검을 들고 나타나서 진검승부를 제안하는 그의 모습은 신선하다.

 

리처드 도킨스 등은 늘 조소를 날리며, 이와 같은 주장을 '사이비 과학', '비과학적' 이라는 수식어로 일축하지만, 그의 논증은 그렇게 단박에 반박할 수 있을 만큼 어설프지 않다.

 

'새로운 무신론 운동'이 거세지면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류의 저서가 급속도로 팔리고 있다.

 

칼 세이건, 스티븐 호킹 등과 [신 없는 우주] 와 같은 책의 저자들, 데니얼 데넷, 에드워드 윌슨 등 걸출한 과학도들이 무신론적 과학을 표방하다 보니, 유신론은 시대에 뒤떨어진 미신이나 신비주의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인들이 더욱 '지적인 각성'을 할 수 있는 계기로 이 시기를 견디길 부탁한다.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쓴 [신 없는 사람들]에서도 소개된 것처럼, 새로운 무신론자들에 대한 최근 동향을 살펴볼 수도 있고, '이성과 신앙'에 대한 첨예한 갈등을 재조명 해 보며, '지구의 특수성'에 대한 논증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이 부분은 많은 물리학자들이 반박을 했지만, 그렇게 깔끔한 반박은 아직 없어 보였다.),

 

다윈주의 세계관에 대한 remind, 성경에 대한 논증 등을 두 명의 저자가 절반 씩 나눠서 정리해 둔 책이다.

(필립존슨의 이전 작들만큼 충격적이거나, 몰입도가 높진 않으나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복습하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종교' 자체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느끼면서, '종교'를 이 땅에서 제거해야 할 기생충 정도로 여기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적이고, 흥미로운 논증에 대해 이와 같은 차분하고 날카로운 반박을 해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들의 맹렬함이 일견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으나...)

 

필립 존슨이 두 번째 뇌졸중을 겪고 나서 책을 쓰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힘과 에너지를 쏟아서 쓴 책이니 만큼 1독을 추천한다. 

 

두꺼운 책이 아니고, 생각만큼 어렵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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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매력은 딱딱하고, 접근하기 어려워들 하는 철학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예술의 여러 장르들(ex) 미술, 음악, 무용, 건축, 사진, 연극, 영화, 문학)에 접근해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강력히 추천해 줄 만한 책이다.

 

철학을 교양화, 대중화 시키고자 하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는 철학아카데미의 걸작이라고나 할까?

 

컬러풀한 사진들이 들어 있어서 책을 읽어 내려갈 때 지루함이 적고, 한 챕터가 끝나고 나면 [더 생각해 볼 문제], [더 읽어볼 책] 등이 소개되어 있으며, 그 책에 대한 자세한 해설까지 해 놓는 친절함이 돋보이는 책이다.

(뭔가 친구들끼리 모여서 디스커션 하기도 좋고, 조별 활동 등에 활용해도 좋은 책이다.)

 

 

독자의 눈까지 내려가서 책을 서술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여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책이다.

 

[더 생각해 볼 문제]도 중요한 논점을 많이 제시한다.

 

가령 "니체는 오로지 미의 현상으로서만 이 세계를 긍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의 뜻은 도대체 무엇일까?'

"예술에는 여러 장르가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미술과 음악과 시다. 이 세 가지는 어떤 동일성과 차이가 있는가?"

 

등의 질문들은 우리의 사유의 폭을 넓혀줄 것이다.

(요즘 시대는 워낙, 사유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이런 시대일수록 적절한 균형이 요구된다.)

 

책의 저자의 말처럼 예술과 철학은 뭔가 깊고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데 예술 혹은 예술가는 감각적인 직관의 힘으로 세계를 강도 높게 느낀다면 철학 혹은 철학자는 강도 높은 강렬한 감각의 흐름을 견고하고 명료한 언어의 체로 걸러 갈무리한다. 

 

그리고 역시 저자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의 힘은 결코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 그리하여 철학 속에 서려 남아도는 감각은 철학에서 예술로 나아가는 통로가 된다.

 

수 많은 철학자들이 단지 '철학 하기'만에 그치지 않고, '예술'을 주목했었다.

 

그 미묘한 이유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지만, '철학 속에 서려 남아도는 감각'의 맛을 보며, 실제 다양한 예술 분야를 자유로이 탐색해 보고 싶지 않는가?

 

그런 지적 호기심이 생긴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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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자인 폴 틸리히의 평전이다.

 

폴 틸리히.

 

칼 바르트 , 몰트만 등과 함께 현대 신학자의 거성으로 꼽히는 사람이다.(그의 신학적 견해에 동의하진

않는다. 무신론자들과도 대화할 수 있는 그의 지적인 깊이와 노력은 존경할 만 하지만, 넘어선 안 될 선을 살짝 넘어 버린 느낌이 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주목해 볼 필요는 있다.)

-> 그리고 세상을 살아 보면, 그의 이야기가 좀 더 와닿는 시점들이 있곤 하다.

-> 칼 바르트의 1차 서적도 도전 했었으나, 너무 양도 많고 힘들어서 포기했는데 틸리히 책도 어마어마하게 난해하다. 그래서 늘 2차 서적이나 달고 산다. 

 

(여담이지만, 칼 바르트와 동갑내기고 둘 다 목회자 자녀고, 둘 다 독일에서 신학 공부를 했으며, 둘 다 대학교수가 되었으며, 둘 다 나치에 저항하다가 폴 틸리히는 미국으로 건너오고, 칼 바르트는 원래 고향인 스위스로 돌아간다.)

(폴 틸리히가 미국으로 건너간 사건이 아인슈타인이 유럽에서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로 넘어온 사건에 비견되었다 한다.)

 

하지만, 그의 '1차 서적'은 너무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다.

 

나와 같은 초심자들은 이와 같은 '2차 서적'을 통해 조금이나마 그 인물에 대해 알아 가면 좋을 것이다.

 

 

책은 아주 쉽고 잘 쓰여 있다.

 

아들과 아빠의 대화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은 , 거무죽죽하고 무시무시한 얼굴이 그려진 책 표지와는 달리 생각보다 읽을 만 하다. (책을 정말 잘 뽑았다는 생각이 든다.)

 

풀 틸리히라는 사람이 워낙 다재다능하고 , 다방면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더욱 많은 노력이 요구되긴 하지만 말이다.

 

그는 20세기의 그 어떤 신학자보다 더 보편적인 신학을 전개하려 했으며 , 기독교가 세속 문화와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해 더욱 씨름하고 고민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경계선상의 신학자' 라고 이야기 한다.

 

모 교회 목사님들은 칼럼 등을 통해 '폴 틸리히' 를 이단이라고 배격하고 있다고 한다.

 

그 분들의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왜냐하면 폴 틸리히의 주장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소위 보수적인 , 근본주의 적인 , 경건주의 적인 신학을 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굉장히 파격적이고 , 쇼킹하고 , 일탈을 하는 듯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어떤 부분에서 쇼킹한지 예를 한 가지 들어 보겠다.

 

그는 이야기 한다.

 

기독교의 '이신칭의'(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 받는다는 교리) 교리를 단지 죄인 뿐 아니라 의심하는 자에게까지 확장시킨다.

 

즉 ,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 뿐 아니라 하나님과 진리를 의심하는 자에게까지 미친다고 주장하는데 , 이는 모든 진지한 의심 속에는 진리에 대한 추구가 들어 있으며 , 이 추구 속에서 그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할 기회를 가지기 때문이라고 그는 이야기 한다. (그러나, 세상을 10년 이상 더 살다 보니, 그의 은혜가 진짜 은혜롭게 들리는 순간들도 있다.)

 

(이건 약과다.그를 이해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러한 말에 충격 먹으면 그의 저서를 읽을 수 없다..;;;;;;)

 

그리고 , 그는 인간 실존을 분석하는 도구로서 '실존주의' 가 유용하다고 이야기 하는데....

 

왜냐하면 , 그는 실존주의 문학이나 철학이 현대인들의 상황을 그 무엇보다 예리하고 깊이 있게 드러내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쉐퍼를 추종했을 때는 그의 이와 같은 견해를 많이 경계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실존주의'를 포용하는 방향이 좀 더 성경적이고, 실재하는 삶과도 더 일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깊은 영역까지 들어가면 충돌하는 지점이 나올지는 잘 모르겠다. 늘 경계선 위에서 중도를 고민하던 치열한 철학자이자, 신학자. 풋내기 시절에는 그의 사상을 재단하기 바쁘고, 옳으냐, 그르냐 평가질하고 판단하기 쉽상이었으나 세상 만사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그의 치열한 고민의 지점이 인간이 서 있을 수 있는 가장 '진리'에 가까운 지점일 지도 모르겠다는 고민도 든다.)

 

 

그래서 , 기존의 기독교적 용어인 '죄' , '심판' , '구원' 등을 실존주의 도움을 받아서 , '소외' , '단절' , '치유' 등의 용어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했다나?

 

그의 훌륭한 점은 내면 깊은 곳의 영적 공허로 괴로워 하는 지성인들을 사역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 그들의 언어와 사고방식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세상과 맞닿은 신학을 하려고 했던 현실 지향적인 신학자.

(그러다 보니 많은 무신론적 철학자들도 이례적으로 기독교 신학자인 폴 틸리히를 존경했었다.)

 

-> 올바른 신앙 고백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며 교회 안을 향한 신학을 지향했던 칼 바르트와 대조적으로 폴 틸리히의 신학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 언어를 끝까지 고민하는 교회 밖을 향한 신학이었다고 이야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는 정말 다양한 개념들을 창조해 낸 신학자인데 , 새로운 용어들만 열거해도 엄청난 분량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원리'  '카톨릭적 내용' 이라는 개념이 꽤나 신선했는데 ,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잘 잡아야 건강한 교회가 된다라는 그의 주장은 아주 신선하다.

 

진보 신학과 보수 신학의 치밀한 '균형' 을 이야기 하는 말이기도 하며 , 자유주의 신학과 근본주의 신학 사이의 치밀한 '균형' 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 워낙 논란이 많기에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외에도 상당히 그럴싸한 개념들을 많이 만들어 냈는데.....

 

하지만 , 우려가 되는 건 사실이다.

 

그가 일본을 다녀온 후 , 불교 속에 나타나는 신적 계시에 주목하는 가운데 , 하나님의 계시는 다양한 종교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계기가 있었다는 말을 보면, 경계선상의 넘어서는 안될 영역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는 부분도 있다.

 

이 신학자는 글로 표현하기가 좀 무리가 있는 듯 하다.

 

워낙 창조적인 사역을 많이 했던 사람인지라 , 그저 각자가 공부하며 알아가는 수 밖에는 방법이 없다.

 

일단 , 우리의 절대적 기준인 '성경' .. 그리고 그 '성경' 을 계시해 주시는 '성령' 을 기억하면서 , 이와 같은 '신학' 들을 알아 가되 , '신학'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순간 ,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두렵고 떨림으로 이와 같은 영역들을 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그의 이론의 문제점을 논하기에 앞서서 ,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 '세상과 맞닿는 신학' , '세상 속에 녹아드는 신학' 에 대해서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듯 하다. (알면 알수록 멋진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심을 잃지 말되(즉 , 우리가 지닌 절대적 기준을 무시하지 말되) , 너무 완고하게 굳어져서 , 독단적이고 앞뒤가 꽉꽉 막힌 사람은 되지 말자.(하나님의 성품을 잃지 말자.).

 

그가 말했던 프로테스탄트 원리 , 카톨릭적 내용의 오묘한 조화를 떠올려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단단히 각오하고 이 책을 펴길 바란다.  

 

참고로 현재 대구 시온성 교회에서 시무하시는 남성민 목사님이 뉴스 엔조이에 폴 틸리히의 [문화의 신학] 관련한 서평 쓰신 글이 있는데 참 좋다. (꼭 가서 읽어보자. 해당 내용을 잠시 발췌해 본다.)

(2019.1.15에 올린 글)

 

틸리히는 <문화의 신학>의 마지막 글 '기독교 메시지의 소통'에서, 복음을 소통한다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제대로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문화적 형식으로 계시적 진리를 현대인들에게 전하면서, 그것을 믿지 않는 책임을 현대인들에게만 돌리는 것은 올바른 제시 방법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그가 알아들을 수 있게 제시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 것입니다. 틸리히의 의도는 결국 그것을 하자는 것이고, <문화의 신학>이 보여 주는 모든 작업은 그 목적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제시했다고 해서 반드시 상대방이 기독교 메시지를 수용하게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제시된 기독교 메시지, 제시된 복음에 대해서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결국 상대방의 결단 문제이고, 또 찬성하도록 결단케 하는 것은 결국 '성령'의 사역일 것입니다.9) 인간의 열심,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소통함에 있어서, 인간 능력의 한계와 함께 기독교인들이 힘써야 할 노력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은 오늘날의 부흥주의적 신학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뉴스앤조이] 한국의 지성들은 왜 기독교 신학에 관심이 없을까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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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책.

 

쟈크 데리다 , 들뢰즈 두 인물이 다 생소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 이들의 이론은 더욱 생소하다.

 

소위 '해체주의' 라느니 , '차이의 철학' 을 주창한 사람들.

해체주의 철학, 구조주의 철학.

 

요즘은 인문학 열풍이 불어서 여러 철학자들을 시대순으로 간단하게 설명해 주거나, 핵심 개념을 알기 쉽게 가르쳐 주는 2차 서적들이 많긴 하다. 반드시 그런 책들부터 독파하고 와야 한다. 사실 지금 소개해 드리는 이 책도 제법 괜찮은 2차 서적이다. (데리다, 들뢰즈의 1차 서적을 읽으려 했다간 큰 내상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어려워도 심하게 어렵다.)

 

물론 이들의 철학이 문화,예술,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분야에서 전문적인 공부를 하는 이들이라면 한번 쯤 들어 봤을 법한 이름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런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의미 있다' 는 것은 무엇이며 , '무의미' 는 무엇인가?

 

'나와 타자는 진정 다른 것인가?' 

 

아주 머리가 아파지는 말 들이다.

(하지만 가만히 곱씹어 보면, 꼭 고민해 봐야 할 중요한 의제들이기도 하다.)

 

물론 이 책은 쉽게 쓰여져 있고 , 두 사람의 이론을 비교,대조 해 놓았기 때문에 풍부한 '예시' 를 바탕으로 읽는 재미가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두 인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 그리고 이쪽 방면으로 지식이 갖춰 지지 않았다면 많은 것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 데리다는 칸트 , 헤겔 ,하이데거 등의 영향을 받고 , 그들의 이론을 헤체 시키는 작업을 했으며 , 로고스 중심주의를 해체시킴으로써 , 자신의 모국어인 '프랑스어' 를 이용한 '말 장난' 을 풍성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번역서로 그의 1차 서적을 읽어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프랑스어에 능통해져서 , 그의 원서를 읽으며 그 '맛' 을 누려야 한다나?. 이렇게까지 읽어야 하나 현타가 제대로 오는 책이다. 그의 1차 저서를 읽었던 트라우마는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뇌리속을 지배하고 있다.)

 

 

들뢰즈라는 사람도 만만치 않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을 맹렬하게 비판하면서도 , 그 이론의 '존재 의의' 를 부정하지는 않음으로서 자신의 이론과 같은 '모호함' , '어중간한 중간' , '모순되는 듯 하면서도 모순되지 않는 오묘함' 의 관계를 누리고 있다.

(도대체가 이들은...)

 

그 외에도 라이프니츠나 스피노자 등의 사상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활용을 하고 있으니 마치 이 느낌은 일본 애니 

[종말의 발키리] 에서 천둥의 신 토르와 삼국지의 여포가 대결을 하는 것 같은 오묘한 콜라보다.

 

이러한 인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 전반에 대한 탁월한 지식이 요구된다.

 

미학에도 발을 들여 놓으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시비' 를 거는 그들의 접근 방식은 , 모더니즘을 넘어서 포스트 모더니즘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겠지만 , 심지어는 이러한 '포스트 모더니즘' 이라는 단어에도 메이지 않는 , 진정한 의미의 '해체' , '새로운 패러다임' 을 추구하는 두 사람.

 

말 장난의 끝. 분석의 극치.

(이렇게까지 뇌를 소모시켜야 하나, 현타 오게 만드는 1등 공신)

 

갈 때까지 가 버린 듯한 학문의 진상을 보는 느낌이지만, 이들의 이론이 건축,예술 등에 미친 영향들을 보고 있노라면 살아평생 한번쯤은 제대로 공부해보고 고민해 볼 가치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 사람의 머리를 미치게 만드는 듯한 이들의 '분석적 성향' 은 참 마음을 어렵게 한다.

 

들뢰즈가 투신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 왜 그리도 이해가 되는지 모르겠다.

 

지적 만족을 누리고 싶다면 읽었을 때 많이 남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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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된 회의자의 사도 루이스와 쉐퍼.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 끊임 없이 고민하고 , 공부했던

 

성실한 지식인 루이스와 쉐퍼.

 

이 둘의 만남이 책으로 성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두 저자를 잘 아는 기독교인들의 가슴은 요동을 칠 것이다.

이는 마치 [베놈2] 영화 쿠키 영상에서 스파이더 맨이 나타났던 것과 같은 흥분이다. multi-universe 를 통해 둘이 

같은 시공간에 놓이는 상상을 얼마나 해 왔던가?

 

이 책은 개인적으로 인생 책 best 30 안에는 넣어줄 수 있는 명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당신은 이런 소망을 지녀 본 적 있는가?

 

'아~ 아인슈타인과 뉴턴이 만나면 과연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소크라테스와 비트겐슈타인이 만나면 어떤 재미있는 대담을 하게 될까?'

 

그렇다. 정말 함께 비교,대조 해 보고 싶은 두 인물이 있는데 , 마침 그 두 사람을 잘 묶어서 책으로 편찬되었다.

(기독교 세계관, 철학에서 워낙 중요한 인물들이다.)

 

바로 이 책!!!

 

C.S 루이스와 프란시스 쉐퍼. 물론 , 동시대에 존재했던 사람들이지만 , 실질적으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다고 한다. (서로가 자신들의 사역을 하느라 바빴을 것이기에....)

 

하지만 , 서로가 서로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고 , 쉐퍼도 루이스를 많이 인용했었고 , 루이스도 쉐퍼를 옥스퍼드 대학교로 초청하고 싶어 했음을 기억해 본다면 이 둘의 관계는 꽤나 우호적이고 , 동맹적 관계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 이들의 핵심 논증들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 이 둘을 만약 한 자리에 앉혀 났다면 상당히 목소리가 높아졌을 가능성이 많다. 굉장히 핵심적이고 중요한 분야에서 서로의 입장이 상당히 다르다. 공통점은 그저 두 분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 이웃을 사랑했으며 , 진리를 전하고 싶어 했다는 것 뿐..)

-> 그리고 논리, 이성 토론의 측면에서는 루이스의 압도적 승리를 점하는 편이다. 

-> 쉐퍼의 책은 처음 읽었을 때 엄청난 감동은 있으나 그 한계가 비교적 빨리 보였다고나 할까?

-> 하지만, 그렇게 답을 내리기 이전에 둘의 만남을 성사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의는 크다.

 

 

이 책은 , 루이스와 쉐퍼의 저서들을 상당량 탐독하고 보면 좋을 것이다.

(루이스의 책도 계속적으로 번역이 되고 있기 때문에 꾸준히 읽고 나서 이 책을 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이 책은 구성도 탁월하고 , 분량도 만만치 않은 책이다.

 

내용은 두 사람의 삶 자체가 워낙 변증적이고 , 깊이가 있었다 보니 쉽진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 이들의 논증이 지니는 '중요성' 을 기억해 본다면 이 정도 '수고' 는 감수하고도 남음이 있다.

(책에 별점 5점을 찍는 경우는 드문데, 책 자체가 엄청나게 맛있다. 진리를 탐구하는 걸 좋아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이 책은 정말 맛있는 별미라고 볼 수 있다.)

 

(또한 , 중요 논증들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 주고 있기 때문에 소장용으로도 그만이다.)

 

일단 , 두 사람의 발자취를 비교해보며 성장 과정을 알아본 뒤에 두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계기를 조망해 본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예정) 과 인간의 자유 의지' 라는 기독교의 중요 이슈. (인간이 살아 평생 완벽한 답을 내놓기는 어렵다는 그 난제 중의 난제) 를 두 인물이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자세하게 비교,대조한다. 

(책의 구성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성경' 이라는 텍스트의 권위를 두 인물이 어떻게 취급했는지를 이야기 해 보며 , 중요한 기반을 다져 본다. 

(이 부분은 생각 이상으로 중요하다)

(성경, 진리로 씨름해 본 사람은 이 이슈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크리스천이면서 지성을 사랑한다면 이 부분은 무조건 읽어보자.)

 

C.S Lewis

 

그리고 , 두 사람이 '변증' 을 해 나간 방식을 서로 비교,대조 해 보고 , 중간 중간 저자의 의견까지도 잘 반영되어 있다.

 

두 사람의 입장도 신선하지만 , 이 책의 저자가 수정,보완,평가 해 둔 부분들이 더욱 감칠맛이 난다. 단순히 루이스와 쉐퍼의 책을 발췌하고 끝내는 느낌이 아니고, 두 저자의 논지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분석해 둔 이 책의 저자가 더욱 빛나는 책이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논리','내적 일관성' 의 면에서는 쉐퍼보다 루이스가 높은 점수를 받는다.

(워낙 Super Intelligent  하다 보니...)

 

하지만 , 쉐퍼가 지닌 강점들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그가 고수하는 근본주의 노선 , 성경의 권위를 철저히 받드는 모습 등은 일종의 '안정감' 을 부여해 주는 게 사실이다.) , 한 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기는 어렵다.

 

또한 , '논리' 의 측면에서는 루이스를 따라갈 사람이 별로 없다 할지라도 , 기독교가 '논리' 의 틀에 완전히 종속될 수 있는 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깊은 고민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비이성적인' , '맹목적인 믿음의 도약' 을 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일터.....

(이런 식으로 사실과 신념이라는 층을 나누고, 신앙의 논의를 할 때만 되면 '신념'의 영역으로 도약하려는 사람들을 비판했던 게 바로 '쉐퍼' 자신이었다. 그런데, 실제 살아보면 논리적으로 깔끔한 개념이 '진실'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이 부분은 참 어려운 것 같다.)

 

프란시스 쉐퍼

 

아마 이러한 '변증' 의 역할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주권에 철저히 순복했을 때 , 비로소 빛을 발하리라 생각한다.

 

'변증' 은 [베전3:15] 에 근거하여 분명히 지지될 만한 분야이며 ,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 이러한 것들이 '진리를 위한 절대 노선' 이라고 이야기 하는 순간 , 그 길은 제대로 된 '진리' 를 가리키지 못하는 '방향 뒤틀린 표지판' 이 되고 말 것이다.

 

쉐퍼와 루이스의 사역에 관심이 많고 , 그리스도의 주권에 철저히 이성을 순복시킬 각오가 되어 있다면 이 책을 보라.

 

그리고 , 사고의 폭을 넓히고 신앙 생활에 넉넉한 도움을 얻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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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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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악한 것을 배격하려는 열심에서 정당한 것까지 정죄하고, 선한 것을 정당하게 취급하려는 욕심에서 부패한 것까지 수용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타락이라는 이름으로 창조를 거부하고 , 창조라는 이름으로 타락을 용인할 위험을 안고 있다.

 

[춤과 그리스도인의 삶] 이라는 보고서에서...

 

 

 

기독교 세계관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필수적으로 읽고 넘어가야 할 고전 중 한 권이다.

(여러 기독교 세계관 책을 읽어 봤지만, BEST 10 권 안에는 넣어줄 수 있다.)

 

이 책은 먼저 '세계관' 에 대한 이해를 도와 주며 , 그 다음에 성경 속에 나와 있는 '창조' , '타락' , '구속' 의 연속적인 흐름을 세계관의 측면에서 설명해 주고 있다.

 

그 뒤에 '구조' 와 '방향' 이라는 개념을 소개해 주고 있는데 , 알아 두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즘은 ,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해 놓은 책들이 꽤 나오고 있어서 , 그러한 책들을 보고 나서 이 책을 보면 뭔가 '생각하는 것 만큼 대단하지 않은 걸?' 이라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 이 '창조,타락,구속' 이라는 심플한 개념이 그 이후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 세계관의 아버지격인 서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일단 세계관은 무엇인가?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 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물론 , 한 사람이 지니는 '세계관' 이 항상 내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 하며 , 이러한 주장을 단순화 시키지 않는 신중함도 보여 주고 있다.)

 

세계관이 중요한 이유는 , 이러한 세계관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기능' 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할 때도 있고 , 의식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또한 , 크리스천으로서 ,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 받아야 함' 을 이 책은 강조하고 있으며 , 자신이 지닌 세계관이 성경적일 때만 우리 삶이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다고 저자는 힘 주어 이야기 한다.

 

 

이들이 견지하고 있는 개혁주의 세계관의 특징을 3가지로 요약하자면..

 

1. '창조' 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2. '타락' 은 창조 세계에 한 구석도 빠짐 없이 철저히 영향을 끼친다.

 

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 은 타락만큼이나 그 범위가 넓어 , 창조의 지평은 동시에 죄의 지평이며 또한 구원의 지평이다.

 

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은 한 군데도 빠짐 없이 모든 영역에 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기에 , '성과 속' 을 교묘하게 분리하려는 일련의 사조를 저자는 배격한다.

 

소위 '이분법적 사고' 라고 하여서 , 이성과 합리성의 영역 , 그리고 믿음과 신앙의 영역을 분리하려고 했던 수 많은 지식인들,종교인들의 활동을 배격한다.

 

(이 관점은 '실존주의'를 포용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사상 자체도 반대하거니와, 실존주의로 물든 '신정통주의 신학'도 배격한다. 그러나, 세상을 해석해 내는 '온전성'의 측면에서 어떤 쪽이 더 '현실'에 잘 부합하는 주장을 하는지는 양측의 이야기를 다 듣고, 숙고를 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프란시스 쉐퍼 등의 노선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건 이들은 칼빈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세계관 공부를 하다 보면 쉐퍼가 지닌 한계, 칼빈주의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점들도 제법 드러난다. 실제 삶을 살아보면 더더욱 그 공백이 크게 느껴지고 말이다.

 

그에 이어서 나오는 '구조' 와 '방향' 이라는 개념을 살펴보자.

 

'구조'  '창조 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혹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 실체가 되게 하는 것' 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리고 '방향''죄와 구속의 질서, 즉 한편으로는 타락으로 인한 창조의 왜곡 혹은 변질을 ,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의 구속과 회복을 지칭' 한다.

 

이 말을 쉽게 예를 들어 나눠 보자.

 

즉 우리가 접하는 공학,예술,기술,학문,문화,학교,회사,감정,합리성 등 수 만가지 개념들이 그 본질(구조)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방향이 잘못 잡혀 있어서 왜곡되었다고 보는 게 이 저자의 특징이다.

 

그러면서 당부하기를 , 구조와 방향을 헷갈려서는 안된다고 이야기 한다.

 

분명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선' 하게 창조하셨고 , 인간이 '타락' 하여서 그러한 '선' 한 '구조' 를 지닌 것들을 '악' 의  '방향' 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라면 , 일부 세력들은 그 개념들 자체가 내재적으로 '악' 을 소유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며 그 '구조' 자체를 '악' 으로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 이러한 인간의 사고를 '영지주의적 성향' 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 예로 드는 것들이 플라톤,그리스 철학,루소,대부분이 낭만주의,철학적 무정부주의,대부분의 심층심리학,하이데거,자크 엘룰 등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는 '복귀'(Repristination) 이 아닌 , '회복'(Restoration)  을 외쳐야 하며 , 만약 '에덴 동산' 시절로 돌아가자고 이야기 하는 것은 원시적인 미발전의 상태를 갈망하는 사고이며 , 우리는 역사적,문명적 진보를 이루는 게 마땅하다고 이야기 한다.

(이에 반해 자크 엘룰 등은 , technology(기술) 자체를 '악' 으로 규정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하여 , 읽고 쓰는 능력을 개발하고 , 도시화를 진행하고 , 산업화 혹은 내연 엔진 등도 권장하는 게 마땅하다고 이야기 하는데...

 

이 부분은 각자의 의견에 맡기는 게 좋을 것 같다.

(낸시 피어시의 [완전한 진리]도 이와 비슷한 노선을 지지하는 듯 하다. 그러나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를 보고 나면 이 논리의 한계점을 간파할 수 있다. 몇도 정도의 각도로 방향이 틀렸는지를 누가 교정할 것이고, 그 기준은 어떻게 세울 것인가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가득한 개념이다.)

 

이러한 '발전' 이 선험적으로 수반하는 '환경 오염' 등의 문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런지....

(니콜라스 월터스포트의 저서라든지, 존 스토트 목사님의 [현대사회의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등을 같이 읽다 보면, 이 책의 내용을 전적으로 수용하긴 어려워진다.)

 

성경적 신앙은 진보적이며 , 결코 반동적이지 않다는데.... 그리하여 인류 역사를 동산에서 도시로 가는 움직임으로 봐야 하며 , 이러한 움직임은 성경적으로 권장된다고 말하는데, 말은 그럴싸한데 실제적인 적용이 늘 아쉽다.

 

쟈크 엘룰의 말처럼 , 인간의 '지식' ,'발전' 이 넘어서는 안 될 '선' 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질문이 오히려 더 와닿는 경우도 많다. 

 

이미 , 현대 사회 속의 예술,문화,공학,기술,사회제도,교육,정치 등 등은 심각한 인본주의의 늪에 빠져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감도 안 잡힌다)

 

어디서부터 소위 '왜곡' 된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 '올바른 방향' 을 잡고 나면 , 이들의 발전이 가능은 한걸까?

 

아직은 , 잘 모르겠다. (아무도 정답을 내놓긴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 하나님의 '창조' 가 전 영역에 영향을 미쳤으며 , '타락' 의 범위도 방대했고 , '구속' 도 구석구석까지 이루어 질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기독교 세계관에 한 획을 긋는 대단한 업적이자 성과라고 생각한다.

 

한번 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으니 , 일독을 권한다.

 

(N,T Wright 같은 경우는 창조-타락-구속 이라는 도식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걸 반대하며 이보다 훨씬 더 풍성한 Narrative 를 가지고, 성경을 읽어 내려가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기도 한다. 일단, 기독교 세계관의 주류 견해이기 때문에 이 책 정도는 꼭 읽어 두고 이후의 논의를 전개해 나가면 좋을 것 같다.)

-> 사실 N.T Wright 의 주장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 같긴 하다.

 

이 책은 공부를 하다 보면 동의하긴 어렵지만, 거쳐 가지 않고는 갈 길이 없는 통과 의례와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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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냐 저것이냐>

 

결혼해 보라 ,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독신으로 있어 보라. 

 

그대는 역시 후회할 것이다. 

 

결혼을 하든 안하든 ,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세상의 어리석음을 비웃어 보라 ,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세상의 어리석음을 비웃어 보라,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세상을 기만해 보라, 

 

그대는 또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세상의 어리석음을 비웃든 기만하든 , 그대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여자를 믿어 보라.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여자를 믿지 말라. 

 

그대는 역시 후회하리라. 

 

여자를 믿든 안 믿든 ,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연애해 보라,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연애하지 말아 보라, 

 

그대는 역시 후회하리라, 

 

연애를 하든 안하든, 그대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독자들이여, 이것이 모든 세상일의 내용이다.

 

진정한 영원성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를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 그 앞을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키에르 케고르 왈-

 

키에르케고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충 감이 잡히는가?

 

왜 그리도 후회하는가?

 

양쪽을 다 긍정할 수는 없는가? 

아니면 양쪽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서 새로운 길을 잡아내는 변증법을 고민해 볼 수는 없는가?

 

(하지만 , 이런 선택과 연결에 묶이지 않고 , 그 단계를 뛰어 넘으려는 저자의 도약으로 봐야 할 듯)

  

전체적인 심상을 살펴보면 , 그는 굉장히 우울한 철학자다.

 

씨니컬한 그의 말투.세상을 바라보는 회의적인 시선들.

(세상을 살면 살수록 그들의 세계관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구미에 맞는 사상이다. 하지만 , 친구로 두기에는 피곤한 사람이라고나 할까? 항간에서는 그를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이자 ,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이야기 하곤 하는데 , 그와는 반대로 그를 일반적인 의미의 그리스도인 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이야기 하는 이들도 있다. 단지 , 그가 기독교의 전반적 신념 을 지지했다 뿐이지 , 자신 스스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다. 어느 쪽 말이 진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 무엇보다도 세상 속에서 근원적인 불안,공포 를 느끼게 될 것을 이야기 하는 그의 입장은 , 지금 현대 사회 속에서 많은 ‘확증’ 을 얻는 듯 하다.

 

 

 

 

그의 저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는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 이 책에는 1부의 4편의 논문만 담겨져 있다.

 

<디압살마타> , <그림자 그림> , <가장 불행한 사람> , <유혹자의 일기>.

 

개인적으로 <그림자 그림>  <가장 불행한 사람> 은 좀 어려운 느낌이고(반성된 사람 에 대한 개념이 나오는데 , 어렵다나머지는 그냥 읽어 내려가면 되는 듯 싶다.

 

사실 , 키에르케고르가 자신의 철학을 체계화 시켜 둔 책은 없기 때문에 , 그냥 쭉 읽어 내려가는 수 밖에 없는데 , 책이 독특하다.

 

그의 특유의 까칠함이 묻어 나오는 글들을 보고 있노라면 , 참 세상 힘들게 산다라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하지만 , 때론 재미있다. 그는 대개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책을 썼기 때문에 뒤에 나오는 <유혹자의 일기> 등을 보고 있노라면 , 자신 스스로는 그러한 작업의 기술 을 적용하고 살아온 건지......들리는 소문으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성취되지 못했었던 사람 이라고 하던데 말이다. 실제 삶은 어떠했을지 정말 궁금해 지는 철학자다.

 

또한 그가 느끼는 바와 같이 세상은 힘겨운 경우가 많기에, 그러한 삶을 상대하며 치열하게 씨름하며 살아가는 개개인 들에게 그의 말은 굉장한 힘을 실어 줄 것이다.

(이런 진중한 글을 보면서 위로 받는 사람들도 있고 아니면 뇌를 비워두고 살아가야 위로가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또한 , 회의적이고 부정적일 듯한 그가 후대에 남긴 긍정의 효과 도 눈 여겨 봐야 하는데 ,  그는 철학적 사고를 함에 있어서 ‘개인의 중요성’ 을 극대화 시켜둔 듯 하다.

 

 

그 당시 지배적이었던 헤겔 철학은 역사의 변증법을 강조했었다면 , 키에르케고르는 진정한 개인 이란 , 혼자 설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면서 스스로가 세상을 사는 법을 골라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의 유명한 3가지 삶의 방식은 , 미학적(심미적) , 윤리적 , 종교적 방식인데 , 그의 책 <이것이냐 저것이냐> (지금 이 사진 속의 책) 에서는 심미적 단계만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가장 많은 장수를 차지하는 <유혹자의 일기>  , 쉽게 말해서 한 남자가 처녀에게 작업을 거는 , 연예 가이드 북 같은 느낌이다. 

 

상당히 독특한 남자 주인공인데 , 결국 자신이 정의 내린 쾌락 을 충족시키기 위해 할 일 없이 여자에게 추근덕 대는 남자의 내면을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또한 이러한 육체적 만족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암시하는 책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런 깨달음이 책을 읽을 때 잘 드러났는지는 모르겠다.)

 

결국 , 이러한 쾌락의 단계를 지나 도덕적 , 윤리적인 사람의 단계를 거쳐 궁극적으로 ‘육체의 죽음’ 앞에서 밀려 오는 ‘불안,공포’ 마저도 극복할 수 있는 종교적 단계로의 도약을 강조하는 그는 , 신 앞에 ‘단독자’ , ‘개인’ 으로 나아갈 것을 주문한다.

 

대표적인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로서 , 그 이후에 장 폴 사르트르 , 레비나스 , 칼 바르트 , 폴 틸리히 등 다양한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그의 저작들은 때론 신비주의 틱 하고 , 때론 굉장히 논리적이기도 하고, 때론 그냥 문학 작품 같으면서도 , 완전 철학적이기도 한 이중적인 형태를 띄고 있다.

 

그를 알아 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 이 책을 한 번 권해 주고 싶다. 이 책 이외에도 <불안의 개념> , <죽음에 이르는 병> 등 중요한 책이 많으니 한번쯤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책이 너무 두꺼워서 읽다가 필자는 포기함)

 

마지막은 그의 까칠함이 잘 드러나는 그의 고백으로 장식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지금을 악한 시대라 욕하지만 나는 한심한 시대라고 본다. 정열 따윈 아예 없다. 인간들의 사상은 천박하며 , 레이스와 같이 약하다.

 

그 자체가 레이스를 짜는 여공처럼 비참하다.

 

그 사상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어 , 죄도 되지 않을 정도다.

 

구더기 같은 벌레라면 그런 사상을 죄라고 평가할지 모르지만 신의 형상을 본따 만들어졌다는 사람에게는 별 것 아니다.

 

그들의 욕망은 이도 저도 아닌 미적지근한 것이다. 그들의 정열은 수면중이다.

 

그들은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지만 , 유대인처럼 화폐를 조금씩 자르는 그런 짓을 한다.

 

그들은 하느님이 아무리 정확하게 장부에 기입한다 해도 그 눈을 속이려 하고 있다.

 

비열한 놈들이다!

 

그러기에 내 영혼은 늘 구약성서와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되돌아간다.

 

거기에는 사랑과 미움이 있다.

 

사람들은 그 적을 죽이고 , 스스로의 자손을 모든 세대에 걸쳐서 저주하고 , 또한 죄를 짓는다.

 

-키에르 케고르 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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