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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크 데리다의 <법의 힘>

 

이 책은 필자와 같은 초심자가 읽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솔직히 그 동안 읽어 왔던 모든 책들 중 가장 난해했다.. 칸트의 [도덕철학] 을 읽을 때보다 더욱 충격적이었다... 필자의 부족한 독서 생활이 주된 원인일테지만...)

(이 책을 읽은지가 아마 12년 가까이 지난 것 같다. 내용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지만 여전히 이 책이 가져다 준 난해함은 트라우마처럼 내 기억 속에 내재되어 있다.)

  

때론 번역이 이상하다고 합리화를 시켜 보려고도 하고 , 때론 듬성듬성 이해가 되어 가는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 큰 그림을 그려내는 데 실패한 책이다

(결국 쟈크 데리다와 질 들뢰즈를 비교한 2차 서적을 보면서 해체주의니, 구조주의니 조금씩 이해해 나갔던 것 같다. 지적 도전정신을 일깨워주는 책이라고나 할까?)

 

Jacque Derrida

 

그 만큼 , 이 책은 어렵다.

 

(책을 많이 보고 , 냉철한 사고력을 지닌 이들은 맛깔나게 읽어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요약해 주실 분은 제게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철학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지 못하면 , 읽어도 이해가 안 된다.

(12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도 이해할 자신이 없다.) 

 

그런 점에서 , 이 책은 ‘무궁무진한 철학의 길’ 을 열어 줄 시발점이 될 수도 있고 , ‘무궁무진한 철학의 길’ 을 접게 만드는 촉진제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 저자에 대해 잠시 알아 보자도대체 자크 데리다는 누구인가.

 

그는 프랑스 출신으로 대표적인 해체주의 철학자이다.

 

 

텍스트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는 선언을 통해 텍스트 뒤에 숨겨진 구조 를 밝혀내려고 하던 구조주의 사조에 반기를 든 이라고 보면 된다.

 

그의 개념은 난해한 개념  현학성 을 지녔기에 , 혹자들은 그를 현대판 소피스트 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하니 , 그의 책이 다른 분들에게도 어렵긴 어려웠나 보다.

 

그는 기존 서양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해체시켜 버리는 대담한 시도를 했다는데, 더욱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면 , 모든 것을 본질  현상 의 이항대립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사조를 부정하며 , 그것들을 재편성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텍스트 를 가지고 언어학적 유희 를 즐기곤 하는데 , 기존에 특정 텍스트 가 지니고 있던 , 전제를 허물어 버려서 , 우리가 당연시 여기던 것들을 무너뜨려 버리고 , 특정 텍스트가 지니는 특징에 기대어 , 단어 스스로가 파괴력을 지니게 만들기도 한다.

 

 , 서양 철학의 근원지인 로고스 의 기반을 허무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어찌 보면 , 말장난 같기도 하고 이상한 거 가지고 트집 잡는 사람 같아 보이는데 , 그의 논리를 적용하다 보면 , 그 동안 쌓아 왔던 견고한 철학의 금자탑 , 그리고 다른 수 많은 영역들이 흔들린다. 무서우면서도 새로운 개념이다.)

 

이러한 논의를 다시 질서있게 정리해 본다면 그의 해체주의는 과연 정의되거나 번역될 수 있는 어떤 것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지를 질문해 온다.

 

사랑 , 우정 등의 개념들은 과연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러한 개념을 언어를 통해 상징적으로만 알아갈 수 있을텐데 말이다. (음...)

 

결국 그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개념화되고 , 경계가 생기는 기존의 현상학적 개념체계를 반대하며 , 새로운 시각을 지니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고정된 진리 체계(텍스트 등) 를 무너뜨리고 , 새로운 영역을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개념은 실로 독창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논리를 따라가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너무 보잘 것 없어지지 않나?

 

데리다를 제대로 공부를 해 내는 이들은 지적 희열 을 느끼고 , 다양한 분야에 이 개념들을 적용해 보려 할 것이다.

 

가령  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도 , 텍스트에 제한되지 않는 무궁무진한  의 존재 자체가 우뚝 설 수 있을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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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복자들. 탈레스에서 사르트르까지-

 

이 책은 고대 철학자 탈레스부터 , 비교적 최근 인물인 사르트르까지를 망라하는 방대한 인물들에 대한 철학 입문서다.

 

각각의 철학자를 깊이 있게 다루는 책이라기 보다는 , 철학의 계보도를 따라서 , 한 명 한명의 핵심적인 주장 , 특징 들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서 써 둔 책이다. (철학책은 1차 서적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이런 해설서를 많이 보게 되는 것 같다.)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한다고 ,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지닌 관점 속에서 각 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기억에 남는 한 가지는 기존에 부정적으로 묘사되던 소피스트들에 대한 좋은 점들을 명확히 강조하는 저자의 자세다. 이렇듯 2차 서적들은 개인의 해석이 가미되기 때문에 여러 저자들의 책을 두루 읽어놔야 풍성한 사유가 가능해지는 것 같다. )

 

전반적으로 서양 철학의 계보를 그릴 수 있도록 도와 주고 , 특징적인 범주에 따라 각 철학자들을 적절히 분류해 뒀기 때문에 , 철학사에 대한 윤곽을 잡는데는 좋은 책이 될 것 같다.

 

[소피의 세계] 보다도 간단하게 , 그리고 즐겁게 정리할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소피의 세계]는 대화하는 문체, 소설과 같은 형식은 매우 접근성이 좋으나 내용은 생각보다 깊이가 있다. 이 어려운 책을 중학교 때 추천 도서로 읽었다는 게 더 신기하다.

 

(단 , 각 철학자들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는 절대 이 책으로 이뤄질 수 없다. 이 책은 준비 운동 정도로 생각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쓰여진 책이 아니기에 , 철학에 대한 무거운 이미지를 개선하는데도 , 일견 도움이 될 법하니 이 영역을 알고자 하는 분들은 읽어 보길 바란다.) 

 

그리고 탈레스에서 시작하여 사르트르까지 이야기를 하고 끊어지는 건 아쉽다. 그 이후에 나오는 현대철학은 본격적인 헬파티가 열리는 철학의 새로운 시작점이라서 많은 이들을 다시 공부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박영규라는 저자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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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는 이제 서로간의 토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서로가 주고 받았던 편지를 기반으로 쓰여져 있구요..)

 

대체적으로 김윤성 교수가 제의하는 밈 이론에 대한 비판에 동의하구요.[468~469page]

 

장대익 교수는 , 분열되고 풀리지 않던 모든 이론들을 풀어줄 피난처로서 밈 이론 을 적극 수용했고 , 이젠 이 이론을 가지고 진화 심리학 , 신경 과학 , 사회 생물학 등을 넘나드는 통합 이론 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 472~489 page 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등에서 언급되었던 , 종교는 사실 악의 원흉 이라는 식의 논증에 대한 절충안 또는 해답의 일부로 제시할 만 합니다.

 

같이 토의,토론해야 할 부분들.

 

1.

도킨스가 만든 다큐멘터리 [모든 악의 근원]에서..

한 복음주의 목사와 논쟁을 벌인 이야기를 언급한다.

 

그 목사가 성경에는 하나의 모순도 없다고 말하자, 도킨스는 현재의 과학이 성경이 가지고 있는 수 많은 모순점을 지적한다고 맞받아쳤죠. 그랬더니 그 목사는 바로 당신같이 오만한 사람이 바로 문제 라고 비난을 하더군요.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을 동물이라고 말하는 당신하고는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며 대화를 그만둡니다.

[대익 교수의 의견]

 

이러한 견해에 대한 여러분의 입장은?

 

2. 기독교의 선택

 

<1> 새로운 과학 지식에 맞추어 전통적인 가르침 가운데 과학과 모순되거나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폐기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같은 신학적 교의를 문제시했던 19세기 말의 가톨릭 근대주의 가 이 흐름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 근대주의는 계몽주의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성서 비평학을 수용합니다. 

 

이들은 전통 교리 , 특히 구세주론과 구원론에 관련된 교리에 대해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이런 교리들을 포기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 예수 세미나 였던가요? 그 단체에서 성경 속의 내용들을 하나하나 해체해 나가다 보니, 거의 남은 내용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바트 어만의 [성경 왜곡의 역사] 같은 책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엘빈 플란팅가 등에 의해 탈탈 털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2> 새로운 과학 지식에 맞추어 기독교 가르침을 새롭게 갱신하려는 시도입니다. 

 

기존의 가르침이 과학적 사실과 뚜렷하게 모순되는 경우 , 새로 구성하려 한 것입니다. 

 

이 입장은 교리를 당대의 시대 정신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다시 해석하면서 , 기독교 신앙과 현대 지식 사이에 교량을 놓으려고 합니다. 주로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 전통이 이런 입장을 취하죠.

 

<3> 전통적인 종교 지식을 그대로 고수. 강화하고 새로운 과학 지식을 전적으로 배척하려는 흐름입니다. 

 

이들은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과 이에 근거한 신앙 지식을 가지고 과학을 대합니다. 기존의 교리와 다른 지식을 제공하는 과학은 배척의 대상이 되죠. 20세기 초 미국에서 발생한 근본주의와 , 그 영향 아래에 있는 현대 개신교 보수주의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4> 과학과 종교를 완전히 분리하면서 자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입장은 근본주의나 보수주의와 달리 , 현대 과학의 성취를 인정하고 성서 해석에서 좀 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죠. 

 

그렇지만 과학은 종교와 분리된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 종교의 관심사는 철저하게 인간적인 것에 묶어 둡니다. 

 

신학은 인간의 영혼과 윤리 , 도덕 , 역사에만 관심을 갖게 됩니다. 종교와 과학을 분리하는 이런 시도는 20세기 중후반 세계 신학계의 주류였던 개신교 정통주의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1>~<4> 번 중 여러분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개인적으로 <1> <4> 은 반대하는 입장이구요.<2>도 분명 껄끄러운 부분들이 보이늰데 , 그렇다면 남는 건 <3> 인데 , <3> 을 좀 세분화 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3> 번 내에서도 다른 성서 문자주의자 진영이 있을 것이고 , 성서의 진리는 인정하지만 , 그 해석법은 다양할 것이다 라고 주장할 사람도 있을 것이구요..)

 

3. 무신론은 과학적 방법으로서는 필요불가결하고 , 형이상학적 신념으로서는 유신론과 나란히 다양한 선택지들 중 하나이며 , 실천적 신념에  따른 운동으로서는 합리성과 인간성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4.김윤성 교수가 말합니다.

 

과학을 의미 , 가치, 상징 , 문화 , 종교 등으로부터 떼어 놓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과학을 의미와 분리하려 해도 과학은 언제나 의미의 영역에 개입하게 됩니다. 

 

 

또 온갖 가치와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스며들기도 하죠. 과학은 설명의 모형으로 상징을 활용하기도 하고 , 과학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과학은 종교를 비롯한 다른 많은 요소들과 더불어 문화의 엄연한 일부로서 , 다른 요소들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역동적인 상호 작용을 주고 받습니다. 하지만 기어츠는 과학을 애써 문화나 종교로부터 격리시킴으로써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상호 작용들을 애써 무시합니다. 

 

굴드나 길키가 그랬던 것처럼 기어츠 식의 분리에서도 과학과 종교의 대화란 애초에 불가능하죠.

 

(참고 자료: 굴드는 사실과 의미의 영역에 종교를 국한시켜서 , 사실 의 영역을 과학에게 줌으로써 , 과학에게 유리한 입장을 유지하려고 했던 무신론자이구요. 길키라는 사람은 과학을 사실 의 영역에 가둠으로써 ,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는 본분에나 충실하라고 , 과학에게 냉소적인 미소를 짓습니다. 인간의 삶에 관련된 가치와 의미에는 과학이 함부로 개입하지 말라는 의도가 담겨 있죠. 결국 , 서로 간의 의도가 달랐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두 영역 을 분리 하려고 시도했었죠.)

 

(전 종교가 사실 의 영역에 개입하지 않을 수는 없다라는 주장을 , 과학이 의미 의 영역을 넘보지 않을 수도 없다는 김 교수의 입장에 덧 붙이고 싶습니다결국 , 쌍방간에 완벽한 이분법적 분리 는 불가능 하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토의거리: 과학과 종교를 명확히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는가?

 

5. 종교학을 가르치는 정진홍 교수의 글입니다.

 

종교의 다양성은 타자를 인정하고 차이를 수용하는 윤리를 요청하는데, 배타적 신앙은 이 윤리적 의무를 저버린다. 경전을 역사나 과학이 아닌 신화로 여긴다고 해서 그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경전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이는 시대 착오가 오히려 경전의 의미를 훼손할 수 있으며 , 반대로 경전을 신화적 은유와 상징으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 풍성해질 수 있다.

 

또한 다른 부분에서

 

진화론적 유신론은 역사.비평적 성서 해석을 따릅니다. 우선 [창세기] 에서 창조를 설명하는 구절들을 문자적 으로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창조와 관련된 [창세기1~11] 의 기록을 비역사적인 설명으로 보는 것이죠.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성서는 과학 논문이 아니니까요. 대신 [창세기] 의 창조 이야기를 신앙 고백으로 받아 들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성이나 정확성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창세기 1] 은 고도로 비유적이고 시적인 문학입니다. 따라서 신의 계시가 담긴 성서를 과학 이론과 일치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잘못입니다. (신 교수의 입장)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창세기1~11]  , 아브라함 이전 시대에 대한 논의들을 요즘 신학계의 한 흐름을 따라서 그저 단순한 신화에 불과하다 라고 보는지 아니면 신화적으로 봐야 하지만 , 진리를 담고 있다 라고 여기는지 아니면 , 분명 [창세기1~11] 는 역사적으로 사실 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해석법은 다양하게 열려 있다 라고 주장하는지 아니면(그래서 , 신 교수의 말처럼 창세기의 초반의 역사성을 믿었다고 해서 모두 젊은 지구 창조론 등을 믿을 필요는 없다는 것) , [창세기1~11] 은 역사적으로 봐야 하며 , 그 문자 하나 하나가 다 틀리지 않다라고 생각하는지

 

6. 신학의 흐름

현 신학의 흐름 자체가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거룩한 인격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격화된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았는데 , 요새는 신을 인격적으로 그대로 설명하는 것 자체를 학자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흐름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 전통에서 신학자들이 신을 인격적으로만 설명한다면 막말로 저 자식 참 촌스러운 자식이네.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죠.

 

1960년대 이후 신을 인격신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문제 삼기 시작했죠. 대표적으로 디트리히 본회퍼나 폴 틸리히 에서 시작해서 현대 신학에서는 신을 인격신으로만 생각하지 말라고 그러거든요.

 

이러한 의견에 대해서 여러분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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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생명의 기원창조주를 상정하지 않고 ,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자연 과학자 진영밀러의 유리 실험을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윤성 교수는 이 밀러의 실험을 언급하면서 , “확률이 극히 희박하게 낮다 할지라도 , 일어난 건 일어난 거다. 우리가 지금 여기 존재하는 건 , 언젠가 한 번 극도로 희박한 확률의 물질 합성이 일어나서 , ‘생명체가 자연 발생했던 것이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급하게 논리의 비약을 하기 시작합니다.

 

 

과학적으로 볼 때 생명이 무기물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밀러의 실험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 해 보자면

 

밀러라는 어르신이 원시대기의 조성을 기초로 하여 , 원시지구의 모형을 만들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를 알아보는 실험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유리병 속에 메탄 , 암모니아 , 수소 가스라는 무기물을 집어 넣어 원시 대기를 만들고 , 불꽃 방전을 일으켜 원시 대기에서 일어나는 번개를 재현 시킵니다. 그리고 물을 끓여 , 기상 상태를 조정하고 바다의 분위기도 연출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합성되었다는 놀라운 실험입니다.

 

하지만 ,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밀러의 유리 실험철저하게 setting 된 연구실내에서나 겨우 될까 말까한 실험이었고(불가능하다고 봐야할 겁니다.) , 물질 합성이 성공하고 나서도 걸어가야 할 길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난감한 실험입니다.

 

(이 부분은 리 스트로벨의 [창조 설계의 비밀] 을 읽어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혹여 무기물에서 유기물의 합성을 가능케 했다 할지라도(이 영역도 결코 타협하기 힘든 , 억지가 많이 개입되어 있지만)

 

그렇다면 , 그 첫 무기물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철학을 이용해 보자면 영원한 질료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리고 본격적으로 PART4 에서는 ,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을 한 덩어리로 보고 , 비판하기 시작하는데요.

3명의 저자 모두가 한 마음이 됩니다.

(이 책의 퀄리티가 확 떨어지는 지점입니다.)

 

 

하지만, 345page 부터 445 page 까지 중에 지적 설계그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해 주는 부분은 398 page 에서 마이클 베히환원 불가능한 복잡성개념을 살짝 건드리는 정도. (어떤 과학적 조사에 의한 주장이 아니라 , 과학이 발전하면 그 동안 설명해 내지 못한 세포 진화에 대한 설명이 나올 것이라는 막연한 주장 뿐입니다. 혈액 응고 등의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지닌 생명 반응을 , 언젠간 풀어낼 것이다라는 막연한 주장.. 근거는 전혀 제시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 러셀 둘리틀처럼 혈액 응고 메커니즘이 실상은 환원 불가능하지 않다라고 과학적으로 반박해 오는 게 더 옳아 보입니다.(하지만, 러셀의 의견은 이미 반박되었습니다)

 

 

그리고 400 page 에서 윌리엄 뎀스키의 특정화된 복잡성개념에 살짝 딴지를 거는 정도.

 

(근거가 없습니다. 이런 부분을 집중 연구해서 , 책을 만들었다면 제대로 된 반박서가 될텐데뎀스키의 설명 필터’(explanatory filter)’ 이론이 작위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근거는 전혀 언급 되어 있지 않네요. 뎀스키의 논증이 , 이렇게 단 몇 문장으로 끝낼 만큼 간단하지가 않을텐데.. 누구보다도 지적 설계 진영에서 책을 많이 쓰고 , 글을 많이 쓰며 , 인터넷을 통해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는 뎀스키를 너무 무시하는 건 아닌지 싶네요. 그 유명한 진화 철학자 마이클 루즈도 뎀스키의 논증에 높은 점수를 줬는데, 너무하지 싶네요..)

 

 

이게 거의 전부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 대니얼 데닛 , 리처드 도킨스 , 제리 코인 , 스티븐 핑거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 과학자들이 모여서 지적 설계를 공격했다는 [지적 사고(Intelligent Thought)] 라는 잡지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리처드 도킨스

 

이들은 , 지적 설계론이 과학계의 사실들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비판의 요지를 장 교수가 자신의 방식대로 재구성한 부분이 책에 언급되는데요.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점령하지 않았다고 기술돼 있는 역사 교과서가 있다고 해 보죠. 그리고 그 저자들이 지금 교육부를 방문해 연일 시위를 하고 있다고 해 봐요. 또 일부 인사들은 그 교과서의 채택을 목표로 고위층 로비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한쪽 입장만 가르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양쪽 입장을 모두 가르쳐라.” 이 얼마나 근사해 보이는 논리입니까.” (지적설계 진영이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는 의미로 쓴 글입니다.)

 

하지만 이건 제대로 된 논증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지적 설계는 사이비 과학이라고 못 박아 두고 , ‘거짓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니 , 뭐 할 말이 없네요.

 

이러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 거의 지적설계를 다루는 이들의 태도에 대한 문제들 , 그리고 그들이 품고 있는 숨은 의도 등에 대한 경고 , 반발 등으로 지적 설계론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토론을 할 만한 부분이 있다면.

 

거기에는 과학자라면 누구나 참여해야 할 논문 심사 시스템이 없고 , 혹시 학회와 학술지가 있을라치면 그것은 늘 그들만의 리그일 뿐입니다. 그러니 연구 프로그램과 그 성과물이 있을리 없습니다. 반명 어떻게든 교과서는 만듭니다. 또한 대중 강좌 프로그램은 바쁘게 돌아 갑니다. 왜냐하면 과학의 내용과 논리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이 그들의 고객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이것은 바로 사이비 과학의 전형입니다.”

 

이런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단 , 조금 변호를 해 보자면 , 기존 주류 과학계에서 그들의 말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받아 들여 주질 않으니 , 이러한 맥락에서 논문을 써 봤자 , 퇴자 맞을 게 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 놓고 , 왜 너희들끼리 노냐고 비난합니다. 어서 우리 쪽으로 오라고..(그 대신 , 우리가 지닌 방법론을 수용한다는 조건을 지켜라고 이야기 하지요.)

 

 

하지만 , 이들이 너무 성급하게 움직이면서 , 제대로 된 개념을 갖추지 못한 상태로 , 강연 등을 다니고 , 교과서 채택부터 시도하려고 함으로써 대외적 이미지가 손상된 부분이 있기 때문에 , 일단은 그러한 홍보 활동보다는 , 진지한 토론과 합의를 해 나가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도 해 봅니다.(하지만, 상대 측이 전혀 받아 들여 주질 않고 , 문자주의적 창조과학 지지자들과 한 패로 봐 버리니 , 진지한 토론 합의도 할 수 없고 , 별 수 없이 자신들의 말을 들어라도 주는 , 사람들을 찾아 홍보를 하고 다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진화 생물학은 생물학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대해 확실한 설명을 제공하진 못해 왔다. 하지만 지적 설계론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설명하려는 시도조차 아직 하지 않았다.”

 

(이런 부분들은 나름 연구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실례되는 발언일 수도 있겠고 , 또는 새로운 연구에 대한 열정을 잃어 버리고 , 기가 죽어 있는 지적 설계를 지지하는 과학자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 아웃 사이더의 길을 감당해야 한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상대측이 혹 할만한 성과라…… 과연 어떤 발견을 제시한다 해도 , 그들이 귀를 열어 줄지 의문이지만.)

 

결국 , 전체적인 맥락들은 계속적으로 지적 설계를 지지하는 이들은 기독교 보수주의spirit 을 숨기고 있고 , 자신들의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지적 설계라는 도구를 철저하게 이용할 뿐이라는 비난이 이 책이 지적 설계를 비판하는 주된 이유인데요.

 

이런 의도를 비난한다 치면 , ‘무신론자들이 , ‘다윈주의를 철저하게 이용하여 , 자신들의 무신론을 정당화 하기 위해 , 멀쩡한 진화론을 확장시켜 , 모든 사회 현상을 진화론적 패러다임으로 설명해 내려고 발버둥 치는 지금의 모습은 , 하나의 철저한 의도가 감춰진 것은 아닌지……..그들에게는 신이 있으면 안 되기에……신이 없어야 하기에..

 

그래서 9.11 테러와 지적 설계 운동 두 가지 덕분에 무신론자들이 한 목표로 뭉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닌지요.(장 교수의 말마따나)

 

이런 맥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신 교수의 입장은 장대익 교수와 전혀 조화를 이룰 수 없게 되구요.

 

(지적 설계 , 창조과학을 사이비로 몰아 붙이는 데는 한 마음이 되지만 , 신 교수는 진화라는 개념을 자신이 믿는 개념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어떠한 것으로 이용하려고 하고 있고 , 장대익 교수는 전혀 신의 자리를 남겨두려 하지 않는 형국입니다.)

 

그리고 , 신 교수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 보면

 

416 page 1페이지로 그는 창조과학을 붕괴시킵니다.

 

(아무리 성경 문자주의자. 그리고 성서 무오론자들이 , 자신들의 신앙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 엉뚱한 주장들을 많이 했기로서니, 창조과학 안에도 분명 진지하게 논의해 볼 만한 분파가 있거늘, 그 어떤 문제 제기 , 반론도 없이 그저 가짜라고 단언하는 태도는 전혀 프로페셔널 하지 않아 보입니다. 책의 지면이 부족했을까요? 유신론 대변자로서는 좀 부적합한 태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417 page 부터는 지적 설계를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몇 번이고 반박이 되었던 논증을 다시 반복하면서..

 

지적 설계빈틈의 하나님 전략을 취할 뿐이다라고..이야기하고..

 

이러한 주장을 합니다.

 

 

그들은 진화론이 오류이면 창조론은 저절로 정당성이 증명된다고 생각합니다.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 모두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아주 편향적인 흑백 논리에 빠져 있습니다. 갑이라는 이론이 특정한 사례를 해명하지 못한다면 , 을이라는 이론이 옳다는 논리죠.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하니까 창조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강경 보수 진영 창조과학회에서나 이런 주장을 하지 , 최소 지적 설계론자들이 이런 주장을 했다는 건 사실이 아닙니다. 양자택일 , 흑백논리라…… 실질적으로 지적 설계라는 개념이 진화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진화라는 단어 자체의 정의도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 그 중에서 철저한 자연주의적 방식을 고수하는 진화에만 이의를 제기하는 , 지적 설계론은 양자택일을 강요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 분이 개인적으로 만나 봤던 지적 설계론자가 , 이론을 오용하여 양자택일 강요했다면 , 그건 그 분께 개인적으로 지적을 했었어야 하는데 , 그 사건을 일반화 시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 교수는 지적 설계론이 과학의 눈으로 봤을 때도 사이비지만 , ‘신학의 관점으로 봐도 문제 투성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이 주장하는 창조는 철저하게 [창세기] 의 일부 구절에 한정됩니다.”

 

 

 

그것은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 진영에 신학을 제대로공부한 사람이 드물고 , 따라서 물려 받은 자신의 신학적 경향을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 이렇게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일차적인 근거입니다.”

 

왜 계속 지적 설계론이 성경과 접목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실제 이런 논의를 펼친 적이 없거늘.. 계속 , 숨은 속내를 들춰 내 보였으니 , 이젠 들춰진 상태로 계속 이야기 이어 나가겠다는 것인지.. 누가 신학을 만족시키려고 , 지적 설계를 지지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계속 그 분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신을 세계와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존재로 보는 정통 기독교의 신론과 동떨어져 있는 게 바로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이다.”(그런데 , 너희들은 왜 이런 이상한 이론을 들고 와서 ,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냐.결국 너희들이 원하는 인격 신을 옹호해 낼 수 없다그러니 , 다 버려 버려라.이런 의미겠죠?)

 

 

그리고

 

 

또한 전능한 신이 만든 완성된 세계라는 이들의 전제는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생명계의 현실과 당연히 모순을 이루고 있죠.”

 

이러한 일련의 말들을 보면서 하고 싶은 말은 , ‘인격신을 주장하려고 지적 설계 개념을 붙들든 그렇지 않든(대개는 붙들고 싶겠지만) , 지적 설계 라는 개념 자체는 그러한 주장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순수 논증만을 요구하기 때문에 , 그러한 인격신 주장을 기대해서도 안되며 ,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며 , 그러한 기준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선을 넘은 이들이 있다면 , 그건 그들이 ID 를 오용했을 뿐이지 , ID 자체에 그러너 함의가 담긴 적은 전혀 없다는 것이죠. 그저 설계자 존재만 논증하면 되기에 , 그런 포괄적인 논증용으로 지적 설계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

(도대체 누가 그런 주장을)

 

그리고 계속 신학적으로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론을 비판하는데

 

창조 신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논의에 따르면 결국에는 태초의 창조만을 기독교 창조와 동일시하는 결과에 빠지고 맙니다.”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논지를 따르면 , 신은 역사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일회성 창조로 끝이 아니다. 신의 활동 여지를 아주 없애 버리죠. 활동을 멈춘 신은 더 이상 기독교의 신이 아닙니다.”

 

어째서 지적 설계론 등을 지지하면 , 유신론이 이신론으로 변해 버리게 되는 건지 , 그 근거는 제대로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 사실도 아니구요. 

 

너무 황당한 주장으로 받아 들여지는데 , 오히려 지적 설계론을 신학의 스펙트럼으로 바라보는 신 교수의 관점에서 객관성이 흐려지는 것은 아닌지요. ‘지적 설계론기독교 신학의 구미에 맞출 이유도 없으며 그저 과학적 방식을 이용하여 , ‘설계된 영역들을 탐지해 나가겠다는 작은 부분만을 설명해 내는 이론일 뿐인데 , 그 속에서 너무 많은 것을 끄집어 내려고 합니다. 주장하지도 않은 이야기들, 관련도 없는 이야기들을 연결 시켜서 신학적으로 비판합니다.’

 

 

그 분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이런 식으로 전개 됩니다.

 

 

 

신 교수님은 지적설계론 등을 기독교의 전파야욕을 위해 어설프게 이용되는 도구 그 이상으로 절대 보지 않습니다. 일부 사람에 한정하여 주장했으면 좋았을 텐데 ,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주장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고수한다면 , 전혀 정당한 토론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분의 말을 더욱 들어 봅시다.

 

 

 

따라서 지적 설계론이 좀 더 진전된 신학적 주장을 하려면 , 그 설계자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라는 것을 또 다시 증명해야 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부분도 역시 지적설계 지지자’ = ‘기독교 신 존재 증명 원하는 자라는 공식을 전제로 설명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부분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그런 수단으로서 사용될 필요가 없는 이론/가설'인데 말이죠.)

 

 

지적 설계론의 주장을 설계 논증으로 본다면 신학적으로는 근거가 빈약한 논증이며 , 별로 고려할 가치가 없는 논증입니다.”

 

뭘 얼만큼 고려했는지는 모르겠지만 , 지적 설계에 대한 논의를 이렇게 두리 뭉실하게 해 놓고 , 단박에 버려도 될 만한 제품 취급을 하고 계십니다. 신학적 근거가 빈약하다는 건 , 왜 비판 받을 만한 여지가 되는지도 참 모를 일입니다.

 

 

여기에는 제대로 된 신학도 없고 , 제대로 된 과학도 없고 , 사이비 신학과 사이비 과학만 있을 따름이죠. 결코 좋은 종교도 좋은 과학도 아닙니다.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은 결국 기독교와 신학의 종말을 자초하는 부메랑이 될 것입니다. 이게 제가 아직까지 채 잉크도 마르지 않은 책들을 포함해서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 운동 진영의 문헌들을 검토하고 내린 결론입니다.”

 

기독교와 신학의 종말을 자초한다?

 

그리고 왜 지적설계가 과학적이지 않은지 에 대한 부분도 , ‘자연주의 방법론을 지니지 않으면 , 절대 과학이 아니다라는 전제 하에서 한 문장으로 반박해 버리고 ,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으니 제대로 된 논의는 되지 않고 , 이야기는 비참하게 엔딩을 맞고 맙니다.

 

 

물론 , 그 분이 신학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겪게 되는 곤란한 상황들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 , 비 과학적인 잘못된 창조 과학의 개념들을 거침 없이 수용하여 , 학생들에게 그러한 가르침을 주입시키고 , 정당화 시키는 등의 실태를 보면 , 부끄럽고 할 말이 없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한 염증이 클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 이런 부분들을 읽어 보면..

 

 

사실 지금 목회를 하는 기존의 목사님들 거의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 이어지는 군사 독재 시절을 보냈습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 당연히 제대로 신학 교육을 받을 여 건이나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성서 비평학은 물론이거니와 신앙과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자연 과학을 공부할 기회는 더욱 없었죠. 그런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으니 , 이들이 과학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지적 설계나 창조 과학 등을 잘 모르고 , 순진하게 받아 들이시는 교회 어르신들의 입장도 일견 동정하게 됩니다. 창조 과학 등을 자신의 신념 때문에 마구 전파시키는 소위 엘리트 종교인 과학자들도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들은 동의합니다.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 이야기를 정확하게 가늠해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교회 안에 거의 없다는 말입니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비판할 수 있는 그런 불경한교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긴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논의를 펼치는 사람들은 더욱 신중하고 ,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 다시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

 

 

진화론을 부정하는 젊은 지구 창조론과 오랜 지구 창조론, 지적 설계론이 한팀이며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건지 , 진화론 그 자체를 부정할 이유가 전혀 없는 지적 설계론이 왜 한 팀으로 묶여 있는 건지..

 

신 교수는 진화론이라는 단어를 너무 모호하게 사용하여 , 그 분 스스로가 사용할 때는 순수한 의미의 명백한 과학적 사실인 진화를 이야기 하고 있겠지만 , 일반적인 의미의 진화론은 모든 생명체가 이러한 자연선택과 돌연변이에 의해 , 자신의 특성이 선택되고 누적되어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자연주의적 진화를 다루고 있기에 , 이야기가 많이 꼬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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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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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신재식 교수는 유신론적 진화론 과 흡사한 구석이 있는 존 호트의 견해를 받아 들이며 , 그의 견해가 기독교 신학에서 주류에 더 가깝다고 이야기 합니다.

 

(무슨 근거로 존 호트의 견해와 판넨베르크의 견해가 기독교 신학을 대표하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고 , 이러한 견해가 지적설계론보다 더 뛰어난 근거도 무엇인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지적설계가 기존 주류 과학의 권위 와 자주 충돌하니까 , 함께 붙잡고 가기가 껄끄러워서 냉혹하게 버려버린 건 아닌지.)

 

존 호트의 논의를 그리고 신재식 교수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사물이나 생명에 관한 설명에는 다양한 수준의 설명이 있으며 , 이것들은 상보적이며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확고히 지니고 있다. 소위 설명의 다윈주의(explanatory pluralism) 에 토대를 둔 것이며 , 이러한 개념과 우주에 대한 비환원주의적 인식을 지님으로써 종교와 과학이 공통의 연결 고리를 찾게 될 것임.

 

설명의 다윈주의를 통해 유물론적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과학적 환원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디딤돌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유기적 세계를 통전적 으로 이해하려는 현대 과학의 시도와 부합한다

 

분명 설명은 그럴싸하고 ,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정말 이렇게만 설명이 된다면 ,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고픈 생각이 간절하구요.

 

하지만 , 철저한 자연과학주의자 들에게는 , 이런 어설픈 제의는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겁니다. 

 

 

자연과학 만으로도 , 풍성하고 완벽한 의미는 설명될 것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도 있겠다. 그 동안 쌓아온 진화론적 분석 자료 들이 있겠다. 인간의 이타적인 행동도 분석해 내고 , 다양한 사회 현상들을 진화론 적으로 해석하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이 와중에 , 뜬금 없이 종교가 손을 잡자고 손을 내민다면 , 그들은 코웃음을 치며 이 제안을 거절할 것입니다.

 

그가 제시하는 다른 입장은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가 주장하는 관점인데요.(차라리, 존 호트의 관점보다는 이 사람의 관점이 그럴싸 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의 저서 [자연 신학] 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만일 성서의 신이 우주의 창조자라면, 그 신을 언급하지 않고 자연 과정들을 완벽하게 , 혹은 적절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역으로 만일 자연 과정들이 성서의 신을 언급하지 않고도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면 , 그 신은 우주의 창조주가 될 수 없을 뿐더러 , 결국 그 신은 진정한 신이 될 수도 , 윤리적 가르침의 근원으로서 신뢰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이 견해에 대해서는 신 교수도 동의하고 ,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판넨베르크의 주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그는 결국

 

자연을 신의 창조물로 설명하는 신학적 해석이 물리학이나 다른 자연 과학의 해석과 경쟁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대를 여지 없이 무너 뜨리는 게 현재 주류 자연 과학자 들이며 ,또한 순수 자연 과학 이라는 개념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며 , 자연 과학 이 사용하는 방법론 만을 취한다 쳐도 , 주류 진화론 을 수용해야 하고 ,  진화론 을 붙들고 있는 주류 진화론자 들의 모든 견해를 폭 넓게 수렴하다 보면 , 건전한 진화론 개념 속에 숨어 있는 유물론적 사관 , 자연주의적 견해 들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면서 ,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형이상학적이고 , 전혀 중립적이지 않은 과학 을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기독교인들은 진화론 자체를 부정한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 함축된 숨은 그림자 를 걷어내고 나면 , 눈에 뻔히 보이고, 명명백백 증명되어 있는 진화론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 과학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편견의 벽을 쌓아 버린 종교인들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구요. 그러한 다수의 모양새를 보고 실망하고 , 종교인들<기독교인들> 진화론 자체를 부정하고 , 사이비 과학 이나 주장하는 억지 투성이라고 성급하게 일반화 해 버리는 과학계 진영 에도 분명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 존 호트의 의견 , 판넨베르크의 의견은 장대익 교수 등이 취하는 과학계 진영에 전혀 구미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신재식 교수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면..

 

제가 보기에 열린 과학 철학을 통해 유신론적 과학을 확립하려는 시도는 과학적 동기에서 출발한 게 아닙니다. 종교적 동기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 시도를 어떻게든지 과학이라고 포장한다 할지라도 , 이것은 기독교 신념에 근거한 신앙의 발현이지 과학 작업은 아닙니다.

 

계속 이런 식입니다. 지적 설계 그 자체 에 대한 비판은 충격적으로 적습니다. 그리고 너무 싱겁게 논의를 끝내 버리고 , 계속 자신이 붙들고 있는 창조과학에서 탈을 바꿔 쓴 지적설계론자들은. 논의할 필요조차 없는 사이비 과학자들이다. 라는 전제를 반복해서 언급할 따름입니다.

 

오히려 , 신 교수 스스로가 자신이 겪어 왔던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위선과 독선’ 등에 대한 앙금을 제대로 걷어 내지 못하고 , 이렇게 펜을 든 건 아닌지 , 염려가 됩니다. 이 문제는 장대익 교수나 김윤성 교수도 마찬가지인데요. 다들 , 기독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고, ‘신의 존재’ 에 대한 궁금증이 있어 왔고 , 동일하게 ‘창조과학’ 에 대한 뼈아픈 체험이 있기에…. 이 분들이 ‘창조과학,지적설계론’ 에 있어서는 유독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도 , 그들이 ‘객관적’ 으로 ‘이러한 학문’ 을 논의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님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앙금이 계속 글 전반에서 표현됩니다. 창조과학이라는 것을 접하면서 , 신앙과 과학의 조화를 한껏 기대했지만 , 막상 들여다 보니 편협하고 , 엉뚱하고 , 끔찍했으며 , 그러한 시대를 겪어 오다가 , 이젠 지적설계 라는 개념이 생겼고 , 자신이 그토록 실망했던 이들이 다시 그러한 지적 설계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 그 두 개념은 동일하게 보이게 되어 버리는……그 학문을 다루는 보게 되기가 쉽지만, 그 개념 자체 를 순수하게 바라보기는 힘든 위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런 앙금들이 씻겨진 상태였다면 , 지적 설계론에 대해서 좀 더 심화된 논의를 해 주고 , 좀 더 철저하게 해부해서 반박을 해줬어야 하는데 , 기이하리만치 그러한 반박이 보이질 않는다는 점에서 , 전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논쟁의 큰 한계 를 느끼게 됩니다.

 

또한

 

신 교수는

 

“’일치주의 는 신앙에 과학 지식을 일치시키려는 시도로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이 과학을 보는 태도에 적용할 수 있을 것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신앙과 과학을 일치시킨다는 말이 굉장히 모호한데요. 여기서도 토의해 볼 만한 구석이 많이 남아 있는데 , 너무 성급하게 글을 마무리 하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성경 문자주의자 들이라면 , 신앙에 과학 지식을 일치시키려는 시도를 할 것이고 , 말도 안되는 억지 주장 을 하기도 하겠지만 , 성경의 권위 를 인정하면서도 , 그 성경 문자 하나 하나에 과학을 끼워 맞추지 않는 견해가 충분히 있을 수 있음을……..소위 온건한 의미의 보수 신학도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신 교수 스스로가 그러한 신학을 하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말이죠.

 

그리고 일치주의 는 시종일관 비판만 하고 , 적응주의  포괄주의 설명은 중립적으로 (또는 자신의 시야를 적용해서) 설명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 이미 색안경이 끼워진 상태는 아닌지. 다시 한 번 우려가 됩니다.

 

김윤성 교수도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무조건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 무신론은 방법적 차원에서는 과학의 핵심 토대지만 , 실재의 궁극적 본질을 탐구하는 차원에서는 그저 여러 선택지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신 교수와 동일한 견해입니다.)

 

(결국 , 순수 자연 과학  형이상학적 자연 과학 이 어떤 기준으로 , 어떤 방법에 의거하여 분리 가능한지를 고민해 봐야 할 것입니다. 제 주장은 분리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 그에 대한 증거로는 리처드 도킨스 , 데니얼 데넷 , 윌슨 ,장대익 교수 등이 걷고 있는 길을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 김윤성 교수가 이야기 하는, 신 존재 증명  신 부재 증명 과 함께 , 성공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한 부분들은 동의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 한 쪽은 신이 없다는 전제 하에서 이야기를 전제하고 , 다른 쪽은 신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니 실상 양쪽이 다 할 말들이 있는 상태이므로 (한 쪽이 더 어설프고, 세상을 불명확하게 설명한다고 논박하고 토론할 수는 있겠지만) , 이 책의 저자인 장대익 교수와 유신론 진영인 신재식 교수 등은 (서로가 자신의 기준을 어느 정도 지키고 있다면) , 결코 타협점을 찾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신재식교수가 기준을 벗어나 , 너무 타협해 버린 것 같아서 상황이 좀 독특하게 흘러가는 책이지만..물론 ,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각 분야의 대표가 3명 모였다고 하지만 , 각 분야 내에서도 분파가 갈리기 때문에 , 그 분야를 대표 한다는 말이 사실 유명무실 할 수 있다라는 언급을 하시긴 합니다.섬세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게 이 책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한계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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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과학]

신재식교수는 이 책에서 시종일관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론을 계속 한 덩어리 취급을 하는데, 그러한 이유는..

 

이들이 주류 과학을 무신론적 유물론 의 포로라고 비판하고 , 초월적 존재의 설계 를 용인하는 열린 과학 철학 을 주장하며 , 현대 과학의 대안으로서 유신론적 과학 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다.

 

라는 겁니다.

 

이러한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론 한덩어리로 묶어버리기  ,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 되기 때문에 , 이러한 오류를 곳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지적설계론에 대한 조예가 깊은 멤버가 한명 참전했다면 이 책의 가치가 더욱 빛났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신재식 교수가 말하기를..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이 중요시 여기는 것은 명시적으로(창조과학) 또는 묵시적으로(지적설계론) 성서이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누누이 말씀 드리지만 , 지적 설계에 매달려 있는 사람의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 지적설계라는 논증 자체에는 성서 가 개입될 틈이 없습니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성서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 과학 지식이 성서의 주장과 모순되는 경우 과학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이 논쟁 양극단에 있는 두 문자주의가 바로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라는 성서적 문자주의’…..

 

(지적 설계 활동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면 , 이런 소리가 과연 나올 수 있었을까요. 타종교가 과학과 지니는 관계라든지 , 그들이 과학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이 책의 저자 3명 중 그 누구도 박식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논의를 펼칠 수도 없었고 말이죠. 

 

그런데 ,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요? 기독교인으로서 지적설계를 붙잡았기에 성경을 묵시적으로 고려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닐까요? 

 

하지만 , 실제 논증 속에서 성서 를 들먹인 적이 있었던가요? 또한 성서의 해석 방법이 무궁 무진 하거늘. 성서에 오류가 없다 라는 전제를 붙드는 것과, 그 오류 없는 성경의 접근법 이 다양하다는 것이 공존한다는 것을 모르시는 건지, 실존주의 신학을 수용하면서도 , 지적 설계의 순수 논리를 적극 수용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보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일반 무신론자 분들이나 , 타종교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으면 , 그래도 이해를 하겠는데 , 신학 대표를 자처하고 나온 신 교수가 이렇게 발언을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가 취하는 노선이 자유주의 신학인지  실존주의 신학인지(이 영역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모르겠지만 , 분명 그 분의 신학적 색깔 이 진하게 반영된, 좋게 말하면 세상과도 소통을 잘하는 Cool 한 신학. 엄밀하게 말하면  타협 이 도를 넘어서서 , 위험해 보이는.... 소위 정신 유전자와 다름 없는  이라는 개념을 Open Mind 로 적극 수용하고 , 장 교수와 이러한 맥락으로 이야기 할 때도 전혀 무리가 없어 보였던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개념 을 수용하는 순간 , 자신이 믿고 있던 유신론 속의  은 형체도 없는 유령이 된다는 것을 아시는 것인지, 아니면 , 장 교수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자 맞춰 주려는 의도에서 그런 표현들을 사용한 것인지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 15년 지난 지금 시점에서 이전에 쓴 글들을 보면 형이상학적 열정이 컸던 것 같다. 과연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데 이런 논의가 의미가 있긴 한 걸까? 라는 회의감이 가득 들긴 하지만,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러한 세계관 싸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한번쯤 고민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 종교와 과학이 이렇게 다투는 것은 생각이 짧은 것이며 , 종교가 과학에게 말도 안되는 요구 만 하지 않는다면 , 둘은 멋지게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신 교수의 입장은 군데 군데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요.)

 

그러나 저는 , 현대 과학을 유물론적 자연주의나 무신론적 자연주의의 포로라고 보는 이들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과학 작업의 핵심은 방법론적 자연주의이며 , 이것과 유물론적 자연주의를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다는 게 제 입장입니다. 또한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배제한 과학은 이미 과학이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진화 과학은 , 생명에 대한 종교의 설명과는 무관하게 생명 현상을 기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화 과학 종교의 설명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하시는데 , 우주와 생명의 기원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 충돌은 절대로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기껏해야 소위 소진화<이 용어에 문제 제기하시는 분들도 있던데> , 정도나 수용할 수 있을까요? 눈에 뻔히 보이는 변이 등에 대해 태클을 거는 건 , 나쁜 의미의 성서 문자주의자 들 뿐이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현대 과학은 절대 유물론적 자연주의  무신론적 자연주의 의 포로가 아니라고 이야기 하시는 분이  등의 개념에 대해 , 전혀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는 건 모순 아닐까 싶습니다.

’(meme)  , 무신론적 자연주의자 , 유물론적 자연주의자들이 , 신을 상정하지 않고도 세상을 설명해 내기 위한 강력한 카드 중 하나인 것을 분명 아실텐데 말이죠.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 [확장된 표현형] 등을 보신 것 같던데 , 참 이상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서 , 유전자로는 설명해 낼 수 없는 마음과 정신 , 형이상학적인 영역들을 설명해 내려고 애를 쓰고 있는 무신론적 자연주의자 진영의 움직임을 알고 있다면 , 이러한 모순되는 행동은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이 부분은 , 장대익 교수가 분명 가장 잘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신 교수의 그러한 제의는 잘 몰랐던 이론에 대한 inform 정도는 되겠지만 , 전혀 받아들일 수도 없고 , 받아들일 필요도 없는…… 자신이 붙들고 있는  으로 세상이 설명 된다면 , 함께 상생하자고 손을 내미는 종교의 손은 여지 없이 쳐 내 버리면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게 논리적으로 맞기도 하구요. )

 

 

결국 , 다시 정리하자면 신재식 교수(김윤성 교수도 일견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는 계속적으로 , 종교와 과학은 서로 다툴 필요가 없으며 , 종교계는 과학을 받아 들일 때 , 방법론적으로는 자연주의 를 허용 해야 한다고 주장 합니다. 이 말은 뼛속까지 자연주의자 가 되어서 , 신을 부정하라는 소리가 아니고 , 과학 이라는 소위 객관적인 학문 을 해 나갈 때는. 그 영역을 다루는 순간에는 자연주의 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노선은 주로 신학을 하시는 분이나 , 목회를 하시는 분들이 좋아하는데 , 왜냐하면 서로 다투지 않고 둥글게 둥글게 평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온 게 유신론적 진화론 과 같은 개념이구요.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가 있었으며 , 그 창조 이후에 진화라는 개념이 사용되든 그렇지 않든 문제될 것 없지 않느냐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 진화론자들은 이런 설명을 전혀 받아들여 주지 않죠. 다윈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유신론적 진화론을 지지하는 이들이 결국은 신앙 고백을 하는 일련의 종교인으로 보일 것이고<어찌 저찌 되었든 신을 상정했으니> 그들의 목적은  없이도 , 생명의 기원 , 우주의 기원을 설명해 내는 것이기에, 유신론적 진화론의 이야기는 전혀 설득력을 지닐 수 없습니다.)

 

-> 일종의 오캄의 면도날(Razor of Okam) 논리에 따라서 굳이 첨가하지 않아도 되는 개념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죠.

-> 새로 전학온 친구 A(종교)가 반에서 인기 많은 친구 B(과학)에게 함께 잘 지내자고 손을 내밀지만, B에겐 A가 굳이 필요 없는 형국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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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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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에 쓴 글입니다. 요즘 다시 읽으면 전혀 다른 결의 글이 나올지는 의문이다. 먹고 살기 빡빡해서 이런 류의 사유를 하기도 어려운 시기인 것 같다. 그래도 의미있는 탐구 활동 아니겠는가?)

 

 

[종교전쟁] 책을 읽었습니다.

 

과학철학자 , 신학자 , 종교학자가 함께 이야기를 나눈 것들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기에 ,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자가 서 있는 위치가 다르지만 , 서로가 지닌 공통점들이 분명 있었기에 극렬한 대립 없이 , 생각보다 잔잔하게 대담이 이뤄진 책입니다. 

 

또한 이 책은 [종교전쟁] 이라기 보다는 [기독교 전쟁] 이라고 보는 게 더 나을 정도로 , 개신교에 거의 국한된 논쟁을 펼치기 때문에(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지만) , 타 종교에 대한 다양한 논의까지 포괄하는 풍성한 대화를 기대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하지만 , 전체적으로 배울 점이 많고(특히 종교학 관련된 지식은 접할 기회가 흔치 않은데 , 여러 모로 유용한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 책 자체도 양질로 구성되어 있어서 , 한번쯤 읽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여기서 다루는 가벼운 느낀점 들은 , 개인적인 의견들이고 , 다양한 방식으로 추가,수정,보완, 논박 될 수 있을 것 같구요.

 

주로 이 책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나 , 같이 토론할 만한 부분들을 글로 적은 것이기 때문에 , 이러한 부분들 이외에 언급되지 않은 부분들은 기분 좋게 학습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것저것 느낀점들]

 

[기적]

 

[기도의 능력] 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 장대익 교수가 마치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 에서 의문을 제기했던 것 처럼 , 기도의 인과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이 말은 , 즉 종교인이 기도를 하면 그 기도가 어떠한 결과를 야기시키느냐 하는 것.. 즉 기도에 능력이 있는 거냐고 질문을 합니다. 한마디로 , 기도에 응답하는 신이 정말 있어서 그 기도에 반응하고 , 결과를 가져 오느냐는 것에 질문을 던진 것인데

 

하지만 , 그에 대한 답변을 김윤성 교수가 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그는 ,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기도의 능력] 에 대한 답변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 줄 위치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신재식 교수의 입장이 궁금했지만 , 그에 대한 언급은 이 책에 없습니다.)

(기독교를 신랄하게 해부하고 비판하는 내용이 많으니, 기독교 이성 논증에 능한 인물이 한명 출전해 주면 좋았을 것 같은데 뭔가 패널의 포지션이 아쉬운 책입니다.)

 

그리고 , 김윤성 교수는 꼭 기도에 인과성이 없더라도 , 기도라는 행위 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다소 유한 말로 , 장대익 교수의 주장을 일견 흐려 놓습니다.

 

이러한 김윤성 교수의 의견은 장대익 교수에게 시원한 만족감을 줄 수 없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 장대익 교수의 입장에서는 , 그런 겉보기에 번지르르한 의미라느니 , 가치 등만 남겨진 종교 , 종교 행위 는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향은 , 도킨스의 열정을 굉장히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러한 입장에 동의합니다.]

 

개인적인 제 의견은 , 기독교가 기도의 인과성을 부인하는 순간 , 기독교의 기도는 공허한 주문 그 이상이 될 수 없으므로 , 폐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부분이 종교가 세계관으로서 힘을 가질 수 있는 건 그 세계관 속에 사실 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죽었고 , 실제로 부활했음을 믿는 게 기독교인데 , 이러한 부분들에 물을 타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 등에 대해서 , 분명하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종교는 삶의 의미와 가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왜 어떤 일들이 일어나지를 해명하려는 사실 체계 여야 하는데 , 이러한 부분들을 자연 과학 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건 당연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황당해 보이는 기적 사건들)

 

김윤성 교수는 이러한 이유로 기도와 기적을 믿지 못하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C.S LEWIS  [기적] 이라는 책이 기적 에 대한 개념을 세우는데 , 일견 도움이 될텐데 , 그 분이 읽어 보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C.S 루이스의 [기적]이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그의 제자에게 논박당했다는 설도 있는데, 관련 내용은 [C.S 루이스의 위험한 생각]이라는 책을 참고하면 도움이 됩니다. 결국 루이스가 이야기한 [기적]에 대한 변증은 살을 더 붙여주면, 논박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또한 전반적으로 장대익 교수는 자연 과학 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 도킨스가 확고하게 다져 놓은 (meme) 이라는 개념을 열광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에 , 신학의 용어로 또는 종교 의 언어로 대담을 나누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상태에 도달한 듯 보입니다.

 

물론 , 장대익 교수님에게도 나름 개신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던 과거가 있고 , 이 쪽 방면으로도 공부를 꽤 했었기 때문에 그가 종교의 언어 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건 확실히 무리가 있지만 , 모든 상황을 과학 으로 설명해 내는 소위 과학 환원주의 가 그의 주장 전반에 두루 펼쳐져 있기 때문에 , 사실 신학을 담당하는 신재식 교수 등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 그 모든 것들을 과학의 언어 로 환언하여 설명해 내고야 말 것입니다.

 

(분명 , 아직 과학 이 설명해 내지 못하는 많은 부분들이 있다지만, 그러한 뇌과학 , 유전학 , 인지 심리학 등의 분야도 조만간 강력한 과학의 힘 으로 온전하게 밝혀 낼 수 있으리라고 보는 , 낙관주의 도 분명히 가지고 있구요..)

 

이러한 장대익 교수의 극단을 달리는 입장 에 대해 신재식 교수는 그러한 진화론적 패러다임 만을 고수하면서 , 모든 현상을 진화되는 과정 으로 설명해 내려는 장 교수의 입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극 보수가 위험하듯이 , 과학 환원주의의 극단도 분명 그 편협함과, 소통 부재는 동일하기에)

 

 

 

개인적으로 장대익 교수가 서 있는 노선은 리처드 도킨스 , 다니엘 데넷 , 에드워드 윌슨이라는 하드코어 무신론적 진화론자 트로이카와 같다라고 보고 있는데 , 이러한 장 교수는 종교가 그 동안 붙들고 있었던 의미와 가치 영역도 이젠 과학에게 넘겨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선 , 저와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는 장 교수를 발견하는데요. 

 

전 오히려 과학이 붙들고 있었던 사실,이성,객관성 의 영역을 종교 가 받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데 , 오히려 반대측에서는 그나마 종교에게서 사실 의 영역을 가져가고 , 남겨진 의미와 가치 영역마저 내어 놓으라고 하니 , 정말 강경한 무신론적 진화론자이긴 한 것 같습니다.

 

(이 영역을 과학 으로 어떻게 설명해 낼지는 참 궁금하고 , 또한 그러한 작업을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는 건데 , 이 영역마저 과학이 가져가면 , 그의 말마따나 종교는 필요 없겠죠.)

 

-> 사실 과학과 종교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자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NOMA 개념(non-overlapping magisteria)은 유명한데, 이게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그 뒤로도 김윤성 교수는 장대익 교수의 주장에 대해 , 종교를 신념이나 세계관과의 연관성으로만 보지 말고 , 종교 고유의 아름다운 몸짓에 주목하라. 종교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동체 문화이고 , 제도이기도 하며 , 다차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 신념 , 세계관 부분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종교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 이에 대해 장대익 교수는 역시나 자신과 다른 영역을 바라보는 김윤성 교수의 답변에 대해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 계속 채근하는 말들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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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론].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사를 가리켜 플라톤의 각주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 만큼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의 영향권 아래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요즘은 인문학, 철학을 쉽게 풀어주는 2차 서적들이 많이 나온 상태다. 인문학 붐이 일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철학의 역사에 대한 이해도가 이전 세대들보다 한층 높아진 것 같긴 하다. 물론, 당장 삶에 유익을 안겨 주는 제테크 서적, 자기 개발 서적 등에 비해 구독률이 떨어지긴 하겠지만 말이다.)

 

 

특히 이 [국가론] 은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을 필자가 읽은지는 13~15년 정도 된 걸로 기억한다.)

(나름 책도 깔끔하고 번역도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형이상학 , 정치학 , 윤리학 , 심리학 , 교육학 , 예술학에 이르는 엄청난 영역을 찌르고 다니는 이 책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책 이 아닌가 싶다.

 

아주 아주 오래된 책인데 , 현실 세계 속에 굉장히 쉽게 적용 가능하다는 점에서 , 정말 플라톤은 엄청난 인물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특히 소크라테스 등의 방식을 계승하여 , 대화체로 서술된 이 책은 읽는 맛이 여타 철학 서적들보다 더 큰 편이다.)

 

일단 [국가론] 속에서는 이상 국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민주 정치에 대해 상당한 반감이 있는 플라톤으로서는 약간은 공산주의적 사유 방식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배 계급 등이 사유 재산을 가지면 안 되며 , 친구들과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자식들과 , 아내까지 말이다. 이 책에서 여성들은 거의 성 노리개 수준이다. 지금 현대 사회가 특정 부분에서는 더 무너졌겠지만, 과거사에 비해 진보한 부분도 상당히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당시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맥락을 고려하면서 읽을 필요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전쟁을 잘 치르고, 정치를 잘 하면 자신의 아내를 상품처럼 건네 준다고 하니, 영 기분이 나쁘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면 , 욕망의 출구가 막히기에 부패의 가능성이 제로가 된다나?

(이게 합리적인 사고가 맞나?) 

 

 

일단 근본적으로 이러한 유토피아가 건설될 수 있을까?를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잘 배운 철학자들이 사람들을 인도하면서 , 모든 쓸 것을 공유하고 서로가 서로를 동포로 여기고 , 마치 태초의 에덴 동산처럼 방긋 웃으며 살아가는 세상이 얼핏 보면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 결론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이론 이 아닐까? (그 유명한 플라톤의 '철인 정치'다.)

 

 

 

최선의 길을 찾기 위해 사유를 하다 보니 , 굉장히 딱딱하게 굳어지고 , 유연성이 결여된 국가가 하나 머릿 속에 떠올랐고 , 그것을 그저 글과 말로 표현해 본 것이리라.

 

자신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 '꿈을 꾸는 건' 모두의 자유 아니던가?

 

이렇게나마 그 세상을 그려 보는 건 , 천재적인 학자의 나름의 삶의 표현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철학을 토대로 하여, 현대사회에까지 철학의 계보가 이어져 내려왔다는 점에서 이 저서는 오래된 고전으로서의 의의가 크다고 본다. 그 내용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칙칙한 구석이 많지만 말이다. 사실 현대사회에 들어와서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해체주의니, 구조주의 철학이니 하면서 언어 자체가 해체되어 버리고 있다 보니, 과연 철학이 제대로 진보를 한건지도 모르겠다. 점점 궤변이 되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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