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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정의의 문제.....고민이 많이 됩니다.. 영화 [밀양]도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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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저서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에서 "인간사의 영역에서 용서의 역할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나사렛 예수였다"고 밝혔다. 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예수가] 이것을 종교적 맥락에서 발견했고 종교적 언어로 표현했다는 사실은, 이것을 엄격한 세속적 의미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용서는 "행동에서 생겨나는 불가피한 피해에 꼭 필요한 교정책"이다. 그것은 "비가역성(irreversibility), 즉 자신이 한 일을 무효로 만들 수 없는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이에 반해 예측 불능에 대한 교정책은 "약속을 하고 지키는 능력에 있다. [용서하고 약속하는] 두 능력은 서로 짝을 이룬다.

 

그중 하나인 용서는 과거의 행동을 원상태로 돌리는 역할을 한다. 과거의 '여러 죄'는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모든 새로운 세대 위에 매달려 있다.

 

다른 하나인 약속으로 자신을 붙들어 매는 일은 미래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불확실성의 바다에서 확실성의 섬들을 세우는 역할을 한다.

 

확실성의 섬 없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종류를 막론하고 그 어떤 영속성은 물론 연속성조차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가 인간사에서 용서의 역할을 발견한 사람이라는 아렌트의 말이 옳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의 '발견'에 대한 그의 설명은 그리 정확해 보이지 않는다. 예수가 인간사에서 용서의 역할을 발견한 사람이라는 아렌트의 주장에는 고대의 이교도 윤리저술가들이 용서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전제가 있다.

 

다음 장에서 나는 그의 주장을 옹호할 것이고 고대 이교도 저자들이 용서를 찬미하거나 촉구하지 않은 것이 그저 우발적 행위였는지 따져 볼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의 주장은 히브리성서의 저자들도 이 문제에서 고대 이교의 윤리저술가들과 다르지 않았다고 전제하고 있다.

 

히브리성서 저자들은 엇나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죄인 용서에서 드러난다고 거듭 선언한다. 앞서 우리가 여러 장에 걸쳐 살펴본 것처럼, 현대 아가페주의자들은 이 선언에 근거해, 하나님의 용서가 하나님 사랑의 여러 발현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일반의 전형이자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의 본보기가 된다고 추론했다.

 

하지만 히브리성서 저자들이 인간의 용서를 말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내가 아는 한) 누군가에게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명하지도 않는다. 예수가 나타나 사람들이 서로를 용서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신 것은 정말 새로운 주장이었다. 누가는 예수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한다.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 주어라.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하오'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누가복음 17:3~4). 이 명령을 놓고 서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며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상상된다.

 

 

정말 일곱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 마태의 기록을 보면, 거듭해서 잘못을 저질러도 회개하면 용서해 주라는 말씀의 진의를 확인하고자 베드로가 예수에게 이렇게 묻는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예수는 과장된 대답을 하신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마태복음 18:21~22).

 

그러고 나서 예수는 비유를 하나 들려주신다. 어떤 종이 엄청난 빚을 주인에게 탕감받았는데 자기가 남에게 빌려준 소액의 빚은 탕감해 주지 않았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주인은 종을 엄중한 벌로 다스렸다. 예수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비유의 요지를 설명하신다.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이 용서의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새로운 사건이었다는 아렌트의 주장은 옳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처럼 "끈끈하게 맺어진 작은 제자 공동체에서의 여러 경험"에 힘입어 예수가 그런 "발견"을 하게 되셨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예수를 그런 "발견"으로 이끈 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서로에 대한 우리의 용서가 이어져 있다는 그분의 확신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듯 하나님도 우리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사랑과 정의]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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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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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논리정연하고 동의되는 내용이 많아서 함께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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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읽으면 진보가 된다?

 

조금 놀랐다. 성경 사랑하고 많이 읽기로 알려진 한국교회 성도들이 실제로는 그다지 읽지 않는단다. 일주일에 성경 한 번 보지 않은 이들이 무려 68%이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매일 또는 한 주에 서너 번은 읽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열에 한둘일 게다.... 이래서는 ‘그 책의 사람들’이라는 호칭이 무안하고, 한국교회가 선교사가 아니라 성경번역과 읽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전통이 차마 무색하다.

 

 

한국교회는 정말 보수적이다. 정치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특히 그러하다. 성경의 권위를 열렬히 옹호한다. 어찌하든지 간에 성경을 읽도록 장려한다. 유교의 독서문화와 한국사회의 공부 열풍과 맞물려 개신교회의 성경 읽기 열심은 유별나다. 일주일에 QT를 몇 번 했는지, 성경을 일 년에 몇 번 읽었는가로 신앙의 수준과 정도를 가늠할 정도다.

그래서 더 놀랍다. 성경을 읽으면 더 진보적이 된단다. 미국의 라이프웨이 리서치와 베일러 종교조사연구에 따르면, 성경을 자주 읽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정치적으로 진보적 성향이 더 나타난다. 예컨대, 테러리즘과 싸우는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고,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고, 과학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사회 경제적 정의를 더 추구하며, 검소한 생활을 위해 소비를 줄이자는 것에 보수적 성향의 신자에 비해 훨씬 높게 나타난다.

 

놀랄 일이 아니다. 성경이 진보적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와 계시록을 간단히 훑어보아도 알 수 있다. 모세오경은 애굽과 바벨론의 제국에 저항하는 불온한 문서이다. 제국은 말한다. 왕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모든 사람, 심지어 노예라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는 제국 이데올로기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왕의 통치 권한과 근거가 오로지 그만이 신의 형상이기 때문에 신을 대리하여 다스린다. 그걸 모두에게 나누어주었으니 반체제적일 수밖에.

 

계시록은 또 어떤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한다는 것 자체가 제국의 질서에 대한 불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는 눈물이 없고, 애통하고 애곡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 그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한다는 것, 그것은 지금의 제국이 천국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이들의 프로파간다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기고만장한 로마제국도 알고 보면 별 것 아니라고 피식 웃어버리는 성경은 진보적이다 못해 급진적이다.

 

그러니 이런 성경을 자꾸 읽으면 기득권에 안주하기 보다는 새로운 세상,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된다. 하여, 나는 안 변할 거다, 내가 움켜잡은 것은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기성 질서는 몸에 맞지 않다. 테러에 대해서도 당연히 반대하지만, 테러를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야 더 거부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제국의 논리고 생리이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쟁취하려고 애쓴다. 성경의 사람들은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고, 나누고 베풀고자 노력한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는 위의 조사 결과를 보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성경을 자주 읽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해 안 읽는 반면, 실제 성경을 자주 읽는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가치관과 생각이 성경대로 변화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성경을 읽으면 자연스레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한다. 그 결과 생각과 행동이 성경처럼 바뀌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성경대로 사는 거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진보적이 된다는 말보다는 성경대로 산다고 말해야 옳다. 그게 그거다. 성경은 도덕적 사안들, 예컨대, 폭력과 전쟁, 가난과 부, 과학에 대해 진보적 색채를 띠게끔 만든다. 하여, 성경 읽으면 진보적이 된다는 말은 맞다.

 

성경만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이 진보적이다.

 

안식년과 희년을 제정하신 하나님은 보수적일 수 없다. 남의 것을 제 것인 양 빼앗기를 일삼고, 버젓이 정당화하는 세상을 희년은 정죄한다. 안식년의 하나님은 죽어라 일하다가 죽어버리는 우리를 바보라고 놀린다. 만나로 먹이시는 하나님은 더 많이 벌려고 아등바등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질서와 가치를 뒤집는다. 역전의 하나님이다. 마리아는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고 비천한 자를 높이는 하나님을 노래한다.(눅 1:51) 그분은 모두 빼앗겨 주린 자를 배불리 먹이고, 떵떵거리며 살면서 가난한 자들을 거들떠보지 않던 부자를 기어이 빈손으로 만든다. 위험천만한 정치적 찬송가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의 권력이 헛되다고 하나님은 선언하신다. 세상의 가치를 전도한다. 세상의 질서를 전복한다. 성경을 읽으면 진보가 아니라 혁명적이 된다.

 

칼 바르트는 묻는다. 성경 안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성경 안에는 낯설고(strange) 새로운(new) 세상이 있다고 대답한다. 그 세계는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다. 바르트의 멋진 말을 날 것 그대로 보면 좋겠다. “성경의 내용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인간적 사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올바른 사상이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를 일러준다.”

 

그 속의 언어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다. 내 생각을 확인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듣는 자리다. 내 생각에 하나님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나를 밀어 넣는다. 그러니까 네 생각과 언어를 닥치고,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을 듣고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삶을 뜯어고치는 하나님은 죽어라 안 변하는 보수적인 우리를 당신 자신이 죽어서까지 우리를 개혁한다. 참, 하나님은 너무 진보적이다.

 

하나님과 성경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은 사람들이 진보적임에 틀림없다. 80년대 대학을 다닌 탓에 나름 열심히 데모하느라 바빴다. 총학생회도 기웃거리고, 동아리 연합회에서도 한 자리 차지하고, 학습도 얼추 해보았다. 나름 관찰한 바에 의하면, 운동권의 절반 가까이가 기독교인인 듯싶다. 내 추측이고, 정확한 통계가 아니라 빈 구석이 많다. 그래도 기독교인 비율이 상당한 것은 분명하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기나 멀어지기는 했어도 어려서부터, 자라면서 교회를 다닌 이들이 수두룩하다.

 

아무리 보수적인 교회이고, 사회 참여에 대해 꽉 막힌 목사이고, 성공과 성장에 목을 매고, 가난한 자보다는 불신자에 더 관심이 많다손 치더라도, 그 설교에는 결국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담겨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번영신학을 떠들어도 성경이 본디 그러하니 정의와 사랑을 말하게 된다. 그걸 듣고 자라면서 본 현실은 강도 만난 자로 득시글거리니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거다. 성경 속의 약자와 빈자, 소수자의 울부짖음을 이미 들었는데, 그들에게 어찌해야 하는지 들었는데 어찌 외면할 수 있으리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성경과 진보의 상관관계는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도리어 성경을 떠받드는 이들이 갈수록 보수화가 되는 것이 이상할 뿐이다.

 

그건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이지 싶다. 하나는 그렇게 성경, 성경 하면서도 실제로는 성경을 거의 안 읽거나, 다른 하나는 읽기는 읽되 하나님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내가 하나님에게 쉴 새 없이 말하거나 일 것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빼앗아야 한다고. 소위 바이블벨트의 기독교인들이 성경 읽으면서 전쟁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개탄하며 한 말이다.

 

나는 예전부터 이 부분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의 논지는 우리가 성경을 따라 살 의사나 의지가 없는 성경 읽기는 자기만족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본다. 간단하다. 성경의 변혁적 능력을 믿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읽어도, 나는 절대로 안 변할 거야, 라고 다짐하고 읽어도, 성경은 여지없이 우리를 무너뜨리고 굴복시킨다. 그러니까 성경이다. 그러니 그냥 읽으라.

 

또 하나 보탤 것은 읽는다는 행위와 진보와의 관계이다. 본래 책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개방적일 수밖에 없다. 조사가 말한 진보라는 것도 기실 타인의 고통과 타인의 소리를 듣고 공감하고 반응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반 독서도 그러하거니와 성경 읽기는 듣기를 무척 강조한다. 로마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믿음은 말씀에서 비롯된다. 말씀을 읽는 것에서 믿음이 생긴다.

 

믿음은 말씀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 받은 이스라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고통 받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의 소리를 듣는다. 그분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하여,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개방적이 되고, 사회적으로 진보적 어젠다에 찬성하는 비율과 비중이 높아진다.

 

 

의외로 성경을 안 읽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규칙적으로 성경을 묵상한다면, 아마도 교회 내 문제의 대부분이 없어질 것이다. 적어도 절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난데없는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닌가 보다. 갈수록 보수화되는 교회는 갈수록 성경을 안 읽어서 그렇구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 진보가 아니라도 좋고, 딱히 진보적이 될 필요도 없다. 성경을 읽자. 그럼 놀라운 일이 생길 것이다. 내가 생각지 못한 새롭고 낯선 일들 말이다. 놀랄 준비하고 성경을 읽자. 성경을 읽고 놀라게 하자.

 

몇 년 전에 올린 글을 페북이 알려줘서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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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가 정확하지 않으나 다른 사이트에서 퍼온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이 유학생으로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은데 그 속에서 답을 찾아 나갈 때 참고할 만한 좋은 글인 것 같아서 공유합니다. 원 글의 출처를 아시는 분은 제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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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미국 유학생 1위 국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이 8만 명을 넘고, 동반한 가족만도 3만 명이 넘는답니다. 올해만 해도 5만 건의 유학 비자가 발급되었다니까 앞으로도 계속해서 미국에서 한국 유학생을 아주 많이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유학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학을 하는 것은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아는 사람들을 떠나서, 의지할 곳도 없고, 시스템도 다르고, 재정적 어려움이 있고,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외국에서, 또한 어설픈 영어로 공부하는 것 자체가 광야입니다. 더구나 가족까지 함께 유학을 한다면 광야는 더욱 깊어집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광야를 더 거칠고 황량하게 만드시지 않아도 외국에서 공부하며 산다는 것이 이미 충분히 힘들고 어렵습니다.


 

경험이 잘 통하지 않고, 알고 있는 지식은 한계가 있고, 문제 해결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제한된 곳에서 답답함과 한계를 뼈 속 깊숙이 느낍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이렇게까지 바보 같지 않았는데,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실수한 적이 없는데….’라는 한탄을 쏟아냅니다. 나이가 들면서 정말 멍청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생존을 위해, 한국에서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을 하면서 왜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유학을 왜 나왔을까 하는 후회를 합니다. 도대체 유학을 마치면 갈 곳이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유학을 하면서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가족이 없는 청년들은 외로움 때문에 몸부림을 칩니다. 그래서 유학생들 가운데 포르노에 중독된 형제들을 아주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또한 남녀 학생들이 동거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커플들이 며칠씩 함께 여행을 떠납니다. 아무도 말하는 사람도 없고,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외로움이 유학하는 청년들의 가치관과 관계를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그렇다고 가족이 있기 때문에 유학이 더 쉬워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생은 시간이 지나고 가족이 늘어갈수록 복잡해집니다. 가족의 생존에 대한 걱정과 적응의 어려움은 유학생 가장이 짊어진 큰 짐입니다. 나이 들어 공부하는 것도 힘든데, 아내와 아이들이 아빠의 시간과 관심을 요구할 때 난감해집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학생의 아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남편보다 훨씬 심합니다. 아내가 영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경우 함부로 밖으로 다닐 수도 없습니다. 언어와 환경에 대한 무능함과 무력함의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집에 갇혀 아무의 도움도 없이 애만 키우는 유학생 아내들은 감기처럼 쉽게 우울증에 걸립니다.


 

 


 

이런 한계와 상황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몸부림을 칩니다. 이것을 극복해 보고자 더욱 열심을 내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밤을 새워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현실을 도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땅 넓은 미국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답답함을 잊고자 합니다. 친구들을 찾아 이 모임 저 모임을 기웃거려봅니다. 하지만 현실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산과 같은 한계의 벽 앞에 울게 됩니다. 실제로 소리 내어 울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영혼 깊숙이 가득한 눈물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외로움과 생존의 눈물이 가득한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불안, 불만족, 분노, 긴장, 두려움이 시도 때도 없이 눈물로 가득한 영혼을 요동케 하며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적응력이 참 뛰어납니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점점 유학 생활에 적응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외로움 때문에 소리 내어 울지 않습니다. 누군가 한국에서 도와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접습니다. 독해지자고 마음을 먹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사귑니다. 한국을 잊어버리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미국에서 평생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찾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적응의 양상은 비슷합니다. 신학생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광야는 인간의 본질, 한계, 그리고 적나라한 인간의 무능함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물론, 광야에서 본질과 한계가 드러났다고 해서 성장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어려움을 많이 겪은 사람이 항상 더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 자체가 영적 성장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광야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반응했는가가 한 사람의 성장과 미래를 좌우합니다. 그렇다면 유학이라는 광야에서 본능과 한계대로 살아가지 않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로 자신의 한계에서 시작된 탄식과 눈물을 하나님 앞에서 쏟아내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유학생이 흘리는 눈물이 외로움과 생존과 한계 때문이더라도 그 눈물을 하나님 앞에서 쏟아내는 것을 기필코 배워야 합니다. 전화를 붙들고 엄마와 친구들에게 아무리 마음을 쏟아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외로움은 영적입니다. 한계는 우리의 본질 안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생존은 현실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외로움을 채워줄 수 없고, 한계를 넘어서게 해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이 무엇인가 잘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로움과 한계와 생존이 가져다주는 강력한 눌림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보통 사람보다 더 울 일이 많은 유학생은 이 기회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영혼에 가득한 우리의 눈물을 쏟아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하나님 앞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던 것처럼 이것을 머리가 아닌 온 몸과 영혼으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통곡을 배운 사람만이 외로움과 한계와 생존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만이 우리보다 더 많은 슬픔과 눈물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강과 바다처럼 많은 눈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눈물이 하나님 앞에서 다 쏟아져 마르게 되면, 그제야 하나님의 눈물이 우리 안에 채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땅을 보시며 아파하시고, 쏟으시는 그 눈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게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를 어루만지시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시는 그분의 눈물을 알게 됩니다. 유학을 하며 흘려야 할 눈물은 바로 이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하나님의 눈물을 배우지 못한 유학생은 유학을 성공적으로 마쳤더라도 여전히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살아갑니다. 한계를 가리기 위해 위선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생존을 위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학을 하면서 이 땅을 위해 그리고 인생들을 위해 하나님이 흘리시는 눈물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유학을 허락하신 거룩한 소명을 붙드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아무런 생각 없이 유학을 온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유학을 떠난다는 것 자체가 많은 희생과 용기와 도전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단 유학을 온 다음에는 생존에 지쳐, 적응하느라 피곤해서, 삶의 계속되는 요구들을 처리하느라 점점 왜 유학을 하는지 잊어버리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선택된 특권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회와 시간을 특별히 허락하신 것입니다. 유학을 허락하셨다면 그곳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반드시 있습니다.


 

명확한 소명은 우리의 모든 선택에 영향을 미칩니다. 명확한 소명은 밤을 새워 드라마를 보지 않을 수 있는 선택, 외로움을 위해 이성을 선택하지 않는 선택, 사소한 이익 때문에 인테그러티(integrity)를 버리지 않는 선택, 현재적 생존이 아닌 미래적 비전을 위한 선택을 명확하게 할 수 있게 만듭니다. 거룩한 소명이 이끄는 삶을 살 때만이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여기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거룩한 목적에 합당한 것만을 집중하여 선택할 수 있습니다.


 

소명은 현재의 모든 상황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만듭니다. 소명이 확실한 사람은 어려움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쉽고, 편리를 보장하고, 이익을 보장되는 상황이 아니어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무명의 시기를 살며,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나 환경이 삶의 주관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명이 있는 자는 그의 생존의 문제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소명을 주신 자의 삶을 인도하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소명은 우리의 미래를 확고하게 보장합니다. 소명이 우리의 살 곳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녀의 교육 때문에, 삶의 질 때문에, 봉급 때문에 자신이 살 곳을 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이 한국에 있다면 유학을 마친 후에 반드시 한국에 돌아가야 하고,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소명이 아프리카에 있다면 그곳에 가야만 하고 가게 될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길을 만드실 것입니다. 소명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소명이 우리가 가야할 곳을 정합니다. 소명이 확실한 사람은 유학을 한 뒤에 자리가 있을까, 어디에서 살게 될까, 무엇을 하게 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소명을 주셨다면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생명을 다해 붙든다면, 유학을 마쳤을 때 하나님이 그가 가야만 하는 곳으로 그 사람을 반드시 보내실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이 유학을 오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좀 더 풍성한 섬김을 베풀 수 있는 사람들로 잘 준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이 외로움의 눈물, 생존을 위한 눈물을 하나님 앞에서 흘려버리고 하나님의 눈물을 배우게 되길 소망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을 회복해서 유학을 마친 뒤에는 그들이 있어야만 하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성취하는 사람들로 섬길 수 있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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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교회 전통을 제대로 보는 데는 시간 거리가 필요합니다. '시간 거리(Zeitabstand)' 는 철학자 가다머(Hans-Georg Gadamer)에 따르면 무엇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더 잘 알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예수의 가르침과 능력을 보고서는 어디서 왔는가 물음을 던졌지만 곧장 누구의 형제, 누구의 오빠가 아닌가 하면서 자기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가다머-

 

 

예수가 누군지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에야 사람들이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200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예수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담은 현실, 교회 현실은 정말 상상력으로 거리 두기를 하지 않으면 제대로 보기 힘들 거예요.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비판적 관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지식인에게 소명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동시대와 시대적 거리 두기가 아닌가 해요. 그렇지 않고서는 볼 수 없어요.

동시대와의 거리 두기가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얘기해 보지요.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근대를 다시 보게 되었어요.

그 이전에는 극히 소수만이 근대의 문제를 깨달았어요.

데카르트나 칸트를 보면 근대를 형성한 사람이면서도 근대의 문제를 동시에 본 철학자들이 아닌가 해요.

독특한 경우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큰 철학자라고 할 수 있지요. 근대를 형성하면서 그 한계를 벗어날 다른 면을 드러내지요. 그렇게 본다는 것이 쉽지 않아요.

​양희송: 현실의 교회 구조에서 일차적으로 거리두기는 누구의 역할일까요?

강영안: 신학자들이지요. 목회자는 현장에 워낙 깊숙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동시대와 거리 두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요. 떨어져 있으면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못하는 거지요. 목회자들의 마음을 다해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면 상상력의 눈이 열리고 현실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는 눈이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와 달리 신학자는 교회의 구체적 상황에서 한 걸음 물러선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신학자들이 전체를 더 잘 볼 수 있어요. 그러나 현실 교회에서 받는 이익에 너무 익숙해져 버리면 그런 눈을 잃어 버려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게 현실이 아닌가 해요.

양희송: 우리 현실에서 그 과제가 만족스럽게 수행되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원인이랄까, 그 이유를 지적할 수 있을까요?

강영안: 글쎄요, 그것이 뭘까요? 신학자의 경우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신학자들이 대부분 교단 신학자라는 점이에요. 교단의 목사를 양성하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쏟고 있고 그로 인해 금전적인 이득이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교회 정치로 부터 희생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한 발을 빼고 볼 여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요.

두 번째는 신학자라는 본질적인 위치와 관계가 있습니다.

 

칸트가 지적하는 점인데 신학자들은 철학자들, 인문학자들과 달리 한 '기관'에 관련된 사람들이거든요. 그 기관이 교회인데, 일반 교인들과 교인들을 가르치는 목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요.

 

칸트는 지적했지요. 대중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고 목회자들은 가능한 한 그런 이익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일하기에 자신들이 원하는 수단이나 충고를 신학자들에게 기대한다고 말이죠. 신학자들의 연구나 발언도 교회 현실이나 사회문화적 현실과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관조하고 발언하기 보다는,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죠. 이것이 칸트의 진단이에요.

양희송: 신학자들은 매우 불행한 위치에 놓여 있군요? (웃음)

강영안: 신학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칸트가 지적한 또 다른 두 직업, 의대 교수와 법대 교수도 동일한 범주에 들어갑니다. 의과 대학 교수들은 의사들을 양성하는데, 의사들은 환자들과 연관되어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법대 교수들은 변호사나 판사를 키워 내고, 변호사나 판사는 고객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단 말이죠.

중세 대학의 세 중심 대학, 중심 학부(faculty)인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는 각각 영혼의 질병, 사회 질병, 신체적 질병, 이렇게 모두 질병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니 대중의 이익과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밖에 없어요.

칸트는 이제 그런 비판적 역할을 좁게는 철학자들이, 넓게는 인문학자들이 감당해야 한다고 봐요.

칸트가 말년에 저술한 <학부간의 논쟁> 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

 

 

양희송: 상당히 재미있는데요.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법학이나 의학은 여전히 전문가 집단으로서 사회의 공적 역할 수행자로 여겨지는데, 신학은 종교 분과 혹은 특정 종교의 성직자 양성기관으로 축소되면서 그만큼 공적 영역에서 사라지고 있잖아요.

강영안: 배제되었죠. 그건 계몽주의 문화의 소산이에요. 사실 계몽주의 이전까지만 해도, 아니, 계몽주의가 한참 유행할 때만 해도 유럽에서는 공적 역할을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했거든요.

 

​정치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높았고 먹혀 들어갔습니다.

​칸트가 활동한 18세기 말만 해도 프로이센 제국에서 경건주의파 출신 목사들의 목소리가 엄청 컸어요.

 

빌헬름 2세 치하에 종교 검열이 생기고 종교 문제에 심한 억압이 있었지요. 지금은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역할이 공적 영역에서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나 언론인의 의견이 더 중요해졌지요. 영적 문제, 정신적인 문제는 대부분 심리적인 문제로 환원되고 정신의학자나 정신분석가, 심리상담가가 신학자나 목회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지요. 서양의 상황에서 보면 이런 것들은 기독교의 세속화가 초래한 현상입니다.

양희송: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비판과 방향 제시 기능을 하려면, 교단 신학자들이 공공의 영역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할까요, 아니면 주로 종교적 영역에 관심사를 국한시키고, 기독 철학자나 기독 인문학자들이 공적 영역에 기독교 담론을 제공하는 구조로 힘을 기울여야 할까요?

강영안: 둘 다 가능하리라고 생각해요.

 

현실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기독 인문학자들과 기독 사회과학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 좀 더 확대한다면 기독 학자들이 교회와 사회와 문화 전반에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기독교 전통과 세속 문화 전통을 모두 고려한 뒤 나오는 온당한 목소리여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연세대나 이화여대 같은 대학 신학부가 있거든요.

그 경우 왜 교회에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가? 이 경우에는 교회와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이 또 문제입니다.

교단 신학의 경우, 교회와 너무 밀착해서 동시대와 거리 두기가 불가능하고, 교단 신학과 관계없는 일반 대학의 신학자들의 경우, 교회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설득력을 발휘할 공통의 바탕(common basis)를 잃어버리지 않았나 해요.

​.........

동시대와 거리를 두려면 교회에 문제가 있더라도 교회에 몸을 담아야 해요.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고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분명히 있으면서, 동시에 거리 두기를 해야 현실 교회를 제대로 볼 수 있고 말씀에 합당한 교회를 위해 몸부림 칠 수 있죠. 그렇지 않다면 빈들의 소리에 그치겠지요.

신학자나 기독 학자들은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고 믿어요.

 

삶 전반에 대한 신학적 검토나 철학적 논의를 시도한 예를 지난 세기에서 찾자면 두 전통이 있어요. 하나는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카이퍼 전통(Kyuper tradition)이에요. 아브라함 카이퍼와 네델란드 중심으로 한 이 전통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삶의 모든 분야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논했어요.

          -아브라함 카이퍼-

 

​카이퍼 이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를 중심으로 도이어베이르와 폴른호븐과 그 후예들이 이 작업을 했어요. 경제학 분야에서는 봅 하웃즈바르트, 기술 철학 분야에서는 반 리슨과 스후르만, 에술 분야에서는 한스 로크마크르 등을 들 수 있을 거예요.

다른 하나는 영국에서 등장한 '급진정통주의'(Radical Orthodoxy)를 들 수 있겠지요.

그레이엄 워드(Graham Ward)나 존 밀뱅크(John Milbank)등이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이들이 내건 기치는 주목할 만합니다.

카이퍼나 도이어베이르트 전통은 사실 철학을 중심으로 경제학, 미술, 기술철학 등 삶의 모든 문제를 기독교적으로 성찰하자는 것이고 신학이 토대가 아니에요.

오히려 철학이 토대에 있죠. 그런데 급진정통주의는 신학 자체가 모든 영역을 성찰해야 한다고 봐요. 그러니까 성경 연구나 기독교 전통 연구에 머물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영성 등 전통적으로 신학적 성찰에서 제외된 영역 전체를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이 점에서 카이퍼 저너통과 급진정통주의는  비슷한 데가 있어요.

...

- [묻고 답하다] 에서 -​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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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 서구적 개인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공동체 강조가 쉽게 정당화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적 근거도 쉽게 찾을 수 있고요. 그러나 그런 이야기에서 늘 간과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개체성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살아남아 있었다면, 서로 다른 것을 포용해 주는 태도인 '관용', 요즘 똘레랑스(Tolerance) 라고 부르는 그것이 교회의 주요한 특징으로 나타나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공동체 이야기를 하면 '다양성' 보다는 '동질성'만 잔뜩 강조하고, 포용력이나 인내심은 점점 잃어 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강영안: 재미난 지적입니다. 그것은 공동체성의 변질이라고 봐야겠지요. 성숙한 개인성이 전제되어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이지, 그것이 없으면 그냥 집단이지요.

​동질성을 강조할수록 집단성이 강화됩니다. 타자성이, 심지어는 이질성이 어우러져서 색깔을 낼 때라야 진정한 공동체가 가능합니다.  (집단성(collectivity)는 공동체(community)와 다르다는 논의가 있었음)

기독교 신앙으로 제한해서 이야기하자면, 에베소서에서 강조하듯, 한 하나님,한 성령, 한 주님을 고백하면서도 색깔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관심이나 직업이나 처한 상황은, 죄가 아닌 한 '선의 씨앗(seed of goodness)'이 될 수 있고, 선을 확장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면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수용해야 진정한 의미에서 공동체입니다.

다른 색깔이나 다른 모양을 배제해 버리고 완전히 동질화한다면 그것은 폭력이지요. 사실 그런 의미의 공동체는 생명을 자라고 번성하게 하기보다는 질식시키고 죽인다고 봐요.

공동체의 강조는 살림의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죽임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없지 않겠어요?

​양희송: 1970년대 이후 한국 개신교가 급속하게 규모를 키우던 때의 전형적인 전도 방법이나 집회 방식은 한 가지 모델을 빈도를 늘리거나 강도를 높이면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영리> 같은 전도 책자로 단순하고 정형화된 내용을 복음의 핵심으로 전도해 왔고, 대형 집회나 부흥회 등은 주로 사람들을 압도하는 스케일로 개최하고 정서적 일체감이 강하게 고양되도록 했지요. 그런 것이 반복적으로 오랜 기간 축적되어 오늘날 복음주의 내 대중 정서의 밑바탕을 이룰 뿐 아니라, 공동체 내부를 규율하는 방식과 바깥을 대하는 태도에 뿌리 내린 것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이런 진단이 틀리지 않다면 어떻게 기독교 신앙 안에서 개체성을 중요한 특질로 재발견하고 그것을 고양시킬까 하는 질문이 아주 크게 다가옵니다.

강영안: 시간 순서로 보면 개체성 확립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그 개체는 개체로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개체를 성장시켜 주는 요소이기도 하구요. 이렇게 본다면 개체성 강조에만 머물 게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행동하고 사고하는 데까지 성장하도록 도와야죠.

​그런데 개체성도 여러 색깔, 여러 모양이 있고 여러 위치에 있을 수 있지요. 그런 것이 어우러져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텐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신앙고백이죠.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공산주의자에게 '공산주의 선언(Communist Manifesto)' 이 있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신경(Creed)' 즉 신앙고백이 있어요. 모든 기독교 전통을 하나로 묶어 주는 공동의 신앙 고백으로 '사도신경'(Apostles' Creed)' , 아타나시우스 신경(Athanasian Creed)',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Nicene-Constantinople Creed)' 이 있습니다.

 

 

다 같은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기독교에는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가톨릭도 있고, 그리스 정교회도 있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도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칼뱅을 따르는 개혁파(Reformed) 교회가 있고, 루터교, 침례교, 감리교, 오순절 교회도 있지요. 서로 다르지만 이 모든 교회를 하나로 묶는 공통의 요소는 신앙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의 일치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서로 다르게 형성되고 성장했지만 하나의 교회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희송: 신앙고백의 중요성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더라는 것이 교회사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신앙고백은 같은 듯하나 구체적인 사안에서 입장이 달라지면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정치적 사안이나 문화적 취향에서 견해가 갈라지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를 믿는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로 비약하고 밥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서로 다른 예수를 믿는 것 아닌가?" 하고 반문하게 됩니다.

​강영안: 지역이나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전통이 형성된 것, 색깔이 다르거나,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거나, 오른쪽에 있거나, 왼쪽에 있거나 누구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가톨릭에 대해, 정교회에 대해 형제자매라 이야기해야 하지요. 그런데 현실을 돌아보면 우울한 일들을 많이 봅니다. 한 교회 안에서도 최근 몇 년 사이 여러 문제에 대해 입장의 양극화를 경험했잖아요.

이라크 파병을 할 것이냐, 노무현 정부를 어떻게 봐야 하느냐, 이명박 정부는 어떻게 봐야 할 거냐, 촛불 시위에 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 등, 아주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교회 안에서 심한 양극화를 보였습니다. 한 공동체라고 하면서 구체적 사안에서 의견 차이가 발생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통적으로는 교회에 의견 차이가 생기면 공의회(Council)를 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 등을 열어서 의견 차이를 조정하고 하나의 교회로 나아가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다릅니다. 사회적으로, 신앙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부딪힐 때 함께 심사숙고할 자리가 없습니다. 노회와 총회는 사실상 일반 성도와 무관한 회의가 되었거든요. 목사와 장로들 모임이고, 성도들이 관심 두고 묻는 물음은 안건으로 올라가지 않아요.

어떤 교회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교회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숙고하고 결정하지 않아요.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큰 난관이나 결함이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생각해요.

 

 

내가 '공교회성'(Catholicity)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보는 까닭이지요. 공교회성은 내가 속한 지역교회뿐만 아니라 이 교회와 저 교회가 다 주 안에서 하나의 교회라는 거죠.

 

나는 장로교 고신교단에 속하는데, 장로교 통합, 장로교 합동 등 국내의 여러 장로교단 간에 공동의 문제를 놓고 숙고할 수 있는 채널이 없습니다.

 

연합체가 없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공교회성의 관점을 가지고 연합체들이 활동을 하는 건 아니에요. 한국처럼 복잡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나라에서 성도들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 방향 제시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공교회적인 의견을 모으고 행동을 유도하는 절차가 없기 때문에 이라크 파병이라든지 촛불 시위 등을 접하면서 교회 안에서 젊은이들과 기성세대의 견해 차이가 생각보다 훨씬 커지지 않았나 해요.

양희송: 공교회성과 관련해서 제가 흥미롭게 생각한 것이, 공교회성은 내부적으로는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체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로 집약되고, 대외적으로는 '공적 책임'(Public Responsibility)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로 귀결된다고 보는데, 교구체제(Parish system)을 '공간으로 분할하는 경우'와 '사람으로 분할하는 경우'에서 공적 책임을 이해하는 방식이 꽤 차이 나는 것 같습니다.

 

공간에 따라 교구를 분할하고, 구심력이 강한 감독제(Episcopal)를 택하는 가톨릭, 성공회, 감리교 등은 목회활동 외에 교구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목회적 관심 범위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회중교회(Congregationalism) 전통인 침례교, 오순절 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가 가진 교회론은 '신자들의 공동체'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만을 목회의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이러다 보니 교단 난립 문제도 가세해서 한 건물에 교회가 서너 개 들어오는 경우도 생깁니다.

여기서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교회 바로 옆에 산다 해도 우리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아니면 목회 대상으로 삼으면 안되지요. 혹은 아무리 멀리 살아도 우리 교회에 출석하면 목회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회중교회적 전통에서는 '교회 안'과 '교회 바깥' 이라는 구분이 가톨릭과는 다른 의미에서 뿌리 깊게 존재합니다. 이들은 '교회 바깥'에 관심을 표명하는 방법은 언제나 '멤버십 확장', 즉 '선교' 아니면 '전도'로 정당화되어야 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것이 '구제' 또는 '사회봉사'도 종종 '선교'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적 관심, 정치 참여 등을 놓고 이것이 '선교냐, 아니냐' 라는 논란이 나옵니다.

'공교회성의 회복'이 모든 교단이나 교회에서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강영​안: 기본적으로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 무수한 분열을 통해, 엄밀한 의미의 공교회성을 상실했다고 봐야겠죠. 저는 여러 점에서 종교 개혁을 지지하고 그 전통 안에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열이 개신교의 최대 비극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한국 교회를 보세요. 각 교단 총회와 교단 연합기구인 한기총이나 NCC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기총이나 NCC에서 공교회성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해요.

칼뱅은 '보이는 교회' 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나눌 때 보편성을 갖는 교회는 비가시적 교회,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생각했거든요. 과거에서 미래에 걸쳐 있고, 전 세계에 확대되어 있는 모든 교회가 결국은 하나의 공교회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죠.

그런데 공교회성을 가톨릭에서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주교체제'로 의미를 부여하지만 사실 '공교회성'은 '우리가 한 분 주님을 모신다'는 것이 가장 기본입니다.

장로 교회든, 루터교회든, 순복음 교회든 '한 주님을 모시는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는 의식이 현재 한국 개신교회에 결여되어 있고 부족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묻고 답하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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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목회자는 신학교에서 일상적 삶과 관련된 지식을 얻고, 그런 방식으로 성도들을 훈련시킬 수 있도록 훈련받아야 해요.

적어도 총론적인 훈련은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드리기가 민망하지만 제가 아는 한 이런 훈련을 하는 신학교가 한국에 한 군데도 없어요. 전통적인 신학 분류 방식에 따른 교육이 아직도 신학교 교육을 지배하고 있어요.

기독교 신앙이 세상의 사상과 문화, 과학과 예술, 정치, 경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폭넓게 읽고 생각하고 공부할 수 있는 신학교가 없습니다.

신학 교수조차도 이야기를 나눠 보면 기독교 세계관으로 통합적 사고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신학 교수들은 전공을 벗어나 통합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면서 각 학문과 삶과 신앙을 연결시키는 사고를 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 아닌가 해요.

 

그렇기 때문에 신약을 가르쳐도, 구약을 가르쳐도, 교회사를 가르쳐도 단편적이고 일면적인 것만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교회사는 교리사 중심이거나 교회 사건사 중심에 그치거든요. 주로 교회 지도자 중심이고요. 그렇게 가르치니까 교회사에서 노동자의 역할이 뭐고, 의사의 역할이 뭐고, 간호사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런 직업이 언제 생겨났고, 왜 생겨났는지, 왜 화가들은 근대에 와서 일상적 삶의 세계를 그리게 되었는지 관심이 없지요. 왜 공회나, 교황이나, 사건이나, 지도자만 중심에 놓고 교회사를 가르쳐야 합니까?

사실 이 내용을 가지고 2007년 5월 <목회와 신학> 대담 때 풀러 신학교 총장인 리처드 마우(Richard Mouw)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평신도 사역을 위한 커리큘럼을 어떻게 운영하느냐 물었더니 풀러신학교에는 '평신도 사역 연구소' 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곳에서 연구한 것이 커리큘럼에 반영되는지도 물었어요. 실상 그렇지 않다고 하더군요.

전통적인 네 가지 분야, 즉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이 주류를 이룬다는 뜻이에요.

이런 분류는 현대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가 도입한 방식입니다.

겨우 200년의 역사를 가진 방식인데, 지금은 거기에 '기독교 윤리학', '기독교 상담학' 등을 좀 더 붙여서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이죠.

 

사실 이건 학문적인 분류방식이지,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 커리큘럼 분류로는 적당하지 않아요.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신학교는 대학에 있는 신학대학, 곧 Divinity School 또는 School of Theology 가 아니라, 그야말로 각 교파의 신학교 곧 세미나리(Seminary)인데, 단어 뜻을 보십시오. '세미나리'는 라틴어 세미나리움(Seminarium), 곧 '모판'에서 온 말이에요. 세멘(Semen)은 씨를 뜻하지요. 볍씨나 고추씨를 뿌려서 키워 내는 모판, 이것이 세미나리의 어원이에요.

신학교는 이렇게 보면 일종의 '양성소'예요.

목회자를 키워 내는 양성소. 그런데 이걸 '신학대학원'이라 부르니 무슨 대단한 학문을 하는 곳으로 착각하는 거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슐라이어마허 이후 근대 신학교육은 마치 학자를 키워 내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커리큘럼을 그렇게 짰지요. 신학 교육의 목적, 방법, 과정을 전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키만큼 성숙한 사람, 온전한 사람(엡4:13)으로 자라가고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섬기도록 훈련할 수 없습니다.

-[묻고 답하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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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지금 말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죠. 한기총이나 NCC가 한국 교회를 대변하는 기관으로 지목되고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은 1980년 이후 상황이지요. 교계연합기구의 등장 이전에는 각 교단이나, 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가 그 역할을 상징적으로 했지요.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이나, 고신이나 합동 측에서도 그런 분들이 계셨지요. 그분들이 돌아가신 뒤에는 한기총이나 NCC가 마치 한국 교회를 대변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어요.

이같이 한국 교회를 대변하는 것은 그야말로 목사들의 모임이지요. 장로들도 별로 관여하지 않고 더욱이 일반 성도들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양희송: 그리고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 연합기구들은 그 구조상 아래로부터 위임의 절차가 일관되게 연결되지 못하고 중간 중간 연결고리가 다 끊어져 있기 때문에 상징적 수준을 넘어서는 실질적 대표성을 말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강영안: 가톨릭의 경우에는 위에서 위임을 하지요. 교황에서 추기경으로, 추기경에서 대주교로, 대주교에서 주교로, 주교에서 각 본당 신부로 내려옵니다. 일종의 위임이고 명령이며 권면 방식으로 내려옵니다.

 

그러나 사실 개신교는 그런 구조 자체도 없잖아요. 위아래 소통할 수 있는 통로 자체가 없으니, 정부에서도 편의상 한기총이나 NCC를 통로로 삼아 업무를 진행하는 것이 쉬웠지요.

목사들도 나름의 통로로 교단의 목소리를 내봐야 들리지 않으니까 연합의 이름으로 교회의 의견을 발표하고 정치적 입장을 취해 온 것이 사실이지요.

얼마 전에 방송국에서 기독교에 비판적인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어요. 한기총을 중심으로 거세게 항의했더니, 방송국에서 그 프로그램 마지막에 한기총 대표의 의견을 이야기하도록 했다고 해요. 그런데 나오지 않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의견을 들었어요. 전혀 설득력 없는 이야기였다지요.

그런 상황을 보면서 "목사님들이 다 선수가 됐구나" 라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목사님들이 모두 선수가 되어 공도 차고, 운동장을 누빈다는 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적 목소리를 내는 주요 역할을 목사님들이 맡으려 해요.

마치 현장에서 뛰는 선수처럼, 대단한 착각입니다.

 

목사님들은 선수가 아니라 성도들을 키워 내고 양육하는 코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축구로 말하자면 벤치에 앉아서 코치 일을 보아야 해요. 선수로 뛰는 것은 성도들이에요. 경제나 정치나 문화 영역은 그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춘 성도들이 해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개혁주의 관점에서 목사들의 영역을 중심에 그렸죠.

그러니까 정치, 경제, 사회, 언론, 문화 영역 등 각 분야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 공동체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 성도 그룹이 해당 분야에 의견을 내고, 필요할 경우 법 개정을 요구하거나 시민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목사들은 성도들을 선수로 키워서 전문 분야로 내보내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교회의 개념이 너무 넓기는 한데, 그때 교회는 목사만 말하는 건 아니거든요.

- [묻고 답하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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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은 사회나 정치적 문제를 다룰 때 교회가 택할 가장 훌륭한 전략으로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한 경험주의적 접근법을 추천했다.

                  -윌리엄 템플-


특히 그는 교회가 "어느 특정 정책"에 대해서도 거만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의 경험은 앞으로 나아갈 특정 방식을 취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정책은 언제나 정치와 경제 세계의 실제적인 인과관계에 대해 전문적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 이 문제에 관해 그리스도인이 이기심의 유혹에 더 저항하지 않는 한, 그가 내린 판단의 신뢰도는 무신론자의 그것보다 나을 게 없다."


템플은 기독교의 원리나 진리 선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특정 상황을 경험하고 얻은 그 상황에 관한 지식은 공공 정책을 가장 잘 결정하는 데 긴요하다는 뜻이었다.


최근, 에버릿 쿠프는 사실은 제쳐 두고 결론부터 쏟아 내는 일이 1980년대 미국 공중위생국장으로 재직하던 기간 내내 자신을 괴롭혔다고 호소했다.


재직 초기에 쿠프는 임신 중절권을 반대한다는 확고한 개인적 견해를 밝혔다가 좌파에게 비판을 받았다.


이후에는 에이즈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인도적 처우를 주장했다가 우파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한 의견을 밝히면서 이 책이 말하는 끈질긴 우연성에 호소했다.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학문 탐구 정신의 결여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신학적 원리에 의지하면 사실은 그리 정확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진보주의자들이 무조건 반사적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무조건 반사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보수주의자들도 마찬가지임을 깨달았습니다."


-마크 놀 [그리스도와 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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