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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의 변화와 씨름하는 현장에서 수년간 봉사하면서 나는 이 책에서 다룰 일련의 해결책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판도라 문제는 인격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의 주변인들이 '내가 한 마디라도 하면 문제가 더 악화될 뿐이야'라는 생각을 버릴 때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다.

 

나머지는 다 두려움으로 침묵하는데 한 사람만 나설 때에는 당연히 문제는 악화된다. 따라서 그룹 차원에서 정체성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첫 번째 필수적인 인격 변화는 그룹 정체성(group identity)의 변화다.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려면 인격의 변화 방법을 아는 그룹이 필요하다.

 

중앙에 있는 사람을 바꿀 방법을 찾기 전에 주변 그룹을 바꿀 방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기억하라.

 

판도라 문제가 발생하고 계속 지속되는 이유는 주변 사람에게 아무런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주변인들의 선택 범위를 넓히고, 이들의 정체성을 강화할 방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40년 동안 나는 사람들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그 변화를 유지하는 법을 이해하고 연구해 왔다.

 

연구 끝에 나는 이단 종교, 학대, 마인드 컨트롤, 테러, 정권 차원에서 자행한 고문 행위를 본격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다.

 

범죄 현장 조사, 연쇄 살인마 프로파일링, 살해당한 어린이에 대한 연구도 진행했다.

 

 

참전 용사, 트라우마 생존자들, 전쟁 피난민, 유대인 인종 학살이나 아르메니안 인종 학살과 투치족 인종 학살의 생존자들, 남수단, 우간다, 나이지리아, 콜롬비아, 스리랑카, 동남아시아의 정치 종교적 대량 학살 생존자들을 돕는 법을 배웠다.

 

이들의 고통을 연구하면서 가해자가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바뀌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변화가 가장 분명하게 일어날 때는 약탈자가 보호자로 바뀌거나, 가해자가 친구가 될 때다.

 

우리가 성자라고 부르는 이들 중에는 자기애성 소시오패스였던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은 자기 의가 강하고 쾌락에 탐닉하며 완악한 사람들이었다. 성 바울과 성 프란시스, 성 어거스틴, 로욜라의 성 이그나시우스는 변화되기 전에 하나같이 남을 해치던 악인이었다.

 

-[2부]에 계속-

-[나르시시즘, 그 판도라 상자를 열다], 짐 와일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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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이 신의 대리자로 떠 받들어 주고, 본인도 뭔가 능력을 받은 것 같고 많은 사람들이 추종해 주니 일부 목회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과대하게 해석하고 선을 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의 나르시시즘..... 잘 알아두는 게 좋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검토가 필요한 첫 번째 판도라 문제는 교회 내의 나르시시즘이다.

 

2015년 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 현재 나르시시즘 증상이 있는 목회자가 목회를 담당한 교회는 96,300에서 112,350개에 이른다고 한다.

 

실제로 일생 동안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런 자아도취적 목회자를 한 번은 경험할 것이다.

 

이렇게 엄청나게 높은 수치는 교회들이 나르시시즘 지도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조장하고 좋게 포장해 선전하기 때문이라고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마르쿠스 와르너(Marcus Wamer) 박사와 공저한 [희귀한 리더십](Rare Leadership)은 성숙한 리더십과 성실하고 공감력 높은 그룹 정체성 구축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 독자들이 보인 가장 흔한 반응은 "교회 지도자 그룹에 자기도취형 약탈자(a narcissistic predator)가 있다면 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였다.

 

교회는 인격 장애라는 문제의 심각성을 상당 부분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런 장애를 지도자의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앞의 연구에서처럼 서구에서 나르시시스트가 목회하는 교회가 30% 에서 90%에 이른다면, 이런 교회가 판도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네델란드 목회자 중에서 90%가 높은 수준의 나르시시즘 증상을 드러낸다는 존다흐(Zondag)의 연구를 보라.

 

교회는 자기애성 약탈자들이 번성할 최적의 조건을 조성할 뿐 아니라, 목회자 선정 과정에서 나르시시스트를 선호함으로 약탈자형(폭군형) 지도자를 적극 추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볼(Ball)과 펄스(Puls) 박사는 캐나다에서 목회자가 일반 국민보다 나르시시스트가 될 확률이 50%에서 3,000% 더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NPD(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겪은 목회자가 정신 건강을 회복할 통계적 가능성은 아주 낮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볼과 펄스는 치료나 성경적 훈련을 통해 인격적 변화를 이루어 가자고 주장하는 대신, 이 나르시시즘을 악성 종양처럼 대하고 교회 사역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걸러내는 방법을 추천한다.

 

대부분 교회들은 소아성애자를 이런 식으로 처리한다.

 

자기애성 지도자들이 스스로 낫기를 기대하는가? 아니면 그들의 문제를 우리가 알아차리도록 가르치기를 기대하는가?

 

기독교 교회의 관행을 보면, 약탈자들을 보호자로 바꾸기는커녕 오히려 약탈자들에게 희생자들을 조달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방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기독교가 어려 심각한 문제를 다루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인가?

 

-[나르시시즘, 그 판도라 상자를 열다], 짐 와일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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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에서는 드러내고 다룰 수 있는 문제들이 다른 곳에서는 같은 주제라도 엄청난 문제를 야기한다.'

 

똑같은 사람들이 어떤 곳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판도라 문제에 갇혀 하나같이 침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가면 갑자기 대화를 중단해 버리는 문제도 일어난다. 판도라 문제의 폭발적 성격 혹은 파괴적 성격을 이해하려면 중앙에 있는 사람 (혹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판도라 문제의 중심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상당히 많다.

 

수천 권의 책, 심리학 연구, 끝없어 보이는 인터넷 자료들은 원인을 이해하고 조건을 확인하며 모든 판도라 매트릭스의 중심에 있는 인물의 단점이나 성격 장애를 구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문제는 인격 장애로 분류할 수 있다.

 

나르시시즘,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와 같은 인격 장애는 흔히 볼 수 있다. 소아성애자, 성추행범, 학대범, 강간범, 연쇄 살인범은 심각한 경우에 해당한다.

 

많은 인격 장애는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있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은 이런 심각한 사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여긴다.

 

경증의 인격 장애들은 상당히 흔하다.

 

조(Joe)의 사레를 생각하면 가벼운 미소가 나올 것이다. 그는 멋진 신사복을 차려입고 내 사무실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박사님, 한 달 치 비용을 미리 치를 테니, 그 시간에는 박사님이 원하시는 대로 마음대로 하십시오. 다만 아내에게 내가 상담을 받으러 왔다고 확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조는 명확히 나르시시스트였고, 이런 그를 내가 도울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내에게 그가 어떻게 말했는지는 하나님이 아실 것이다.

 

조는 아내가 정절을 지키기를 원했지만 정작 자신은 아내에게 충실하지 않았다.

 

친구처럼 보이고자 했지만, 실상 원수처럼 행동했다. 우리에게는 의리를 지키라고 요구하면서 정작 본인은 지킬 마음이 없어 보이는 사람 때문에 의아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를 보호해 주리라 생각했던 사람에게 상처를 입거나 이용당한 적은 없는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거나 안전감을 얻기 위해 누군가를 위협한 적은 없는가?

 

우리는 "글쎄, 진짜 위협할 마음은 없었는데. 이런 상황은 그냥 경고에 더 가까워.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단 말이야" 라고 말한다. "달리 어떻게 했어야 한다는 거야? 내가 뭔가를 꼭 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인격적 결함은 대부분 압박감이 심할 때 드러난다. 부부 갈등, 양육권 싸움, 교회 리더십 분쟁, 사업상의 어려움, 통치 권력 투쟁을 통해 경증의 인격적 결함이 드러나게 되고, 이것을 지적할 경우 오히려 문제는 악화된다.

 

중증의 인격 장애 못지 않게 이런 경증의 인격 장애를 변화시키는 일 역시 성공 확률이 낮다.

 

이 책에서는 성경의 이야기들과 세상 각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겪는 경험을 살펴보고, 판도라 문제가 침묵이 아닌 실제적 인격 변화로 나타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것이다. 

 

중증의 인격 장애들을 고친 사례들을 연구하면 우리가 침묵하는 경증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르시시즘, 그 판도라 상자를 열다], 짐 와이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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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 문제(Pandora problems)

: 누구나 심각성을 알지만 언급하기를 꺼리고 두려워하여 못 본 체하는 문제. / 폭발력이 강해 아예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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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 문제의 역동을 이해하려면 한 집단에서 (악화되기만 할 뿐 달리 도리가 없다고) 두려워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헤쳐 나갈 방법이 있다는 확신이 그 집단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판도라 문제가 야기될 것이다. 얼마든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인 지도자 두 명이 이런 판도라 문제를 해결한 방법을 비교하고 대조해서 살펴볼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자기 어머니를 살해한 사람을 사랑하도록 주위 사람들을 도와야 했다.

 

나는 우발도(Ubald) 신부가 모친을 살해한 남자를 안아 주는 장면을 보면서 그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두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고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원수를 친구로 삼으면서 그들의 인격에는 심오한 변화가 생겼다.

 

르완다 학살 다큐멘터리를 함께 보면서 나는 옆에 앉아 있는 우발도 신부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이 아프리카계 사제가 잔혹한 살인자들과 참혹한 고통을 당한 희생자들로 이루어진 회중을 사랑의 관계로 이끌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특별히 가해자들이 변화된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그를 보면서 또 다른 위대한 르완다 지도자인 R 박사가 생각났다. 우발도 사제처럼 R 박사 역시 학살 이후 용서를 가르치고 그것을 몸소 실천해 왔다. 그러나 R 박사가 섬기던 기독교 공동체에서 이 학살은 일종의 판도라 문제가 되었다.

 

누구도 학살에 가담한 사실을 입 밖에 내려 하지 않았다.

 

 

학살에 가담한 일은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입으로 발설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책을 쓰는 시점에도 문제를 발설하면 상황이 더 악화될 뿐이므로 내 친구들의 실명을 거론할 수 없다)

 

R 박사는 연설을 하려 강단에 섰을 때, 어머니를 눈앞에서 살해한 사람이 맨 앞줄에 앉아 있었던 당시 상황을 내게 말해 주었다.

 

그 사람은 맨 앞줄에 앉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R 박사는 속으로 그 남자를 용서했다. 하지만 그 살인자에게는 어떤 인격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교회는 어떤 화해의 미소도 보이지 않았다. 공동체에는 어떤 기쁨도 없었다. 무슨 말이든 한 마디라도 하면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 뻔했다.

 

R 박사와 우발도 신부는 인종 학살이라는 문제를 용감하게 거론하는 놀라운 지도자들이었다.

 

두 지도자 모두 용서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데 매우 뛰어났다.

 

두 사람 모두 모친을 살해한 살인자와 직접 대면했다. 두 사람에게는 원수를 용서하는 그리스도의 심장이 있었다. 하지만 이 두 만남에는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 주변의 사람들이었다.

 

-[나르시시즘, 그 판도라 상자를 열다], 짐 와일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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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정신치료의 진행과 해석 과정 설명인데 실제 치료자들은 도움이 많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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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치료자가 침묵하면서 많이 듣는 자세를 취하는 분석정신치료에서 치료자의 말은 치료자가 상상하고 의도하는 것 이상으로 환자에게는 많은 의미를 전달하게 됩니다.

 

정신분석에서 무엇이든 떠오르는 대로 진술하라고 자유연상을 권장하는 것 자체를 환자가 자신이 무슨 공상을 하든지 간에 괜찮다고 허용된다고 받아들이듯이 분석정신치료에서 치료자가 무엇을 선택해서 말하든 간에 환자는 그것을 마치 치료자가 그걸 안 좋게 생각한다고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치료자에게 환자가 자신의 초자아를 투사하는 일은 흔한 현상입니다.

 

치료자가 아무 말을 안 하고 지나가는 건 마치 치료자가 그건 괜찮다고 한다는 식으로 환자는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 반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구요.

 

또한 치료자는 명시적 말이 아니라 '음', '흠' 등등의 소리를 내는 경우도 많은데 이런 경우에 환자들은 보통 치료자가 환자의 말에 긍정의 신호를 보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치료자의 말들을 카테고리화해서 살펴본다면 저는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치료자의 말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명료화시키기 위한 질문 형태의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명료화는 환자가 이야기하는 내용에서 모호한 부분을 좀 더 상세한 질문을 통해 명료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명료화는 환자가 이야기하는 상황을 명료화하기 위한 질문이나 아니면 환자가 직면한 심리적 현상을 명료화하기 위한 물음으로 다시 나누어 볼 수도 있겠지요.

 

물론 이런 명료화를 위한 질문을 던질 때도 형사가 범인 취조하듯이 묻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되지요.

 

항상 환자의 주의를 이끌면서 그 부분을 좀 더 아는 게 흥미롭지 않은지 하는 등의 태도를 취하는 게 기본적일 테죠.

 

이러한 명료화와 온전히 구별하기는 쉽지 않지만 직면시키기 위한 치료자의 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환자가 어떤 현상을 피하고 대면하지 않으려 할 때, 이를 직면토록 해서 그 부분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게 자신의 마음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부각시키기는 거지요.

 

그 다음에 이를테면 '해석'이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해석에 관해서는 많은 초보 치료자들이 지레 겁을 먹어서 아예 해석을 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습득한 지적 이해에 기반으로 한 해석을 남발해서 마치 치료를 지적인 게임의 장과 같은 것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음은 해석의 이론에 관해서입니다.

 

페니쉘(1941)이 말했던 바 '해석은 표면에서부터 비롯해야 한다.'는 명제는 환자가 막고 있는 본능적 파생물을 직접적으로 해석하기 이전에 이에 관한 방어에서부터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방어가 더 표면적인 것이고 환자가 깨닫기가 더 쉬운 부분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접근을 통해서 환자가 자신의 방어에 관해서 호기심을 가지고 전에 자신이 배척했던 걸 들여다보려고 하게 되면 좀 더 깊은 내면의 본능적 소망에 대한 해석도 가능해질 수 있겠지요.

 

보통 환자의 전의식에 올라와 있는 것을 우리가 해석해야 바로 의식에서 환자가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요.

 

이 모든 개입에서 중요한 요소는 환자와 치료자가 맺고 있는 관계입니다. 적어도 치료자에 대한 긍정적 감정을 지니고 있어야 치료자가 하는 말이 환자에게 의미 있는 말로 다가오기 때문이지요. 

 

환자가 치료자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다루고 있는 과정이라도 최소한 치료적 관계를 유지하고 치료자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정도의 긍정적이고도 우호적인 감정이 치료자를 향해 있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해석을 시도할 때 치료자가 명심해야 할 일은 모든 해석은 환자에게는 고통을 주는 아픈 일이 될 거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정도의 강도로 해석을 가할지를 생각할 때 환자에게 고통을 덜 주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표면에서부터 해석하라는 것도 바로 그런 노력의 일환입니다.

 

우선 환자가 어떻게 방어하고 있는지를 해석해서 환자의 호기심을 이끌어내고 환자가 왜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런 방어를 일삼고 있는지, 즉 환자가 자기의 심리현실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뒤에 그 다음 단계로 좀 더 깊은 내용을 해석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환자의 자아는 전에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던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변하게 되고 이런 맥락 하에서야 비로소 본능적인 충동에 관한 좀 더 깊은 내용에 대한 해석도 수용이 가능하게 되겠지요.

 

슈퍼비전을 수행하다 보면 수련생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혼란을 종종 마주치곤 합니다. 한번 해석한 어떤 것에 대해서 환자가 당연히 이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간주해서 같은 해석을 다시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수련생들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비슷한 내용을 해석하고, 또 되풀이해서 해석하는 일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치료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같은 현상도 이리 보고 저리 보면서 경험할 때마다 늘 새로운 듯이 다루어주어야만 하는 거지요. 이런 현상은 그러니까, 왜 훈습이 필요한가 하는 물음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 되기도 합니다.

 

-[정신분석의 이삭을 줍다, 치료자를 위한 길잡이], 민성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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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선 환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환자가 고통스러워하는 삶과 현실이 어느 정도의 고통일지를 가늠해 봅니다.

 

그래서 만일 분석정신치료를 한다면 불가피하게 그 고통을 다시 치료 상황에서 경험하게 될 터인데 이러한 퇴행을 얼마나 환자가 견딜 수 있고, 또한 그 고통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건강하게 다룰 수 있는 힘이 환장게 얼마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환자의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합니다. 

 

과연 얼마나 지속적으로 올 수 있을지, 치료비를 환자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지. 만일 보호자가 치료비를 내 주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보호자는 과연 어느 정도 이런 치료 방식을 이해하고 지지할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려고 하지요.

 

예를 들어 정신분석을 원한다고 하면서 몇 달 후에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야하는 현실적 사정이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지금 수행할 수 있는 치료는 정신분석이 아니라 단기정신치료가 될 터이지요.

 

제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분석정신치료와 정신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임상을 시작했을 때, 다른 선생님들이 저에게 의뢰하는 환자를 보면 때로는 마치 문제가 심각한 환자를 제가 잘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저에게 보내는 경우가 있었지요.

 

하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제가 분석적인 방식으로 가장 잘 도와줄 수 있는 환자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잘 대처할 수 있을 만큼 기능하고 있지만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괴로움이 있는, 말하자면 어느 정도는 기능의 수준이란 것이 꽤 높은 환자이지요.

 

또 다른 딜레마는, 분석정신치료의 적응증에는 다 맞지만 현실적인 여러 여건이 환자가 치료를 지속할 만한 여건이 안 되는 경우에는 치료를 하기가 어려워지지요.

 

이제 치료 세팅에 관해서 이야기해 볼까요?

 

 

치료 세팅이 왜 그리 중요한 걸까요?

 

이 치료 세팅을 제대로 해 논 상태에서 치료를 수행해야 분석정신치료의 과정에서 활성화되는 무의식의 자료들이 의식으로 올라올 때 치료적으로 다룰 수가 있습니다.

 

우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시간만큼을 규칙적으로 치료자를 볼 수 있는 상황. 치료자가 항상 그 시간에 같은 치료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보통의 사회적 관계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어떤 면에서 살펴보자면 다소 비현실적인 상황이기도 하지요.

 

이런 인위적인 비현실적인 상황을 만들어 놓은 이유는 우리 무의식을 살피는 실험실의 상황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일주일에 몇 번 만날지 하는 횟수의 문제도 있는데 보통 전통적 정신분석에서는 주 4회 내지는 주 5회를 시행합니다. 그 경우에는 카우치에 누워서 하고, 그 외에 주 3회 이하 주 2회나 주 1회에서는 보통은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서 하게 됩니다.

 

한 차례 만날 때의 시간은 보통 45분에서 50분으로 미리 정하지요. 이 시간도 프로이트는 애초에 1시간 정도 보았다고 하는데 그 뒤에 전화의 발명 및 확산이 있으면서 환자 보는 사이의 시간에 분석가들이 처리할 일, 전화를 주고받는 등의 일을 하고 또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정신분석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환자를 더 보기 위해서 한 번에 45분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또한 책에는 노골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치료자의 수입과도 관련이 됩니다. 이러한 치료를 하는 경우에 하루에 볼 수 있는 환자의 수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데 치료 시간이 초창기의 1시간에서 45분으로 줄어들면서 하루에 볼 수 있는 환자 수가 다소 늘어나는 추세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무의식을 다루는 의미 있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회당 적어도 45분은 봐야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45분에서 더 짧은 시간으로 단축될 것 같지는 않네요.

 

-[정신분석의 이삭을 줍다, 치료자를 위한 길잡이], 민성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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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는 환자가 치료의 효과에 관해 초기 면담이나 평가면담 후에 물어볼 때, 치료자가 지나치게 회의적으로 답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보통은 치료자의 치료 목표가 환자가 바라는 치료 목표보다 높은 경우가 많고, 환자는 치료에서 충분한 도움을 받았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겠죠. 혹은 치료를 통해서 환자가 자신에 대해서 충분한 통찰력을 갖게 되면서 자신이 치료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의 현실적인 한계를 인식하게 되기도 합니다.

 

우선 치료자의 역할을 생각해 볼까요? 앞서 얘기에서 분석정신치료 진행에서의 환자의 몫을 6할이라고 보고, 치료자의 몫을 4할이라고 제가 가정했는데 제 말을 잘못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 비유는 치료가 진행될 때 치료 안에서의 역할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환자와 분석분석정신치료의 치료 계약을 맺은 뒤에 그 치료 틀을 유지하고 치료 환경을 만드는 데 있어서 치료자의 역할은 이보다 훨씬 더 큽니다.

 

처음으로 치료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볼 때, 저는 치료자의 역할이 거의 10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치료를 시작한 이후에는 물론 치료 계약을 따라야 하는 환자의 역할 분담이 늘어나게 됩니다.

 

환자에게는 치료 지속을 위한 치료 계약의 외적인 틀을 준수해야 하는 역할 분담이 있지요.

 

약속한 치료 시간에 오고, 약속한 치료비를 지불하는 등의 일이 여기에 속하겠지요.

 

 

치료 계약의 내적인 부분으로는 치료 시간에 와서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나 떠오르는 생각, 느낌, 감각 등을 가능한 한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역할이 부여됩니다.

 

요컨대, 분석정신치료는 말로 하는 치료입니다. 환자가 치료 시간에 무엇이든 말로 표현하는 건 괜찮지만 치료 시간 내에서 어떤 행동이건 행동으로는 표현하지 않아야 하겠지요.

 

분석정신치료에서는 정신분석에 비하면 환자에게 자유연상을 하도록 많이 강조하지는 않지만, 환자가 이야기해 나아감에 따라서 환자가 직면하고 있는 고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인 셈입니다. 따라서 분석정신치료에서 환자에게 부여된 중요한 역할은 자신의 고통을 향해 나아가라는 거지요. 당연히 환자는 의식에서는 이 작업을 하러 분석정신치료에 왔다고 알고 있지만 여러 방법을 통해서 이 고통을 피하려고 합니다. 환자는 침묵하거나, 자신의 고통과 멀어지는 방식으로 말하거나 등등의 방법으로 말이에요.

 

이 과정에서 치료자에게는 환자에게 왜 치료 계약이 필요하며 치료의 틀을 유지하는 것이 치료에 어떤 의미가 있어서 그런지를 필요한 시기에 적절하게 설명하거나 교육하거나 환자의 저항을 조심스럽게 다루어 주어야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석정신치료에서 치료자가 환자에게 요구하는 일들은 환자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해서이지요.

 

이 과정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예를 들면, 왜 환자에게만 주로 말하게 하고 치료자는 가만히 듣고만 있는지요? 그리고 환자가 질문을 하는데 왜 치료자가 직접적인 답변을 하지 않기도 하는지요? 환자가 가지게 되는 매우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의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로 환자가 자유롭게 이야기하게 하고 치료자가 침묵하는 이유는 환자에게 치료적으로 도움이 되는 퇴행을 일으키기 위한 목적이 있다거나, 환자의 질문에 바로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대답을 안 하는 경우에도 어떤 치료적 목적이 있어서 그런다거나 하는 걸 알려주는 일이 치료자의 역할에 속하는 일입니다.

 

많은 환자가 말하는 것만으로 과연 치료가 될 수 있는지를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

 

아이흘러(2010)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서가 캄캄한 링 위에 서 있으면서 누구와 싸우는지 모르는 상태일 때, 정신치료는 여기에 빛을 비추어서 누구와 싸우는지를 보게 해준다, 라구요.

 

-[정신분석의 이삭을 줍다, 치료자를 위한 길라잡이], 민성헤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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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정신치료에서는 무엇보다도 환자의 협조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치료 과정 중에 환자가 감당하고 부담해야 하는 몫이 크기 때문이지요.

 

이를 수치로 표현하기는 어렵고 또한 수치로 인해 도식화 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분석정신치료에서 전체 치료 진행의 몫을 10으로 볼 때 치료자의 몫을 4로 두고 환자의 몫을 6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과 치료를 하려는 이 환자는 과연 어느 정도의 몫을 감당할 수 있는 상태인가? 치료자 자신에게 이를 스스로 묻고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요리를 잘 하는 사람과 요리를 잘 못하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제 경험에 의하면 요리할 때 들어가는 여러 재료와 양념을 필요한 만큼 적절하게 넣을 수 있는지에 그 차이가 생긴다고 봅니다.

 

무조건 많이 넣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너무 많이 넣으려 한다면 그 요리의 맛을 장담하기 어렵겠지요.

 

꼭 필요한 재료와 양념이 안 들어가도 마찬가지로 맛을 장담할 수 없다고 봅니다. 결혼 초에 왜 내가 만든 요리는 맛이 없고 남편이 만든 요리는 맛이 있는지를 살피다가 제가 내린 결론이 이러했습니다.

 

또한 맛있게 만든 음식도 우리가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적당한 양과 적당한 온도를 잘 이용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이 모두는 저의 초기 신혼 생활에서의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 일입니다.

 

분석적인 계열에 속하는 정신치료도 바로 이런 발상으로 이해한다면 좀 더 쉬울 겁니다. 치료자가 나서서 환자의 어려움을 다 해결해 줄 것 같은 태도를 취하면 이는 아주 취약한 상태에 놓여있는 환자의 경우에서는 환자에게 안전감과 안정감을 느끼게 하고, 치료자로부터 필요한 충분한 지지를 받았다고 느끼게 할 수는 있지요.

 

 

하지만 반대로 현실감이 충분히 살아있고 이미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인생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고 치료를 받으러 오기 전에 여러 가지의 시도를 통해서 자신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는 걸 파악하고 온 환자의 경우라면 치료자가 이런 태도를 취한다면 오히려 환자는 치료자의 전문성을 의심하게 될 터이겠지요.

 

그도 그럴 것이 이런 환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로의 접근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의식적인 각성을 지니고 치료에 왔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니까요.

 

만약 환자 마음속에 치료자의 몫이 10이라는 주장이 강하다면 우선 지지적인 정신치료를 하면서 어느 정도까지 환자가 자신의 몫을 감당할 잠재력이 있는지를 살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속성 때문에 분석 정신치료의 결과에 대한 예측이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환자가 처음에는 환자의 몫인 6할 정도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치료자가 평가했지만 치료의 진행에 따라 그렇지 않다는 게 점점 더 분명해질 수도 있겠고, 그와 반대의 경우도 가능할 수 있겠지요.

 

이런 속성으로 인해서 분석정신치료의 치료적 효과를 치료자가 환자에게 확신을 가지고 예측해서 미리 말해주기가 어렵고 따라서 분석정신치료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이 많은 사람을 설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면, 초보 치료자는 다시 한숨이 나오겠지요. 다음의 넋두리가 절로 나오겠네요.

 

'아니 하나도 단순하거나 쉬운 게 없어 보이네.' 하고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분석정신치료를 한다는 일은 늘 치료자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이고 항상 불확실성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입니다. 자신이 이런 점을 너무나 견디기 어려워한다면 왜 이런 치료를 하는 치료자의 길로 들어섰는지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2부]에 계속-

-[정신분석의 이삭을 줍다, 치료자를 위한 길잡이], 민성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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