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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연성은 이 문제와 거의 관련이 없음을 주의하라.

 

그런 사람은 전능하고 전지하며 온전히 선한 인격체가 이런 역겨운 일을 허용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추론하지 않으며,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려는 존재라면 이런 역겨운 일을 허용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추론하지도 않는다.

 

여기 나오는 위로는 개연성을 고려한 사유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하게 고려할 것이 또 하나 있다. 하나님이 실현하실 수도 있었던 최고의 가능 세계에,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위대한 선인 하나님의 성육신과 구속이 - 그러나 물론 죄와 고통도 -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님은 이 가능 세계 가운데서 하나를 실제 세계로 고르셨으며, 그 세계에서 인류는 고통을 당한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죄와 고통 뿐 아니라, 구속을 받고 하나님과 영원한 사귐을 누릴 경이로운 기회도 존재한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견뎌야 할 고통을 훨씬 능가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선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영원한 사귐을 누릴 기회를 부여받은 우리 인간은 매력이 넘치는 삼위일체의 교제 자체에 동참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어쩌면 이런 초대는 타락하여 고통을 겪었으나 구속받은 피조물에게만 부여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인류의 상태는 아무런 죄와 아무런 고통이 없었을 때보다 훨씬 더 나아진 셈이다. "오, 복된 죄로다" (O flex culpa) 라는 말은 사실이다!

 

따라서 신앙을 가진 사람(중생의 과정을 겪고 있는 사람)은 역시, 아퀴나스/칼뱅 모델에 따르면, 하나님의 임재와 선하심을 어느 정도는 뚜렷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라는 인격체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상당한 보증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도, 신의식이 손상되지 않았던 사람처럼, 무시무시한 악을 보여 주는 사례를 직면할 때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을 따르고픈 유혹을 거의 혹은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도 당황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도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세계에 끔찍한 악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서 행동하고 따지고픈 충동을 느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믿음을 포기하는 것은 선택 가능한 방안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만일 그들 자신이 두드러진 고통을 겪는다면, 그들은 시편 119:75~76 저자와 뜻을 같이할지도 모른다.

"오, 야훼여, 나는 당신의 율법이 의로우며 당신이 신실하심 가운데 나를 괴롭게 하셨음을 압니다. 당신이 당신 종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이 내 위로가 되게 하소서."

 

사실 이들은 심지어 복된 만족을 누릴지도 모른다. 여기서도 귀도드 브레[Guido de Bres, 1561년 네델란드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의 저자]가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에 아내에게 쓴 편지를 보라.

 

나는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있는데, 그런 나를 당신의 슬픔과 고통이 괴롭게 하기에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오. 나는 당신이 한없이 슬퍼하지 말기를 아주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하오...

나는 지금 개미 한 마리도 빠져 나가지 못하는, 비참할 대로 비참한 지하 감옥에 갇혀 있소. 어찌나 어둡고 음울한지 감옥이라는 이름이 딱 들어맞는구려. 공기도, 가장 나쁜 공기조차 그저 조금 맛볼 뿐이오. 내 손과 발에는 무거운 쇠가 채워져 있소. 이것이 나를 끊임없이 고문하면서, 심지어 내 뼈가 드러날 정도로 내 살점을 파먹었소. 그러나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내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약속을 버리지 않으시고, 내 마음을 위로하시며 내게 가장 복된 만족을 주신다오.

 

드 브레는 큰 고통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가장 복된 만족"을 누렸다.

 

 

물론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어쩌면 하나님 같은 인격체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쩌면 드 브레 자신이 줄곧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계속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코 비합리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고통 가운데도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를 갖기는커녕,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억누르고 (어쩌면 소원 섞인 생각을 통해) 어쨌든 계속하여 하나님을 믿었던 것 같다. 아니, 그의 믿음은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산출하는 인지 과정 - 다시 회복된 신의식, 성령의 내적인 자극-이 올바르게 기능한 결과다.

 

-> (이 부분의 표현이 아마 악과 고통의 문제의 극한의 답변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마지막 신의식, 성령의 내적 자극이 회복된 상태라는 부분은 논증의 영역은 아닌 것 같다.

 

의심하거나, 회의하거나, 의심하는 순간 '망가진 신의식, 성령의 내적 자극의 약화' 라고 말을 듣게 되니 참 곤란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러면 서로 토론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

 

-[10부]에 계속-

-[지식과 믿음], 앨빈 플랜팅가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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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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