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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연성은 이 문제와 거의 관련이 없음을 주의하라.

 

그런 사람은 전능하고 전지하며 온전히 선한 인격체가 이런 역겨운 일을 허용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추론하지 않으며,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려는 존재라면 이런 역겨운 일을 허용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추론하지도 않는다.

 

여기 나오는 위로는 개연성을 고려한 사유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하게 고려할 것이 또 하나 있다. 하나님이 실현하실 수도 있었던 최고의 가능 세계에,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위대한 선인 하나님의 성육신과 구속이 - 그러나 물론 죄와 고통도 -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님은 이 가능 세계 가운데서 하나를 실제 세계로 고르셨으며, 그 세계에서 인류는 고통을 당한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죄와 고통 뿐 아니라, 구속을 받고 하나님과 영원한 사귐을 누릴 경이로운 기회도 존재한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견뎌야 할 고통을 훨씬 능가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선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영원한 사귐을 누릴 기회를 부여받은 우리 인간은 매력이 넘치는 삼위일체의 교제 자체에 동참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어쩌면 이런 초대는 타락하여 고통을 겪었으나 구속받은 피조물에게만 부여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인류의 상태는 아무런 죄와 아무런 고통이 없었을 때보다 훨씬 더 나아진 셈이다. "오, 복된 죄로다" (O flex culpa) 라는 말은 사실이다!

 

따라서 신앙을 가진 사람(중생의 과정을 겪고 있는 사람)은 역시, 아퀴나스/칼뱅 모델에 따르면, 하나님의 임재와 선하심을 어느 정도는 뚜렷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라는 인격체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상당한 보증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도, 신의식이 손상되지 않았던 사람처럼, 무시무시한 악을 보여 주는 사례를 직면할 때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을 따르고픈 유혹을 거의 혹은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도 당황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도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세계에 끔찍한 악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서 행동하고 따지고픈 충동을 느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믿음을 포기하는 것은 선택 가능한 방안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만일 그들 자신이 두드러진 고통을 겪는다면, 그들은 시편 119:75~76 저자와 뜻을 같이할지도 모른다.

"오, 야훼여, 나는 당신의 율법이 의로우며 당신이 신실하심 가운데 나를 괴롭게 하셨음을 압니다. 당신이 당신 종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이 내 위로가 되게 하소서."

 

사실 이들은 심지어 복된 만족을 누릴지도 모른다. 여기서도 귀도드 브레[Guido de Bres, 1561년 네델란드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의 저자]가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에 아내에게 쓴 편지를 보라.

 

나는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있는데, 그런 나를 당신의 슬픔과 고통이 괴롭게 하기에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오. 나는 당신이 한없이 슬퍼하지 말기를 아주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하오...

나는 지금 개미 한 마리도 빠져 나가지 못하는, 비참할 대로 비참한 지하 감옥에 갇혀 있소. 어찌나 어둡고 음울한지 감옥이라는 이름이 딱 들어맞는구려. 공기도, 가장 나쁜 공기조차 그저 조금 맛볼 뿐이오. 내 손과 발에는 무거운 쇠가 채워져 있소. 이것이 나를 끊임없이 고문하면서, 심지어 내 뼈가 드러날 정도로 내 살점을 파먹었소. 그러나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내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약속을 버리지 않으시고, 내 마음을 위로하시며 내게 가장 복된 만족을 주신다오.

 

드 브레는 큰 고통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가장 복된 만족"을 누렸다.

 

 

물론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어쩌면 하나님 같은 인격체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쩌면 드 브레 자신이 줄곧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계속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코 비합리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고통 가운데도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를 갖기는커녕,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억누르고 (어쩌면 소원 섞인 생각을 통해) 어쨌든 계속하여 하나님을 믿었던 것 같다. 아니, 그의 믿음은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산출하는 인지 과정 - 다시 회복된 신의식, 성령의 내적인 자극-이 올바르게 기능한 결과다.

 

-> (이 부분의 표현이 아마 악과 고통의 문제의 극한의 답변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마지막 신의식, 성령의 내적 자극이 회복된 상태라는 부분은 논증의 영역은 아닌 것 같다.

 

의심하거나, 회의하거나, 의심하는 순간 '망가진 신의식, 성령의 내적 자극의 약화' 라고 말을 듣게 되니 참 곤란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러면 서로 토론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

 

-[10부]에 계속-

-[지식과 믿음], 앨빈 플랜팅가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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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신자는 어떤가?>

 

그러므로 아퀴나스/칼뱅 모델에 따르면, 철저히 합리적인 사람에게는 악을 보여주는 사실들이 유신론 믿음을 무너뜨리는 어떤 종류의 파기자도 되지 않는다.

 

-> (앨빈 플랜팅가가 취하는 전략이 기존 유신론을 이성론으로 변증하기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와 장 칼뱅의 모델을 활용하고, 더 나아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유신론을 변증하기 위해 자신만의 확장된 아퀴나스/칼뱅 모델을 활용한다.....책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고, 나름 흥미로운 논증법이다.)

그럼에도 (교활한 반신학자가 주장하게 될 내용에 따르면) 고작해야 이런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 실제로 존재하는 신자-가 따르는 유신론의 파기자가 이 세상의 불행 속에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과 관련하여 의심스로운 연관성을 가질 뿐이다.

 

기독교 교리 자체에 따르면, 어떤 인간도 본디 처음에 가졌던 완전한 합리성을 향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식은 죄 때문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우리 대다수는 거의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은 (어쨌든 거의 항상)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조금은 그림자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것으로 인식한다.

 

하나님의 존재가 다른 사람이나 뒤뜰에 있는 나무의 존재만큼이나 뚜렷이 드러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철저히 합리적인 사람에게는 악을 보여 주는 사실을 아는 지식이 유신론의 파기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타락한 인간에게는 (주장되는 바에 따르면) 파기자가 될 수 있다.

 

-> (그런 인식,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너는 '신의식'이 줄어 든 거고, '성령의 내적 감각'이 감소된 상태로구나....너는 '합리적이지 못하고, 타락한 상태로구나' 라는 이야기를 '앨빈의 주장대로라면' 하는 건데........이래서는 토론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이게 논증을 같이 할 수 없는 이유 아닐까....도킨스와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만나도 답이 안 나오는 이유....)

 

하지만 이런 논지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기독교 믿음의 또 다른 특징을 무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신의식이 입은 손상은 신앙과 중생의 과정에서 원리상 그리고 점차 고쳐진다. 신앙의 사람은 다시 한번, 적어도 몇몇 경우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아주 명백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게다가 그런 사람은 성육신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생각조차 불가능한 기독교 이야기 전체의 찬란함, 그 자신이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통과 죽음에 관해 듣고 안다.

 

 

물론 이런 지식이 하나님은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지식은 여기서 대단히 중요하다.

 

내가 엄청난 잔학 행위에 관하여 하나 더 읽으면 아마 동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럴 때도 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서 드러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큰 사랑, 그리스도가 기꺼이 자신을 비워 종의 본질을 입으려 하신 것, 죄로 가득한 우리 인간이 구속을 얻을 수 있게 고난과 죽음을 감내하신 것, 그리고 내 신앙도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이 왜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왜 사람들이 서로 고문하고 죽이도록 내버려 두시는지,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나 공산주의처럼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사회적 실험을 왜 허용하시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기꺼이 우리와 고통을 함께 하시며, 그 스스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시고,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나는 특히 역겨운 악을 보여주는 사례를 만나면 하나님께 묻고 싶어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화를 내며 격분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고통이 어떤 유익에 어떻게 이바지하는지 눈곱만큼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나 혹은 나의 가족이 그분의 (당연히 고상한) 목적을 촉진하려고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그럴 때도 나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기꺼이 더 큰 고통을 감내하려 하심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고, 어쨌든 입을 다물게 된다.

 

-> (결국 이게 최선의 답변인가 보다.....약간은 허탈할 수 있다. 신앙적 고백으로 마무리 되는 수 밖에..이 책의 논증은 늘 훌륭하다..그러나, 무신론자나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분노하는 자들이 이 글로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다.)

 

-[9부]에 계속-

-[지식과 믿음] , 앨빈 플랜팅가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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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히 합리적인 사람에게는 파기자가 없다>

-> (이게 앨빈 플랜팅가의 주장이다.....음....유신론의 파기자가 되기는 좀 애매하긴 하다...그러나 기독교 믿음이 이야기하는 사랑과 능력을 갖춘 인격신과 고통을 화해시키는 작업은 상당히 어렵다. 결국 앨빈도 명확한 답은 내리지 못하고, 개인의 신앙 고백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간다.....우리 인간이 알아낼 수 없는 한계의 범주인 것일까...)

 

우리가 이런 주장 - 악을 분명히 살펴보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파기자를 발견한다는 주장-을 고찰한다고 가정해 보자.

 

먼저, 믿음의 파기자는 내가 믿는 것의 나머지에 의존한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나의 새로운 믿음이 옛 믿음의 파기자인지 여부는 내가 달리 믿는 것이 무엇이며 나의 경험이 어떠한지에 의존한다.

 

나는 그 나무가 단풍나무라고 믿는데, 여러분은 내게 그 나무가 실은 느릅나무라고 알려 준다.

 

만일 내가 여러분이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며 진실을 말하기를 목표한다고 생각하면, 그러면서 내가 여러분이 나무에 관하여 나보다 훨씬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혹은 여러분이 스스로 진실이라 여기는 것을 말하고 있을 확률이 50 대 50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이 한 말은 그 나무가 단풍나무라는 내 믿음을 파기할 것이다.

 

세계가 보여 주는 악의 공포를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가 될 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먼저 논증하고 싶은 것은, 만일 고전적 기독교가 참이라면, 철저히 합리적인 사람, 그 인식 능력이 올바르게 기능하는 사람에게는 악을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파기자가 못 된다는 사실이다.

 

고전적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어쨌든 아퀴나스/칼뱅 모델에 따르면), 여기에는 신의식이 올바르게 기능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런 과정이 올바르게 기능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친밀히, 자세히, 생생하게, 분명하게 아는 지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 영광, 선하심, 능력, 완전성, 경이로운 매력, 달콤함을 깊이 알 것이다.

이미지는 그냥 퍼온거고, 아래 내용과는 무관함.

 

그리고 이런 사람은 자신의 존재에 관하여 확신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의 존재도 확신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 하나님이 거룩하고 불타는 열심으로 악을 증오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 하나님의 세계에 이런 악이 존재함으로 인해 당황할 수도 있으나, 그래도 하나님 같은 인격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아마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도 악과 고통에 직면하면 하나님이 왜 이런 것을 허용하시는지 자문할지도 모른다.

 

악을 보여주는 사실은 행동하게 만들고 탐구하게 만드는 자극제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그 답을 찾지 못하면, 자신이 모르는 이유가 틀림없이 하나님께 있다고 결론지을 것이다.

 

-> (신자에게 이런 마음가짐 말고 달리 이 문제를 영리하게 피할 방법이 없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인격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추호도 의심하려 하지 않는다.

 

아퀴나스/칼뱅 모델에 따르면, 철저히 합리적인 사람에게 악의 존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파기자가 되지 않는다.

 

-[8부]에 계속-

-[지식과 믿음], 앨빈 플랜팅가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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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쩌면 여기서는 그것만이 현실적인 반응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이런 식으로 반응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합리적인 반응이 있지 않을까?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어떤 상황에서는 고통과 악이 실제로 이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무너뜨리는 파기자 역할을 할 수 없지 않을까?

 

인간이 타인에게 저지르는 잔학 행위 목록은 끔찍하고 섬뜩하다.

 

그뿐 아니라 그 목록이 아주 길고 자꾸 반복되다 보니 결국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럼에도 가끔은 새로운 깊이에 다다른다.

 

 

보스니아의 한 젊은 무슬림 엄마는 남편과 아버지가 지켜보는 앞에서 거듭 강간을 당했다. 이 엄마의 아기는 바닥에서 엄마 옆에 누워 비명을 질렀다. 이 엄마에게 잔학 행위를 저지르던 사람들이 마침내 이 여인에게서 떨어지자, 엄마는 아이를 보살피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강간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재빨리 아이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엄마 무릎에 내던졌다.

 

이런 일은 끔찍함 그 자체다. 생각만 해도 고통스럽고, 그대로 마음에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럽다. 이런 일을 이처럼 차가운 철학 토론의 소재로 끌어들인 것 자체가 비참하며 인정이 없는 짓처럼 보일 수 있겠다.

 

-> (이런 표현들 중요하다. 사실 이게 이성 논증의 극한이지 않나 싶다.. 이성의 극한이 가장 감정적인 문제로 귀결된다라....신정론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저자를 아시면 제보 좀 부탁드립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해 보자.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이렇게 끔찍한 악을 마주했을 때 전능하고 전지하며 온전히 선한 인격체가 있어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감독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어쩌면 완전한 인격체라면 이런 일을 허용할 수 없다고 증명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개연성이나 증거에 입각하여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훌륭하게 증명하는 논증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나님의 명성에 걸맞게 사는 존재라면 이와 같은 일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누가 봐도 명백한 일 아닌가?

 

 

그렇다면 설령 악에 근거한 좋은 논증이 없다 해도,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가 여기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이와 같은 것이 악에 근거한 반유신론 논증 가운데 가장 강력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이 주장은 우리가 사는 이 음침하고 불행한 세상이 펼쳐 보이는 악의 무시무시한 공포를 제대로 지각하고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같은 존재가 그런 일을 허용하리라고 주장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단박에 알린다.

 

이는 일종의 역 신의식이다. 어쩌면 악에 근거한 훌륭한 논증은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논증도 필요하지 않다.

 

이런 종류의 호소를 전개할 때는 논증을 자세히 말하는 방법이 아니라, 대화 상대방을 세상의 고통과 악이 지닌 처절한 공포가 그야말로 진저리를 치게 분명히 나타나는 상황에 두는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실제로 반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어떤 논증을 제시하는 것은 역효과를 낳는다.

 

그런 논증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고, 그의 눈이 역겨운 고통을 외면하게 하며, 가능 세계와 개연성 있는 기능, 그리고 다른 불가사의를 둘러싼 무미건조한 토론으로 도피하게 한다.

 

그런 논증은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파기자인 상황에서 주의를 돌리게 한다.

 

-[7부]에 계속-

-[지식과 믿음], 앨빈 플랜팅가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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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근거한 가장 강력한 주장>

 

악의 존재가 하나님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 논증은 없다.

 

아울러 악에 근거한 증거론적 혹은 개연론적 논증 가운데 진지하게 고려할 만한 것도 없다.

 

이 정도면 됐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일부 사람에게는 고통과 악이 어느 정도 문제가 된다. 구약성경에는 그런 사례가 가득하다.

 

-> (과연 제대로 고통을 당하면 '어느 정도'라고 표현할 수준인지는 의문이긴 하지만...논리상으로는 음..

공부할 수록 어려운 영역.....이게 공부해서 될 일인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이런 고통스러운 절규를 토해 내신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시편 22편의 말을 반영하는 외침이다.

 

-> (고통 속에서는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

 

욥기는 악을 보여주는 사실과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샅샅이 그리고 강력하게 탐구한다.

 

욥은 분개한다.

 

그는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 생각하고, 하나님께 직접 그 이유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라고 도발한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자신이 겪는 잔인한 고통 때문에 혹은 자신과 가까운 누군가의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분노했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찾아온 고통과 악 때문에 하나님께 분개할 수 있고, 불신할 수 있으며, 거부하고 적대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으레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를 산출하지는 않는다.

 

에수나 시편의 시인이나 욥도 유신론 믿음을 포기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이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라기보다는 영적인 혹은 목회적인 문제인 것이다.

 

-> (이런 논증은 상당히 좋다....영적, 목회적..... 그 이상 표현은 없으려나?....감정적인 문제?......뭔가 2% 아쉽다. 극심한 고난 앞에서는 사실 이 정도 표현이 와닿긴 힘들다.)

 

 

어쩌면 하나님은 내 아버지나 내 딸이나 내 친구 혹은 내가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게 하실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분명히 그분은 신이 가진 멋진 특질을 모두 갖고 있겠지. 그분이 이 지긋지긋한 일을 허용한 것도 분명 타당한 이유가 있을 거야. 요컨대 내가 으 이유를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나 같은 사람은 그분의 속내를 알 수가 없어.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일 테니. 그러나 그분이 허용한 일은 끔찍해. 정말 지긋지긋해!"

 

나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악을 쓰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훌륭하고, 장엄하고, 전지하고, 전능할 수도 (심지어 온전히 선할 수도) 있겠죠. 온통 탁월한 것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하는 일이 아주 지긋지긋하게 싫어요."

 

이런 문제는 사실은 증거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며, 유신론의 파기자도 아니다.

 

-[6부] 에 계속-

-[지식과 믿음], 앨빈 플랜팅가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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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주제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을런지 모르겠다.유신론과 무신론에 대한 고민은 영원히 해볼 가치가 충분하다.앨빈 플랜팅가가 이렇게 이성론자처럼 보여도 나름 신비 체험도 많이 하고, 영성을 중요시 여기는 학자라는 거...지금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와 함께 은퇴해서 조용한 여생을 누리고 계시다는데.,.....아직 살아계신가??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렇다면 악이 유신론을 반박하는 어떤 증거를 구성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증거에서 나오는 결론은 무엇인가?

 

많지 않다.

 

내가 믿기에 참이라고 합리적으로 수용되는 많은 명제는 또한 그에 반대하는 증거도 있다.

 

피터가 생후 3개월 아이라는 사실은 이 아이의 몸무게가 약 9kg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증거다. 그럼에도 피터의 몸무게가 그렇다고 믿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그리고 진실에 부합할 수도 있다.)

 

그럼 우리가 가진 모든 증거를 고려할 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을 개연성이 크다는 생각은 우리가 알거나 믿는 것의 나머지 모두인가?

 

 

반신학자가 이를 증명하려면 하나님의 존재를 지지하는 증거를 모두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존재론 논증, 우주론 논증, 목적론 논증, 그리고 다른 많은 논증 모두를 말이다.

 

반신학자가 자신이 지목한 결론에 이르려면 이 모든 논증의 상대적 장점을 살펴보고, 악에 근거한 논증에 비추어 이 모든 논증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내가 믿는 것의 나머지에 비추어 유신론이 개연성이 없을 것 같다고 가정해 보자. 아니면, 내가 믿는 것의 나머지가 유신론을 부인하는 증거를 제공하며 유신론을 지지하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에서 나오는 결론은 무엇인가?  다시 말하지만, 많지 않다.

 

내가 견지하는 (그것도 철저한 합리성으로 견지하는) 많은 참된 믿음들은 내가 믿는 것의 나머지를 고려하면 사실일 것 같지 않다.

 

내가 포커를 치고 있는데, 내가 알거나 믿는 것의 나머지에 비추어 볼 때 인사이드 스트레이트(4장의 카드가 있는데 연속적인 숫자 구성을 위해서는 숫자 하나만 빠진 상태)가 나올 개연성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방금 인사이드 스트레이트를 채웠다는 믿음에 비합리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이유는 이런 믿음이, 그 보증을 위해서, 내가 믿는 것의 나머지에 비추어 적절한 개연성이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을 위한 보증의 원천은 전혀 다른 것인데, 곧 인식이다.

 

유신론의 경우도 비슷하다.

 

여기서는 실제로 모든 것이, 내가 논증해 오고 있는 것처럼, 유신론이 보증의 다른 원천-하나님을 인식하는 것, 혹은 신의식, 혹은 신앙과 성령의 내적인 자극-을 가지고 있거나 가질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되는데, 이는 내가 믿는 다른 명제에 비추어 개연성을 갖는 것과 구분된다.

 

-[5부에 계속]-

-[지식과 믿음], 앨빈 플랜팅가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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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년간 신정론 이슈와 관련된 책은 기회가 될 때마다 찾아본다.

이를 어떻게 인지적으로, 감정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이들에게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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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혹은 35년 전까지만 해도, 악에 근거한 논증 가운데 사람들이 선호했던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논리적 비일관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논증이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라는 인격체(전능하고, 전지하며, 온전히 선한 인격체)가 존재한다고,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두 미음이 모두 참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이렇게 주장된다.)

 

여기서 주장은 하나님의 존재와 악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신론자가 둘 다 확실히 믿는 이상, 유신론 믿음은 분명히 비합리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과 악을 함께 긍정하는 것이 명백한 모순이라거나 꼭 틀렸다고 볼 필요는 없음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

 

악의 존재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며 완전히 선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광범위한 논리적인 의미에서도) 논리적으로 양립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유신론자가 곤경을 벗어나기에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지구가 평평하다는 생각, 혹은 지구가 거북이 등 위에 있고, 이 거북이는 또 다른 거북이 등 위에 있으며, 이런 식으로 거북이 밑에 거북이가 계속 있다는 생각에는 아무런 논리적 모순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런 견해는 (우리가 지금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려하면) 비합리적이다. (여러분의 장성한 자녀가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면 여러분은 괴로울 것이다.)

 

따라서 악에 근거한 논증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악의 존재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에서 이런저런 종류의 증거론적(evidential) 혹은 개연론적(probabilistic) 논증으로 돌아섰다.

 

 

여기서 주장은 기독교 믿음이 논리적으로 비일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악을 보여주는 사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강력한 증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런 증거론적 논증도 전형적으로 개연론적이다.

 

가장 단순한 사례를 보면, 이런 논증은 악을 보여 주는 사실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존재는 있음직하지 않거나 개연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오늘날 전형적인 반신학 논증은 하나님의 존재가 악의 존재와 양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이 하나님의 존재를 반대하는 강력한 증거론적 혹은 개연론적 사례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4부에 계속]-

-[지식과 믿음], 앨빈 플랜팅가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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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과 고통은 겪으면 겪을 수록, 논증의 문제를 넘어서 좀 더 내밀한 감정의 문제로 치닫는 것 같다.

신정론 이슈 참으로 지긋지긋하나 피해갈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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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근거한 강력한 반신학적 논증이라는 게 있을까?>

하지만 많은 사람은 고통과 악의 양, 다양성, 분포에 관한 지식("악이라는 사실들")이 신자에게 전혀 다른 종류의 문제를 안겨 준다고 주장해 왔다.

 

그들은 이 사실들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즉 세계를 창조하고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사랑하는, 전능하고 전지하며 온전히 선한 인격체의 존재를 부인하는 - 강력한 논증의 전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증은 멀리 고대 세계의 에피쿠로스(주전 341-27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의 논리는 회의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였던 데이비드 흄(1711~1776)이 18세기에 되풀이했다.

 

에피쿠로스의 옛 질문은 아직도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악을 막고 싶지만 막을 수 없는가? 그렇다면 그는 무능하다.

막을 수 있지만 막고 싶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적이다.

막을 수 있고 또한 막고 싶은가? 그렇다면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는 이런 논증에 관한 지식이 유신론 믿음(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파기자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라면, 당연히 기독교 믿음의 파기자이기도 하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악을 보여 주는 사실에 관한 지식이 정말 유신론과 기독교 믿음의 파기자인지 여부다. 이런 지식은 내가 계속하여 합리적으로 기독교 믿음을 견지할 수 없게 만드는 근거인가?

 

이것이 전통적인 신정론의 문제는 아님에 주의하라.

나는 "하나님의 방식을 인간에게 정당화하는" 것도, 하나님이 왜 악을 일반적으로 허용하시는지 혹은 왜 특별히 극악무도한 몇몇 형태의 악을 허용하시는지 묻는 질문에 대답을 제시하려는 것도 아니다.

 

대신에 우리의 질문은 인식론과 관련이 있다.

 

유신론과 기독교 믿음이 내가 제시한 방식으로 보증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면, 악을 보여 주는 사실에 관한 지식이 이런 믿음의 파기자를 제공하는가?

 

지식이 그런 믿음을 비합리적이거나 보증되지 않은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는가?

 

물론 대답이 꼭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고통과 악을 보여주는 사실들은 -우리가 사는 이 슬픈 세계에서는- 믿은 지 오래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나, 이 시대의 문화와 단절된 그리스도인이나, 우리의 세게에 있는 고통과 악을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나, 자신들이 알고 있는 고통과 악이 얼마나 심각한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파기자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다....제대로 고통을 당해보면 '악'은 파기자의 자리를 줄 정도로 충분히 위협적이다. 다른 파기자들도 물론 고려는 해야 함.)

 

하지만 우리의 질문은 "우리의 문화에서 지적으로 세련된.....성인"과 관련이 있다.

 

나는 우리의 세계에 존재하는 고통과 악이 엄청나며 놀라움을 알고, 악을 보여주는 사실에서 시작하는 최고의 반 유신론 논증을 잘 알고, 그러면서도 기독교 믿음이 합리적이며 보증된다고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지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성숙할 수 있을까?

 

여전히 나는 지식을 이루기에 충분한 보증을, 나를 위해서, 가질 수 있을까?

 

나는 "당연히 그렇다"가 올바른 대답이라고 논증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꼭 극소수의 예외인 사람만 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니다.

 

나는 진지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약간의 인식론만 있어도, 비록 악을 보여 주는 사실이 아무리 섬뜩할지언정 보증된 기독교 믿음에 방해가 되지 않음을 논증할 것이다.

 

-> 크게 만족스러운지는.....

 

-[3부에 계속]-

-[지식과 믿음], 앨빈 플랜팅가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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