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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유신론 철학자 중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와 함께 1차로 떠오르는 앨빈 플랜팅가.

인식론 적 측면에서,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1타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가장 까다로운 문제인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그의 답변은 그의 다른 저서에서 더 자세하게 들어볼 수 있는데 책이 절판나서 구하기가 어렵다.

 

[지식과 믿음]에서는 이해하기 쉽고, 요약된 느낌으로 간략하게 핵심만 설명해 준다.

논리적으로는 그럴싸하고, 깔끔하고 멋지지만, 감정적으로는 뭔가 응어리가 남는 논증이긴 하다. 이 책의 백미는 글 자체의 깔끔함과 논리성도 있지만 가장 뒤에 첨부되어 있는 강영안 교수님의 친절한 해설이 있다는 점이다. 그 해설을 읽고 나면 클리어하게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든, 저러든 이런 논증 자체가 가능하다는 게 신선하고 일반인들과 대화할 때 이를 납득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이와 같은 이성 논증을 중요시 여기는 성향의 사람들에겐 참으로 고마운 책이 될 것이다. 저자의 다른 저서들은 참 어렵다...다른 철학서적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악의 문제는 참 어렵다. 이것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논리가 되기는 어렵다지만, 기독교 믿음이 이야기하는 인격신 문제에서는 가장 큰 관문인 건 사실인 듯 하다.

 

앨빈 플랜팅가의 논증을 쭉 보면, 결국 참혹한 아픔 앞에서는 할 말이 없다는 게 결론이다. 의심하거나, 짜증내거나, 분노하는 감정에 잡히는 순간 우리의 신의식과 성령의 내적 자극은 약화된 증거라고 말하니.......더 이상 논증할 방법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유신론 믿음을 위협하는 가장 무시무시한 파기자 후보를 살펴보겠다.

전통적인 '악의 문제'(problem of evil)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고통과 악이 놀라울 정도로 많고 다양하다. 나는 고통(suffering)이 온갖 아픔이나 불안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아픔이나 불안은 질병이나 부상, 혹은 억압, 혹은 과로, 혹은 노령에서 오기도 하지만, 자신이나 자기 인생의 (혹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운명에 느끼는 실망, 그리고 고독, 고립, 배신, 알아주지 않는 사랑의 아픔에서 오기도 한다.

 

 

아울러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아는 것에서 오는 고통도 있다.

 

나는 악이, 근본적으로는, 자유로운 피조물(인간이든 아니든)이 잘못된 일을 행하는 것의 문제라고 생각하며, 이 잘못된 일에는 특히 우리 인간이 서로 상대를 학대하고 잔인하게 대하는 것도 포함된다.

 

종종 아픔과 고통은 악에서 생겨나는데, 20세기를 생각하면 떠올리게 되는 몇몇 사건이 그런 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동유럽에서 70년 동안 이어지며 수백만의 희생자를 낳은 무시무시한 마르크스주의 실험, 폴 포트와 그 추종자들이 저지른 극악한 소행, 보스니아와 아프리카를 덮친 대학살처럼 말이다.

 

물론 많은 고통과 악은 평범한 일상이며, 이런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을 실제로 좌절시켜 왔다.

 

이 책에서 악의 문제를 잘 다루고 있는데 국내는 절판 남.

 

기독교와 히브리 성경은 이런 좌절과 당혹감을 널리 대변하는데, 유일하게는 아니지만 그 가운데 특히 시편과 욥기가 그렇다.

 

신자가 자신의 삶이나 가까운 사람의 삶에서 특별히 무시무시한 고통이나 악을 충격적인 구체성으로 마주하면, 자신이 하나님을 상대로 책망하는 태도-불신하거나, 의심하거나, 비꼬거나, 반감을 보이는 태도-를 취하고픈 유혹에 빠진다.

 

-> 많은 고통 받는 신자들은 이 부분에서 뜨끔할 것이다.

 

이 문제는, 넓게 말하자면, 영적인 혹은 목회적인 문제다.

 

이런 문제에 사로잡힌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 또는 심지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픈 유혹을 많이 받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분개하며, 신뢰하지 못하고, 경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버지로 생각하지 못하고 멀리 있으며 자신에게 무관심한 분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2부에 계속]-

-[지식과 믿음], 앨빈 플랜팅가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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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케플러 차례였다.

 

케플러는 프라하의 황실수학자로서 선임자였던 튀코 브라헤가 직접 꼼꼼히 작성해 놓은 화성궤도 관측결과를 분석하여, 천묵학적 관측이 행성이 원운동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선험적 이론에 근거한 계산보다 증거로서 더욱 가치 있다고 과감히 밝혔다.

 

나머지는 흔히 하는 말처럼 역사가 되었다.

 

그는 행성들이 태양을 초점으로 주위를 '완전한' 타원을 이루며 움직인다는 획기적인 주장을 했는데, 이 견해는 나중에 뉴턴의 만유인력의 역제곱법칙에 의해 탁월하게 증명되었다.

 

 

뉴턴의 법칙은 이 모든 전개과정을 놀랄 만큼 간결하고 우아한 하나의 공식으로 압축해냈다.

 

케플러는 수 세기 동안 과학을 제한했던 부적절한 철학에서 과학을 놓여나게 함으로써 과학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이런 해방의 역사가 두 번 다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좀 주제넘는 일이다.

 

 

여기에 대해 앳킨스와 도킨스같은 과학자들은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 시대 이후 과학이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고 이제는 (적어도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서) 과학과 너무나 긴밀히 연결된 자연주의 철학이 부적절한 것이라는 증거가 전혀 없다고 반박할 것이다.

 

참으로, 그들이 볼 때 자연주의는 과학의 발전에 이롭기만 하고, 과학은 과거 그토록 자주 발목을 잡혔던 신화적 짐들에 방해를 받지 않고 전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과학적 방법이 최고라고 믿기 때문에 자연주의의 큰 장점이 과학을 방해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자연주의는 정의상 본질적으로 과학과 절대적으로 양립 가능한 단 하나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갈릴레오는 분명 우주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선험적으로 기술한 아리스토텔세스 철학 때문에 과학이 방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갈릴레오와 뉴턴을 포함해 당시에 과학의 눈부신 발전에 기여한 위대한 과학자들 대부분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이런 식으로 과학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 믿음이 적극적인 자극제임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그들 중 많은 이들에게는 그 믿음이 과학연구의 주된 동기가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현대 일부 작가들의 맹렬한 무신론을 보며 이렇게 묻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어째서 저들은 무신론이 지적으로 타당한 유일한 입장이라고 이토록 확신하는 것일까?' 과학의 모든 것이 무신론을 가리킨다는 것이 정말 사실일까? 과학과 무신론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한 쌍일까?'

 

저명한 영국 철학자 앤터니 플루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동안 무신론을 옹호하는 대표적 지성인이었던 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생명의 기원과 자연의 복잡성에 대한 유일하게 타당한 설명은 초지성이라고 선언했다.

 

-[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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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이 정말 사실일까?

 

모든 종교인들은 편견에 사로잡혔고 아는 것이 없다고 무시해야 할까?

따지고 보면, 그들 중 일부는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들이 아닌가.

 

그들이 정말 과학이 절대 빛을 비출 수 없는 우주의 어두운 구석을 찾아내기를 바라고 있을까?

 

이것은 과학의 초기 선구자들 대부분에 대한 공정한 묘사도, 참된 묘사도 아니다.

 

케플러처럼 그들은 다름 아닌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확신에 영감을 받아 점점 더 높은 수준의 과학에 이를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과학이 빛을 비춘 우주의 어두운 구석이야말로 신의 천재성에 대한 증거의 보고였다.

 

그럼 생물권은 어떨까?

 

생물의 정교한 복잡성은 피터 앳킨스의 든든한 동료인 리처드 도킨스가 믿는 대로, 설계된 것처럼 보일 뿐일까?

 

자연법칙의 제약 하에서 우주의 기본 물질들에 무작위로 작용하는 눈먼 자연적 과정을 통해 정말 합리성이 생길 수 있을까?

 

이성적 정신이 맹목적이고 정신없는 과정에 의해 정신없는 몸에서 "생겨났다"는 것이 심신관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런 자연주의적 이야기의 지위를 둘러싼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 여전하다.

 

그렇다면, 자연주의는 실제로 과학이 요구하는 것일까? 아니면 과학이 필요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과학에 덧붙여진 철학이라고 봐야 할까?

 

자연주의가 종교적 신앙과 비슷한 신앙의 표현에 더 가깝지 않느냐고 감히 물을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때로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보면 자연주의가 신앙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전 시대의 종교적 이단자들이 순교를 당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 보조금 지원이 중단되는 형태로 일종의 순교를 당할 수 있는 까닭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성공하려면 올바른 질문을 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어떤 질문들은 묻는 것도 위험하고, 답변을 시도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과학의 정신에 부합하고 과학에 이롭기도 하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것 자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어 중세에는 과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어떤 측면에서 벗어난 이후에야 진정한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달 위로는 모든 것이 완전하다고 생각했고, 그가 볼 때 완전한 운동은 원운동이므로, 행성과 항성이 완전히 원을 그리며 움직인다고 가르쳤다.

 

달 아래로는 움직임이 선형적이었고 불완전했다. 이 견해는 여러 세기 동안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통해 가장자리가 울퉁불퉁한 달의 분화구를 보았다.

 

우주가 말을 걸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선험적인 완전 개념에서 연역한 일부 결론이 망가졌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운동에 집착했다.

 

"우주의 그 영역에서 완전한 질서가 유지되려면 움직이는 천체들이 원운동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원운동도 운이 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2부에 계속]-  / -[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에서 -

 

*모든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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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적 관점: 권력을 소유물로 가정. 그래서 권력을 특정 계급에 의해 획득되는 소유물로 봄.

 

푸코: 권력이 소유물이 아니라, '전략'이라고 본다.

 

[2] 전통적 관점: 권력이 일정한 위치를 갖는다(위치한정<localisation>이라는 개념으로 서술됨)는 가정은 권력이 국가권력이며 국가기구 안에 있다고 본다.

 

푸코: 국가 자체도 하나의 중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작용하는 복합적인 수준들의 결합체로 본다. // 그리고 푸코는 현대 사회를 '규율 사회'로 보는데 이 때 규율이 기구나 제도와 동일한 것은 아니며, 그것은 권력의 한 유형으로서 기구들과 제도들을 가로지르면서 그것들을 연결시키거나 작동시키는 테크놀로지이다.

 

 

[3] 전통적 관점: 국가권력이 생산양식과 하부구조에 종속된다고 주장한다.

 

[4] 전통적 관점: 권력의 본질이나 고유한 속성을 가정한다. 곧 권력이 일정한 본질을 지니며, 지배자의 속성이라고 가정한다.

 

푸코: 권력이 본질을 갖지 않으며, 조작적인(operational) 것이고, 속성이 아니라 관계라고 본다.

 

[5] 전통적 관점: 권력이 폭력이나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고 가정한다.

 

푸코: 권력이 정신을 향할 때에도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지 않으며, 육체를 노릴 때에도 반드시 폭력이나 억압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는 권력이 억압하기 전에 특정한 실재를 만들어 내고, 이데올로기화하기 전에 진리를 생산한다고 본다.

 

[6] 전통적 관점: 권력의 합법성을 가정한다. 곧 국가권력은 법에 의해 표현되며, 법은 평화 상태나 승리한 전쟁의 결과로 이해된다.

 

푸코: 법과 불법은 대립하며, 이 때 법은 불법에 대한 관리체계라고 본다. 따라서 법은 전쟁 자체이며, 그 전쟁의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By 들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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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곳 : http://www.gotoquiz.com/which_philosopher_are_you


 

 

 

 

아래는 번역


 

1.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18살 미만
18-24살
25-30살
31-40살
41-50살
51-60살
60살 초과


 

 


 

2. 성별은?
남자
여자


 

 


 

3. 만일 숲의 나무가 쓰러지고, 그곳에 아무도 없다면, 소리가 나겠습니까?
아뇨

질문이 합당치 않네요.


 

 


 

4. 과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나요?
세계에 대한 진리를 알려줍니다.
세상의 "진리"를 변화시킵니다.
아무것도 보증해주지 않습니다.
세계를 보여주고, 우리는 그것을 인지해야만 합니다.


 

 


 

5. 진리는 상대적인가요?

아뇨. 진리는 절대적입니다.
둘 중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6. 진리는 선험적인가요?
네. 진리는 경험의 세계와 나뉘어진 더 높은 층에 있습니다.
아뇨. 진리는 경험의 세계에 있습니다.(내 마음 밖에)
아뇨. 진리는 내 마음 안에 있습니다.("내 마음" 역시도 경험의 세계일 수 있습니다.)


 

 


 

7. 예술..
인간의 모방과 조화의 충동을 만족시킵니다.
진리를 표현하지 않는 한, 예술은 해롭고 망상적인 것입니다.
불멸하고 선험적인 것으로써 존재합니다.
인간의 가장 숭고한 목적입니다.
사실의 이상적인 표현입니다.


 

 


 

8. 삶은..
우리가 잘 살았다면, 예술입니다.
그건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로부터의 착각입니다.
으스스한, 삶은 광휘이다. 삶은 우리의 가장 작은 부분이, 우리 대부분이 바로 그 부분(즉, 우리의 최소한)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고 느끼게끔 만드는 것이다.삶은 새싹의 돋움이며, 음산한 시간의 소비 안에서 흐릿한 최초의 충동의 생성이다.


 

사실들의 편집물입니다.


 

 


 

9. 신은..
죽었다.
우리가 세계를 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가져야만 하는 불변의 범주이다.
진리이자 정의이다.
하나 이상의 것이다.
삶의 불합리함을 피하려 하는 시도이다.


 

 


 

10. 우리는 무엇이 되기 위해 살아야 하는가.
삶의 불합리함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사람
진리에 도달하는 사람
선, 악의 저편에 도달해야한다.
완벽한 중간자, 고결한 개인
오로지 선의지에서만 행동하는 윤리적인 인간


 

 


 

11. 수학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과학과 달리)
수학은 우리에게 뜻이 없는 진리를 제공한다.
믿음이란 거미줄(네트워크)의 한 부분
아폴론적인 꿈의 한 부분
순수하게 분석적인 것


 

 


 

12. 언어는..
지각에 관여되어 있지 않다.
지각에 관여되어 있다.
언어는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질 수 있다.

 

 

 

원글(출처와 번역) 철학포럼 주유님 : http://club.cyworld.com/club/main/club_main.asp?club_id=50332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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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수 많은 걸출한 철학자를 배출해 낸 나라이다. 실제로 독일에 가면 테오도르 호이스 다리에서부터 카를 테오도르 다리가 있는 곳까지 이어지는 철학자의 길이 있다고 한다. 이름만 들어도 남다른 위용이 느껴지는 헤겔, 야스퍼스, 하이데거 등의 철학자들은 이 길을 걸으며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자신들만의 특별한 철학을 정립하기도 했었다.

 

갑작스레 독일을 언급한 이유는, 이와 같이 인간 지성의 정점을 선점하고 있던 독일이라는 나라로부터 유토피아(Utopia)가 시작될 것이라 기대했던 계몽주의의 환상이 세계대전(The World War)을 일으킨 전범이라는 오명 앞에 사그라 들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 철학이 가야 할 길이 있을 터인데, 우리는 그 길을 논하기 위해 아주 서툴게나마 주요한 철학의 흐름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고민을 나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면상의 한계와 글쓴이의 미미한 지식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 서툰 흐름 파악조차도 범위를 한정 지어야 할 것 같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 자연 중심이었고, 중세로 넘어 오면서 중심이었다면 근대 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를 거쳐서 서서히 ’(인간)란 존재를 향해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데카르트는 프랑스인으로서 지성을 중요시한 합리론자였다면, 동시대에 영국에선 경험을 중요시 여기는 경험론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합리론이냐 경험론이냐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시기에 칸트라는 철학자가 등장함으로써 두 관점을 통합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세계 철학사에서는 만약 칸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칸트를 창조해야만 했을 것이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칸트는 철학을 신학과 과학으로부터 독립시켰으며 독일 관념 철학의 막을 열었는데 이 시기 즈음부터 철학의 본 무대는 독일이 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데카르트로부터 출발했던 에 대한 논의는 계몽주의 철학의 조류를 따라 나란 존재가 지닌 이성과 인식에 초점을 맞추면서 발전해 왔다면 몇 차례의 혁명과 전쟁을 치르고 난 19~20세기에 와서는 이성을 지닌 나란 존재의 본질을 찾기 보다는 현실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나의 존재인 실존’(Existence)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유신론적 철학은 키에르케고르 등을 위시하여, 지금까지도 다양한 갈래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현대 사회에선 엘빈 플란팅가와 같은 유신론적 분석 철학자가 등장하여서 탄탄한 논리로 유신론의 합리성을 변증해 주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무신론적 철학이 지성의 영역에서 이 정도의 지위를 누리게 된 시기도 19~20세기였다고 볼 수 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기반 속에서 사유하던 방식이 의심되기 시작하고 모더니즘을 거쳐 포스트 모더니즘을 향해 세계관이 변화되어 가면서 실존 철학’, ‘분석 철학’, ‘해체주의까지 무신론적 철학은 거침 없는 항해를 이어 나간다.

 

다시 철학의 역사로 돌아가 보자.

 

독일이 낳은 위대한 철학자인 헤겔은 변증법을 통해 인간이 무지한 정신에서 절대정신으로 발전해 간다고 주장했으며, 이와 같은 변증법을 이어받은 칼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사관을 주창하여 역사 속에서 실질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친다.

 

헤겔은 이와 같은 논리를 인간에게만 한정 짓지 않고, 역사가 발전해 나가는 과정도 절대 속박에서 절대 자유로의 변천이라고 주장한다.

 

재미있는 것은 헤겔 자신의 변증법이 정,,합에 기초하여 이뤄졌듯이 철학의 도 헤겔이라는 걸출한 철학자의 주장()에 대한 반작용으로 쇼펜하우어의 비합리주의 철학’()이 등장했다는 것이다.(‘에 도달한 철학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엔 절대 정신을 주장하는 헤겔의 모습 속에서 합리론자의 망령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모든 삶에 회의를 느끼며 염세적인 느낌으로 살기를 촉구하는 반작용을 일으켜 본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내리고 금욕을 체득하라고 독려 하기도 하며 나름의 입지를 굳히던 쇼펜하우어는 니체, 프로이트, 바그너 등에게도 영향을 줌으로써 철학사 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음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이 철학의 은 다른 학문들과도 적절한 통섭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비단 쇼펜하우어 뿐만 아니라 헤겔의 철학이 칼 마르크스를 통해 사회 이념과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좌시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결국 독일을 최고의 지성 국가로 등극하게 해준 칸트의 관념 철학이 쇼펜하우어라는 인물의 반작용으로 인해 비판 받기 시작하면서 철학의 은 새로운 응용과 조합을 이뤄 나가기 시작한다.

 

철학이 발전되어온 길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무리 간략하게 추려 내고, 요약해서 설명하려 해도 그 복잡성(Complexity) 자체가 철학의 진가이자 매력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실존주의 철학의 시조 격인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의 절대 정신개념을 비판했었는데 그는 대표적인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가다.

 

즉 그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를 실존이라고 지칭했는데 인간의 실존 방법 3단계인 1.미적 실존 2.윤리적 실존 3.종교적 실존 속에서 인간은 종교적 실존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미적 실존에서 윤리적 실존으로 넘어갈 때 필연적으로 나란 실존은 윤리의 벽 앞에서 쾌락과 본성을 죽여야 하기에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되고, 우리는 윤리적 실존에서 종교적 실존으로 넘어가기 위해 을 바라보게 된다고 이야기 한다.  

 

이와 같이 종교와 연계되어 새로운 깊이를 더해 가던 실존철학은 기존의 사변적이고, 이성적인 논의였던 삶이란, 인간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 일단 그런 삶과 인간의 개념을 정의 내리는데 에너지를 소모하기 보다는 이미 이곳에 실존하고, 이미 이곳에 놓여 있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종교적 입장을 떠나서라도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무신론적 실존철학의 대표주자인 니체와 사르트르라는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계몽주의와 기존의 모더니즘 적 문명 전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니체의 철학 사상은 또 하나의 큰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고,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으로 정의했던 사르트르의 영향력은 실제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철학의 모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신 없이 철학사를 요약하며 달려왔지만 실상 너무도 놓친 부분이 많음을 부정할 수 없다.

 

대표적인 철학자 몇 명만 더 살펴 보고, 우리는 지금 현재우리의 과 근접해 있는 철학의 을 조명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이후에야 비로소 철학이 장차 나아갈 에 대한 고민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철학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의 별명은 존재의 철학자이다.

 

그에게 있어서 란 존재는 현존재로서 세계와 유리되지 않은 세계 내 존재이다.

 

단순히 합리주의 철학이 행했던 것처럼 세계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를 들여다 보는 삶을 원치 않았던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어떤 사태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러한 사태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실존 전체를 미래를 향해 내던져서(‘기투된 존재로 표현함) 실존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존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이해란 사태의 피상에만 머무는 것이므로 진정으로 그 사태를 이해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 철학에서는 존재자에 대한 존재 구조의 분석에 집중했었다면, 후기 철학에서는 존재 전체인 세계를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역사성으로 파악했다. 그러므로 현존재가 처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제 세계는 인간의 실존 방식에 따라 자신을 달리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간에게 자신을 열어 보인다.

 

인간이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인간에게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살짝 나누기만 했지만, 그의 실존 철학은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다.

 

이 즈음에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의 다른 흐름을 만들어 내면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Existence precedes essence)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는데, 우리가 어떤 존재이든 지금 이 자리에 실존하고 있는 게 더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리고 실존주의를 휴머니즘과 연계시키며 나란 존재를 사회적 존재로 바라보며 사회에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함으로써 나란 존재의 참 가치를 발견해 나가는 시도를 해 보인다. 현실에 참여하는 삶을 지향했던 그의 철학은 학생 혁명에 불을 당겨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철학의 을 간략히 나누고 내년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일상 언어, 학문 용어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중요시하는 철학을 우리는 분석 철학이라고 부르는데 기존의 관념 철학은 현실과 동 떨어진 막역한 것에 대한 논의만 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태동한 철학이 바로 분석 철학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버드런트 러셀을 들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분석 철학의 조류는 19세기에는 의식을 분석하는데 더 집중했다면, 20세기에는 언어를 분석하는 길이 더 득세했다고 보면 된다.

 

 

 

존재에 집중했던 하이데거완 달리 의미에 더 중요성을 두고 고민했던 언어 분석 철학의 대가 비트겐슈타인도 놓칠 수 없는 철학사의 중요 인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사유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한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 그 구조를 알면 그의 내면 세계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위 언어 게임’(Language Game)이라는 틀 안에서 논의가 가능한 영역만을 철학적으로 분석했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개입하려 들지 않았다.

 

자신이 분석할 수 없고, 자신이 설명해 낼 수 없다고 해서 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들과는 달리 그는 표현할 수 없는 세계의 무궁무진함과 귀중함을 자주 강조했다는 점이 인상 깊다.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엔 수 많은 철학자들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변증법이라느니, ‘실존재라느니, ‘초인이라느니 다양한 가짜 언어로 규명하려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의 업적은 철학의 주제를 존재사유로부터 언어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그가 쓴 책은 <논고>로서 논리학을 기초로 사용하는 철학에 관한 논고라는 뜻인데, 2만자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이었지만, 이 책 한 권에 대한 연구 논문이 수 천편에 달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 만큼 비트겐슈타인은 천재적인 철학자였나 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철학의 은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다. 2차 세계 대전 직후까지는 실존주의가 철학의 중심에 있었다면 프랑스 등의 서구 철학은 1960년대 이후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라는 급격한 물살을 타게 된다.

 

먼저 구조주의는 사회나 현상은 각각 다른 모습, 특성을 지녀도 그 안의 공통적인 몇 가지 일반 법칙으로 참된 결론이 도출된다는 사조로서 인간의 행동이 구조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는 관점이다.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던 데카르트의 계몽주의 철학이나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강조한 사르트르의 실존적 철학에도 반기를 드는 철학 사조다.

 

요즘 가장 주류를 이룬다는 해체주의의 대표적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는 절대로 선 언어적, 선 개념적인 실재와 만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현존(present)은 실제로 부재(absent)이며, 소여는 한갓 인간 담론의 구성물일 뿐이다. 그가 바라보기에 서양 철학의 지배적인 전통은 실재론이다. 약간의 부연 설명을 하자면 실재론자들은 소박한 실재론자(naïve realist), 관점주의적 실재론자(perspectival realist)로 나뉠 수 있는데 전자는 심판이 야구 경기 후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하기를 볼이면 볼, 스트라이크면 스트라이크야. 나는 있는 그대로 정확히 선언한다네.” 라고 말할 것이고 후자는 볼이면 볼, 스트라이크면 스트라이크지. 그런데 나는 내가 보는 대로 선언한다네.” 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재론을 쇠퇴시키고 포스트 모던적인 관점에선 심판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볼이면 볼, 스트라이크면 스트라이크지. 하지만 내가 선언하기 전까지 그것은 볼도, 스트라이크도 아니야.” 라고 말이다. 즉 데리다가 바라보기에 서양 철학은 실재론이 주를 이뤘기에 진리의 개념 체계 내에 현존한다고 전제된 것은 언어와 사고보다 앞서 존재하는 참된 소여를 통해 파악이 가능하며 언어와 사고를 통해서도 적합하게 파악이 가능하다고 보는 게 서양 철학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서구 모더니티 사상은 실재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이론은 실재와 실재에 대한 기술’(description) 사이에 본질적 유사성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해체주의자들은 이런 전제를 비판한 것이다. 사고방식의 획일화도 그 본성상 폭력적이라고 규정하는 해체주의식 철학 앞에서 우리는 어떤 논의를 더 전개할 수 있을까?

 

헤겔, 하이데거, 칸트의 철학을 해체시켜 나가며 소위 로고스 중심주의를 격파해 나가는 그의 대담함은 언어를 가지고 마치 유희를 즐기듯이 꼬투리를 잡고, 애매모호함과 어중간한 표현들로 자신의 사상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당혹시킨다. 아마 지금 쓰고 있는 글 자체도 그 앞에선 조목조목 해체될 것이기에 이 정도 선에서 논의를 마쳐야 할 것 같다.

 

해체주의 철학 그 이후,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 속에서 모든 것이 상대화 되어 가고 있고 모든 기준이 부정되고 있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철학이 나아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다음 번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최신 철학을 좀 더 심도 있게 들여다 보며, 그러한 철학의 강점과 한계점에 대해 논의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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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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