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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쩌면 여기서는 그것만이 현실적인 반응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이런 식으로 반응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합리적인 반응이 있지 않을까?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어떤 상황에서는 고통과 악이 실제로 이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무너뜨리는 파기자 역할을 할 수 없지 않을까?
인간이 타인에게 저지르는 잔학 행위 목록은 끔찍하고 섬뜩하다.
그뿐 아니라 그 목록이 아주 길고 자꾸 반복되다 보니 결국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럼에도 가끔은 새로운 깊이에 다다른다.
보스니아의 한 젊은 무슬림 엄마는 남편과 아버지가 지켜보는 앞에서 거듭 강간을 당했다. 이 엄마의 아기는 바닥에서 엄마 옆에 누워 비명을 질렀다. 이 엄마에게 잔학 행위를 저지르던 사람들이 마침내 이 여인에게서 떨어지자, 엄마는 아이를 보살피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강간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재빨리 아이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엄마 무릎에 내던졌다.

이런 일은 끔찍함 그 자체다. 생각만 해도 고통스럽고, 그대로 마음에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럽다. 이런 일을 이처럼 차가운 철학 토론의 소재로 끌어들인 것 자체가 비참하며 인정이 없는 짓처럼 보일 수 있겠다.
-> (이런 표현들 중요하다. 사실 이게 이성 논증의 극한이지 않나 싶다.. 이성의 극한이 가장 감정적인 문제로 귀결된다라....신정론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저자를 아시면 제보 좀 부탁드립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해 보자.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이렇게 끔찍한 악을 마주했을 때 전능하고 전지하며 온전히 선한 인격체가 있어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감독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어쩌면 완전한 인격체라면 이런 일을 허용할 수 없다고 증명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개연성이나 증거에 입각하여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훌륭하게 증명하는 논증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나님의 명성에 걸맞게 사는 존재라면 이와 같은 일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누가 봐도 명백한 일 아닌가?
그렇다면 설령 악에 근거한 좋은 논증이 없다 해도,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가 여기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이와 같은 것이 악에 근거한 반유신론 논증 가운데 가장 강력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이 주장은 우리가 사는 이 음침하고 불행한 세상이 펼쳐 보이는 악의 무시무시한 공포를 제대로 지각하고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같은 존재가 그런 일을 허용하리라고 주장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단박에 알린다.

이는 일종의 역 신의식이다. 어쩌면 악에 근거한 훌륭한 논증은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논증도 필요하지 않다.
이런 종류의 호소를 전개할 때는 논증을 자세히 말하는 방법이 아니라, 대화 상대방을 세상의 고통과 악이 지닌 처절한 공포가 그야말로 진저리를 치게 분명히 나타나는 상황에 두는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실제로 반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어떤 논증을 제시하는 것은 역효과를 낳는다.
그런 논증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고, 그의 눈이 역겨운 고통을 외면하게 하며, 가능 세계와 개연성 있는 기능, 그리고 다른 불가사의를 둘러싼 무미건조한 토론으로 도피하게 한다.
그런 논증은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파기자인 상황에서 주의를 돌리게 한다.
-[7부]에 계속-
-[지식과 믿음], 앨빈 플랜팅가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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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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