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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단지 증후군적 사고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이 아니다.

 

예를 들어 긍정심리학은 공동체와 개인이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강점과 미덕을 연구함으로써 우리가 가지고 있는 초점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그렇게 해서 긍정 심리학은 이 책에서 우리가 발전시키고 옹호하는 접근에 많은 방법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리 바로 눈앞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여러 형태의 괴로움을 만들어 내고 있는 핵심적 차원의 과정들을 긍정심리학이 탐색할 때까지는 긍정심리학은 현행 시스템에 내재되어 있는 심각한 어려움들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

 

 

즉, 우리는 설명을 필요로 하고 있다.

 

건강한 것이 정상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임상제도(clinical establishment)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신건강의 영역에 접근해 오고 있는 중이고, 넓게 말하면 인간 괴로움의 영역에 접근해 오고 있는 중이다.

 

그 결과로써 건강한 것이 정상이라는 가정은 마음의 고통 상태를 장애나 질병 신호로 보고 있다.

 

이러한 책략이 굉장히 효과적인 형태의 심리치료로 이어졌다면 우리가 반대할 이유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 괴로움은 어디에나 다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괴로움을 사제나 목사 혹은 랍비에게 맡겨야만 한다.

 

우리 임무는 임상적 증후군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바로 우리 내담자들이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그것을 아주 잘 해낸다."

 

우리는 그렇게 말을 할 수는 없다.

 

심리학 분야는 가장 흔한 '정신장애'에 대해 꽤 효과적인 치료들을 개발하고는 있지만 그러한 치료의 효과 크기는 중간 정도일 뿐이며, 대부분의 영역에서는 효과 크기상에서의 감지 가능한 증가가 여러 해 동안 전혀 없었다.

 

 

증거기반 치료 혁명은 이러한 문제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드러내 왔지만, 과학적 공동체 안에는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지원 기금이 대학이나 연구소로 계속해서 쇄도하는 한 사람들은 불만을 갖지 않는다.

 

과학 저널들이 질병 모형에만 매진하는 한 그 누구도 보다 더 현명해지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험 많은 임상가들은 현재의 진단 체계에 대한 깊은 회의를 쉽사리 표현할 것이며, 정신장애에 기반한 치료를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어떤 점에서는 부족하다는 점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다고 선뜻 말할 것이다.

 

실무자들은 미리 약속되었던 것과 실제로 전달된 것 사이의 간극을 대개는 인지하고 있다.

 

학계는 정신건강 문제들의 '형태'에만 열중할 뿐, 그 문제들이 내담자의 삶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충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라고 임상가들은 종종 말한다.

 

다른 비판자들은 다음의 불일치, 즉 특정 장애에 대한 임상치료와 그 증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맥락적 영향 간의 외견상 드러나 있는 불일치를 지적한다.

 

심지어는 정신의학적 질병분류학의 창시자들조차도 증후군적 접근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증후군적 접근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때때로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의 출처를 생략하고 나서 청중에게 출처를 맞혀 보라고 한다.

 

-[3부]에 계속-

-[수용과 참여의 심리치료]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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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괴로움에 대해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접근은 지형학적인 특징들(EX) 징후, 증상, 증후)을 살펴보다 보면 정말로 기능적인 의미의 질병체에 도달하게 된다는 생각에 기초해 있다.

질병에 대한 기능적 접근은 그러한 지형학적인 특징들이 나타나게 된 이유와 그 특징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모두 포함한다. 심리치료 분야는 그러한 가정과 그 가정에서 나온 분석적 책략들에 의해서 완전히 지배되어 왔다.

그런 가정과 책략들의 채택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심리학 연구자나 정신의학적 연구자는 거의 없다. 어떻든 간에 정신의학적 질병이란 것은 실제로는 어떤 실재라기 보다는 신화에 가깝다.

심리학과 정신의학에서 비정상 모형(abnormality model)에 아낌없이 준 터무니 없는 관심을 생각한다면 정신건강 증후군들을 정당한 질병군으로 확립하는 데 있어서 사실상 전혀 진척이 없었다는 점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전신 마비의 진부하고 오래된 예를 이용해서 설명한 후에는 내놓고 말할 만한 그 어떤 다른 성공 사례도 사실상 없다.

불행히도 성공 사례가 없다고 해서 그러한 심리적 증후군들이 곧 개별적인 질병군을 대표하게 될 것이라고 과학자들이 주장하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다.

 

리는 지금 막 고비를 넘겼고, 정신의학적 장애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 신경전달물질 혹은 신경조절물질을 발견하기 직전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이젠 수십 년이 지났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런 접근에 회의적이었던 사람들은 그 회의론의 정당성에 대해서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질병 목록을 빠르게 살펴보면 그 이야기가 얼마나 신기루 같은 이야기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가장 흔한 정신건강 증후군 중 그 어느 것도 아직까지 질병 상태로 정당하게 간주될 만한 가장 기본적인 기준조차 충족시키지 못했다.

 

심지어는 조현병이나 양극성 장애처럼 눈에 확 띄는 장애조차도 가장 기본적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지금까지 나온 DSM의 모든 새로운 개정판은 '새로운' 정신 상태의 조건들, 하위 조건들, 병리의 차원들을 넘치게 포함해 왔다. DSM-5의 초안은 그러한 확장적 경향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인류의 점점 더 많은 수는 주요한 정신의학적 질병분류학의 범위 아래에 계속 있게 될 것이다.

 

진단적인 확장주의는 그것이 만일 우리의 정신건강 체계가 가지고 있는 전반적 효과성을 증가시킨다면 수용할 만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진단적 확장주의는 그러지를 못했다. 대신에 우리는 바벨탑과 직면하게 되었다. 전반적인 기획 실패들을 위장하기 위해서 엉성하게 기능하는 질병분류학에다가 새로운 차원, 개념, 증상 목록들을 그 탑 안에서 덧붙였다.

현재 사용하는 진단 체계에는 너무나 많은 결함이 있어서 여기서는 일부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장애 간의 '동반이환' 비율은 어마하게 높아서 전체 체계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정의적 통합성을 위협할 정도이다.

 

예를 들어 주요우울장애는 80%에 달하는 동반이환 비율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놀랄 만하게 높은 비율은 진정한 동반이환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잘못된 진단 체계의 상징이다.

 

더구나 그러한 범주들이 가지고 있는 치료의 유용성은 현저하게 낮다.

동일한 치료가 여러 증후군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찰 결과는 진단이 가지고 있는 주요한 기능적 목적, 즉 치료 결정의 효과성을 증가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훼손시킨다.

 

그 체계는 중요한 형태의 심리적 괴로움(관계적 문제, 실존적 위기, 행동적 중독 등)을 묵살하고 있으며 비탄, 두려움, 슬픔 등과 같은 정상적인 삶의 과정조차도 종종 병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같다는 데에 심지어는 그 체계의 옹호자들조차도 동의한다.

사전 지불 정신건강 관리 환경에서 (보험 적용을 받기 위한 '진단'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상황), 심리학적 처치를 받고 있는 내담자의 대다수는 진단이 가능한 조건들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 내담자가 '광장공포증을 가진 공황장애' 혹은 '강박장애'라는 진단명을 받게 된다면 치료는 직장, 아이들, 대인관계, 성적 정체성, 직업상의 경력, 분노, 슬픔, 음주 문제 혹은 삶의 의미와 같은 다른 문제들을 여전히 따로 다루어야만 할 것이다.

 

 

슬프게도 인간의 괴로움을 보는 DSM의 시각이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정상적인 어려움들을 점점 더 많이 병리화함에 따라서 행동적 및 사회적 기능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괴로움을 다루는 비서구적 문화의 능력은 향상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빠졌다.

증후에 초점을 두는 접근은 우리로 하여금 증상 감소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심리적 건강의 기능적 및 긍정적 표지들을 경시하게 만들었다.

심리치료의 효과가 기능적 지위와 삶의 질에 대해 일반화되는 정도는 작을 때가 많으며, 증상의 심각성을 측정하는 척도에서만 최대의 효과가 관찰되는 경향이 있다.

증상의 빈도와 심각성이 감소되는 정도는 사회적 기능이나 삶의 질에 대한 광범위한 척도들에서는 중간 정도만의 향상을 보이고 있다.

 

아직까지는 정신병리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거의 모든 증후군 범주의 거의 모든 특징을 알게끔 의무적으로 훈련받는다.

임상심리학과 정신의학에 관한 연구 저널들은 거의 대부분 증후군에 대한 연구만을 포함하고 있다.

 

정신건강과학에 투자를 하는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그러한 증후군들에 대한 연구에 대해서만 지원을 한다.

-[수용과 참여의 심리치료]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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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유명한 찬송가는 소시오패스 노예상이 쓴 곡이다.

존 뉴튼은 수많은 노예와 가족들을 고문하고 그들의 삶을 빼앗고 죽였다.

 

물론 표면적으로 존 뉴튼은 선장이자 성직자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의 '비참함'을 보게 되었다. 노예무역을 그만둔 지 30여 년이 흐른 뒤 그는 그 악습을 비판하고 천천히 보호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예로, 찰스 콜슨의 변화는 노년의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출세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재소자들을 옹호하는 사역자가 되었다.

 

이 둘의 변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통 요인은 무엇인가?

 

그들은 모두 하나님과 직접 만난 경험이 있었다.

 

기꺼이 원수를 사랑하려는 하나님의 백성(God's people)과 의미 있는 관계를 나누었다.

 

인격적 약점을 지닌 사람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 시작하면 그들 안에 놀라울 정도로 헤세드 사랑이 성장한다.

 

한때 악하게 사용되던 약점이었지만 이제는 사랑을 자라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은 자기를 합리화하지 않고 이전의 생활 방식이 수치스러웠음을 인정하며, 새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생활 방식의 일원이 된다.

 

 

인격적인 변화를 지속하는 일은, 단순한 변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존엄성을 지키는지 이해하면, 누구나 겪는 일상의 문제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법을 알 수 있다.

 

가령, 원수를 사랑한 순교자의 가족에게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짜증스러운 교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상처를 입으면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들을 '원수'처럼 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무관심하기 쉽다. 자신을 추적해 살해하려던 가해자를 사랑으로 품은 그리스도인을 보면 변화를 지속하는 방법에 관한 통찰을 얻게 된다. 

 

변화가 일어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에 효과가 없는 이유를 알게 된다.

 

내가 상담 전문직에 입문할 당시, 소속 교구민을 희롱한 성직자들의 추악한 실상을 자각하자는 문화적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교회의 초기 대응은 그런 성직자들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전문 상담을 받게 한 후 새 교구로 전보 발령을 내는 식이었다. 그 결과, 대부분 '범죄 재발'이 일어났다. 확실히 내가 경험한 사례는 모두 그러했다.

 

서구식 해결 방식은 성범죄좌, 아동 성애자, 나르시시스트, 소시오패스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교회는 정기적으로 신원을 조회하여 자원봉사자 중에서 범죄자를 걸러낸다.

 

하지만 그 범죄자의 변화에 대해서 교회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교회의 역사는 인생의 변화를 체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우리는 나르시시즘과 인격 장애에 대한 해결책이 서구의 문화와 미국적 가치 체계에서는 무시당하고 심지어 악마화되는 뇌의 메커니즘을 활용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르시시즘, 그 판도라 상자를 열다] 짐 와일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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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가 대거 개봉하면서 상영 횟수가 현저히 줄어 버린 영화다.

그래도, 감독이 [작은 아씨들] 의 그레타 거윅이고, 좋아하는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기에 주저없이 영화 관람을 추진했다. 

 

어린 시절, 여자 아이들의 장난감 양대 산맥 '미미', '쥬쥬' 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외국에선 '바비 인형'이 최고였나 보다.

영화가 '바비 인행' '바비랜드'를 활용해서 페미니즘적인 목소리를 냈다는 점은 창의성 측면에서 일단 기본 점수를 줘야 할 것 같다.

마고 로비도 바비 인형과 싱크로율이 놀랍고, 라이언 고슬링도 켄 이라는 남자 인형에 딱 맞는 느낌을 준다.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영상미 좋고, 음악도 좋은 작품에서 열연을 하니 영화관에서 관람을 하는 만족감은 상당했다.

여성 감독인 거윅이 이전에 [작은 아씨들]에서도 페미니즘 이야기를 제법 나눴던 걸로 기억한다. 원작이 주는 깊이와 완성도가 있다 보니 일단 기본적으로 + 가산점이 붙는 좋은 작품이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좀 더 노골적이고, 직설적이고, 적나라하게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중후반에 바비 인형을 좋아하던 엄마의 입을 통해서 소리치듯이 '여성이 받는 억압과 차별, 부당함'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연출 자체가 세련되거나, 영리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너무 노골적이고, 불편할 정도로 이야기를 나열하긴 하는데 아마 관련 경험이 있는 여성들은 가장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대목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서는 바비랜드라는 인형 세상 (이 곳에서는 바비라는 여자 인형이 모든 세상의 중심이다. 대통령도, 의사도, 판사도 다 여자들이 차지하고 있고 남자 인형들은 여자 인형을 빛내주는 들러리일 뿐이다.)과 현실 세상 (이 감독이 그려내는 현실 세상은 인형 세상과는 정 반대의 모습인 듯 하다.

 

말로 상징되는 마초적이고,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남성들이 임원을 독차지하고 있고, 여성들은 남성들을 빛내주는 소모품인 것처럼 묘사된다.)을 비교/대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하며 살던 바비 인형(마고 로비)이 '죽음'에 대한 실존적 생각을 하게 되고, '불안'을 느끼게 되고, 뒷꿈치가 발에 닿게 되고, 셀룰라이트가 생기면서 인형 세상을 떠나 인간 세상에 와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간 세상에 놀러온 바비 인형은 현실 세상에서는 사랑받지 못하고 당당하지 못한 자신의 이미지에 충격을 받게 되고, 남자 인형인 켄은 자신이 속해 있던 인형 세상에서와는 달리 현실 세상에서는 남성들이 세상을 주도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전율을 하게 된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시 인형 세상에 돌아온 남자 인형 켄이 바비랜드 (인형 세상)을 가부장적 느낌으로 바꿔 버리고, 그런 세상에 대한 면역력이 없고, 취약했던 바비 인형(여자)들은 전부 남자에게 종속되고, 사랑받는 삶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결국 뒤틀려 버린 바비 랜드를 다시 원래대로 회복하기 위해 바비 인형(마고 로비)과 일부 여성 인간들이 힘을 합치게 되고 남성들이 지닌 허영심, 질투심, 경쟁 의식 등을 이용해서 자멸을 유도하는 전략을 세운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노골적이고, 편파적이고,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 모습으로 여성들에게 힘을 실어 주고, 남/녀 대립 구도를 첨예화 시켜 나간다.

하지만 결론부에 가서는 결국 여자는 남자에 종속되지 않고, 남자도 여자에 종속될 필요 없이 '나는 나로서' 살아가면 된다고 이야기 한다.

 

나름대로 남/녀 균형을 맞춰 주려는 시도들이 자잘하게 들어가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제시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마지막에 남/녀 공존과 화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나서 남자 인형(켄)이 "법관 자리 하나 달라!" 라고 할 때, 바비 인형(여자)은 "대법관 자리는 못 주고, 하급 판사 자리는 줄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결국, 이 바비랜드에서 평화와 공존은 주창되었으나, 이에 대비되는 현실 세계에서처럼 아직 완전한 평등은 이뤄지지 않았으며 현실 세상에서는 '여성'들이 아직 높은 요직을 제대로 가지 못했다는 걸 암시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늘 고민이 되지만, 남/녀의 평등이 정말 모든 것을 equal 하게 만드는 것이 맞는 걸까?

가령, 바비랜드에서 보여준 남성들의 모습은 그저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이고, 본능에만 충실한 속된 말로 물소 게이와 같았다.

 

그에 반작용(안티 테제)로 등장한 여성들의 모습은, 남성들을 자신들이 지닌 성적 매력으로 홀려 놓고,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여우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극단적인 이미지의 남/녀를 상정해 놓다 보니, 메시지의 전달력은 선명해 지고, 파워풀하지만 이런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도 혐오하게 되고, 이런 여성들이 지배하는 사회도 전혀 나을 것 같지가 않다.

남성 중심 사회가 역사적으로 오래 지속되어 왔으며 진화론적으로 힘이 있는 생명체가 힘이 없는 생명체를 힘으로 누르는 야만의 시대가 길었다 보니 여성들이 느끼는 억압은 클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이를 영화로 표현하려면 반대 급부인 여성들을 좀 더 편파적으로 세워주는 방식으로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들이 있는 것 같다.

여성의 인권이 올라가야 한다는 주장은 늘 동의하지만 이 주장에 이르는 과정이나 방식에 있어서는 늘 고민이 된다. 결국 남/녀라는 성별을 기준으로 세상을 조망하다 보니 극단적인 시나리오가 전개되고, 급히 절충하는 듯 마무리는 했지만 뭔가 영화에서 일관되게 보여주던 극단적인 전개와 마지막 결론이 부조화스럽게 느껴지긴 한다.

 

 결국 우리는 의미와 목적 없이 그저 이 땅에 기투된 존재라는 실존주의적 사고로 세상을 조망하던 감독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신'을 끌어 들이는 방식을 택한다.

바비 인형을 만든 주체 (인형들에겐 '신'이다.)가 등장하면서 이들의 헛헛하고, 공허한 결론에 생명을 불어 넣어 주려 한다.

 

그러나, 바비 인형(마고 로비)은 '자신이 인간이 되고 될까요?' 라고 허락을 구하자, 인형을 만든 주체(신)은, 그건 본인의 의지적 선택, 자유로운 결정이라고 이야기 한다.

결국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유신론적, 인격신은 아니고 이신론적인, 인간의 자유의지가 한껏 강조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절충한다. 마지막에 인간이 된 바비 인형(마고로비)는 부인과 선생님을 만난다 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는 무엇을 암시하는 걸까?

자신이 주체적으로 사랑할 남자를 선택하여 아이를 가졌다는 점?

본인의 삶에 '의미'를 찾기 위해 엄마가 되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했다는 점?

여러가지 열린 결말로 해석이 될 것 같다.

여성으로 태어나, 남성들은 할 수 없는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며 그러다 보니 아이 양육이라는 거대한 짐이 그들의 정체성, 주체성에 '고민거리'를 던져준다는 시사점.

인간으로 살아간다면 필연적으로 고민해 볼 수 밖에 없는 내용들이다.

이 저자의 시도는 늘 도전적이고, 참신하고,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가 개별자로서만 존재하는 세상. 서로에게 영향을 주거나, 서로에게 종속되는 게 잘못되었다는 삶. 이 가치관에 있어서는 토론의 여지가 있을 것 같다.

모든 학문들도 서로간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새로운 철학과 지식이 발전적으로 창발된다는 들뢰즈의 리좀형 사고 방식은 이럴 때 필요한 개념이 아닌가 싶다.

 

이를 인간 사회에 적용해 본다면 모든 인간들은 개별자로서도 살아가야 하지만, 동시에 서로간에 상호작용으로 존재가 확립되는 부분도 분명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도 타인의 시선에 의해 즉자와 대자 등 썰을 풀었던 기억이 난다.

 

양자역학에서도 관측이라는 행위 자체가 '변화'를 일으킨다는 게 과학적 사실로 밝혀지지 않았던가.

결국 미세한 입자부터 시작해서, 입자들의 합(+영혼?) 인 거시적인 인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존재를 확립해 나간다.

이런 섬세한 부분들까지도 남/녀 문제를 다룰 때 더욱 고민을 했었더라면 굉장한 명작이 나오지 않았을까?

마지막에 부인과 선생님을 찾는 인간이 된 바비 인형(마고로)의 모습에서 그런 작은 희망을 발견하긴 한다.

 

하지만, 영화 전반에 걸쳐 연출되고, 보여진 일련의 모습들은 '개별자'에만 집중하고, 이분법에 머무르며 (변증법적인 제 3의 결론 도출이 필요해 보이는데 남,녀로 양분되어 있음),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세상을 해석하다 답이 안 나오니 갑자기 신으로 도약을 한다. 그리고 그 신은 있으나, 마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이 아니다 보니,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줄 만한 당위성도 없다.)

다소 철학적으로 빠져 버렸지만 영상미와 배우들의 연기, 현란한 음악 만으로도 수작의 반열에 올려둘만한 좋은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깊은 생각거리를 던져 줬다는 점에서 근래에 본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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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다카시 책은 정말 중요하다. 히키 코모리, 회피성 인격장애, 인간 알레르기 분야라든지, 경계성 인격장애 분야에서는 이 만한 저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앞으로 현대 사회에서 더욱 이 저자의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리라 예상해 본다.

 

한 분야에서 깊은 깨달음과 지식을 연마한 자들은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이론을 만들고 싶어지는데 가령 우주론에서도 '모든 것에 대한 이론' 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과 유사하다.

 

다카시도 언컨텍트 시대에 인간 진화심리학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인간 종인 '디스커넥트 인간형'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대담한 미래를 그려 나간다. 다카시 책을 보고 비판적인 느낌이 든 경우는 별로 없었다. 워낙 탁월하고, 지식의 깊이, 경험의 폭이 넓은 정신과 의사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배우고, 수용해야 할 내용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 책은 도발적인 시도, 참신한 시도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우며 일부 소름 돋을 정도로 생각해 볼 만한 시사점을 주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봐야 할 책이었다.

 

일단, '디스커넥트 인간형'이라는 분류가 꼭 필요한가가 의문이다.

 

정의 자체가 모호하다. 약간은 자폐증과 같기도 하고, 아스퍼거 증후군과 유사하기도 하며, 회피성 애착을 지닌 사람, 히키 코모리, 비범한 천재, 조현성 인격장애 등 다양한 정신병리나 인격 구조가 뒤섞인 느낌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니체라든지, 유발 하라리 등도 디스커넥트 인간 유형이라고 하는데 글쎄..... 본인이 뭔가 가설을 세워 놓고 거기에 진실을 끼워 맞추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애착'의 중요성을 굉장히 강조하고, '애착'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핵심 원동력임을 전제로 하는 그가 미래 시대에는 애착/관계 중심적 인간은 도태되고, 애착이 크게 필요 없는 '디스커넥트 인간 유형'이 살아남기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 근거로 진화론적 접근 방식을 취한다. 그래서 새로운 종의 출현, 대진화/소진화 까지 언급하면서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이야기하는데 "좀 많이 나가버린" 이론이 아닌가 싶다.

 

굳이 정확한 정의 자체가 어려운 신종 용어를 활용해서 세상을 설명하려 하기 보다는 기존에 존재하는 병리 개념, 성격 구조 개념을 가지고도 어느 정도 세상은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오캄의 면도날 법칙에 기반한다면 '단순할수록 진리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 고 본다면, 이런 개념은 다소 불필요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큰 틀 속에 여러 개념들을 혼합 시켜 두면, 세상을 큰 틀에서 조망하고, 설명하기 편해진다는 장점은 있다. 갈수록 타인에겐 관심이 없고, 혼자가 편하고, 성/결혼/아이에 연연하지 않고, 인간보다는 사물이나 기술에 더 친화적인 사람이 많아지는 시대.

 

이런 유전자가 더욱 자연 선택을 받게 되어 후대에 대물림 된다는 흥미로운 발상.

 

이들은 호모 사피엔스를 몰아낸 네오 사피엔스가 될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한다.

 

코로나 이후 언컨텍트 시대가 대두되고, 사람들이 IT 매체 속에서 사람들과의 교류를 더 즐기게 되고, 일본 포함 우리나라 및 다양한 나라에서 히키 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많아지는 것고 사실이다.

 

기존에 이런 해석만으로도 제법 충분하다 생각하는데 '디스커넥트 인류' 라....... 진화심리학, 진화론이라는 전제를 달고 개념을 만들면 이와 같은 결론이 도출되는 것 같다. 아마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유신론적 접근을 기저에 활용했다면 이와 같은 도출과는 제법 다른 모습으로 미래를 예견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신이 지닌 세계관이나, 경험지식 등을 많이 의존하는 것 같다.

 

'애착'을 평생 연구해 온 학자가 이젠 '애착 없는 인류'를 예견하고 있다.

 

워낙 내용이 도발적이라 비판할 여지가 많긴 하지만, 미래 시대에 정말 이런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그는 실제 존재하는 인물, 과거의 인물, 다양한 사례들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에 읽다 보면 설득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크게 설득되지 않은 책이다.

 

-[디스커넥트 인간형이 온다], 오카다 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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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5분 뚝딱 철학'에서 다루는 서양철학사를 쉽고 간결하게 요약한 책이다.

 

만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데 큰 부담이 없고, 책으로 나온 [5분 뚝딱 철학]의 요약판, 간단 버전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렇게 개괄적으로 철학을 소개하는 책들은 여러 권을 같이 읽어 보는 게 도움이 된다.

 

어려운 철학자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저자들에 따라서 강조하는 이론이나 포인트들이 제각기 다르다.

 

이 책의 장점은 많은 개괄서적에서 잘 다루지 않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부터, 현대 철학자들을 제법 다뤘다는 점이고, 읽기가 쉽고 핵심 개념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적다는 점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특정 철학자로부터 배워야 할 방대한 개념을 제대로 포괄하기는 어렵다 보니, 철학자의 특정 이론/면모만을 강조해서 소개하고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이건 책의 구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서 단점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긴 하다.

 

책의 말미에 부록으로 QR 코드를 인식하면 유투브로 바로 해당 내용을 볼 수 있도록 구성해 둔 점 등은 최신 트렌드에 맞춘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다른 2차 서적들을 하나하나 찾아 보고 그 뒤에 자신감이 붙으면 관심가는 철학자들의 1차 서적을 읽는다면 순서상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청소년기에 읽었던 [소피의 세계]와 같은 책은 이런 철학을 개괄적으로 다룬 측면에서 정말 역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인이 되서 다시 한번 읽어 봐야 할 정도이다.

 

그 책에서 아쉬운 부분은 다른 훌륭한 철학자들이 많이 누락되었다는 점과 현대 철학자들이 다소 부실하다는 점인데 이런 부분들이 보완되어서 2편이 출간되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든다.

 

철학은 딱딱하고, 어려워 보이고, 현학적으로 보여도 현실 사회를 살아가는데 매우 필수적인 학문이다.

 

철학이 갖춰진 사람은 삶을 대하는 방식, 사람과 관계맺는 방식이 다르다. 그런 측면에서 어린 시절부터 이와 같은 양서로 공부를 해 나갈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귀여운 일러스트도 있지만, 각 챕터마다 짤막하게 나와 있는 5분 뚝딱 인터뷰다.

 

가령 논리 실증주의자, 분석철학자, 실존주의 철학자 등 분류에 맞춰서 몇명의 철학자를 묶어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형식인데 나름 재미도 있고, 통합적으로 학자들을 이해하고, 분류하고, 범주화 하는데 도움이 된다. 열심히 공부하자.

 

-[철학툰], 김필영 지음 /김주성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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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교회와 목사들에게서 종종 듣는 말이다. 

 

설교 본문만 뽑아놓고, 성령의 음성을 기다려 인도하심을 따라 설교하면 그만이라고.

 

설교 전체 원고를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작성하고 억양과 몸짓을 연습하는 것은 인본주의라 매도한다.

 

이에 대해 이 위대한 사람의 반박은 통쾌하기 그지없다. 

 

성령의 음성을 직접 듣고 인도받는다면, 왜 "굳이 남들에게 해설하려고 나서[는가?]"

 

이는 자기 게으름을 뻔뻔스럽게 포장하려 드는 것으로, 조에 죄를 더하고 만다.

 

기본적으로 청중이 내 말을 알아듣도록 말해야 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횡설수설을 성령의 가르침이라 호도하지 말지니.

 

아우구스티누스는 2권에서 일반 학문의 유용성을 길게 설파한다. 성경도 언어로 기록되었기에 우리식으로 말하면, '국어', '한글' 실력이 있어야 한다. 다른 종교 경전과 달리 성경 66권은 가히 도서관에 해당할 방대한 지식과 학문 분야와 관련되어 있기에 다양한 학문이 성경을 읽는 데 요긴하다.

 

역사학, 음악, 지리학, 식물학과 동물학, 천문학도 필요하고, 논리학과 수학도 쓸모가 많다.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붙는다. 바울의 말을 빌려 하나를 말하면 이렇다.

 

"설사 모든 학문이 허용되나, 모든 학문이 유익하지 않으며, 설령 모든 학문이 나름으로 일리가 있어도 모든 학문이 덕을 세우지는 못한다." (고전 10:23). 대표적인 것이 점성술과 미신 등이다.

 

다른 하나도 바울의 말을 가져와서 말해 보자. 

 

"지식이 많을수록 교만하기 십상이니, 참된 지식이라면 사랑으로 이끌고 덕을 세울 것이다." (고전 8:1)

 

또는 "교만하게 하는 지식보다는 덕을 세우는 사랑을 더 구할 것이다."

 

모든 학문의 도움을 받더라도, 그것은 성경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자는 것이지 성경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아, 책 제목에 쓰인 '교양'의 말뜻을 짚어야겠다. 모든 책은 제목만 보면 단박에 어떤 종류와 주제를 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저자와 편집자는 지나치게 명확히 밝히거나 때로는 은근한 암시로 독자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그리스도교 교양]이라고 했을 때의 라틴어는 'Doctrina'(독트리나)다. 여기서 'doctrine'(교리) 이라는 영어가 파생되었다. 한 때 '교육'이라고도 번역되었는데, 일차적인 의미는 '학문'이다. 또한 그 학문을 '가르치는 것'도 포함한다. 기독교를 학문적으로 설명하고 청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교양'이다.

 

당대 문화에서 저 단어는 '교양'에 가깝다. 이때 교양은 '고전'을 읽고 이해하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기독교 교양'은 기독교의 고전, 즉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고 가르치는 기술을 다룬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1~3권은 텍스트를 읽는 법, 4권은 텍스트를 가르치는 법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그러니까 기독교적으로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를 '읽는 법'에 관한 책이다. 나도 이 책으로 '읽는다는 것'을 말해 보려 한다.

 

중년의 성숙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책에서 발전시킨 탁월한 성취 중 하나는 '향유'와 '사용'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개념이 그의 신학과 윤리학의 요체라 한다. 나는 그것을 이 책의 핵심 주제와 연결하여 '읽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말해 보려 한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김기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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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교회사에서 단 한 사람의 신앙인을 고르라면 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꼽는다.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많은 해설서나 논문에서 "최고의 신학자요 신자"라는 문구를 흔히 본다. 그러니 한 개인에 대한 숭배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허나, 그는 그런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그는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 큰 바위 얼굴이다. 그의 얼굴을 보고 그의 가르침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의 집 마당의 참새처럼 집을 짓고, 제비처럼 새끼를 칠 보금자리를 얻을 테다.

 

그는 사이에 낀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이교도인 아버지와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 사이,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길목, 로마 제국의 해체와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질서 사이, 진리에 대한 무한한 열망과 더불어 세속적 성공과 육체적 욕망에 대한 탐닉 사이에서 쩔쩔 매면서도 어느 하나를 버리지 못한 사람, 하나님을 만나면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라는 선언에 합당한 삶을 산 사람, 그렇지만 이전 것을 버리기보다는 새것의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통합해 낸 기독교 신학의 아버지가 된 사람, 그가 성 아우구스티누스다.

 

그랬기에 그는 [그리스도교 교양]에서 이전 것이 필요 없다고, 버렸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그 흔적과 영향력이 완연하다. 

 

 

4권에서는 설교자에게 성경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성경을 읽고 또 읽는 것만으로 말하는 기술을 습득하는 데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 곳곳에 '수사학의 예문'이 매우 많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귀찮을 정도이며, '수사학의 표본'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런데도 당대 최고 수사학자의 실력을 십분 발휘하여 그 수사학이 기독교 안에서 수용되고 변용되는 탁월한 재구축의 모델을 보여 준다. 고전 수사학이 말한 웅변의 목적은 셋인데, '가르치고, 매료하고, 설득하는' 것이다. 그는 순서를 살짝 바꾼다.

 

아무래도 진리 전달이 초점인 기독교 설교의 특성상, 설득이 매료보다 앞선다. 전달이 우선인 까닭이다.

 

읽는 것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문자를 해독하는 능력이 없으면, 그러니까 국어 실력이 떨어지면 성경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다는 것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혹자는 바울 사도의 말을 인용하면서 문자가 아닌 영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허나, 성경은 언어로 기록된 이상, 그 말과 글을 읽어 내는 능력과 독해 방식을 무시하면 오독하기 십상. 그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 안으로 깊숙이 치고 들어간 다음,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김기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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