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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라이트

출판  IVP

발매  2007.10.10

 

 

 

 21세기의 C.S 루이스...

 

 

 그의 별명이다.

 

 

 톰 라이트.... 그에게 주목하자.

 

 

 보수 장로교 측에서는 경계를 많이 하는 신학자다. 이승구 교수의 [톰 라이트 사상 비판]에 대한 책을 읽고 있는데, 일견 공감되는 부분도 있고, 필요한 접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좀 과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신학 천재가 나타난 것 같다고 말한다면 과장된 것일까?

 

 

 설교면 설교, 저술 활동이면 저술 활동, 토론이면 토론...

 

 

 그는 상당히 만능이다.

 

 

 그를 처음 알고 싶을 땐 이 책으로 시작하는 걸 추천한다.

 

 

 [칭의 논쟁]으로 인해 상당히 화두에 올라가 있는 그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1세기 유대교, 역사적 관점에 충실해서 해석할 것을 당부하며 그런 측면에서 성경을 읽게 되면 그 동안 정통 신학에서 지켜오던 '교리'들이 많은 점검을 받아야 할 거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매우 위험해 보이지만, 그의 저서를 읽고 나면 어느 순간 그의 주장에 설득되어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 만큼, 논증이 탄탄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이 책은 [순전한 기독교]의 최신판 같은 느낌인데, logical한 논증 중심이 아닌 옆 사람에게 들려주는 네러티브 형식으로 일관성 있게 구성된 변증서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은 지성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 봤으면 하는 책이다.

 

 

 이 시대는 기독교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져 있다.

 

 

 그 와중에도 기독교에 대해서 편견 없이, 명료하게 inform을 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크나큰 축복인데 여기에 21세기의 C.S 루이스가 있다.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 하거나, 숨기고 싶어하지 않으며 당당히 이야기 하고 싶어 한다.

 

 

 그 속에 들어 있는 그의 '자신감'과 '학자적 깊이'를 존경하며, 이 책을 감히 추천한다.

 

 

 충격적인 한 방이 있는 책은 아니었지만, 이와 같은 매끄러운 서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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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라이트

출판  IVP

발매  2008.06.20

 

 

 

 

 

 

  톰 라이트의 새로운 책이다. '악'의 문제에 대해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논증에 동의를 하든, 그렇지 않든 들어보고 싶어지지 않는가?

 


 

  그의 책은 역시 굉장히 정교한 논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궁금해 했던 의문들에 대해 피하지 않고 꼼꼼하게 설명해 주는 강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악의 문제'는 현대판 C.S Lewis 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clear하고, 깔끔하다.

 


 

  인간이 언어로 서술할 수 있는 영역의 극한까지 논리를 끌고 간 느낌?

 


 

  그가 이야기하는 '악'은 단순히 철학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다.

 


 

  계몽주의 전통에서는 악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함으로써 교만의 죄를 범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제시하는 그에 대한 반론도 신선한 해결책은 되기 어렵다고 이야기 하며 그의 논지를 끌고 나간다.

 


 

  사실, 하나님이 악에 대해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분명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마치 이 영역은 '금기'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 악의 문제는 아무리 변증을 해도 속시원한 답을 듣기가 어렵다.

 


 

  아마 난 이 문제에 대해서 라이트의 책에서 어느 정도의 결론을 맺어둔 것 같다.(그게 속시원한 대답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일단 구약 성경은 하나님이 악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보다는, 악에 대해 무엇을 행하실 수 있고, 행하고 계시며, 또 장차 행하려고 하시는지를 많이 말해 주는데, 많은 무신론자들은 구약을 그렇게 독해하지 않는다. 그저 잔인한 하나님으로 비춰지는 겉모습에 당황하며 분노할 뿐이다.

 


 

  그러나 라이트의 말마따나 에덴동산 이후로 또 노아 시대에 하나님이 슬퍼하셨던 이후로, 바벨과 아브라함 이후로 줄곧 전개된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은 세상을 지저분한 곳에서 끌어내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반복해서 지저분한 방법으로 일하셔야만 했다는 점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하나님은, 세상을 올바른 모습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우리에게 불쾌감을 주는 어떤 방식으로 신에 진흙을 묻히고 손에 피룰 묻히셔야만 했던 것 같다고 라이트는 이야기 한다.

 


 

  그리고 선악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에 어떤 본질적 연속성을 지녀야만 우리는 도덕적인 어둠에 갇히기 않게 되며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과 하시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지나친 확신으로 단언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라이트는 주장한다.

 


 

  이와 같은 변증을 통해 구약의 잔혹해 보이는 하나님을 서술하는 방식은 사실 놀랍다.

 


 

  분명 '악'은 살아 있는 실재가 맞다.

 


 

  그러나 우리는 '악'을 서술하기 이전에 우리의 인식과 지각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점검 받으면서 차분하게 토대를 쌓으며 논리를 전개해 나가야 한다.

 


 

  이 책은 꼼꼼하게 '악'의 문제를 다루면서 성경 속의 다양한 부분을 설명하는데 그 중에 '욥기'에 대한 요약이 기억에 남는다.

 


 

  라이트가 말하는 '욥기'는 이 시대에서 악의 문제를 '해결'해 버리는 것은 악의 문제를 축소하는 것일 뿐이며 명백한 반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세상의 주님이시라고 선언하는 신학적 찬양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성경 안과 성경 밖에서 필요한 부분을 피하지 않고 설명해 가는 라이트의 필력은 상당하다.

 


 

  '악'을 논증할 때 먼저 악의 인격화된 힘인 사탄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으며 악의 기원 자체는 신비로 남아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가 등장할 때마다, 사탄은 엄격한 제약 속에 갇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은 전체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근거들은 성경적으로 깔끔하게 제시되어 있다.

 

  세 번째로는 사람들이 행하는 악은 피조물의 노예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네 번째 주장이 상당히 정교한데 구약 성경은 절대로 철학자들이 원하는 그런 종류의 모든 것이 깔끔하게 설명되는 정적인 세계 질서의 그림을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고 그는 주장한다.(이 부분은 라이트의 놀라운 파워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네 번째 주장을 좀 더 설명하자면, 많은 회의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전능한 관리 책임자로서 기계가 잘 돌아가게 관리해야 하는 것처럼 단순한 도식을 그리고 있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그림은 어떤 부분에서도 그렇게 단순한 모습으로 쪼그라들지 않는다고 라이트는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보다 더 낯설고 신비한 것이며, 불의한 세계 안에서 정의를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과업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다.

 


 

  이 주장은 하나님의 입장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려고 노력하는 어떤 이들이 좋아하는 '자유의지 옹호론'(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으므로 모든 것은 우리의 잘못이다)과는 조금 다른 관점이다. 이것은 피조세계가 여전히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확고한 긍정에서 나온 하나님 쪽에서의 '행동에 대한 헌신'에 좀 더 가까운 관점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현재의 피조세계를 폐기하고 다른 일을 하시기 보다는 기존의 것을 바로잡으려 하셨고, 사람들이 늘 악하기 짝이 없고, 실수 투성이였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 그들을 통하여 일하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라이트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책임과 주체됨을 무너뜨리지 않으시면서, 악을 심판하고 징벌하시며, 악에 한계를 설정하시며, 새로운 은혜의 순간들과 새 창조를 이루는 사건들- 비록 그것들이 어쩔 수 없이 양면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을 약속하고 그것을 가져오십니다.'

 


 

  하나님을 보호하기 위해 자유의지 옹호론을 주로 사용해 악의 문제를 서술하던 나로서는 라이트의 설명에 설득당하지 않기가 쉽지 않았다.

 


 

  훨씬 더 정교하며 성경의 흐름에 부합해 보인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장일까?

 


 

  라이트는 정말 균형이 잘 잡힌 사람이다.

 


 

  가령 하나님이 결국 새로운 세상을 만드실 것이며, 그 곳에서는 더 이상 고통과 눈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하면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합니다.

 


 

"그런 해결책이 제공하는 정의는 이전에 지나간 모든 악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합니다. 또한, 우리는 단순히 진보를 통해서도 악의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결책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세대만 행복해지면 모든 이전 세대의 비참함이 간과될 수 있다거나, 심지어는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한 해답은 직접 책을 보면서 들어 보길 추천한다. (꼭 라이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분명 통찰력에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막간의 지면을 할애해서 라이트는 C.S Lewis 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서술된 '악마'에 대한 논의를 언급하며, 자신의 추가적인 의견을 덧붙이는 멋진 시도를 한다. (사탄의 인격성이 좀 저급하다는 그의 주장에서 근거가 좀 의아하긴 하지만,루이스의 지식에 살을 덧붙이는 그의 포스는 상당하다)

 


 

  그는 '악'에 대해 철학적 서술은 깔끔하지 않더라도, 악을 쉽게 치부해 버리거나 이상한 방식으로 해석하길 거부하며 실천적인 방향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그 전에 그가 '악'에 대한 서술이 쉽지 않은 점을 설명하는 부분을 주목해 보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도입한 설명은 개인적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신비의 영역에 속한 일임이 틀림없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우리의 사고에 반영해야만 합니다. 비록 잠시 물리학 이야기로 돌아가서 하이젠베르크적인 의미에서만이라도 말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실성의 원리를 밝혀냈습니다. 무엇인가를 관찰할 때, 제가 관찰한다는 사실이 제가 보고 있는 대상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저는 결코 그 대상을 완전히 정확하게 파악했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도덕적, 영적 방정식에는 불확실성의 요인, 즉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개입되어 우리가 얼마나 잘 조직화 하든지, 우리가 얼마나 많이 기도하든지, 우리의 신학이 얼마나 건전하든지, 우리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작업하든지 간에, 그 곳에는 우리를 거슬러서 작용하는 부정적인 힘들[아마도 '우주적인 부정적 힘'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또한 C.S lewis 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은 '악'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점을 묵상했던 일화도 들려 준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악을 정복하심으로써 악으로 하여금 다시는 하나님을 괴롭히지 못하게 만들었기에 그는 분명 '악'에 대한 책임자는 아니며 결국 악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새로운 세계, 즉 구속받고 새로움을 입은 사람들이 다스리며 하나님의 지혜와 치유의 질서를 실현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발견된다고 라이트는 주장한다.

 


 

  요약하면 악은 철학적인 설명으로 깔끔하게 서술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실재이며 그 궁극적인 답은 새로운 세계에서 반드시 밝혀질 것인데 현재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 아기가 이해할 수 있는 생각의 범주가 부족하여 바깥세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그 문제를 완전히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때에 악은 우리를 향해 아무런 할 말이 없게 되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승리가 완전히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악의 문제에 대한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답을 들으려 하기 보다는 우리는 그저 창조 세계가 아닌 창조주를 바라보며,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악'을 막아낼 수 있는 실천적인 '용서'와 '포용'에 힘써야 할 것이다.

 


 

  '악'을 부정하지 않으며 그 '악'에 대항하여 '용서'와 '포용'의 실천을 힘쓰라는 그의 메시지는 굉장한 힘이 있다.

 


 

  이 영역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1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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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라이트

출판 새물결플러스

발매 2011.12.05

 

 

 라이트의 저서다. '성경'에 대해서 그가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엄청난 달변가이자 매우 똑똑하다. 일당백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수 많은 논란과 공격 속에서도 당당히 자신의 명검을 꺼내들 수 있는 명장이다.

 


 

  굉장히 다루기 어려운 주제임에도 그는 차분하게 논리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그리고 좌파와 우파 진영의 성경 해석의 문제들을 함께 격파하면서 치밀한 균형점을 찾아 낸다.

 


 

  천재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같다. 그의 의견에 동의가 안 되는 이들은 비판을 적절하게 가하면 되지만, 아직 라이트의 주장을 능가하는 반대측의 의견을 잘 들어보지 못해서 일단은 그에게 주목하고 있다.

 


 

 그는 역사적인 성경 해석을 중요시 여기는데 그러다 보니 종교개혁자들에게도 반기를 들곤 한다. (그러니 칼빈주의자들이나 개혁주의 신학을 하는 분들은 라이트를 매우 경계하고 싫어한다)

 


 

 그는 이렇게 대담하지만, 반박하기가 쉽지 않은 말을 한다.

 


 

"오늘날에 와서 종교개혁자들의 글을 읽다 보면 그 속에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성경 자체를 두고 보면 극히 중요한 것인데도 세부 사항에 너무 주의를 기울인 나머지 신경 써서 강조하지 못했던 것으로, 바로 성경이 하나님, 이스라엘, 예수, 세상에 관한 거대 담론적 '내러티브'라는 사실, 오늘날까지 그 진행을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으며, 미래에 있을 궁극적 회복을 기다리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

 

 


"안타까운 것은 종교개혁자들 스스로도 진정한 통찰을 더 발전시켜, 성경이 계속해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이야기, 곧 그 후반부에는 우리 자신도 합류하게 되는 이야기라는 강력한 개념 - 지금 우리가 이 책에서 논의하려는 바로 그 개념!-에 도달하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라이트의 말에 수 많은 보수 신학자들은 흥분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겠지만 실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개혁주의는 계속 개혁되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게 진정한 개혁주의의 정신이라고 믿기 때문에 1500년 경의 종교개혁이 마치 모든 것이 완성된 것처럼 단정하고, 그 시기를 사수하려는 과한 시도들이 그리 달갑게 보이진 않는다.

 


 

라이트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한 가지 점만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만약 종교개혁자들이 오늘날 우리 시대로 돌아온다면 절대로 "우리 생각과 해석이 모두 맞다. 그러니 당신들은 반드시 우리 주해와 신학을 따라야 하며 정확히 그 결과물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나도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하신 진리의 말씀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신학에 있어서 '성경', '이성', '전통', '경험'이 지녔던 지위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는데, 상당히 정교하다.

 


 

 단, 나는 '경험'이 지닌 지위를 지켜주고픈 마음이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는 삶'이 이 영역에 속해 있다던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페이스북 관리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이 영역이 사수되는 것이 굉장히 위험하지만, 성경의 네러티브를 잘 반영한 결론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라이트는 여기서 '경험'의 중요성을 낮춘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웨슬리안 4대행'이라는 표현 속에 이 4가지가 들어가는데 웨슬리 자신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의 말마따나 '경험'을 권위로 여기면 '권위'라는 단어 자체가 해체된다는 점도 일견 공감한다.

 


 

 그러나 그는 정말 정교한 신학자다. '경험'이 지닌 긍정적인 측면을 언급하면서 이와 같은 비유를 사용한다.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으리라."경험"은 정원에서 스스로 자라나는 온갖 식물과 잡풀들이다. '권위'라는 정원사는 혼돈과 가시와 엉겅퀴를 물리치고 정원이 아름답고 비옥하게 가꿔지도록 잡초를 뽑아낸다.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정원에 심겨진 진짜 꽃과 채소의 우수성이 제대로 드러나게 된다. 지나치게 권위적인 교회는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정원에 콘크리트를 깔아서 (그래서 좋은 꽃과 채소마저 덮어버리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반면 지나치게 경험을 중시하는 교회는 콘크리트의 문제(경직되고 '비판적인' 형태의 믿음)를 해결한다는 취지 아래 정원에서 자라나는 어떤 해로운 것에도 손을 대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콘크리트를 '율법'이라 칭하고 모든 잡초들을 '은혜'라고 칭송한다."

 


 

 여기서 '지나치게 권위적인 교회'를 극도의 정지론자들이라 보면 '지나치게 경험을 중시하는 교회'는 소위 신사도 운동의 지지자들을 떠올려 봐도 될 것 같다.

 


 

 이런 탁월한 비유를 통해 그는 자칫 놓치기 쉬운 '경험'의 한 측면을 절묘하게 잡아낸다.(이 영역은 라이트에게 속시원하게 동의하진 않지만, 그의 논리는 여전히 강하다)

 


 

 그리고 우파와 좌파의 잘못된 성경 해석법과 바른 성경 해석법을 제안한 부분, 그리고 이를 실제로 적용해서 안식일과, 일부일처제라는 논란이 되는 이슈를 직접 다룬다. (이런 적용이 정말 탁월하다)

 


 

 라이트는 좋든, 싫든 한번 도전해 보고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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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라이트

출판 IVP

발매 2009.05.08

 

 

 

'하나님 나라'에 대한 책 중 독보적인 책이다.

 


 

라이트가 썼다는 것만으로도 기본 신뢰가 가는 책이다.

 


 

  부활, 구원, 복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서술들은 라이트의 언변과 지혜와 지성으로 무장하여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다룬다.

 


 

1. 기독교 복음이 제시하는 궁극적 미래의 희망 -> '구원', '부활', '영생' 등에 대한 논의다.


2. 현재의 세상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

 


 

  그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개념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데 초반에는 '부활'이라는 단어의 실제 의미를 다시 살펴보는데 지면을 할애한다.

 


 

  그의 주장은 상당히 충격적일 수 있어서 이승구 교수님 등, 보수 진영에서는 라이트를 경계하게 만드는데 가령 이런 주장을 들어보자.

 


 

"물론 전통적으로 우리는 기독교가, 구원받은 혹은 복 받은 사람들이 가게 될 위에 있는 천국과, 악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게 될 아래에 있는 지옥에 대해 가르친다고 생각해 왔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사후 천국행'에 대해 말하는 바가 거의 없으며, 지옥행에 대해서도 말하는 바가 많지 않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사용되는 천국이라는 용어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의 설교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는 사후의 운명을 일컫는 말도 아니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말도 아니다. 이것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일컫는 말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미래의 운명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다른 영역, 숨겨진 영역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주장이 보수 기독교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다. 그러나 라이트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따로 떼어서 반박하는 접근법으로 격파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승구 교수님이 하시는 것처럼), 그는 성경적, 역사적 엄밀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의 전체 이야기에 대적할 만한 강력한 이야기를 들고 나오지 않는 이상, 그의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가 쉽지 않다.

 


 

  '죽음' 이니, '부활'이니 하는 논의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말하며 굳이 이런 주제로 글을 쓰는데 400page 이상을 투자해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라이트는 이와 같이 말한다.

 


 

"우리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 무엇을 말하느냐가 다른 모든 것의 모양과 색채를 결정한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죽음과 부활은 더 이상 놀라움으로 다가 오지 않고 현재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더 나아가 예수님 자신은 부활에서 비롯된 것도 아닌,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지도 않는 그러한 '희망'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그저 사변적인 논쟁으로서만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적인 삶과 사회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더 나아가 한 영혼의 운명에도 직결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중하게 이 부분을 고민해 봐야 한다.

 


 

  그는 철저하게 역사적인 논의와 성경적 논의를 중요시 여긴다. 그 일환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탐구해 보는 챕터가 나오는데, 충격적인 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냥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믿었던 적이 없다. 그들은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식의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후 목적지로서 천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 '천국의' 삶을 궁극적인 육체의 부활로 가는 도중에 일시적으로 거치는 단계로 보았다.

 


 

(상당히 충격적이다. 우리가 생각하던 장소적 개념인 천국이 마치 '연옥' 같은 중간단계의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연옥과는 다른 개념이다.)

 


 

  정리하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미래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는데 1. 죽음과 그 직후의 상태로 머무는 단계 2. 새롭게 재창조된 세상에서 새로운 육체를 가지고 사는 단계 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은 이교주의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하며, 라이트는 이를 가장 유대교적인 신앙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

 


 

'부활'은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죽음을 면하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사후에 영광스럽고도 존귀하게 존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 이후에 다시 육체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쇼킹하지 않은가?)

 


 

  그가 역사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예수의 육체가 새로운 몸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검증할 수 있으면 가장 확실한 해답이 되겠지만 그 사건이 1회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중립적인 입장에서 '증명'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역사적 논증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중요하다.

 


 

"그 누구도 역사적 논증만으로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믿도록 강제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 논증은 온갖 종류의 회의주의들이 오랫동안 숨어 있던 덤불을 치우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또한 '앎'에 대한 그의 논증도 매우 인상깊다.

 


 

"결국 '앎'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과학적 연구는 반복이 가능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반복되지 않는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단 한번 건넜으며, 만약 그가 그 강을 다시 건넜다면 그 두 번째는 의미가 달라졌을 것이다."

 

 


....

 

 


그러나 사람들이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났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때는 역사를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유추의 원칙에 호소하는 것이다. 유추의 문제점은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차분하면서도 철학적, 이성적, 논리적 접근과 그 이상의 메타 서술을 섬세하게 융합시켜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낸다.

 


 

 결국 결론적으로 그가 주장하고픈 바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초월하지만 포함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의 변증의 절정은 "부활을 믿는 것은 사랑이다" 라고 주장하는 대목이다.

 


 

그의 마무리는 이러하다.

 


 

"사랑은 가장 깊은 앎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실재에 완벽하게 관여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실재를 확인하고 축하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많은 근대적 인식론이 무너진다. 사물은 객관적으로 사실이거나 (따라서 냉정한 관찰자에 의해서 그렇게 자각될 수 있거나) 아니면 주관적으로 사실이거나 (따라서 실재적 공공 세계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쓸모가 없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하는 '객관' 과 '주관'의 진부한 반정립이 사랑의 인식론에 의해서 극복되는 것이다. 새로운 공공 세계, 부활절에 시작된 세계, 예수님이 주이시고 카이사르는 주가 아닌 세계에서 살게 될 사람들에게 필요한 앎의 방식으로 대두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인식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역사적 논증이 참으로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도마와 바울, 베드로가 직면했던 질문들, 즉 믿음, 소망, 사랑의 질문들을 던지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이런 고차원적인 논증을 펼칠 수 있는지 감탄이 나올 따름이다.) 

 


 

  라이트는 이와 같이 역사적 논증과 이성적인 논증의 철저한 균형과 함께 그 이상의 차원으로 논증을 끌고 가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손상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 이후에 '구원'에 대한 논의도 전개되는데

 


 

요약하면

 


 

'구원'의 온전한 의미는 (1) 단지 '영혼'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에 대한 것 (2) 미래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것 (3)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두고두고 곱씹으며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용어들을 재정립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통해 직접 경험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마지막은 라이트가 말하는 '부활'을 다시한번 정리하며 마무리 하도록 하자.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은 하나님이 기적을 행한다거나 성경이 진리라는 증거 이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오순절의 진실이지, 부활절의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 이후의 천국에 대한 확신을 훨씬 능가하는 사실이다.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그가 주로 강조하는 것은 부활한 몸으로 다시 돌아와서 새롭게 탄생한 하나님의 창조계 안에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새로운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이 땅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하늘의 생명으로 이 땅을 식민화하는 프로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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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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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라이트

출판 에클레시아북스

발매 2011.05.12

 

 

톰 라이트가 나타났다. 그의 가장 논쟁적인 책이다.

 


 

'칭의'(Justification) 는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가장 애지중지하는 개념 중 하나다.

 


 

 그런데, 그는 이 부분을 종교개혁자들이 성경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한다.

 


 

 예상했던 대로 존 파이퍼 목사님은 눈에 불을 켜고, 톰 라이트와 vs 구도를 그리면서 배틀 도서를 냈고, 라이트는 그에 대해 여유롭게 응수하며 다음과 같은 화답서를 출간한다.

 


 

승패를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파이퍼가 쓴 [칭의 논쟁] 과 톰 라이트가 쓴 [칭의를 말하다]를 통해 두 인물의 이야기를 거의 처음 들어봤다.

 


 

제 3자가 봤을 때 라이트의 압승이었다. 파이퍼는 계속 뒤에 가면 그 부분을 격파시켜 주겠다고 호언장담 하지만 결국 싱겁게 책을 끝내 버린다. 그냥 "종교개혁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 때 정립된 교리와 개념을 그렇게 바꾸려고 하면 안되는 거야~ 그건 잘못된 거야 ~ 알지? 그건 진짜 중요한 거야" 라는 말을 하고 끝내버리는 느낌이다.

 


 

라이트의 주장은 사실 계속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성경 속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자'였다! 라는 나의 기본 개념마저도 흔들어 놓는 그의 대담한 '역사적 눈으로 성경 읽기'는 마음을 심히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칭의' 논쟁에 대해 이 책만 읽고 나면 라이트의 주장에 설득 당하지 않기가 정말 어렵다.

 


 

무슨 마법을 쓰는 것 처럼, 그의 주장은 정교하고 논리가 탄탄하며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힘이 있다.

 


 

일단 몇 가지 지식을 나눠보자.

 


 

  존 파이퍼는 '의'(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가 죄인에게 '전가'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처음 믿는 순간부터 마지막으로 하늘나라에 도달하기까지 죄인을 그와 같은 상태로 옷 입히는 것을 '칭의'라고 본다.

 


 

  그러나 라이트의 주장은 바울은 파이퍼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 세부적인 내용을 자세히 풀어 쓴 책이 바로 [칭의를 말하다]이다.

 


 

 그는 먼저 '전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통이란 극히 세심하고 경건하며 박식한 사람들의 전통이라 할지라도 결국 사람의 전통이다. 내가 루터와 칼뱅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 특별히 칼뱅을 읽었을 때, 나는 그들이 말하는 내용 전부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진술하고 실천한 성경 읽기 방법만은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방식이란 나 자신을 성경 속에,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구약성경과 그리스어로 된 신약 성경 안에 푹 담그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성경이 나의 혈액을 따라 흐르게 하는 것으로서, 나는 내가 교회와 세상에 성경을 신선하게 가르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소원했었다. 우리가 종교개혁자들에게 보내야 할 가장 위대한 경의는 그들에게 오류가 없다고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그들에게도 섬뜩한 일일 것이다), 그들이 행한 대로 우리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의 수준에서 상당한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존 파이퍼는 내가 '교회가 1500년 동안 곤경에 빠져 있다는' 식의 말을 했다고 암시한다. 내가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파이퍼의 영웅인 루터와 칼뱅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말로 공격했었다. 그때 루터와 칼뱅은 성경을 통한 대답을 했고, 트렌트 공의회는 전통에 의거하여 대응했다."

 


 

  아직 책은 28page로서 제대로 된 논의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지만 이 말만 읽어도 라이트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가 보여주는 자신감의 근원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전통으로 덤빈다면 나는 나의 명검인 '성경'으로 너희를 격파해 주겠노라"

 


 

  그토록 '진리'를 강조하며, 기존 체계를 흔드는 라이트의 등장에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내는 '파이퍼', 보수 기독교 측은 이 황당한 말에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라이트의 위대한 공헌은 그가 정말로 성경과 역사의 엄밀성을 가지고 자신의 논리를 설득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사실, 나같은 초보 신자는 반대측 진영이 라이트의 주장을 성경대로 격파해 주는 걸 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이승구 교수님, 존 파이퍼 목사님 등의 적극적인 시도는 책의 내용으로 볼 때 전혀 라이트를 이겨내기 어려워 보였다)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기존 기독교에 폭탄을 날린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먼저 내가 다루고 싶은 핵심 본문들뿐만 아니라 구할 수 있는 신학 사전과 성경 사전들에 수록된 '칭의'에 대한 내용들도 꼼꼼히 읽어보았다. 그때 반복적으로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저자들이 성경 본문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보일 때에도 바울의 교리에서 핵심적인 요소들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시된 주제들을 나열하면, 아브라함과 하나님께서 그와 맺으신 언약,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 부활과 새 창조,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 역사를 통해 지속된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계획이라는 의미에서 종말론, 그리고 특별히 성령과 기독교적 인격의 형성이다. 이 주제들은 어디로 가 버렸나?"

(제임스 패커의 글에서는 이런 것들을 예외적으로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바울에 대한 논의는 그의 후속작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에서 더욱 자세하게 이어진다.

 


 

그가 말하는 '칭의'는 아직 들어가지 않았지만, 굉장히 천재적인 비유가 나온 부분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선작업에 동의가 되어야 이후에 펼쳐질 논의를 받아들일 마음 문이 열리게 된다.

 


 

"후대의 교리와 경건한 의지가 자체적으로 새로운 일련의 사고를 만들어낸 것이다. 다시 음악과 관련된 비유를 들어보겠다. 피아노의 댐퍼 페달을 누르고 낮은 '라' 건반을 눌러보자. 피아노가 조율이 잘 되어 있다면 곧 다음 옥타브의 '라'가 공명되어 울리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 위의 '미'가 들리고 그 다음 '라'가 들린다. 그 다음은 '올림 도', 그리고 또 '미'가 들릴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조금 혼란스럽다. 화성진행에 따르면 다음 음은 약간 내린 솔 제자리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가능하다. 이 모든 음들, 몇 개의 '라'가 원래 '라' 음을 강화해주고, '미'와 최소 1개 이상의 '올림 도'는 실제로 원래 음들의 일부를 이룬다. 피아노와 같은 악기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그 음들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실제로 그 음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을 듣다가 '미' 음만 귀에 들어와서 '미' 건반을 누르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들어봐! 이게 바로 우리가 듣고 있던 그 음이야!") 물론 '미' 음도 원래 '라' 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미' 건반을 누르는 순간 이전과는 다른 상이한 조합의 공명이 시작된다. 즉 다른 '미' 음이 들리고, '시', 또 '미', 그리고 '올림 솔' , '시' 와 같은 음이 공명하기 시작한다.

 

 


종교 개혁 이후 수 세기 동안 교회에서 바울을 적용하려 했을 때 발생한 일이 바로 이러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잠시 동안 루터와 칼뱅이 (물론 그들 사이에는 주요한 차이가 있다. 성급하고 때로는 분노한 반-새관점 운동에서는 이러한 차이도 얼버무리곤 한다) 바울이 이야기했던 내용에서 진짜 배음을 실제로 들었다고 치자. 바울이 댐퍼 페달을 밟고 '라' 건반을 누르자 울려 퍼진 화성의 다섯 번째 음인 '미'를 그들이 들었고 그 '미'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말이다. 그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개신교 내부에서 상황은 계속 변화했다. 다양한 형태의 운동들이 오고 갔다. 18세기 대륙의 계몽주의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완전히 개신교적인 운동이었다. 즉, 권위적인 종교를 제거하고, 분명하고 합리적이며 역사적인 질문들을 던졌다. 그 후 건조한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낭만주의 운동은 개신교의 정서가 지닌 또 다른 흐름을 담게 되는데, 이번에는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이 아니라 내적인 감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다양한 종류의 경건의 모습들이 나타나서 번성하다가 변형되고 그 유산을 남겼다. 마지막에는 (물론, 지금의 설명은 긴 역사를 과도하게 단축시킨 이야기이다) 실존주의가 나타나서 진정한 신앙의 핵심으로서 그리고 진정한 신앙을 판정하는 척도로서 본래적 사람의 경험을 들여다보았다. 그 기간 동안 순전하게 종교개혁자들에게 돌아가려는 흐름 같은 것은 없었다. 그들의 반향실(Echo chamber) 속에 들어가 반복해서 그들 자신의 말을 듣고 또 들었을 뿐이며, 반향실이 존재하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들의 바울 읽기는 그러한 반향실을 통해 계속 전달되었기 때문에, 결국 사도 바울의 원래 목소리는 완전히 들을 수 없는 정도가 되어버렸다. 결과적으로 피아노의 모든 음들이 명랑하게 울려 퍼지고 있는 상태가 되어, 처음에 울렸던 음을 알아내보려는 어떤 노력도 가망이 없어 보인다.

 

 


  물론 우리가 역사로 되돌아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울은 그 역사속에서 그 이야기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었던 이야기의 뿌리를 들여다보았다. 후대 교회 지도자들의 신망 있는 전통이나 좀 더 최근의 학자들의 그보다는 덜 신망 있는 각주들보다, 성경 그 자체에 귀를 기울이려 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향해야 할 곳이 바로 역사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16세기의 문제들과 19세기의 시각들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왔다. 이제 21세기의 문제들과 1세기의 시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을 때가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의 말을 어떤 재주로 반박할 수 있을지 모르겟다.

 


 

만약 파이퍼의 주장대로 '전가된 의'가 기독교에 핵심적이고 목숨을 걸만큼 중요하다면 바울이 왜 그에 대해 드러내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는지에 대해 고민을 해 봐야 한다고 라이트는 주장한다.

 


 

파이퍼는 16세기 기독교 갱신 운동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는 거라면 라이트는 1세기로 돌아가서 성경을 보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난감하다. 이 두가지가 대립관계에 놓이면 기독교인은 당연히 '진짜'에 기준점을 두는 게 맞지 않나?

 


 

  라이트는 칭의에 대한 논의를 전개함과 동시에 파이퍼의 주장들의 비논리성을 반박하고, 2부에서는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고린도서, 에베소서, 로마서를 세밀하게 주해한 뒤 결론에 도달한다. (성경 해석과 역사 지식으로 무장해 버리면 정말 쉽지 않다)

 


 

놀라운 그의 주해는 생략하고, 끝 자락의 이야기를 몇 가지 들어보자.

 


 

"우리가 많은 개신교에서 전통적으로 생각해온 방식을 따라 '이신칭의'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현재 행하고 있는 행위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우리는 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으로만' 이라는 요소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에 부딪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울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셨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전 세계와 맺으신,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바울의 성경적 신학이라는 더 큰 틀에서 이신칭의를 바라본다면, 결과적으로 완전히 바울과 부합하는 그 큰 틀로부터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행위들'의 위치(때때로 이런 식으로 언급된다)를 이해할 수 있는 쉽고 곧은 길을 발견하게 된다. 이 길은 어떤 방식으로도 '이신칭의'와의 연대를 위협하는 형태를 띠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스라엘이 엣 종교개혁이 주장한 의미에서 '행위로 얻는 의'를 추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이스라엘은 선한 도덕적 행위를 행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호의를 얻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상기하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 구출한 백성이었고, 그들이 지닌 율법은 이미 구속받은 백성들을 위한 삶의 방식으로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렇다: 이스라엘의 실수는 하나님의 목적을 오해한 데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전-세계를-위한-이스라엘-통한-단일-계획으로 보지 않고, 세상과는 무관한-이스라엘을-위한-단일-계획으로 보았다.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된 악한 것이라는 루터의 틀도 아니며, 그리스도가 율법에 순종하여 그 결과 '의'(행위로 얻는 의 라는 면에 주목하라)를 획득했고, 그 의가 믿는 사람들에게 '전가'된다는 칼뱅의 틀도 아니며, 하나님과 그의 이스라엘에 대한 신실함에 관한 내러티브가 메시아 안에서 그 종착점에 도달했다는 바울 자신의 유대적 사고 틀 안에서 진정한 의미가 파악된다."

 


 

 상당히 충격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으로 라이트는 율법을 부정적으로 간주하려던 루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율법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려뎐 칼뱅을 뛰어넘어 더 정확한 관점에 도달한다.

 


 

 신광은 목사님의 [천하무적 아르뱅주의]에서도 루터의 '이신칭의'가 우리로 하여금 믿음과 행위를 서로 대립관계로 여기게 만들어 기독교의 윤리관에 타격을 주고, 신앙이라는 것을 이상한 수준으로 쪼그려 놨다고 말했었는데 라이트의 성경적, 역사적 맥락 안에서 우리가 바른 '지식'을 지니게 되면, '행위'도 자연스레 회복시키면서 참된 하나님과의 신앙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오직 의로우신 분은 하나님 뿐이다! 라는 그의 선언은 빛이 난다.

 


 

의는 '전가'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고백 또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명증한 방법이다.

 


 

성경 주해를 세밀하게 하는 부분에서는 꽤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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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라이트

출판 에클레시아북스

발매 2011.02.10

 

 

톰 라이트의 [칭의를 말하다]에 이은, 그의 대표저작 중 하나이며 역시 논쟁적인 저서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을 한다.

 


 

1. 바울은 '복음'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나?

2. 바울은 예수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3.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 이방종교에 도전하였나?

4. 이스라엘에게 던진 바울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5. 바울은 '칭의'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나? (이 부분은 [칭의를 말하다]와 겹치는 부분이다)

6. 바울은 진정 기독교의 창시자였나?

 


  제임스 던의 말처럼 라이트는 본문이 말하는 내용을 단순히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열정과 예리한 지성을 활용하여 문제의 옮고 그름을 따진다. 그러다 보니 라이트의 주장이 다 동의되는 건 아니더라도 그의 논리에 감탄을 하게 된다.


  이 책에서 그는 바울서신인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를 집중적으로 주해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그는 다음과 같은 화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기들은 위대한 사도인 바울에게 충실하며, 그가 자기들의 진정한 길잡이라고 큰소리로 떠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바울의 사상 중 일부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바울이 똑같은 관심을 쏟은 나머지 부분은 관심 밖으로 내던져 버리거나 심지어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래도 칭의 논쟁의 연장선 상에서 기존의 기독교 계가 걸어왓던 행보 구석구석의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는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아니~ 우리가 종교개혁의 취지를 잘 반영하면서 철저하게 개혁주의적 신앙을 구축해 놨는데 우리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라고 느낄 것이다)

 


 

라이트는 바울 신학에 대한 대표적인 입장들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주는데


1) 슈바이처

2) 불트만

3) 데이비스

4) 케제만

5) 샌더스


의 입장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슈바이처만 잠깐 살펴보면 슈바이처는 '이신칭의' 바울신학의 주장처럼 로마서 1~4장이 로마서의 진정한 핵심부라는 의견에 반대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 바울 신학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5~8장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고 슈바이처는 다음과 같은 질문 4가지를 우리에게 남겨주게 된다.

 


 

1. 바울을 1세기 종교의 역사 속 어느 지점에 둘 것인가?

2. 그의 신학을, 그 신학의 출발점과 핵심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3. 바울 자신이 각각의 편지들 속에 집어넣으려 했떤 내용을 거꾸로 끄집어 내면서, 어떻게 그 편지들을 읽을 것인가?

4. 그리고 이런 작업의 결과와 부산물을 우리 자신의 삶, 우리 자신의 직업과 관련지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슈바이처의 공헌이 있다면 그는 바울을 유대교의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고 바른 주장을 한다. (이 부분이 요즘 너무 무시되고 있다고 라이트는 이야기 한다) -> 그러나 슈바이처 박사는 바울을 세계에 종말이 곧 닥칠 것이라고 믿었던 묵시적인 유대인으로 바라봄으로써 너무 과하게 나아가 버렸다.

 


 

  불트만의 주장은 어느 정도 반박되며 배제된다.(그 당시 시대 상황에 통용되던 실존주의 철학 등에 의존하여 바울을 해석한 점에서 한계가 드러난다, 즉 유대교 맥락으로 바울을 읽기보다는 헬레니즘 적 방법론으로 바울에게 접근하여 문제를 드러냄)

 


 

  데이비스는 유대교 랍비와 바울을 비교 연구하는데 장점도 있었지만 전폭적인 지지를 받진 못했다. (랍비 관련 자료들의 상당수가 바울이 살았던 시대보다 몇 세기 후의 것들이었다)


  케제만에 대해서는 앞선 선배들의 정신을 적절히 혼합하여서 그나마 나은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라이트는 말한다.


  라이트가 말하는 케제만은 이러하다.

 


 

"무인도에 함께 가면 좋을 한 명의 바울 해석자를 고르라면 나는 케제만을 택할 것이다. 힘찬 기세와 주해에 있어서의 솔직함과 철저함, 진리와 자유를 향한 열정으로 가득한 그의 저작들은 훌륭한 읽을거리이며, 언제나 신선한 눈으로 바울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나를 이끈다. 나는 그의 견해에 상당 부분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를 향한 큰 존경과 감사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라이트는 현재 바울 신학계에서 1)~4) 까지의 학자를 다 합친 것보다 영향력이 큰 학자가 있으니 그는 바로 '샌더스'라고 말한다.(과거 옥스퍼드에서 라이트의 동료였다)

 


 

바울 연구를 하는 사람은 누구도 샌더스의 자료를 피해갈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사실 샌더스가 주장했던 '언약적 율법주의' 가 내겐 큰 충격이었다. 그가 주장했던 것은 바울 당시의 유대교는 행위로 말미암은 의를 주장하는 율법주의적인 종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개신교 주해가들과 의견이 다른 것이다. 대부분의 개신교 주해가들은 유대교를 옛 이단 중 하나인 펠라기우스주의의 한 형태로 이해하고 있는데(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사람의 노력과 행위로 의와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샌더스는 반대하는 것이다.

 


 

  즉 그가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으로서 감사의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지, 그러한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겠다고 행하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언약 백성으로 들어가기 (get into)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머물기 (stay in)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샌더스는 바울 사상의 중심이 칭의나 이스라엘에 대한 어떤 비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바울 사상의 중심은 '참여' 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슈바이처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초점 삼아 바울의 사상을 복합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라이트는 샌더스가 이렇게 중요한 틀을 제시했으면서 바울 서신의 구절들에 대한 상세한 주해를 하지 않은 점을 비판한다. 어떤 틀이 실제로 얼마나 효과를 발휘하는지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주해 작업은 필수라고 주장하면서 라이트는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라이트의 주장대로라면 나는 아직도 보수 주의 신학파가 되어 버린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특별히 보수 학파에 있는 이들은 샌더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반응했다. 그들은 유대교를 최초의 펠라기우스주의로 보는 옛 관점, 즉 구원을 얻는 방법 측면에서 사람의 자기 노력('율법의 행위')을 거부하고 이신칭의를 설파한 교사로서 바울을 보는 관점을 사력을 다해 부활시키려 했다."

 


 

그리고 라이트는 샌더스를 이렇게 평가하며 마무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더스는 바울 신학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정직한 학자라면 그의 중심 논제에 대한 중대한 반박이 가해지기 전까지는 그를 무시하고 작업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런 반박은 일어날 수도 없고, 나는 그가 주장하는 기본 논점이 이미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바울을 1. 역사, 2. 신학 3. 주해 4. 적용의 측면에서 분석해 들어가는데

 


 

 예를 들어 역사적 측면에서는 바울을 헬레니즘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은 거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고, 정확한 분파는 논쟁이 붙어 있지만 극히 유대적인 사상가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의 생애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바울이 사울이었던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사울'이라는 유대인도 좀 전의 논의처럼 행위로 의를 얻으려고 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이 바란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죽었을 때 천국에 가는 것'에 대해서도 사울과 같은 유대인들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부활을 믿었는데 그 부활은 하나님이 약속한 새로운 이스라엘과 새로운 세계의 생명을 함께 누리도록 모든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사건이며, '천국'에 대한 서구의 일반적인 견해와는 그 의미가 매우 다르다)

 


 

그러던 사울이 회심을 하게 되는데 이 전환의 핵심은 이러하다.

 


 

"다소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눈이 멀고 아마도 멍이 든 채 엎드려서 품었을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의미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역사의 한 중간 지점에서, 사울이 생각하기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역사의 마지막에야 행하실 그 일을, 한 사람 나사렛 예수를 위해 행하셨다는 것이다. 사울은 이스라엘이 이교도들의 손에 고난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옳다고 판결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이교도들의 손에 고난을 받은 후에 예수가 옳다고 판결하셨다."

 


 

  그 이후에 사울은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는데 그 관점은 이전에 지니고 있었던 언약 신학에 깊고 확고하게 계속 뿌리박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스라엘의 숙명이 메시아이신 예수 안에서 집약되고 성취된 것이다)

 


  즉, 바울은 다른 무언가를 위해 유대교를 포기한 게 아니라는 점을 라이트는 강조한다. 즉 바울은 유대교의 오랜 이야기가 나사렛 예수 안에서 그 이야기의 절정과 성취에 이르렀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인이 되어 박해를 받은 것이지 유대교를 버리고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에 대한 새관점을 지지한 톰 라이트)

 


 

그 다음으로는 바울의 '복음'을 이야기해 보자.

 


 

  바울은 하나님과 세계의 이야기가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 안에 집중되고 요약되었으며, 그 예수의 이야기가 바로 전 세계를 위한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믿었다. 바을 신학에서 핵심은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 였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복음'에 대한 논의는 '부활'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는데 바울이 훈련 받았던 바리새인의 배경에서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

 


 

  단지 시체가 다시 살아나는 개념의 '육체의 부활'이 아닐 뿐인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전 15장 44절에서 '영적인 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는 플라톤 철학의 관점에서 (즉 비물질적인) '영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말은 '영'으로 구성된 (어떤 면에서는 물리적인) 육체라는 의미이다.

 


 

  '복음'에 대한 라이트의 말을 들어보자.

 


 

  "바울은 그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어떤 방법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한 것도 아니며 '예수'라는 이름과 '그리스도'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졌던 한 인물이 우연히 달성해 낸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한 것도 아니다. 그는 메시아의 구원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개인적이고 비역사적인 의미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바울의 복음 요약]

1.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꼭 집어 이야기하자면 그의 십자가 안에서, 죄와 사망을 포함한 모든 악의 권세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2. 예수의 부활 안에서 새로운 시대가 동텄다. 모든 예언들이 성취되고, 이스라엘의 유배 생활이 끝나며 모든 세계가 유일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날이 시작되었다.

3.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예수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메시아, 즉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이었다.

4. 따라서 예수는 주이시다. 즉 그는 이 세상의 참 왕이시며, 또 모든 무릎이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바울은 복음이 그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정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복음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실제로 그 힘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와 같이 바울에 대해 살펴보고 나서는 그가 유대교의 유일신론에 충실하면서 그 속에서 삼위일체를 자연스레 바라보고 있었던 점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논증을 펼치고 '칭의'에 대한 논의를 덧붙인다.

 


 

  의의 '전가'라는 개념을 반박하는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하지만 그들이 얻게 될 의가 하나님 자신의 의는 아닐 것이다. 그 의가 하나님 자신의 의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나님 자신의 의는 언약에 대한 그분의 신실하심을 말하며, 그 신실하심 때문에 (이스라엘이 소망하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정당함을 입증하시고, 그들의 정당함이 입증된 혹은 무죄가 입증된 피고가 소유하는 '의'의 상태를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여전히 하나님 자신의 특징이다. 하나님의 의는 자신의 백성이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그가 행동하시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시는 가운데 이스라엘에게 부여하는 상태가 하나님의 의는 아니다."

 


 

(이런 부분에서 기존 개혁주의 신학의 엄청난 반발을 얻었다)

 


 

[하나님의 의 라는 개념을 해석하기 위한 편리한 구성]

A. 하나님 자신의 '의'

 A1. 도덕적인 특징으로서의 의('하나님의'를 소유격 속격으로 본다)

   A1a. 분배적 정의 (마틴 루터)

   A1b. 언약에 대한 신실함 (톰 라이트)

 A2.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의 능력으로서의 의 ('하나님의'를 주격 소격으로 본다)

  A2a. 언약에 대한 신실함에서 오는 행위 (A1b와 이걸 융합시켜야 한다는데?)

 A2b. 언약과 무관한, 세계를 정복하는 행위 케제만)


B. 사람에게 주어지는 '의'

  B1.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로운 상태로서의 의 ('하나님의'를 기원의 속격으로 본다)

   B1a. 전가된(imputed) 의

   B2b. 분여된(imparted) 의

  B2.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혹은 '하나님께 가치가 있는' 특성으로서의 의('하나님의'를 목적격 속격으로 본다)

   B2a.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타고난 특성

   B2b.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특별한 선물로서 차후에 인정되는 특성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책을 참고하도록 하고, 결론을 말하자면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신의 의를 지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실제로 유대교 배경은 매우 강력하게 이런 내용을 찬성하는 전제를 만들기 때문이다. 만일 이에 반대되는 주장을 바울이 했다면 그건 바울이 유대교 배경을 저버렸다는 말이 되므로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라이트는 지금 이 시대에도 참된 바울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되어질 수 있고 이를 통해 믿음과 행함의 온전한 일치와 사회 속으로 뻗어 나가는 실천적 신학이 가능하다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가 논증을 해 나가는 구석구석을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바울 서신에 입각하여 철저한 주해 작업을 해 나가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는 신뢰성이 더해진다.

 


 

  그 동안 교회에서 들어오던 것과는 너무 다른 주장을 하는 것 같아서 어리둥절 하고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그는 철저히 성경과 역사에 기반해 있음을 기억해 보면서 설득 당할지, 거부할지를 선택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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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승구

출판 합신대학원출판부

발매 2013.10.01

 

 

 

  인기 절정인 톰 라이트에 대해 개혁신학(보수신학)에서 입장을 표명한 책이다.

이승구 교수님은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감안해서 읽어야 한다.

 


일단 한국에선 개혁주의 신학이 '보수주의 신학'을 대변하는 용어가 되어 버렸지만 원래 '개혁주의 신학'은 좀 더 넓은 관점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Term이라고 생각한다.

 


 

톰 라이트의 작금의 주장들이 상당히 논쟁적이고, 사람을 고민되게 만드는 요소가 많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약간은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의 이론에 대해 적절한 비판을 해주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 속에서 톰 라이트의 입장은 잘 비판되지 못한다. 그러기에는 뭔가 역량이 부족하다고나 할까?

 


 

이 책은 톰 라이트의 원서들을 읽으면서 그의 입장을 장황하게 인용하면서 인쇄된 책이기 때문에, 두서가 없고 산만한 느낌이 든다.

 


 

뭔가 라이트의 글을 천천히 곱씹으며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다음에 차분하게 입장을 표명하는 느낌이 아니라 일단 이상하다 싶은 부분들은 다 인용을 해 둔 다음에 그 뒤에 자신의 입장을 빠르게 정리해서 몇 자 적는 느낌으로 전개되는 책이다.

 

 

          

                                                               

                                 (톰 라이트)


 

라이트가 [칭의를 말하다]에서 존 파이퍼 목사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무시하면서 논의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 점에 대해서 이승구 교수님은 라이트가 너무 자신의 입장에서만 관찰한 것 같다고 비판을 하긴 하는데, 이게 라이트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의 [칭의]에 대한 부분을 비판할 때도 딱히 그 논리에 비판을 하지는 못하지만 1500년 경의 전통(orthodoxy)에 기대어서 그와 다른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 경고를 할 뿐이다.

 


 

그리고 라이트가 성경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모습을 비판하면서 성경에 전혀 비판을 시도하지 않는 이들을 라이트가 문자주의자들,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냉소적으로 평가절하하는 모습을 다시 비판하는데, 이건 이 책의 저자가 지향하는 '독특한 노선'에 기대어서 비판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오랫동안 논쟁적인 주제가 되었던 성경 비평에 대한 부분이니만큼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비판받는 걸 막을 방도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부분적으로 라이트가 성경을 주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에서 의문이 드는 부분도 있다. 역사적인 접근만을 지향하다 보니, 우리가 들어왔던 해석과 너무 다른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라이트의 원서를 직접 본 게 아니라 이승구 교수님의 인용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라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 때는 성경에 대한 다차원적인 해석을 지지하는 이승구 교수님의 접근법에 마음이 더 간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논의는 이승구 교수님의 의견에 잘 설득되지 않는다.

 


 

  톰 라이트가 천주교적인 성찬 이해를 허용한다고 표현한 것이나 동방 교회의 '예수 기도'가 우리에게도 의미있게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 부분에 대해서 극도의 위험성을 드러내며 경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진리를 순수하게 지켜 내려는 그의 열심이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앞과 뒤가 다 막혀서 유연성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다.

 


 

  또한 라이트가 '신조 중심의 기독교'와 '성경 중심의 기독교'를 구분해서 후자에 집중하자고 역설한 부분은 너무도 당연한 해석인데, 이 책의 저자는 모든 신조 작성가들이나 신조를 믿는 분들이 성경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아갔다는 것을 기억하자며 신조중심의 기독교를 지켜내려 한다.

 


 

  그러다 보니 라이트가 1세기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해야지 16세기의 칼빈에게 충성해서야 되겠는가? 라는 식의 말을 하는 건 당연하다.

 


 

  이승구 교수님의 경고를 들어보자.

 

 

  "그러나 우리는 신학을 한 시대를 대상으로만 하는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모두를 의식하면서 하는 것이다. 라이트는 미래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평가할 것으로 기대하지만, 지금 그가 논의하는 것은 결국 성경에 충실하려는 개혁자들의 논의 방식을 사용해서 개혁자들의 논의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 되며, 이는 결국 종교개혁이 내용적으로는 잘못된 것이거나 지나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라이트는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이런 식이다. 라이트는 종교 개혁을 부정하지도 않고, 그 가치를 폄하하지도 않는다. 놀라운 사건이었고, 하나님의 중요한 이끄심이었음을 믿지만 그 개혁 역시 인간의 손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완전히 무오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보수주의자들은 그런 식의 해석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성경무오설도 문자 그대로 신봉하게 된 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개혁의 형식적 원리인 성경에 충실할 것과 함께, 종교개혁의 내용적 원리인개혁자들이 이해한 이신칭의 교리에도 충실해야만 한다는 점을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이다. 라이트에게 아쉬운 점이 바로 이점이다. 부디 라이트가 종교개혁의 형식적 원리에만 충실하지 말고, 그 내용적 원리에도 충실할 날이 오기를 원한다."

 


 

이런 충격적인 입장을 지지하면서 라이트에게 훈수를 둔다는 게 당혹스럽다.

 


 

세계관 분석 방법론 같은 챕터는 상당히 중요한 접근법이고, 좋은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저자가 충분히 이해하고 인용하며, 정리를 한 건지 약간의 의구심이 생기는 구성과 짜임새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라이트의 입장에 따르면 그 어떤 인간도 신적인 관점을 가질 수는 없으니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진술을 할 수는 없고, 우리 모두 다 제한된 의미에서 각자의 주장을 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라면서 그는 이와 같은 견해를 반박하는데, 그렇다면 종교개혁을 100% 형식적, 내용적으로 다 받아들이는 누군가는 그런 절대적인 진술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는 것일까?

 


 

  글을 보다 보면 이승구 교수님은 워필드, 반틸 등의 성경 해석법을 동의하는데, 코넬리우스 반틸은 쉐퍼의 스승이었지만 쉐퍼조차도 등을 돌린, 극단적인 보수주의자 아니던가...... 진리를 엄밀하게 지키기 때문에 자신은 그 입장에 설 수 밖에 없다고 호소하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늘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는 라이트의 열린 관점, 논의를 하고자 하는 넓은 자세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는데 결국 그의 말에 따르면 이성논증은 하지 말아야 하고, 학문적인 접근은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책의 저자는 자신도 이성을 활용하여 학문적 접근을 하면서 라이트를 비판하고 있으니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치 절대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는 상대론자들,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의 '그 주장'을 절대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모순되어 보인다.

 


 

  세부적이고 사소한 해석에 있어서는 이승구 교수님의 라이트 비판이 동의가 되는 부분이 있고, 고민이 되는 영역도 있으나 크게 봤을 때는 결국 이승구 교수님은 자신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잣대를 가지고 라이트의 안 좋은 부분을 꼬집어 낸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24장에 대해서 대개 영적인 해석을 많이 첨가하는데 라이트는 이 속에 예수님의 재림이나 '때의 징조'에 대한 생각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부분들은 좀 더 고민이 된다. 그리고 다차원적인 해석의 용도로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다고 믿는 견해를 나는 지지한다.

 


 

  그리고 이 책은 라이트가 공헌한 부분도 앞에 조금 써주긴 하지만 대부분은 뒤에서 잔뜩 비판하고 싶은 전조에 불과하다.

 


 

  라이트가 지닌 하나님 개념에 대해서는 칼 바르트를 따르는 이들에게서 듣던 말을 라이트가 한다면서 그 말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냥 자신은 칼 바르트 입장을 반대하고, 정통적인 해석이 맞다고 믿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비판의 근거가 되나 보다.

 

(21세기의 C.S 루이스라 불리며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톰 라이트, 퍼옴)


 

  그리고 예수님의 제사장직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고 선지자직(그리고 왕직)에만 집중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트집을 잡는데, 이런 건 책의 분량을 채우기 위한 유치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라이트보다도 좀 더 균형잡힌 성경해석자들을 갈구하게 되고, 우리들의 성경해석에서 이와 같이 한 해석에 집착하여 균형을 깨는 무리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이 논의를 통하여 우리들은 스스로 흥미롭다고 발견한 한 해석에 사로잡혀서 성경 해석 전체를 그르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로고 주의하여 가야 한다는 큰 교훈을 얻게 된다."

 


 

  라이트의 시각이 균형잡히지 않았다면 어떤 것이 균형잡힌 시각일까? 역시 답은 정통주의적 해석을 충실히 따라주는 게 바로 '균형 잡힌 것'이라고 그는 말할 것이다.

 


 

  일단 이 책은 라이트의 입장을 너무 곧이 곧대로 듣지 말고, 좀 더 비판적인 눈으로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나도 라이트의 글을 보면서 놀라곤 하지만, 동의가 안되는 부분이 몇 가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승구 교수님의 입장이 더 균형잡힌 시각이라고 보이진 않는다.

 


 

  반틸의 전제주의를 다시 가져오자고 말하는 순간, 그의 입장은 그의 노선은 오른쪽 그 어딘가에 고착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관련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저자의 '진리'를 향한 열정과 노력에는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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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라이트/ 출판 IVP/ 발매 2015.08.28.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이며 신약에 나온 '기도'와 관련된 성경 구절을 한 챕터 씩

주제로 잡고, 다양한 기도의 유형과 방식에 대해 쉽게 설명해 둔 책이다.

 

  톰 라이트의 저서 치고는 어렵지 않게 쓰여 있으며 '기도'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높여 주는

나름 유용한 서적이라고 볼 수 있다.

  C.S Lewis 의 시대가 지나가고 라이트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우스겟 소리처럼 그의 저서가

요즘 폭발적으로 번역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번 책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며 기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를 가볍게 상승시켜 주는 책이 될 것이다. 기존에 라이트가 보여줬던 복잡한 신학이 녹아 있는 책은 아니기 때문에 지레 겁 먹고 이 책을 읽지 못하는 불상사는 없길 바랄 뿐이다.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책이라서 개인적으로 의미가 깊은 책이다.

 

 라이트의 글을 좋아하고, '기도'에 대한 가벼운 지식이 필요한 이들에게 1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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