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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신광은

출판 포이에마

발매 2014.02.12

 

 

 

 

 

  근 몇년 간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많은 감동을 받았던 책이다. (꼭 책의 저자의 주장에 동의해서는 아니다)


 

  저자의 신학적 노력과 다양한 학문 활동이 집약된 농축된 저서라고 볼 수 있다.

 


 

  [메가 처치 논박]을 써서 한국 교회의 괴상한 문제점의 중요한 한 측면을 밝혀냈던 신광은 목사님이 이번에는 한층 더 강력해진 '한국 교회의 문제의 '원인'을 찾아서 나타났다. (메가 처치 논박에서는 문제 분석이 혁명적으로 탁월했지만 해결책 제시는 미흡했던 아쉬움이 있다. 이번 책은 해결책이 구체적인 것은 아니지만, 논리상으로나 추론상 훨씬 더 만족스러운 결론에 도달했던 것 같다)

 


 

  아르뱅주의와 메가처치 현상이 더해져서 한국 교회가 병들었다고 주장하는데 설득력이 상당하다. (이러한 원인 이외에도 중요한 몇 가지 측면이 더 있다고 생각하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르뱅주의라는 개념은 정말 신선하다)

 


 

  이는 아르미니우스주의 + 칼빈 주의의 합성어인데, 좋은 의미로 합성된 의미는 아니고 각 교리에서 필요한 부분만 쏙 빼서 하나로 합쳐 버린 변종 교리를 의미한다.

 


 

  너무 중요한 내용이 많아서 두고두고 별도의 글로 인용해서 올릴 예정이다.('아르뱅주의가 한국 토양에 자리를 잡은 역사'는 글로 따로 올릴 예정이다)

 


 

 이 책은 칼빈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 자체에 대한 공부를 위해서도 요긴하게 활용될 수 있으니 참고하도록 하자.

 


 

 저자는 종교개혁이 지닌 인간적인 문제점을 부정하지 않고,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장,단점,윤리관 등을 균형감 있게 서술한다.

 


 

그리고 논리상으로는 합치될 수 없는 두 사상을 어떻게 융합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데,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부분이 참으로 신선하다.

 


 

-> 정론과 자유의지론이 융합될 수 있는 방법이 논리적으로는 도통 없다 보니 여러 가지 방법들이 도입된다. 둘 다 100% 작용하는 상호 모순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둘이 50%씩 작용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저자는 가톨릭 신학자인 몰리나의 '중간 지식'이라는 개념을 활용한다. (이 부분이 정말 신선하다)

 


 

'중간지식'은 다른 말로 하면 '조건적 지식'이다. 이는 하나님의 본성상 아는 지식도 아니고, 하나님의 의지로 알게 된 지식도 아니다.

[일단 '지식'은 하나님이라면 본성상 필연적으로 알 수 밖에 없는 지식인 '본성적 지식'하나님 자신이 역사 속에서 사건을 예정하고, 결정한 것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알 수 밖에 없는 지식인 '의지적 지식'으로 구분 가능하다. 예를 들면 '수학적 지식, 과학적 지식' 등은 하나님의 본성상 알고 계실 것이다. 이런 걸 '본성적 지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의지가 달린 문제이므로 '의지적 지식'이라고 볼 수 있다. ]




저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이 지식은 하나님이 탁월한 예지력으로 어떤 사람이 어떤 조건 아래 A를 선택할지 혹은 B를 선택할지를 내다보는 지식을 말한다. 비유로 말하면 바둑의 고수가 초심자와 바둑 둘 때 초심자의 바둑 수를 미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과 유사하다. 초심자는 무척 고심해서 바둑을 두지만 고수는 자신이 어디다 돌을 놓으면 초심자가 그 다음 어떤 식으로 돌을 놓을지를 훤히 꿰뚫고 있다. 그래서 고수는 하수가 실수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 때 고수는 모든 가능한 상황을 예지하고 그 예지에 기초해서 특정 상황과 조건을 만들어 초심자로 하여금 실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자, 이 때 하수가 실수를 했다. 그러나 그것이 고수가 하수에게 강제적으로 시킨 일일까? 아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결국 초심자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고수가 예측한 실수를 했다. 고수는 다만 상황을 조성했을 뿐이다."

 


 

이런 식의 서술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신학적으로 너무 훌륭한 개론서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칼빈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 등을 다 따로 정리해 둬도 좋을 것 같다.

 


 

간략하게나마 양측 교리를 살펴보고,아르뱅주의에 대해 살펴보고, 저자가 주장하는 3개의 우물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이야기 해 보도록 하자.

 


 

[칼빈주의 5대 교리 TULIIP]

 


 

T: total Depravity : 전적타락

U: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L: Limited Atonement : 제한속죄

I: Irresistable Grace: 거부할 수 없는 은혜

P: Perseverance of the Saints : 성도의 견인

 


 

T: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구원에 관한 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U: 구원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받을 자(택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비택자) 모두를 미리 정하셨다.

L: 예수 그리스도는 택자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비택자를 위해서 피를 흘리실 이유가 없다.

I: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실 때 인간은 이를 거부할 수 없다.

P: 한 번 구원받은 신자는 영원히 구원받는다. 그가 가끔 낙심하거나 실패하거나 죄를 지을 수 있을지라도 그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저자는 칼뱅주의의 한계를 적절하게 비판한다. 몇 군데만 살펴보면 이미 버림 받을 자를 예정하셨다는 '이중예정' 논리 자체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십자가 사랑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두 가지 모순되어 보이는 개념을 억지로 하나를 포기하면서 하나로 합치려 하지만, 오히려 성경은 변증법 적인 모순을 그대로 두고 끌고 가는 것을 더 이야기할 때가 많다.

 


 

  제한속죄 개념도 이상하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라는 구절에 대한 칼빈주의측 논의를 들어 보면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모두 해석이 이상하다. 누가 들어도 끼워 맞추기 해석일 뿐인 주장을 한다. 무엇보다도 제한속죄를 하는 신이 과연 자비로운 신이고, 공평한 신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긴 하다.

(사실 이 책에서는 T,U,L,I,P 가 다 비판을 받는데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개혁주의도 계속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말이 이래서 중요한 것 같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을 하는 분들은 극도로 강경해서 자신들의 '교리'를 하나도 빠짐 없이 다 지키지 않으면 그들은 '거짓'이라고 매도할 때가 많다.)

 


 

   그건 그렇고 칼빈주의자들의 윤리적 추진력은 '두려움'이었는데 왜냐하면 자신이 '택자'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진리를 지키려 애를 쓰고 그러한 열매를 통해 자신이 '택자' 임을 입증하려 한 것이다.

 


 

  [참고로 칼빈주의의 TULIP 교리는 그 이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와 논쟁을 벌이면서 만든 '예정론'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미-펠라기우스 주의가 등장했고 이게 상당 부분 아르미니우스주의와 닮았다]

 


 

  결국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아우구스티누스-칼빈주의를 거부하고, 동시에 자력구원을 주장한 펠라기우스도 거부함으로서 제 3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5대 주요 교리]

 


 

Natural inability (자연적 무능력) :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나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로 회복되었다.


Conditional Election (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는 자를 미리 알고 그들만 자기 백성으로 예정하신다. 하나님의 예정은 복음을 믿을 것이라는 조건에 따른다.


Unlimited Atonement (보편속죄):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한 차별없이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


Resistable Grace (저항할 수 있는 은혜) : 하나님께서 베푸신 십자가의 은혜는 이를 믿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믿지 않기로 거부할 수도 있다.


Conditional Perseverance (조건적 견인): 신자는 인내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며, 하나님은 그러한 신자를 붙드신다.

 


 

칼빈주의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아르미니우스주의가 태동했다지만 저자는 이 5개의 교리도 차근차근 반박해 나간다.

(난감하겠지만, 논리가 상당히 탄탄하다)

 


 

가령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죄와 악을 개인의 도덕적 결단과 책임의 문제로 환원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에게 저자는 2개의 예시를 든다.

 


 

1) 중독현상 : 중독 환자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할까? (ex) 우리가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대로 알코올 중독 환자는 술을 마실 자유는 있어도 마시지 않을 자유는 없다. 이와 같이 도무지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중독현상은 아르미니우스주의보다 칼뱅주의에 더 잘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2) '집단악' 개념 : 개인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로 '집단악'을 서술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 도대체 뭐가 맞다는 걸까? 결론은 둘 다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가령 알코올 중독자 모임인 AA(Alcoholic Anonymous) 에서도 12단계 치유법이 있는데 그 중 1단계가 "우리는 알코올에 무력했으며 스스로 생활을 처리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고 시인했다" 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사실(칼뱅주의의 전적 타락설인 T)을 자기 스스로 인정(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자유의지론)해야만 치유가 가능한 것이다. 역설적인 결론이다.


  참고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윤리적인 추진력은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 티켓이 절대로 취소되지 않는다는 칼빈주의와 달리 구원은 -> 성화 -> 영화로 진행되므로 그 구원을 삶으로 이뤄 나가라는 신학을 지지하므로 유지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저자가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5대 교리를 하나씩 반박해 나가는 건 대단하다.)


  결국 이와 같은 지점까지 왔는데 이제 아르뱅주의를 봐야 한다.


  아르뱅주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여 구원 열차를 거머쥘 수 있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그렇게 구원을 받고 회심을 했으면 이제 칼빈주의의 성도의 견인 교리처럼 결코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하는 퓨전 신학이다.


  이런 이상한 신학이 한국 교회에 정착을 하면서 신자들은 윤리적인 추진력도 잃어 버리고, 비성경적인 정신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책 전체가 거대한 논리 구조를 따르고 있는데 깔끔하고 잘 읽힐 것이다.)

 


 

아르뱅주의의 특징은 1) 자기 중심적 2) 반지성주의 3) 편의주의 4) 맹신주의 다.

 


 

  구원의 근거를 '구원의 확신' 자체에 두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만 있으면 구원받게 되는 거다. 그러다 보니 극단적인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진리'가 구원 받은 믿음의 내용이 아닌게 되어 버린다. 믿음의 내용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믿음' 자체가 되어 버림으로써 '자기 믿음을 믿는 믿음'이라는 거짓 체계에 빠져 버린다.


(저자는 한국 교회에 신천지가 판을 치게 된 것도 '아르뱅주의' 때문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한국 교회의 윤리적 실패를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 측면에서는 나도 동의한다. 그 이외에도 '율법주의, 근본주의 신학' 으로 인해 성경의 위치가 본연의 자리를 이탈하면서 '그들이 성경을 활용하는 방식에 성도들이 속게 된 점'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다음 저자는 개신교 구원론이 3개의 우물에 빠졌다고 주장하는데 1) 그리스 철학의 우물 2) 아우구스티누스의 우물 3) 루터의 우물이 바로 그것이다.

 


 

1. [그리스 철학의 우물]

 

  먼저 그리스 철학의 명제적, 명사적, 존재론적 패러다임에 갇혀 버리는 바람에 칼빈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 모두 다 성서 해석에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학적이 아닌 성서적 해석법을 창안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저자는 그리스 철학의 논리학이 전수되면서 모든 성경의 진리를 '명제화'시켜서 참과, 거짓으로 판단이 가능한 것처럼 만들어 버린 점도 지적하는데 문제는 성서의 모든 내용이 명제화 될 수 있냔느 것이다. 성서의 계시란 역사를 의미하며 역사는 삶인데 그 삶을 다 명제화 시키는 건 말이 안 된다. 명제화 되지 않는 성서의 내용은 결국 제거되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설도 그리스 철학의 논리학에 따른 전제(방법론)으로 도출되는 결론이기 때문에 저자는 이와 같은 방법론 자체를 폐기하고 나면 이런 오류도 걷히게 될 것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결국 성서의 진리관은 '인격적 진리관', '실존적 진리관'이지, '명제적 진리관'이 아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탐구하던 그리스 철학자들과 달리 성서는 '진리는 누구인가?' 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논리적 지식'이 아닌 인격체에 대한 '관계적 지식', 즉 '야다(yada)'를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를 명제적 진리, 그리스 철학의 방법론으로 전락시킨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 -> 프란시스 쉐퍼 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사실 틀리지 않다. 아퀴나스는 워낙 유명하고, 쉐퍼도 명제적 진리를 진리에 이르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2.[아우구스티누스의 우물]

 

  그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펠라기우스의 행위 중심적 구원관에 반대되는 은총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다. 그런데 실제 성서 속에는 은총과 행위 사이에 긴장은 있어도 대립은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성서에서는 은총과 공로가 대립할 뿐이다. 즉 행위를 앞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공로를 앞세우는 게 문제인 것이다. 오히려 은총과 행위는 서로 함께 가는 것이 더 성경적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이 격화되면서 그는 상대측의 주장을 거부하는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의 원인이 될 만한 행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버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강조하게 되고 인간은 믿음조차 자발적으로 가질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 여기서 예정론이 추론되어 버린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은 오류 투성이다.


  은총이 보존되려면 인간은 자유도 없고 지성도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성경에도 바로 왕이 이스라엘 민족을 놓아주지 않을 때 마음이 완고해진 것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완고하게 만든 것이기도 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는 두 표현이 다 등장한다). (가룟 유다 건도 마찬가지다)


  성서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주권은 충돌하지 않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은총이 마치 대립되는 듯이 만들어 버린다.


  이 책의 저자는 공로는 은총을 파괴하지만 행위와 은총은 대립되지 않기 때문에 '믿음'에서 인간 편에 주도권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해서 성경에 위배되진 않는다고 말하며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 노동자와 고용자의 관계, 황산벌 전투 등의 비유를 들어서 멋지게 자신의 이론을 설득시켜 나간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는 톰 라이트의 '관점'을 상당히 많이 받아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논리적이고 탁월한 글을 쓸 수 있는 저자도 그의 논리에 설득을 당했나 보다. '칭의'에 대한 개념도 라이트의 노선을 따라가는 듯 하다]


 어쨌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행위 라는 대립구도 형성에 의해 은총은 '행위 없음'을 의미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 도식은 루터와 에라스무스 논쟁,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논쟁을 거쳐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3. [루터의 우물]

 

  오직 믿기만 하면 칭의가 수여된다고 주장하는 그의 신학으로 인해 그저 믿는 순간이 칭의의 순간이고, 칭의의 순간은 구원의 순간과 동일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바울의 칭의론을 벗어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 믿기만 하면 구원 받아 버리는 격이 되므로 루터의 칭의 중심주의는 윤리적 추진력이 없어진다. 그러다 보니 칼빈은 이 칭의 뒤에 '성화'가 이어지는 도식을 그리려 했고, 그런 식으로 윤리관을 어느 정도 되찾긴 했지만 깔끔한 서술이 안 되는 문제점이 생긴다.


 결국 루터로 인해 한번의 결단의 체험, 놀라운 영접의 체험으로 인해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믿게 되어 버린 것이다.

(좀 애매하긴 하다. 왜냐하면 루터 뿐만 아니라 존 웨슬리나 스펄전, 무디 등도 이와 같은 회심 체험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터의 교리대로 칭의 중심주의가 되어 버리면 그 회심 체험 한번으로 모든 구원이 해결된 것처럼 살아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정교한 교리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후반에는 바른 구원관을 제 3의 대안으로 모색하면서 이 책은 마무리가 된다.

 

 

 

두고두고 공부하면서 더 나은 대안이 없는지 모색해 봐야 겠다.

 


 

진실된 마음으로 고민하고 있던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은 가뭄에 단비와 같이 훌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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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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