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유신론 믿음을 파기하는 상황이 전혀 없는가?>

 

물론 우리 대부분은 귀도 드 브레와 같은 영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

 

우리 가운데 고통 앞에서도 위로와 만족을 누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칼뱅이 지적하듯이, 우리 대부분은 때로 하나님이 정말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고 생각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심지어 영적인 삶의 위대한 스승들도 때로는 영적인 어둠에 빠진다.

 

그리스도인은 인식적이며 영적인 상황이 사람마다 천양지차임을 인정해야 하며, 같은 사람조차 때에 따라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악을 보여 주는 사실이 기독교 혹은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가 되는 상황이 전혀 없는가?

 

나는 "십중팔구 없다"가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신의식이 잘 작동하지 않는 사람, 아무 생각 없이 수박 겉핥기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 믿음에 실상 아무런 활기나 깊이나 생기가 없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어쩌면 그런 사람은 악을 보여 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면 유신론 믿음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곧 이 사람이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를 가졌음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이런 사람이 그런 파기자를 가질 때는 오로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계속 믿는 것이 올바른 인지 기능에 반하여 비합리적일 때뿐이다. 이런 사람은 그런 파기자를 가질 때는 오로지 그런 상황에서 유신론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 우리의 인지 기능의 설계 계획의 일부일 때 뿐이다.

 

-> (이래서야 논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려나..... 기독교적 답변으로는 최상의 답변이긴 한데....)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설계 계획이 그런 상황에서 유신론 믿음을 포기할 것을 명령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이 설계 계획에는 신의식이 올바르게 기능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인지 과정이 올바르게 기능하지 않을 때 일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설계 계획의 일부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설계 계획의 일부라기보다는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럼에도 우리는, 단지 논증을 위하여, 실제로 그런 사람에게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가 정말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 중요하게 알아야 할 점은, 만일 그런 사람에게 파기자가 있다면 다만 그의 지성 구조 어딘가에서 일어난 합리성의 고장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신의식이 오작동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가 처음에 다루었던 질문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라는 인격체가 존재한다고 믿는 S라는 사람은 악을 보여주는 사실에서 파기자를 가지는가?

 

우리는 이제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없음을 알 수 있다. S가 게속하여 유신론 믿음을 가진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 안에서 적어도 어느 정도는 신의식이 올바르게 작동함을 보여 주는 증거다. 어쩌면 이런 사람도 (이런 상황에서 믿는 데 실패하는 것이 설계 계획의 일부라면) 파기자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면 설령 악을 보여주는 사실에 관한 지식에서도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를 가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결론 짓는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물론 나는 기독교 혹은 유신론 믿음을 무너뜨리는 파기자가 전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런 파기자의 위치에 오를 만한 가장 그럴듯한 후보 셋 -역사 비평, 다원주의, 그리고 고통과 악-이 사실은 파기자로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강력히 주장한다.)

 

-> 역사 비평 쪽이나 다원주의 쪽은 뒤에 강영안 교수님 해설 보면 나름 이해하기가 쉽다. 그의 보증 3부작 전체 책을 다 읽어봐야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긴 하다......c.s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 이나 [기적] , [고통의 문제] 등의 책이 얼마나 귀한지 다시 한번 알 수 있다.......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긴 하다. 나중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책을 읽고 보완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지식과 믿음] , 앨빈 플랜팅가 저 -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개연성은 이 문제와 거의 관련이 없음을 주의하라.

 

그런 사람은 전능하고 전지하며 온전히 선한 인격체가 이런 역겨운 일을 허용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추론하지 않으며,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려는 존재라면 이런 역겨운 일을 허용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추론하지도 않는다.

 

여기 나오는 위로는 개연성을 고려한 사유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하게 고려할 것이 또 하나 있다. 하나님이 실현하실 수도 있었던 최고의 가능 세계에,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위대한 선인 하나님의 성육신과 구속이 - 그러나 물론 죄와 고통도 -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님은 이 가능 세계 가운데서 하나를 실제 세계로 고르셨으며, 그 세계에서 인류는 고통을 당한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죄와 고통 뿐 아니라, 구속을 받고 하나님과 영원한 사귐을 누릴 경이로운 기회도 존재한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견뎌야 할 고통을 훨씬 능가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선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영원한 사귐을 누릴 기회를 부여받은 우리 인간은 매력이 넘치는 삼위일체의 교제 자체에 동참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어쩌면 이런 초대는 타락하여 고통을 겪었으나 구속받은 피조물에게만 부여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인류의 상태는 아무런 죄와 아무런 고통이 없었을 때보다 훨씬 더 나아진 셈이다. "오, 복된 죄로다" (O flex culpa) 라는 말은 사실이다!

 

따라서 신앙을 가진 사람(중생의 과정을 겪고 있는 사람)은 역시, 아퀴나스/칼뱅 모델에 따르면, 하나님의 임재와 선하심을 어느 정도는 뚜렷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라는 인격체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상당한 보증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도, 신의식이 손상되지 않았던 사람처럼, 무시무시한 악을 보여 주는 사례를 직면할 때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을 따르고픈 유혹을 거의 혹은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도 당황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도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세계에 끔찍한 악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서 행동하고 따지고픈 충동을 느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믿음을 포기하는 것은 선택 가능한 방안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만일 그들 자신이 두드러진 고통을 겪는다면, 그들은 시편 119:75~76 저자와 뜻을 같이할지도 모른다.

"오, 야훼여, 나는 당신의 율법이 의로우며 당신이 신실하심 가운데 나를 괴롭게 하셨음을 압니다. 당신이 당신 종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이 내 위로가 되게 하소서."

 

사실 이들은 심지어 복된 만족을 누릴지도 모른다. 여기서도 귀도드 브레[Guido de Bres, 1561년 네델란드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의 저자]가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에 아내에게 쓴 편지를 보라.

 

나는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있는데, 그런 나를 당신의 슬픔과 고통이 괴롭게 하기에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오. 나는 당신이 한없이 슬퍼하지 말기를 아주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하오...

나는 지금 개미 한 마리도 빠져 나가지 못하는, 비참할 대로 비참한 지하 감옥에 갇혀 있소. 어찌나 어둡고 음울한지 감옥이라는 이름이 딱 들어맞는구려. 공기도, 가장 나쁜 공기조차 그저 조금 맛볼 뿐이오. 내 손과 발에는 무거운 쇠가 채워져 있소. 이것이 나를 끊임없이 고문하면서, 심지어 내 뼈가 드러날 정도로 내 살점을 파먹었소. 그러나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내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약속을 버리지 않으시고, 내 마음을 위로하시며 내게 가장 복된 만족을 주신다오.

 

드 브레는 큰 고통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가장 복된 만족"을 누렸다.

 

 

물론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어쩌면 하나님 같은 인격체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쩌면 드 브레 자신이 줄곧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계속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코 비합리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고통 가운데도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를 갖기는커녕,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억누르고 (어쩌면 소원 섞인 생각을 통해) 어쨌든 계속하여 하나님을 믿었던 것 같다. 아니, 그의 믿음은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산출하는 인지 과정 - 다시 회복된 신의식, 성령의 내적인 자극-이 올바르게 기능한 결과다.

 

-> (이 부분의 표현이 아마 악과 고통의 문제의 극한의 답변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마지막 신의식, 성령의 내적 자극이 회복된 상태라는 부분은 논증의 영역은 아닌 것 같다.

 

의심하거나, 회의하거나, 의심하는 순간 '망가진 신의식, 성령의 내적 자극의 약화' 라고 말을 듣게 되니 참 곤란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러면 서로 토론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

 

-[10부]에 계속-

-[지식과 믿음], 앨빈 플랜팅가 저 -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다른 신자는 어떤가?>

 

그러므로 아퀴나스/칼뱅 모델에 따르면, 철저히 합리적인 사람에게는 악을 보여주는 사실들이 유신론 믿음을 무너뜨리는 어떤 종류의 파기자도 되지 않는다.

 

-> (앨빈 플랜팅가가 취하는 전략이 기존 유신론을 이성론으로 변증하기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와 장 칼뱅의 모델을 활용하고, 더 나아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유신론을 변증하기 위해 자신만의 확장된 아퀴나스/칼뱅 모델을 활용한다.....책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고, 나름 흥미로운 논증법이다.)

그럼에도 (교활한 반신학자가 주장하게 될 내용에 따르면) 고작해야 이런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 실제로 존재하는 신자-가 따르는 유신론의 파기자가 이 세상의 불행 속에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과 관련하여 의심스로운 연관성을 가질 뿐이다.

 

기독교 교리 자체에 따르면, 어떤 인간도 본디 처음에 가졌던 완전한 합리성을 향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식은 죄 때문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우리 대다수는 거의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은 (어쨌든 거의 항상)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조금은 그림자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것으로 인식한다.

 

하나님의 존재가 다른 사람이나 뒤뜰에 있는 나무의 존재만큼이나 뚜렷이 드러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철저히 합리적인 사람에게는 악을 보여 주는 사실을 아는 지식이 유신론의 파기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타락한 인간에게는 (주장되는 바에 따르면) 파기자가 될 수 있다.

 

-> (그런 인식,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너는 '신의식'이 줄어 든 거고, '성령의 내적 감각'이 감소된 상태로구나....너는 '합리적이지 못하고, 타락한 상태로구나' 라는 이야기를 '앨빈의 주장대로라면' 하는 건데........이래서는 토론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이게 논증을 같이 할 수 없는 이유 아닐까....도킨스와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만나도 답이 안 나오는 이유....)

 

하지만 이런 논지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기독교 믿음의 또 다른 특징을 무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신의식이 입은 손상은 신앙과 중생의 과정에서 원리상 그리고 점차 고쳐진다. 신앙의 사람은 다시 한번, 적어도 몇몇 경우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아주 명백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게다가 그런 사람은 성육신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생각조차 불가능한 기독교 이야기 전체의 찬란함, 그 자신이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통과 죽음에 관해 듣고 안다.

 

 

물론 이런 지식이 하나님은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지식은 여기서 대단히 중요하다.

 

내가 엄청난 잔학 행위에 관하여 하나 더 읽으면 아마 동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럴 때도 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서 드러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큰 사랑, 그리스도가 기꺼이 자신을 비워 종의 본질을 입으려 하신 것, 죄로 가득한 우리 인간이 구속을 얻을 수 있게 고난과 죽음을 감내하신 것, 그리고 내 신앙도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이 왜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왜 사람들이 서로 고문하고 죽이도록 내버려 두시는지,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나 공산주의처럼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사회적 실험을 왜 허용하시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기꺼이 우리와 고통을 함께 하시며, 그 스스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시고,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나는 특히 역겨운 악을 보여주는 사례를 만나면 하나님께 묻고 싶어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화를 내며 격분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고통이 어떤 유익에 어떻게 이바지하는지 눈곱만큼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나 혹은 나의 가족이 그분의 (당연히 고상한) 목적을 촉진하려고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그럴 때도 나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기꺼이 더 큰 고통을 감내하려 하심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고, 어쨌든 입을 다물게 된다.

 

-> (결국 이게 최선의 답변인가 보다.....약간은 허탈할 수 있다. 신앙적 고백으로 마무리 되는 수 밖에..이 책의 논증은 늘 훌륭하다..그러나, 무신론자나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분노하는 자들이 이 글로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다.)

 

-[9부]에 계속-

-[지식과 믿음] , 앨빈 플랜팅가 저 -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철저히 합리적인 사람에게는 파기자가 없다>

-> (이게 앨빈 플랜팅가의 주장이다.....음....유신론의 파기자가 되기는 좀 애매하긴 하다...그러나 기독교 믿음이 이야기하는 사랑과 능력을 갖춘 인격신과 고통을 화해시키는 작업은 상당히 어렵다. 결국 앨빈도 명확한 답은 내리지 못하고, 개인의 신앙 고백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간다.....우리 인간이 알아낼 수 없는 한계의 범주인 것일까...)

 

우리가 이런 주장 - 악을 분명히 살펴보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파기자를 발견한다는 주장-을 고찰한다고 가정해 보자.

 

먼저, 믿음의 파기자는 내가 믿는 것의 나머지에 의존한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나의 새로운 믿음이 옛 믿음의 파기자인지 여부는 내가 달리 믿는 것이 무엇이며 나의 경험이 어떠한지에 의존한다.

 

나는 그 나무가 단풍나무라고 믿는데, 여러분은 내게 그 나무가 실은 느릅나무라고 알려 준다.

 

만일 내가 여러분이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며 진실을 말하기를 목표한다고 생각하면, 그러면서 내가 여러분이 나무에 관하여 나보다 훨씬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혹은 여러분이 스스로 진실이라 여기는 것을 말하고 있을 확률이 50 대 50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이 한 말은 그 나무가 단풍나무라는 내 믿음을 파기할 것이다.

 

세계가 보여 주는 악의 공포를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가 될 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먼저 논증하고 싶은 것은, 만일 고전적 기독교가 참이라면, 철저히 합리적인 사람, 그 인식 능력이 올바르게 기능하는 사람에게는 악을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파기자가 못 된다는 사실이다.

 

고전적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어쨌든 아퀴나스/칼뱅 모델에 따르면), 여기에는 신의식이 올바르게 기능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런 과정이 올바르게 기능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친밀히, 자세히, 생생하게, 분명하게 아는 지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 영광, 선하심, 능력, 완전성, 경이로운 매력, 달콤함을 깊이 알 것이다.

이미지는 그냥 퍼온거고, 아래 내용과는 무관함.

 

그리고 이런 사람은 자신의 존재에 관하여 확신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의 존재도 확신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 하나님이 거룩하고 불타는 열심으로 악을 증오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 하나님의 세계에 이런 악이 존재함으로 인해 당황할 수도 있으나, 그래도 하나님 같은 인격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아마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도 악과 고통에 직면하면 하나님이 왜 이런 것을 허용하시는지 자문할지도 모른다.

 

악을 보여주는 사실은 행동하게 만들고 탐구하게 만드는 자극제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그 답을 찾지 못하면, 자신이 모르는 이유가 틀림없이 하나님께 있다고 결론지을 것이다.

 

-> (신자에게 이런 마음가짐 말고 달리 이 문제를 영리하게 피할 방법이 없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인격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추호도 의심하려 하지 않는다.

 

아퀴나스/칼뱅 모델에 따르면, 철저히 합리적인 사람에게 악의 존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파기자가 되지 않는다.

 

-[8부]에 계속-

-[지식과 믿음], 앨빈 플랜팅가 저 -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그러나 어쩌면 여기서는 그것만이 현실적인 반응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이런 식으로 반응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합리적인 반응이 있지 않을까?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어떤 상황에서는 고통과 악이 실제로 이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무너뜨리는 파기자 역할을 할 수 없지 않을까?

 

인간이 타인에게 저지르는 잔학 행위 목록은 끔찍하고 섬뜩하다.

 

그뿐 아니라 그 목록이 아주 길고 자꾸 반복되다 보니 결국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럼에도 가끔은 새로운 깊이에 다다른다.

 

 

보스니아의 한 젊은 무슬림 엄마는 남편과 아버지가 지켜보는 앞에서 거듭 강간을 당했다. 이 엄마의 아기는 바닥에서 엄마 옆에 누워 비명을 질렀다. 이 엄마에게 잔학 행위를 저지르던 사람들이 마침내 이 여인에게서 떨어지자, 엄마는 아이를 보살피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강간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재빨리 아이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엄마 무릎에 내던졌다.

 

이런 일은 끔찍함 그 자체다. 생각만 해도 고통스럽고, 그대로 마음에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럽다. 이런 일을 이처럼 차가운 철학 토론의 소재로 끌어들인 것 자체가 비참하며 인정이 없는 짓처럼 보일 수 있겠다.

 

-> (이런 표현들 중요하다. 사실 이게 이성 논증의 극한이지 않나 싶다.. 이성의 극한이 가장 감정적인 문제로 귀결된다라....신정론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저자를 아시면 제보 좀 부탁드립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해 보자.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이렇게 끔찍한 악을 마주했을 때 전능하고 전지하며 온전히 선한 인격체가 있어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감독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어쩌면 완전한 인격체라면 이런 일을 허용할 수 없다고 증명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개연성이나 증거에 입각하여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훌륭하게 증명하는 논증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나님의 명성에 걸맞게 사는 존재라면 이와 같은 일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누가 봐도 명백한 일 아닌가?

 

 

그렇다면 설령 악에 근거한 좋은 논증이 없다 해도, 유신론 믿음의 파기자가 여기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이와 같은 것이 악에 근거한 반유신론 논증 가운데 가장 강력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이 주장은 우리가 사는 이 음침하고 불행한 세상이 펼쳐 보이는 악의 무시무시한 공포를 제대로 지각하고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같은 존재가 그런 일을 허용하리라고 주장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단박에 알린다.

 

이는 일종의 역 신의식이다. 어쩌면 악에 근거한 훌륭한 논증은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논증도 필요하지 않다.

 

이런 종류의 호소를 전개할 때는 논증을 자세히 말하는 방법이 아니라, 대화 상대방을 세상의 고통과 악이 지닌 처절한 공포가 그야말로 진저리를 치게 분명히 나타나는 상황에 두는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실제로 반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어떤 논증을 제시하는 것은 역효과를 낳는다.

 

그런 논증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고, 그의 눈이 역겨운 고통을 외면하게 하며, 가능 세계와 개연성 있는 기능, 그리고 다른 불가사의를 둘러싼 무미건조한 토론으로 도피하게 한다.

 

그런 논증은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파기자인 상황에서 주의를 돌리게 한다.

 

-[7부]에 계속-

-[지식과 믿음], 앨빈 플랜팅가 저 -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십수년간 신정론 이슈와 관련된 책은 기회가 될 때마다 찾아본다.

이를 어떻게 인지적으로, 감정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이들에게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0년 혹은 35년 전까지만 해도, 악에 근거한 논증 가운데 사람들이 선호했던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논리적 비일관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논증이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라는 인격체(전능하고, 전지하며, 온전히 선한 인격체)가 존재한다고,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두 미음이 모두 참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이렇게 주장된다.)

 

여기서 주장은 하나님의 존재와 악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신론자가 둘 다 확실히 믿는 이상, 유신론 믿음은 분명히 비합리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과 악을 함께 긍정하는 것이 명백한 모순이라거나 꼭 틀렸다고 볼 필요는 없음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

 

악의 존재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며 완전히 선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광범위한 논리적인 의미에서도) 논리적으로 양립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유신론자가 곤경을 벗어나기에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지구가 평평하다는 생각, 혹은 지구가 거북이 등 위에 있고, 이 거북이는 또 다른 거북이 등 위에 있으며, 이런 식으로 거북이 밑에 거북이가 계속 있다는 생각에는 아무런 논리적 모순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런 견해는 (우리가 지금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려하면) 비합리적이다. (여러분의 장성한 자녀가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면 여러분은 괴로울 것이다.)

 

따라서 악에 근거한 논증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악의 존재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에서 이런저런 종류의 증거론적(evidential) 혹은 개연론적(probabilistic) 논증으로 돌아섰다.

 

 

여기서 주장은 기독교 믿음이 논리적으로 비일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악을 보여주는 사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강력한 증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런 증거론적 논증도 전형적으로 개연론적이다.

 

가장 단순한 사례를 보면, 이런 논증은 악을 보여 주는 사실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존재는 있음직하지 않거나 개연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오늘날 전형적인 반신학 논증은 하나님의 존재가 악의 존재와 양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이 하나님의 존재를 반대하는 강력한 증거론적 혹은 개연론적 사례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4부에 계속]-

-[지식과 믿음], 앨빈 플랜팅가 저 -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