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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달라스 윌라드

출판 복있는 사람

발매 2007.09.05

 

 

 

걸작 중에 걸작이다. 책이 600page가 넘고 두껍다. 그리고 다루고 있는 주제도 광범위하다.

 


 

  하나의 주제로 소급되거나 환원되는 느낌이 아니라 각 챕터가 고유의 가치를 지니며 알아서 뛰어노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 책을 더 꼼꼼하게 독해한다면 하나의 분명한 주제로 달려가는 글들을 목격했을 것 같다)

 


 

그런데, 말 한마디 한마디 속에서 감탄이 나오고, 주목하게 된다.

 


 

이 책에서 느꼈던 감동을 조금이나마 전달해 주기 위해 추천사를 몇 개 인용해 보겠다.

 


 

"사실 나는 [하나님의 모략]을 디트리히 본회퍼, 존 웨슬리, 장 칼뱅, 마르틴 루터, 아빌라의 테레사, 빙겐의 힐데가르트, 나아가 토마스 아퀴나스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진귀한 저작과도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싶다. 만일 주님의 재림이 늪어진다면 이 책은 다음 밀레니엄을 위한 책이다."

- 리처드 포스터-

 

 


 

"나는 여태껏 성경 외에 [하나님의 모략] 만한 책을 만나 보지 못했다. 주님 앞에 겸손히 부복하여, 그분이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그의 나라를 살아내도록 간절한 열망을 품게 한, 내 평생의 책 가운데 하나다." -고 옥한흠 목사-

 

 

 


"캠퍼스 선교단체 대표로서 젊은이들이 꼭 읽어야 할 책으로 [하나님의 모략]을 추천한다. 이 책은 우리의 신앙관과 제자도, 인생의 목적에 대해 성경적 원리와 실제적인 지침을 제공해 주는 책이다.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의미 있는 인생을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김중안 한국 IVF 대표-

 

 


"이 책은 다른 경건서적들처럼 잔망치로 톡톡 치는 정도가 아니라, 해머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준다. 오늘날 피상적인 '소비자 기독교'에 익숙해 있는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더불어 묵상하며 읽어야 할 지침서이다."

-신국원 교수-

 

 

 

 


추천사만 봐도 이 책의 진가가 드러나는 신기한 책이다.

 


 

사실, 버릴 만한 요소가 거의 없어서 이 책 전체를 이곳에 실어 놓고 싶다.

 


 

하지만 지면에 한계가 있으니 간단히 몇 가지 지침만 제시하겠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3장: 현대 문화의 모습을 진단하고, 오늘날의 기독교와 교회가 처해 있는 여러 현상과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하나님의 세계에서 누리는 풍성한 삶을 보여준다.

 


 

3~7장: 산상수훈에서 발견되는 예수의 핵심 가르침을 살펴봄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8~10장: 예수 학교의 제자들이 도제가 되어 변화받는 길을 제시한다.

 


 

기억에 남기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아서 몇 가지만 나누겠다.

 


 

[1] 행함 없는 믿음에 대한 그의 고뇌

 


 

"용서받았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영생의 선물이 그 정도로 그친단 말인가?

 


 

"우리는 완전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용서만 받은 것보다 훨씬 더 성숙한 자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용서받은 자라는 것은 명백히 밝혀야 할 내용이다. 용서의 조건이 완전함에 있지 않다는 것도 분명히 알려야 한다. 그러나 이 슬로건의 의미가 과연 거기에 있을까?"

 

 


"우리는 정말 테레사 수녀로부터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내면이란 누구나 다 동일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인간의 진정한 욕망은 다 똑같은데 그중에 누구는 의지가 굳거나 '재수가 좋아' 거기에 빠지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이 정작 성품과 영성을 좌우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도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옳을까? 예수가 우리의 '현실 생활'에는 사실상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그의 치밀한 고뇌가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나서 그는 우익의 개인에 치우친 복음과 좌익의 사회 정의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좌익의 복음을 소개하면서 양 극단의 한계를 간파해 내며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두 복음의 관심은 죄책이나 구조악(사회적 죄) 및 그 해결에 있다. 그것이 전부다. 그들의 실제 삶이 복음 없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양 극단에 서서 신앙활동을 하는 이들은 정말 '진리'를 말하지만, 예수님과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살아간다.

 

 


 

[2] 팔복에 대한 설명

 


 

"팔복은 복 받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다. 팔복은 우리 쪽에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아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좋아하시거나 인간에게 유리한 조건들을 제시해 주는 것도 아니다.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 형편이 좋다는 말은 사실상 어디에도 없다. 여덟 가지 조건이 하나님이나 사람 앞에서 행복을 얻는 길로 제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팔복은 '혁명 이후' 누가 높은 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지적도 아니다. 팔복은 예수와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지금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 나라를, 눈앞의 현실 상황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예시한 말씀이다. 인간이 모든 희망을 포기한 현실 상황들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천국 통치가 예수 안에서 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 사례를 팔복은 하나하나 꼽고 있다."

 


 

-> 기존의 팔복에 대한 서술과 상당히 다른데, 그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은혜가 넘친다.

 


 

"팔복은 영적 거인들의 목록이 아니다. 종종 이들 '복 있는' 자들로부터 남다른 품위와 영광이 느껴질 때가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 나라의 광채다."

 


 

-> [하나님의 열심]에서 느꼈던 하나님만이 드러나는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진다.

 

 


 

[3]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것 정도가 아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서, 그분은 '가진'자, 하나님 편에 '있는'자, '복 있는' 자를 외적 조건을 보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다. 하나님 나라와 크고 작은 인간의 나라는 오직 그 마음 속에서만 하나로 맞물릴 수 있다. 마음대로 문화적, 사회적 반경을 그어보라. 하나님은 반드시 뚫고 나갈 길을 찾아내실 것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눅 16:15)

 


 

[4] 율법과 영혼

 


 

"예수는 인간 영혼의 구조를 정확히 아시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 자체에 중점을 두시지 않고 행동의 근원을 주로 다루신다. 따라서 그분은, 이미 지적한 것처럼 율법을 궁극적 답으로 삼으시는 백해무익한 일을 피하신다. 사람들은 한사코 그렇게 생각하지만 인간 실존의 문제는 잘못된 행동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그분은 잘 아셨다. 그것은 증상일 뿐이다. 물론 그 자체로도 적지 않은 악을 유발할 때도 많이 있다.

 

 


행동의 근원을 살피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그분의 말씀의 골자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5:20), 즉 하나님 나라의 충만함을 누리며 살아가려면 인간적으로 꾸며내는 종교 인사들을 능가해야 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율법이 말할수 없이 선하고 소중한 것이며, 그 안에 사는 삶이 영원한 삶이라는 사실이 조금이라도 위축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율법은 의의 근원은 아니나 영원히 의의 경로다"

 


"율법의 행위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밖에 없는 사람,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잔을 안은 닦지 않고 겉만 닦기는 쉽지만 안을 깨끗이 닦으면서 겉만 더럽게 놓아두기는 어렵다. 안을 닦으면 자연히 그 과정에서 겉도 깨끗해지게 마련이다. 손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해도 미세할 뿐이다."

 


 

​-> 참 '행함'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고, '믿음과 행함'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멋지게 서술하고 있다.

 

 

[5] 분노 (진보가 외치는 거룩한 정의로서의 분노를 포함)

 


 

 "오늘날 영향력을 쥔 자들은, 우리는 반드시 분노해야 하며 사회악에 항거하려면 분노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부추기고 있다. 이런 개념은 우리의 사고 깊숙이 뿌리를 내린다. 언젠가 나는 가정 문제로 어느 그리스도인 부부를 상담하면서 아이를 홧김에 훈육하지 말라고 권한 적이 있다. 그들은 놀라며 물었다. "감정 없이 벌을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자신들의 분노에 자기 의가 섞여 있다는 것을 이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느 유명한 사회 인사는 절망과 분노야말로 정의를 위한 싸움의 필수 요소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자들은 결국 섣부른 말한 마디에 몇 배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사실, 시민 상호 간의 분노와 원한으로 갈수록 병들어가는 이 나라에서 우리는 이미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게다가 분노와 원한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하게 옹호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나 분노로 되는 일도 없고 분노가 없어 악화되는 일도 없다. 오히려 분노에 깔려 있는 자기 의가, 상대의 분노와 자기 의만 더욱 유발시킬 뿐이다. 물론 가정이든 국가이든 잘못된 일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당연히 분노가 쌓여 결국 행동으로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며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밖에서는 심지어 필요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해답은 분노를 품는 것이 아니라 인내의 사랑으로 잘못 바로잡는 것, 더 이상 실제 혹은 가상의 잘못을 더하지 않으면서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다. 반면, 분노를 품고 키우는 것은 "마귀로 틈을 타'게 하는 것이다 (엡 4:26~27). 마귀는 그 틈을 살릴 것이고 그 대가는 지옥이 될 것이다. 의지적 분노에 매번 담겨 있는 한 조각 달콤한 자기 의는, 상대방의 자기 의의 반응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몰고 온다. 그리고 분노가 지배하는 한, 그 악순환은 끝이 없다."

 


 

-> 진보의 행보를 일견 지지하면서도 가장 우려하는 요소 중 하나다.

 


 

  이와 같이 그의 저서는 훌륭한 통찰력의 보고와 같다.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싶지만 나머지는 이 책을 직접 읽으며 얻어가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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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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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라이트

출판 에클레시아북스

발매 2011.02.10

 

 

톰 라이트의 [칭의를 말하다]에 이은, 그의 대표저작 중 하나이며 역시 논쟁적인 저서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을 한다.

 


 

1. 바울은 '복음'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나?

2. 바울은 예수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3.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 이방종교에 도전하였나?

4. 이스라엘에게 던진 바울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5. 바울은 '칭의'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나? (이 부분은 [칭의를 말하다]와 겹치는 부분이다)

6. 바울은 진정 기독교의 창시자였나?

 


  제임스 던의 말처럼 라이트는 본문이 말하는 내용을 단순히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열정과 예리한 지성을 활용하여 문제의 옮고 그름을 따진다. 그러다 보니 라이트의 주장이 다 동의되는 건 아니더라도 그의 논리에 감탄을 하게 된다.


  이 책에서 그는 바울서신인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를 집중적으로 주해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그는 다음과 같은 화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기들은 위대한 사도인 바울에게 충실하며, 그가 자기들의 진정한 길잡이라고 큰소리로 떠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바울의 사상 중 일부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바울이 똑같은 관심을 쏟은 나머지 부분은 관심 밖으로 내던져 버리거나 심지어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래도 칭의 논쟁의 연장선 상에서 기존의 기독교 계가 걸어왓던 행보 구석구석의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는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아니~ 우리가 종교개혁의 취지를 잘 반영하면서 철저하게 개혁주의적 신앙을 구축해 놨는데 우리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라고 느낄 것이다)

 


 

라이트는 바울 신학에 대한 대표적인 입장들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주는데


1) 슈바이처

2) 불트만

3) 데이비스

4) 케제만

5) 샌더스


의 입장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슈바이처만 잠깐 살펴보면 슈바이처는 '이신칭의' 바울신학의 주장처럼 로마서 1~4장이 로마서의 진정한 핵심부라는 의견에 반대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 바울 신학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5~8장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고 슈바이처는 다음과 같은 질문 4가지를 우리에게 남겨주게 된다.

 


 

1. 바울을 1세기 종교의 역사 속 어느 지점에 둘 것인가?

2. 그의 신학을, 그 신학의 출발점과 핵심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3. 바울 자신이 각각의 편지들 속에 집어넣으려 했떤 내용을 거꾸로 끄집어 내면서, 어떻게 그 편지들을 읽을 것인가?

4. 그리고 이런 작업의 결과와 부산물을 우리 자신의 삶, 우리 자신의 직업과 관련지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슈바이처의 공헌이 있다면 그는 바울을 유대교의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고 바른 주장을 한다. (이 부분이 요즘 너무 무시되고 있다고 라이트는 이야기 한다) -> 그러나 슈바이처 박사는 바울을 세계에 종말이 곧 닥칠 것이라고 믿었던 묵시적인 유대인으로 바라봄으로써 너무 과하게 나아가 버렸다.

 


 

  불트만의 주장은 어느 정도 반박되며 배제된다.(그 당시 시대 상황에 통용되던 실존주의 철학 등에 의존하여 바울을 해석한 점에서 한계가 드러난다, 즉 유대교 맥락으로 바울을 읽기보다는 헬레니즘 적 방법론으로 바울에게 접근하여 문제를 드러냄)

 


 

  데이비스는 유대교 랍비와 바울을 비교 연구하는데 장점도 있었지만 전폭적인 지지를 받진 못했다. (랍비 관련 자료들의 상당수가 바울이 살았던 시대보다 몇 세기 후의 것들이었다)


  케제만에 대해서는 앞선 선배들의 정신을 적절히 혼합하여서 그나마 나은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라이트는 말한다.


  라이트가 말하는 케제만은 이러하다.

 


 

"무인도에 함께 가면 좋을 한 명의 바울 해석자를 고르라면 나는 케제만을 택할 것이다. 힘찬 기세와 주해에 있어서의 솔직함과 철저함, 진리와 자유를 향한 열정으로 가득한 그의 저작들은 훌륭한 읽을거리이며, 언제나 신선한 눈으로 바울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나를 이끈다. 나는 그의 견해에 상당 부분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를 향한 큰 존경과 감사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라이트는 현재 바울 신학계에서 1)~4) 까지의 학자를 다 합친 것보다 영향력이 큰 학자가 있으니 그는 바로 '샌더스'라고 말한다.(과거 옥스퍼드에서 라이트의 동료였다)

 


 

바울 연구를 하는 사람은 누구도 샌더스의 자료를 피해갈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사실 샌더스가 주장했던 '언약적 율법주의' 가 내겐 큰 충격이었다. 그가 주장했던 것은 바울 당시의 유대교는 행위로 말미암은 의를 주장하는 율법주의적인 종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개신교 주해가들과 의견이 다른 것이다. 대부분의 개신교 주해가들은 유대교를 옛 이단 중 하나인 펠라기우스주의의 한 형태로 이해하고 있는데(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사람의 노력과 행위로 의와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샌더스는 반대하는 것이다.

 


 

  즉 그가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으로서 감사의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지, 그러한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겠다고 행하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언약 백성으로 들어가기 (get into)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머물기 (stay in)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샌더스는 바울 사상의 중심이 칭의나 이스라엘에 대한 어떤 비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바울 사상의 중심은 '참여' 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슈바이처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초점 삼아 바울의 사상을 복합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라이트는 샌더스가 이렇게 중요한 틀을 제시했으면서 바울 서신의 구절들에 대한 상세한 주해를 하지 않은 점을 비판한다. 어떤 틀이 실제로 얼마나 효과를 발휘하는지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주해 작업은 필수라고 주장하면서 라이트는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라이트의 주장대로라면 나는 아직도 보수 주의 신학파가 되어 버린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특별히 보수 학파에 있는 이들은 샌더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반응했다. 그들은 유대교를 최초의 펠라기우스주의로 보는 옛 관점, 즉 구원을 얻는 방법 측면에서 사람의 자기 노력('율법의 행위')을 거부하고 이신칭의를 설파한 교사로서 바울을 보는 관점을 사력을 다해 부활시키려 했다."

 


 

그리고 라이트는 샌더스를 이렇게 평가하며 마무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더스는 바울 신학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정직한 학자라면 그의 중심 논제에 대한 중대한 반박이 가해지기 전까지는 그를 무시하고 작업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런 반박은 일어날 수도 없고, 나는 그가 주장하는 기본 논점이 이미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바울을 1. 역사, 2. 신학 3. 주해 4. 적용의 측면에서 분석해 들어가는데

 


 

 예를 들어 역사적 측면에서는 바울을 헬레니즘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은 거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고, 정확한 분파는 논쟁이 붙어 있지만 극히 유대적인 사상가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의 생애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바울이 사울이었던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사울'이라는 유대인도 좀 전의 논의처럼 행위로 의를 얻으려고 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이 바란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죽었을 때 천국에 가는 것'에 대해서도 사울과 같은 유대인들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부활을 믿었는데 그 부활은 하나님이 약속한 새로운 이스라엘과 새로운 세계의 생명을 함께 누리도록 모든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사건이며, '천국'에 대한 서구의 일반적인 견해와는 그 의미가 매우 다르다)

 


 

그러던 사울이 회심을 하게 되는데 이 전환의 핵심은 이러하다.

 


 

"다소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눈이 멀고 아마도 멍이 든 채 엎드려서 품었을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의미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역사의 한 중간 지점에서, 사울이 생각하기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역사의 마지막에야 행하실 그 일을, 한 사람 나사렛 예수를 위해 행하셨다는 것이다. 사울은 이스라엘이 이교도들의 손에 고난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옳다고 판결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이교도들의 손에 고난을 받은 후에 예수가 옳다고 판결하셨다."

 


 

  그 이후에 사울은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는데 그 관점은 이전에 지니고 있었던 언약 신학에 깊고 확고하게 계속 뿌리박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스라엘의 숙명이 메시아이신 예수 안에서 집약되고 성취된 것이다)

 


  즉, 바울은 다른 무언가를 위해 유대교를 포기한 게 아니라는 점을 라이트는 강조한다. 즉 바울은 유대교의 오랜 이야기가 나사렛 예수 안에서 그 이야기의 절정과 성취에 이르렀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인이 되어 박해를 받은 것이지 유대교를 버리고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에 대한 새관점을 지지한 톰 라이트)

 


 

그 다음으로는 바울의 '복음'을 이야기해 보자.

 


 

  바울은 하나님과 세계의 이야기가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 안에 집중되고 요약되었으며, 그 예수의 이야기가 바로 전 세계를 위한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믿었다. 바을 신학에서 핵심은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 였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복음'에 대한 논의는 '부활'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는데 바울이 훈련 받았던 바리새인의 배경에서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

 


 

  단지 시체가 다시 살아나는 개념의 '육체의 부활'이 아닐 뿐인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전 15장 44절에서 '영적인 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는 플라톤 철학의 관점에서 (즉 비물질적인) '영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말은 '영'으로 구성된 (어떤 면에서는 물리적인) 육체라는 의미이다.

 


 

  '복음'에 대한 라이트의 말을 들어보자.

 


 

  "바울은 그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어떤 방법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한 것도 아니며 '예수'라는 이름과 '그리스도'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졌던 한 인물이 우연히 달성해 낸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한 것도 아니다. 그는 메시아의 구원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개인적이고 비역사적인 의미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바울의 복음 요약]

1.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꼭 집어 이야기하자면 그의 십자가 안에서, 죄와 사망을 포함한 모든 악의 권세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2. 예수의 부활 안에서 새로운 시대가 동텄다. 모든 예언들이 성취되고, 이스라엘의 유배 생활이 끝나며 모든 세계가 유일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날이 시작되었다.

3.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예수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메시아, 즉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이었다.

4. 따라서 예수는 주이시다. 즉 그는 이 세상의 참 왕이시며, 또 모든 무릎이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바울은 복음이 그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정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복음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실제로 그 힘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와 같이 바울에 대해 살펴보고 나서는 그가 유대교의 유일신론에 충실하면서 그 속에서 삼위일체를 자연스레 바라보고 있었던 점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논증을 펼치고 '칭의'에 대한 논의를 덧붙인다.

 


 

  의의 '전가'라는 개념을 반박하는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하지만 그들이 얻게 될 의가 하나님 자신의 의는 아닐 것이다. 그 의가 하나님 자신의 의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나님 자신의 의는 언약에 대한 그분의 신실하심을 말하며, 그 신실하심 때문에 (이스라엘이 소망하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정당함을 입증하시고, 그들의 정당함이 입증된 혹은 무죄가 입증된 피고가 소유하는 '의'의 상태를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여전히 하나님 자신의 특징이다. 하나님의 의는 자신의 백성이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그가 행동하시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시는 가운데 이스라엘에게 부여하는 상태가 하나님의 의는 아니다."

 


 

(이런 부분에서 기존 개혁주의 신학의 엄청난 반발을 얻었다)

 


 

[하나님의 의 라는 개념을 해석하기 위한 편리한 구성]

A. 하나님 자신의 '의'

 A1. 도덕적인 특징으로서의 의('하나님의'를 소유격 속격으로 본다)

   A1a. 분배적 정의 (마틴 루터)

   A1b. 언약에 대한 신실함 (톰 라이트)

 A2.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의 능력으로서의 의 ('하나님의'를 주격 소격으로 본다)

  A2a. 언약에 대한 신실함에서 오는 행위 (A1b와 이걸 융합시켜야 한다는데?)

 A2b. 언약과 무관한, 세계를 정복하는 행위 케제만)


B. 사람에게 주어지는 '의'

  B1.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로운 상태로서의 의 ('하나님의'를 기원의 속격으로 본다)

   B1a. 전가된(imputed) 의

   B2b. 분여된(imparted) 의

  B2.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혹은 '하나님께 가치가 있는' 특성으로서의 의('하나님의'를 목적격 속격으로 본다)

   B2a.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타고난 특성

   B2b.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특별한 선물로서 차후에 인정되는 특성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책을 참고하도록 하고, 결론을 말하자면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신의 의를 지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실제로 유대교 배경은 매우 강력하게 이런 내용을 찬성하는 전제를 만들기 때문이다. 만일 이에 반대되는 주장을 바울이 했다면 그건 바울이 유대교 배경을 저버렸다는 말이 되므로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라이트는 지금 이 시대에도 참된 바울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되어질 수 있고 이를 통해 믿음과 행함의 온전한 일치와 사회 속으로 뻗어 나가는 실천적 신학이 가능하다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가 논증을 해 나가는 구석구석을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바울 서신에 입각하여 철저한 주해 작업을 해 나가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는 신뢰성이 더해진다.

 


 

  그 동안 교회에서 들어오던 것과는 너무 다른 주장을 하는 것 같아서 어리둥절 하고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그는 철저히 성경과 역사에 기반해 있음을 기억해 보면서 설득 당할지, 거부할지를 선택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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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신광은

출판 포이에마

발매 2014.02.12

 

 

 

 

 

  근 몇년 간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많은 감동을 받았던 책이다. (꼭 책의 저자의 주장에 동의해서는 아니다)


 

  저자의 신학적 노력과 다양한 학문 활동이 집약된 농축된 저서라고 볼 수 있다.

 


 

  [메가 처치 논박]을 써서 한국 교회의 괴상한 문제점의 중요한 한 측면을 밝혀냈던 신광은 목사님이 이번에는 한층 더 강력해진 '한국 교회의 문제의 '원인'을 찾아서 나타났다. (메가 처치 논박에서는 문제 분석이 혁명적으로 탁월했지만 해결책 제시는 미흡했던 아쉬움이 있다. 이번 책은 해결책이 구체적인 것은 아니지만, 논리상으로나 추론상 훨씬 더 만족스러운 결론에 도달했던 것 같다)

 


 

  아르뱅주의와 메가처치 현상이 더해져서 한국 교회가 병들었다고 주장하는데 설득력이 상당하다. (이러한 원인 이외에도 중요한 몇 가지 측면이 더 있다고 생각하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르뱅주의라는 개념은 정말 신선하다)

 


 

  이는 아르미니우스주의 + 칼빈 주의의 합성어인데, 좋은 의미로 합성된 의미는 아니고 각 교리에서 필요한 부분만 쏙 빼서 하나로 합쳐 버린 변종 교리를 의미한다.

 


 

  너무 중요한 내용이 많아서 두고두고 별도의 글로 인용해서 올릴 예정이다.('아르뱅주의가 한국 토양에 자리를 잡은 역사'는 글로 따로 올릴 예정이다)

 


 

 이 책은 칼빈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 자체에 대한 공부를 위해서도 요긴하게 활용될 수 있으니 참고하도록 하자.

 


 

 저자는 종교개혁이 지닌 인간적인 문제점을 부정하지 않고,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장,단점,윤리관 등을 균형감 있게 서술한다.

 


 

그리고 논리상으로는 합치될 수 없는 두 사상을 어떻게 융합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데,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부분이 참으로 신선하다.

 


 

-> 정론과 자유의지론이 융합될 수 있는 방법이 논리적으로는 도통 없다 보니 여러 가지 방법들이 도입된다. 둘 다 100% 작용하는 상호 모순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둘이 50%씩 작용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저자는 가톨릭 신학자인 몰리나의 '중간 지식'이라는 개념을 활용한다. (이 부분이 정말 신선하다)

 


 

'중간지식'은 다른 말로 하면 '조건적 지식'이다. 이는 하나님의 본성상 아는 지식도 아니고, 하나님의 의지로 알게 된 지식도 아니다.

[일단 '지식'은 하나님이라면 본성상 필연적으로 알 수 밖에 없는 지식인 '본성적 지식'하나님 자신이 역사 속에서 사건을 예정하고, 결정한 것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알 수 밖에 없는 지식인 '의지적 지식'으로 구분 가능하다. 예를 들면 '수학적 지식, 과학적 지식' 등은 하나님의 본성상 알고 계실 것이다. 이런 걸 '본성적 지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의지가 달린 문제이므로 '의지적 지식'이라고 볼 수 있다. ]




저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이 지식은 하나님이 탁월한 예지력으로 어떤 사람이 어떤 조건 아래 A를 선택할지 혹은 B를 선택할지를 내다보는 지식을 말한다. 비유로 말하면 바둑의 고수가 초심자와 바둑 둘 때 초심자의 바둑 수를 미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과 유사하다. 초심자는 무척 고심해서 바둑을 두지만 고수는 자신이 어디다 돌을 놓으면 초심자가 그 다음 어떤 식으로 돌을 놓을지를 훤히 꿰뚫고 있다. 그래서 고수는 하수가 실수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 때 고수는 모든 가능한 상황을 예지하고 그 예지에 기초해서 특정 상황과 조건을 만들어 초심자로 하여금 실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자, 이 때 하수가 실수를 했다. 그러나 그것이 고수가 하수에게 강제적으로 시킨 일일까? 아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결국 초심자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고수가 예측한 실수를 했다. 고수는 다만 상황을 조성했을 뿐이다."

 


 

이런 식의 서술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신학적으로 너무 훌륭한 개론서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칼빈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 등을 다 따로 정리해 둬도 좋을 것 같다.

 


 

간략하게나마 양측 교리를 살펴보고,아르뱅주의에 대해 살펴보고, 저자가 주장하는 3개의 우물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이야기 해 보도록 하자.

 


 

[칼빈주의 5대 교리 TULIIP]

 


 

T: total Depravity : 전적타락

U: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L: Limited Atonement : 제한속죄

I: Irresistable Grace: 거부할 수 없는 은혜

P: Perseverance of the Saints : 성도의 견인

 


 

T: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구원에 관한 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U: 구원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받을 자(택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비택자) 모두를 미리 정하셨다.

L: 예수 그리스도는 택자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비택자를 위해서 피를 흘리실 이유가 없다.

I: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실 때 인간은 이를 거부할 수 없다.

P: 한 번 구원받은 신자는 영원히 구원받는다. 그가 가끔 낙심하거나 실패하거나 죄를 지을 수 있을지라도 그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저자는 칼뱅주의의 한계를 적절하게 비판한다. 몇 군데만 살펴보면 이미 버림 받을 자를 예정하셨다는 '이중예정' 논리 자체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십자가 사랑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두 가지 모순되어 보이는 개념을 억지로 하나를 포기하면서 하나로 합치려 하지만, 오히려 성경은 변증법 적인 모순을 그대로 두고 끌고 가는 것을 더 이야기할 때가 많다.

 


 

  제한속죄 개념도 이상하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라는 구절에 대한 칼빈주의측 논의를 들어 보면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모두 해석이 이상하다. 누가 들어도 끼워 맞추기 해석일 뿐인 주장을 한다. 무엇보다도 제한속죄를 하는 신이 과연 자비로운 신이고, 공평한 신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긴 하다.

(사실 이 책에서는 T,U,L,I,P 가 다 비판을 받는데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개혁주의도 계속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말이 이래서 중요한 것 같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을 하는 분들은 극도로 강경해서 자신들의 '교리'를 하나도 빠짐 없이 다 지키지 않으면 그들은 '거짓'이라고 매도할 때가 많다.)

 


 

   그건 그렇고 칼빈주의자들의 윤리적 추진력은 '두려움'이었는데 왜냐하면 자신이 '택자'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진리를 지키려 애를 쓰고 그러한 열매를 통해 자신이 '택자' 임을 입증하려 한 것이다.

 


 

  [참고로 칼빈주의의 TULIP 교리는 그 이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와 논쟁을 벌이면서 만든 '예정론'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미-펠라기우스 주의가 등장했고 이게 상당 부분 아르미니우스주의와 닮았다]

 


 

  결국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아우구스티누스-칼빈주의를 거부하고, 동시에 자력구원을 주장한 펠라기우스도 거부함으로서 제 3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5대 주요 교리]

 


 

Natural inability (자연적 무능력) :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나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로 회복되었다.


Conditional Election (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는 자를 미리 알고 그들만 자기 백성으로 예정하신다. 하나님의 예정은 복음을 믿을 것이라는 조건에 따른다.


Unlimited Atonement (보편속죄):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한 차별없이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


Resistable Grace (저항할 수 있는 은혜) : 하나님께서 베푸신 십자가의 은혜는 이를 믿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믿지 않기로 거부할 수도 있다.


Conditional Perseverance (조건적 견인): 신자는 인내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며, 하나님은 그러한 신자를 붙드신다.

 


 

칼빈주의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아르미니우스주의가 태동했다지만 저자는 이 5개의 교리도 차근차근 반박해 나간다.

(난감하겠지만, 논리가 상당히 탄탄하다)

 


 

가령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죄와 악을 개인의 도덕적 결단과 책임의 문제로 환원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에게 저자는 2개의 예시를 든다.

 


 

1) 중독현상 : 중독 환자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할까? (ex) 우리가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대로 알코올 중독 환자는 술을 마실 자유는 있어도 마시지 않을 자유는 없다. 이와 같이 도무지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중독현상은 아르미니우스주의보다 칼뱅주의에 더 잘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2) '집단악' 개념 : 개인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로 '집단악'을 서술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 도대체 뭐가 맞다는 걸까? 결론은 둘 다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가령 알코올 중독자 모임인 AA(Alcoholic Anonymous) 에서도 12단계 치유법이 있는데 그 중 1단계가 "우리는 알코올에 무력했으며 스스로 생활을 처리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고 시인했다" 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사실(칼뱅주의의 전적 타락설인 T)을 자기 스스로 인정(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자유의지론)해야만 치유가 가능한 것이다. 역설적인 결론이다.


  참고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윤리적인 추진력은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 티켓이 절대로 취소되지 않는다는 칼빈주의와 달리 구원은 -> 성화 -> 영화로 진행되므로 그 구원을 삶으로 이뤄 나가라는 신학을 지지하므로 유지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저자가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5대 교리를 하나씩 반박해 나가는 건 대단하다.)


  결국 이와 같은 지점까지 왔는데 이제 아르뱅주의를 봐야 한다.


  아르뱅주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여 구원 열차를 거머쥘 수 있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그렇게 구원을 받고 회심을 했으면 이제 칼빈주의의 성도의 견인 교리처럼 결코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하는 퓨전 신학이다.


  이런 이상한 신학이 한국 교회에 정착을 하면서 신자들은 윤리적인 추진력도 잃어 버리고, 비성경적인 정신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책 전체가 거대한 논리 구조를 따르고 있는데 깔끔하고 잘 읽힐 것이다.)

 


 

아르뱅주의의 특징은 1) 자기 중심적 2) 반지성주의 3) 편의주의 4) 맹신주의 다.

 


 

  구원의 근거를 '구원의 확신' 자체에 두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만 있으면 구원받게 되는 거다. 그러다 보니 극단적인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진리'가 구원 받은 믿음의 내용이 아닌게 되어 버린다. 믿음의 내용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믿음' 자체가 되어 버림으로써 '자기 믿음을 믿는 믿음'이라는 거짓 체계에 빠져 버린다.


(저자는 한국 교회에 신천지가 판을 치게 된 것도 '아르뱅주의' 때문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한국 교회의 윤리적 실패를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 측면에서는 나도 동의한다. 그 이외에도 '율법주의, 근본주의 신학' 으로 인해 성경의 위치가 본연의 자리를 이탈하면서 '그들이 성경을 활용하는 방식에 성도들이 속게 된 점'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다음 저자는 개신교 구원론이 3개의 우물에 빠졌다고 주장하는데 1) 그리스 철학의 우물 2) 아우구스티누스의 우물 3) 루터의 우물이 바로 그것이다.

 


 

1. [그리스 철학의 우물]

 

  먼저 그리스 철학의 명제적, 명사적, 존재론적 패러다임에 갇혀 버리는 바람에 칼빈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 모두 다 성서 해석에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학적이 아닌 성서적 해석법을 창안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저자는 그리스 철학의 논리학이 전수되면서 모든 성경의 진리를 '명제화'시켜서 참과, 거짓으로 판단이 가능한 것처럼 만들어 버린 점도 지적하는데 문제는 성서의 모든 내용이 명제화 될 수 있냔느 것이다. 성서의 계시란 역사를 의미하며 역사는 삶인데 그 삶을 다 명제화 시키는 건 말이 안 된다. 명제화 되지 않는 성서의 내용은 결국 제거되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설도 그리스 철학의 논리학에 따른 전제(방법론)으로 도출되는 결론이기 때문에 저자는 이와 같은 방법론 자체를 폐기하고 나면 이런 오류도 걷히게 될 것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결국 성서의 진리관은 '인격적 진리관', '실존적 진리관'이지, '명제적 진리관'이 아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탐구하던 그리스 철학자들과 달리 성서는 '진리는 누구인가?' 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논리적 지식'이 아닌 인격체에 대한 '관계적 지식', 즉 '야다(yada)'를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를 명제적 진리, 그리스 철학의 방법론으로 전락시킨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 -> 프란시스 쉐퍼 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사실 틀리지 않다. 아퀴나스는 워낙 유명하고, 쉐퍼도 명제적 진리를 진리에 이르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2.[아우구스티누스의 우물]

 

  그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펠라기우스의 행위 중심적 구원관에 반대되는 은총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다. 그런데 실제 성서 속에는 은총과 행위 사이에 긴장은 있어도 대립은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성서에서는 은총과 공로가 대립할 뿐이다. 즉 행위를 앞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공로를 앞세우는 게 문제인 것이다. 오히려 은총과 행위는 서로 함께 가는 것이 더 성경적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이 격화되면서 그는 상대측의 주장을 거부하는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의 원인이 될 만한 행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버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강조하게 되고 인간은 믿음조차 자발적으로 가질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 여기서 예정론이 추론되어 버린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은 오류 투성이다.


  은총이 보존되려면 인간은 자유도 없고 지성도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성경에도 바로 왕이 이스라엘 민족을 놓아주지 않을 때 마음이 완고해진 것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완고하게 만든 것이기도 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는 두 표현이 다 등장한다). (가룟 유다 건도 마찬가지다)


  성서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주권은 충돌하지 않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은총이 마치 대립되는 듯이 만들어 버린다.


  이 책의 저자는 공로는 은총을 파괴하지만 행위와 은총은 대립되지 않기 때문에 '믿음'에서 인간 편에 주도권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해서 성경에 위배되진 않는다고 말하며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 노동자와 고용자의 관계, 황산벌 전투 등의 비유를 들어서 멋지게 자신의 이론을 설득시켜 나간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는 톰 라이트의 '관점'을 상당히 많이 받아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논리적이고 탁월한 글을 쓸 수 있는 저자도 그의 논리에 설득을 당했나 보다. '칭의'에 대한 개념도 라이트의 노선을 따라가는 듯 하다]


 어쨌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행위 라는 대립구도 형성에 의해 은총은 '행위 없음'을 의미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 도식은 루터와 에라스무스 논쟁,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논쟁을 거쳐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3. [루터의 우물]

 

  오직 믿기만 하면 칭의가 수여된다고 주장하는 그의 신학으로 인해 그저 믿는 순간이 칭의의 순간이고, 칭의의 순간은 구원의 순간과 동일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바울의 칭의론을 벗어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 믿기만 하면 구원 받아 버리는 격이 되므로 루터의 칭의 중심주의는 윤리적 추진력이 없어진다. 그러다 보니 칼빈은 이 칭의 뒤에 '성화'가 이어지는 도식을 그리려 했고, 그런 식으로 윤리관을 어느 정도 되찾긴 했지만 깔끔한 서술이 안 되는 문제점이 생긴다.


 결국 루터로 인해 한번의 결단의 체험, 놀라운 영접의 체험으로 인해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믿게 되어 버린 것이다.

(좀 애매하긴 하다. 왜냐하면 루터 뿐만 아니라 존 웨슬리나 스펄전, 무디 등도 이와 같은 회심 체험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터의 교리대로 칭의 중심주의가 되어 버리면 그 회심 체험 한번으로 모든 구원이 해결된 것처럼 살아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정교한 교리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후반에는 바른 구원관을 제 3의 대안으로 모색하면서 이 책은 마무리가 된다.

 

 

 

두고두고 공부하면서 더 나은 대안이 없는지 모색해 봐야 겠다.

 


 

진실된 마음으로 고민하고 있던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은 가뭄에 단비와 같이 훌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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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배덕만

출판 대장간

발매 2010.09.08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알고 나서, 그 동안 도대체 뭐가 문제였는지 삶을 반추해 보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 때 여러 가지 중요한 요인들 하나로 떠올랐던 것이 바로 '근본주의 문제' 였다.

 


 

  이 책은 한국 개신교의 근본주의가 배타적 신학, 보수 전통적 윤리, 반공의 정치, 친자본주의적 경제에 몰두해 왔기 때문에 그 결과로 기복주의, 물질주의, 성장주의, 독점주의천민자본주의가 교회 안에서 주인 노릇을 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상당히 공격적인 느낌이 나는데, 그 주장이 허무맹랑하거나 근거가 빈약할까?

 

 

 내 생각에는 이 책은 두께도 얇고 size도 작지만 버릴 내용이 거의 없다.

 


 

 역사적인 추적과 지식적 엄밀성이 잘 갖춰져 있어서 딱히 반박하기가 힘든 책이다.

 


 

  구성도 논리적인게 먼저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신학적, 역사적 기원이 되는 미국 근본주의 역사를 고찰해 보고, 이러한 개신교의 변형된 유형이 한국 땅에 정착하게 된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한다.

 


 

 책의 내용이 상당히 알차고, 유용하기 때문에 따로 글을 올려서 그 내용을 나누게 될 것이다.

 


 

 '근본주의'로 인해 우리가 참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온전한 십자가 '도'를 따르는데 방해를 받는 경우가 많음을 (개인적으로) 확신하기 때문에 이 책을 많은 이들에게 권해 주고 싶다.

 


 

물론 세부적인 내용 면에서는 조금씩 다른 의견을 지니게 되는 것도 있지만 그런 부분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책은 충분히 공부해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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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필립 얀시

출판 포이에마

발매 2012.11.22

 

 

 

 

  회의자의 안내자로서의 소명을 감당하며 열린 마음과 따뜻한 글쓰기, 그리고 깔끔한 논리로 무장해 온 필립 얀시가 '진리'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일종의 '변증서'라고 봐도 될 것 같다.

 


 

다양한 '주제'를 폭 넓게 다루다 보니 한 '주제'에 대한 깊이는 좀 부족한 책이지만, 전반적으로 논리를 세우는데 도움이 된다.

 


 

한장 한장 몇 가지 내용을 살펴보자.

 


 

[1장, 2장] 고통

 

  주님이 우리의 고통에 대해 슬퍼하고 분노하고 계시며 조만간 확실한 조처를 쥐할 것임을 역설한다.

  고통을 변증하는 다른 서적들과 같은 노선을 걷고 있다.

  그리고 C.S Lews 의 [고통의 문제], 도로시 세이어즈 등의 지식을 활용하고, '고통' 속에서 만나는 깊은 하나님을 강조한다.


 

 또한 생리적이고 육체적인 통증, 고통이 '선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한 '폴 브랜드 박사'의 논리를 통해 의료 분야에서 고통을 변증하고 '윤리적인 측면'에서 '고통의 중요성'은 C.S Lewis 에서 답을 찾는다.


 

 이와 같이 얀시는 다양한 지식을 적절히 비벼서 우리에게 깔끔하게 전달해 준다.

 

 

 여기서 글을 끝낸다면 상당히 싱겁고 섭섭할 수 있는데 얀시는 브랜드 박사를 직접 찾아가 인터뷰를 한 내용을 수록함으로써 이 책만의 색깔을 입힌다. 브랜드 박사가 이야기하는 '고통 변증'은 상당히 참신하고 새롭다. (직접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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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강제 수용소에서 배우다.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험난한 시절을 보낸 솔제니친의 이야기를 집중 조명하면서 그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추려낸다.

  자유와 소망, 인간의 도덕성 등에 대한 영역을 탐구하는데 어렵지 않고 생생한 이야기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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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초도덕의 위기

 


 

  이 챕터에서는 도덕적 상대주의를 경고한다. 옮고/그름에 대한 확실한 기준이 없는 시대가 오다 보니 그저 자기만 좋으면 그만인 세상이 되어감을 설명한다.

 


 

특히 진화심리학의 대두를 강조해서 설명하는데 이 부분은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자.

 


 

"진화심리학은 상대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선을 바라본다. 즉, 선을 영원한 가치라든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이상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이기적 유전자'의 실용적 기능 정도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리처드 도킨스나 에드워드 윌슨 같은 진화 생물학자들은 테레사 수녀의 선한 행위도 결국 '자기 이득'을 위해 취하는 행동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수 많은 강경한 무신론자들이 신 없이도 도덕성이 유지된다고 주장했으나 사실 제대로 된 변증을 들어본 적은 없다.

 


 

  얀시 또한 '신' 없이 그와 같은 도덕성은 나타날 수 없음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눠준다.

 


 

"윌 듀런트, 아리엘 듀런트 부부는 "우리 시대 이전까지는 역사를 통틀어 사회가 신앙의 도움 없이 도덕적 생명력을 유지해낸 전례가 없는게 사실'이라면서, 예언적인 논평을 덧붙였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이슈는 공산주의와 개인주의, 유럽과 미국, 더 나아가 동양과 서양의 대립이 아니라, 과연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살아보겠다고 덤벼드는 문명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바츨라프 하벨은 위기의 실체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서 인간은 항상 만물, 특히 자신에 관해 설명할 수 있게 해주던 일종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좌표 시스템을 상실했다. 상대적이고 제각각인 좌표에 맞추다 보니 인간의 세계와 인격은 차츰 제각기 따로 노는 쪼가리들로 산산이 부서져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더 나아가 이러한 크리스천 윤리관 없이 어떻게 '결혼'이 유지될 만한 정당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느냐고 저자는 반문한다.

 


 

  도덕적 상대주의 토양 속에서 페미니스트 사상가들 중 일부는 자아가 희미해지고, 구시대적인 관습에 사로잡힌 여성상을 타파하기 위해선 혼외정사를 강력히 추천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기도 했다. (<성의 침묵>을 쓴 델마 헤인의 주장)

 


 

  바버라 에런라이크도 <타임> 지에 기고한 글에서 "서로 호감을 품고 있으며 상호 합의한 성인들 사이에서 섹스는 마땅히 놀이의 영역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 뿐이다" 라고 이야기 하며, 결혼 윤리의 붕괴를 조장했다.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어느 중산층 부부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부모를 돌보기가 귀찮아서 방치했다든지, 껄렁거리는 아이들이 다섯 살배기 꼬마를 고층건물에서 창밖으로 밀어버렸다든지, 열 살짜리 여자아이가 복도 한귀퉁이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든지, 인생을 즐기는 데 거추장스럽다며 엄마가 두 아이를 물에 빠트려 죽였다는 소식을 들으면 너나없이 분노에 치를 떤다. 왜 그런가? 윤리가 본질적으로 제각기 알아서 결정해야 할 사안이라고 정말 믿는다면 도대체 무얼 근거로 그처럼 맹렬히 분개하는가? 그런 범죄를 저지른 파렴치범들은 한 점 거리낌이 없었다.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원들이 유대인들을 학살하면서 눈곱만큼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나 매한가지다. 도덕성이란 것이 개인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누가 그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무얼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

 


 

-> 이 말에 대한 제대로 된 반박을 듣고 싶다.

 


 

  그리고 일부 근본주의자들과 제대로 정신 못 차린 기독교 역사 속에서나 노예제도가 기독교 내에 수용되었지, 결국 노예제도를 종식시킨 힘, 여성참정권 운동, 인권 운동, 시민권운동을 이끌었던 것도 '기독교'였다.

 


 

 신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독교가 윤리를 파괴시켰다는 건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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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진화 심리학은 믿을 만한가? [이 부분이 이 책에서 가장 참신한 주제가 아닌가 싶다]

 


 

  얀시는 진화 심리학은 방자하기 짝이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DNA에 기록된 것 외에 다른 목적을 지니지 않으며 유전자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하찮은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진화 심리학은 주장하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윌슨, 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등이 등장하여서 새와, 벌, 침팬지에 관한 생생한 설명으로 혼을 빼놓고, 구애행위, 바람기, 모성본능, 가십, 사회조직 등을 멋들어지게 묘사한다는 것이다.


 

  늘상 제기되는 문제이지만 '진리 개념 자체'가 자연선택의 산물이 되어버리는데 무엇을 근거로 우리는 '진화 심리학의 글'이 '진리'라고 믿을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 엔서컴이 C.S Lewis 와 이 부분에 대해 철학적 논의를 했던 걸로 아는데, 더 깊은 논의를 시도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얀시는 4가지 점에서 진화 심리학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1. 증명하거나 오류를 입증할 수 없는 두루뭉실한 원리를 표현만 바꿔 반복적으로 내세워가며 윤리적 문제들을 설명한다.

 

  그들은 이기적 유전자라는 한 가지 원리에 기대어 인간의 모든 행동을 해석한다. 그러다 보니 게이나 불임부부처런 유전자를 영원히 전하지 않는 이들의 행동 해석을 해야 한다는 난제에 봉착하기도 하고 영원한 순결을 서약한 마더 테레사 등의 행동을 서술하는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도 어찌저찌 그들이 설명을 시도하긴 한다).


 

  결국 이런 단일화된, 단순화된 해석은 우리의 모든 행동을 다 '이기적 유전자의 소산'으로 보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유전자에 조종되는 기계로 전락시켜 버린다.

 


 

2. 도덕성은 온전히 인간의 가장 내밀한 원천, 곧 유전자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대중들에게 진화 심리학을 능숙하게 잘 설명하는 로버트 라이트는 이기적 유전자 이론이 참이라는 근거로 '성욕'을 내세우는데 성적인 욕구야말로 마치 '인간이 많은 자손을 원하며 어떻게 해야 그 뜻을 이룰 수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이게 만드는 자연의 방법이라고 그는 이야기 한다.


 

그런 논리대로 따라가다 보니 그는 일부다처제를 조심스럽게 인정하는 말을 한다. (남자의 성적인 욕구가 결혼 후에도 제어되지 않는다면 그걸 왜 한 명의 여자에게 국한시켜 두느냐는 것이다.)

 

 

더군다나 진화 심리학 논리대로라면 '폭력'도 용인이 된다.

 

 

  <악마같은 남성>에서 책의 저자는 "남성은 기질적으로 폭력을 잘 쓰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므로 쉬 멈추기 어렵다" 라고 말하는데 이런 추론의 근거도 결국 인간의 가장 가까운 유전자 친구인 침팬지 수컷들이 동료를 죽이고, 강간하고, 지배하고, 짝을 두들겨 패는 것을 통해 유추를 한 것이다.


 

  C.S Lewis 가 [인간 폐지]에서 말했던 것처럼, 처음에 가닥을 잘못 잡으면 뒤로 갈수록 오류는 점점 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라이얼 왓슨이라는 자가 두 아기를 자동차에  태운 채로 호수에 밀어 넣은 수전 스미스를 변호한 이야기를 들어 보자.

 


 

"이러한 사레들이 사회 안정과 생태적 균형에 기여한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례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죄악의 표출로 해석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심사를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적합한 상태를 이루는 지점을 두고 벌이는 양측의 갈등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러한 차이를 조율하기 위해선 건전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진화론적 관점에 입각한 증거를 총동원해서 계산을 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모든 잔학한 행위를 다 유전적 행동이라는 논리적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다 보니, 제대로 된 도덕 체계가 세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객관적 진리가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

 


 

3. 자연은 도덕성에 관해 엇갈린 메시지를 준다.

 


 

  영장류를 보면 연민, 공감, 정의 같은 덕목들의 초기 형태를 알 수 있고 목숨을 걸고 상처 입은 동료를 구해내는 고래와 돌고래, 누군가 다치면 달려가서 돕는 침팬지, 죽은 친구의 곁을 떠나지 않는 코끼리 등을 보면서 사람들은 '윤리관'의 기원을 찾으려고 하는데, 자연은 그렇게 일관되지 않다. 얀시의 반박을 들어 보자.

 


 

"그렇다면 여성들은 자연을 본받아 사마귀처럼 짝짓기를 마친 수놈을 게걸스럽게 뜯어먹어야 하는 걸까? 보노보 침팬지가 그러하듯, 이웃들끼리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재빨리 성관계를 가져서 분쟁의 소지를 없애야 하는 걸까? 모시밑들이처럼 남자들도 몰래 숨어서 기다리다가 가까이 다가오는 상대를 힘으로 취해야 하는 걸까?"

 

 


"얼룩다람쥐는 아무 때나 내키는 대로 새끼를 잡아 먹는다. 청둥오리는 동료를 집단 강간하고 물에 빠트려 죽인다. 기생벌의 애벌레는 움직이지 못하는 먹잇감을 안에서 밖으로 맹렬하게 갉아먹는다. 아프리카 시클리드는 동족의 눈알을 파먹는 걸 좋아한다. 하이에나는 태어난 지 한 시간 뒤면, 힘이 더 센 새끼가 한배에서 난 형제와 싸워 숨통을 끊어 놓는다."

 


 

이런 식의 '자연의 예시'는 끝도 없이 근거를 댈 수 있다.

 


 

4. 자연에 토대를 둔 윤리는 대규모 악용에 취약하다.

 


 

  잘못된 생물학적 논리인 우생학이 2차 세계 대전에서 미친 영향력은 분명히 그 비중을 차지한다.

 

  이런 식의 논의는 분명 잘못된 '철학, 세계관'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다음 part 2 로 넘어가면 '프란시스 쉐퍼'를 만나 인터뷰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프란시스 쉐퍼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사서 읽어보는 게 큰 도움이 된다. (쉐퍼의 인터뷰를 생생하게 들어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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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프란시스 쉐퍼의유산

 


 

  쉐퍼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 그의 이론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설명을 해 주는데 쉐퍼가 비판받던 포인트가 지적되어 있어서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인용해 보겠다.

 


 

"쉐퍼 박사가 바르트나 키에르케고르처럼 저마다 좋아하는 인물들을 콘크리트 장벽 너머로 집어던져버릴 때마다 크리스천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안절부절 온몸을 꼼지락거리기 일쑤였다. 잭 로저스가 지적하듯, "쉐퍼는 루소와 칸트, 헤겔과 키에르케고르를 한데 묶어 처분해 버린다.... 그때마다 사실상 똑같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이들조차도 박사가 특정한 철학자를 터무니없이 희화화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나머지 상대편에 서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자신만만하고 폭넓은 주장을 펼친 탓에 쉐퍼에게는 호평과 악평이 동시에 몰렸다."

 


 

  내가 바라보는 쉐퍼도 한번은 반드시 거쳐갈 만한 멋진 신학자이고, 그의 방법론이나 자세를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게 더 유익할 때가 많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는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고상한 영적 세계의 일이 아니라 삶의 영역 전반을 아우르는 사건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 공헌도가 크다. (그의 세계관 책 말고, 설교집도 굉장히 은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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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T.S 엘리엇에게 한 챕터를 투자하는데, 그의 진면목에 대해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다양한 활동을 했으나 주로 '시'를 통해서 많은 영향력을 미쳤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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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다.


 

 NGO 에서 뛰는 친구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챕터다.

 

 


 

 그 뒷 부분 부터는 '복음주의'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예술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주며  좀 더 실천적인 측면에서 '진리'를 탐색하는 것으로 책은 마무리된다.


 

 약간 두서가 없을 수도 있고, 산만한 경향이 있지만 각 챕터가 주는 교훈들이 상당하니 기회만 되면 읽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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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알리스터 맥그라스

출판 IVP

발매 2001.06.14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에서 마크놀이 우려했던 대로 이 시대에는 지성을 격하시키는 이상한 복음주의가 뒤엉켜 있다. 행위가 업신여김을 당하기도 하고, 지성이 업신여김을 당하기도 하니 신학 자체의 문제를 파헤치고, 분석하는 책이 나올만도 하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영향력은 톰 라이트에 비견할 만 하다.

 


 

 분야는 다르지만 그가 분명하게 공헌해 주고 있는 위치가 있기 때문에 그의 저작은 소중하다.

 


 

 이 책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성경의 권위에 대한 설명을 하고 나서 복음주의와 후기 자유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종교 다원주의를 비교, 분석 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주옥과 같은 책이다.

 


 

 그의 다방면의 학식이 빛을 발할 때가 많은데 가령 [성경의 권위]에 대한 파트에서도 '경험' 과 같이 민감한 부분을 어떻게 서술하는지 들어보면 치밀한 균형과 신중함이 느껴진다.

 


 

 대체적으로 C.S Lewis 의 논리도 많이 사용되면서 실존주의적인 접근도 능수능란하게 활용함으로써 쉐퍼의 한계를 극복하기도 한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자유주의자들의 (100% 경험에만 기댄) 기독교 신학을 배격하는데 힘을 실어줬다는 부분도 언급하면서 사유의 풍성함과 논리성을 치밀하게 조직해 나간다.

 


 

 그리고 성경의 권위를 드높이면서 그는 '이야기'의 중요성을 언급하는데 이는 신정통주의와 싸우다가 정통신학자들이 버려버린 중요한 성경 해석의 방법론이다.

 


 

 이와 같은 영역에서 힘을 쏟았던 리처드 니버, 칼 바르트를 옹호하면서 맥그라스는 보수 기독교로 하여금 다시 한번 각성하기를 촉구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성경의 네러티브적 특성을 인식하면 성경의 계시를 온전하게 회복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은 결코 신적 계시의 객관적이고 인지적인 진리에 대한 복음주의의 헌신을 포기하거나 약화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계시에는 객관적이고 인지적인 요소 이상이 있으며, 그러한 주제에 대한 환원주의적 접근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지혜를 권하는 것이다."

 


 

 후반에 맥그라스는 '복음주의'가 다른 어떤 현대의 세계관들에 비해 결코 부끄럽거나 부족하지 않다는 점을 변증하는데 상당히 놀라운 설명이 이어진다.

 


 

 너무 중요한 내용이 많기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내서 이 내용들을 정리해야 할 것 같다.

 


 

 복음주의 지성에 대한 열망이 크고, 세계관에 대한 관심이 많은 이들에겐 이 책을 꼭 추천하고 싶다. [약간 어려울 수 있지만 많은 것을 얻어가게 될 것이다.]

 


 

 마지막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무리하자.

 


 

 "이 책은 복음주의의 지적인 적절함과 충족성이 공적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복음주의 운동의 내적 기준과 현대 서구 세계의 다른 세계관들과의 관련 속에서 보여 주고자 했다. 더 이상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신념으로 인해 부당하게 주눅이 들거나 그것들을 방어하거나 변명하는 입장을 취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자신들의 신념을 적용하고, 지난 세대에 이루어 놓은 위대한 진보를 견고하게 하고 확대시켜야 한다. 진리를 향한 복음주의의 열정은 복음주의적 지성에 대한 열정이어야 한다. 복음주의는 기독교 교회의 삶을 형성하고 새롭게 하는 데 주된 공헌을 해 왔다. 이제는 기독교 지성의 삶을 형성하고 새롭게 할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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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알리스터 맥그래스

출판 IVP

발매 2014.04.03

 

 

 

 

  이 책은 Mere Theology 를 표방하며, 신학의 강력한 효능과 기능을 삶의 구석구석에 적용해 주는 책이다.

 

 

  신학은 신학자의 전유물이고, 사변적 논쟁에만 쓰인다는 고정관념을 깨 주면서 기독교 신학의 목적, 위치, 타당성을 바르게 세워준다.

 


 

 그와 같은 밑작업을 한 후에 그는 독특한 전개를 해 나가는데 조지 허버트의의 시를 통해서 '신학을 렌즈나 창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얻어낸다.

 


 

 그리고 다음 챕터에서는 십자가, 고난, 신학적 당혹감이라는 제목으로 마틴 루터와 C.S 루이스를 숙고하는데 마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으로 '고난'을 묵상하며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와 [헤아려본 슬픔]을 통해서 '고통'의 실존적 차원까지 서술해낸다.

 


 

 예를 들어 C.S 루이스가 쓴 [고통의 문제]를 읽을 때 그는 이성적으로 빛이 임하는 걸 경험하긴 했찌만 실존적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이후에 [헤아려 본 슬픔]을 읽으면서 그 결핍된 부분이 회복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맥그라스는 말한다.  루이스 스스로도 표면적 인간이 아닌 '깊이 있는 인간'을 다루는 사람으로 변모했던 게 아닌가 싶다.

 


 

 여기까지는 흥미로우면서도 약간 무난하다. [워낙 훌륭한 논의를 많이 해 와서 그렇다]

 


 

 그 이후에 '자연관'에 대한 설명과 함께 part2 의 문화와 관계를 맺는 챕터가 시작되는데 여기부터 맥그라스의 진가가 드러난다.

 


 

 '자연과학' vs '신학'이라는 잘못된 대결구도를 바르게 지적해 주고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한 사례를 가지고 설명을 시작하는데, 아마 이런 논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신학자가 아닌가 싶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그리고 창조와 진화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다루고, 뒤에서는 [신 없는 사람들]에서도 언급되었던 '신 무신론 운동'에 대한 설명을 추가적으로 하면서 현재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잘못된 대결 구도를 타파하고자 한다.

 


 

 이 책은 초반에는 참신하고 신선한 아이디어가 빛나며 약간은 뻔한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책에 비하면 상당히 밋밋한 감이 있다), 후반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논의, 그리고 맥그라스가 아니면 해줄 수 없는 논의를 해 줌으로써 그 기능을 다한다.

 


 

 '자연과학과 신앙'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공격적인 신 무신론 운동에 대해 관심이 가는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신학을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도 있으니 사실 모든 평신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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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양재

출판 두란노

발매 2014.10.20

 

 

 

조정민 목사님의 [사람이 선물이다] 등과 같이 고난 속에서 힘을 얻는 일종의 잠언록이다.

 


우리들교회 담임 목사인 김양재 목사님이 쓴 책으로서 '가정 사역'에 열심이 있는 만큼, 가정에 관련된 잠언이 많이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는 조정민 목사님의 책을 볼 때와 같은 깊은 감동과 전율을 느끼지는 못했다.

 


 

간헐적으로 귀하게 건질 수 있는 어구들이 있다는 점이 장점이고, 가정 속에서의 많은 역경들을 이겨낼 수 있는 위로와 힘이 담겨 있다.

 


 

그러나 때로는 동의하기 어려운 과한 표현들이 보일 때도 있다.

 


 

루이스의 글이나 투르니에의 글에서 느껴지는 섬세함이 더 필요하다고나 할까?

 


 

전반적으로 짤막하면서도 힘이 되는 구절이 많으니 1독을 추천하긴 하지만 다음과 같은 부분은 주의해서 읽는 게 좋다.

 


 

"엄마가 무관심했기 때문이야"

"아빠가 폭력적이었기 때문이야"

"가난했기 때문이야"

"나는 학대를 당했기 때문이야"

 이런 것들은 내 고난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죄와 고난을 환경 탓으로 돌리고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은 '내가 옳다,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는, 내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결정적인 악입니다.

 


 

 이 부분은 필요한 마음 가짐이긴 하다.

 


 

모든 것을 불운한 가정, 불운한 환경, 조건의 탓으로 돌리며 자신의 실존이 지닌 악에 대해서는 무고한 자인 듯 살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주변 환경이 주는 요소가 너무 거대해서 자신의 악을 통찰할 겨를조차 없고, 힘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메시지가 들어가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일단, 상한 마음을 만져주고, 상황의 어려움을 잘 긍정해 주면서 존재가 일어설 힘이 생기고 나면 그 때서야 비로소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자칫 잘못 읽으면 율법적으로 스스로를 정죄하건, 가족들을 정죄할 수 있는 위험성이 생

길 수 있다.

 


 

이런 부분을 보자.

 


 

"돈과 음란과 중독으로 힘들게 하는 가족을 보면서, 그것이 내가 온전하지 못하고 구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걸 깨닫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입니다."

 


 

 이런 식의 조언은 해악이 될 때가 많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사자가 율법주의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면 스스로를 굉장히 정죄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더욱 자신을 복종시키려 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가다 보면 표면적으로는 가정에 평화가 찾아오는 듯 할 수는 있지만, 결국 그 영혼은 파괴되고 만다.

 


 

"믿는 우리가 세상에 보여줄 인내의 본은 하나님이 붙여 주신 나의 가정에서 악하고 음란한 식구들과 함께 살며 섬기는 것입니다."

 


 

사실, 가정사역을 하시면서 이혼은 절대 하지 말아라고 강조하신다고 한다. 성경적으로 그 말이 맞다.

 


 

그러나 존 스토트 목사님이 [현대사회의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에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좀 더 상황을 폭 넓게 보고 이런 말씀을 적용해야지, 문자적으로 밀어 붙여 버리면 그건 여럿에게 본을 보이려다가 그 본을 보이는 주체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게 하등 무슨 유익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순전한 사랑과 희생으로 가족을 끌어 안을 때, 놀라운 은혜가 임할 수 있는 상황들은 충분히 아름답고 본받고 싶은 모습인 건 사실이다.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가족들을 악하고 음란한 식구로 여기면서 섬기는 태도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전반적으로는 무난하게 좋은 말들이 많지만, 중간중간 잘 분별하며 읽었으면 하는 잠언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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