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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에타 린네만

출판   부흥과개혁사

발매   2010.08.24

 

 

  상당히 논란이 될 만한 책이다. '성경 비평학'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책인데 보수 기독교에서는 좋아할 만한 책이고, 칼 바르트 등을 위시한 신정통주의 신학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책이 될 것 같다.

 


 

  일단, 난 칼 바르트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고, 성경 비평학에 대한 공부가 아주 부족한 상태이긴 하지만 적절히 활용한다 해서 보수 기독교가 말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위기'가 오거나, '정통'이 무너진다고 생각하진 않는 편이다.

(혹시 공부를 해 나가다가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게 다가온다면 입장은 바뀔 수도 있다.)

 


 

  그의 책은 일단 시종일관 두서가 없고, 산만하다. (노력은 많이 하고, 열심히 논증을 하려고 애를 쓰는데 책이 시원하게 읽히지 않는다)

 


 

  초반에 칼 바르트를 비판하기 전에 스피노자가 한 이와 같은 말을 비판한다.

 


 

"믿음을 미신으로 변화시키고 하나님 대신에 종이와 잉크를 경배하는" 위험에 빠져 있다.!! -> 이 말을 비판하며, 이러한 논리가 역사비평가들에 의해 사용되어졌고 칼 바르트의 신론의 배경을 이룬다면서 바르트를 이어서 강하게 비판한다.

 


 

  성경 지상주의를 표방한다면 이와 같은 말이 무섭게 들리겠지만, 사실 우려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주장하기를 바르트가 성경이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했다고 한다.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으나, 이렇게 말한 게 맞다면 심각하긴 하다)

 


 

  이 책의 저자는 역사비평 신학자들은 철학을 신뢰하고 성령으로 영감된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개탄하며, 그와 같은 역사비평이 스피노자의 이론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철학은 "거짓의 아비"(요8:44)로부터 영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견 맞는 부분도 있지만, 모든 방법론을 다 거짓의 아비로 매도할 건 없어 보인다.)

 


 

  주로 스피노자, 칸트, 흄 등을 언급하면서 철학과의 절교를 선언하고 신정통주의 색깔이 드러나는 신학자들을 한번씩 언급하면서 그들의 위치를 부끄럽게 만드는 전개를 보여주는데 가령 디트리히 본회퍼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현대인에게는 하나님이라는 목발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초월에 대한 언급 없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기적을 부인한 것에 분개한 것 같은데, 뭐 이렇게 까지 간게 사실이라면 문제가 있는 발언이긴 하다.(그러나 일단 출처를 잘 모르겠고, 앞뒤 문맥을 쏙 잘라먹고 이야기 한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불편하다)

 


 

  불트만은 지속적으로 비판을 받고, 자유주의 신학자인 슐라이어마흐는 칸트의 철학을 고려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자유주의 신학은 나도 지지하기 어렵다)

 


 

  성경비평 방법으로는 '역사비평 방법'이 사용될 수 있는데 저자는 이게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방법을 따라가 버리면 시편은 모세 오경보다 더 늦게 쓰였으므로 바벨론 포로 시절에야 쓰일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다윗이 쓴 시편은 하나도 없게 된다고 한다. (이 부분은 잘 모르겠다. 이렇게 흘러가면 보수 기독교가 위기를 느낄 만도 하다. 더 제대로 된 비평을 하면 이런 극단적인 상황으로 안 가지 않을까?)

 


 

  그리고 기존에 알고 있던 마가복음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원전으로 사용되었다는 것도 사실은 거짓말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것은 바이세가 주장한 것인데, 이는 고대 언어학자 칼 라흐만의 권위에 의존했다고 하는데, 라흐만은 실제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한다.

 


 

  사비평에 대한 부분은 어려워서 잘 모르겠다. (그러나, 반대측 의견도 좀 들어보고 싶다)

 


 

  그 이외에도 문학비평, 양식사와 편집사 비평 방법도 비판하는데 이 부분은 책을 읽어보면서 공부해 볼 것을 추천한다.

 


 

  일단 저자가 우려하며, 성경 비평학에 칼날을 세울만 한 가치는 충분하다.


 

  각각의 비평 방법에 대해 이해를 해 보고, 자신의 입장을 전개하면 될 것 같은데 이 책의 문제점은 계속 같은 말이 반복되지만 속 시원한 비판이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다.

 


 

  계속 이러한 비평들은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은 하는데, 그 근거들로 내세우는 것은 뭔가 허전한 느낌?

 


 

  각각의 비평들이 활용되는 예시는 하나 언급해 두겠다.

 


 

Q. 복음서 기자는 복음서의 테두리를 결정하는 데에서 자신의 신학이 반영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분명하게 집어낼 수 있는가?

문학 비평: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그 저자들이 여러 자료를 편집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단락 사이의 연관성은 부분적으로는 편집자, 부분적으로는 자료에 상관 있다고 한다. 저자가 한 일은 초보적인 편집 활동으로 평가된다.

 


 

양식사: 예수님 이야기의 테두리를 이차적인 부가물로 보고 이에 관심을 두지 않고 단지 원래 전승의 생성과 그 변형의 역사에만 관심을 둔다.

 


 

편집사: 복음서 전체에서 특히 그 테두리에서 신학적인 의도를 가진 복음서 기자의 신학적 작업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복음서 구조에서 사소한 차이에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저자의 창조적인 개관에서 각 복음서 기자 고유의 신학적인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느낌으로 비평이 전개되는데, 사실 불완전한 인간을 통해 완전한 진리의 성경을 주셨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맥락으로도 탐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성경의 권위가 떨어져 버리면 안될 사람들에겐 이건 죽어도 막아야 할 암 적인 요소임에 틀림 없다.

 


 

  성경 무오론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논쟁이 함께 작용하게 될 이 책은 일단 빠르게 읽어 보고 반대측 의견도 들어보자.

 


 

  책이 초반부터 성경 비평학을 완전히 쓸어버릴 것처럼 호언장담 하긴 하지만 동어반복만 하다가 맥 없이 끝나 버리는 것 같아서 아쉽긴 하지만, 고민해 볼 만한 부분은 어느 정도 어필해 주기 때문에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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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기복

출판 두란노

발매 2011.11.07

 

 

 

  수 많은 크리스천 연애, 결혼 서적이 저마다의 장단점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고루고루 볼 것을 추천하지만 이 책은 한 권 만으로도 10여권의 관련 서적을 제압할 수 있는 포스를 자랑한다.

 


 

  이 책의 저자는 불문학 전공에 신학교에서 가정사역을 전공했으며 상담심리학으로 Ph. D 를 획득하였다.

  이와 같은 다방면에서의 지식을 습득한 상태에서 여성 목사로 안수를 받고, 교수를 역임했으며 가정상담연구원장을 역임했으니 뭔가 접근하는 방향과 느낌도 남다르다.

 


 

  이 책은 성경에도 충실하면서 매 챕터마다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들을 수록해 놓고, 결혼에 필요한 주례사와 결혼 서약문 등 실질적이고 활용하기 좋은 예시들을 많이 제시해 뒀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장점은 상담학과 신학이 접목되면서도 여성적 섬세함이 가미되어서 감정을 다루는 깊이가 남다르다는 것이다.

 


 

  래리 크랩의 [결혼 건축가]도 상담 심리와 신학이 잘 조화를 이루긴 하지만, 이 책은 다른 책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정신과 성격에 대한 깊은 통찰이 가미되어 있다.

 


 

  크리스천 연애 서적 중에서 가장 무난하면서도 (쉽게 읽히면서도),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 요소가 많았었다.

 


 

그래서 많은 예비 크리스천 부부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곤 한다.

 


 

프롤로그에 있는 내용을 나누며 이 책의 느낌을 전달하고자 한다.

 


 

"결혼 생활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된 결혼은 아름답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결혼 후 겪게 될 예상문제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혼 후 부딪치는 어려움과 위기는 넉넉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공부하며 배우려는 자세를 갖는다면 행복한 결혼을 충분히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

 


 

"이 책은 특히 새롭게 시작하는 가정에 해답과 용기와 소망을 주기 위해 쓰였습니다. 먼저 이 책을 자신의 결혼생활에 적용하고 자신의 가정을 견고히 세워 가십시오. 그러고 나서 다른 가정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지금도 절실히 도움을 구하고 있는 친구들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결혼 생활의 위기를 겪고 있는 주위의 사람들을 도와주십시오. 그들의 결혼을 함께 지켜주십시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책이 창조주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을 원래대로 회복시키는 데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와 같은 저자의 소망이 담겨 있는 이 책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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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존 스토트

출판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발매 2010.06.01

 

 

소천하신 존 스토트 목사님의 마지막 책이다.

 


  평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힘써 왔으며, 세상 속에 뛰어들어 다양한 현대 사회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고 진리를 선포했던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책이 [제자도] 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스토트의 명성은 자자하다.

 


 

  빌리 그레이엄은 그를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성직자"라고 칭했고, 존 폴락은 "사실상 전 세계 복음주의의 신학적 리더"라고 그를 평가했다.

 


 

  [Time] 지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했을 정도이니 그가 기독교 계에서 더 나아가 세계에 미친 영향력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제자의 참다운 핵심 자질 8가지를 제시하는데

 


 

  불순응, 닮음, 성숙, 창조 세계를 돌봄, 단순한 삶, 균형, 의존, 죽음

 


 

이 바로 그것이다.

 


 

[한 챕터씩 간략하게 살펴보자]

 


 

불순응: 세상에서 도피하여 거룩함을 보존하려 해서도 안 되고, 세상에 순응하여 거룩함을 희생시켜서도 안 된다는 구호 아래 그는 다원주의, 물질주의, 윤리적 상대주의, 나르시시즘에 불순응 하라고 촉구한다.

 


 

닮음: 이 챕터는 율법주의 토양에서 읽으면 아무 생명력이 없는 글이 되지만, 참다운 십자가 복음에 서서 읽는다면 굉장히 중요한 자질임을 알게 된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읽는다면 굉장히 은헤가 될 것이다]

 

 


-> 스토트도 이 챕터의 마지막에 '성령의 내주' 라는 섹션을 만들어서 이를 통해 '닮음'이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하며, 이 챕터의 가치를 극대화시켜 준다.

 


 

 

성숙: 성숙이란,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신뢰하고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그분과 성숙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 이 부분을 이루기 위해 그는 그리스도의 힘으로만 전력투구하라고 촉구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도 바울이 신적인 힘을 입을 때조차 수고하며 애썼던 점을 강조하며 치밀한 균형감 속에서 '성숙'을 이루라고 말한다.

 

[스토트의 깊은 영성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창조 세계를 돌봄: 청지기적 사명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데 그는 주의점을 제시한다.

 

[1] 자연을 신격화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2] 자연을 착취하는 반대 극단도 피해야 한다.

 

그는 이 챕터에서 자연 생태계를 지켜내는 환경 이슈와 동시에 문화 명령까지도 성취해야 하는 복음주의적 사명을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인이 평생을 씨름해야 할 중요한 화두를 적절하게 제시한다.

 


 

단순한 삶: 좀더 적은 돈으로 살고 좀더 많이 나누기 위해 우리의 수입과 지출을 재점검할 것과 가난한 이웃을 도울 때도 원조보다는 개발을 도움으로써 그들이 자력으로 생존해 나가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게 도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영성이 결코 이론에 그치지 않고, 끊임 없이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갔음을 잘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균형: [1] 개인적인 제자들로 자라는 일과 공동으로 교제하는 일 둘 다로 우리는 부름 받았다. [2] 예배와 일 둘 다를 하도록 부름 받았다 [3] 순례자와 시민 둘 다로 살아가도록 부름 받았다.

 


 

요약하면 우리는 개인적인 제자이면서 교회의 구성원이며, 예배자이면서 증인이며, 순례자이면서 시민인 것이다.

 

[이러한 치밀한 균형점을 찾아내고 선포할 수 있다는 건 그의 연륜과 지혜의 깊이가 얼머나 무르익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의존: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챕터다. 그 분의 계획은 우리가 점점 더 그분을 의존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이 부분은 신앙의 초보들이 들으면 황당할 수 있겠지만, 십자가 복음의 본질을 암시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그 분만을 의존하며, 나를 신뢰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그분과 하나가 되고, 참된 겸손을 얻게 된다.

 


 

죽음: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생명을 얻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박해와 선교와 순교를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챕터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가장 큰 두려움으로 여기지만 그리스도인에겐 죽음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니며 나의 죽음이 더 많은 생명을 싹 틔울 수 있다면 기꺼이 그 길

을 걷게 만드는 소중한 동반자가 된다.

 


 

이와 같은 깔끔한 책의 마무리는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 가장 정확하고 명료하게 보여준다.

 


 

값진 책이다.

 

 

                                               존 스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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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리처드 니버

출판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발매 2007.12.10

 

 

 

기독교 세계관 공부를 하다 보니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고전 중에 고전이었다.

 

강력히 추천하는 책이다.

 


 

형인 라인홀트 니버와 함께 리처드 니버는 신학계에 없어서는 안 될 빛나는 존재인 것 같다.

 


 

 신정통주의 좌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상당히 통합적인 시야를 지니고 있고 범주화를 잘 하는 학자인 것 같다.

 


 

 남긴 저서도 많지 않은데, 이 책 한 권만으로도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잠깐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처음 세계관 공부를 할 때는 낸시 피어시의 [완전한 진리], 프란시스 쉐퍼 전집 등을 통해 혁명의 불길이 일었었지만, 실제 삶을 살고 나니 더욱 실존적이고 실제적인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율배반적이고 역설적인 쟈크 엘룰의 세계관이나 마틴 루터적인 신학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었다.

 


 

 이 책은 그리스도와 문화를 붙잡는 유형을 5가지로 분류하는데, 이 classification이 두고두고 유용하게 활용된다.

 


 

 읽고 나서 자신이 어떤 지점에 서 있는지를 확인해 볼 수도 있고, 주류를 이루고 있는 다섯 번째 세계관(칼빈주의 세계관)의 장점과 한계점도 고찰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다섯 가지 유형은 이러하다.

 


 

1.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 터툴리아누스, 톨스토이

2.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적응주의 유형) : 슐라이어마허

3. 문화 위의 그리스도: 토마스 아퀴나스

4.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 쟈크 엘룰, 어쩌면 칼 바르트, 마르틴 루터

5.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 칼빈주의 세계관, 칼 바르트도 약간?

 


 

 개인적으로 나는 4번과 5번을 뒤섞은 어떤 지점에 서 있는 것 같은데 우리 나라 기독교 세계관 분위기는 전적인 5번이 주류를 이루다 보니, 굉장히 승리주의적이고 이미 문화를 다 변혁시킨 것 처럼 자신감이 넘친다.

 


 

  낸시 피어시나 쉐퍼의 글을 읽으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예술, 철학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는 거뜬히 승리할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와 같은 [창조, 타락, 구속]의 세계관은 성경 해석에 한계를 보일 때가 많다.

 


 

  톰 라이트도 지적했듯이 성경을 이와 같은 세계관으로 읽으면 전체적이고, 통전적인 네러티브를 잃을 수도 있다.

 


 

  또한 나의 스승님의 말씀처럼, 모든 창조된 것들은(구조) 선하지만, 그 방향이 잘못된 것이라면 ([창조,타락,구속]에 나온 말처럼), 과연 어느 정도 방향을 바꿔줘야 올바른 방향성(orientation)을 지니게 되는 것이며 누가 그 기준이 되어 줄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 불명확하다.

 


 

  때론 문화보다 그리스도의 가치를 더 고상하게 두는 아퀴나스의 의견이 설득력을 얻을 때도 있다.

 


 

  나는 나의 스승에게 이와 같은 관점은 쉐퍼가 피를 토하며 반박했던 것처럼, '이분법적 사고'를 조장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더니, 나의 스승은 "이분법이 꼭 나쁜 건가요?" 라는 짧고 명료한 답변으로 내 의견을 받아쳤다.

 


 

  사실 1,2번은 복음주의적 영성을 지닌 기독교인이라면 그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로부터 완전히 담을 쌓자고 주장했던 터툴리아누스나 톨스토이(1번 관점)도 결국 사회, 경제, 정치 등에 종속될 수 밖에 없었으며 문화에 속해 적응해 버리는 그리스도(2번 관저)는 그 진리를 잃게 될테니 말이다.

 


 

내가 5번 세계관을 논리로는 좋아했지만, 실제 삶 속에서 '실존주의적인 요소'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게 더 진리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4번과 같은 모순되고, 역설적인 관점도 고민을 하게 되었었다.

 


 

지금도 수 많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 가르침을 들어 보면 특정 관점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설파할 때가 많은데, 길을 강요하기 보다는 다양한 길이 있다는 걸 소개시켜 주는 게 더 중요할 것 같다.

 


 

사유는 각자가 하게 될 것이다. 진리 안에서 성경 안에서 최선의 지점을 찾아 보자.

 

 


 

이 책은 내용에 동의하든, 내용을 납득하기 어렵든 반드시 거쳐가야 할 책이다.

 


 

  굉장히 잘 쓰여져 있고, IVP 모던 클래식스 중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책 중 하나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리처드 니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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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라이트

출판 IVP

발매 2009.05.08

 

 

 

'하나님 나라'에 대한 책 중 독보적인 책이다.

 


 

라이트가 썼다는 것만으로도 기본 신뢰가 가는 책이다.

 


 

  부활, 구원, 복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서술들은 라이트의 언변과 지혜와 지성으로 무장하여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다룬다.

 


 

1. 기독교 복음이 제시하는 궁극적 미래의 희망 -> '구원', '부활', '영생' 등에 대한 논의다.


2. 현재의 세상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

 


 

  그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개념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데 초반에는 '부활'이라는 단어의 실제 의미를 다시 살펴보는데 지면을 할애한다.

 


 

  그의 주장은 상당히 충격적일 수 있어서 이승구 교수님 등, 보수 진영에서는 라이트를 경계하게 만드는데 가령 이런 주장을 들어보자.

 


 

"물론 전통적으로 우리는 기독교가, 구원받은 혹은 복 받은 사람들이 가게 될 위에 있는 천국과, 악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게 될 아래에 있는 지옥에 대해 가르친다고 생각해 왔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사후 천국행'에 대해 말하는 바가 거의 없으며, 지옥행에 대해서도 말하는 바가 많지 않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사용되는 천국이라는 용어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의 설교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는 사후의 운명을 일컫는 말도 아니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말도 아니다. 이것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일컫는 말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미래의 운명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다른 영역, 숨겨진 영역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주장이 보수 기독교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다. 그러나 라이트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따로 떼어서 반박하는 접근법으로 격파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승구 교수님이 하시는 것처럼), 그는 성경적, 역사적 엄밀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의 전체 이야기에 대적할 만한 강력한 이야기를 들고 나오지 않는 이상, 그의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가 쉽지 않다.

 


 

  '죽음' 이니, '부활'이니 하는 논의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말하며 굳이 이런 주제로 글을 쓰는데 400page 이상을 투자해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라이트는 이와 같이 말한다.

 


 

"우리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 무엇을 말하느냐가 다른 모든 것의 모양과 색채를 결정한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죽음과 부활은 더 이상 놀라움으로 다가 오지 않고 현재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더 나아가 예수님 자신은 부활에서 비롯된 것도 아닌,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지도 않는 그러한 '희망'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그저 사변적인 논쟁으로서만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적인 삶과 사회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더 나아가 한 영혼의 운명에도 직결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중하게 이 부분을 고민해 봐야 한다.

 


 

  그는 철저하게 역사적인 논의와 성경적 논의를 중요시 여긴다. 그 일환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탐구해 보는 챕터가 나오는데, 충격적인 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냥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믿었던 적이 없다. 그들은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식의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후 목적지로서 천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 '천국의' 삶을 궁극적인 육체의 부활로 가는 도중에 일시적으로 거치는 단계로 보았다.

 


 

(상당히 충격적이다. 우리가 생각하던 장소적 개념인 천국이 마치 '연옥' 같은 중간단계의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연옥과는 다른 개념이다.)

 


 

  정리하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미래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는데 1. 죽음과 그 직후의 상태로 머무는 단계 2. 새롭게 재창조된 세상에서 새로운 육체를 가지고 사는 단계 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은 이교주의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하며, 라이트는 이를 가장 유대교적인 신앙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

 


 

'부활'은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죽음을 면하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사후에 영광스럽고도 존귀하게 존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 이후에 다시 육체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쇼킹하지 않은가?)

 


 

  그가 역사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예수의 육체가 새로운 몸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검증할 수 있으면 가장 확실한 해답이 되겠지만 그 사건이 1회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중립적인 입장에서 '증명'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역사적 논증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중요하다.

 


 

"그 누구도 역사적 논증만으로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믿도록 강제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 논증은 온갖 종류의 회의주의들이 오랫동안 숨어 있던 덤불을 치우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또한 '앎'에 대한 그의 논증도 매우 인상깊다.

 


 

"결국 '앎'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과학적 연구는 반복이 가능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반복되지 않는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단 한번 건넜으며, 만약 그가 그 강을 다시 건넜다면 그 두 번째는 의미가 달라졌을 것이다."

 

 


....

 

 


그러나 사람들이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났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때는 역사를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유추의 원칙에 호소하는 것이다. 유추의 문제점은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차분하면서도 철학적, 이성적, 논리적 접근과 그 이상의 메타 서술을 섬세하게 융합시켜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낸다.

 


 

 결국 결론적으로 그가 주장하고픈 바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초월하지만 포함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의 변증의 절정은 "부활을 믿는 것은 사랑이다" 라고 주장하는 대목이다.

 


 

그의 마무리는 이러하다.

 


 

"사랑은 가장 깊은 앎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실재에 완벽하게 관여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실재를 확인하고 축하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많은 근대적 인식론이 무너진다. 사물은 객관적으로 사실이거나 (따라서 냉정한 관찰자에 의해서 그렇게 자각될 수 있거나) 아니면 주관적으로 사실이거나 (따라서 실재적 공공 세계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쓸모가 없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하는 '객관' 과 '주관'의 진부한 반정립이 사랑의 인식론에 의해서 극복되는 것이다. 새로운 공공 세계, 부활절에 시작된 세계, 예수님이 주이시고 카이사르는 주가 아닌 세계에서 살게 될 사람들에게 필요한 앎의 방식으로 대두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인식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역사적 논증이 참으로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도마와 바울, 베드로가 직면했던 질문들, 즉 믿음, 소망, 사랑의 질문들을 던지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이런 고차원적인 논증을 펼칠 수 있는지 감탄이 나올 따름이다.) 

 


 

  라이트는 이와 같이 역사적 논증과 이성적인 논증의 철저한 균형과 함께 그 이상의 차원으로 논증을 끌고 가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손상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 이후에 '구원'에 대한 논의도 전개되는데

 


 

요약하면

 


 

'구원'의 온전한 의미는 (1) 단지 '영혼'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에 대한 것 (2) 미래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것 (3)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두고두고 곱씹으며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용어들을 재정립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통해 직접 경험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마지막은 라이트가 말하는 '부활'을 다시한번 정리하며 마무리 하도록 하자.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은 하나님이 기적을 행한다거나 성경이 진리라는 증거 이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오순절의 진실이지, 부활절의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 이후의 천국에 대한 확신을 훨씬 능가하는 사실이다.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그가 주로 강조하는 것은 부활한 몸으로 다시 돌아와서 새롭게 탄생한 하나님의 창조계 안에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새로운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이 땅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하늘의 생명으로 이 땅을 식민화하는 프로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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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헨리 나우웬

출판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발매 2002.01.20

 

 

 

 내가 읽은 책은 개정판으로서 훨씬 깔끔하고 아름다운 표지로 된 5000원 짜리 사랑스러운 책이었다.

 


 영성 신학의 대가인 헨리 나우엔의 책은 깔끔한 범주화가 장점이며, 군더더기 없고 깊이가 있어서 좋다.

 


 번역본은 예전에 읽엇고, 지금은 원서로 읽고 있는데 둘 다 가치가 상당하다.


 

  그는 가톨릭 사제이며 캐나다 토론토의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정신 지체 장애인을 섬겼다. 그는 예일, 노틀담, 하버드 대학교에서 가르쳤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슈퍼 엘리트인 그가 자신의 지위를 내리고, 낮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살아가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데 그의 저서들은 최소 평타 이상은 치는 것 같다.

 


 

 그의 저서중 가장 충격적인 감동을 받았던 [영적 발돋움]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한 사람의 인생을 뒤바꿀 만큼, 글 속에 위로와 힘이 넘친다.

 


 

이 책은 믿음이 없는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제안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가장 깊은 갈망에 대해, 우리의 수 많은 소원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생존 전략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뢰에 대해서, 정서적 욕구를 채우는 새로운 방법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변화무쌍한 우리의 관점보다 더 큰 비전에 대해, 대중 매체의 소음보다 더 깊이 있는 목소리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들보다 위대한 그 무엇이나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이와 같은 제안을 듣던 나우엔은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전할 자격이 될까 고민을 하지만 결국 그 지점에 서기로 결심한다.

 


 

 챕터는 깔끔하다.

 


 

1. 사랑받는 자가 되다.


2. 사랑 받는 자가 되어 가다

 - 선택받은 자 , - 축복 받은 자 - 상처 받은 자 - 나누어 주는 자


3. 사랑 받는 자로 살아가다

 


 

  그는 정말 사람을 깊게 들여다보는 은사가 있다. 나우엔의 글은 나우엔 만의 힘이 느껴진다.

 


 

  예를 들어 그가 '자기거부'에 대해 설명한 부분만 봐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우리 삶에서 가장 위험한 함정은 '자기 거부'라고 이야기 한다.

 


 

"아마도 자네는 자기 거부보다는 교만이라는 유혹에 더 빠지기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네. 그러나 사실 교만이란 것도 자기 거부라는 동전의 다른 면이 아니겠는가? 교만은, 자네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보이기 싫어서 자신을 더 높은 자리에 앉히려는 것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분석해 보면 교만은 무가치감에 대처하는 또 다른 방식이 아닐까? 자기 거부나 교만은 둘 다 우리를 인간 존재의 공통적 실제에서 벗어나게 해서, 그 모습에 이르는 것을 극도로 어렵게 -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만들지. 나는 내 교만 밑에는 수많은 자기 회의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네. 마치 나의 자기 부인 안에 엄청난 자만이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말일세. 내가 의기 양양하게 되든 움츠리게 되든 상관없이, 나는 진짜 내 모습에 다가가지 못하고 실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왜곡시켜 버리네."

 


 

"나는 줄곧 내가 사랑받는 존재임을 확신시켜 줄 수 있는 누군가나 그 무엇을 찾으면서, 크고 작은 원을 그리며 이 진리 주위를 맴돌고 있었네."

 


 

"이는 내 사랑하는 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길 거부하는 것 같았네. 그 목소리는 항상 그 곳에 있었지만 나는 이와 다른 더 큰 목소리. "네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해 봐. 제대로 된 화끈한 일을 해 봐. 그러면 네가 그렇게 원하는 사랑을 얻을 수 있을거야"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더 애쓰고 있는 것 같았네. 그러면 내 마음이 고요하고 침잠할 때 속삭이던 부드럽고 온유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거나 적어도 설득력 없는 상태로 남아 있었지."

 


 

 나우엔의 이야기는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비진리'를 끄집어 내서,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으로 그 영역을 녹여 버린다.

 


 

 나우엔은 이와 같은 '자기거부'를 타파하고, 진정한 사랑받는 자로서의 '인간'을 일으켜 세우며 그 인간이 '사랑받는 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이야기 하기 시작한다.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간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서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그 진리를 구현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때 중요한 4가지 키워드가 바로 선택받은자, 축복 받은자, 상처 받은자, 나누어 주는 자이다.

 


 

1. 선택받은 자: 영적인 삶의 첫 단계는 우리의 전 존재가 이미 붙잡힌 바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많은 이들이 오해하기 쉬운 것처럼, 우리가 선택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은 거절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나우엔은 말한다. 이것이 위대한 영적 신비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 택함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제하지 않고 그들도 포함시킨다.)


2. 축복받은 자: 축복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사랑 받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확정하는 것이다.

(선택받은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우리는 계속되는 축복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축복의 땅과 저주의 땅 사이에는 중립 지대가 없기에 우리는 어디서 살고 싶은지를 순간순간 선택해야 한다.)


3. 상처받은 자: 고통과 아픔은 단순히 우리 삶의 성가신 방해거리가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독특성과 우리에게 익숙한 개성에 대해 알게 해 준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 심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나의 고통이 나에게만 있는 독특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서 더 고마움을 느낀다고 나우엔은 이야기 한다.)

(우리의 상처는 우리가 선택받고 축복받은 사실만큼이나 독특하다.)

(상처가 우리의 선택받음과 축복받음만큼이나 우리 존재와 밀접한 것이라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 상처와 친해져야 한다)

(인간의 고통은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기쁨과 평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곳으로 이르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의 삶이 지닌 위대한 비밀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이 - 즐거움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아픔이든, 건강이든 질병이든 - 우리의 인간성에 대한 완전한 인식으로 향하는 여정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4. 나누어 주는 자 : 우리는 나누어 주는 삶을 살기 위해 선택받고 축복받고 상처도 받는다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될 때에야 선택받고 축복받고 상처받은 사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걸까? 주는 행위가 있어야, 우리가 단순히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다른 사람을 위한 삶 안에서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선택받고 축복받고 상처받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우리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우리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행복한 삶은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다. 그러나 그 진리는 대개 우리가 상처에 직면할 때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상처 때문에 서로의 삶을 나누고 서로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더 깊이 알게 된다)


나우엔이 '나누어주는 자'를 마무리하는 표현은 아름답다


"보잘것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나누어 주는 행동 가운데서 풍성해질 양식이 되기 위해 선택받고 축복받고 상처받은 존재가 되었음을 진정으로 알게 된다면, 자네와 나는 기쁨에 넘쳐 춤을 출 걸세.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걸세. 오히려 우리의 전 존재를 다른 사람을 위한 선물로 만들고 싶은 소망의 절정이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향한 삶을 살게 될 걸세."

 

 


 

사랑 받는 자로 살아가다


 

-> 이젠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에서, 사랑받고 있다는 진리에 "그렇습니다"로 지속적으로 반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삶이란 우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기회다)


 

 이러한 흐름을 통해 자신의 변화를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고통과 기쁨이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비슷한 것임을 알게 된다.


 

 고통을 기쁨 속에 통합시키는 나우엔의 서술은 그가 지닌 삶과 그가 지닌 지혜의 정점이다.

 


 

 그의 표현을 빌려보자.

 


 

"상을 받는 경험과 우수하지 못함을 알게 되는 경험이 둘 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주장할 기회를 제공한다면, 이 경험들은 다른 것이 아니라 거의 같은 것이 되는 거지. 외로움과 편안함에 모두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을 더 잘 발견하게 하기 위한 부르심의 의미가 있다면, 이러한 감정은 별개의 감정으로 남아 있지 않고 통합되네. 결국 사는 것과 죽는 것 둘 다가 온전한 영적 자아 실현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은 세상이 가르치는 것처럼 정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동일한 신비의 양면이 되는 것이지.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의 통합된 실재로서 살아간다는 말이네. 어둠의 세력은 나누고 분리하고 대적하게 만드는 반면, 빛의 세력은 하나를 이루게 한다네. '악마적인'(diabolic)이란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나눈다는 것이지. 마귀는 분리시키고, 성령님은 하나가 되게 하신다네."

 


 

 결국 나우엔의 글은 비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쓰여졌지만 정작 나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한 은혜의 바다를 맛보게 해준다.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고통을 끌어안고 주의 사랑 앞에 나아가는 삶을 가장 잘 다루는 신학자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를 표현하는 능력과 섬세함도 독보적이다.

 


 

 그의 유한 태도나 지나치게 포용적인 관점이 진리의 엄격성을 훼손한다고 우려하는 많은 보수 기독교 측에서는 그를 매도하기에 바쁘지만, 그건 나우엔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달콤한 자양분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1독을 추천한다. 

 

 

                                                   헨리 나우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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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라이트

출판 에클레시아북스

발매 2011.05.12

 

 

톰 라이트가 나타났다. 그의 가장 논쟁적인 책이다.

 


 

'칭의'(Justification) 는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가장 애지중지하는 개념 중 하나다.

 


 

 그런데, 그는 이 부분을 종교개혁자들이 성경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한다.

 


 

 예상했던 대로 존 파이퍼 목사님은 눈에 불을 켜고, 톰 라이트와 vs 구도를 그리면서 배틀 도서를 냈고, 라이트는 그에 대해 여유롭게 응수하며 다음과 같은 화답서를 출간한다.

 


 

승패를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파이퍼가 쓴 [칭의 논쟁] 과 톰 라이트가 쓴 [칭의를 말하다]를 통해 두 인물의 이야기를 거의 처음 들어봤다.

 


 

제 3자가 봤을 때 라이트의 압승이었다. 파이퍼는 계속 뒤에 가면 그 부분을 격파시켜 주겠다고 호언장담 하지만 결국 싱겁게 책을 끝내 버린다. 그냥 "종교개혁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 때 정립된 교리와 개념을 그렇게 바꾸려고 하면 안되는 거야~ 그건 잘못된 거야 ~ 알지? 그건 진짜 중요한 거야" 라는 말을 하고 끝내버리는 느낌이다.

 


 

라이트의 주장은 사실 계속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성경 속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자'였다! 라는 나의 기본 개념마저도 흔들어 놓는 그의 대담한 '역사적 눈으로 성경 읽기'는 마음을 심히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칭의' 논쟁에 대해 이 책만 읽고 나면 라이트의 주장에 설득 당하지 않기가 정말 어렵다.

 


 

무슨 마법을 쓰는 것 처럼, 그의 주장은 정교하고 논리가 탄탄하며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힘이 있다.

 


 

일단 몇 가지 지식을 나눠보자.

 


 

  존 파이퍼는 '의'(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가 죄인에게 '전가'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처음 믿는 순간부터 마지막으로 하늘나라에 도달하기까지 죄인을 그와 같은 상태로 옷 입히는 것을 '칭의'라고 본다.

 


 

  그러나 라이트의 주장은 바울은 파이퍼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 세부적인 내용을 자세히 풀어 쓴 책이 바로 [칭의를 말하다]이다.

 


 

 그는 먼저 '전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통이란 극히 세심하고 경건하며 박식한 사람들의 전통이라 할지라도 결국 사람의 전통이다. 내가 루터와 칼뱅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 특별히 칼뱅을 읽었을 때, 나는 그들이 말하는 내용 전부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진술하고 실천한 성경 읽기 방법만은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방식이란 나 자신을 성경 속에,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구약성경과 그리스어로 된 신약 성경 안에 푹 담그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성경이 나의 혈액을 따라 흐르게 하는 것으로서, 나는 내가 교회와 세상에 성경을 신선하게 가르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소원했었다. 우리가 종교개혁자들에게 보내야 할 가장 위대한 경의는 그들에게 오류가 없다고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그들에게도 섬뜩한 일일 것이다), 그들이 행한 대로 우리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의 수준에서 상당한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존 파이퍼는 내가 '교회가 1500년 동안 곤경에 빠져 있다는' 식의 말을 했다고 암시한다. 내가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파이퍼의 영웅인 루터와 칼뱅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말로 공격했었다. 그때 루터와 칼뱅은 성경을 통한 대답을 했고, 트렌트 공의회는 전통에 의거하여 대응했다."

 


 

  아직 책은 28page로서 제대로 된 논의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지만 이 말만 읽어도 라이트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가 보여주는 자신감의 근원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전통으로 덤빈다면 나는 나의 명검인 '성경'으로 너희를 격파해 주겠노라"

 


 

  그토록 '진리'를 강조하며, 기존 체계를 흔드는 라이트의 등장에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내는 '파이퍼', 보수 기독교 측은 이 황당한 말에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라이트의 위대한 공헌은 그가 정말로 성경과 역사의 엄밀성을 가지고 자신의 논리를 설득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사실, 나같은 초보 신자는 반대측 진영이 라이트의 주장을 성경대로 격파해 주는 걸 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이승구 교수님, 존 파이퍼 목사님 등의 적극적인 시도는 책의 내용으로 볼 때 전혀 라이트를 이겨내기 어려워 보였다)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기존 기독교에 폭탄을 날린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먼저 내가 다루고 싶은 핵심 본문들뿐만 아니라 구할 수 있는 신학 사전과 성경 사전들에 수록된 '칭의'에 대한 내용들도 꼼꼼히 읽어보았다. 그때 반복적으로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저자들이 성경 본문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보일 때에도 바울의 교리에서 핵심적인 요소들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시된 주제들을 나열하면, 아브라함과 하나님께서 그와 맺으신 언약,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 부활과 새 창조,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 역사를 통해 지속된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계획이라는 의미에서 종말론, 그리고 특별히 성령과 기독교적 인격의 형성이다. 이 주제들은 어디로 가 버렸나?"

(제임스 패커의 글에서는 이런 것들을 예외적으로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바울에 대한 논의는 그의 후속작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에서 더욱 자세하게 이어진다.

 


 

그가 말하는 '칭의'는 아직 들어가지 않았지만, 굉장히 천재적인 비유가 나온 부분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선작업에 동의가 되어야 이후에 펼쳐질 논의를 받아들일 마음 문이 열리게 된다.

 


 

"후대의 교리와 경건한 의지가 자체적으로 새로운 일련의 사고를 만들어낸 것이다. 다시 음악과 관련된 비유를 들어보겠다. 피아노의 댐퍼 페달을 누르고 낮은 '라' 건반을 눌러보자. 피아노가 조율이 잘 되어 있다면 곧 다음 옥타브의 '라'가 공명되어 울리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 위의 '미'가 들리고 그 다음 '라'가 들린다. 그 다음은 '올림 도', 그리고 또 '미'가 들릴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조금 혼란스럽다. 화성진행에 따르면 다음 음은 약간 내린 솔 제자리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가능하다. 이 모든 음들, 몇 개의 '라'가 원래 '라' 음을 강화해주고, '미'와 최소 1개 이상의 '올림 도'는 실제로 원래 음들의 일부를 이룬다. 피아노와 같은 악기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그 음들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실제로 그 음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을 듣다가 '미' 음만 귀에 들어와서 '미' 건반을 누르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들어봐! 이게 바로 우리가 듣고 있던 그 음이야!") 물론 '미' 음도 원래 '라' 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미' 건반을 누르는 순간 이전과는 다른 상이한 조합의 공명이 시작된다. 즉 다른 '미' 음이 들리고, '시', 또 '미', 그리고 '올림 솔' , '시' 와 같은 음이 공명하기 시작한다.

 

 


종교 개혁 이후 수 세기 동안 교회에서 바울을 적용하려 했을 때 발생한 일이 바로 이러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잠시 동안 루터와 칼뱅이 (물론 그들 사이에는 주요한 차이가 있다. 성급하고 때로는 분노한 반-새관점 운동에서는 이러한 차이도 얼버무리곤 한다) 바울이 이야기했던 내용에서 진짜 배음을 실제로 들었다고 치자. 바울이 댐퍼 페달을 밟고 '라' 건반을 누르자 울려 퍼진 화성의 다섯 번째 음인 '미'를 그들이 들었고 그 '미'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말이다. 그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개신교 내부에서 상황은 계속 변화했다. 다양한 형태의 운동들이 오고 갔다. 18세기 대륙의 계몽주의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완전히 개신교적인 운동이었다. 즉, 권위적인 종교를 제거하고, 분명하고 합리적이며 역사적인 질문들을 던졌다. 그 후 건조한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낭만주의 운동은 개신교의 정서가 지닌 또 다른 흐름을 담게 되는데, 이번에는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이 아니라 내적인 감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다양한 종류의 경건의 모습들이 나타나서 번성하다가 변형되고 그 유산을 남겼다. 마지막에는 (물론, 지금의 설명은 긴 역사를 과도하게 단축시킨 이야기이다) 실존주의가 나타나서 진정한 신앙의 핵심으로서 그리고 진정한 신앙을 판정하는 척도로서 본래적 사람의 경험을 들여다보았다. 그 기간 동안 순전하게 종교개혁자들에게 돌아가려는 흐름 같은 것은 없었다. 그들의 반향실(Echo chamber) 속에 들어가 반복해서 그들 자신의 말을 듣고 또 들었을 뿐이며, 반향실이 존재하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들의 바울 읽기는 그러한 반향실을 통해 계속 전달되었기 때문에, 결국 사도 바울의 원래 목소리는 완전히 들을 수 없는 정도가 되어버렸다. 결과적으로 피아노의 모든 음들이 명랑하게 울려 퍼지고 있는 상태가 되어, 처음에 울렸던 음을 알아내보려는 어떤 노력도 가망이 없어 보인다.

 

 


  물론 우리가 역사로 되돌아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울은 그 역사속에서 그 이야기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었던 이야기의 뿌리를 들여다보았다. 후대 교회 지도자들의 신망 있는 전통이나 좀 더 최근의 학자들의 그보다는 덜 신망 있는 각주들보다, 성경 그 자체에 귀를 기울이려 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향해야 할 곳이 바로 역사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16세기의 문제들과 19세기의 시각들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왔다. 이제 21세기의 문제들과 1세기의 시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을 때가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의 말을 어떤 재주로 반박할 수 있을지 모르겟다.

 


 

만약 파이퍼의 주장대로 '전가된 의'가 기독교에 핵심적이고 목숨을 걸만큼 중요하다면 바울이 왜 그에 대해 드러내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는지에 대해 고민을 해 봐야 한다고 라이트는 주장한다.

 


 

파이퍼는 16세기 기독교 갱신 운동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는 거라면 라이트는 1세기로 돌아가서 성경을 보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난감하다. 이 두가지가 대립관계에 놓이면 기독교인은 당연히 '진짜'에 기준점을 두는 게 맞지 않나?

 


 

  라이트는 칭의에 대한 논의를 전개함과 동시에 파이퍼의 주장들의 비논리성을 반박하고, 2부에서는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고린도서, 에베소서, 로마서를 세밀하게 주해한 뒤 결론에 도달한다. (성경 해석과 역사 지식으로 무장해 버리면 정말 쉽지 않다)

 


 

놀라운 그의 주해는 생략하고, 끝 자락의 이야기를 몇 가지 들어보자.

 


 

"우리가 많은 개신교에서 전통적으로 생각해온 방식을 따라 '이신칭의'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현재 행하고 있는 행위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우리는 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으로만' 이라는 요소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에 부딪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울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셨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전 세계와 맺으신,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바울의 성경적 신학이라는 더 큰 틀에서 이신칭의를 바라본다면, 결과적으로 완전히 바울과 부합하는 그 큰 틀로부터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행위들'의 위치(때때로 이런 식으로 언급된다)를 이해할 수 있는 쉽고 곧은 길을 발견하게 된다. 이 길은 어떤 방식으로도 '이신칭의'와의 연대를 위협하는 형태를 띠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스라엘이 엣 종교개혁이 주장한 의미에서 '행위로 얻는 의'를 추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이스라엘은 선한 도덕적 행위를 행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호의를 얻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상기하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 구출한 백성이었고, 그들이 지닌 율법은 이미 구속받은 백성들을 위한 삶의 방식으로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렇다: 이스라엘의 실수는 하나님의 목적을 오해한 데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전-세계를-위한-이스라엘-통한-단일-계획으로 보지 않고, 세상과는 무관한-이스라엘을-위한-단일-계획으로 보았다.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된 악한 것이라는 루터의 틀도 아니며, 그리스도가 율법에 순종하여 그 결과 '의'(행위로 얻는 의 라는 면에 주목하라)를 획득했고, 그 의가 믿는 사람들에게 '전가'된다는 칼뱅의 틀도 아니며, 하나님과 그의 이스라엘에 대한 신실함에 관한 내러티브가 메시아 안에서 그 종착점에 도달했다는 바울 자신의 유대적 사고 틀 안에서 진정한 의미가 파악된다."

 


 

 상당히 충격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으로 라이트는 율법을 부정적으로 간주하려던 루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율법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려뎐 칼뱅을 뛰어넘어 더 정확한 관점에 도달한다.

 


 

 신광은 목사님의 [천하무적 아르뱅주의]에서도 루터의 '이신칭의'가 우리로 하여금 믿음과 행위를 서로 대립관계로 여기게 만들어 기독교의 윤리관에 타격을 주고, 신앙이라는 것을 이상한 수준으로 쪼그려 놨다고 말했었는데 라이트의 성경적, 역사적 맥락 안에서 우리가 바른 '지식'을 지니게 되면, '행위'도 자연스레 회복시키면서 참된 하나님과의 신앙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오직 의로우신 분은 하나님 뿐이다! 라는 그의 선언은 빛이 난다.

 


 

의는 '전가'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고백 또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명증한 방법이다.

 


 

성경 주해를 세밀하게 하는 부분에서는 꽤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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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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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오스 기니스

출판 IVP

발매 2006.06.14

 

 

 

'소명' 이라는 제목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책이다.

 


 

쉐퍼의 제자이자, '문화 선교'에서 상당히 힘을 실어 주고 있는 '오스 기니스'의 대표 저서다.

 


 

  일단 주제 자체가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읽어보면 좋다. 이 책은 다른 책들처럼 그저 그런 말들을 나열하는 형태가 아니라 풍성한 예시와 다차원적인 해석, 풍성한 지식이 어우러져서 '소명'에 대한 다양한 측면들을 철저하게 해부하는 책이다.

 


 

  그래서 나우엔의 책처럼 '영혼의 울림'을 준다거나, C.S Lewis 의 책처럼 '천재적인 비유, 논리'가 들어 있지는 않다.

 


 

  약간은 건조하면서, 다양한 information 을 던져주는 느낌이 나는 기니스의 책은 처음에는 약간 싱거운 느낌이 난다.

 


 

그러나 챕터를 넘어갈 수록 다양한 인물들의 예화가 챕터의 주제와 조화를 이루기 시작하고, 기억하고 싶은 문구가 점점 쌓여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책을 덮고 나면 저자가 이 책에서 알려주고자 했던 내용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소명'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한 차원 더 넓고, 높아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스 기니스 강연 모습)


 

  그는 '소명'을 단순하게 바라보지 않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다 담아낸다.

 


 

  그리고 1차 소명과 2차 소명을 구분하는데 1차 소명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에 대한' 삶을 살겠노라는 마음의 자세를 의미하며, 2차 소명은 좀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직업적인 영역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소명'에 대해 고민할 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담긴 책.

 


 

 처음에는 좀 싱거워도 뒤로 갈수록 몰입도가 높아지는 책.

 


 

  그리고 각 챕터마다 생각해볼 만한 질문거리를 남겨주고, 그룹으로 모여서 공부할 수 있는 교재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점.

 


 

 이러한 매력을 기억하면서 같이 '소명'을 읽고, 나눠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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