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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C.S. 루이스

출판 홍성사

발매 2014.08.10

 

 

루이스의 원숙한 신앙이 담긴 에세이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고 7개의 주제를 짤막하게 나누는 글인데 글 하나하나가 주옥과 같다.

 

 


1. 기도의 효력

2. 믿음의 고집에 대하여

3. 썩은 백합

4. 스크루테이프, 축배를 제안하다

5. 선한 일과 선행

6. 종교와 우주 개발

7. 세상의 마지막 밤

 


 

1챕터: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기도 실험을 했던 것에 대해 반박해주는 챕터이다. <햄릿>에서 왕이 "진심이 안 담긴 기도는 결코 하늘에 닿지 않는다." 라고 말했던 대목을 루이스가 인용한 건 적절하다. 그런 식으로 조건을 걸어서 실험을 하듯이 접근하는 기도가 어떻게 진실된 기도가 될 수 있을까? 자연주의자들이 납득을 하든 안 하든 이 대목을 읽어 보고 자신들의 접근법을 고찰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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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챕터: 무신론자들이 볼 때, 왜 기독교인들은 저리도 근거 없이 맹목적인 믿음을 보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할 때가 있다. 그러다 보니 리처드 도킨스, 빅터 스텐저, 데니얼 데넷, 에드워드 윌슨 등은 자신들의 저서에서 그들의 무지함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지적으로 뛰어난 학자들 중에는 무신론자가 많다는 연구 데이터를 늘 자랑스럽게 내놓는다.

 

 


그런 의문을 지닌 이들에게 기독교인의 '믿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도와 주는 챕터다.


루이스의 마지막 말을 인용해볼까 한다.

 


 

"이것은 전달할 수 없는 지식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 동의하고 나면 사변적 사고의 논리에서 필연적으로 벗어나 인격적 관계의 논리라 부를 만한 단계로 넘어간다는 것은 그들도 알 수 있습니다. 그저 견해 차이에 불과하던 문제가 한 인격체가 신적 인격체를 대하는 행동에 관한 문제로 변합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 이 '신에 대한 믿음'으로 바뀝니다. 이 신은 이 하나님, 갈수록 더 많이 알 수 있는 주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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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챕터: 난 이 챕터를 보면서 우리가 높게 평가하는 '교양' 에 대해 재고해 볼 수 있었다. 나는 가끔, 한자락 지나가듯 읽는 웹툰이나 컴퓨터 게임,환타지 소설 속에서도 그 어떤 고전, 예술 작품보다 위대한 가치를 발견할 때가 있는데 사람들은 후자는 '고상하고, 멋지고, 우아하고 교양있는 것'으로 높게 평가하지만, 전자는 '철없고, 유치하고, 배울 점 없는 저급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라는 말과 함께 루이스가 인용하는 예시들이 있는데 그 중 한가지를 나눠 보겠다.

 


"제가 어떤 셰리주 파티에 참석했는데, 거기서는 교양이라는 말이 폭포수처럼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예술, 어떤 사람, 어떤 자연물에 대한 진정한 향유를 암시하는 말이나 시선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파티를 마치고 버스에 오른 저는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판타지와 공상과학 소설>에 푹 빠져 읽고 있는 남학생을 보고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살아 있고 조작되지 않은 것, 자발적이고 충동적이고 사심 없는, 진정한 문학적 경험을 만났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소년에게 희망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책이건 정말 좋아해 본 사람은 언젠가 좋은 책도 좋아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감상기관들이 존재합니다. 그것들은 무력하지 않습니다. 설령 그 소년이 공상과학 소설보다 더 진지한 책은 보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얻는 게 있을 테니까요."

 


 

이런 마음 가짐으로 자녀를 양육할 수 있다면, 훨씬 고차원적인 양육도 가능하지 않을까?

 


나의 인생을 반추해 봐도, 루이스의 표현들은 얼마든지 성립 가능하다. 그들의 표면만 보고 그들을 판단하지 말자.

 

 


꼭 고상한 책을 읽어야 그 사람의 수준이 고상한 건 아니다.

 


 

그러면서 후반에는 현대 교육의 폐해를 지적해 주고 있는데, 이런 논의 자체가 참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교양은 지배 계급의 자격 조건으로 적절하지 않습니다. 교양을 갖춘다고 해서 통치할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통치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자비, 재정적 정직, 실천적 지성, 노력 등이 교양 있는 사람들 안에 특별히 더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누구보다 '교양 있다고 받아들여지는' 루이스가 하는 말이기에 이 말들의 진실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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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챕터: <스크루테이프 편지>를 쓰고 나서, 후속편도 써달라는 요청에 대해 너무 악마적인 생각으로 빨려 들어가는게 힘들어서 더 이상 그런 글은 쓰기를 꺼렸다던 루이스가 이번에는 편지글이 아니라 연설문 형태로 그 악마들을 다시 초청했다.

 

 


악마의 입을 빌려서 루이스는 민주주의가 잘못 사용되는 경우, 평등주의의 지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가령 자신과 다른 모습을 용납하지 못하고, 자신의 열등감을 투영해서 그들을 그럴싸한 말로 쉽게 정죄해 버리는 민주 정신을 비판하는데 다음과 같은 예를 제시한다.

 

 


 

"여기 영어를 나보다 더 분명하고 듣기 좋게 말하는 사람이 있네. 잘난 체하고 고상한 척 꾸미는 비열한 가식이 분명해. 여기 핫도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네. 핫도그 따위는 수준에 안 맞다 이거 아냐. 주크박스를 작동시켜 본 적이 없다는 사람이 있네. 교양인입네 하고 뽐내려는 거 아냐. 그들이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나와 똑같을 게 분명해. 그들이라고 해서 다를 권리가 없잖아. 그건 민주적이지 않아."

 

 


이런 느낌과 더불어서 집단주의, 전체주의 양상이 만연해지다 보니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제 젊은 인간들은 보통 사람들과 달라질까 봐 고전음악이나 훌륭한 문학에 대한 취향을 애초부터 억누르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정직과 정숙과 절제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 구하기만 하면 그 힘을 가져다줄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한다고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다른 사람들과 달라지고, 다수가 걸어가는 길에서 어긋나고, 연대에서 밀려나고, 전체와 통합된 상태가 훼손될까 봐 우려하는 겁니다. 개인이 되어 버리면 어쩌나 걱정하는 거지요."

 


 

실제로 집단에 들어가면 이와 같은 분위기를 강요 받게 된다.

 


이건 진실에서 거리가 먼 악마적인 모습이라고 루이스는 경고한다. 그의 에언자적 통찰력이 빛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를 한다.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악마적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나도 너 못지 않아.', 다른 사람들과 같음, 함께함)가 정치적 민주주의를 지구상에서 제거하는 데 가장 좋은 도구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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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챕터, 6챕터도 나름의 참신한 의견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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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챕터: 재림 교리에 대해 다시 고찰해 보면서 유토피아적이고, 진화론적인 사고관에 비판을 가하는데 과학에만 국한된 진화론은 남겨 두고, 그 영역을 윤리, 문화, 사회, 역사에 공통적으로 적용해서 진보의 법칙을 이끌어 내는 점의 허구성을 파헤쳐 준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마지막 밤'이 도래하는 것을 기다리는 삶이 얼마나 가치 있으며, 중요한 부분인지를 역설한다.

 


 

 

짧은 글들이지만, 루이스의 균형잡힌 시각과 놀라운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 C.S Lew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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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양낙흥

출판 부흥과개혁사

발매 2003.10.10

 

 

 

 

  정통 칼빈주의에서는 1등급 신학자이자 목회자로 존경을 받고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다룬 책이다.

 


 

  700page가 넘는 분량으로 인해 접근하기가 쉽진 않겠지만 조나단 에드워즈가 왜 금세기에 이토록 존경을 받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다.

 


 

  청교도적인 신학적 배경도 잘 설명해 주고, 그의 출생과 사역, 변화, 대부흥 시기에 대한 역사적인 지식, 그리고 신학적인 개념들까지 자세하게 기록해 뒀기 때문에 실제로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유익한 점이 많다.

 


 

  그는 설교 준비와 연구에만 하루 13시간 이상을 투자했다고 하니 대단히 지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강점은 이성적인 논증에만 특화되지 않고, 분명한 성령 체험과 경험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30대 중반에 겪었던 놀라운 신비적 체험이 [개인적 진술]이라는 저서에 실려 있다.

 


 

"주후 1737년 어느 날 나는 건강을 위해 숲 속으로 말을 타고 들어갔다. 그리고 고적한 곳에서 말을 내려 여느 때처럼 명상과 기도를 위해 산책을 시작하려 했다. 그 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에 대한 비범한 시야가 열리는 것을 체험했다. 그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보자로 나타났다. 그의 놀랍고 위대하며 충만하고 순수하며 달콤한 은혜와 사랑, 그리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겸손을 보았던 것이다. 내게 그처럼 고요하고 달콤하게 나타났던 이 은혜는 하늘보다 더 위대해 보였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형언할 수 없이 탁월해 보였으며 모든 생각과 관념을 다 집어삼킬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탁월성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한, 그것은 약 한 시간 정도 계속되었다. 그 시간 대부분을 나는 눈물의 홍수 속에서 큰 소리로 울며 보냈다. 내 영혼은 비워지고 소멸되었으며 먼지 속에 누워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져서, 거룩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며, 그 분에 의해 살면서 그를 섬기고 따르며, 그리스도의 충만함 속에 전적으로 삼켜져, 완전히 성화되고, 신적이고 천상적인 순수함으로 순수해지는 것을 느꼈다는 것 외의 다른 말로는 도저히 표현하 길이 없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체험을 이렇게 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것도 에드워즈의 천부적인 재능이었던 것 같다.

 

 

 


 

또한 그는 청교도적인 신앙관을 잘 살려서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도 균형감 있게 잘 강조해 주고 있다.

 


 

"나의 사악함은.... 오랫동안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무한 위에 무한을 쌓아 두며 무한에 무한을 곱하는 것으로 외에는 내 죄가 내게 어떻게 보였는지를 더 잘 표현할 길을 알 수 없었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매우 자주 나는 이런 표현들을 내 마음과 입에 두고 다녔다. "무한 위에 무한, 무한 위에 무한!" 내가 내 마음을 들여다 보면서 나의 사악함을 살피면 그것은 지옥보다 무한히 더 깊은 구렁처럼 보였다."

 


 

 그의 놀라운 점은 대각성이 있고 나서, 정말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할 때 이에 대해서도 명확히 변증을 해냈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들을 명료하게 범주화 해서 변증할 수 있는 신학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싶다.

 


 

  그리고 그는 섬세함을 잃지 않는데 그저 '무질서'를 일으키면 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하며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다' 라는 관련 구절만 슬쩍 인용하는 식의 어설픈 사변 논증은 에드워즈와 거리가 멀다.

 


 

그는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들의 양심을 깨우치기를 기뻐하신 결과로 그들이 커다란 외적 표현을 도저히 억제할 수 없다면 그들이 참석하고 있던 공적 수단들을 다소 침범하고 깨뜨리는 결과가 생긴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혼란이나 불행한 침범이라 생각지 않는다." 

 

요즘 보수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영역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열성적인 부흥주의자들이 오해받는 경우에 대해서 그들을 변호해 주고, 열심 있는 사역자들이 경계해야 할 함정들에 대해서도 균형감 있게 알려줌으로써 신앙의 많은 영역에서 통찰력을 키워 주기에 이른다.

 


 

  이와 같이 에드워즈는 주로 저술 활동과 지식적인 논증에서 많은 힘을 발휘했는데 그 속에 체험적 신앙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보니 그 글들에는 생명력이 있고 힘도 있으며 날카롭고 달콤하다.

 


 

  문제는 그가 사역 후반에 성도의 조건으로 너무 까다로운 조건들을 내걸다가 자신이 오랜 세월 섬기던 교회와 갈등을 빚게 되면서 해임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가 제시하는 기준은 좀 당혹스럽다. 그건 신앙을 받아들이고 나서 상당한 성령의 열매를 맺은 이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덕목, 가치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C.S 루이스의 말처럼 모든 사람들이 출발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가시성'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게 더 좋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요구를 했다는 면에서 율법주의적인 신앙관을 조장한 것은 아니냐고 비판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구원론을 불신자를 위한 회심의 기준으로써가 아니라 신자가 추구해야 할 성화의 목표로 삼고 추구한다면 분명 경건생활에 유익이 클 것이다.

 


 

인간이 결단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으니 그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강하게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오직 그런 영역들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리는 칼빈주의적인 신앙관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는 토론에 능하고, 말을 잘하는 달변가는 아니였지만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깊게 하나님을 알아가고, 전하며 진리의 투사로 싸웠다.

 


 

그의 가치는 후대에 인정이 되어 요즘은 그에 대한 양질의 번역서들이 다수 출판되고 있다.

 


 

상당히 엄격한 색깔을 지니고 있던 그였고, 그의 깊고도 세부적인 신앙에 대한 설명들 중 동의가 안되는 부분들이 종종 나올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신앙 생활, 영성 생활을 이렇게 글로 논리정연하게 정리해서 전달할 수 있는 균형감 있는 신학자는 드물기 때문에 그의 가치는 크다고 본다.

 


 

그리고 세속의 철학적인 접근에도 능숙해서 그의 글은 어떤 경우에는 상당히 읽기 어렵기도 한데 그만큼 깊이가 있다.

 


 

경건 생활을 향한 도전을 원한다면 1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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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승구

출판 합신대학원출판부

발매 2013.10.01

 

 

 

  인기 절정인 톰 라이트에 대해 개혁신학(보수신학)에서 입장을 표명한 책이다.

이승구 교수님은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감안해서 읽어야 한다.

 


일단 한국에선 개혁주의 신학이 '보수주의 신학'을 대변하는 용어가 되어 버렸지만 원래 '개혁주의 신학'은 좀 더 넓은 관점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Term이라고 생각한다.

 


 

톰 라이트의 작금의 주장들이 상당히 논쟁적이고, 사람을 고민되게 만드는 요소가 많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약간은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의 이론에 대해 적절한 비판을 해주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 속에서 톰 라이트의 입장은 잘 비판되지 못한다. 그러기에는 뭔가 역량이 부족하다고나 할까?

 


 

이 책은 톰 라이트의 원서들을 읽으면서 그의 입장을 장황하게 인용하면서 인쇄된 책이기 때문에, 두서가 없고 산만한 느낌이 든다.

 


 

뭔가 라이트의 글을 천천히 곱씹으며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다음에 차분하게 입장을 표명하는 느낌이 아니라 일단 이상하다 싶은 부분들은 다 인용을 해 둔 다음에 그 뒤에 자신의 입장을 빠르게 정리해서 몇 자 적는 느낌으로 전개되는 책이다.

 

 

          

                                                               

                                 (톰 라이트)


 

라이트가 [칭의를 말하다]에서 존 파이퍼 목사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무시하면서 논의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 점에 대해서 이승구 교수님은 라이트가 너무 자신의 입장에서만 관찰한 것 같다고 비판을 하긴 하는데, 이게 라이트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의 [칭의]에 대한 부분을 비판할 때도 딱히 그 논리에 비판을 하지는 못하지만 1500년 경의 전통(orthodoxy)에 기대어서 그와 다른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 경고를 할 뿐이다.

 


 

그리고 라이트가 성경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모습을 비판하면서 성경에 전혀 비판을 시도하지 않는 이들을 라이트가 문자주의자들,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냉소적으로 평가절하하는 모습을 다시 비판하는데, 이건 이 책의 저자가 지향하는 '독특한 노선'에 기대어서 비판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오랫동안 논쟁적인 주제가 되었던 성경 비평에 대한 부분이니만큼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비판받는 걸 막을 방도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부분적으로 라이트가 성경을 주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에서 의문이 드는 부분도 있다. 역사적인 접근만을 지향하다 보니, 우리가 들어왔던 해석과 너무 다른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라이트의 원서를 직접 본 게 아니라 이승구 교수님의 인용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라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 때는 성경에 대한 다차원적인 해석을 지지하는 이승구 교수님의 접근법에 마음이 더 간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논의는 이승구 교수님의 의견에 잘 설득되지 않는다.

 


 

  톰 라이트가 천주교적인 성찬 이해를 허용한다고 표현한 것이나 동방 교회의 '예수 기도'가 우리에게도 의미있게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 부분에 대해서 극도의 위험성을 드러내며 경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진리를 순수하게 지켜 내려는 그의 열심이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앞과 뒤가 다 막혀서 유연성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다.

 


 

  또한 라이트가 '신조 중심의 기독교'와 '성경 중심의 기독교'를 구분해서 후자에 집중하자고 역설한 부분은 너무도 당연한 해석인데, 이 책의 저자는 모든 신조 작성가들이나 신조를 믿는 분들이 성경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아갔다는 것을 기억하자며 신조중심의 기독교를 지켜내려 한다.

 


 

  그러다 보니 라이트가 1세기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해야지 16세기의 칼빈에게 충성해서야 되겠는가? 라는 식의 말을 하는 건 당연하다.

 


 

  이승구 교수님의 경고를 들어보자.

 

 

  "그러나 우리는 신학을 한 시대를 대상으로만 하는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모두를 의식하면서 하는 것이다. 라이트는 미래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평가할 것으로 기대하지만, 지금 그가 논의하는 것은 결국 성경에 충실하려는 개혁자들의 논의 방식을 사용해서 개혁자들의 논의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 되며, 이는 결국 종교개혁이 내용적으로는 잘못된 것이거나 지나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라이트는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이런 식이다. 라이트는 종교 개혁을 부정하지도 않고, 그 가치를 폄하하지도 않는다. 놀라운 사건이었고, 하나님의 중요한 이끄심이었음을 믿지만 그 개혁 역시 인간의 손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완전히 무오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보수주의자들은 그런 식의 해석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성경무오설도 문자 그대로 신봉하게 된 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개혁의 형식적 원리인 성경에 충실할 것과 함께, 종교개혁의 내용적 원리인개혁자들이 이해한 이신칭의 교리에도 충실해야만 한다는 점을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이다. 라이트에게 아쉬운 점이 바로 이점이다. 부디 라이트가 종교개혁의 형식적 원리에만 충실하지 말고, 그 내용적 원리에도 충실할 날이 오기를 원한다."

 


 

이런 충격적인 입장을 지지하면서 라이트에게 훈수를 둔다는 게 당혹스럽다.

 


 

세계관 분석 방법론 같은 챕터는 상당히 중요한 접근법이고, 좋은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저자가 충분히 이해하고 인용하며, 정리를 한 건지 약간의 의구심이 생기는 구성과 짜임새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라이트의 입장에 따르면 그 어떤 인간도 신적인 관점을 가질 수는 없으니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진술을 할 수는 없고, 우리 모두 다 제한된 의미에서 각자의 주장을 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라면서 그는 이와 같은 견해를 반박하는데, 그렇다면 종교개혁을 100% 형식적, 내용적으로 다 받아들이는 누군가는 그런 절대적인 진술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는 것일까?

 


 

  글을 보다 보면 이승구 교수님은 워필드, 반틸 등의 성경 해석법을 동의하는데, 코넬리우스 반틸은 쉐퍼의 스승이었지만 쉐퍼조차도 등을 돌린, 극단적인 보수주의자 아니던가...... 진리를 엄밀하게 지키기 때문에 자신은 그 입장에 설 수 밖에 없다고 호소하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늘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는 라이트의 열린 관점, 논의를 하고자 하는 넓은 자세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는데 결국 그의 말에 따르면 이성논증은 하지 말아야 하고, 학문적인 접근은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책의 저자는 자신도 이성을 활용하여 학문적 접근을 하면서 라이트를 비판하고 있으니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치 절대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는 상대론자들,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의 '그 주장'을 절대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모순되어 보인다.

 


 

  세부적이고 사소한 해석에 있어서는 이승구 교수님의 라이트 비판이 동의가 되는 부분이 있고, 고민이 되는 영역도 있으나 크게 봤을 때는 결국 이승구 교수님은 자신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잣대를 가지고 라이트의 안 좋은 부분을 꼬집어 낸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24장에 대해서 대개 영적인 해석을 많이 첨가하는데 라이트는 이 속에 예수님의 재림이나 '때의 징조'에 대한 생각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부분들은 좀 더 고민이 된다. 그리고 다차원적인 해석의 용도로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다고 믿는 견해를 나는 지지한다.

 


 

  그리고 이 책은 라이트가 공헌한 부분도 앞에 조금 써주긴 하지만 대부분은 뒤에서 잔뜩 비판하고 싶은 전조에 불과하다.

 


 

  라이트가 지닌 하나님 개념에 대해서는 칼 바르트를 따르는 이들에게서 듣던 말을 라이트가 한다면서 그 말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냥 자신은 칼 바르트 입장을 반대하고, 정통적인 해석이 맞다고 믿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비판의 근거가 되나 보다.

 

(21세기의 C.S 루이스라 불리며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톰 라이트, 퍼옴)


 

  그리고 예수님의 제사장직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고 선지자직(그리고 왕직)에만 집중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트집을 잡는데, 이런 건 책의 분량을 채우기 위한 유치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라이트보다도 좀 더 균형잡힌 성경해석자들을 갈구하게 되고, 우리들의 성경해석에서 이와 같이 한 해석에 집착하여 균형을 깨는 무리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이 논의를 통하여 우리들은 스스로 흥미롭다고 발견한 한 해석에 사로잡혀서 성경 해석 전체를 그르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로고 주의하여 가야 한다는 큰 교훈을 얻게 된다."

 


 

  라이트의 시각이 균형잡히지 않았다면 어떤 것이 균형잡힌 시각일까? 역시 답은 정통주의적 해석을 충실히 따라주는 게 바로 '균형 잡힌 것'이라고 그는 말할 것이다.

 


 

  일단 이 책은 라이트의 입장을 너무 곧이 곧대로 듣지 말고, 좀 더 비판적인 눈으로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나도 라이트의 글을 보면서 놀라곤 하지만, 동의가 안되는 부분이 몇 가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승구 교수님의 입장이 더 균형잡힌 시각이라고 보이진 않는다.

 


 

  반틸의 전제주의를 다시 가져오자고 말하는 순간, 그의 입장은 그의 노선은 오른쪽 그 어딘가에 고착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관련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저자의 '진리'를 향한 열정과 노력에는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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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존 스토트

출판 IVP

발매 2011.03.14

 

 

 

  개정판이 나오면서 상당히 깔끔한 표지로 재등장했다. 스토트 목사님이 소천하신지 그리 많이 지나진 않았는데 그의 역작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현실 참여적이고,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굳건히 살아가는 삶을 강조하던 그의 정수가 담겨 있는 책인 듯 하다.

 


 

  인권, 환경, 평화, 생명공학, 부의 불균형, 실업, 다문화 사회, 동성애, 페미니즘 등 다양한 사회 이슈들을 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직면하는 그의 모습은 교회 안에만 갇혀 있는 시야가 좁은 목회자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아가려는 한 명의 제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책의 말미에는 스터디 가이드가 있기 때문에 한 챕터를 읽고 나서 소그룹 모임을 통해 토의문제를 같이 풀어 보고, 고민을 나누는 유익한 시간도 가질 수 있다.

 


 

  이 책을 보면 스토트 목사님이 얼마나 많이 연구하고, 고민하고 달려 왔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존 스토트, 퍼옴)


 

  각 챕터 자체가 굵직하고 중요한 논의이며 많은 공부가 요구되기 때문에 감히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색깔을 지니고 있는데 스토트 목사님은 용감하게 각 영역에 뛰어들어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의견과 지식들을 거침없이 활용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세워 놓는다.

 


 

  세부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면, 스토트 목사님의 의견에 반대하는 부분이 나올 수도 있고 아쉬운 챕터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책 한권으로 성공리에 쓰여졌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벅차 오르는 책이다.

 


 

  500page가 넘는 분량이기 때문에 읽어내는데 시간은 좀 걸리지만 각 분야에 대해 기독교적인 관점이 궁금한 이들은 해당 부분을 발췌해서 읽어도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떠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떠오른다.

 


 

  힘겹게 각자의 위치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지켜내고 살아가고 있을 용사들에게 작은 위로와 힘이 될 수도 있는 책이고, 이미지가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여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어진 한국 기독교 계에도 이와 같은 목회자가 더욱 많아지기를 기도하게 된다.

 


 

  세상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꼭 소장하고 읽고 또 읽으며 고민해 보자.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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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존 하워드 요더

출판 IVP

발매 2007.10.10

 

 

 

IVP 모던 클래식은 어느 정도 믿고 본다.

 

존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은, 정치에 깊게 관여하지 않는 내겐 우선순위가 밀리는 책이었지만 중요한 사회 영역을 언제까지 배제해두고 살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접근했던 책이다.

 


다른 어려운 서적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이 상대적으로 더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책이 잘 안 읽혔던 것 같다. 아래쪽에 난하주가 너무 많이 달려 있어서 본문을 읽는데 방해가 될 때도 많이 있었다.

(물론, 워낙 논쟁적인 주장들을 하기 때문에 적절한 변증과 섬세한 접근이 중요하긴 하다지만....가독성에 방해가 된 건 사실이다.)

 


 

일반 성도들에게 생소한 메노나이트 교단에 속한 요더는 칼 바르트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었다.


 

예리한 지성,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 언어와 학문 영역의 경계를 넘나드는 폭넓은 학식에 요더의 주변 사람들은 자주 놀란다고 하는데....

 

 

           

                                                (존 하워드 요더)


 

이 책의 요지는 이런 것 같다.

 


예수님은 다분히 정치적인 존재였다는 전제를 확실히 박고 이야기가 진행된다.


 

많은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정치적인 색깔을 벗겨 내려고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리고 그분이 정치적으로 워낙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결국 정치범을 향한 최고의 형벌인 십자가형이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이 추구하는 '정치'는, 기존의 '세속 정치'에 기대어서 힘을 불려 나가거나, 그 방식을 그대로 수용하되, 적절히 변형시켜서 사용하는 개념이 아니라 전혀 다른 '대안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예수가 추구하던 세상은 '온전한 순종과 복종', '온전한 평화'를 외치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요더가 추구하는 '평화주의'는 일반적인 평화주의와 동기와 철학적 근거가 판이하게 다르다것이다.

 


가령 톨스토이도 비슷한 강조를 했지만 그와 같은 인류애 때문도 아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나 간디처럼 그 노선이 탁월한 효과를 지니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예수가 그 길을 걸어가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입장은 철저히 기독론에 근거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그는 기존 사회 질서, 정치가들의 정치, 그 부산물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사회에 참여해야 할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체적인 행동 양식에 대해서는 요더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는 스토트 목사님의 [현대사회의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같은 저서같이, 좀 더 실제적이고 사람을 살리는데 도움이 되는 노선이 더 눈에 들어오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더는 자신을 리처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제시했던 유형론(typology)의 시각으로 바라보지 말아달라고 당부한다.

 


 

그렇다. 아무래도 이런 노선을 견지하는 요더를 바라보고 나면 리처드 니버가 말했던 1번 유형이 떠오른다. 톨스토이나 터툴리아누스가 주장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길과 세상 문화는 서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 속에 요더를 집어 넣고 싶어진다.

 


그러나 요더는 기존 사회를 변혁해 나가는 것에 대한 열정보다는 그저 대안 공동체인 교회를 더욱 회복시켜서 기존 사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사회 속에 영향력을 일으키고 싶었던 것 같다.

 


분명 논쟁적인 책이지만,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제시하는 그의 주장은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평화가 무너져 버린 작금의 시대 가운데 다시 한번 요더가 주장하는 '예수님의 정치'.... 즉,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걷는 순종의 삶'이 회복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한번쯤 고민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이 책을 접하고 나서 수년 뒤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가 잦은 성추행으로 구설수에 올랐다고 한다. 비윤리적인 신학자가 전하는 '신학적 윤리학'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 사람이 주장하는 이론과 그 사람의 삶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주장을 전개한 주체와 주제의 내용을 독립적으로 바라보긴 힘든 것 같다. 이와 같은 불미스러운 행위가 없었더라면 그의 저작은 더욱 빛났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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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강성호

출판 짓다

발매 2016.05.12.

 

 

 

 

기독교인이라면 꼭 봐야 할 책이다.

 

 

한국 기독교가 어쩌다가 '개독교'가 되어 버렸는지 추적을 하다 보면

 

 

율법주의적 신앙관 등 신학의 문제점도 관련이 깊지만,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기독교가 취해 왔던 행보들, 정치와의 부당한 결탁 등도 한국 기독교의 변질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 책은 한국 기독교가 일찍이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의 침략 전쟁을 지원하고, 이승만 정권 때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군부 독재 시절에는 부당한 정권에 아부하며 기생했던 부끄러운 이야기가 구구절절 써 있다.

 

 

부정선거에 연관된 것은 물론이요, 로마서 13장의 정치학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세운 권세는 부당해도 복종해야 한다는 궤변을 설교한 적도 많았으며,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마치 기독교의 절대 진리인 것 마냥, 그 잣대를 중심으로 모든 걸 재단하려 했던 부끄러운 역사....

 

 

돈과 권력이 관련된 일에는 발벗고 나섰으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향해서는 눈을 돌리지 않았던 매정한 기독교...

 

무례하고, 오만한 전도 방식과 주변 지역 사회에 민폐를 끼치면서 성전 건축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우리들의 부끄러운 민낯...

 

말하기도 부끄럽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 노골적으로 잘 담겨 있다.

 

아마 많은 분들이 한국 근현대사와 결탁한 한국 기독교에 대해서는 생소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 책을 봐야 한다.

 

 

 

 

 

한국 기독교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디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는지가 더 선명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소위 [메가처치 현상] 등과 맞물려서, 한국 기독교의 변질과 문제점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해 보고 싶다면 필독서로 삼아야 할 책이다.

 

 

이 책을 보고 나면, 자신의 정치관도 다시 점검하게 되고 어떤 지점에 서 있어야 하는지 조금은 감이 올 것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외면치 말고, 당당하게 직면하고 반성하고 넘어가야 할 시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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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Henri J. M. Nouwen

출판 CrossradPublishingCompany

발매 2002.10.01.

 

 

 

  영성 신학의 대가 헨리 나우엔의 원서다.

 

 

  원서이지만, C.S Lewis 등의 저서처럼 읽기가 난해하지는 않고, 어렵지 않은 문장으로 매우 고급스럽게 쓰여진 책이다.

 

 

  믿지 않는 비기독교인 친구를 대상으로 복음을 나눠 보는 책인데, 실상 믿지 않는 이들보다는 기독교인들이 읽었을 때 더 은혜가 되는 책이다.

 

 

  이 책을 읽은 믿지 않은 친구가 나눠준 소감은 이랬다.

 

 

  Fred tried to explain the problem.

 

  "Long before you start speaking about being the Beloved and becoming the Beloved, you have to respond to some very fundamental questions such as : Who is God? Who am I? Why am I here? How can I give my life meaning?

  How do I get faith?

 

  When you do not help us to answer these questions, your beautiful meditations on being and becoming the Beloved remain dreamlike for us."

 

 

  이 친구의 고백이 이 책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제시해 주는 듯 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은 믿는 이들에게 훨씬 더 유익하다.

 

 

  아직 믿음이 없는 이들에겐 신이란 어떤 존재이며, 믿음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이며 기적이란 있는 것이며, 우리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 좀 더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친구의 고백은 실제 삶에서 잘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결국 돌이켜 보면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되었을 때 우리는 신앙을 가지게 되지만 정작, 믿는 자들이 이런 질문과 답을 들고 먼저 다가가면 믿지 않은 이들은 너무 복잡하다는 둥, 너무 어렵다는 둥, 관심 없다는 둥 별로 성과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본인 스스로가 그런 갈망에 잠겨 있을 때 적절한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그런 논의가 이뤄지는 게 최적일 것이다.

 

  그리고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찾고 나서 다시 이 책을 읽는다면 나우엔의 친구 Fred는 눈물을 흘리며 이 책의 내용을 묵상하게 될 것이다.

 

  우선순위가 칼로 무를 자르듯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것 같진 않다. 어떤 이들에겐 이 책이 주는 메시지가 더 절실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대개는 근본적인 질문들과 이러한 내적 채움이 동시 다발적으로 이뤄지는 게 우리네들의 신앙의 신비가 아닐까...

 

  책 내용은 거의 버릴 게 없을 정도로 좋아서 1독을 추천한다.

 

  선물 받은 책인데, 좋은 책을 추천 받아서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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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마크 A. 놀

출판 IVP

발매 2015.08.10.

 

 

 

 

  이 책은 마크 놀의 저서다. 마크 놀 하면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이라는 역작을 낸 사람이 아니던가.

 

 

  복음주의 지성이라고 할 만한 게 사라져 버린, 현대 기독교의 어두운 면모를 예리한 지성으로 까발렸던 저자가 이번에는 학문 연구 속에 복음주의 지성을 어떻게 적용할지를 논하고 있다.

 

 

  책 제목과 저자만 보고도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어떻게 학문할 것인가?"

 

 

  이와 같은 진중한 질문을 던지면서 이 책은 시작된다.

 

 

  "신앙하기""학문하기" 를 어떻게 조화롭게 활용할지 고민하는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 책을 거쳐 가는 걸 추천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인간의 학문 추구의 가장 근본적인 동기" 라는 상당히 도발적인 문구를 제시한다.

 

 

  물론 난 이 책의 중반 정도를 읽을 때까지 큰 감흥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초반에 밑 작업을 섬세하게 하는데, 그 작업이 지루하게 느껴지고, 너무 애둘러서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밑 작업으로 '예수 그리스도' 에 대한 깊은 묵상을 이끈 다음에 역사, 과학, 성경 연구 등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모습보고 있노라면, 튼튼한 반석을 깔아 놓고, 그 위에 세워지는 그의 논리가 상당히 그럴싸해 보인다.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에 대한 비판이라든지, N.T wright 등의 성경 연구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도발을 하는 느낌도 주고...

 

 

  책이 어렵지 않은 듯 하면서도, 다 읽고 나니 다시 한번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존에 복음주의 지성을 대변하는 느낌과는 또 다르게 기독론을 중심으로 다른 학문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그의 방법론은 전부 동의가 되지 않더라도 고민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한 것 같다.

 

 

  책 속의 세부적인 내용들은 공유할 만한 게 몇 가지 있어서 다른 지면을 빌어 그 이야기는 나누고자 한다.

 

 

  진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학문 활동을 잘 해 나가고 싶은 이들이라면,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을 먼저 읽고 나서, 이 책을 한번 읽어 보면 좋을 것이다.

 

 

  워낙 밑작업이 오래 걸리는 책이라서 초중반에 좀 지루할 수 있고, 이 책이 도대체 책 제목을 왜 이렇게 지었는지 의아함이 생길 수도 있지만 끈기를 가지고 중반을 넘어서고 나면, 신선한 바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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