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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 기니스의 [소명] 에 나온 이야기로서 정확한 출처는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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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는 20세기 예술의 최정상에 위치한 천재적인 예술가다.


그러나 그는 대인관계 특히 여성과의 관계에서는 탐욕스러운 괴물이었다.


그는 자기를 '미노타우르스'(인간의 몸과 소의 머리를 가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라고 불렀으며, 조각가 지아코메티를 비롯한 친구들은 그를 '괴물'이라고 불렀다.

 

 


피카소는 "내가 죽는 것은 배가 난파하는 것과 같아서, 거대한 배가 침몰할 때처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배와 함께 가라앉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불행하게도 피카소의 말은 옳았다.


1973년에 91세의 나이로 그가 죽은 후 그와 가까웠던 세 명의 인물이 자살했고 - 두 번째 부인 자클린, 초기의 정부 마리 테레즈, 손자 파블리토 등- 여러 명이 정신적인 붕괴를 겪었는데 그 중에는 첫 번째 부인 올가와 가장 유명한 정부인 도라 마르가 포함되어 있다.


이 같은 파괴적인 종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상된 것이었다.


피카소의 어머니는 첫 번째 며느리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나는 어떤 여자라도 내 아들과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 아이는 자기만을 위할 뿐 타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야."

 

 


프랑소와즈 질로는 피카소의 세 번째 정부인데, 그보다 40세 연하로서 그와 함께 살았던 10년의 세월을 [피카소와의 삶](Life with Picasso) 에서 들려준다.


그는 너무나 강렬하게 그녀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그녀는 "그와 함께 있지 않으면 숨을 쉬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고 썼다.


그러나 피카소가 시인한 것처럼 그의 세게에는 오직 두 종류의 여인 - 여신과 신발 흙털개- 이 있을 뿐이었다.


모든 여인은 전자로 시작했다가 조만간 후자로 변하게 마련이었다.


질로 이전의 정부였던 도라 마르는 결국 피카소에게 "당신은 평생 어느 누구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당신은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몰라요" 라고 말했다.


한번은 질로가 그에게 '악마'라고 말하자 피카소는 피우고 있던 담배로 그녀의 뺨을 지졌다. 그리고 손을 떼면서 "아직은 당신을 바라보고 싶어" 라고 그 이유를 말했다. 피카소는 질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내를 바꿀 때마다 이전의 여인은 묻어버려야 해. 그런 식으로 그들을 없애 버리는 거야... 그 여인을 죽이고 그녀와 관련된 과거를 깨끗이 씻어 내는 거지."

 


질로는 이것을 피카소의 '푸른 수염 콤플렉스' (푸른 수염의 사나이는 6명의 아내를 차례로 죽인 동화 속의 잔인한 남자다) 라고 불렀고, 이것이 그의 무신론과 관계가 있음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자신은 니체의 추종자라고 공언했던 피카소는 신은 죽었다고 주장했으며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이다" 라고 중얼거리곤 했다고 한다.


피카소가 창조한 허무주의적인 공허함 속에는 악마적인 힘이 있었으며, 그것이 그로 하여금 계속해서 작품을 만들어 내도록 하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 파블로 피카소는 위대한 화가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임에 틀림없다.


그는 파괴성을 드러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다른 방향을 향한 동경심을 보였다.


가장 뚜렷한 예로, 질로가 그의 모순을 발견하고 놀란 사건이 있었다.


피카소와 같이 생활한 지 3년째 되던 어느 날 그들은 프랑스 남부의 앙티브에 있었는데 갑자기 피카소가 질로를 조그마한 교회로 데리고 가서는 그녀를 앞선 구석진 곳으로 이끌었다.


"여기서 나를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맹세해 주었으면 하오." 하고 피카소가 말했다.


"나 자신이 그 정도로 헌신하길 원하기만 한다면 어디에서나 그렇게 맹세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하필이면 여기서죠?" 라고 질로가 되물었다.


"그저 아무데서나 하는 것보다 여기서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오"라고 그가 말했다.


"여기서든 다른 곳에서든 마찬가지예요"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아니오 글쎄, 물론 그 말이 맞소 다 마찬가지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요. 누가 알겠소. 교회에 뭔가 특별한 게 있을지도 모르지 않소. 모든 걸 좀더 확실하게 해줄 수도 있으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않소?"


그래서 질로는 맹세했고 피카소 또한 맹세를 했으며 그는 만족스로워하는 표정이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피카소의 고집은 일종의 미신이었는가, 아니면 직관이었는가?


피카소가 미신적이고도 운명론적인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질로에게 "모든 사랑은 예정된 기간 동안만 지속될 수 있을 뿐이다." 라고 서글픈 어조로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하루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의 관계가 끝날 날이 하루씩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고 썼다.


다른 한편 그 또한 치유 불가능한 갈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나는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채 죽을 것 같다" 고 말한 적도 있다. 결국 옛날 노래 가사와 같이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면 영원이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그러한 동경은 인간 관계의 연약성 너머를 향한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준거점을 찾는 절규다. 오직 영원한 표준만이 영속적인 사랑을 향한 욕구를 해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무신론자 피카소는 하나님을 부인했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었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교회로 가서 서로에게 사랑을 맹세하며 스스로 책임을 지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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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 기니스의 [소명]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출처를 정확히 명시해 두지 않았습니다만 워낙 성실한 학자이니 믿어볼 만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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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시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열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파스칼은 역사상 가장 탁월한 사상가 중 한 사람이요 서구 문학의 위대한 걸작으로 꼽히는 [팡세](Pensees)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정말로 다재다능했던 인물로 수학의 천재요, 발명가요, 컴퓨터 및 현대 위험 이론의 대부요, 수학뿐 아니라 물리학, 철학, 신학에 정통한 르네상스 사상가요, 프랑스어를 가장 우아하게 구사하는 산문 작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들을 제대로 밝혀 주며 그의 짧지만 강렬하고 고통스럽고 불꽃 같은 인생의 핵심부에 자리잡고 있던 중요한 경험에 대해 아는 사람은 당대에 거의 없었고 우리 시대에도 매우 드물다.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 저녁, 31세였던 파스칼은 마차 사고로 인하여 죽기 직전까지 갔었다.


그 날 밤 그는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경험했고 이것이 그의 인생 행로를 바꾸어 버렸다.


파스칼은 원래 과속 운전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회의론자들은 그의 교통 사고 소식에 비웃음으로 반응했다.


볼테르(Voltaire)는 콩도르세(Condorcet)에게 이렇게 조롱하며 말했다.


"이보게, 뉴일리 다리 사고 이후로 파스칼의 뇌가 손상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반복해서 말해도 싫증이 안 나는군!"


파스칼의 극적인 체험은 밤 10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계속되었다.


그것을 보통 그의 '두 번째 회심'이라 부른다. 그의 첫 번째 공식적인 회심은 24세 때 루앙(Rouen)에서 있었다. 이 두 번째 회심에서 그의 언어 능력이 손상되어 결국 망가지고 말았다. 그는 그 체험에 단 하나의 단어, "불" 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을 뿐이었다. 그 경험은 파스칼에게 너무나 귀하고 결정적이어서 그는 그 단어를 양피지에 적어 윗옷 안쪽 심장 옆에 붙이고 다녔다. 8년 여의 여생 동안 새로 구입하는 윗옷마다 그것을 새겨 넣을 정도였다.


이 사실은 1662년 39세의 나이에 그가 죽은 다음 그의 여동생이 윗옷 가슴부분이 두툼한 것을 보고 발견하게 되었다.


파스칼의 "회상럭"(Memorial) 전반부는 다음과 같다.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가슴 깊숙이 느껴지는 확신, 확신, 기쁨, 평안.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자 너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은 잊혀지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이.

그분은 오직 복음서에서 가르치는 길로만 발견될 뿐.

인간 영혼의 위대함이여.

"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당신을 알지 못했어도 나는 당신을 알았나이다."

기쁨,기쁨,기쁨,기쁨의 눈물


우리는 대부분 파스칼의 수학적 업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그의 짧은 인생에 담긴 고통과 괴로움을 경험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품과 재능의 깊은 잠재력에 불을 붙여 찬란한 불꽃으로 타오르게 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열려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소명이다.


그 소명이 파스칼에게 너무나 깊이 다가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불이 그의 삶과 일을 어루만졌고 그의 전 생애가 소모되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파스칼은 소명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하나님의 소명은 삶에서 가장 깊은 성장과 최고의 영웅적 자질을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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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세이어즈의 [창조자의 정신]에 나온 내용입니다. IVP 모던 클래식으로 읽은 책이고, 그녀의 감성이 신학과 잘 조화를 이뤄 창조적인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책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은?]

 

 

어떤 인간도 자의식을 가진 존재를 창조할 수 없지만 그런 존재를 창조하고픈 내적인 열망은 늘 있다. 그래서 출산에서 , 극작가와 배우 간의 관계에서 , 상상 속의 인물을 창조하면서 그런 열망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듯하다.

 

이와 같은 관계에서 작가는 앞에서 이야기해 온 모순을 경험한다. 즉 창조물의 완전한 독립성을 원하면서도 , 창조물이 본연의 자연 법칙을 준수하면서 작가의 목적에 원활히 협조하기를 원한다.

 

이런 모순적 욕구를 통해서 작가는 창조주와 창조물 간의 완벽한 관계를 어렴풋이 깨닫고 , 자유롭게 창조된 의지와 신에 의해 예정된 운명의 완벽한 조화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창조물에서도 불일치와 모순을 찾아낸다. 창조물에게는 겉으로 표출되려는 집요한 충동과 창조에 저항하면서 무작위의 세계로 되돌아가려는 성향이 동시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베르자예프는 이런 저항을 '어두운 비존재적 자유' 라 칭했다. 쉽게 말하면 무질서를 향한 충동적 욕구다. 따라서 이 저항은 물질의 자연법칙을 따르고 , 이 자연 법칙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하는 무작위성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작가와 그의 작품] (하나님과 그의 창조물)

 

창조물이 실체적 존재가 되기 위해 집요하게 투쟁한다는 것은 어떤 천재적 작가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런 투쟁은 작가의 처지에 상관하지 않고 , 가장 적절하지 못한 순간에도 일어날 수 있다. 출판사 , 은행 잔고 , 심지어 지식인들이 작가에게 더 생산적이고 안정된 길을 택하라고 요구할 수 있지만 , 표현되기를 원하는 작품의 열정적 힘을 부인하는 그들의 요구는 좌절되기 일쑤다. 물론 이런 투쟁은 직접적인 영감에서부터 종잡을 수 없는 변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띤다.

 

하지만 실체로 존재하고픈 창조물의 욕구가 강렬하면 다른 것들은 하찮게 보인다. 작가는 다른 모든 소리에는 귀를 닫고 , 분노와 환희가 교차하는 마음으로 그 일에 파고 든다.

 

이 때문에 예술가는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라는 가정에 삶의 철학을 두어야 한다. 이는 사실이면서도 객관적으로 입증할 방법이 없으며 , 다만 작가가 겪은 경험을 휴추해서 역으로 증거를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우주의 모순을 속시원히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작가의 창조물은 시공간에서 표현되기를 요구하는 동시에 시공간의 세계를 완강히 거부한다. 즉 작가와 세계가 갖는 의지 역시 삶과 관계가 있는 만큼 무질서와도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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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라이트

출판  IVP

발매  2008.06.20

 

 

 

 

 

 

  톰 라이트의 새로운 책이다. '악'의 문제에 대해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논증에 동의를 하든, 그렇지 않든 들어보고 싶어지지 않는가?

 


 

  그의 책은 역시 굉장히 정교한 논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궁금해 했던 의문들에 대해 피하지 않고 꼼꼼하게 설명해 주는 강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악의 문제'는 현대판 C.S Lewis 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clear하고, 깔끔하다.

 


 

  인간이 언어로 서술할 수 있는 영역의 극한까지 논리를 끌고 간 느낌?

 


 

  그가 이야기하는 '악'은 단순히 철학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다.

 


 

  계몽주의 전통에서는 악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함으로써 교만의 죄를 범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제시하는 그에 대한 반론도 신선한 해결책은 되기 어렵다고 이야기 하며 그의 논지를 끌고 나간다.

 


 

  사실, 하나님이 악에 대해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분명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마치 이 영역은 '금기'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 악의 문제는 아무리 변증을 해도 속시원한 답을 듣기가 어렵다.

 


 

  아마 난 이 문제에 대해서 라이트의 책에서 어느 정도의 결론을 맺어둔 것 같다.(그게 속시원한 대답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일단 구약 성경은 하나님이 악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보다는, 악에 대해 무엇을 행하실 수 있고, 행하고 계시며, 또 장차 행하려고 하시는지를 많이 말해 주는데, 많은 무신론자들은 구약을 그렇게 독해하지 않는다. 그저 잔인한 하나님으로 비춰지는 겉모습에 당황하며 분노할 뿐이다.

 


 

  그러나 라이트의 말마따나 에덴동산 이후로 또 노아 시대에 하나님이 슬퍼하셨던 이후로, 바벨과 아브라함 이후로 줄곧 전개된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은 세상을 지저분한 곳에서 끌어내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반복해서 지저분한 방법으로 일하셔야만 했다는 점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하나님은, 세상을 올바른 모습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우리에게 불쾌감을 주는 어떤 방식으로 신에 진흙을 묻히고 손에 피룰 묻히셔야만 했던 것 같다고 라이트는 이야기 한다.

 


 

  그리고 선악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에 어떤 본질적 연속성을 지녀야만 우리는 도덕적인 어둠에 갇히기 않게 되며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과 하시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지나친 확신으로 단언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라이트는 주장한다.

 


 

  이와 같은 변증을 통해 구약의 잔혹해 보이는 하나님을 서술하는 방식은 사실 놀랍다.

 


 

  분명 '악'은 살아 있는 실재가 맞다.

 


 

  그러나 우리는 '악'을 서술하기 이전에 우리의 인식과 지각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점검 받으면서 차분하게 토대를 쌓으며 논리를 전개해 나가야 한다.

 


 

  이 책은 꼼꼼하게 '악'의 문제를 다루면서 성경 속의 다양한 부분을 설명하는데 그 중에 '욥기'에 대한 요약이 기억에 남는다.

 


 

  라이트가 말하는 '욥기'는 이 시대에서 악의 문제를 '해결'해 버리는 것은 악의 문제를 축소하는 것일 뿐이며 명백한 반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세상의 주님이시라고 선언하는 신학적 찬양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성경 안과 성경 밖에서 필요한 부분을 피하지 않고 설명해 가는 라이트의 필력은 상당하다.

 


 

  '악'을 논증할 때 먼저 악의 인격화된 힘인 사탄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으며 악의 기원 자체는 신비로 남아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가 등장할 때마다, 사탄은 엄격한 제약 속에 갇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은 전체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근거들은 성경적으로 깔끔하게 제시되어 있다.

 

  세 번째로는 사람들이 행하는 악은 피조물의 노예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네 번째 주장이 상당히 정교한데 구약 성경은 절대로 철학자들이 원하는 그런 종류의 모든 것이 깔끔하게 설명되는 정적인 세계 질서의 그림을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고 그는 주장한다.(이 부분은 라이트의 놀라운 파워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네 번째 주장을 좀 더 설명하자면, 많은 회의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전능한 관리 책임자로서 기계가 잘 돌아가게 관리해야 하는 것처럼 단순한 도식을 그리고 있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그림은 어떤 부분에서도 그렇게 단순한 모습으로 쪼그라들지 않는다고 라이트는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보다 더 낯설고 신비한 것이며, 불의한 세계 안에서 정의를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과업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다.

 


 

  이 주장은 하나님의 입장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려고 노력하는 어떤 이들이 좋아하는 '자유의지 옹호론'(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으므로 모든 것은 우리의 잘못이다)과는 조금 다른 관점이다. 이것은 피조세계가 여전히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확고한 긍정에서 나온 하나님 쪽에서의 '행동에 대한 헌신'에 좀 더 가까운 관점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현재의 피조세계를 폐기하고 다른 일을 하시기 보다는 기존의 것을 바로잡으려 하셨고, 사람들이 늘 악하기 짝이 없고, 실수 투성이였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 그들을 통하여 일하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라이트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책임과 주체됨을 무너뜨리지 않으시면서, 악을 심판하고 징벌하시며, 악에 한계를 설정하시며, 새로운 은혜의 순간들과 새 창조를 이루는 사건들- 비록 그것들이 어쩔 수 없이 양면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을 약속하고 그것을 가져오십니다.'

 


 

  하나님을 보호하기 위해 자유의지 옹호론을 주로 사용해 악의 문제를 서술하던 나로서는 라이트의 설명에 설득당하지 않기가 쉽지 않았다.

 


 

  훨씬 더 정교하며 성경의 흐름에 부합해 보인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장일까?

 


 

  라이트는 정말 균형이 잘 잡힌 사람이다.

 


 

  가령 하나님이 결국 새로운 세상을 만드실 것이며, 그 곳에서는 더 이상 고통과 눈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하면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합니다.

 


 

"그런 해결책이 제공하는 정의는 이전에 지나간 모든 악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합니다. 또한, 우리는 단순히 진보를 통해서도 악의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결책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세대만 행복해지면 모든 이전 세대의 비참함이 간과될 수 있다거나, 심지어는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한 해답은 직접 책을 보면서 들어 보길 추천한다. (꼭 라이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분명 통찰력에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막간의 지면을 할애해서 라이트는 C.S Lewis 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서술된 '악마'에 대한 논의를 언급하며, 자신의 추가적인 의견을 덧붙이는 멋진 시도를 한다. (사탄의 인격성이 좀 저급하다는 그의 주장에서 근거가 좀 의아하긴 하지만,루이스의 지식에 살을 덧붙이는 그의 포스는 상당하다)

 


 

  그는 '악'에 대해 철학적 서술은 깔끔하지 않더라도, 악을 쉽게 치부해 버리거나 이상한 방식으로 해석하길 거부하며 실천적인 방향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그 전에 그가 '악'에 대한 서술이 쉽지 않은 점을 설명하는 부분을 주목해 보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도입한 설명은 개인적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신비의 영역에 속한 일임이 틀림없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우리의 사고에 반영해야만 합니다. 비록 잠시 물리학 이야기로 돌아가서 하이젠베르크적인 의미에서만이라도 말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실성의 원리를 밝혀냈습니다. 무엇인가를 관찰할 때, 제가 관찰한다는 사실이 제가 보고 있는 대상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저는 결코 그 대상을 완전히 정확하게 파악했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도덕적, 영적 방정식에는 불확실성의 요인, 즉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개입되어 우리가 얼마나 잘 조직화 하든지, 우리가 얼마나 많이 기도하든지, 우리의 신학이 얼마나 건전하든지, 우리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작업하든지 간에, 그 곳에는 우리를 거슬러서 작용하는 부정적인 힘들[아마도 '우주적인 부정적 힘'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또한 C.S lewis 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은 '악'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점을 묵상했던 일화도 들려 준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악을 정복하심으로써 악으로 하여금 다시는 하나님을 괴롭히지 못하게 만들었기에 그는 분명 '악'에 대한 책임자는 아니며 결국 악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새로운 세계, 즉 구속받고 새로움을 입은 사람들이 다스리며 하나님의 지혜와 치유의 질서를 실현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발견된다고 라이트는 주장한다.

 


 

  요약하면 악은 철학적인 설명으로 깔끔하게 서술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실재이며 그 궁극적인 답은 새로운 세계에서 반드시 밝혀질 것인데 현재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 아기가 이해할 수 있는 생각의 범주가 부족하여 바깥세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그 문제를 완전히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때에 악은 우리를 향해 아무런 할 말이 없게 되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승리가 완전히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악의 문제에 대한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답을 들으려 하기 보다는 우리는 그저 창조 세계가 아닌 창조주를 바라보며,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악'을 막아낼 수 있는 실천적인 '용서'와 '포용'에 힘써야 할 것이다.

 


 

  '악'을 부정하지 않으며 그 '악'에 대항하여 '용서'와 '포용'의 실천을 힘쓰라는 그의 메시지는 굉장한 힘이 있다.

 


 

  이 영역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1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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