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여년 전에 쓴 글이다 보니, 지금에 와서 읽어보면 부끄러운 부분이 많은 글입니다. 세상에서 겪게 되는 고통, 악의 현존을 경험하고 나면 장황하고 합리적인 설명들의 설득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는 고통, 악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C.S Lewis 의 [고통의 문제]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던 13년 전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팀 켈러의 [고통에 답하다]라는 책을 보면서 새로운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관련된 문제로 씨름 하시는 이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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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우리는 수 많은 고통과 ‘악’ 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다. 고통과 ‘악’ 은 믿음 앞에 닥쳐올 수 있는 가장 험한 시련이고, 고난이 제기하는 질문은 믿음이 접할 가장 예리하고 집요하고 유해한 질문이다. 판단 보류에 대한 최고의 도전은 다른 어디가 아닌 여기에 있다.[1] 그러한 환경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것으로부터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와 같이, 함께 공존 하고 싶지 않지만 함께 공존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존재는 우리의 ‘실존’ 이 당면하게 되는 필연적인 ‘특성’ 들과도 밀접한 연관이 되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서로 ‘공생’(symbiosis) 하는 접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이와 같은 문제를 고찰해 볼 당위성은 충분히 부여된 셈이다. 또한 원하는 바도 아니고 정당해 보이지도 않으며 뾰족한 설명이나 해결책도 없는 고통과 고난의 편재는,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 엄청난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유신론적 입장에서 실존을 고민함에 있어서도 뜨거운 감자와 같은 개념이 아닐 수 없는데, 이와 같이 무차별의 쓰라린 고뇌, 범세계적 혼란, 공포의 역사 앞에서 어떻게 감히 신뢰의 길을 제시할 것인가?[2] 심지어 하나님을 그토록 사랑하며, 수 많은 회의론자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했던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도 사랑하는 아내 조이를 잃고 나서 경험하게 된 고통스러운 슬픔 앞에서 이와 같은 고백을 하지 않았던가.
“내게 종교적 진리에 대해 말해 주면 기쁘게 경청하겠다. 종교적 의미에 대해 말해 주면 순종하여 듣겠다. 그러나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 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3]
이와 같이, 고통이라는 거대한 장애물 앞에선, 우리의 실존이 느끼는 심리적 불안과 절망의 크기가 우리의 믿음을 압도하는 경우도 빈번한 게 사실이다. 물론, 이와 같은 의심스러운 고백을 하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신앙’ 을 의심하고, ‘믿음’ 이 없다라는 말로 일축하는 설교자들도 종종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필자는 이와 같은 입장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또한, 모든 ‘고통’ 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귀하게 사용될 것 임도 이러한 논의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답변이다.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며, 그 말이 지니는 체험적 의미도 일견 알고 있다. 하지만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실존적 아픔’을 전혀 공감하려고 하지 않고 너무도 쉽게 사용되는 ‘앵무새 식 답변’ 으로써 이와 같은 견해가 사용된다면, 이와 같은 태도에는 적극 반대한다. 이번 연구에서는 이와 같은 ‘독단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자 한다. 그들에겐, 이와 같은 물음이 적절한 답변이라 생각한다.
물론 나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 큰 선을 이루고자 하시는 그 분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이므로 그 분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설교자들의 말을 나는 자주 들어 왔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 진다. 그렇게 말하는 설교자들은 그런 끔찍한 상실감을 느껴 보기나 했을 까 의심스럽다.[4]
또한 이와 같은, 논의가 중요한 이유는 선교적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기 대문이다. 사망의 골짜기에 가본 적도 없는 이름뿐인 신자들이 포스터와 상투어와 훈계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외쳐대는 그 ‘말’ 에는 힘이 없다. 고통과 악에 용감하게 직면해 본 사람, 고통의 잔을 찌끼까지 마셔 본 사람, 인간 조건의 실존적 고독과 소외를 느껴 본 사람만이 감히 우리의 말 못할 고통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속삭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증거만이 신빙성 있고 그 사랑만이 믿을 수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5] 이 연구가 추구하는 방향성과, 태도를 수긍한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악과 고통’ 의 문제를 고찰해 보도록 하자. 이 때 다양한 지성인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하는데 이는 굉장히 의미 있는 과정이 될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어떤 사상을 평가할 때는 어설픈 모방자가 아니라 그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룬 탁월한 대가의 가르침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결국 이와 같은 수고를 하는 이유는 우리 나름의 ‘최선의 입장’을 잘 정립해 보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최선의 방법을 활용하여 ‘사람’을 치유해 나가는 데도 귀중한 통찰력을 얻고자 함이다.
2.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
아무리 타당한 이유와 좋은 논리를 지니고 있어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태도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실제 삶 속에서 그 지식이 전개되는 양상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와 자세를 짚고 넘어가는 것은 필수적인 사안일 것이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필수적인 삶의 자세는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히브리 철학 속에서 모든 지식(앎)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출발했으며, 십계명과 산상수훈, 성경 전체 속의 모든 개념들이 결국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원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었음을 기억해 본다.[6] 리처드 니버도 [그리스도와 문화] 에서 이야기 하고 있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중요한 명제는, 하나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는 것에 우선될 수 없는(우선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안임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지 않은가.[7]
둘째, 우리가 유한한 이성과 의지의 자유를 행사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며 아직 끝나지 않은 교회의 역사 속 그 어딘가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일 것이다.[8] 이와 같은 태도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너 거기 있구나’(There you are) 라는 마음을 지니며, 상대방을 마치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듯한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인격체이신 하나님이 ‘너는 어디 있느냐?’ 라고 말씀하시며 아담을 찾아 나섰던 것처럼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듣고, 그들이 서 있는 이야기의 지점을 찾은 뒤, 그들의 가능성과 그들의 의도를 충분히 숙고해 보는 겸손한 자세를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마치 사부(guru) 가 된 것처럼, 그리고 상대방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진 것처럼 행세하지 않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또 공감을 하려고 애쓰고 있다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그 어떤 지점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9]
이와 같은 태도 속에서만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라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그들과 우리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삶을 살아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선행되고 난다면 서로 이질적인 입장들 속에서도 소통 가능한 풍성한 내러티브(narrative)가 만들어 질 수 있는 여지가 생길 것이라 기대해 본다. 마지막으로 프란시스 쉐퍼가 지니고 살았던 중요한 삶의 태도를 들어보고 , 우리도 그러한 자세를 견지하고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해 보도록 하자.
사랑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을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10]
3.‘악’과 ‘고통’ 에 대한 기원과 개념 정의
일반적으로 악은 도덕적 악과 자연적 악으로 구분된다.[11] 도덕적 악은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고, 자연적 악은 인간과 무관하게 발생한다. 전자에는 전쟁, 살인, 증오, 불의, 사기, 수군거림, 분쟁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고, 후자에는 지진, 태풍, 화재, 질병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 악도 ‘사람이 하는 행위’ 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결국 ‘악’ 이라는 개념은 이 둘을 아우르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악’ 의 개념과 ‘고통’ 의 개념의 상관 관계를 짚어 보면, 악이 고통의 실체라면 고통은 악에 의해 야기되는 주관적 인식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12]
그러나, 이러한 개념적인 구분이 실상 모호하게 이해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가령 오스 기니스 같은 경우는 이야기 하기를 “과거에는 악을 고통의 원인으로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일반적으로 고통을 악의 원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라고 이 개념들을 서술하고 있으며[13], C.S LEWIS 가 자신의 저서인 [고통의 문제] 에서, 고통을 Pain 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도, 이는 ‘통증’ 과도 섞이는 면이 있으니, 고통을 육체적인 개념으로 보는 것과, 정신적인 개념으로 보는 것이 하나로 묶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자세가 영, 혼, 육으로 이뤄진 인간을 whole person 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바른 방향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오스 기니스 같은 경우는, ‘악’ 을 정의 내리는 문제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악을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규명하려 드는 순간, 악은 그 실체를 감쪽같이 감추었다가 다시 다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악의 형태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악은 자신의 형태를 끊임 없이 바꿀 수 있고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재주가 탁월하기 때문에 , 잠시도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14]
결국 이러한 용어들을 확고부동한 기준을 가지고 서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래서 적정 선에서 조율을 해 본 결과 ‘악’ 은 도덕적 악과 자연적 악과 그것들이 유발시키는 ‘고통’ 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으며, 여기서는 ‘악과 고통’ 이라는 용어를 동등선 상에 놓고 , Interchangable 하게 사용하고자 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이성 논증을 하는 이유는, 이와 같은 논리와 합리성이 진리와 유리되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칼 야스퍼스의 말을 빌리자면, 비이성적인 것, 반이성적인 것, 초이성적인 것으로 추락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에 관한 앎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성에 대한 가장 철저한 반항에서조차도 최소한의 합리성은 남기 마련이기 때문이다.[15] 그러므로, 모든 게 설명될 수 없다고 해서 모든 논의를 포기하진 말자.
물론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접근을 주된 방법론으로 사용한다 해도, 악과 고통의 문제는 증거와 논리의 영역에 전면적으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16] 궁극적으로는 악과 고통의 문제는 다분히 실존적이며, 유동성을 전제하며[17] , 실천적인 함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실제 삶 속의 ‘악과 고통’을 다뤄주지 못하는 ‘추상적 담론’ 은 반 쪽짜리 진리에 불과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4.현대 사회 속의 다양한 고통과 악의 유형
필립 보빗은 [아킬레스의 방패] 라는 전쟁사 연구 문헌을 통해 , 1914~1990년 사이에 대략 187,500,000명이 인간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이 숫자는 1900년 전 세계 인구의 약 10퍼센트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또한 국제 인종 학살 연구협회(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Genocide Scholars) 의 한 기자는 20세기에 일어난 인종 학살로 인한 사망 자수가 지금까지 전쟁으로 죽은 사망자 수를 상회한다” 고 이야기 했다.
이와 같이 명증하도록 끔찍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우리가 굳이 고통과 악에 대한 실례를 논해 보자면,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연구에서는 한 번의 대표적인 사건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렇게만 주의를 환기시켜도, 충분히 이 연구의 중요성을 숙고할 만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먼저, 르완다의 인종학살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호텔 르완다> 라는 영화에서도 어느 정도 다뤄 주고 있다. 역사상 가장 신속한 대량 학살 사건 가운데 하나였던 이 사건은 불과 석 달도 못 되어 후투족이 80만 명이 넘는 후치족을 잔인하게 살육했던 참혹한 기록을 남겼다.
이는 홀로코스트 이후 자행된 가장 대표적인 인종 학살 사건으로, 히틀러가 유대인과 집시족을 처단한 속도보다 세 배나 빠르게 진행되었다.[18] 그러나 이 사건 자체보다 더욱 끔찍한 건, 1994년, 무방비 상태의 투치족이 도움을 부르짖었을 때 세계 모든 사람들은 그 참담한 상황을 외면 했었다는 것이다.
그들을 도와준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이와 같이, 고통과 악에 대한 실제 사례를 언급하면서 우리는 비단 ‘현상적인 역사’ 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고통과 악’ 의 근본 뿌리를 서서히 파헤쳐 나가는 점층적인 분석 방식을 사용할 것이다. 지난 역사를 자세히 고찰해 본다면 우리는 그 실마리를 어렴풋이나마 유추 가능할 것이다.
5.무신론적 논증.
수 많은 무신론자들은 ‘악과 고통’ 의 문제에 열광했다.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하나님을 위한 유일한 변명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 했다.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하나님이 있다면 그는 악마일 것이다.” 라고 말했다. 작곡가 리차드 바그너는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누가 그에게 나를 창조하라고 요구했는가? 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그 점을 내 자신이 과연 기쁘게 생각하느냐, 그것이 문제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철학자 아더 쇼펜하우어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나는 절대로 그런 신이 되고 싶지 않다. 세상의 불행과 고뇌는 나의 마음을 찢어 놓곤 한다.” 고 말했다. 심지어 프로이트도 이러한 ‘고통의 문제’ 를 창조주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된 논증으로 사용했었는데, ‘종교 경험’ 이라는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하나님은 참사가 일어나는 것을 허용한다.’ 고 단언하면서, 그 책임은 하나님이 져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19]
이 뿐만이 아니다. 세계적인 철학자이자, 사회 운동가로 추앙 받던 버드런트 러셀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와 같이 이야기 하며 신에 대한 분노를 쏟아 낸다.
“만일 여러분에게 전지전능과 수백만 년의 세월을 주면서 세상을 완성해 보라고 했다면 고작 공포의 KKK 단이나 파시스트 같은 것 밖에 만들 수 없었을까? 게다가, 과학의 일반 법칙을 인정한다면 인간과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적당한 과정을 거쳐 결국에는 다 멸종될 것이란 점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20]
이와 같이 시대를 막론하고 수 많은 무신론자들은 제각기 ‘고통과 악의 문제’ 를 통해, ‘신의 존재’ 를 거부하거나, ‘신의 불의’ 를 주장해 오곤 했다. 이와 같이 광대한 영향을 미쳐 온 ‘문제’ 를 다룸에 있어서, 필자는 대표적인 한 인물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들어보고자 하는데, 일단 수 많은 무신론자 들 중에서, 최근에 ‘고통과 악’ 에 대해 가장 큰 목소리를 냈던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을 주요하게 들어보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만들어진 신] 에서 이야기 하기를, 종교가 평화를 가져다 주기는커녕, 이 세상의 폭력과, 악을 조장시키는 주범이라고 말한다.[21]
그는 이 모든 악의 근원을 ‘거짓 투성이인 종교’로 보고 있으며, 그러한 종교가 없이도 인간은 선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펼친다.[22] 이러한 도킨스의 낙관론은 ‘죄’ 를’범죄’ 로, ‘범죄’ 를 다시 ‘질환’ 이나, ‘역기능’ 으로 바꾸면서, 우리의 근본적인 죄, 그로 인해 태동하는 ‘악’ 과 ‘고통’ 을 외면하려고 하는 현대의 사조와 일맥상통한다. [23] 도킨스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좀 더 들여다 보자.
상상해 보라. 종교 없는 세상을. 자살 폭파범도 없고, 911도 없고 , 런던폭탄테러도 없고 , 십자군도 없고 , 마녀 사냥도 없고 , 화약 음모 사건(1605년 영국 가톨릭교도가 계획한 제임스 1세 암살미수 사건) 도 없고 , 인도 분할도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도 , 세르비아.크로아티아.무슬림 대학살…등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24]
종교를 악의 근원으로 보는 시각은, 도킨스의 전유물은 아니다. 세계적인 과학자인 스티븐 와인버그도 이와 같은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종교가 있든 없든 선한 일을 하는 사람과 악할 일을 하는 나쁜 사람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악한 일을 하려면 종교가 필요하다.[25]
다시 도킨스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가 지금 무신론 운동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19세기 데이비드 흄을 능가하는 더욱 강력한 유일신 종교 비판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는 한 마디로 무신론 운동의 상징(icon) 이다. 실제로 세계 무신론 연맹(Atheist Alliance International, AAI) 은 종교에 대해 비판적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으로 리처드 도킨스 상까지 제정할 정도이다.
이 정도면 도킨스 신드롬이 일어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단, 그의 주장들을 간략하게 요약해 본다면 책 제목처럼, 신이라는 존재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Delusion(망상) 에 불과하며, 종교의 기능 자체도 사회 속에서 좋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인간은 선하고 참되기 때문에 굳이 거짓된 종교의 도움이 없이도, 선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이제 이와 같은 견해를 하나 하나 비판적으로 검토해 볼 것인데, 일단 이성적인 설명체계로 모든 진리를 다 설명해 낼 수 없음을 논증하기 위해, 과학적 사고의 한계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와 같은 논의는 ‘실존주의적 접근’ 이나, ‘심리학적 접근’ 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그리고, 종교가 늘 행해 왔던 일이 사회 속에 고통과 악을 유발시켰다는 부분에 대해서 철학적, 역사적 측면에서 반박을 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죄’ 에 대한 도킨스의 낙관적인 태도에 대해 신학적인 접근을 통해, 그 근본 토대를 흔들고자 한다.
6.심리학적,실존주의적 접근
일단, 도킨스는 자연주의자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주의란, 자연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상태도 자연과학처럼 모두 자연현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말한다.[26] 이와 같은 전제 속에는 모든 것이 이성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인간은 자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 적 전제가 함축되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성적 사고를 하는 ‘자아’,’주체’ 에 대한 회의를 전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설명은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실존’ 은 언제나 Verb-like 하며[27], 단일한 개념으로 소급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이와 같은 논의는 세상을 완전하게 설명해 낼 수 없다.
이러한 ‘자아’만큼은, 그리고 그 ‘자아’ 가 사용하는 ‘언어’만큼은 확실하다고 믿었겠지만, 이러한 부분들이 근대 사회에 들어와서 무수히 많은 공격을 받았음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내 안에 숨겨진 나도 모르는 나, 나조차 신뢰할 수 없는 ‘무언가’ 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용하는 ‘언어’ 라는 것도, 그 자체로 ‘실재’를 나타내기 보다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던 것처럼 , 특정 언어 게임 속에서만, ‘실재’ 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전락해 버린 시대가 바로 작금의 시대이다[28]. 또한, 하이데거와 자크 엘룰 등의 논의를 통해, 현대의 과학기술이 세상의 본질을 더욱 찾을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는 비판도 충분히 검토해 볼 만한 주장이다.[29] 이와 같은 다양한 논의가 핵심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실존을 설명하는 건 생각처럼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물론, 실존주의적 접근과 ‘무신론’을 밀접하게 연관시켜 설명하는 학자도 있었다.
대표적인 학자는 장 폴 사르트르일 것인데, 그는 자신의 저서인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에서 논증하기를, 신이 실존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논하는 게 실존주의는 아니지만, 실존주의는 신이 우리를 결코 도울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우리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하며, 이 모든 역경을 헤쳐 나가기를 종용하는 낙관론이자, 행동의 독트린이라고 말한다.[30] 그리고 덧붙이기를,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유신론적 실존주의보다 더욱 일관성이 있는데, 왜냐하면 신과 창조론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즉, 선재하는 모든 인간 본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실존주의의 기본 명제(인간에게 있어서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를 보다 더 논리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31]
이와 같은 실존주의적 논증이 ‘무신론’ 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지만, 아마 도킨스는 이와 같은 논증을 달갑게 여기진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실존’ 도 또한 설명 되어져야 하는 모종의 개념처럼 표현되고 있는데(언어를 이용하여), 이를 어떠한 언어적 정의나, 설명 체계로부터 예외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일관성이 결여되고, 비합리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 또한 알베르 까뮈는 [시지프 신화] 에서 말하기를, 고통과 악이 존재하긴 하지만 인간은 신화 속에 나오는 시시포스 처럼 의연하게 돌을 굴려 올리고, 능히 그 고통들을 극복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도 역시 ‘신’ 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으려 하는데, 결국 사르트르와 까뮈는 ‘의미’ 없는 세상 속에서 힘을 내 보자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의미’ 가 없는 삶에서 그 어떤 활력과 에너지가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결국, 논의를 정리해 보자면 합리적인 이성 논증을 통해 ‘무신론’ 을 주창한다면, 이에 대해 실존주의 자체에 내재된 특성을 반영하여 다른 설명의 여지를 남길 수 있으며, 그 새로운 설명 체계 자체도, 그 자체만으로는 허점을 많이 보이기 때문에 이성 논증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순환적인 역설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논의를 가능케 하는 그 어떤 ‘지혜의 근원’ 을 상정해 본다든지, 이러한 인식을 하고 있는 ‘주체’ 의 ‘제 1 원인’ 을 추적해 본다든지, ‘옮고 그름의 문제’ 를 고민하는 우리의 내재된 ‘자연법’ 을 떠올려 본다면, 우리는 충분히 더 나은 대안을 고민해 볼 수 있게 된다.
7.철학적 ,역사적 접근
일단, 도킨스가 범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오류 몇 가지를 언급해 주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도킨스는 일찍이 종교가 자신들의 권위를 남용하여 특정 신념이나 가치관을 일방적으로 주입시켜 왔으며, 그로 인해 많은 아픔과 갈등이 초래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도킨스는 과연 자신이 내세운 ‘비판적 논지’ 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도 결국은 자신의 신념이나 권위, 삶의 가치관(‘종교’를 거부하라든지, ‘신’ 은 없다라든지)을 자신의 딸에게 전달해 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게 그의 저서인 [악마의 사도] 에 잘 나타나 있다.[32] ‘절대 진리는 없다.’ 라고 말하는 것조차도, 하나의 명제적 주장이 되기 때문에 자체 모순을 지니고 있을진대, 하물며 도킨스는 ‘유전자를 둘러 싼 자연선택과 돌연변이가 곧 나의 신이요’ 라고 외치고 다니고 있으니, 이건 그 이전의 유물론자들 보다도 한 차원 더 종교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의 입으로는 ‘신은 허상이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으면서, 정작 자신은 ‘신적 대상’을 숭앙하고 있다는 것은 굉장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모든 표상을 제거하고, 모든 기준을 무너뜨리며, 모든 의미를 이질화 시켜 버리는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도 이와 같이 ‘신’ 이라는 개념은 이성적으로도 유효하다. 왜냐하면 폴 틸리히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관심은 우리의 궁극적 관심. 곧 우리의 신이 되려고” 하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무신론자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33] 이 말을 도킨스에게 적용해 본다면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 을 쓴다 해도, 그의 안에 유전자의 복제와 자연선택설 이라는 궁극적 관심이 존재하여 자신만의 ‘신’ 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34]
그리고 도킨스가 줄곧 범하고 하는 오류 중 하나가 바로 ‘허수아비 논증’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도킨스의 주장은 비판을 제기해 볼 수 있다. 물론, 중세 시대 때, 그리고 현대 사회 속에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악행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악과 고통의 문제를 종교의 탓으로 돌려 버리는 건 세상을 너무 단편화 시킨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가령, 터키 청년당원들, 스탈린, 마오쩌둥, 폴 포트 등의 대략 학살, 인종 학살 사건을 분석해 보면, 종교적인 박해보다 세속주의 정권과 세속적인 지성인들과 세속적인 신념에 의해 더 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35]
그리고 지성사 속의 대표적인 무신론자들은 도킨스와는 상당히 다른 의견을 지니고 있었는데, 가령 토마스 홉스는 [인간론] 에서 인간은 가장 교활하고 가장 강하고 가장 위험한 동물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장 자크 루소는 [에밀] 에서 악의 원인을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악의 원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데이비드 흄 마저도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에서 인간의 가장 큰 원수는 바로 인간 자신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정직하게 따져 봤을 때, 종교의 학살과 박해의 역사를 열거해 보자면, 알비파 교도 대학살(약 60,000명 희생),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살(약 30,000명 희생) , 시칠리아 만종 반란 사건(8,000명 희생) , 스페인 종교 재판소(10,000명 희생) , 유대인의 스페인 추방(160,000명의 난민 발생)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36]
그렇다면 2차 세계 대전의 주범인 히틀러와 나치는 종교 때문에 유발된 사건이었을까? 이 사건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경우에는 그렇다라고 답하는 우를 범할 수 있는데, 실상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지도자들은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단호히 배격했다.
히틀러는 “나는 기독교의 거짓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시대는 기독교라는 질병의 종말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백 년이나 이백 년 뒤에는 기독교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먼 곳에서 약속의 땅을 내다보았던 선지자들처럼 그 결과를 목격하지는 못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치에 대항하던 ‘종교인’ 들의 사례는 얼마든지 인용할 수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민간인 폭격을 강력하게 규탄했던 조지 벨 주교,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에 트루먼 대통령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한 옥스퍼드 대학교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제기했던 철학자 엘리자베스 엔스컴, 르 샹봉에서 나치에 대항했던 앙드레와 마그다 트로크메, 수천 명의 유대인을 구한 덴마크의 주교, 이 외에도 디트리히 본회퍼 , 헬무트 제임스 폰 몰트케도 나치 정권에 대항했다. 이들의 모습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쯤에서 우리는 다른 접근 방법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과연 누구를 궁극적인 책임자로 삼아야 하는 걸까? 궁극적으로 우주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 말이 없기에, 모든 인간의 눈길은 하늘을 향하기 마련이며, 모두의 손가락은 우주의 창조자요 지배자로 믿는 하나님께로 향하기 마련이다. 이 막막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어떤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8.신학적 접근
기독교 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함에 있어서 편의를 위해 크게 3가지 영역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개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악과 고통의 기원과 이러한 악과 고통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논해 보고자 한다.
일단, 하나님이 전지전능 하시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고통이 초래될 수 있느냐고 반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수 많은 이들이 역사 속에서 항의해 왔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 하나님은 물론 우리에게 초래되는 모든 고통과 악을 강권적으로 막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다.
그 분의 능력과 힘을 우리 입장에서 측량할 수 있다는 것 조차, ‘신’ 이라는 내재적 정의에 부합되지 않는 모순된 주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짜여진 프로그램 대로 움직이는 로봇처럼 만드신 것도 아니고, 명령대로 복종만 하는 군대로 만드신 것도 아니다.[37] 만약 그 분이 우리를 그런 존재로 대하신다면, 우리는 ‘자유의지’를 지닐 수 없게 된다. 만약 그 존재가 일방적으로 모든 악을 멈춰 버린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38]
우리의 givens of existence(실존적 소여)를 잃어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우리가 아니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신학적인 표현으로 이와 같이 신이 자신의 능력을 특정한 이유를 가지고 제약하는 행위를 Divine Self Limitation(신의 자기 제한)이라고 부른다.
당신 스스로가 강권적으로 모든 일에 개입하여,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음에도, 굳이 이 연약하고, 아무 것도 자율적으로 할 수 없는 존재들을 통해 자신의 형상(이미지)을 세상 속에 드러내고픈 열망을 지니고 계신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악과 고통의 문제를 결코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기 어려워 지게 된다. 오늘날 66억의 세계 인구 가운데 고작 수천 명에게만 해당되는 기도 때문에 날씨나 질병, 경제적인 위기와 같은 상황에 기적적으로 개입하셔서 그 분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게 과연 타당한 건지, 그리고 정말 그와 같은 ‘비일관적인’ 삶을 원하는 지 난 반문하고 싶다. 내가 원하는 특정 사건에, 내가 원하는 특정 시간에, 예외적으로 간섭해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고 고백한다는 건 어찌 보면 모순된 말처럼 들린다.
‘나의 입장’, ’나의 주장’, ‘나의 조건’ 을 철저히 버리지 않으면서 , 내가 인식하고 , 내가 바라보고 , 내가 겪는 모든 상황이 마치 중립적이고, 깨끗하고, 완벽한 선에서 출발한 것인 마냥 하나님 앞에 너무도 당당히 그와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경외함은 행동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와 태초에 약속해 주신 최고의 선물인 ‘자유의지’ 라는 크나큰 선물을 한번 더 인식해 본다면, 자신의 ‘기도’ 가 얼마나, ‘자체적인 모순을 지니는 요구’ 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난 신실하지 않은 하나님을 원해요. 규칙과 약속 법칙을 때때로 깨 주세요. 제가 원하는 순간에만요.!’ 라고 외치고 있는 자의 삶의 중심에는 과연 누가 서 있는가? C.S 루이스가 했던 말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아주 일반적이지만 분명한 한 가지 개념은 그런 기적들은 참으로 드물게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39]
그 분은 이 모든 상황들이 일어날 일을 이미 알고 계셨다. 루이스가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를 너무도 잘 아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 분은 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40] 이와 같은 논리를 따른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도 마음 한 켠에 한 자락 남아 있는 아쉬움은, ‘사랑의 하나님’ 이 실존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랑할 수 없음’ 이 도처에 편만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존재의 마음과 성품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 논리상 일관성이 있기 때문에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무덤덤하게 이 상황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나는 이 해답을 ‘예수 그리스도’ 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유추할 수 있고, 검증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 시공간을 공유하셨던 그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참고해 볼 때, 우리는 그 분이 끔찍한 재앙과 고통 앞에서 무덤덤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41]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볼 때,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는데 첫 번째 길은 무고한 어린 아이의 살해를 계획하시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입장이고, 두 번째 길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시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더 나은 입장은 두 번째인데 왜냐하면, 그 말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이 길이 하나님의 성품을 완벽하게 드러내신 예수의 이야기에 더욱 부합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하나님. 그 분을 형용한다는 것은 우리 능력 바깥의 문제일 것이다. C.S 루이스가 묘사한 하나님의 사랑은, 다양한 비유를 통합적으로 사용하여서, 진리의 그림자를 조금이라도 더 선명하게 보려는 가상한 노력이었다.
여러분은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여기 계십니다. 여러분이 대수롭지 않게 불러낸 위대한 영, 그 “무시무시한 용모의 군주” 가 여기 계십니다. 꾸벅꾸벅 졸면서 여러분이 그 나름대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연로한 할아버지의 인자함이나 양심적인 치안판사의 냉담한 박애주의, 손님 대접에 책임감을 느끼는 집주인의 배려로서가 아니라, 소멸하는 불로서, 세상을 창조해 낸 사랑으로서, 작품을 향한 화가의 사랑처럼 집요하고 개를 향한 인간의 사랑처럼 전제적이며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처럼 신중하고 숭고하며 남녀의 사랑처럼 질투할 뿐 아니라 꺾일 줄 모르는 철두철미한 사랑으로서 여기 계십니다.[42]
이러한 탁월한 비유를 기본 골격으로 삼아, 우리는 역시 이 모든 논의를 ‘예수’로 귀결시키는 게 마땅할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 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변호하는 논증이 예수가 아닌 다른 데서 끝난다면, 그것은 중심이 없거나 틀린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43].
우리가 분명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울부짖던 예수보다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간 존재는 아무도 없었고, 자신 스스로는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끔직한 ‘고난’을 당함으로써 그 모든 아픔을 짊어졌던 사람은 역사 가운데 예수 뿐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고통’ 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그는 죄가 이 땅에 들어옴으로써, 그 삯인 ‘사망’ 의 노예가 되어 버린 자신의 백성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존재다. 이와 같은 표현은 실로 깊은 의미를 지닌다. 또한 예수는 적극적으로 고통을 감당해 냈다. 신이 고통 당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철학적으로는 맞는 말일지 몰라도, 성경적으로는 틀린 말이다.[44]
그가 당한 극심한 고통을 열거하자면 오랜 시간이 걸릴 만큼, 그는 질고의 늪을 깊숙하게 들어갔다 나온 존재다. 이토록 극심한 고통과 아픔을 몸소 짊어진 예수의 성품과 인격을 면전에 두고 ‘신은 가학적 피학적 폭군이다’ 라는 지극히 모순되는 명칭을 부여하는 세인들의 주장은 논리적이지도 못하고, 경험적으로도 부당한 처사이다. 오스 기니스가 고백했던 것처럼, 예수는 이 모든 고통의 문제에 관한 변증의 정점에 서 있다.
아버지에 대한 회의는 아들 안에서 잠잠해진다. 성육신의 진리는 좋은 신학 정도가 아니라 실제적 위안이요 확신이다.[45]
그렇다면, 이 모든 ‘악과 고통’ 의 근원에 대한 해답을 내려보자. 그 해답은 우리 인간의 ‘죄’ 와 깊은 연관이 되어 있다. 그 죄가 개개인이 짓는 ‘죄’ 일수도 있고, 자신이 주체는 아니지만 대물림 되는 모종의 ‘죄’ 일 수도 있다.
일단, 성경이 이야기 하는 창조 세계는 어떠했을까? 기독교에서 이야기 하는 ‘창조’는, 인본주의적이기 보다는 신본주의적이다. 자연은 범신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적인 힘을 지니는 것이 아닌 단지 피조물에 불과하며, 이신론처럼 세계는 내적 매커니즘에 의해 저절로 작동하는 곳이 아니다.[46] 이 피조 세계는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요구한다.
그 첫 피조 세계 속에 악과 고통의 자리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세계는 폭력이 아닌 상호 조화와 화평이 세계의 근간이었다.[47] 물질 세계가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보는 관점은 고대 ‘영지주의자’ 들의 견해에 불과했다. 그런 왜곡된 세계관을 가졌기에 그들은 의롭고 선한 예수를 살해한 가룟 유다를 천연덕스럽게 미
화하고, 배반의 신비를 운운하며 [유다복음] 을 기록하게 되었고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조상인 아담은 ‘죄’ 와 손을 잡고 말았다. 이를 개혁주의 신학의 거장인 칼빈은 이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악하다고 선언하는 것을 빌미로,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들의 허물과 연관짓는 자들이 있으니, 이들을 물리치도록 하자. 그들은 사악하게도 자기들의 죄악된 상태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찾으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아담의 손상되지 않고 부패하지 않은 본성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파멸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의 죄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원시 상태로부터 타락하였기 때문에 멸망하게 된 것이다.[48]
이러한 ‘원죄’ 를 기점으로 , 인간은 수 많은 악과 고통을 이 세상에 자발적으로 초청하고 말았다. 성경 속 [전도서] 기자는 이와 같은 상황을 비탄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전도서7:29]
그렇다. 고통과 악은 ‘죄’ 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한 것을 보내신 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고통과 악을 보내신다고 표현하는 것은 오해를 야기할 소지가 있다.[49] [누가복음13:16] 에서도 예수님은 질병을 하나님의 행위가 아니라 사탄의 행위로 돌리셨다. 그러므로 모든 고통은 죄로부터 유발되었다는 견해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아직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눠야 할 것 같다. 성경 속 [구약]을 들여다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며, 벌을 내리시는 역할을 담당하신다. 이와 같은, 잔혹해 보이는 신의 모습과 선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 걸까? 이 문제의 해답도 역시 인간의 ‘악함’으로 돌아가서 찾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문제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과 모순되지 않음도 알게 될 것이다. 일단 인간의 ‘악함’을 이야기 하고 나면, 성선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나, 인본주의적 낙관주의를 지닌 이들로서는 심기가 매우 불편할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악하다고 고백하는 이들조차도 그 고백이 ‘말로만’ 그친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바라볼 때, ‘야만적이다’ 라는 느낌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악함을 직접적으로 ‘지각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가피 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임을 알게 될 것이다.[50] 결국 이와 같은 과정을 수용해 나가는 작업은 비단 무신론자에게만 해당되는 사안이 아니라 모든 ‘인간 전체’ 에게 해당되는 사안이다.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떨어뜨린 이는 가톨릭 신자였고, 그날 아침 그가 과업을 잘 수행하고 무사히 귀환할 것을 빌어준 것도 군종 신부였으며, 원자탄이 떨어진 지역은 일본 최고의 가톨릭 지역이었고, 원폭 투하지는 정확하게 성당과 수녀원이었다.[51] 이 예시를 종합해 보자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또 다른 하나님의 백성을 무참하게 살해했고, 하나님의 일꾼이 그를 축복하고 보호를 기원했다는 것이다. 종교인이라 해서, ‘고통과 악’ 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라고는 적극적인 ‘벌’ 을 주시기 이전에, 그저 죄악에 빠진 사람들이 스스로 따르기로 선택한 길에 의해 이미 자신들에게 부과한 그 심판을 비준하고 확증하는 것 뿐일 수도 있는 것이다.[52]
인간은 독립하려 하고, 자율성을 드러내고 싶어 하며, 하나님 없이도 마음 껏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세상에 그와 같은 중립 지대는 없었다.
하나님께 예속되느냐, 사탄과 죄의 노예가 되느냐, 두 길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율성’,’자기 중심적’인 삶을 선택했고, 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이 땅에 ‘죄’를 태동시키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거부했고, 하나님은 신랑이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듯이, 다시 돌아오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인간은 끝까지 그 ‘죄’를 버리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이 그들의 선택을 존중 하시사, 인간들을 내어 버려 두실 때, 인간에게는 모든 죄가 덮쳐 들어 온다.[로마서1장],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선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신적인 지혜와 자비를 가지고 그 고통을 선하게 사용하기로 결심한다. 이는, C.S 루이스의 유명한 문장으로 간결하게 표현 가능하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53]
‘고통’ 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변모할 수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고통이라는 선물] 에서, 저자는 나병 환자들과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 그들이 느끼지 못하는 ‘고통’ 이라는 감각이 사실은 우리 인간을 살아남게 해 주는 유용한 신호 장치임을 인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개념은 꼭 물리적인 고통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더 나아가 거시적인 의미의 ‘고통과 악’ 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C.S 루이스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도록 하자.
고통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겸손이다. 왜냐하면 배가 이미 가라앉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백기를 드는 것은 궁색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교만한 분이라면 그런 조건에서는 우리를 받아 주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낮춤으로써 정복하시는 분으로서, 우리가 언제나 그분보다는 다른 것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붙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분께 나아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54]
스스로 자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피조물의 환상은 본인 자신을 위해 깨져야 합니다.[55]
사탄의 기만에 속아, 죄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들. 그리고, 우리 혼자 힘으로 살아가려는 헛된 욕망 속에 발버둥 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이와 같은 끔찍한 수렁에서 건져 내시고자 부단히 애를 쓰신다. 우리를 치유하시고자, 고통을 사용하신다. 이와 같은 그 분의 처절한 사랑이 담겨 있는 세상이기에 우리가 ‘고통을 제거해 주세요’ 라고 기도 해도 침묵을 경험하곤 하는 게 아닐까.
루이스의 표현을 빌려서, 잔인한 사람이라면 뇌물을 주어 빌어 볼 수라도 있고, 스스로가 자신의 사악한 놀이에 지칠 수도 있다. 그리고 술 주정뱅이가 잠시 제정신이 드는 것처럼 잠깐이나마 자비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하나님은 온전하며, 선한 의도를 지니신 ‘외과의사’ 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계신다. 만약 이와 같은 비유가 적절하다면, 그가 다정하고 양심적일수록, 더욱 무자비하게 썩은 살을 잘라낼 것이다.
그가 우리의 애걸복걸에 의지를 꺾어 버리거나, 수술이 끝나기도 전에 그만둬 버린다면, 그때까지 겪은 고통은 아무 소용 없게 될 것이다.[56] 물론, 아직도 이 모든 고통과 악의 문제를 나 자신, 즉 인간에게 돌리는 것에 찬동하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특히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왜 자신 스스로가 지고 살아야 하는지 억울한 이들도 많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질병’ 에 걸리는 경우인데, 이러한 ‘질병’ 앞에 무력한 우리 인간들로서는 실로 분노하며, 원망하는 것 만이 최선의 길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도올 <st1:personname w:st="on">김용옥</st1:personname>은 이렇게 말한다.
“크메르인들은 인간의 질병이 우연적인 세균이나 사기(사악한 기운)의 감염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의 결과라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크메르인들의 생각은 내가 생각하기에 매우 과학적인 것이다. 과학적임을 자처하는 현대인들은 인간의 질병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질병은 세균 탓이며 재수 탓이며, 그 치료는 의사의 몫이며, 돈으로 해결해야만 할 그 무엇이라고 믿는다. 현대인들이 사실 ‘의료 과학 미신’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질병은 결국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반드시 자기가 자기 몸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만 발생하는 것이다.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도 재수가 아니라 면역능력 감소에 의한 것이며, 면역 능력 감소는 반드시 실존적 행위의 소관이다. 질병은 죄를 지었기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고대인들의 생각은 내가 생각하기에, 현대인들의 무책임한 질병관보다 훨씬 과학적이다.”[57]
물론 모든 질병이 자기 잘못인 것 아니다. 이러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 버리면, 욥의 친구들과 같은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근원을 추적해 본다면 이 모든 무질서, 불균형,어긋남의 근원이 ‘인간의 식습관, 생활방식, 자연파괴’ 등과 결코 떨어져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이 모든 ‘질병의 원천’을 ‘하나님’ 이라고 말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 논의를 전개했음에도 역시 마음 한 켠이 무거운 이들이 있을 것이다. 너무도 해 맑은 아이들이 끔직하게 죽임을 당하고, 성폭행을 당하고, 너무도 착하게 살아온 이들이 비참한 모습으로 고통 당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이 모든 상황이 인간 전체의 책임에 있다 해도 너무 잔혹한 처사가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고백을 했던 [오두막] 이라는 책 속의 주인공은, 사랑하는 딸이 잔혹한 유괴범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나서 오두막에서 ‘하나님’ 과 대화 하는 시간을 가진다. 결국, 주인공은 이러한 고통을 통해 ‘자기 중심성’을 버리고, ‘인격이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삶의 의미를 되찾지만, 정말 이런 상황 밖에는 방법이 없었느냐는 뼈 아픈 질문이 남게 된다. 주인공과 하나님의 대화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너무도 절절하게 드러나 있기에, 그 전체 대화를 이곳에 인용해 보고자 한다.
주인공:”이 모든 일이 다 그 때문인가요? 미시(딸)가 죽어야만 당신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었나요?”
하나님:”맥(주인공), 진정해요. 나는 그런 방식으로 일하지 않아요.”
주인공:”그래도 딸 아이가 죽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없을 것이고..”
하나님:”맥, 참담한 비극에서 놀라운 선을 행했다고 해서 내가 그 비극을 연출했다는 뜻이 성립되진 않아요. 내가 어떤 것을 이용했다고 해서 내가 그 일을 초래했다거나 혹은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 일을 필요로 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결국 당신은 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될 뿐이니까요. 은혜가 꼭 고통의 도움을 받아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에요. 고통이 있는 곳에서 여러 가지 색채의 은혜가 발견되는 것 뿐이죠.”
주인공:”마음이 놓이는 이야기네요. 내 고통 때문에 딸 아이의 생명이 단축되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괴로워요.”[58]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 분은 누구보다 이 상황에 대해 아파하시고, 힘들어 하시지만 이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선’을 이루시고자 부단히 애를 쓰시는 분이시다.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상황들을 받아 들이고, 힘겹더라도 최선을 다해 이 상황들 속에서 ‘주’ 를 바라봐야 한다.
루이스도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가 죽고 나서 기나긴 슬픔의 터널을 지났지만, 결국 자신의 눈동자를 죽은 아내가 아닌, 하나님을 향함으로써 이 모든 아픔들을 극복해 나간다. 더 나아가서, 내게 닥친 시련이 결코 ‘최악’ 은 아님을 기억하는 것도 작게 나마 위로가 될 수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통해 표현 가능하다.
나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암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제한적이니까요. 암세포는 사랑을 무력하게 할 수 없고, 소망을 꺾어버릴 수도 없으며, 믿음을 앗아갈 수도 없고, 평안을 사라지게 할 수도 없고, 신뢰를 망가뜨릴 수도 없고, 우정을 박살낼 수도 없고, 추억을 내쫓을 수도 없고, 용기를 무너뜨릴 수도 없고, 성령을 억누를 수도 없고, 예수님의 능력을 업신여길 수도 없지요.[59]
9.치료에의 적용 그리고 실천에 대한 고민
이와 같은 논리적 결론에 도달했다면, 이제 수반되어야 할 것은 구체적인 ‘실천’과 실제 삶에의 ‘적용’을 향한 고민일 것이다. 우리끼리 이야기 한 논의들을 세상 속으로 들고 나가는 작업을 함에 있어서, 이질적인 두 논의(무신론과 유신론이라는 핵심 토대)가 충돌할 것에 대해 두려움과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길을 삶으로 살아 내려면 이와 같은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있는 용기(다른 말로는 ‘믿음’)가 요구된다.
‘세상’ 은 시대에 따라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가 암묵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임을 사전에 인정하고, 우리의 메시지가 다른 이들의 ‘구조’와 달라 그들을 불편하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들로부터 독단적이고, 교만하다는 말을 일방적으로 듣는 건 정당한 처사가 아님을 알게 된다면, 용기를 발휘하는데 한결 도움이 될 것이다.[60] 왜냐하면 예를 들어, 세상이 물질로만 존재하는 게 진실이었다면 과학적 연구가 지식을 얻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겠지만, 성경적 관점에서는 실재의 토대가 인격체임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은 충분히 다원적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인격체와 다양한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며, 진리를 알아가게 될 것이다. 거대하고 장대한 드라마가 펼쳐지며 진리가 계시되어 가는 것이다.[61]
물론, 이와 같은 ‘다원성’을 전제하더라도 이 문제가 답을 내리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책임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에, 이와 같은 관점을 붙들고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고민 그 자체를 그쳐선 안되며, 이러한 노력들이 ‘삶’ 이 되도록 노력 하는 시도들을 멈춰선 안 될 것이다.[62] 악과 고통의 문제는 결코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실존적인 성격을 내포하며,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야기이기에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끌어 안고 삶으로 적합한 길을 살아 내며 그 권위를 성경에 두고 달려가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을 행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과감한 선택을 하는 용기일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입장을 정립하고, 바른 자세와 태도로 타자와 주변 세상과 소통해야 할 시점에 이르면, 선택은 필수 사안일 것이다.
오스 기니스의 말처럼 선택은 ‘믿는다’는 단어의 근본 개념 중 하나로서, ‘책임’과 ‘헌신’의 요소는 ‘순종하는 믿음’ 의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63]완전하고, 순전한 ‘지식’과 ‘삶’ 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행위적 완전성과 논리의 완전성은 저 멀리 존재할지라도, 태도의 완전성을 지향하며 그 마음의 중심을 계속 십자가 앞에 내려 놓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먹어야 할 마음 가짐은 그저 고통을 꾹 참고 견뎌내는 스토아 철학을 넘어서서 우리에게 닥친 고통을 창조적으로 응대하고, 선용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지니는 것이다.[64]
마지막으로 가장 필수적인 요소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이러한 과정을 끌어 안는다면, 실제 사람을 치료하는 자리에서도 성령의 임재와 능력 속에서, 그리고 그 분의 깊은 사랑 속에서 그 아픔들이 선용되고, 활용 되어지는 과정을 묵묵히 응원해 주고, 단순히 고통으로 인한 ‘상처’ 만 치료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귀중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겪는 모든 고통들을 한 사람이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묵묵히 삶을 노래하다 보면, 갈망하는 세대들에게 온전한 진리가 비춰질 날이 올 것이다.그 때가 되면, 우리의 생각들은 모두 발 아래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리고 문제라고는 애초부터 전혀 없었음을 보게 될 것이고 말이다.[65]
난 그 날을 갈망한다.
용어 해설
1. 언어게임(language game):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한 개념으로서, 언어와 언어에 얽힌 행위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후기저작 [철학적 탐구](A Philosophical Investigation) 에서 언어는 세계를 묘사하는 명제가 아니라 인간의 활동으로서 일종의 도구나 게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도구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삶의 현장의 특수한 맥락에서 사용될 때 기능을 얻게 되듯이, 언어 역시 언어가 사용되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의미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 따르면, ‘진리’ 나 ‘오류’ 라는 개념도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언어게임에서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66]
2. 타당성 구조: 피터 버거(Peter Berger)가 사용한 용어다. 그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수용하는 신념과 행위의 유형으로서, 어떤 신념이 그럴 듯 하고 또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이러한 타당성 구조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한 사회가 어떤 신념을 ‘타당하나 것’ 으로 여긴다는 말은 그 사회의 타당성 구조를 바탕으로 그런 판단을 내린다는 뜻이다.[67]
3. 허수아비 논증(straw man argument) : 상대방의 주장을 공격하기 쉬운 주장, 즉 허수아비처럼 쉽게 무너지는 주장으로 제멋대로 바꾸어놓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논증을 말한다.[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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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피트 그리그, 윤혜란 옮김,(2009),p.163
[60]Lessile, Newbigin, 홍병룡 옮김,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IVP,2007),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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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Albert, Wolters & Michael, Goheen, 양성만,홍병룡 옮김, 창조,타락,구속,(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2007),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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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 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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