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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봐도 궁금해 지는 책이다.

 

20세기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두 거장인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다.

 

책의 저자가 고등학교 사회 선생님임을 고려할 때, 이 책은 정말 대단하다.

[비트겐슈타인도 학교 선생님의 위치에 있었던  경력이 있다는 점이 떠오른다]

 

저자는 하이데거는 '현상학'이라는 방법론으로 철학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갔다면, 비트겐슈타인은 '분석철학'이라는 방법론으로 철학적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구성이 깔끔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필요한 '선지식' 들을 미리 학습시킨 뒤에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이라는 두 인물의 생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각 철학자의 대표 이론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며 마지막으로 두 철학자를 대결 구도로 만들어서 이야기를 융합시키며 마루리한다.

 

둘의 차이점이 드러나는 몇 구절을 나눠보자.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의미'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의미하고는 거리가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의미를 그것이 표현되는 언어로 국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에서 그것을 밝히려고 애썼다."

 

"하이데거 철학에 등장하는 시구와 같은 언어들은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많은 단계의 명료화를 거쳐야 하는 애매모호한 문장이었을 테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을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신비로운 영역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비트겐슈타인이 하이데거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영역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마르틴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이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해 남긴 유일한 글이 있다.

 

"나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불안으로 무엇을 의미하려고 하는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은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하는 충동을 가지고 있다. 가령 무엇이 존재한다는 어떤 경이로움을 생각해보라. 이러한 놀라움은 질문의 형태로 표현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답변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느끼는 모든 것은 이미 경험에 앞서서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언어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은 바로 윤리이다.

(필자 의견: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개념이 윤리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양심이나, 영혼, 신비주의적인 무언가, 누미노제의 체험 등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윤리에 대한 한담을 멈추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지식이 존재하는지, 가치가 존재하는지, 선은 정의될 수 있는지 떠드는 것은 윤리에 대한 한담에 지나지 않는다. 윤리에서 우리는 그 문제의 본질에 관계하지 않고 또 관계할 수도 없는 것에 대해 말하려고 시도한다.

 

선에 대한 정의를 제시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본래적인 것에 대응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마치 무어가 그랬듯이 언제나 오해이다. 그것은 진실로 논리적으로 확실하다. 그러나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경향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가엾은 인간이여, 너희들은 무의미한 것을 말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원하는가? 무의미한 것을 말하라. 그것이 어떤 차이도 만들어내지 않는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을 때, 그는 바로 이 점을 알고 있었다."

 

다시 저자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을 논리실증주의로 오해했던 카르납이 하이데거 철학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과는 달리, 오히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경이로움의 세계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언어의 한계로 보았다."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이 하이데거 철학에 가까이 다가간 것 같은 구절이 있다.

 

"세계 안에서 사물들이 어떤 방식으로 있는가 하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비스러운 것은 하여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경험은 어떤 것이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튼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험이 아니다. 논리는 모든 경험에 앞선다. 즉 무엇이 그렇게 있다는 경험에 앞서 아무튼 무엇이 있다."

 

이 책의 제목처럼 하이데거는 존재의 차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의 차원에서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 하이데거는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분석을 통해 그 철학적 문제를 해명하고자 했다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그들의 관심 영역이 다르다 보니 하이데거 철학은 나중에 실존주의 철학의 다양한 분파를 만들어 냈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분석철학의 다양한 흐름을 만들어 냈다.

 

결국 결론은 하이데거는 경이와 신비로움으로 가득 찬 삶의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고,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와 자아가 뒤엉킨 삶의 양식을 철학으로 설명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세계의 내용을 드러내려 했고, 비트겐슈타인은 드러난 내용의 형식을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해 다듬으려고 했다.

 

결국 내용과 형식을 각각 추구한 두 철학자의 사유를 잘 융합시키면 더욱 풍성한 '삶'을 해석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저자는 철학하기의 의의를 말미에 남겨둔다.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처럼 일상 생활이나 과학이 가져오는 정보를 알기 위해 철학은 그것이 왜 가능한지를 정확히 분석해서 그 정보에 사용되는 의미를 밝힐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이나 과학이 설명하고자 하는 세계의 경이로움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이나 과학이 추구하는 진리를 외면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현대 과학지상주의가 불러일으키는 여러 현상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철학임에 틀림 없다."

 

 

두 철학자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이해를 돕고, 사유를 확장해 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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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철학자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퓨전된 문화인 같은 느낌이 좋다.

 

그의 주장들은 비판적으로 고찰해 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며,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자신의 철학체계를 만들어 나가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 깊다.


자크 라캉을 공부하다 보니, 지젝이 라캉의 정신분석을 적절히 활용해서 또 다른 사유를 전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요즘 득세하고 있는 해체주의, 구조주의 철학자들의 책보다 일단 재미가 있고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도 좀 더 통통 튀는 매력이 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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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1949~)은 철학자이다. 하지만 지극히 유희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글을 쓴다는 점에서 여느 철학자와 다르다.


지젝은 철학을 끊임없이 오락거리로 만든다.

 

비판적 사유 특유의 고답성을 유쾌하게 무시하는 그의 접근방식은 열정적이고 전복적이다.


정치적 무관심에 빠진 현대인들의 생활을 꾸짖는가 하면, 다음 순간 이웃집 닭에게 잡아먹힐 걱정을 하는 남자에 관한 농담을 하고, 영화 <스피드> 속 키아누 리브스의 윤리적 영웅주의를 역설하는가 하면, 비아그라의 철학적 토대와 마르크스주의에서 기독교가 갖는 역설적 가치를 폭로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젝은 정신분석학과 철학의 목덜미를 붙잡아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면시킨다.


영국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지젝을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럽에 출현한 사람 중 가장 놀라운 명민함으로 정신분석학, 혹은 문화이론을 해설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지젝의 이 '놀라운 명민함'은 그의 놀람에서 비롯된다.


정말이지 그는 끊임 없이 놀라서 묻는다.


 

왜 모든 것이 이와 같은가?


물론 지젝의 놀람은 일종의 전략이다.


그의 주장대로 비판적 사고의 토대는 의혹과 경계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이것은 그와 같다' , ;법은 법이다' 등)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 순간, 우리가 현실로 대면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는 순간, "철학은 시작된다."


부모에게 하늘이 왜 파란지 묻는 어린아이의 엉큼함으로 지젝은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그것을 하는지에 관한 통상적인 지식 전체를 의문에 부친다.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

 


 

지젝의 매력 중 하나는 그 자신의 표현대로 "영화나 대중문화의 사례들과 때로는 고상한 취향의 한계를 위험하게 넘어서는 농담이나 정치 일화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방법으로 대중문화와 일상생활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은 죽음이나 고매한 시적 극단을 메마르고 잔잔한 어조로 설명하는 일부 철학고 달리 매우 풍부한 호소력이 있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그가 '고상한 취향의 한계'와 협상하여 그것을 자기 저작의 일상생활과 통합시키는 방법이다.


지젝 스스로 지적하듯이, 타란티노나 화장실에 관한 논의에서 발생하는 미세하게 역겨운 향락은, 실제로는 "소위 인간적 고려라고 하는 병리학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기계적' 사유의 전개"를 은폐한다.


가령 지젝이 영화 <에얼리언>의 지하 동굴에 대해 "이 동굴이 불러 일으키는자궁-질의 이미지는 거의 노골적이다" 라고 말할 때, '거의'라는 단어는 확실히 그의 저작을 관통하는 차갑고 냉철한 이론가의 면모와 그가 겨냥하는 독자 사이의 분열을 시사한다.

 


자궁-질의 암시가 '거의 노골적'이라면 정확히 누구에게 그렇다는 것인가?


답은 물론 우리, 지젝의 독자들이다.


이런 진술로 지젝은 우리를 소외시킨다.


다시 말해서 이런 자궁의 환기는 너무나 음란해서 거의 외설에 가깝지만, 동시에 지젝이라는 '이론가' - 그것이 독자의 감각에 미칠 충격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문화적 파편들을 자신의 이론적 제분기에 집어넣는 이론가-에게는 전혀 외설스럽지 않다.


따라서 '거의' 란 단어는 지젝의 작업 속에 감춰진 분열, 일종의 '떨림점'을 지시한다.


독자의 감각을 알고, 마찬가지로 그 감각을 지니고 있는 지젝은, 오직 이론적 요점과 엄밀성만을 따지는 지젝에게 공명하여 떨린다.


요컨대, 지젝의 문체가 지닌 트릭은 이러하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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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저서를 읽다가 intro-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인물 정보라도 간략히 알고 접근하시라는 취지에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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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와 그의 종교관

 

책 제목: 과학의 영혼

108page

 

프랑스 태생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는 물리적 세계가 거대한 기계이며, 식물과 동물 역시 기계와 유사한 자동장치(automaton)라고 주장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에 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자신이 받아들인 기계론적 철학을 당대의 종교적 회의주의자들을 논박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기계적 우주와 인간의 영혼을 예리하게 구분함으로써, 데카르트는 인간 영혼에 대한 믿음을 보전하고, 이를 신에 대한 믿음을 위한 전진 기지로 삼고자 했다.

 

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는 종교적 확언이었다. 사고는 종교적 활동이었으므로, ‘코기토’(Cogito)는 인간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답변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코기토에서 출발한 데카르트는 즉각적으로 신의 존재에 도달했다.

 

 

이런 데카르트의 철학적 유산이 신이나 인간 영혼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되지 못하고, 단지 거대하고 비인격적인 우주에 대한 기계론적 개념에 대한 증명이 되어 버린 것은 이상한 일이다.

 

기계론적 철학의 확산은 과학사회의 형성에 의해 더욱 촉진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갈릴레오의 추종자들이 그룹을 형성하였고, 프랑스에서는 갈릴레오의 저작을 불어로 번역한 탁발수사 마린 드 메르센느(Marin de Mersenne, 1588~1648)를 중심으로 그룹이 형성되었다.

 

영국에서는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이 왕립협회(the Royal Society)라고 불리는 과학사회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를 따르는 다수의 무리들에 의해 둘러 싸여 있었지만, 이 그룹들은 선교적 열정을 지니고 자신들의 기계론적 철학을 장려하였다.

 

또한 이들은 기계론적 철학을 종종 종교적 변증과도 연관시켰다. 예를 들면, 왕립협회의 회원인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1703)은 그처럼 엄청난 장치들에 의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자연을 보고도 이 모든 것을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것은 어리석다고 보았다.

 

혹은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이처럼 탁월한 기계장치들은 전능자의 작품이다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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