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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물이며, 우리에게 배트맨 시리즈로 친숙한 조커다. 대표적인 빌런인 조커가 주인공인 영화라니.... 고담시를 피바다로 만들고, 폭탄을 터뜨리고 군단을 끌고 와서 학살하는 내용일까?

조커가 주인공이라면 누가 조커를 막는단 말인가??

다양한 추측들을 하며 관람하게 된 이 영화는 실로 놀라운 영화였다.

일단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가 어마어마하다. 히스 레져의 조커가 잔상처럼 남을 줄 알았으나, 어느새 호아킨 피닉스는 조커 그 자체였다.

 

 

조커가 조커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일련의 이야기를 담아 내고 있는데, 빌런임에도 마음이 쓰이는 캐릭터다.

이 영화를 본 이들 중 두 가지 관점이 대표적으로 등장할 수 있다.

 

"어떻게 저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느냐, 자신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타인을 해치는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다. 살인은 나쁜 행위이며, 도덕과 질서, 법은 중요하다."

 

"조커의 기분을 알 것 같아. 조커를 이해할 것 같아."

당신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가.

 

첫 번째 관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조커의 행위는 잘못 되었으며 벌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그렇게만 보고 끝내기에는 얻어낼 것이 너무도 많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섬세함을 지닌 이들이 사회 속에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조커가 지닌 '분노'를 깊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늘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한 인간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 주변에 많다.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도 없고, 지위도 없다. 의지할 수 있는 가족도 없다.

TV에 나오는 웨인 같은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은 노력을 안해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니, 가진 자들의 지도, 감독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정말 가난한 모든 이들이 다 그렇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나마 다니고 있던 직장에서도 쫓겨난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다. 괜히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얻어 맞고, 물건도 빼앗긴다.

 

하나 남은 혈육인 어머니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 의지할 친척도 없다.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할 단 한 사람이 없다.

 

 

 

살아가는 단 1분도 행복하지 않은데, 주변에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즐거움'에 맞춰서 자신들을 웃겨 달라고 요구한다. 정신과 약을 먹고, 상담도 받고 싶은데 지원이 끊겨서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대상도 없어진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괜히 시비가 붙어서 또 얻어 맞는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으며 망상 장애에 빠진 엄마는 웨인이라는 TV에 나오는 시장 후보가 자신의 남편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엄마의 망상 속 가짜 남편인 토마스 웨인을 찾아가 보지만 돌아오는 건 조소와 주먹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처럼 동경하던 TV 쇼 진행자 머레이는 TV 에서 자신을 조롱하고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 급격히 무너져 내리는 아버지 상 속에서 그는 아버지로 대변되는 세상, 사회를 향해 광기를 드러내기에 이른다)

 

영화는 갑작스럽게 조커라는 빌런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잔잔하면서도 매우 무겁고,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조커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나간다.

 

그의 어머니는 조커를 해피라고 부른다. 늘 웃으며 살기를 요구하며, 자신의 광대가 되기를 요구하는 어머니는 사실 망상장애+자기애성 인격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집에서 학대를 당하고 있어도 방관했던 사람이며 그 이후에도 자신의 뒷바라지나 맡겨 놓는 '자기 밖에 모르는 엄마' 였던 것이다. 자기애성 인격장애가 있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자신의 존재감을 지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엄마는 자신이라는 무대 위 주인공을 빛내 주고, 존재하게 해 줄 여러 소품 중 하나로서 아들을 대했을 것이다.

 

(늘 아들에게 웃는 모습을 강요하고, 화 내거나 자기 주장을 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엄마의 모습 속에서 엄마가 지닌 지독한 자기애가 확인된다.)

(엄마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나서, 조커는 분노하게 되고 엄마를 죽이기에 이른다. 엄마를 죽인 날은 조커의 마음에 평안을 주는 날이었다.)

영화는 조커의 불안정한 심리를 잔잔하지만 점진적으로 묘사하는데 그의 삶에서 나타나는 망상에 대한 부분은 나름 반전도 있고, 조커의 삶에 슬픔을 가중시키는 요소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성과 관련된 망상은, 그가 처한 절대 고독을 더욱 가중시키며 그녀와 나눴던 대화가 모두 환청이었다는 에서 그는 망상장애를 넘어선 '조현병'과 비슷한 정신증적 증상을 앓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자신이 동경하고, 좋아하던 TV 쇼 진행자로부터 조롱과 놀림을 당하는 그....

자존감이 낮아질 대로 낮아지고, 아무도 기댈 수 없으며 자신에게 요구만 하는 세상을 향해 그의 분노는 갈수록 높아져만 가고 자신을 무례하게 대하고 자신의 깊은 어두움을 들여다 보려 하지 않는 (들여다 볼 능력도 없는) 세상을 향해 행복한 웃음이 아닌 조소를 날리기에 이른다.

 

그가 바라보는 코메디는 주관적이다. 말도 안 되게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며, 공정하지 못한 세상. 자신의 인생을 지옥으로 밀어내기만 하는 세상과 상황 자체가 코메디인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색하게 폭소하는 그의 웃음은 세상을 향한 경멸, 조롱, 회의가 가득 담겨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코메디의 일부일 수 있다.

 

이 영화는 한국 영화 <기생충>과도 일면 겹치는 부분이 있다. 늘 일정 선을 넘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소위 가진 자들의 행동.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선심 쓰듯이 베푸는 아량.

 

 

 

가지지 못한 자들의 피해 의식, 열등감으로만 이 영화를 해석한다면 그 사람은 조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마지막에 조커가 타인의 질문에 대해 "재미있는 조크가 떠올랐는데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답했던 것처럼......

 

웨인 부부가 비참하게 살해 당하고 그 자리에 남겨진 브루스 웨인은 훗날 베트맨이 된다. 브루스 웨인도 사실 피해자다.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할 나이에 부모를 허무하게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브루스 웨인도 부모로부터의 애착 결핍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았을 것이며, 마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커의 입장도 단순하게 보기는 어렵다. 시스템의 문제, 사회 구조적, 제도적 개선이 반드시 필요한 주제임에도 조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깊이 있는 사람들이 너무 희박한 세상이다.

 

브루스 웨인과 같이 물질적 부족함이 없는 삶, 사회적 위치가 낮아본 적 없는 삶만 살아본 이들은 조커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조커' 가 되기 전 '회복된 조커'(나는 이를 'joy' 라고 부른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기독교적 표현으로는 '상처 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 라고도 볼 수 있다.

(타인의 기분에 맞춰 웃는 연기를 하는 '해피', 세상을 향한 분노와 조소가 가득 차버린 냉소적인 '조크' 를 넘어선 참된 기쁨이 가득한 상태로서의 'joy')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며, 물질과 도덕, 법률, 제도의 이면에 감춰진 인간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베트맨이 아니라 '회복된 조커'에게 있다. 하지만, 결국 영화 속 조커는 비슷한 아픔을 지닌 이들에게 모종의 카타르시스만 남긴 채 흑화하고 만다.

 

이 세상 속에 만연한 조커들이 더 break down 되기 전에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조커와 비슷한 삶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삶을 버텨내고 있는 이들이 생각나는 영화다.

 

굉장한 수작이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정말 압권었으며 끔찍한 절망 속에서 추는 조커의 춤은 지독하게 슬프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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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피트의 첫 SF 영화이다.

믿고 보는 명품 배우인 그이지만, 이번 작은 특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SF 영화, 우주라는 배경을 활용한 지극히 심리적인 인간 탐색 영화다.

애착과 자기애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바라봤을 때, 남기는 유산이 상당하다.

상당히 염세적이며, 인간에 대한 알레르기를 지니고 있는 주인공 로이 맥브라이드

그는 마치 감정이 일부 결여되어 있는 로봇과 같이 자신의 일에 열중하며, 주변 사람들을 향한 정서 활동이 철수되어 보이는 유능한 우주비행사다.

 

어머니에 대한 정보는 현저히 적으나, 이 영화는 '아버지' 라는 인물의 중요성을 한껏 부각시킨다.

 

일찍이 자신의 꿈과 야망을 위해 새로운 생명체를 찾아 떠난 그의 아버지는 오랜 기간 가정에 있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주인공 로이는 father hunger 를 지닌 사람으로 자라나게 된다.

 

 

 

애착의 측면에서는 다소 회피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세상을 향한 사회성을 가르쳐 주는 아버지라는 존재의 부재로 인해 그는 세상으로부터 철수된 모습으로 어색하게 살아간다.

사람들을 향해서는 웃는 모습을 보이는 페르조나를 드러내지만 늘 탈출구(exit)를 향해 나아가는 그의 모습 (1인칭 시점으로 영화 초반에 보여주는 카메라 시점이 압권이다.).

심지어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는, 더 나아가 '지구'라는 우리의 삶의 터전 전체에 대한 환멸과 거부를 남기게 된다.

 

그로 인해 주인공 로이는 지구라는 물리적 공간을 벗어나 달을 넘어 화성을 넘어 해왕성까지 뻣어 나가는 우주 비행사의 삶을 살게 된다. 사람들은 이를 꿈과 비전이라 이야기 하지만, 주인공 로이에게 이는 거대한 도피에 불과하다.

심지어 달로 도피 했으나, 지구와 다를 바 없는 시설, 사람이 즐비한 모습을 보며 치를 떠는 주인공의 모습 속에서는 아버지의 환영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하는 처절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로이는 양가감정이 분명하다.

아버지를 그리워 하면서도, 아버지를 증오한다.

자신의 옆에 부재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 하지만 그 분노의 껍질을 벗겨 보면 그 속에는 깊은 상처가 존재한다. 결국 그 상처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려 버린 삶을 살았던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애착의 문제와 자기애의 문제로 씨름하는 로이는 결국 영화의 말미에 아버지와 재회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 또한 애착의 문제, 자기애의 문제가 있었겠지만 영화에서 애착의 문제를 정확히 확인하기는 어렵다. 단지, 자신의 grandiose self(과대 자기)가 충분히 해결되지 않으면서 다소 광적으로 '프로젝트'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묘사될 뿐이다.

 

주인공 로이와 아버지가 끈으로 연결되어 망망한 우주 속을 유영하는 모습은 상징적이다. 물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진 생활을 했으나, 로이의 내면은 늘 아버지와 심리적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부재에 대한 증오, 그로 상징되는 세상을 햠한 환멸, 그를 떠올리게 만드는 타인을 향한 불편한 감정 등이 뒤엉키면서 로이는 끊임없이 싸워 왔다.

인간에 대한 환멸이 가득함에도, 절대적으로 혼자가 된 상태를 견디기 힘들어 하는 그의 모습은 회피적 인격을 지닌 사람의 전형을 보여준다. 강인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묘사되던 그도 아버지 이슈에 흔들리고, 자신이 잘해주지 못했던 옛 연인에 대한 회한을 끊임없이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쯤에서 숙고해 볼 수 있는 건 세대 간의 이슈이다. 그의 아버지는 결국 자신의 이슈(자기애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다.

 

나이는 어리지만, 더욱 성숙한 심리적 성장을 이룬(아버지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주인공 로이는 아버지를 더 성숙한 방향으로 인도해 주려 애쓰지만 결국 그의 아버지는 '자기를 찾는 여정'에 함몰되어 자신의 가족을 포기하게 된다.

 

혹자들은 내리사랑이 가장 고상한 사랑이라고들 하지만 오카다 다카시(일본의 정신과 의사)의 말처럼 자식들의 부모를 향한 사랑은 부모들의 자식들을 향한 사랑을 뛰어넘는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예외들은 분명히 있지만서도 부모들은 더욱 결핍된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욕구를 자식을 통해 푸는 경향이 그 다음 세대보다 더 노골적이고 강한 경우들이 많다. 하지만 자녀들에겐 부모는 우주와 다름 없다. 아버지, 어머니라는 두 우주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와 우주를 지키려 한다. 이 부분은 이후에 관점이 바뀔 여지도 있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로이는 '아버지 이슈'를 극복하게 된다. 아버지를 떠나 보내면서 그의 삶에서는 새로운 눈이 떠진 것이다. 그 동안 삶에 대한 의욕을 전혀 보이지 않던 그는 2번째로 얻게 된 지구에서의 삶에서 새로운 삶의 목표와 방향성을 찾게 된다.

아버지의 관점으로 바라보던 세상이 비로소 자신의 눈으로 바라봐 지게 되면서 그는 일상의 소중함, 옆에 있는 존재의 소중함에 눈을 뜨게 된다. 우주에서 지구에 도착했을 때 처음 손을 내밀어준 타인의 손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로이의 모습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된 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된다.

 

 

때론 미움,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타인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삶, 일상에서 사랑을 나누며 사는 삶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는 귀중한 영화다.

아버지라는 이슈를 극복하고, 아버지를 건강하게 떠나 보내는 훈련이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을 통제하거나, 바꿀 수 없다는 점도 받아들여야 한다.)

혹자들은 영화 [그라비티][인터스텔라]가 합쳐진 놀라운 작품이라고 이 작품을 평가한다. 그라비티에서 보여준 우주의 영상미와 인터스텔라가 보여준 인간에 대한 성찰이 융합된 작품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는 두 영화가 보여준 영역과는 또 다른 인간의 깊은 내면을 성찰하게 만들어 준 보기 드문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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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종영된지 한참 지난 드라마다. 하지만 워낙 비숲에 대한 좋은 평가들이 많다 보니 반신반의하면서 완주했다.

결론은, 한국에서도 왠만한 미드 부럽지 않은 몰입력 있는 작품이 나왔다는 것이다.

의사 드라마도 멜로, 요리 드라마도 멜로, 정치 드라마도 멜로로 귀결되던 한국 드라마의 식상한 전개 방식을 탈피했다는 점만으로도 일단 신선했다.

 

이 작품은 처음에는 단순한 범죄 스릴러 물이라고 생각했으나 검찰,경찰,행정,재벌, 군부 등각계각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두운 면모들을 과감하게 들춘 보기 드문 문제작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부정/비리 고발 드라마는 더러 있었으나, 완결이 난 마지막 화 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주제 의식을 확실하게 전달해 주는 드라마는 좀처럼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배우들의 열연도 주목할 만 한데, 드라마로 만나는 배두나, 조승우는 그저 반가웠다.

일단 인물들의 개성이 온전하게 살아 숨쉬고, 이러한 개성이 일관성 있게 시리즈 전반에 걸쳐 나타났기에 몰입도가 감소하지 않았으리라...

 

insula(뇌섬엽) 부위 절제 수술을 받고 나서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게 된 황시목 검사(조승우)가 주인공이다 보니, 감정과잉으로 흘러가지 않고 보는 이들도 차분하게 추리/수사에만 집중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주인공이 감정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감정이 있으나 이를 드러내거나 표현하거나 인지할 수 없다는 점....그래서 격해지는 상황에서는 몸이 이를 버티지 못해 발작을 일으킨다는 설정 등은 황시목 검사를 향한 연민의 감정, 따스한 시선, 보호 본능을 자극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드라마는 치밀하게 추리를 하면서 용의자를 찾아나서게 만드는데 미리 정보를 입수하지 않고 처음부터 보는 걸 추천한다. 예상을 빗나가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선사해 줄 것이다.

 

서부 지방 검찰청과 용산 경찰서에 소속되어 있는 검사,경찰 들이 사건의 중심에 있으며 그 주변부로 해서 초거대 재벌기업 한조가 우뚝 서 있다. 한 남자의 죽음을 둘러싼 얽히고 설킨 각자의 이야기.

 

모든 등장인물들이 비밀을 가지고 있으며 나무 하나하나가 모여서 거대한 숲을 이룬다.

조승우, 배두나 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의 감초같은 연기들도 일품이다. 드라마 진행에 방해가 될 만한 어설픈 연기를 보여주는 이들은 드물다.

(여담이지만 [sky 캐슬]을 최근에 봤더니 윤세아, 박유나 씨 등 출연진이 눈에 띈다.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역할도 상당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창준 역을 맡은 유재명 씨의 연기도 상당히 인상 깊으며 자세한 스포일링은 생략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이다. (마지막 법정에서의 모습은 정말 압권)

(드라마 [자백] 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하니 기대를 해본다)

 

사회를 고발하는 장르물. 몰입도와 신선도를 유지한 채 끝까지 일관성 있게 주제를 끌고 나간 보기 드문 수작.

 

 

너무 허황되고, 이상적인 결과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범위 내에서 현 시대의 문제점을 조망해 준 점 등이 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줬다고 생각한다.

"법관에게 있어 정의란, 영원한 짝사랑이자 궁극의 이데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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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봤던 더 리더(The Reader) 라는 영화입니다. 당시에 심리학적으로 접근해서 리뷰를 남겼습니다.

지금에 와서 다시 영화를 본다면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연기도 훌륭하고, 스토리도 깊게 다가오는 부분이 많더군요.

한번 쯤 보시는 걸 추천 드립니다.

 

 

 

1.       남자의 삶의 의미

남자 주인공 마이클에게 있어서 , 삶의 의미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사랑을 했고 , 처음으로 육체적,정서적 친밀함을 누려 봤다. 무뚝뚝한 아버지와 , 아들이 하는 일이라면 늘 싸고 돌기에 바쁜 엄마 , 그리고 살 얼음 같은 남매 지간 그 모든 것들이 식탁 에서의 식사 장면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한 , 정서적 결핍을 누려 오던 주인공이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배우게 되었고 , 15세와 30대의 어찌 보면 경계선에 서 있는 듯한 아슬아슬한 연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 마이클의 마음은 진실성’(authenticity) 이 가득했다.

혹자들은 마이클을 아직 어리고 , 뭘 모르는 사춘기 시절을 삐딱하게 보낸 한 아이로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 하기에 마이클의 태도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도중에 여자 주인공인 한나가 보여주는 이상한 행동 때문에 ,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 그 때 남자의 핵심 질문은 이러한 부분을 잘 나타내 준다. ‘Do you love me’? 라는 질문을 한나에게 던짐으로서 , 사랑을 확증받고 싶어 하는 마이클의 태도가 좋은 예이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면서 몇 가지의 의미가 이에 더해지는데 , 중점적으로 나누고 싶은 부분은 비밀이다. 영화 속에서도 나오듯이 , 학교 수업 시간에 비밀에 대한 개념을 배우는 시간이 있다. 마이클에게 있어서 , 이모 뻘 되는 여인과의 불 같은 정사를 나누는 몇 주간의 시간들은 , 결코 공개할 수 없는 비밀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 학교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 가족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으며 은밀하게 움직이곤 했던 것이리라…. 나중에 이 비밀사랑이 결합된 , ‘비밀스런 사랑이 마이클이라는 주인공에게 미친 영향은 가히 엄청나다. 이 부분을 나누기에 앞서서 , 한 가지 더 덧붙여야 할 남자 주인공의 삶의 의미가 있다면 , 그것은 배신감일 것이다.

왜냐하면 , 그토록 열정을 다해 사랑했던 한나가 말 없이 사라져 버렸을 때 , 남자 주인공이 느꼈을 분노와 배신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컸을 것이기 때문이다. 옷을 다 벗어 버린 체 , 물 속으로 들어간 마이클은 수 많은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아마, ‘생애 최초로 경험해 본 애뜻한 사랑을 물 속에 가라 앉혀 죽이는 시간이었을 것이고 , 커다란 배신감과 분노라는 을 그 은밀한 마음에 덧씌워 놨을 것이고 , 겉으로 보여지는 그의 모습 속에는 , ‘사랑의 감정이 전면적으로 차단되어 버린 ‘emotionless man’ (무감정의 사람) 만 남겨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처음 시작되었던 1995년도의 이야기를 보면,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 버린, 감정이 결여된 휴머노이드와 같은 느낌이 난다. 심지어 그의 딸에게도 그는 무뚝뚝하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아버지였을 뿐이다.

또한, 마이클이 법대에 들어 가게 된 과정들도, 그가 감정을 다루는 일련의 활동들이 아니라, 옳고 그름이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는 (실제적으로 이게 말처럼 되진 않을 수 있겠지만, 표면적으로 봤을 때), ‘감정을 섞지 않아도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부터 이 아이의 모습은 위의 3가지가 결합, ‘사랑이 깊숙한 곳에 억압되어 버린, 분노와 배신감으로 얼룩진 비밀스럽고 알 수 없는 남자라고 볼 수 있다. 법대 안에서, 매력적으로 자신을 유혹하는 여학생이 있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 뭔가를 감추고 있는 사람처럼 살아간다.

그러다가, 법정 재판에 견학 차 방문하여 수년 만에 한나를 만나게 되는 마이클…. 그 순간, ‘비밀’ , ‘배신감’ , ‘사랑이 미묘하게 뒤틀리면서, 복합적인 감정 변화를 경험하고 만다. 사실, 한나가 보고서 작성의 핵심 주모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필체 확인 과정을 하는 장면에서 한나가 주저하는 모습을 통해 마이클은 직감했을 것이다.

 그 동안, 한나가 보여줬던 일련의 모습들….. 가령, 책을 늘 읽어 달라고 하고, 여행을 가서도 메뉴판을 잘못 읽고, 쩔쩔 매던 모습들 속에서, 그녀가 문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손을 들고 그녀를 변호해 주지 못하는 마이클한나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되는 순간, 굵은 눈물 방울이 마이클의 뺨을 타고 흘러 내린다.

 왜 마이클은 그렇게 행동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비밀을 지켜 주고 싶은 것이리라. 철저히 숨기고 싶어하는 그녀의 자존심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까지 그 부분들을 지켜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사랑비밀이 결합되었을 때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비밀로 남을 수 있었겠지만 , ‘배신감이라는 불순물이 개입되고 나서 , ‘사랑은 억압되어 버리고 , ‘비밀무감각’ , ‘무반응으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상처를 , 똑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고 , ‘배신감을 억압해 두고 , ‘비밀스런 사랑만을 떠올리며 그 여인의 선택을 지지해 준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아직 이 남자의 배신감 , 완전히 치유된 상태가 아니다.

또한, 한 가지 더 추가되는 남자의 삶의 의미는 바로 정의’(justice) 일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보여준 배신 행위 , 그녀가 보여준 불의의 모습들이 법대생이 되어 있는 이 남자에게는 분명 내면의 갈등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을 억압 시켜 두고, ‘비밀스런 사랑의 힘을 가지고 다시 한번 옛 열정을 불태워 보는데….. 자신이 예전에 읽어 주던 호머의 <오디세이>,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등의 책을 직접 녹음해서 , 테이프로 만들어 한나에게 보내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한나는 변화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스스로 글을 공부하여, 언어를 깨우치고 마이클에게 편지도 보내기 시작하는데…..

그리고 20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를 몇 주만 남긴 상황에서, 마이클은 한나와 재회를 한다. 이 때, 마이클은 수 많은 갈등 속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한나에게 편지를 받아도 답장을 하지 못하던 그의 모습 속에서 아직도 비밀스런 사랑배신감’, ’정의의 문제가 미묘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신경질 적으로, 편지 보관함을 닫아 버리는 모습이라든지, 그 갈등이 가득 드러나는 표정을 보고 있으면 이 남자의 내면적 싸움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마이클은 한나에게 물었으리라.. ‘옛날 생각을 하느냐?’(나찌 시절)….. 하지만, 한나에게는 그 때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 같다. 한나는 오직 마이클과 보냈던 행복했던 시절들만을 회상했을 뿐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마이클과의 관계를 마이클이 생각하는 것 만큼 크게 여긴 것 같진 않다….. 그 만큼, 마음 문을 닫아 둔, 자기에게 갇혀 살아가는, 어찌 보면 순수한, 어찌 보면 무지한 여인이었으리라.).

글을 깨우치고, 세상을 바로 보기 시작하면서, 이 여인은 비로소, ‘진실한 사랑을 알게 되고, ‘도덕과 정의의 문제를 알아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비록 할머니가 되어 버렸지만, 그녀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 있던 외로운 시절들을 벗어나, 비로소 진실된 나로 새로 태어나, ‘사랑’,  정의’,  도덕을 정립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 이런 내막을 다 알 수도 없고 , 설령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용납하기가 쉽지 않았던 마이클은, 한나와 맞잡았던 손을 놓게 되고 , 그녀의 모습 속에서 , ‘회개’ , ‘용서’ , ‘후회의 모습을 보길 원한다.

이것은 자신에게 행한 배신 행위에 대한 용서와 함께, 어리숙 하지만, 어쨌든 수백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그녀의 행위에 대한 용서도 함께 녹아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의 자살로 이 모든 만남은 마무리가 지어지고, 그 이후에 마이클은 자신의 딸에게 한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자신의 비밀을 공개한다.

더 나아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생존자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공개함으로써 스스로의 치유를 경험한다. 이게 완전한 의미의 치유가 될 수 없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벌어진 사건들과, 이미 겪었던 일들에 대해서 돌이킬 수 없는 인간 존재이기에,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수용하고, 있는 자리에서 그 모든 것들을 견뎌내고자 하는 생의 의지’ , ‘회복으로의 발로가 엿보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자살을 통해 마이클은 배신감의 감정을 작게 나마 치유 받고(그녀는 자살을 통해 용서를 구한 측면도 있을 것 같다.), ‘비밀스런 사랑만은 끝내 변질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남겨 두는 길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2.       여자의 삶의 의미

여자는 순수했다. 그녀의 이름은 한나다. 30대가 되어서도 문맹인 걸 보면, 아마 변변찮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도 일반 사람들과 똑 같은 자아를 지니고, ‘자존심을 지니고 , ‘감정을 지니는 동일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분명 솔직하고, 따뜻한 구석도 많이 있다. 그러나 폴 투르니에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되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자신이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상처를 받게 되어 있다.

이 여인의 삶도 분명 그러한 상처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어리디 어린 꼬마 아이들도 자기가 보지 못하는, 음식점 메뉴판을 잘 읽어 내며 깔깔 거리며 웃고 있는데, 아무것도 볼 수 없고 ,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한나의 모습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마치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 등장하는 어머니가 글을 읽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모습과도 흡사해 보인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끊임 없이 던졌을 그녀에게 있어서, 배우지 못함에 대한 한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나 보다.

그녀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배움’, ‘계몽이 아니었을까…. 더 나아가서는 이 영역이 자신의 정체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말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배움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나였다. 그렇다. 그녀는 이미 시작부터 마이클과 달랐다. 마이클은 사랑을 배움으로써, 상대방을 배려하고 , 생각해 주는 마음이 큰 동력이 되었지만 , 그 당시 한나에게 있어서, 마이클은 수단에 더 가까웠다.

 

 

 ‘배움에 대한 한과 열망을 지닌 나를 위해, 그 아이를 도구로 삼은 것이다. ‘섹스는 그녀가 자신을 찾아 가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래서, ‘책을 읽어 주면, 그 뒤에 잠자리를 같이 하자라는 식으로 rule 을 바꾼 것이리라자신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영역을 십분 활용하여, ‘를 채워 가려는 욕망. 지독하게 에게 집중되어 있던 그녀에게, ‘도덕’ , ‘사회’ , ‘타자’ , ‘에 대한 의미는 희미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어찌 보면 그녀는 경계선에 서 있는 성격 장애를 지닌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도, 지독한 예민함이 바닥에 깔려 있으며, ‘에게 집중되어 있기에 상황을 해석하는 방식도 지독하게 자의적이다.

그래서, 세상과 소통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더군다나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크나큰 상처가 덧붙여져서, 자신의 존재를 바르게 인식하는 게 너무도 약했던 여자…. 그래서 영화 도중에, 마이클이 왜 나만 늘 사과를 해야 하는 거야?” 라고 외쳤을 때, 그녀는 아무도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다.” 라는 말로 응수를 한다.

를 바로 보지 못하고, ‘에 대한 끊임 없는 의문을 품고 있는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 ‘나의 결정그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결과등을 인지하고 수용하기가 쉽지는 않았나 보다. 어찌 보면 지독하게 순수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만큼 무지했고, 또 위험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글을 읽을 수 없다는 게 노출되는 게 두려워, 사무직으로 승진했을 때도 저 멀리 도망가 버렸고, 수용소의 경비원으로 일했을 때도 깊은 사유와 고민을 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철저히 잘 하면 되는 줄 믿고 있었다.

어찌 보면,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 하는, ‘자아 의식’ , ‘자존감이 지독하게 낮은 한 여인일 것이고, 그로 인해 자신이 낮게 평가 받는 것을 두려워 했을 것이며, 그래서 그녀의 삶은 일종의 완벽주의기질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맡은 일에 있어서 만큼은 철저하고, 성실하게 움직였던 것이리라…. 그러한 기질은 결벽적으로’, 자신의 몸을 샤워하고, 씻곤 하는 중간중간 장면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또한 그녀는 시종일관 순진했다. 다른 5명의 경비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부정하고 뒤로 뺄 때도, 그녀는 너무도 천진난만 한 표정으로 자신이 그 일을 했노라고 말하고,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 하는 주장도 펼친다. (도덕적 난제가 담긴 질문일 수는 있지만, 일반적인 상식을 가지고 봤을 때는 너무 기계적이고, 생각 없는 답변이다.).

그러다가, 5명의 경비원들이 한나가 주동자라고 몰아 붙일 때, 그녀는 자신이 문맹인 것이 밝혀지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심정으로 자신이 주동자였음을 시인해 버린다. 그녀의 삶의 의미는 끝까지 . ‘배우지 못한 나’ …. 그게 자신의 인생을 끝까지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것을 중심으로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그러했기에 순수했을지는 몰라도, 그녀의 행동은 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도 능통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타자의 목숨세상의 질서는 그녀에게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배우지 못한 나가 회복되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심지어, 마이클과 불 같은 사랑을 나눴던 것도, 그 당시에는 마이클이 느꼈던 것 만큼 진실한 사랑을 한나는 지니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Do you love me?” 라는 마이클의 질문에, 한나는 아니라고 고갯짓 하려다가, 마이클의 슬퍼하는 표정을 보고 마지못해 끄덕거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또 한번 스스로를 자책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느냐, 그들에게 버림 당하느냐에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데, 또 그러기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자신을 수그리고 남의 감정과 기분을 맞춰 줬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혐오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러한 복합적인 감정 속에서, ‘사랑의 참 의미를 잘 모르던 그녀는 친밀했던 관계를 순식간에 정리하고 너무도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더 이상, 마이클과 친밀해 지다가는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어, 상대방으로부터 버림당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분명한 이유가 존재했고, 그 이유에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행동으로 보이곤 한다. 그녀에게 마이클의 마음은 너무도 부차적인 문제다. ‘배우지 못한 라는 감옥은 그 만큼 단단하고, 두텁다. 그런 그녀가, ‘자기라는 감옥을 깨 부수는 순간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감옥 속에서 녹음 테이프를 받기 시작한 때부터다.

스스로가 글을 깨우치기 시작하면서, ‘배우지 못한 나라는 한과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하고, 감옥을 나오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하기 시작한다. 그녀 스스로는, 수 십년 간 자신을 괴롭혀 온, ‘지독한 정체성 문제가 해결되어서 새롭게 태어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수십 년 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마이클과의 사랑도 새롭게 느껴지고, 풍성하게 와 닿았을 것이고, 자신이 수용소에서 행했던 부도덕하고, 불의한 일들에 대한 깊은 반성의 시간도 가졌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가 원했던 건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지난 과거들을 다 청산하고, 새롭게 인식하고, 처음으로 깨달은 진정한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열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건, 그녀가 지독한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녀가 저지른 수 많은 행각들이었다. 마이클이라는 한 남자가 받은 상처와, 수용소 생존자들이 겪었던 아픔들, 사회의 혼란 등…… 이 모든 것들이 깨끗하게 정리되고 다시 원점에서 시작될 수 있는 세상이라면, 그녀의 다시 태어남은 기쁜 결실을 맺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기에는 그녀가 행한 에 대한 대가’, ‘책임이 너무 무거웠다. 그러면서, 마이클은 끝내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사랑은 했지만,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한나로서도 마지막 희망의 원점이 좌절되는 느낌과 함께,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죄책감도 함께 올라왔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녀에게 있어서 그 죄책감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인식은 했을 것이다. 수용소 생존자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가져다 달라는 말을 통해, 이런 부분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난 죄책감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서 자살을 한 것 보다는, ‘희망이 좌절되어서 목숨을 끊었다고 해석하는 것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그 만큼, 그녀는 자기에게 갇혀 있던 사람인지라, 남을 배려하고, 주변을 돌아보는 의식이 어린 아이와 같았기에, 그런 거창한 도덕적 함의를 지니고 자신을 희생했을 것 같진 않아 보인다.

이제 막 타자’, ‘이웃’, ‘사회를 보기 시작한 그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지독한 희생적 사랑을 가진 한 남자가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희망의 원점은 전능자 하나님께 둬야 마땅했을 것이다. 사람에게 그것을 요구하기에는, 너무 감수해야 할 부분이 많지 않겠는가..). 마이클이 그 희생을 받아 들이길 거절한 부분에 대해서 난 아무런 비난도 할 수 없다.

오히려, 마이클의 선택은 충분히 정당했다고 생각한다. 마이클의 입장에서도, 그녀의 죽음이 시원하게 다가왔을 리가 없다. 그리고 마이클은 알았을 것이다.

그녀가, ‘속죄의 의미보다는, ‘자신의 희망이 말살된 것에 대한 실망이 더욱 컸던 것을…. 하지만, 한나라는 여자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속죄 형태가 된 것이기도 하기에, 마이클은 이 모든 것을 끌어 안고 , 이 삶을 수용한 것이리라….

결국 한나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자기를 찾는 것’. 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하나님에게서 찾았더라면, 이 여자의 삶은 크게 바뀌었을 텐데 ….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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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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