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은 사회나 정치적 문제를 다룰 때 교회가 택할 가장 훌륭한 전략으로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한 경험주의적 접근법을 추천했다.

                  -윌리엄 템플-


특히 그는 교회가 "어느 특정 정책"에 대해서도 거만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의 경험은 앞으로 나아갈 특정 방식을 취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정책은 언제나 정치와 경제 세계의 실제적인 인과관계에 대해 전문적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 이 문제에 관해 그리스도인이 이기심의 유혹에 더 저항하지 않는 한, 그가 내린 판단의 신뢰도는 무신론자의 그것보다 나을 게 없다."


템플은 기독교의 원리나 진리 선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특정 상황을 경험하고 얻은 그 상황에 관한 지식은 공공 정책을 가장 잘 결정하는 데 긴요하다는 뜻이었다.


최근, 에버릿 쿠프는 사실은 제쳐 두고 결론부터 쏟아 내는 일이 1980년대 미국 공중위생국장으로 재직하던 기간 내내 자신을 괴롭혔다고 호소했다.


재직 초기에 쿠프는 임신 중절권을 반대한다는 확고한 개인적 견해를 밝혔다가 좌파에게 비판을 받았다.


이후에는 에이즈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인도적 처우를 주장했다가 우파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한 의견을 밝히면서 이 책이 말하는 끈질긴 우연성에 호소했다.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학문 탐구 정신의 결여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신학적 원리에 의지하면 사실은 그리 정확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진보주의자들이 무조건 반사적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무조건 반사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보수주의자들도 마찬가지임을 깨달았습니다."


-마크 놀 [그리스도와 지성] -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책의 저자는 루이스의 자유의지론에 힘을 실어 주고 있으며,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설명체계로서는 루이스가 쉐퍼를 압도해 보인다. 하지만, 루이스의 이론이 온전한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지는 좀 더 고민해 봐야 한다. 연옥의 존재 등에 대한 그의 개념은 성경적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다소 힘을 잃기 때문이다.

 

[변증적 고려 사항]

 

 

 

책 제목: 루이스와 쉐퍼의 대화

 

저자: 스콧 버슨&제리 월즈 지음

 

162~167page

 

 

 

앞서 세 장에서 우리는 쉐퍼와 루이스의 구원론적 체계를 상세히 살펴보며 공통적인 기반과 분기점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파악했다.

 

그러면 이 모든 내용이 변증적 과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이제 우리의 구원론적 연구를 다섯 가지의 변증적 고려 사항들을 통해 결론짓고자 한다.

 

 

 

  1. 양립론은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 그리고 선하심을 훼손한다.

 

약한 경정론이나 양립론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그것들이 문제가 될만한 의미들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첫째, 이 입장은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한다.

 

모든 행동과 생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결정론적 뜻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결정해 놓으신 것 외에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둘째, 이 입장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데,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제 2원인에 의한 죄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제 2원인에 의한 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선택받은 자에게는 제 2원인에 의한 행실에 대해 점수를 줄 수 있다는 것인가?

 

이 입장에 근거한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자들을 벌하시는 하나님은 불의하시거나, 아니면 인간은 자신의 행실을 자랑할 수 있다.

 

셋째, 이 입장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자유로운 인간의 선택을 결정하실 수 있다면,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결정해 놓지 않으셨나?

 

만일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기 위하여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필요가 없다면, 완전한 사랑과 전적인 선하심을 갖추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모든 인간이 그분의 구원 선물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게 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아직 이러한 비판적 질문에 대하여 설득력 있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자유의지론은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자유 모두를 제대로 보여 주는 유일한 자유론이다.

 

 

 

 

  1. 우리의 구원론은 자유의지론적 자유관을 반영해야 한다.

 

만일 자유의지론이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자유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공하는 데 정말로 필요하다면, 우리의 구원론은 자유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일관되게 붙잡아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루이스의 변화론 모델이 쉐퍼의 형법적 모델보다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이것은 세 가지 근거를 들 수 있다.

 

첫째, 자유의지론적 구원은 인간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구원 선물을 받을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무조건적인 예정과 자유의지론적 자유는 전혀 양립할 수 없다.

 

둘째, 자유의지론적 자유는 구원을 위해서는 단회적인 회심이 아닌 지속적이며, 역동적인 신앙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만약 구원이 회심 때에 결정되었다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영역인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서 인간의 자유는 불필요한 것이 된다.

 

셋째, 자유의지론적 자유는 변화의 과정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한 이중적 행위라는 관념을 제시한다.

 

그리고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이는 이 과정이 끝나기 전에 죽은 사람들을 위한 무덤 너머의 정결 과정이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반드시 내포한다.

 

 

대부분의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이 마지막 주장은 소화하기가 힘들 것이다. 이 교리는 중세에 모금 수단용으로 쓰이던 비성경적인 사상을 연상케 한다. 그것만이 아니라, 형법적 모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교리는 전적으로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의를 전가해 주시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를 용서하시며, 죽음의 순간에 우리가 일방적으로 변화할 것을 약속하셨다면, 도대체 왜 우리에게 연옥의 교리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러나 변화론 모델의 관점에서 보면, 루이스의 사후 정화론은 논리적 필연성을 갖고 있다. 만일 구원이 무엇보다 변화에 관한 것이고, 이 변화의 과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면, 정화의 과정이 완료되기 전에 죽은 이들에게 무덤 너머에서도 진행되는 변화의 기회가 있다고 보는 편이 논리적으로 맞을 것이다.

 

즉 루이스는 면죄부, 혹은 전통적으로 면죄부와 연루된 비성경적 개념들을 인정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변화론적 구원론을 논리적인 결론까지 이끌고 갔을 뿐이다.

 

 

따라서 연옥에 대한 질문은 단순히 성경해석적 토대에서만 답변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적 자료들을 그 논리적 결론까지 밀어 붙여야 한다. 만일 자유의지론적 자유와 루이스의 변화론 모델이 성경의 내용을 가장 잘 이해시켜 준다고 믿는다면, 이러한 정화론도 논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죽음의 순간에 변화를 완수하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정화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더 이상의 정화 과정도 불필요할 것이다.

 

 

 

 

  1. 우리는 진리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만일 우리가 논리적 일관성 기준에 다른 신앙의 체계를 맞추려 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바로 위의 진술을 신실하게 붙잡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쉐퍼의 역설적인 입장에서 본 것처럼 이는 언제나 일어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논리와 질서,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이시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진실하지만 총체적이지 않은 진리를 구현하는 자기 일관성을 갖춘 체계를 소유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신비의 문제에 관해 더욱 철저하게 생각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당연한 긴장점과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루이스를 따라 잠정적 불가지론의 진영으로 따라가거나, 아니면 우리의 교리적 입장을 재고해야 한다.

 

역설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유의지론적 자유를 보존해야 할 필요가 드러난 마당에, 우리는 독자들이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문제를 미해결의 바다에 던지기에 앞서 성경의 내용과 하나님의 성품을 바르게 보여 주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관한 대안적 체계를 탐구할 것을 권한다.

 

 

 

[1]신학적 진솔함은 변증의 필수이다.

 

무조건적인 예정론을 오로지 구원의 확신을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의도적으로 이러한 교리를 불신자들에게 감추려는 시도에는 뭔가 의심쩍은 부분이 있다.

 

이는 쉐퍼가 안고 있던 문제다. 만일 정말로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일부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고 나머지는 내어 버리기로 하셨다면, 우리는 쉐퍼의 방법론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이 교리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이 교리에서 함축하는 내용들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쉐퍼는 다른 신념 체계 안에 있는 대화 상대자들에게도 솔직함을 요구하지 않겠는가? 분명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동일한 기준에 우리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하더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열어야 한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우리는 그 진리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쉐퍼로 하여금 예정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불신자들과 나눌 수 없게 했던 바로 그 본능적 요인이 이러한 교리가 의심스러움을 직관적으로 보여 주는 상징이나 경고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우리의 신앙 체계를 솔직하고 성실하게 나눌 수 없다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같은 취지에서, 우리는 조직 신학과 목회 신학을 이원화하는 형태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쉐퍼는 전적이고 무조건적인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적 자유의 긴장 관계라는 모순된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목회적인 상황에서 그의 전략은 바뀌었다.

 

완벽한 균형대신, 쉐퍼는 미심쩍은 내용을 지닌 신념들을 간과하면서 더 안전한 교리를 강조한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루이스는 목회적 혹은 영적 조언이라는 기치 아래 자신의 실용적 제안을 정당화했다.

 

특별한 교리를 강조하는 것이 목회적 차원에서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믿는 바를 왜곡하면서까지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면밀함을 갖추지 못한 목회적 조언을 제시하는 것도 정당하다 볼 수 없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실재하는 모든 것의 주님이시라면, 우리의 목회 신학과 조직 신학 사이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쉐퍼는 분명히 이 점에 부응하는 주장을 했다. “만일 내가 나의 지적인 무결성을 유지하고 나의 인격적, 영적, 그리고 지적인 삶의 통합성을 지키려면대답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한 사람의 신학적 무결성을 진단하는 방법은 그 신학의 내용들이 막상 현장에 적용되었을 때 진실하게 인정받을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살해를 당했다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하나님이 그러한 어린아이의 죽음을 의도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완전한 무결성과 신학적 일관성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이가 신앙을 버릴 때, 우리는 완전한 무결성과 신학적 일관성을 갖고 하나님이 이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며 어떻게 해서든 그 분의 품으로 데려오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비극적 죽음이 일어나거나 불신자가 신앙을 거부하는 등의 일이 일어날 때 우리의 사상에 걸림돌이 생기는 것인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어린아이에게 일어나는 야만적 행위나 선택받지 못한 자들에게 가해지는 무조건적 저주 같은 모든 일을 결정해 놓으셨다고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는 실제 세계에서 이러한 예상 결과들과 더불어 지낼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에서 우리의 조직 신학을 적용할 수 없다면, 우리의 교리적 입장에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필자: 양자역학과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가 등장한 현대 사회에는 이와 같은 상식적인 주장도 때론 반론에 부딪힐 수 있다.)

 

[2]변증학은 체계적 사역이다.

 

 

 

변증적 과제와 조직 신학 간에는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어떤 이들은 변증학을 농구 시합이나 축구 경기와 같이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많은 점수를 얻는 자가 승리하는 식이다. 이는 단순히 양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변증학은 복잡한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다고 봐야 한다.

 

여기서의 목표는 뒤범벅이 되고 혼란스럽게 널린 조각들을 하나의 일관성 있고 질서정영한 실체로 조합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기는 사람은 조각이 가장 적게 남아 있는 자이다. 우리가 할 일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엄청난 증거 자료들을 단순히 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증거들이 어떻게 합리적이고 실존적으로 만족할 만한 실재의 모습으로 조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조각들을 잘 엮어서 알쏭달쏭한 인생의 퍼즐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는 이들에게 기독교의 일관성과 아름다움을 명쾌하게 제시하는 일이 조직 신학과 변증학의 몫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의 구원론적 비전은 일관되고, 포괄적이며, 거부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3]최대의 충돌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

 

 

쉐퍼는 일관되고 포괄적이며 거부할 수 없는 비전의 필요성을 이해했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보면 그는 우리에게 실재에 대한 통합적 관점이 부족하며,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곤 단절된 파편들뿐이라고 지적한다.

 

실재는 책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책의 미미하고 훼손된 부분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는 겨우 각 페이지마다 1인치 정도의 활자화된 내용일 뿐이다. 이 정도로는 어떠한 저자가 있다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따름이지 이야기를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만일 우리가 잃어버린 부분들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파편들을 일관된 메시지로 조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쉐퍼가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의 관계를 구상했던 방식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하나님의 우주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대답의 일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의미 있는 삶을 살기에 충분한 정보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 간격을 매우고 인생의 부조리함을 해석하기 위해 성경의 관대한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가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의 파편들을 한데 엮을 때, 실재에 관한 일관되고 포괄적이며 유력한 구상이 떠오른다.

 

그러나 쉐퍼에 따르면 이와 같은 명료한 이치가 많은 기독교 진영에서는 구름에 가리어졌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본문을 쪼개고 둔갑시키는 성경 비평가들의 새로운 조류가 등장했다. 따라서 성경 본문은 자연 계시의 파편들과는 어울릴 수 없게 되었다.

 

실재에 대한 통합적 구상과 인간의 곤경에 대한 하나님의 해법을 묘사하는 이야기는 한쪽에서는 신앙과 특별계시의 해체되고 이원화된 병렬 관계로, 다른 한쪽에서는 검증된 사실과 자연계시의 병렬 관계로 대치되었다.

 

그렇기에 쉐퍼가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한 것이다.

 

실재에 대한 통합적 비전은 이러한 교리를 집요하게 고수할 때만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쉐퍼에게 있어서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이는 분열된 지식 세계와 동강난 세계관으로 치달을 뿐이다.

 

필자들의 구원론 연구를 통해 쉐퍼와 루이스 사이에 존재하는 몇 가지 핵심적인 균열이 드러났다. 속죄의 성격, 영원한 구원, 예정론, 영혼의 정화, 그리고 역설에 대한 의존 등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쉐퍼가 성경의 영감에 관한 루이스의 일부 주장을 불편하게 여겼음은 확실하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오랫동안 미국 IVP 편집인으로 있었던 제임스 사이어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사이어는 1973년에 신시내티에서 열린 기독교 서점 협회에 쉐퍼와 대동했던 때를 술회한 바 있다. 어느 날 저녁 두 사람은 유람선과 작은 배들이 유유히 오가고 있는 오하이오 강변을 거닐고 있었다. 신시내티레즈 팀의 야구 경기가 없는 저녁의 야구장은 강 둑 위에 은은한 자태를 드러내었다. 두 사람은 호텔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는데, 쉐퍼는 늘 그렇듯 차분했다.

 

진중한 성격인 그는 흥겹게 웃는 시간에도 별로 미소를 짓거나 잘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지성과 의지, 그리고 감성을 활용해 소통하는 데에는 능했지만, 그다지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이어는 쉐퍼가 성경의 영감에 관한 루이스의 입장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창조 기사에 대한 신화적 해석이나 구약의 기적들의 시공간적 사실성에 대한 의문,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의 오류 가능성 등은 성경무오성 교리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쉐퍼는 특히 루이스의 [시편 사색]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지만, 이 작품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를 꺼려했다. 왜냐하면 루이스의 성경관이 갖고 있는 결함을 부각시키면 그의 다른 저작이 갖고 있는 매우 긍정적인 변증적 영향력이 위축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대화가 잠시 뜸해지자, 사이어는 흥미로은 시나리오를 하나 구상했다. 그는 쉐퍼와 루이스를 같은 방에 데려다 놓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밖에 몰래 엿듣고 싶다고 했다.

 

쉐퍼의 엄숙한 얼굴에 평소와 달리 밝은 미소가 번졌다. 쉐퍼는 사이어에게 이렇게 응수했다. “, 우리가 진작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루이스는 분명히 전향했을텐데.”

 

추측컨대 우리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변증가들이 이 중요한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것을 지켜보고 싶은 이는 비단 사이어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만남이 성사됐다면 그날 밤 신시내티 강변의 야구장은 북적대는 사람들로 가득 찼을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 토론은 단지 쉐퍼와 루이스 뿐 아니라, 복음주의 세계를 갈라놓은 큰 간극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다음 장은 사이어의 흥미로운 소원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


참고: 이 책의 그 다음 챕터도 쭉 읽어 보시는 게 좋습니다. [굉장히 완성도 높은 책으로서 두 인물들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꼭 정독 하시길 부탁드립니다.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기독교 우익을 담당하며, 정통 기독교를 수호하려 했던 프란시스 쉐퍼와 기독교 변증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근현대사 속에서 기독교 변호에 앞장 섰던 C.S 루이스는 서로 격렬한 논쟁을 벌인 적은 없으나 한번쯤 한자리에 앉혀 놓고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핵심적인 신학을 비교해 보자. 자세한 내용은 [루이스와 쉐퍼의 대화] 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책이 상당히 두껍지만 두 저자를 좋아하고, 신학적인 내용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잘 쓰여진 책이다.

 

 

 

 

 

 

 

쉐퍼의 입장 (근본적인 것들이라는 책에 따르면)

(그리고 B.B. 워필드, 제임스 오르, W. H.그리피스 토머스, 캠벨 몰간도 같은 견해)

  1.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2.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출생

  3.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속죄

  4. 그리스도께 죽음으로부터(문자 그대로) 부활하심

  5. 그리스도의(문자 그대로) 재림.

 

 

루이스의 입장 (순전한 기독교에 따르면)

  1. 성경의 영감과 속죄의 효력에 대해서는 인정함. 그러나 성경이 어떻게 영감을 받았으며 속죄로 인해 타락한 피조물들이 어떻게 회복되는지에 관한 것은 본질적인 문제로 취급하지 않음.

  2.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반대함.

  3.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출생

  4.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문자 그대로) 부활하심

  5. 그리스도의 (문자 그대로) 재림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 인생의 의문점들

 

저자: 니키 검블

 

22~25page

 

 

 

공산 국가였던 러시아의 사전에는 예수님은 결코 존재하지 않은 신화 속의 인물이라고 설명되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늘날 진정한 역사학자로서 그런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필자: [예수는 신화다] 등의 책이 있으나, 진지한 무신론 역사학자들조차도 그런 주장에는 동의하기 힘들 것이다.)

예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들은 대단히 많다. 성경이나 그 밖의 다른 기독교 저술 외에 비기독교 자료에서도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직접적으로, 수에토니우스는 간접적으로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A.D. 37년에 태어난 유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예수님과 그분의 추종자들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요세푸스-

 

 

이 때쯤 예수라 하는 한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다. 그를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기적을 행하는 자였으며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위에는 많은 유대인과 또한 많은 이방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그리스도였다. 빌라도가 우리 가운데 지도자격인 사람들의 제안으로 그를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처음에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그가 다시 사실 것과 그 밖의 수 많은 기적들을 예언한 바와 같이, 그가 죽은 지 사흘 째 되는 날 그들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을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지금도 존재한다.” (Josephus, Antiquities, XVIII 63f. 어떤 이들은 그 본문이 썩어져 없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가 제시하는 증거는 예수님의 역사적 실존을 확증시켜 준다.)

 

 

 

이와 같이 신약 성경 이외에도 예수님이 실재 인물이었다는 증거가 있다.

더구나 신약 성경에 있는 증거들은 대단히 확실하다.

때때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신약성경은 오래전에 쓰여졌습니다. 성경 기자들이 기록한 내용들이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본문 비평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신약의 저자들이 쓴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원전이 많으면 많을수록 원전에 대한 의심은 적어질 수 밖에 없다.

F. F. 브루스 (그는 맨체스터대학교의 성경비평과 성경해석학 교수였으며, 지금은 돌아가셨다)는 그의 책 [신약성경의 기록은 믿을만 한가?]에서 성경의 텍스트들을 다른 역사적인 텍스트들과 비교함으로써 신약성경이 얼마나 풍부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밝히고 있다.

 

 

 

저서

쓰여진 시기

최초의 사본

시간간격

사본 숫자

헤로도토스

488~428 B.C.

A.D.900

1300

8

투키디데스

460~400 B.C.

A.D.900

1300

8

타키투스

A.D. 100

A.D. 1100

1000

20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58~50 B.C.

A.D. 900

950

9~10

리비우스의 로마사

59 B.C. ~ A.D 17

A.D. 900

900

20

신약성경

A.D. 40~100

A.D.130(사본 완성 A.D.350)

300

5000+ 헬라어 10,000 라틴어 9300 다른 언어

 

 

 

 

위의 표는 그 사실들을 종합하여 신약성경이 어느 정도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브루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에 관한 아홉개 혹은 열 개의 사본이 현존하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카이사르의 시대보다 약 900년 후에 쓰여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리비우스의 [로마사]의 경우 20개의 사본 밖에 없으며 가장 일찍 쓰여진 사본은 A.D. 900년 경의 것이다. 타키투스가 쓴 열 네권의 역사책은 20개의 사본이 남았을 뿐이며, 열여섯 권의 연대기는 그의 두 개의 위대한 역사서의 열개 부분이 전적으로 두 개의 원고에 의존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9세기의 것이며, 다른 하나는 11세기의 것이다.

 

투키디데스의 역사는 거의 전적으로 약 A.D. 900년의 것인 여덟 개의 원고로만 알려져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랜 역사적 간격과 비교적 적은 양의 자료에도 불구하고 이 저서들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고전학자들은 없다.

 

 

 

신약 성경에 관한 한 우리는 풍부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

신약은 A.D. 40년과 A.D. 100년 사이에 쓰여졌다고 여겨지는데, 우리에게는 A.D. 350년에 쓰여진 신약 전체의 완전한 원본(단지 300년의 시간적 간격뿐이다.)과 신약의 내용을 거의 다 포함하고 있는 3세기의 파피루스, A.D. 130년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복음의 일부도 있다.

또한 5000개 이상의 헬라어 원본들과 10000개 이상의 라틴어 원본, 그리고 9300개의 다른 언어로 쓰여진 원본들이 있으며, 그 뿐 아니라 초대 교회 교부들의 글 속에 36000개 이상의 인용 구절들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원전 연구가의 한 사람인 F. J. A. 호트는 말했다.

신약성경은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증거들의 다양함과 풍부함에 있어서 고대 산문 기록 가운데 독보적인 존재이다.”

 F. F. 브루스는 이 분야의 권위자인 프레데릭 케니언 경의 말을 인용하여 그 증거를 요약한다.

 

 그렇다면 처음 글이 쓰여진 시기와 현존하는 최초의 증거 사이의 간격은 아주 작은 것이므로 사실상 무시할 만하다. 그러므로 성경이 원래 쓰여진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졌는가에 대한 의심은 이제 그 근거를 상실했다. 신약성경의 신뢰성과 통일성은 결국 증명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C.S 루이스가 행위 구원론자인가?]

 

 

 

책 제목: 루이스와 쉐퍼의 대화

 

92~96PAGE

 

 

 

 

 

루이스는 쉐퍼가 주장한 것처럼 우리가 마치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상태로있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보다 우리는 완전한 겸손으로 우리의 죄악 된 선택들에 대한 영원한 지식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천국을 즐길 수 있는 피조물이 될 것이다.

 

 

 

루이스는 천국을 죄 사함을 받은 자라면 누구나 즐겁게 동참할 수 있는 천상의 디즈니랜드로 제시하기보다, 오직 정화와 적절한 준비를 갖춘 자들만이 천국 도시의 기쁨을 소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최근 읽었던 권영경 교수님의 [위선]이라는 책을 보면 갈라디아서, 로마서에서 바울의 일관된 입장과 사복음서에 제시된 예수님의 메시지는 모두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행위와 은혜는 서로 양자택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는가? 루이스는 속죄론을 그 열쇠로 제시했다.

 

 

 

루이스에 따르면 인간은 심각한 도덕적 수렁에 빠져 있다.

 

사실, 우리가 처한 곤경은 너무 심각해서 단순한 개선안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총체적인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실제적으로 도덕적인 변화를 겪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고통스럽다.

 

 

 

[순전한 기독교]에서 루이스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삶 속에 도덕적 변화를 일으키시려고 끈질기게 일하셨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원한다면 내가 너희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겠다. 너희 자신을 내 손에 맡기는 순간, 나이 목적은 오직 너희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밖의 다른 것은 없다. 너희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으며, 너희는 나를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이 일을 완성할 것임을 명심하여라. 너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떠한 고생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죽음 뒤에 어떠한 상상조차 못할 정화의 과정이 오더라도, 내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너희가 진실로 완전해지기까지 나는 결코 쉬지 않을 것이며, 너희도 쉬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구절을 읽고 루이스의 구원론은 행위를 통해 의로움을 얻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전혀 맞지 않다. 이 구절에서 루이스가 강조하는 것은,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손에 자신을 맡겨 드림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성부의 형상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힘으로는 구원을 결코 이룰 수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거룩함을 위해 그분이 내리시는 처방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 일을 시작하셨고 종국에는 완성하실 거룩하신 의사에게 지속적으로 믿음을 두는 것이다.

 

루이스에게 있어서 믿음은 분명히 신뢰를 수반하고 있으며,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정말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행해야 한다 

 

 

(필자: 아르뱅주의니, 4차원 복음이니 해서 한국 기독교는 행위를 집어 던지고 구원티켓을 획득한 이후 세속에 기반한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예배도 안 빼먹고, 헌금도 잘 하니 신실한 성도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은 성경적인 참 복음이 아니다) 

 

 

루이스가 인간의 의지나 어마어마한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호감을 얻을 수 없으며, 자신을 치료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루이스는 정반대의 해법을 제시한다. 구원의 열쇠는 기꺼이 항복하고, 회개하며, 심지어 그리스도의 성품과 대립되는 모든 것에 대해 죽고자 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반역자들이다. 따라서 출발점은 우리의 무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직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 적의 영토에서 빠져나온 뒤에 하나님의 진영으로 귀순해야 한다.

 

탈출로에는 지뢰, 철조망, 포탄의 파편들이 널려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중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과정은 다음 세계에서도 이어질 것이다. 우리의 지휘관께서는 이 길 혹은 다른 길, 이생 혹은 다음 생에서도 우리가 그의 명령을 따르기만 한다면 우리를 반드시 귀환시키겠노라고 약속했다.

 

 

 

다시 말해 회개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단순히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다. 이는 사실상 죄인의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자기중심적 기질들을 모두 제거하는 과정이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되찾으려 할 때에 요구하시는 전제 조건이 아니다. 그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변화의 과정이 끝나기 전에 죽는다 해도, 정화의 과정은 무덤을 지나서도 지속될 것이다.

 

 

 

[개인 기도]에서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영혼은 연옥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은가?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 아들아, 사실 너에게서 악취가 나고 네 낡은 의복에서 진흙과 오물이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너를 불쌍히 여기고 있으니 아무도 그런 것들로 너를 비난하지 않고 너를 배척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기쁨에 동참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루이스는 하나님께서 죽음의 순간에 일방적으로 우리를 완전한 존재로 변화시킨다고 믿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충분히 성결케 되고, 변화되며, 완전해질 때까지 이와 같은 성품 형성의 과정에 자유롭게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는 진실로 천국을 즐길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피조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다.

 

타락한 인간은 완전한 회개와 복종을 행할 능력이 없다. 그들은 교만으로 가득하여 겸손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 루이스는 이 점에 있어서 흥미로운 아이러니 하나를 지적한다.

 

오직 나쁜 사람만이 회개할 필요가 있지만, 오직 선한 사람만이 완전하게 완전하게 회개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회개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선하시다. 그러나 그 분은 회개할 필요가 없으시다. 사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존재 안에서 회개와 복종, 죽음을 경험하실 수 없다. 그분은 불변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그분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여기서 바로 루이스는 성육신을 이상적인 해법으로 본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회개자가 되시기 위해 인간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인간의 속성을 받아들이심으로 완전한 겸손 가운데 회개하시고, 복종하시며,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

 

 

 

이는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으로는 하실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속죄가 의미하는 바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해 완전한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행의 모델이나 도덕론에서 주장하듯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완전한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진짜 이유는,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 분이 우리를 통하여 같은 일을 하기 위함이셨다.

 

여기에는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믿음이 수반된다. 속죄는 법적인 형벌의 행위라기보다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속죄를 통해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한 회개를 이루셨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회개와 복종, 그리고 죽음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교만을 극복하시고 완전한 겸손으로 구원에 이르셨다. 완전한 겸손은 영원한 생명에 필요한 유일한 성품이다.

 

 

 

이처럼 구원을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는 변화의 과정으로 구상하는 것은 루이스의 저작에서 되풀이되는 주제이다.

 

그는 우리의 성품 형성과 궁극적인 구원을 가로막는 유일한 것이 내키지 않는 태도라고 못 박았다. 루이스는 구원이 비록 우선적으로는 과정이지만, 결정과 항복을 요구하는 중요한 순간들이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는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 나오는 인상 깊은 장면에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루이스는 자기 어깨 위에 놓인 빨간 작은 도마뱀의 간섭 때문에 천국 생활에서 주눅이 든 한 혼령을 그리고 있다. (욕망을 상징하는)이 도마뱀은 그의 귀에 대고 절망적인 말들을 속삭인다.

 

도마뱀은 그에게 자기가 없이는 행복하게 살지 못할 뿐 아니라, 더 이상 살 수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 천사가 나타나 도마뱀을 침묵하게 하자고 제안한다. 처음에 그 혼령은 동의한다. 그러다 그는 천사의 그 말이 도마뱀을 없애자는 말임을 알게 된다.

 

그러자 혼령 뒤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도마뱀을 죽여야 할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소. 어쩌면 내가 저 녀석을 잘 다룰 수도 있을 것 같소. 나는 지금 당장 죽이는 것보다는 찬찬히 두고 지켜보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천사는 그에게 그런 점진적인 과정은 이러한 경우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 설득한다. 천사는 다음과 같은 방안을 내놓는다.

 

나는 네 의지가 없이는 저 녀석을 죽일 수가 없네. 허락해 줄 수 있겠나?” 결국, 극적인 갈등을 거친 다음 그 혼령은 천사에게 도마뱀을 죽이도록 허락한다. 천사가 일을 수행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 도마뱀이 눈부신 종마로 변신한 것이었다. 또한 그 혼령 역시 화려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품위 있는 사람으로 변신하여 그 말을 타고 천국의 영광으로 임하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내놓는다.

 

그 어느 것도, 가장 좋고 가장 고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 있는 그대로 나아갈 수 없다. 그 어느 것도, 가장 저열하고 가장 상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죽음에 굴복한다면 다시 부활할 수 없다. 욕망은 그것이 죽었을 때 떠오를 갈망의 풍부함과 에너지에 비교하면 가난하고 빈약한 불평의 하소연이다.”

 

 

 

이는 마치 죄가 그 매혹적인 약속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궁극적인 파괴와 비참함을 대표하듯이 참된 성품 형성은 우리의 궁극적인 만족과 성취를 대표한다는 중대한 원리를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가 천국을 누리려면, 완전한 도덕적 변화는 타협할 수 없는 선행조건이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Mere Theology] 책 Ch4. 를 보면 이 둘의 신학을 비교해 둔 부분이 나온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신학 여정은 내가 신학을 바라보는 여정과 흡사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약 13년 전,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 등을 보면서 모든 세상이 다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희열과 기쁨에 가득찼던 시절이 있었다.  실제로 죽음을 경험하면서 [헤아려본 슬픔]과 같은 반응이 나오는 순간이 있었다.

 

 

 

존 비버슬루스(John Beversluis)의 논평

 

"[헤아려 본 슬픔]은 고통스러운 책이다. 그것은 이 책이 고통, 죽음, 위태로운 신앙을 다루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루이스가 그동안 반드시 대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 질문, 그의 이전 신앙에 결정적일 정도로 중요했던 그 질문에 대해 반응도 없고, 대답도 없는 상태로 남겨진,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재발견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이성으로 모든 것이 다 설명될 것 같았던 계몽주의적 세계관이 좀 더 실존주의적이고, 경험론적인 방향으로 인식을 전환한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루이스가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 보기 전에 썼던 [순전한 기독교]는 내 인생을 바꿔 놓을 만큼 훌륭했지만, 사랑을 경험하고 나서 썼던 [네 가지 사랑]은 나를 전율하게 했고, 루이스가 고통을 합리주의로 적절히 버무려 놨던 [고통의 문제]는 내 신앙을 바꿔 놓을 만큼 훌륭했지만, 그가 고통을 영혼 깊숙한 곳까지 경험하고 나서 썼던 [헤아려본 슬픔]은 나의 영혼을 움직였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지닌 역설적인 면모는 쟈크 엘룰의 세계관처럼 이율배반적인 우리들의 삶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굉장한 힘이 숨어 있다.

 

실제로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나면 그와 같이 '설명되지 않는', 그러나 너무도 생생한 '실존적 신학'이 내 삶에 들어오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을 활용한 논리 정연한 '신학'이 부정되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전의 루이스도 이후의 루이스도 모두 존중 받아야 하며 실존과 이성이 함께 어우러져서 궁극적으로 온전한 빛 되신 하나님을 보게 될 날을 고대해야 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담이지만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를 보면 칼빈주의적 세계관과 마틴 루터의 이율배반적 세계관이 서로 대비되어 등장한다. 낸시 피어시의 [완전한 진리]를 읽을 때 느끼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전율은 대단하다. 세상을 승리할 것만 같은 십자가의 힘에 전율한다. 그러나, 실존적이고 경험적인 삶의 무대에서 책의 메시지는 쉽사리 발현되지 않는다. 그 때 우리는 마틴 루터 또는 쟈크 엘룰의 메시지를 떠올리게 된다. 이율배반적이고, 역설적인 세상 속에서의 삶을 감내해야 하는 우리의 삶은 새로운 세계관을 요구할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배척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되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매꿔줄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알리스터 맥그라스 책을 보다가 둘을 짧게 비교한 부분이 나오네요. 흥미로운 내용이라 발췌해 봅니다.

 

루이스는 허버트와 비슷하게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확고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루이스가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지배적인 이미지는 조명의 이미지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은 빛으로 세상을 밟게 비추고 인간의 인지 능력을 바꾸어 주는 태양과 같다.

 

따라서 하나님을 인간 정신에 빛을 비추어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지적인 태양이라고 생각하는(Andrew Walker, 'Scripture, Revelation and Platonism in C.S Lewis'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55(2002), 19~35 page 보기) 루이스의 성향이 상당히 플라톤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비판이 아니다. (루이스의 신학적 지침 중의 하나이자,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발견되는 기독교적 플라톤주의를 알려면, Philip Cary, Augustine's Invention of the Inner Self: The Legacy of a Christian Platonis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63~76rpage 보기)

 

 

 

루이스가 인간이 더 큰 실재에 참여할 때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이러한 인식 방법을 선호했던 많은 낭만주의 저자들의 선호 성향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움(Sehnsucht)이라는 낭만주의 개념에 대한 관심이 그의 저작 곳곳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루이스의 초기 소네트 "정오의 강렬함"(Noon's Intensity)은 이런 이미지가 특히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그는 하나님을 "모든 것을 황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적 광선"을 비추는 태양으로 묘사한다.

(C.S Lewis, Collected Poems (London: HarperCollins, 1994), 128쪽. 이에 대한 논평을 알고 싶으면 Don W. King, 'Topical Poems: Lewis 'Post-Conversion Poetry' in C.S Lewis : An Examined Life, edited by Bruce L. Edwards (Westport, CT: Praeger, 2007), 292~293쪽 보기)

 

이 소네트에서 조명이 본질 자체를 바꾸는지 아니면 본질에 대한 인간의 인식만 바꾸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루이스의 지배적인 사상은 인간의 관점이 거룩하게 바뀐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루이스의 관점은 허버트의 관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허버트는 실재와 인간 인식의 변화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두 가지 모두 치유하고 고치는 "팅크"(tincutre, 알콜에 혼합하여 약제로 쓰는 물질)로서의 복음에 의존하고 있다고 본다.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성경을 볼 때 행간을 보지 않고, 편협하고 경직된 해석을 하다 보면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가지고 하나님의 속성과는 전혀 다른 태도/행동/가치관을 설파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누가복음 14장을 해석할 때 예수님의 성품과 전인적 속성을 잘 염두에 두면서 읽는다면 엉뚱한 해석적 오류를 범하지 않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14장]에 대해 알아봅시다.

 

여기서 예수는 어느 종교 지도자의 집에서 '일요일 저녁 식사'를 들고 계신다.

 

주인이 친척들과 부유한 이웃들만 초대한 것을 보시고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12~14절)

 

이 말씀은 당신의 친척들이 어떤 이들인가에 따라 당장 당신이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될 수 있다!

 

그들을 저녁에 초대하지 말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이 친척들을 저녁식사에 청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님을 굳이 밝힐 필요가 있을까? 비록 표현상으로는 분명히 그렇게 돼 있지만 말이다.

 

만일 그런 뜻이라면 우리 중 기뻐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머니나 삼촌이나 이모나 경제적으로 넉넉한 이웃을 저녁식사에 부르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일이 된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에 달려 있다.

 

그 분은 단지 특정한 사건을 기회로 삼아, 도로 갚을 능력이 있는 넉넉한 이들과는 식사를 함께 하면서 정작 가난한 이들은 무시하는 세간의 관행을 바로잡아 주시는 것 뿐이다.

 

그 분은 우리에게 피차 주거니받거니 하는 작은 교제권을 벗어나 어려운 이들을 대접함으로써 보다 넓은 천국 통치의 세계로 들어갈 것을 명백히 명하고 계신다.

 

그 세계는 누구와 저녁을 함께 먹든 그것과 상관 없이 우리의 사고와 마음이 새롭게 변하는 곳이다.

 

by 달라스 윌라드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