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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는 순수한 주요우울장애로 보긴 어려울 것입니다. 인격장애 수준의 문제를 동반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삶이 순탄하지 않았으며 어린 시절 애착이 부실했다는 점은 틀림 없어 보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는 전쟁터에 뛰어들어 취재를 하거나 아프리카에 맹수를 사냥하러 가는 등 매우 활동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노년기에 그는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았다.

우울증을 악화시킨 원인 중 하나가 고혈압 약으로 복용하던 레서핀이었다.

이 약은 가끔 우울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투약을 중단한 것은 증상이 꽤 심해진 후였다. 헤밍웨이는 유명한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에 가명으로 입원했다.

 

그 후 일단 퇴원은 했지만 또다시 피해망상을 동반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이 강해져 아내는 그를 메이요 클리닉에 다시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비행기 프로펠러에 달려들려고 하는 등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결국 가까운 병원에 긴급히 실려가 전기충격치료를 받았다.

그 후 그는 회복된 듯 보였는데, 사실은 다 나은 것처럼 행동한 것이었다.

퇴원하고 얼마 안 되어 그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어느 이른 새벽에 산탄총으로 자살했다.

-[선생님, 저 우울증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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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라르는 니체와 하이데거 그리고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 등에서 발견되는 과도하고 급진적이고 위험한 '해체'보다는 인류 문명의 오래된 '축적된' 지식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다. 

해체(deconstruction)라는 말은 파괴(destruction)뿐 아니라 건설(construction)도 파함한다. 이 데리다의 해체라는 말은 하이데거가 말한 철학적 사유의

'새로운 시작'(andere Anfang)을 연상케 한다.​

​......

 

 

아카데미 프랑세즈 '불멸의 40인'에 속하는 또 다른 학자인 미셸 세르(Michel Serres)는 2005년 지라르가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정회원으로 선출되었을 때 했던 수락연설에 대한 답변에서 그를 '인문학의 새로운 다윈'(nouveau Darwin des sciences humaines)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어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인문학의 새로운 다윈"이란 제목으로 지라르의 학문적 여정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지라르는 '기독교의 헤겔'이나 '인문학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라르는 다른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과 함께 논의를 해나가면서도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독창적인 연구를 지속했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가 해독하려고 했던 신화의 수수께끼를 마침내 풀었고, '문화의 기원'을 희생양 메커니즘 속에서 해명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지라르는 문화의 기원을 해독한 '인문학의 다윈'이요, 문명사적으로 유대-기독교 전통을 다시금 비판적으로 변증하는 '기독교의 헤겔'과 같은 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지라르의 문명이론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 이후의 새로운 거대담론을 제시한다. 유대-기독교적 전통에 대한 진지한 연구로 인해 때때로 스캔들로 인식되어졌지만, 그렇다고 그가 항상 고립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66년에 지라르 자신의 주도로 존스 홉킨스대학에서 열린 '비평언어와 인간과학'(The Language of Criticism and the Sciences of Man)이라는 제목의 학술대회에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와 자크 라캉(Jacques Lacan),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루시엥 골드만(Lucien Goldmann) 등이 참여했다.

 

이 대회는 미국에서 프랑스 철학과 이론을 유행시킨 분수령이 되었으며, 데리다도 이 대회를 출발점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가 여기에서 발표한[인간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그리고 놀이](La structure, le signe et le jeu dans le discours des sciences humaines)는 해체주의 철학의 고전적 텍스트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학술대회의 논문들은 [비평언어와 인간과학:구조주의 논쟁]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에서도 당시 이 학술대회를 조직한 주도적인 인물로서 지라르를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미 1961년, 자신의 모방적 욕망이론과 희생제의적 폭력과 박해에 대한 연구 성과로 출판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을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라르는 자신을 '구조주의자' 혹은 '후기구조주의자'로 분류하는 것에 대해 용감하게 저항했으며, 기존의 아카데믹한 영역들을 기꺼이 넘나들고자 했다.

 

그는 방대한 독서를 통해서 인간과학(les science de l'homme)의 많은 영역들, 곧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신화와 종교의 영역들까지도 폭넓게 섭렵하였다.

-[르네 지라르와 현대 사상가들의 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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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아니라 에밀 크레펠린이라고 하는 학자도 많다.

 

정신분석학은 일시적 현상일 뿐이고, ​크레펠린의 정신병 분류 체계는 프로이트주의보다 먼저 이룩되었을 뿐 아니라 또 그 뒤까지도 이어졌다는 것이다.


​1890년 프로이트가 빈에서 개업할 무렵, 서른네 살의 내과 의사였던 크레펠린이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정신의학 교수직을 맡는다.

 

크레펠린은 재직하는 동안 여러 정신병 증상에 관심을 갖게 된다.

크레펠린은 레지던트들과 함께 병원에 오는 환자마다 한 장씩 카드를 만들어 증상과 1차 진단을 적어 넣고 각 카드를 '진단 상자'에 넣었다.

 

 

 

​새로운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진단을 수정할 때마다 환자 카드를 상장에서 꺼내 바뀐 내용을 추가했다.

 

환자가 퇴원할 때에는 기질과 최종 진단을 기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카드가 수백 장이 모이자 크레펠린은 휴가를 내고 이것들을 검토했다.

"이런 방식으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어떤 진단이 부정확한지, 왜 이런 오류를 범하게 되었는지를 볼 수 있었다." 크레펠린은 이렇게 적었다.

환자의 증상과 진단을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일이 오늘날에야 특별할 것 없어 보이겠지만 크레펠린 이전에는 ​정신병을 이렇게 철저하게 관찰하고 분류하려는 시도가 아예 없었다.

 

(사실 예외로 점성학자들의 작업이 있긴 하다. 계몽주의 시대에 점성학자들은 의학 기록을 아주 꼼꼼하게 기록했는데 천체의 정렬에 따라 증상을 도표로 만들어 그 상관관계를 밝혀서 진단과 치료에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기록 덕에 체계적 관찰보다 직관에 의존하던 의사들보다 점성학자들이 병의 진행을 오히려 더 잘 예측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점성학자가 의사보다 더 잘 맞는 약을 내어줄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체계 없이 자의적으로 진단이 내려지곤 했다.

 

 

크레펠린이 이런 자료들을 모은 까닭은 증상을 구분해 각 정신병의 특징이 되는 증상 모둠을 확인하고 병의 발전 경과를 그려보기 위해서였다.

 

(정신병이 의학적 병인지 사회심리적 '적응' 문제인지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했던) 프로이트와 달리 ​크레펠린은 정신의학은 의학의 하위 분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서장애를 홍역이나 폐결핵처럼 구분해서 확인할 수 있는 생물학적 실체라고 보았다.

​크레펠린은 카드에 모은 증상 데이터를 기반으로 삼아 1883년 정신의학 교과서를 출간했다.

 

여러 해를 거치며 여러 차례 수정한 [정신의학 개론(Compendium der Psychiatrie)]은 지금까지 나온 정신의학서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1899년 6차 개정판이 나왔을 무렵에는 정신병 분류의 기준이 되었다.

​정신분석학이 크레펠린의 생물학적 정신의학을 주변부로 몰아낸 20세기 중반에조차 크레펠린 체제와 프로이트 체제가 나란히 공존했다.

1952년 DSM 초판이 발행되었을 때에는 병들을 질병 모둠에 따라 여러 범주로 나누었다.

 

크레펠린의 19세기 정신의학 교과서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병을 설명하는 용어는 대체로 정신분석학적이었다. 그래서 ​DSM 초기 두 판에는 의학과 정신분석학 용어 체계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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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스스로 불안을 조절하기 위해 약물에 크게 의존했다.

프로이트의 초기 학술 논문 가운데 여섯 편은 코카인의 효능에 관한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1880년대부터 거의 10년동안 규칙적으로 코카인을 투여했다.

"최근에 심한 우울증이 왔을 때 다시 코카인을 썼소. 놀랍게도 적은 양으로도 기분이 최고로 좋아졌어요. ​지금은 이 마법의 물질을 칭송하는 글을 쓰려 참고 문헌을 모으는 중이오."

1884년 아내에게 보낸 편지다. 프로이트는 코카인의 의학적 특성을 연구하여 명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코카인이 커피 정도의 중독성 밖에는 없다고 생각해서 예민한 신경, 우울, 소화불량, 모르핀 중독 등 모든 병의 치료제로 자기 자신과 다른 환자들에게 처방했다.

 

프로이트는 코카인을 "마법의 약"이라고 불렀다. ​"나는 우울증이나 소화불량이 올 때 정기적으로 아주 조금씩 흡입하는데 효과가 탁월하다."

 

파리에 있는 스승 장마르탱 샤르코의 살롱 모임에 참석할 때도 사회불안을 달래기 위해 코카인의 힘을 빌렸다. 프로이트의 코카인 사랑은 자신이 코카인을 처방한 절친한 친구가 치명적인 중독 상태가 되었을 때에야 수그러들었다.

 

그렇지만 ​프로이트는 코카인 직접 경험을 통해 일부 정신질환은 뇌에 물리적 원인이 있다는 확신을 굳게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 의학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프로이트는 후기 작업 덕에 정신병은 무의식의 심리적 갈등에서 나온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는 현대 정신역학 치료법의 선구자로 생각되지만, 또 한편으로 ​초기에 코카인 관련 연구를 썼기 때문에 정신병은 물리적, 화학적 기능이상에 따른 것이므로 약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보는 생물학적 정신의학의 선구자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현대 정신약리학 역사를 훑어보면 프로이트의 코카인 실험처럼 우발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지난 60년 동안에 상업적 성공을 거둔 항불안제나 항우울제 대부분이 우연히 발견되었거나, 본디는 결핵, 수술 쇼크, 알레르기 치료약, 살충제, 페니실린 보존제, 염료, 살균제, 로켓 연료 등등 불안이나 우울과 전혀 상관없는 용도로 개발된 물질이었다.

P.S: 프로이트는 자기가 니코틴 중독이라는 것도 인정했다. ​거의 평생 동안 시가를 하루에 스무 대 이상 피웠고 결국 60대에 구강암에 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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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은 자기 인생의 수십 년을 위장병 때문에 누워 보냈다.

1865년에 다윈은 자기가 거의 30년 동안 앓아온 여러 증상을 열거하는 처절한 편지를 존 채프먼이라는 의사에게 보냈다.

​나이 쉰 여섯에서 쉰일곱. 25년 동안 밤낮으로 극심하게 발잘적으로 속이 부글거림. 이따금 구토를 하고 구토가 몇 달 동안 지속된 일이 두 차례 있었음. 몸이 떨리고 히스테리적으로 울음이 나고 죽을 것 같은 기분이나 반쯤 기절한 상태가 되어 구토가 나오며 흐린 색 소변이 다량 나옴. 현재는 귀울림, 몸이 붕뜬 기분, 시야가 흐려지고 구토가 나옴... E[에마 다윈, 아내]가 곁을 떠나면 초조함.

​이 목록이 적힌 증상의 전부가 아니다. ​다른 의사가 권해서 다윈은 1849년 7월1일부터 1855년 1월 16일까지 '건강 일기'를 썼다.

​수십 쪽에 달하는 이 일기에는 만성피로, 심한 복통, 배 속에 가스가 참, 잦은 구토, 현기증(다우니은 "머리가 수영한다"고 표현함), 떨림, 불면, 발진, 습진, 종기, 가슴 두근거림, 가슴 통증, 우울 등의 증상이 나열되어 있다.

 

 

다윈은 자기 아버지부터 시작해 수십 명의 의사를 만나보았지만 아무도 병을 낫게 해주지 못해 좌절했다.

 

채프먼 박사에게 편지를 썼을 때에는 이미 지난 수십 년의 대부분 시간을 환자의 몸으로​ 집 안에서만 지내야 했다.

(그 동안에 영웅적으로 분투하여 [종의 기원]을 썼다) 일기와 편지를 바탕으로 다윈은 스물여덟 살 이래로 낮 시간의 3분의 1은 토하거나 침대에 누워서 보냈다고 말할 수 있다.

채프먼은 이런 저런 불안증 때문에 "나가 떨어진" 저명한 당대 지식인 여럿을 치료했다. 채프먼은 자기가 "정신이 매우 발달하고 교양이 높은 예민한 신경증 환자"를 전문으로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미묘한 정신적 영향에 얽히고 지배 받아서 그 정신적 영향이 신체적 병과 어떤 강도로 어떻게 관련되는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고 했다.


채프먼은 신경과 관련된 거의 모든 병에 ​척추에 얼음을 가져다 대는 치료를 처방했다.


​채프먼은 1865년 5월 말 다윈의 시골집을 찾아왔고 다윈은 그 뒤 몇 달 동안 날마다 몇 시간씩 얼음 속에 들어갔다. 다윈은 [사육 재배에 의한 동식물의 변화]의 핵심 부분을 척추에 얼음 주머니를 두르고 썼다.

 

 


 

치료는 효과가 없었다. "끝없는 구토"가 계속되었다. ​다윈과 가족들이 채프먼을 좋아하긴 했으나("우리는 채프먼 박사를 너무 좋아해서, 얼음이 효과가 없어서 실망한 한편 박사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다윈의 아내가 쓴 글이다.) 7월에는 치료를 포기하고 의사를 런던으로 돌려보냈다.

다윈 치료에 실패한 의사는 채프먼 전에도 있었고 후에도 있었다. 다윈의 일기와 편지를 읽어보면 놀랍게도 1836년 비글호 항해에서 돌아온 뒤에 거의 언제나 쇠약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윈한테 정확히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두고 150년 동안 열띤 의학적 토론이 벌어졌다. 다윈 생전과 후에 거론된 병명은 다음과 같다. ​아메바 감염, 맹장염, 십이지장 궤양, 소화기 궤양, 편두통, 만성 담낭염, '소모성 간염', 말라리아, 카타르성 소화불량, 비소 중독, 포르피린증, 기면증, '당뇨병 유발 인슐린과다증', 통풍, '억눌린 통풍', 만성 브루셀라증(​비글호가 방문했던 아르헨티나의 풍토병), ​샤가스병(​아르헨티나에서 벌레에 물려 감염되었을 수 있음), ​다윈이 실험하던 비둘기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 비글호에서 겪은 장기 배멀미로 인한 한볍증, '눈의 굴절 이상' 등. ​방금 나는 2005년 영국 학술지에 발표된 [​다윈의 병이 밝혀지다] ​라는 글을 읽었다.

 

이 글에서는 다윈의 병이 유당불내증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다윈의 삶을 찬찬히 읽어보면 다윈이 가장 심하게 앓을 때마다 ​불안이 병을 재촉한 원인으로 등장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정신의학자이자 역사가인 랠프 콜프는 1970년대에 입수 가능한 다윈의 일기, 편지, 의료 기록 등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콜프는 다윈의 병증이 가장 심한 기간이 진화론 연구나 가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시기와 일치했다고 한다.(결혼식을 앞두고는 "이틀 밤낮 동안 심한 두통이 계속되어서 과연 내가 결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1997년 <미국 의학협회 저널>에 실린 [찰스 다윈과 공황장애]라는 논문의 저자들은 다윈 스스로 설명하는 증상을 바탕으로 하면 DSM-4 의 '광장공포증을 동반한 공황장애' 진단을 쉽게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다윈은 이 병과 관련된 열 세 가지 증상 중에서 아홉 가지 증상을 보였다.(진단을 받으려면 네 가지만 충족시키면 된다.)

4년 9개월 동안 계속된 비글호 항해는 다윈이 생물학 연구를 펼치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경험이었다.

비글호 출항 전에 항구에서 몇 달을 보내면서 "생애 최악으로 비참한 시간"을 보냈다고 노년에 다윈은 기록했다. 평생 끔찍한 ​신체적 고통에 시달린 다윈이 그렇게 말했다니 그 때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기에 그랬을까 싶다.

 

​"가족과 친구들 곁을 오랫동안 떠난다는 생각에 울적했고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암울하게 보였다. 게다가 심장이 두근거리고 아파서 괴로웠다. 젊고 무지한데 의학에 관한 수박 겉핥기 지식은 있어서 나는 내가 심장병에 걸린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다윈은 현기증과 손끝이 따끔거리는 증상도 경험했다. 모두 불안의 증상이고 특히 공황장애로 인한 과호흡 때문에 일어난다.

​다윈은 겨우 우울감을 극복하고 항해를 떠났다. 항해하는 동안 ​폐소 공포증('끝없는 두려움'에 빠지게 했다) 과 심한 배멀미​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대체로 건강을 유지했고 필생의 과업을 달성하고 명성을 누릴 토대가 될 생물학적 증거들을 수집했다. 그렇지만 1836년 10월 2일 비글호가 팰머스로 돌아온 뒤 다윈은 평생 단 한 차례도 영국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장장 거의 5년 동안 세계 여행을 하고 돌아온 뒤에 다윈의 지리적 활동 영역은 점점 축소되었다.

​다윈은 "나는 조금만 흥분해도 위장이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어디든 가기가 겁이 난다."고 사촌에게 말했다.

[종의 기원]을 쓸 수 있었다는 게 기적일 지경이다. ​결혼 직후에 다윈은 진화론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그 때 처음으로 '주기적 구토'를 겪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토하고 몇 주 동안, 심할 때에는 몇 년 동안 침대 신세를 져야 하는 이런 기간이 그 뒤에도 계속 찾아온다.

흥분하거나 사람들과 어울려야 할 일이 있으면 신체적 동요를 일으켰다.

파티나 모임이 있으면 불안 때문에 '쓰러졌고', '격한 떨림과 구토 발작'이 일어났다.("그래서 여러 해 동안 디너파티를 모조리 포기해야 했다."고 다윈은 적었다.)

다윈은 진입로로 들어오는 손님들을 집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볼 수 있도록 서재 창밖에 거울을 설치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거나 숨을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다윈은 채프먼 박사의 얼음 치료 뿐 아니라 유명한 의사 제임스 걸리(제임스 걸리 박사는 그 무렵에 앨프리드 테니슨, 토머스 칼라일, 찰스 디킨스도 치료했다.)의 '물 치료'도 시도했고, 운동도 했고, 무당분 식사, 브랜디와 '인도산 에일', 조제약 수십 종도 먹어보고, 내부 장기를 자극하기 위해 금속판을 상체에 붙이고 놋쇠와 아연선으로 만든 '전기 사슬'로 전기 충격을 가하고, 식초에 온 몸을 담가보기도 했다.

 

심리적 효과 때문인지 다른 데로 정신이 분산되었기 때문인지 실제로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부는 한동안 효과가 있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병이 재발했다. 런던에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일 등으로 인해 규칙적인 일상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며칠에서 몇 주 동안 누워 지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매우 심한 구토'가 시작되었다.

 

무슨 일을 하려 하든, 특히 다윈이 '내 지긋지긋한 책'이라고 부른 [종의 기원] 작업을 하려면 몇 달씩은 앓았다. "몸이 좋지 않았어. 진저리나는 교정쇄 때문에 이틀 동안 심하게 토했거든."


1859년 초 교정을 보는 동안 친구에게 보낸 편지다. 다윈은 서재에서 토할 수 있게 커튼 뒤에 세면대를 설치하기도 했다.


1859년 10월 1일 구토에 시달리면서도 교정을 마쳤다. [종의 기원]을 붙들고 씨름한 열다섯 달 동안 불편을 느끼지 않은 상태로 보낸 가장 긴 시간이 20분이 채 안 될 정도로 끝없이 위장장애에 시달렸다.


20년 넘는 준비 기간을 거쳐 [종의 기원]이 1859년 11월 마침내 출간 되었을 때 다윈은 물 치료를 받으러 요크셔에 있는 온천에 가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 속은 요동 쳤고 온 몸에 발진이 돋았다.


"최근에 많이 안 좋았다. 끔찍한 '위기'를 겪었다. 상피병에 걸린 것처럼 한쪽 다리가 부었고 눈이 거의 감겼고 온 몸이 발진과 화농성 부스럼으로 덮였다.


..............지옥에 사는 것 같았다.

다윈의 병은 책 출간 뒤에도 낫지 않았다. "아마 나는 날마다, 매 시간마다 불편하다고 불평하고 신음하면서 무덤까지 갈 것 같다."고 1860년에 썼다.

 

어떤 사람들은 다윈의 증상이 심하고 기간이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을 들어 다윈이 세균 감염이나 아니면 다른 신체적 병에 걸렸었다고 주장한다.("찰스가 얼마나 아픈지 말씀드려야겠네요. 여섯 달 동안 거의 날마다 토했답니다." 아내가 1864년 5월 친구에게 보낸 편지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을 들어 반박할 수 있다. ​다윈이 일을 멈추고 스코틀랜드 고지대나 북웨일스로 여행을 갔을 때에는 건강이 다시 좋아졌다.

​찰스는 너무 쉽게 불안해해. 알잖아.

-​[애마 다윈이 친구에게(1851)-

내가 찰스 다윈의 위장에 지나친 관심을 쏟는 것처럼 보일 것도 같은데 아마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공포에 대한 현대적 연구를 촉발했고, 공포가 구체적인 생리 반응(특히 소화기의 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로 그 사람이 신경증적 위장에 극심하게 시달렸다는 사실이 참 얄궂기도 하고 또 그럴싸하다 싶기도 하다.

다윈은 아내 에마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문제도 있었다. "당신이 없으면 나는 아프고 너무나 쓸쓸해요." 다윈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다. "아 엄마, 당신과 같이 있고 싶어요. 당신이 보호해 주어야 안전한 느낌이 들어요." 이런 편지도 보냈다.

엄마라고?

프로이트주의자들이 다윈에게 ​의존성 문제 ​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가 있다고 주장한 것도 납득이 간다. 여기서 내가 아내에게 부담이 될 정도로 의존하고 그 전에는 부모에게 의존했다는 사실에 근거해 W 박사가 나에게 ​의존성 인격장애​가 있다는 진단을 내렸음을 밝혀야 할 것 같다.

 

의존성 인격장애가 있는 사람은 DSM-5에 따르면 다른 사람(주로 사랑하는 사람이나 양육자)에게 심리적으로 지나치게 의존하고 자신은 무언가 부족하고 무력해서 혼자 힘으로는 해나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등의 특징이 있다.

마지막으로 다윈이 수십 년 동안 끝없이 구토를 했다는 점도 나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다. ​구토 공포증이 있는 나 같은 사람은 그 사실에서 병적인 매혹을 느낀다. ​다윈은 불안감 때문에 구토를 했지만 구토가 불안감을 더 높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다윈은 그렇게 토하면서도 일흔세 살까지 살아 당시 기준으로는 장수했다.

​다윈이 이렇듯 심한 위장병을 안고도 그렇게 위대한 성취를 해냈다는 사실을 보면, 내가 한 번 구토를 하더라도, 아니 다섯 번 하더라도, 아니 하루에 다섯 번, 아니면 다윈처럼 수 년 동안 하루에 다섯 번 구토를 하더라도 죽지 않을 뿐 아니라 뭔가를 이루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안심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이 ​구토공포증이 없는 사람이라면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할 것이다.

내 정신병의 핵심에 있는 불합리한 강박을 드러내는 예이다. 이해가 안 가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지만 당신이 구토공포증 환자라면, 그렇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거울처럼 또렷하게 이해할 것이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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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아들러는 1870년 2월 7일 빈에서 태어나 삶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는 젊은 의사 시절에도 자신의 의학적 지식을 사회 문제와 교육 문제에 적용했다.

1902년에 프로이트가 자택에서 여는 토론회에 아들러와 다른 세 사람을 초대했다. 이 모임이 빈 정신분석학회로 발전했다. 1910년에 아들러는 이 학회의 회장이 되었고, 학회지의 공동 편집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1911년에 아들러와 프로이트는 서로의 견해가 더 이상 조화를 이룰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아들러는 개인심리학학회를 결성하고 학회지를 만들었다.

 

 

그의 학회는 유럽 전역에 34개의 지부가 생겨날 정도로 확장되었고, 특히 독일에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아들러는 심리학적 통찰력을 실질적으로 적용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에 광범위한 강연 활동을 펼쳤고, 빈에 최초의 아동 상담소를 열었다.

1926년부터 미국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다가 1935년에 미국에 정착했다. 아들러는 강연 여행 중이던 1937년 5월 28일에 스코틀랜드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사망 당시 그는 뉴욕주립대 다운스테이트 의학센터의 전신인 롱아일랜드 의과대학에서 임상 환자의 심리와 대인관계 문제를 다루는 의학적 심리학 (인간의 정신 현상을 이해하고 치료하는 데 있어 심리학과 의학의 관점을 종합하여 해설하는 심리학)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비공식적 담화와 강연은 아들러가 좋아했던 소통 방법이다. 그는 전문가와 학생뿐 아니라 비전문가들에게도 강연을 했다. 100편이 넘는 주요 논문을 썼는데, 그의 저서들과 마찬가지로 이 논문들은 대부분 강의록을 바탕으로 집필되었다.

아들러는 민주적이고 친근하며 친절한 사람이었고, 원예를 비롯해 비공식적 친교와 음악, 예술을 사랑했다.

 

결혼하여 네 명의 아이를 두었는데, 그중 두명은 부친의 뒤를 이어 현재 뉴욕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정력적이었던 아들러는 일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는 동시에 삶을 즐겼다.

[왜 신경증에 걸릴까]의 편집자로 아들러를 잘 알고 있던 필리프 메레는 그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나를 비롯해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아들러가 위대한 인물이라고 느꼈다. 프로이트나 융만큼 폭넓고 깊은 교양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목표와 관련된 분야는 매우 심도 있게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들러는 인간 본성을 매우 심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위대한 정신치료 의사들보다 더 도덕주의자이지만 도덕적 신랄함은 없었다.

 

현역 의사로 심리학에 입문한 아들러는 사람들의 장애를 치료하거나, 부분적 불치일 경우 보상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했다.

 

프로이트나 융이 일부 어떤 면에서는 더 위대하고 아들러와 달리 저술에 뛰어났지만, 나는 환자를 진단하는 시선은 아들러가 이 두 사람보다 더 예리했다고 생각한다. 아들러는 놀라울 정도로 즉흥적이었고, 가장 훌륭했던 강의 대부분이 사전 준비 없이 이루어졌다."

- [왜 신경증에 걸릴까]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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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94년 시작된 '폭력과 종교에 관한 학술대회'는 지라르 이론에 영향을 받은 여러 학문 분야의 학자들을 망라한 국제 학술대회다.


"문화의 기원과 그 유지에 있어서 폭력과 종교의 관계를 조사, 비판하고 모방적 모델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 이 학술대회는 해마다 강연회를 열고 있으며, [전염: 폭력, 모방, 문화 저널] 이라는 제목의 학회지를 간행하고 있다.


2005년 3월 17일 르네 지라르는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학술원)의 종신회원으로 선출된다.


기존 회원의 유고 시에만 새로운 회원을 뽑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입성은 그의 학문적 여정의 소중한 결산서인 동시에 고국인 프랑스에서 그의 학문적 성과를 결정적으로 인정받게 된 계기가 되었다.

 

 

 


2004년 1월에 사망한 카레신부의 후임으로 선출된 그는 2005년 12월 15일 입회식을 거쳐 종신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지라르의 생애와 관련하여 한 가지 생각해볼 만한 점은 거의 모든 삶의 단계에 있어서 그가 항상 이방인의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아비뇽에 있을 당시 주변의 친구들과 그리 편안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고 밝힌 적이 있으며, 미국에서는 기존의 문화 분석의 틀을 넘어서 독특한 시도를 하는 낯선 유럽인 학자라는 배타적 시선을 견뎌야 했다.


대학 교수를 처음 시작했을 때에도 그는 문학과에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 나중에 인류학을 선택하게 된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 활동하고 싶은 생각도 가졌으나, 고문서 학교 졸업새으로서 자기가 원하는 진로를 개척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그의 사유는 동시대를 주름 잡았던, 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유 경향들과는 여러면에서 동떨어져 있다.


지라르는 그 이름만 들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수많은 학자들에 맞서 홀로 싸움에 임한다.


이 모든 점을 미루어볼 때 지라르가 희생양 이론에 그토록 천착했던 것이 오로지 우연의 소산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그가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프루스트나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위대한 작가들, 욕망의 진실을 말하고 있는 작가들이 한결같이 스스로 예전에 그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가 그 굴레를 벗어나 욕망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된 작가들이었다면, 그 자신은 낯선 자, 이방인으로서 여러 한계와 갈등을 몸소 체험한, 다시 말해 간접적으로 희생양 메커니즘을 삶 속에서 체험한 학자로서 그것의 비밀을 꿰뚫어보게 된 학자가 아니겠는가?

 


르네 지라르의 작품 세계는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해볼 수 있다.


바로 모방 욕망이라는 개념을 문학 작품 분석을 통해 드러내 보였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모방 개념을 인류학적 차원으로 확대시켜, 희생양 메커니즘을 밝혀낸 [폭력과 성스러움], 그리고 기독교를 통한 희생양 메커니즘의 해체를 시도한 그 이후의 저작들, 그중에서도 1999년에 발간된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이 보이노라]가 그것이다.


우리 역시 위의 세 권의 저서를 중심으로 지라르의 이론 전반을 살펴볼 것이다.


그 전에 우선 이 세권을 포함한 지라르의 주요 저작들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961년 그라세 출판사에서 간행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지라르의 첫 번째 저작임과 동시에 그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지라르의 위대한 문학 작품들을 통해 인간의 사유와 활동, 그리고 모든 갈등의 근간에 있는 모방 욕망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주체, 대상, 모델이라는 욕망의 삼각형 모델은 이후에 전개될 그의 전체 이론 체계의 바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욕망의 삼각형 이론은 문학 비평에 있어서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개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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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 기니스의 [소명] 에 나온 이야기로서 정확한 출처는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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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는 20세기 예술의 최정상에 위치한 천재적인 예술가다.


그러나 그는 대인관계 특히 여성과의 관계에서는 탐욕스러운 괴물이었다.


그는 자기를 '미노타우르스'(인간의 몸과 소의 머리를 가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라고 불렀으며, 조각가 지아코메티를 비롯한 친구들은 그를 '괴물'이라고 불렀다.

 

 


피카소는 "내가 죽는 것은 배가 난파하는 것과 같아서, 거대한 배가 침몰할 때처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배와 함께 가라앉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불행하게도 피카소의 말은 옳았다.


1973년에 91세의 나이로 그가 죽은 후 그와 가까웠던 세 명의 인물이 자살했고 - 두 번째 부인 자클린, 초기의 정부 마리 테레즈, 손자 파블리토 등- 여러 명이 정신적인 붕괴를 겪었는데 그 중에는 첫 번째 부인 올가와 가장 유명한 정부인 도라 마르가 포함되어 있다.


이 같은 파괴적인 종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상된 것이었다.


피카소의 어머니는 첫 번째 며느리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나는 어떤 여자라도 내 아들과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 아이는 자기만을 위할 뿐 타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야."

 

 


프랑소와즈 질로는 피카소의 세 번째 정부인데, 그보다 40세 연하로서 그와 함께 살았던 10년의 세월을 [피카소와의 삶](Life with Picasso) 에서 들려준다.


그는 너무나 강렬하게 그녀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그녀는 "그와 함께 있지 않으면 숨을 쉬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고 썼다.


그러나 피카소가 시인한 것처럼 그의 세게에는 오직 두 종류의 여인 - 여신과 신발 흙털개- 이 있을 뿐이었다.


모든 여인은 전자로 시작했다가 조만간 후자로 변하게 마련이었다.


질로 이전의 정부였던 도라 마르는 결국 피카소에게 "당신은 평생 어느 누구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당신은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몰라요" 라고 말했다.


한번은 질로가 그에게 '악마'라고 말하자 피카소는 피우고 있던 담배로 그녀의 뺨을 지졌다. 그리고 손을 떼면서 "아직은 당신을 바라보고 싶어" 라고 그 이유를 말했다. 피카소는 질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내를 바꿀 때마다 이전의 여인은 묻어버려야 해. 그런 식으로 그들을 없애 버리는 거야... 그 여인을 죽이고 그녀와 관련된 과거를 깨끗이 씻어 내는 거지."

 


질로는 이것을 피카소의 '푸른 수염 콤플렉스' (푸른 수염의 사나이는 6명의 아내를 차례로 죽인 동화 속의 잔인한 남자다) 라고 불렀고, 이것이 그의 무신론과 관계가 있음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자신은 니체의 추종자라고 공언했던 피카소는 신은 죽었다고 주장했으며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이다" 라고 중얼거리곤 했다고 한다.


피카소가 창조한 허무주의적인 공허함 속에는 악마적인 힘이 있었으며, 그것이 그로 하여금 계속해서 작품을 만들어 내도록 하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 파블로 피카소는 위대한 화가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임에 틀림없다.


그는 파괴성을 드러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다른 방향을 향한 동경심을 보였다.


가장 뚜렷한 예로, 질로가 그의 모순을 발견하고 놀란 사건이 있었다.


피카소와 같이 생활한 지 3년째 되던 어느 날 그들은 프랑스 남부의 앙티브에 있었는데 갑자기 피카소가 질로를 조그마한 교회로 데리고 가서는 그녀를 앞선 구석진 곳으로 이끌었다.


"여기서 나를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맹세해 주었으면 하오." 하고 피카소가 말했다.


"나 자신이 그 정도로 헌신하길 원하기만 한다면 어디에서나 그렇게 맹세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하필이면 여기서죠?" 라고 질로가 되물었다.


"그저 아무데서나 하는 것보다 여기서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오"라고 그가 말했다.


"여기서든 다른 곳에서든 마찬가지예요"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아니오 글쎄, 물론 그 말이 맞소 다 마찬가지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요. 누가 알겠소. 교회에 뭔가 특별한 게 있을지도 모르지 않소. 모든 걸 좀더 확실하게 해줄 수도 있으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않소?"


그래서 질로는 맹세했고 피카소 또한 맹세를 했으며 그는 만족스로워하는 표정이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피카소의 고집은 일종의 미신이었는가, 아니면 직관이었는가?


피카소가 미신적이고도 운명론적인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질로에게 "모든 사랑은 예정된 기간 동안만 지속될 수 있을 뿐이다." 라고 서글픈 어조로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하루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의 관계가 끝날 날이 하루씩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고 썼다.


다른 한편 그 또한 치유 불가능한 갈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나는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채 죽을 것 같다" 고 말한 적도 있다. 결국 옛날 노래 가사와 같이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면 영원이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그러한 동경은 인간 관계의 연약성 너머를 향한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준거점을 찾는 절규다. 오직 영원한 표준만이 영속적인 사랑을 향한 욕구를 해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무신론자 피카소는 하나님을 부인했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었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교회로 가서 서로에게 사랑을 맹세하며 스스로 책임을 지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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