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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가 행위 구원론자인가?]

 

 

 

책 제목: 루이스와 쉐퍼의 대화

 

92~96PAGE

 

 

 

 

 

루이스는 쉐퍼가 주장한 것처럼 우리가 마치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상태로있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보다 우리는 완전한 겸손으로 우리의 죄악 된 선택들에 대한 영원한 지식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천국을 즐길 수 있는 피조물이 될 것이다.

 

 

 

루이스는 천국을 죄 사함을 받은 자라면 누구나 즐겁게 동참할 수 있는 천상의 디즈니랜드로 제시하기보다, 오직 정화와 적절한 준비를 갖춘 자들만이 천국 도시의 기쁨을 소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최근 읽었던 권영경 교수님의 [위선]이라는 책을 보면 갈라디아서, 로마서에서 바울의 일관된 입장과 사복음서에 제시된 예수님의 메시지는 모두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행위와 은혜는 서로 양자택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는가? 루이스는 속죄론을 그 열쇠로 제시했다.

 

 

 

루이스에 따르면 인간은 심각한 도덕적 수렁에 빠져 있다.

 

사실, 우리가 처한 곤경은 너무 심각해서 단순한 개선안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총체적인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실제적으로 도덕적인 변화를 겪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고통스럽다.

 

 

 

[순전한 기독교]에서 루이스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삶 속에 도덕적 변화를 일으키시려고 끈질기게 일하셨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원한다면 내가 너희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겠다. 너희 자신을 내 손에 맡기는 순간, 나이 목적은 오직 너희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밖의 다른 것은 없다. 너희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으며, 너희는 나를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이 일을 완성할 것임을 명심하여라. 너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떠한 고생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죽음 뒤에 어떠한 상상조차 못할 정화의 과정이 오더라도, 내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너희가 진실로 완전해지기까지 나는 결코 쉬지 않을 것이며, 너희도 쉬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구절을 읽고 루이스의 구원론은 행위를 통해 의로움을 얻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전혀 맞지 않다. 이 구절에서 루이스가 강조하는 것은,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손에 자신을 맡겨 드림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성부의 형상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힘으로는 구원을 결코 이룰 수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거룩함을 위해 그분이 내리시는 처방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 일을 시작하셨고 종국에는 완성하실 거룩하신 의사에게 지속적으로 믿음을 두는 것이다.

 

루이스에게 있어서 믿음은 분명히 신뢰를 수반하고 있으며,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정말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행해야 한다 

 

 

(필자: 아르뱅주의니, 4차원 복음이니 해서 한국 기독교는 행위를 집어 던지고 구원티켓을 획득한 이후 세속에 기반한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예배도 안 빼먹고, 헌금도 잘 하니 신실한 성도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은 성경적인 참 복음이 아니다) 

 

 

루이스가 인간의 의지나 어마어마한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호감을 얻을 수 없으며, 자신을 치료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루이스는 정반대의 해법을 제시한다. 구원의 열쇠는 기꺼이 항복하고, 회개하며, 심지어 그리스도의 성품과 대립되는 모든 것에 대해 죽고자 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반역자들이다. 따라서 출발점은 우리의 무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직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 적의 영토에서 빠져나온 뒤에 하나님의 진영으로 귀순해야 한다.

 

탈출로에는 지뢰, 철조망, 포탄의 파편들이 널려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중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과정은 다음 세계에서도 이어질 것이다. 우리의 지휘관께서는 이 길 혹은 다른 길, 이생 혹은 다음 생에서도 우리가 그의 명령을 따르기만 한다면 우리를 반드시 귀환시키겠노라고 약속했다.

 

 

 

다시 말해 회개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단순히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다. 이는 사실상 죄인의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자기중심적 기질들을 모두 제거하는 과정이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되찾으려 할 때에 요구하시는 전제 조건이 아니다. 그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변화의 과정이 끝나기 전에 죽는다 해도, 정화의 과정은 무덤을 지나서도 지속될 것이다.

 

 

 

[개인 기도]에서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영혼은 연옥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은가?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 아들아, 사실 너에게서 악취가 나고 네 낡은 의복에서 진흙과 오물이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너를 불쌍히 여기고 있으니 아무도 그런 것들로 너를 비난하지 않고 너를 배척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기쁨에 동참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루이스는 하나님께서 죽음의 순간에 일방적으로 우리를 완전한 존재로 변화시킨다고 믿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충분히 성결케 되고, 변화되며, 완전해질 때까지 이와 같은 성품 형성의 과정에 자유롭게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는 진실로 천국을 즐길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피조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다.

 

타락한 인간은 완전한 회개와 복종을 행할 능력이 없다. 그들은 교만으로 가득하여 겸손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 루이스는 이 점에 있어서 흥미로운 아이러니 하나를 지적한다.

 

오직 나쁜 사람만이 회개할 필요가 있지만, 오직 선한 사람만이 완전하게 완전하게 회개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회개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선하시다. 그러나 그 분은 회개할 필요가 없으시다. 사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존재 안에서 회개와 복종, 죽음을 경험하실 수 없다. 그분은 불변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그분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여기서 바로 루이스는 성육신을 이상적인 해법으로 본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회개자가 되시기 위해 인간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인간의 속성을 받아들이심으로 완전한 겸손 가운데 회개하시고, 복종하시며,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

 

 

 

이는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으로는 하실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속죄가 의미하는 바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해 완전한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행의 모델이나 도덕론에서 주장하듯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완전한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진짜 이유는,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 분이 우리를 통하여 같은 일을 하기 위함이셨다.

 

여기에는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믿음이 수반된다. 속죄는 법적인 형벌의 행위라기보다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속죄를 통해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한 회개를 이루셨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회개와 복종, 그리고 죽음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교만을 극복하시고 완전한 겸손으로 구원에 이르셨다. 완전한 겸손은 영원한 생명에 필요한 유일한 성품이다.

 

 

 

이처럼 구원을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는 변화의 과정으로 구상하는 것은 루이스의 저작에서 되풀이되는 주제이다.

 

그는 우리의 성품 형성과 궁극적인 구원을 가로막는 유일한 것이 내키지 않는 태도라고 못 박았다. 루이스는 구원이 비록 우선적으로는 과정이지만, 결정과 항복을 요구하는 중요한 순간들이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는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 나오는 인상 깊은 장면에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루이스는 자기 어깨 위에 놓인 빨간 작은 도마뱀의 간섭 때문에 천국 생활에서 주눅이 든 한 혼령을 그리고 있다. (욕망을 상징하는)이 도마뱀은 그의 귀에 대고 절망적인 말들을 속삭인다.

 

도마뱀은 그에게 자기가 없이는 행복하게 살지 못할 뿐 아니라, 더 이상 살 수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 천사가 나타나 도마뱀을 침묵하게 하자고 제안한다. 처음에 그 혼령은 동의한다. 그러다 그는 천사의 그 말이 도마뱀을 없애자는 말임을 알게 된다.

 

그러자 혼령 뒤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도마뱀을 죽여야 할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소. 어쩌면 내가 저 녀석을 잘 다룰 수도 있을 것 같소. 나는 지금 당장 죽이는 것보다는 찬찬히 두고 지켜보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천사는 그에게 그런 점진적인 과정은 이러한 경우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 설득한다. 천사는 다음과 같은 방안을 내놓는다.

 

나는 네 의지가 없이는 저 녀석을 죽일 수가 없네. 허락해 줄 수 있겠나?” 결국, 극적인 갈등을 거친 다음 그 혼령은 천사에게 도마뱀을 죽이도록 허락한다. 천사가 일을 수행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 도마뱀이 눈부신 종마로 변신한 것이었다. 또한 그 혼령 역시 화려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품위 있는 사람으로 변신하여 그 말을 타고 천국의 영광으로 임하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내놓는다.

 

그 어느 것도, 가장 좋고 가장 고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 있는 그대로 나아갈 수 없다. 그 어느 것도, 가장 저열하고 가장 상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죽음에 굴복한다면 다시 부활할 수 없다. 욕망은 그것이 죽었을 때 떠오를 갈망의 풍부함과 에너지에 비교하면 가난하고 빈약한 불평의 하소연이다.”

 

 

 

이는 마치 죄가 그 매혹적인 약속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궁극적인 파괴와 비참함을 대표하듯이 참된 성품 형성은 우리의 궁극적인 만족과 성취를 대표한다는 중대한 원리를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가 천국을 누리려면, 완전한 도덕적 변화는 타협할 수 없는 선행조건이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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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정치학]에서 존 하워드 요더가 설명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을 휘두른 구절 등은 때론 폭력적인 행동들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근거로 많이 활용되곤 합니다. 다른 성경 강해서와 함께 살펴봐야 할 내용입니다만 존 하워드 요더의 해석이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과 달리 신선한 부분이 있어 발췌해 봅니다.

 

폭력의 정당화로 이 구절이 사용되는 건 위험성이 있으나, 때론 불의한 일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와 확고한 신념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사랑과 정의]를 보면, 성경에 나온'사랑'의 정의는 상당히 파격적이며 존 하워드 요더가 제시하는 내용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진정한 정의,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지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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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의 초창기부터, 예수가 성전에서 채찍을 휘둘렀던 사건은 예수의 생애 중 그리스도인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가장 좋은 선례로 간주되어 왔다.


오래된 번역들은 마치 그 채찍이 상인들을 향한 것처럼 옮김으로써 그런 해석의 여지를 제공해 주었다.


"....그는 그들 모두를 그리고 양과 소들을 성전 바깥으로 내어쫓으셨다.." (벌게이트역을 좇은 흠정역)


독자들은 "그들 모두"를 돈 바꾸는 자들과 가축을 판매하던 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소지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 초기부터, 이 본문을 신중하게 연구한 학자들은 이런 해석을 배제하고 현대의 새로운 번역들이 채택한 입장을 옹호했다.


"... 모든 짐승을, 양과 소 모두, 성전 바깥으로 내어 쫓으셨다..." (Today's English Version, Moffatt, Goodspeed, the Zurich Bible, 그리고 McGregor, Temple, Plummer, Strachan 등의 주석가들)


접속사 '테 카이'(te kai)의 통상적 기능은 새로운 목록을 시작하는 것이지 "그들 모두" 에서 이미 시작된 목록을 계속 이어 주는 것이 아니다.


문법적으로 "그들 모두"(pantas)는 선행하는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 혹은 뒤따르는 "양과 소" 중 어느 것과도 연결될 수 있다.


또한 "내어쫓으시며"(exebalen)는 결코 폭력을 상정하지 않는다. 신약 성경 다른 곳에서 이 단어는 단지 "내어 보낸다"는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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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터 맥그라스의 [Mere Theology] 책 Ch4. 를 보면 이 둘의 신학을 비교해 둔 부분이 나온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신학 여정은 내가 신학을 바라보는 여정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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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3년 전,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 등을 보면서 모든 세상이 다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희열과 기쁨에 가득찼던 시절이 있었다.  실제로 죽음을 경험하면서 [헤아려본 슬픔]과 같은 반응이 나오는 순간이 있었다.

 

 

 

존 비버슬루스(John Beversluis)의 논평

 

"[헤아려 본 슬픔]은 고통스러운 책이다. 그것은 이 책이 고통, 죽음, 위태로운 신앙을 다루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루이스가 그동안 반드시 대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 질문, 그의 이전 신앙에 결정적일 정도로 중요했던 그 질문에 대해 반응도 없고, 대답도 없는 상태로 남겨진,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재발견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이성으로 모든 것이 다 설명될 것 같았던 계몽주의적 세계관이 좀 더 실존주의적이고, 경험론적인 방향으로 인식을 전환한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루이스가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 보기 전에 썼던 [순전한 기독교]는 내 인생을 바꿔 놓을 만큼 훌륭했지만, 사랑을 경험하고 나서 썼던 [네 가지 사랑]은 나를 전율하게 했고, 루이스가 고통을 합리주의로 적절히 버무려 놨던 [고통의 문제]는 내 신앙을 바꿔 놓을 만큼 훌륭했지만, 그가 고통을 영혼 깊숙한 곳까지 경험하고 나서 썼던 [헤아려본 슬픔]은 나의 영혼을 움직였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지닌 역설적인 면모는 쟈크 엘룰의 세계관처럼 이율배반적인 우리들의 삶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굉장한 힘이 숨어 있다.

 

실제로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나면 그와 같이 '설명되지 않는', 그러나 너무도 생생한 '실존적 신학'이 내 삶에 들어오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을 활용한 논리 정연한 '신학'이 부정되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전의 루이스도 이후의 루이스도 모두 존중 받아야 하며 실존과 이성이 함께 어우러져서 궁극적으로 온전한 빛 되신 하나님을 보게 될 날을 고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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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를 보면 칼빈주의적 세계관과 마틴 루터의 이율배반적 세계관이 서로 대비되어 등장한다. 낸시 피어시의 [완전한 진리]를 읽을 때 느끼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전율은 대단하다. 세상을 승리할 것만 같은 십자가의 힘에 전율한다. 그러나, 실존적이고 경험적인 삶의 무대에서 책의 메시지는 쉽사리 발현되지 않는다. 그 때 우리는 마틴 루터 또는 쟈크 엘룰의 메시지를 떠올리게 된다. 이율배반적이고, 역설적인 세상 속에서의 삶을 감내해야 하는 우리의 삶은 새로운 세계관을 요구할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배척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되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매꿔줄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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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윌라드의 지식을 빌려 왔습니다. 사복음서를 읽다 보면 가끔씩 봉착하게 되는 이 구절은 '뱀 같이 지혜로우라고?' 라는 낯선 느낌을 풍기면서 읽는 이들에게 상당한 혼란을 주곤 한다. 달라스 윌라드가 [하나님의 모략]에서 제시한 설명을 참고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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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웃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도와주는 것"을 이웃사랑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족과 이웃과 "접촉 반경 내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보았다.

 

과연 맞는 말이다.

 

대체적으로 말해, 사람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다 분명한 것은, 우월적 태도나 정죄는 이웃 사랑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천국의 섬김으로 인간의 필요를 채우도록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당부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10:16)

 

이 소박한 이미지는, 남을 정죄하거나 도움이 안 될 좋은 것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대인 접촉의 긍정적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뱀의 지혜란 무엇인가? 행동할 시점이 이를 때까지 잘 관찰하고 주시하는 것이다. 적시를 포착하는 것이다. 뱀은 그저 겁이나 주려고 먹이를 쫓아다니거나 먹잇감과 엎치락 뒤치락하지 않는다.

 

일단 한번 움직이면 신속하게 결정타를 날린다.

 

비둘기는 어떠한가?

 

비둘기는 꾸미지 않는다.

 

술책을 쓸 줄 모른다. 교활함이란 비둘기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 온순한 동물은 이중성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순결한" 것이다.

 

성경은 교활하지 않은 마음을 아주 중요하게 가르친다. 천국에서 큰 자인 어린아이들의 특성 중 하나가 속이지 못하는 것이다. 성인인 우리도 그와 같아야 한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라는 사복음서의 구절과 대비했을 때, '진실함'이라는 특성이 지닌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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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윌라드의 견해는 오스왈드 챔버스의 저서, 권영경 교수님의 저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 있다. 상당히 중요한 관점이며,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관, 팔복을 통해 얻는 교훈이 전혀 달라 질 수 있다.

 

 

 

 

팔복은 복 받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다.

 

팔복은 우리 쪽에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아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좋아하시거나 인간에게 유리한 조건들을 제시해 주는 것도 아니다.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 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 형편이 좋다는 말은 사실상 어디에도 없다.

 

여덟 가지 조건이 하나님이나 사람 앞에서 행복을 얻는 길로 제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팔복은 "혁명 이후" 누가 높은 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지적도 아니다.

 

팔복은 예수와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지금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 나라를, 눈앞의 현실 상황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예시한 말씀이다.

 

인간이 모든 희망을 포기한 현실 상황들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천국 통치가 예수 안에서 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 사례를 팔복은 하나하나 꼽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복 있다" 하신 것은 그들이 자격이 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가 아니다.

 

정확히, 그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상태 속으로, 그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천국의 통치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 그들에게 임했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에더샤임(Alfred Edersheim)의 말이 정확히 옳다.

 

"산상수훈에서....예컨대 소위 "팔복"에 붙어 있는 약속들을 각 복과 연결된 영적 상태에 대한 보상이나 결과로 보아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는 것은 그의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의 상태가 다른 상태로 자라거나 서로 인과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보상은 더욱 더 아니다.

 

각 경우마다 연결 고리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분이......'모든 믿는 자에게 천국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의 팔복을, 복을 얻는 방법의 조건으로 보는 통상적 해석이 옳다면 복 있는 자 중에 들기 위해 우리도 가난해져야 하고 애통해야 하고 핍박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해석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자라면 당연히 가난해지고 슬퍼하고 핍박 받으려 해야 하건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by 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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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가복음 10장은 누가복음 팔복의 첫째 내용인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 흥미로운 의미를 던져 준다.

 

이후 많은 시대가 그러하듯, 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표시라는 것이 그 시대의 일반적 통념이었다.

 

이 땅의 부를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일진대 달리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청년은 하나님보다 부를 더 사랑했다.

 

사업을 계속할 것인가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선택의 기로가 주어지자, 그는 고민 끝에 부를 택했다.

 

 

 

이어 예수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즉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말씀해 주셨다.

 

부는 곧 하나님의 은총을 뜻한다는 일반의 통념 때문에 제자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이 놀라는 반응을 보이자 예수는 이런 설명을 덧붙이셨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설명'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심히 놀라' 서로 수군거렸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26절)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 분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사실 그 분은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도움, 즉 누구를 막론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통해서 말이다. 그 분은 또한 '구원받는'일에 관한 한, 전체적으로 볼 때 가난한 자가 부자보다 유리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다만 그 분은 눈 앞의 사례를 활용하여 하나님과 부에 대한 일반의 뿌리 깊은 통념을 뒤집으신 것 뿐이다.

 

아무리 부자라 한들 하나님을 부보다 덜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좋게 보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자라고 해서 곧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가난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은총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부자 청년의 사례가 세간의 통념을 바로 잡아주고 있다.

 

듣는 자들에게는 충격이었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좀 더 정확하게 생각하게 해 준 사례다.

 

by 달라스 윌라드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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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터 맥그라스 책을 보다가 둘을 짧게 비교한 부분이 나오네요. 흥미로운 내용이라 발췌해 봅니다.

 

루이스는 허버트와 비슷하게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확고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루이스가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지배적인 이미지는 조명의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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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빛으로 세상을 밟게 비추고 인간의 인지 능력을 바꾸어 주는 태양과 같다.

 

따라서 하나님을 인간 정신에 빛을 비추어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지적인 태양이라고 생각하는(Andrew Walker, 'Scripture, Revelation and Platonism in C.S Lewis'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55(2002), 19~35 page 보기) 루이스의 성향이 상당히 플라톤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비판이 아니다. (루이스의 신학적 지침 중의 하나이자,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발견되는 기독교적 플라톤주의를 알려면, Philip Cary, Augustine's Invention of the Inner Self: The Legacy of a Christian Platonis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63~76rpage 보기)

 

 

 

루이스가 인간이 더 큰 실재에 참여할 때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이러한 인식 방법을 선호했던 많은 낭만주의 저자들의 선호 성향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움(Sehnsucht)이라는 낭만주의 개념에 대한 관심이 그의 저작 곳곳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루이스의 초기 소네트 "정오의 강렬함"(Noon's Intensity)은 이런 이미지가 특히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그는 하나님을 "모든 것을 황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적 광선"을 비추는 태양으로 묘사한다.

(C.S Lewis, Collected Poems (London: HarperCollins, 1994), 128쪽. 이에 대한 논평을 알고 싶으면 Don W. King, 'Topical Poems: Lewis 'Post-Conversion Poetry' in C.S Lewis : An Examined Life, edited by Bruce L. Edwards (Westport, CT: Praeger, 2007), 292~293쪽 보기)

 

이 소네트에서 조명이 본질 자체를 바꾸는지 아니면 본질에 대한 인간의 인식만 바꾸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루이스의 지배적인 사상은 인간의 관점이 거룩하게 바뀐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루이스의 관점은 허버트의 관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허버트는 실재와 인간 인식의 변화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두 가지 모두 치유하고 고치는 "팅크"(tincutre, 알콜에 혼합하여 약제로 쓰는 물질)로서의 복음에 의존하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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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를 통한 구원을 얻는 체계가 아닌,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삶이 강조됨에도 마태복음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그리스도인의 의가 더 나아야 한다고 써 있다.

 

이 말의 의미를 달라스 윌라드는 이렇게 풀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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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우리의 소관이나 책임이 아니다. 결과에 필요한 우리 몫의 일, 그것만이 우리의 책임일 뿐이다.

 

우리의 마음은 화해를 갈망하고 있는가?

 

우리의 몫을 다했는가?

 

정직히 그런가?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행위를 의식의 행위 정도로 때우려는 마음을 거부하고 있는가?

 

형제의 분노가 그 자신의 영혼과 우리의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 입히는 해를 인하여 우리는 아파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 하나님의 길을 온전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굳이 율법적 행동 목록이 주어지지 않아도 그런 마음으로 행할 수 있는 적절한 길을 우리는 반드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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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권영경 교수님의 [위선]이라는 책에서는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행위를 약화시키거나 은해와 행위가 서로 대비되는 개념인 것처럼 서술하고 가르치는 모든 사조를 거부한다. 성경적인 요소가 많아 보이며 성경을 바르게 독해한 좋은 설명이라 생각한다. 이는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성경 속에서 일관 되게 강조하는 표현들이며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표현들에서 '율법의 행위'는 겉으로 보여지는 할례, 제사 등의 몇 가지 '외현적 활동'에 국한된 내용임이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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