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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Lewis 의 비교적 초창기 작품이다.

강렬한 회심 체험과, 자신만의 독특한 신앙의 여정을 소설 형식으로 잘 녹여낸 작품이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과 비슷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며, 주인공이 상징과 알레고리가 가득한 판타지 세계를 돌아 다니면서 수 많은 '진실'들을 마주대하고, 더 나아가 참 '진리' 의 길에 도달하는 여정이 재미있게 그려진 책이다.

​읽다 보면, 각각이 무엇을 비유하고 있는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알듯 말듯 하면서도 잘 모를 만한 부분도 많이 나온다.



일단 책이 쉽게 읽히는 것 같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뜨거운 '진리 체험'을 자신이 지닌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녹여 내려고 한 루이스의 열정이 잘 느껴지지만, 루이스가 의도한 바를 독자들이 따라가는데 어려움은 상당할 수 있다.

오히려 이후에 나온 루이스의 다른 저서들은 이 소설보다 더 잘 다듬어져 있고, 더 깊은 이해를 돞기 위해 애쓴 흔적들이 보인다. 


이 책은 루이스가 삶 속에서 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종합 선물세트와 같으며, 순례자의 여정으로 우리를 초청한다.

책 중간중간 등장하는 좋은 어구나 시가 상당히 좋다.

도덕이나 양심, 이성, 정욕, 교만 등 다양한 주제들을 넘나들면서 참 진리인 '하나님의 길'을 강조하는 이 책은, 투박하지만 깊이가 있고 다소 산만하지만 일관성 있는 이율 배반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한번 읽고 그칠 책이 아니라, 읽고 또 읽으면서 루이스가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는지를 곱씹어 보면서 읽는다면 상당히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을 책이다.

루이스가 진정 말하고 싶었던 그 '정수'가 이 책의 존재 의의나 다름 없다.

그의 문학가적인 매력과 장난 꾸러기 같은 상상력과 철학자, 신학자적인 깊이가 날 것 그대로 녹아져 있는 이 책을 기점으로 그의 수 많은 정제된 저서들을 대한다면 루이스의 매력, 더 나아가 루이스가 말하고자 했던 '기독교의 진리'에 매료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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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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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의 저서 치고는 내용이 많지 않으며, 다소 생소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기존의 기독교적인 느낌의 변증서라기 보다는 문학 비평게 관련된, 독서론에 관련된 책인 것이다. (최근에는 그의 인문학적 소양을 엿볼 수 있는 저서들이 많이 번역되는 것 같다. 루이스의 매력을 제대로 알아차리려면 이 분야도 함께 공부해야 한다)

결국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 책이며 '문학적인 독서가', '비문학적인 독서가'를 구분하기도 하고, 환상이나 리얼리즘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내용 자체는 워낙 어려운 분야지만 루이스 정도니까 그나마 읽힐만 하게 재미나게 잘 써준 것이리라.)



일반인인 내가 보기엔 쉽게 받아들여지거나, 익숙한 주제들은 아니나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나 글을 쓰는 걸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는 상당히 재미있게 읽힐 수 있는 책이리라 생각한다.

평생을 책을 쓰고, 편지를 쓰며 여생을 보냈던 C.S Lewis 에게는 문학 비평, 어떻게 독서를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중요한 화두였을 것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글', '언어' 를 진지하게 받아 들이고 이러한 소스들을 활용해서 '읽기' 를 어떻게 해 나갈 것인지를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단순히 글을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이나 가치관까지도 점검해 보고 도전 받을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의 궁극적인 독서론이 된다면 그 또한 매력 있는 삶이 되리라 생각해 본다.


개인적으로는 루이스의 다른 저서들 만큼 임팩트를 느끼진 않았지만 다시 한번 이 책을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면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깊이를 발견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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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의 영어 표현을 매끄럽게 번역할 능력도 부족하거니와 영어 실력 자체의 미진함으로 인해 이해 안되는 부분이 많이 있음을 유념해 주시길 바랍니다.

 

더 깔끔하게 누군가 번역해 주시면 그걸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C.S Lewis가 인용한 부분들은 이미 번역되어 나와 있는 책들을 찾아 보시면 더욱 아름답고 자연 스러운 표현들을 보실 수 있으니 이건 그냥 참고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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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가 컨퍼런스 시간 전부를 C.S Lewis 라는 사람 한 명에게 쏟아 부어야 하는지 의아해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Peter Kreeft“The Romantic Rationalist: Lewis the Man” 에서 C.S Lewis에게 보낸 찬사를 여러분과 공유하며 이 강연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황량한 시대가 이어지던 때세부적이고 전문적인 분야만을 연구하도록 만드는 사조가 팽배했었기에 이 시대는 다방면에 박식한 천재들라든지, 낭만적인 감성을 지닌 시인들, 정신적이고 숭고한 사랑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 수사학적 감각을 지닌 전문가, 심지어 정통 그리스도인을 거의 쓸모 없게 만들어 버렸는데 그와 같은 시대 가운데 한 사람이 있었다. (마치 또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신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세상에서 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 그는 엘프나 천사처럼 비현실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는 이와 같은 영역들에서는 아마추어였지만 자신의 전공 분야인 중세/르네상스 영미문학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기도 했다.

 

1963년도에 죽기 전까지 그는 문학사, 문학 비평, 신학, 철학, 전기문 분야, 성경 연구, 비유학, 판타지, 공상 과학, 편지글, , 설교, 공식적인 수필과 비공식적인 수필, 역사 소설, 영성 일기, 종교적 우화, 단편집, 아동 소설 등을 저술하며 일생을 바쳤다.

 

Clive Staples Lewis는 일개 인간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또 하나의 세상과도 같았다.

 

 

당신이 글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와 같은 찬사를 더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C.S Lewis라는 사람이 뭔가 굉장히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그가 놀랍도록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믿습니다. 그가 이 땅을 떠난 지 50주년이 되는 지금 이 순간, 이와 같은 컨퍼런스는 그를 보내 주신 하나님을 향한 크나큰 감사와 그를 향한 우리의 존경심, 그리고 그의 재능이 온 세상 가운데 영원토록 보존되고 전파되기를 바라는 우리의 열망에 비하면 매우 미약하고 작은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의 유년기&학교 생활]

 

이 컨퍼런스에서 많은 연설자 분들이 루이스와 관련된 그들의 관심사가 반영된 그의 삶의 많은 요소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전 여러분들에게 4분 동안 그의 삶을 간략하게 나눌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몇 몇 심오한 진실에 대해 이 자리에서 이야기를 더 나눠야 하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늘 우리가 비가 내리고 홍수가 덮쳐올 때 집 속에 꼭 감춰 두고 싶어하는 그런 류의 중요하고도 심오한 진실을 사랑했었습니다.

 

루이스는 1898년도에 Ireland에 있는 Belfast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9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재혼하지 않았습니다. 1908년도 8월과 1914년도 가을 사이 즈음에 루이스는 네 군데나 되는 기숙학교를 다녔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2년 반 동안 그는 William Kirkpatrick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루이스는 그를 The Great Knock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의 내면에서 태동하던 무신론이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더욱 확고해졌고 그의 추론 능력은 이와 같이 독특한 방식으로 정제되고, 훈련되어져 갔습니다. 루이스가 말하기를, 세상에 거의 완전 순도100%의 논리로만 구성된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Kirk 일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루이스는 훗날 그 때의 자신을 ‘17세의 합리주의자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믿음의 대변자가 되어가는 과정]

 

그러나 그의 합리주의가 정점에 달하던 그 순간, 그는 George Macdonal의 판타지 소설인 Phantastes[판타스테스]에 매혹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그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날 밤, 나의 상상력은 보기에 따라서는 일종의 세례를 받았었다.” 무언가가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열어줬고, 밝은 그림자가 내면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그는 회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낭만적인 충동들이 내면에서 다시 꿈틀거렸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그 당시 상황이 생생한 사실이었고 거룩한 순간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루이스는 그 독특한 경험을 이와 같이 부르진 않았었습니다.)

 

 

18살 때,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그는 육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1918년도 2월 달에 그는 프랑스에서 부상을 입어 회복을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옥스퍼드에서 1919년도 1월달에 공부를 다시 재개했습니다. 그 이후로 6년 간 공부한 결과 그는 고전 분야, 인문학, 영문학 이 세 분야에서 1등급(우등) 학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1925년도 10월 달에 대학원생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수업을 보조하는 학생 조교가 되었습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26세 되던 때입니다.

 

6년 뒤인 1931년도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진리라는 강한 확신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10년이 체 지나지 않아서 그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이라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믿음의 대변자로서 활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출현하는 방송 대담 프로그램은 1941~1942년도에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전성기의 루이스]

 

루이스는 자신이 지닌 창조성과 변증적 능력의 절정기에 다다랐다. 그의 전성기에, 루이스는 중세 영미문학계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권위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라이벌 중 한 명의 이야기를 참고하자면, 루이스는 당시 그의 세대 전체를 대표하는 최고로 박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와 같은 찬사 그 이상의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종류의 책들이 출판되었는데, [순례자의 귀향], [네 가지 사랑],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페렐란드라] 가 바로 그 출판된 책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1950년도에 [나니아 연대기]를 저술하기 시작했습니다.

 

방금 언급한 이 모든 책들은 각기 다른 장르의 책들인데 이를 통해 루이스라는 한 인물이 작가로서 그리고 사상가로서 심지어 상상력이 풍부한 선지자로서의 면모들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만큼 루이스는 놀라울 정도로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947년도 [타임]지의 표지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에서의 생활 30년 후인 1955년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중세/르네상스 영문학 정교수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 해인 1956년도에 그의 나이 57세였는데, 루이스는 Joy Davidman 이라는 여성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결혼 기념일을 기념하지 못한 체, Joy 라는 여성은 암으로 죽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3년 반 후인 그의 65세 생일을 2주 남긴 시점인 1963년도 11 22일 루이스는 Joy 를 따라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하나에 집중된 삶]

 

루이스는 그가 살아있을 당시보다 요즘 더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 40개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1억 부 이상이 전 세계적으로 판매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입각해볼 때, 제가 여러분께 던져 드리고 싶은 메시지는 루이스는 굉장히 보기 드물 정도로 높은 수준과 만족도를 자랑하는 낭만적 합리주의자’(romantic rationalist)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낭만적이고 합리주의적인 깊은 (그러나 종종 왜곡된) 열망이 숨어 있습니다.

 

저의 논지는 그의 낭만주의와 그의 합리주의는 루이스가 그리스도께로 가게 된 길잡이 역할을 해 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낭만주의와 합리주의는 그가 일생을 살아 내고, 일생동안 이뤄낸 업적들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은 루이스를 논리와 비유라는 두 가지 특별한 재능을 겸비한 저술가이자 교사로 만들어 줬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재능을 가지고,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사람들에게 세상 저 너머에 있는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고, 세상의 의미에 대해 일깨워 주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데 바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그의 낭만주의부터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합리주의를 살펴볼 것이며, 이 두 가지 요소가 어떻게 그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이 두 가지 요소가 그를 20세기 최고의 비유가, 복음 전도사로  자리매김하게 해 줬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낭만주의]

 

1932 8월에 루이스는 14일간 그의 첫 소설을 써 내려갔습니다. 이 때는  루이스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고백한지 1년이 체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순례자의 귀향]은 루이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순례를 하던 삶을 기반으로 한 우화였으며 200page 정도의 분량을 자랑했습니다. 부제목은 “Allegorical Apology for Christianity, Reason, and Romanticism”(기독교, 이성, 낭만주의에 대한 우화적 변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낭만, 합리주의자, 기독교인 이 모든 요소를 옹호했습니다. 

 

 

 

[낭만주의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10년 후에 [순례자의 귀향]의 제 3판이 출시될 때, 그는 서문에 10page를 더 추가시켜서 모호한 부분을 변증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낭만적인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고자 이야기를 덧 붙였습니다.

 

사람들이 모호함을 느끼는 이유는 (고의가 아니게), 제가 이 단어를 굉장히 사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가 정의 내리는 이 단어의 정의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누리는 경험이라고 합니다.

 

이 책의 제목에 써 있는 낭만주의에 대한 나의 정의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대한 기억들이 주요하게 작용하는 특별하게 반복되는 경험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경험이 떠오르면 저는 주저 없이 그러한 것들을 낭만적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 없는 비동물계와 놀라운 문학의 세계도 결국 이와 같은 낭만을 불러 일으켜 주는 경험들 내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루이스가 언급한 특별한 경험에 대한 정의를 면밀히 조사해 보면, 이와 같은 낭만은 그가 10년 후에 쓴 자서전에서 그가 말하는 ‘Joy’(기쁨)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낭만주의에 대한] 그와 같은 경험은 강렬한 열망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열망은 다른 류의 열망들과 두 가지 관점에서 구별이 됩니다. 먼저 무언가를 원하는 감각은 갑자기 생겨 나고 때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이 배제된 순전한 원함그 자체는 즐거운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게 사실입니다. 순수한 갈구함은 다른 어떤 ‘fullness(풍성함)’보다 더 좋습니다. 이와 같은 류의 가난은 다른 모든 부유함보다 더 좋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열망의 대상에 대한 기이한 미스터리가 존재합니다. 경험이 부족한 미숙한 사람 (그리고 부주의는 몇가지 미숙함을 그의 삶 속에 남긴다.)이 생각하기를, 자신들이 그와 같은 것을 느꼈을 때, 자신들이 무엇을 열망하고 있는지 스스로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떠한 지난 날 벌어졌던 사건들, 무시무시한 바다, 성적인 암시, 아름다운 초원, 머나먼 행성, 놀라운 성취, 놀라운 지식 등]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인상’(impressions)들은 모두 잘못되었습니다.

단 하나 높이 살 만한 요소가 있다면 이와 같은 글은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해 주는 한 사람에 의해 쓰여져 있다는 것 뿐입니다. 이 주장을 함에 있어서 한 치의 자만심이나 허영심이 틈 탈 자리는 없습니다.

, 저는 그들이 잘못되었음을 이성을 사용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입각하여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역으로 이와 같은 오답들 하나 하나에 제 스스로를 노출시켜 보고 스스로를 속여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 각각의 속임수를 밝혀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오랫동안 숙고하고 고민해 봤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성실하게 이와 같은 열망’(desire)를 좇는다면, 그릇된 대상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 되고, 그들의 허위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들은 단호하게 자신들이 좇던 그릇된 대상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 사람은 인간의 영혼은 현존하는 주관성의 세계와 시공간의 실존 속에서 온전하게 주어지지 않은’ (아니 그보다는 주어진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몇 몇 object(대상)를 즐기도록 창조되었음을 명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열망에 대한 변증]

 

루이스는 이와 같은 경험을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존재론적 증거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또는 많이 양보해서, 창조된 세계 너머의 또 다른 무언가에 대한

 

증거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열망에 대한 변증

신실하게 따르면 단순히 그 사실을 논하는데 머무르지 않게 되고 그 (모종의) ‘존재론적 증거와 함께 거하며 살 수 있게 된다고 그는 말합니다.

 

훗날, 그가 [순전한 기독교]를 썼을 때, 그는 이와 같은 논지를 더욱 유명한 표현으로 바꿔 표현합니다.

 

, 만약 내가 이 세상이 만족시켜 줄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설명은 나란 존재가 또 다른 세상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가슴을 후비는 갈망]

 

결국 그의 낭만주의의 정수는 이 피조 세계보다 더 큰 무언가에 대한 감각이 그에게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경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언가가 다른, 그리고 자연 세계를 뛰어 넘는 그 무언가 말입니다.

 

처음에 그는 강렬한 열망 또는 갈망이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심한 후에 루이스는 말하기를

 

나는 지금에서야 내가 지닌 마음의 상태로만 간주하고 있던 그 경험이 그와 같은 중요성을 지녀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다시 한번 이와 같은 경험에게 중요성을 부여했다. 내가 지녔던 그 경험들은 무언가 다른 것,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표지자로서 매우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무언가 다른 것, 이 세상 너머의 어떠한 것은 그가 자신이 갈망하던 것이 God 이었다는 것을 알기 전에도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크리스천이 되었기에, 그 강렬한 갈망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게 누구를 나타내는지를 이미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와 같은 강렬하고 아름다운 경험들, 달콤쌉쌀하고 아련한 경험들이 내가 회심하게 된 이후로 더욱 뚜렷하게 내게 다가오게 되었음을 나는 믿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루이스의 생애에서 중심이 되는 이야기]

 

 

 

Alan Jacobs 

 

이러한 경험보다 한 인간의 존재의 핵심에 더욱 밀접하게 다다를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Clyde Kilby

 

그의 책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발견되어지는 단 하나의 길

 

이라고 표현했으며,

 

루이스 자신 스스로는

 

내 삶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감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예기치 못한 기쁨] [순례자의 귀향] 그리고 [고통의 문제], [영광의 무게]에서 발견되는 낭만주의기쁨에 대한 이와 같은 경험에 대한 루이스의 반복적인 서술을 읽고 나면, 당신은 이러한 영역들이 단순히 루이스가 자신의 독특한 기질이나 성향의 일부로 이것들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보편적 특질로서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 낭만적입니다.

 

루이스는 이와 같은 갈망은 우리 모두가 느끼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당신은

결국 이게 우리 모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일 거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천국을 양한 우리의 감춰진 열망]

 

예를 들어, [고통의 문제]에서 루이스는 천국을 전혀 열망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마저도 사실은 상황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저란 사람도 인간은 천국을 열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 인간이라는 존재는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진 심연에서는 무언가 다른 것을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애타게 만드는 순간의 경험들, 이뤄지지 않을 약속, 당신의 귀에 잡히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메아리….

 

그러나 만약 사라지지 않은 메아리가 당신에게 찾아와 명확한 소리로 변하였다면….. 당신은 그게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의심의 가능성을 넘어서 당신은 이게 바로 내가 창조된 이유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문제 참고]

 

그래서 루이스는 자신의 낭만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인간 존재의 경험으로 바라봤습니다. 우리는 모두 낭만적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따금 씩 현존하는 세상은 더 크고 깊은 것을 추구하는 우리의 심연한 감각을 만족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합리주의자]

 

 

 

우리는 지금부터 루이스의 합리주의에 대해 이야기해 볼 것입니다. ‘낭만주의라는 용어처럼, 나는 합리주의라는 용어도 흔히 사용되는 것과 같은 철학적인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할 것입니다.

 

제가 합리주의자속에 넣고자 했던 의미는 루이스가 합리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진지하게 헌신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지니고 있었던 원칙은 참/거짓의 분명한 기준이 존재하며 이 모든 것은 절대 이성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순례자의 귀향]의 부제가 [기독교,이성,낭만주의에 대한 우화적인 변증] 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루이스가 말하는 낭만주의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성은 어떤 식으로 변호하고 있을까요?

 

 

 

[본성을 이끄는 논리]

 

루이스의 합리성에 대한 핵심을 이야기해 보자면, 그는 비모순율의 원칙(the law of non-contradiction)(모순율)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모순율은 사물이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니다 는 될 수 없다고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원칙).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은 법칙이 배제되어 버리면 진리만 손상을 입는 것이 아니라 낭만주의기쁨까지도 위험에 빠지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비모순율의 법칙은 모순적인 진술이 동시에 둘 다 참이 될 수 없다는 개념입니다.

 

 

 

 

 

루이스는 논리를 궁극적인 현실의 실제적인 표현이라고 간주했습니다. 논리의 법칙은 문화가 각기 다르게 창조된 인간의 관습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의 법칙현실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이 가능케 만들어 줍니다.

 

그는 말하기를

 

논리는 실재하는 것들이 실존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진정한 통찰력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서, ‘사유 법칙구체적인 무언가에 대한 법칙이 되기도 한다. 즉 가장 먼 공간과 가장 멀리 떨어진 시간 속에서의 구체적인 무언가에 대한…..  

 

 

 

[하나의 장소를 향해 나 있는 두 가지 길]

 

이와 같은 기본적인 논리 법칙’ (또는 합리성’)에 대한 헌신은 루이스를 낭만주의또는 기쁨이라는 길에서 그가 발견했던 그리스도와 동일한 그 분께로 루이스를 인도해 줬습니다. 그는 이 상황을 이와 같이 묘사했습니다.

 

“[낭만주의에 대한] 나의 변증과 나의 철학적인 진전에 대한 논증된 변증들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수렴되고 있다.” (, 유신론에 대한 실재, 기독교, 온 열방의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목표 말이다.) 

 

낭만주의 노선에서, 루이스는 자연의 본성 너머에 있는 궁극적 실재를 향해 계속적으로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결국 궁극적 실재의 끝은 God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열망은 이 세상의 무언가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똑 같은 상황이 어떻게 그가 이성을 사용할 때도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는 현대 사회 속에 출현하게 된 철학적, 과학적 우주론을 면밀히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재적인 모순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과학적인 우주론을 총제적인 개념으로서 받아들인다면 (이 관점에서는 합리적이고 인격을 지닌 신이 배제됩니다.), 저란 사람은 기독교에 적합한 사람도 되지 않을 뿐더러, 과학의 범주에도 포함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만약 마음이라는 개념이 전적으로 생리적인 뇌에만 종속되는 것이라면(여기서 의미하는 뇌는 생화학적 개념의 로서 의미가 부여되어 있지 않은 원자들의 집합체일 뿐입니다.), 저로서는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보다 마음에 대한 제 사유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이유를 도무지 알 길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생각들이 제가 해결해야 할 마지막 과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다룰 때 중요하게 작용하는 세계관을 나무에 이는 바람과 다를 바 없이 취급해 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참이라고 말하거나 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루이스는 이와 같은 행동이 모순적이라고 지적합니다. 무신론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생각을 사용하는 것그 자체를 무효화 시켜 버리는 세계관을 창조하는데 사용할 뿐입니다.

 

 

 

 

 

[인간 폐지]

 

 

 

이와 같은 개념이 바로 루이스가 [인간 폐지]라는 그의 책 제목에 함축시켜 둔 의미였습니다. 만약 모든 논리의 근본이 되고(비모순율의 법칙처럼), 가치 판단의 근본이 되는 ‘God’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정의 또는 아름다움 등과 같은 가치), 인간이라는 존지는 폐지되어 버릴 것입니다.

 

인간의 사고와 생각은 단지 바스락거리는 잎사귀와 다를 바 없게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가치 판단은 작은 연못의 일렁임 처럼 하찮은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Tao’() ( 1원칙의 절대성)에 대항하는(궁극적으로는 God에 대항하는) 새로운 류의 신념의 반란은 마치 나무 기둥에 대항하는 잔 가지들의 반란과도 같다. , 만약 그 반란이 성공한다면, 그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자신들의 존재 자체도 파괴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폐지 참고하기]

 

 

 

루이스는 무신론적 세계관이 이라면, 기독교의 신학은 깨어남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신이 일어났을 때, 당신은 깨어남모두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꿈 속에 머무르고 있으면, 당신은 깨어남을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기독교의 신학은 과학, 예술, 도덕성, 하위 기독교 종교들을 포용할 수 있지만, 과학적인 세계관 그 자체는 다른 어떠한 것들도 포용할 수 없다. 심지어 과학 그 자체도 포괄하지 못하는 설명체계인 것이다. 내가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마치 내가 태양이 떠오른다는 표현을 할 때, 비단 그것이 내 눈에 보여지기 때문에 믿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표현을 하고, 믿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성을 넘어 기독교로]

 

이와 같은 사고들이 어떻게 그를 기독교를 진리로 부를 수 있게 해 주는 이성의 길로 인도해 줬는지에 대한 루이스의 고백을 직접 들어봅시다.

 

 

 

이와 같은 근거에 기초해 봤을 때, 대중적이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과학적 우주론은 어찌 되었든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철학적 이상주의나 유신론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 해도 과학적 우주론보다는 덜 거짓에 가깝다고 표현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주의는 당신이 그것을 진지하게 취급하기 시작할 때 위장된 유신론이었음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유신론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당신은 그리스도가 언급했던 주장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당신이 그 지점을 심사숙고하며 진지하게 고찰하다 보면 어정쩡한 중간 지대가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미친 사람 아니면 진정한 신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광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루이스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준 낭만주의합리주의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그의 일생 동안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모종의 갈망에 대한 경험들은 이 세상의 개념만 가지고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이 루이스를 이 세상 너머에 계시는 God에게로 인도해 줬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가 일생동안 씨름했던 논리와 이성의 경험들은 그로 하여금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정의와 과학이 이와 같은 개념들의 근본을 이루는 초월적인 God 없이는 어떠한 타당성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지점까지 그를 이끌어 줬습니다. 

 

 

 

[언어의 힘이라는 열쇠]

 

그러므로, 루이스는 한 편에는 낭만주의’(또는 깊은 갈망)라는 길을 따라서 그의 구주이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갔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합리주의’(또는 논리’)라는 길을 따라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갔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들은 그로 하여금 물질로만 이루어진 세상 너머의 어떠한 실재를 소유하도록 그를 다그쳤습니다. 그 어떠한 실재는 뭔가 전혀 다른 것이었으며 이 세상 전체보다도 더 큰 무언가였습니다.

이 두 길은 마침내 창조주이자 구속자 그리고 우리의 모든 갈망의 궁극적 성취이시며 우리의 모든 이성과 추론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수렴하게 되었습니다.

 

낭만주의합리주의’ (, ‘갈망함논리적 사고’) 는 그로 하여금 이 세상이 지닌 의미타당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그를 이 세상 바깥으로 인도해 줬습니다. 이 세상은 그의 깊고 심연한 목마름을 해갈시켜 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그의 가감 없는 논리그 자체에 타당성을 부여해 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의 갈망함은 풍성하고 영원히 지속된 만족감으로 보상되었으며, 그의 이성에 대한 진리 논증은 타당성을 얻게 되었는데 이 모든 과정은 이 세상에서 이뤄진 작업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가능했던 작업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 루이스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줬던 낭만주의합리주의에 대한 이중 경험은 루이스에게 세상의 깊은 의미를 밝히 드러내는 데 언어가 지닌 힘이 얼마나 굉장한지를 알려주는 키가 되어줬습니다. , ‘비유의 막강한 힘 말입니다. 지금부터 비유자로서의 루이스에 대해 알아봅시다.

 

 

 

 

 

[비유의 달인]

 

 

 

God은 하나님이 아닌 것을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만든 not-God 들은 하나님을 드러내고, 알아가는 수단으로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루이스는 이 세상은 세상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인해 이끌림을 받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무언가는 바로 세상과는 다른 God이었습니다.

그는 낭만주의합리주의로부터 이 세상이 가장 고상하고 가장 진실에 가까이 도달하는 그 순간은 바로 이 세상이 자신들 너머의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을 그 자체로 보기 보다는 그 자체와 유사하지만 다른 그 무언가에 빗대어 바라볼 때 가장 선명한 진리를 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이스는 이 논증을 다음과 같이 추론했습니다. , 만약 이 세상에 대한 가장 심연한 의미를 담고 있는 열쇠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 놓여져 있다면, 이 세상을 그 자체로 단순하게 서술하는 것보다 이 세상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이 세상을 비유함으로써 이 세상을 더욱 깊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끊임 없이 다듬어져 가는 논리적 명료성]

 

루이스가 건드리는 거의 모든 영역들이 놀라운 통찰력으로 빛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가 자신의 논리적 명료성을 끊임 없이 다듬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빈번하게 활용해 주는 비유도 그의 통찰력을 빛나게 해 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은유, 유추, 실례, 직유, , 소설, 신화 등이 사실은 보여지는 세상을 그 세상이 아닌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비유의 여러 방식들에 속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세상이 진정 무엇인지지를 더욱 깊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어떠한 대상이 무엇인지 깊게 들여다 보기 위해서 그 대상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그 대상을 비유한다는 것은 상당히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이 바로 루이스의 전 생애가 루이스에게 가르쳐 준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자신의 전 생애를 이 진리를 예시하고 변호하는 데 사용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1931년도에 T.S Eliot에게 자신이 그에게 보낸 에세이를 설명해 주기 위해 글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이 모든 것들은 진리를 담지하는 능력을 지닌 상상력에 대한 낭만적 교리를 재긍정 할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비록 낭만그 자체가 진리를 이해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말합니다.”

 

 

 

[비유의 역설적 효과]

 

루이스는 그의 전 생애 동안 언어적 이미지, 언어적 비유가 실재를 조명 해주는 힘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크리스천이 되었을 때, 이와 같이 세상을 바라보는 깊게 내재된 그의 능력이 그가 쓰는 모든 글 속에 오직 진리를 조명할 목적으로만 활용되도록 제한되었습니다.

1954년도에 루이스는 the Milton Society of America에 그의 책 리스트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책들이 어떻게 하나로 묶일 수 있는지를 이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내 안의 상상력을 뿜어내는 인간은 더 많이 늙어 버렸지만 여전히 계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인 저술가나 비평가보다 더욱 기초적인 감각들이 이 상상력을 뿜어내는 인간 속에 담겨져 있다.

나로 하여금 처음 시인이 되게 (거의 성공하진 못했지만) 만들어 줬던 것도 바로 이 인간이었다. 그리고 내가 회심한 후에 나로 하여금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부터 [신학적으로 각색된 공상 과학 소설] 까지 자유 자재로 쓸 수 있도록 상징적, 문자적 형태 안에서 내 종교적 신념을 끌어안을 수 있게 해 준 것도 바로 이 인간이었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아이들을 위해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를 쓸 수 있게 나를 인도해 준 것도 그 인간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이 받은 소명의 많은 영역에서 상상력이 가미된 문학 작품 저술에 힘을 쏟았는지를 이야기해 준 것입니다.

모든 이와 같은 형태의 비유는 우리가 종종 간과하고 있는 현실의 측면들을 드러내 주는 역설적 효과가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상상과 실재]

 

1940년도에 그는 편지를 썼습니다.

 

신화는 컨텐츠 자체가 상상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 미루어 볼 때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상상력이 풍부한 원천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생생한 실재와 만날 수 있게 해 준다는 관점에서 진리에 더 근접한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대상이 아닌 것에 실재를 비유함으로써 우리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욱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에세이인 “Ono Stories”를 보면, 루이스는 고대 신화인 [Oedipus]에 대한 멘트를 남깁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이것이 실제 삶을 나타내 주진 않을지 몰라도 아마도 실재는 뭔가 더욱 근본적인 영역일 것이라는 모종의 이미지를 나타내 주는 기능을 지닌다.” 라고 루이스는 말합니다.

 

 

 

루이스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great romance’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1958년도에 편지에 “A great romance는 마지 당신이 도달할 수 없는 어떠한 것을 상기시켜 주는 향기를 지닌 꽃과 같다…. 나는 오크나 엔트, 엘프를 만나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에 대한 느낌들, 먼 과거에 대한 감각들….위험을 감소시켜 주는 느낌….명백히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성취되는 영웅적인 과업들….광대함..어딘지 모를 낯섬….왠지 모를 따뜻함아늑함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뒤엉켜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이 느끼는 것을 그대로 대변패 준다. 

 

 

 

[실재를 드러내기]

 

[순례자의 항해] 서문에서, 그는

 

모든 좋은 우화는 감추기 보다는 드러내려고 한다. 보충 설명하자면, 내면 세계에게 (상상화 된) 구체적인 체현을 제공해 줌으로써 그것들이 더욱 잘 보이고 만져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 [Impenitence] 에서, 그는 가상의 이야기 하는 동물들을 변호하는 내용을 담습니다.

 

Masks for Man, cartoons, parodies by Nature
Formed to reveal us.

 

(인간을 위한 마스크, 만화, 본성에 대한 풍자 등은 모두 진정한 우리를 드러내기 위해 지어졌다.)

 

다시 말해서 영웅 신화 그리고 날카로운 우화, great romance(위대한 낭만소설), 이야기하는 동물들은 모두 드러내기 위해만들어진 ‘masks’(마스크)와 같은 것이다. 다시 비유의 역설로 돌아가 보자면

 

실재를 더욱 깊이 드러내기 위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그 실재의 일부분을 묘사하는 것…(이것이 바로 비유’)

 

 

 

 

 

[변증학에서 활용되는 비유]

 

혹시 제가 루이스는 시나 소설에서만 비유자로서 살아갔다는 인상은 남기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루이스는 그가 저술하는 모든 장르에서 비유자로 살아갔음을 강조해보려고 합니다.

 

신화와 우화 그리고 낭만소설, 이솝 우화들은 은유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됩니다. 그러나 실상 은유적으로, 상상력에 기반하여, 우화적으로 글을 쓰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은 루이스의 삶과 작품 모든 영역에 심겨져 있습니다. 

 

루이스는 그가 저술하는 모든 영역에서 한 명의 시인이자, 장인, image-maker 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어떠한 요소들이 (그의 소설이 아닌) 루이스의 설교, 에세이, 변증적 글들을 매혹적으로 만들어 줬는지를 탐구했습니다.

 

그 결과 루이스는 시인의 감성을 가지고 다른 산문체의 글들을 써 내려가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글들은 기억 속에 오래도록 머물고 주의깊게 정제된 구절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요소들이 상상력을 잘 붙잡아서 표현할 수 있게 도와줬습니다.(우리가 좋은 를 평가할 때 활용되는 단어를 읊을 때 나는 소리, 풍성하고 시사하는 바가 많은 비유와 이미지들, 생생한 묘사, 서정적인 분위기 등이 모두 루이스의 산문 형태의 글에서 발견된다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맥그라스의 분석은 지극히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요소들이 루이스를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 쓴 글에서 재미를 주고, 기분을 전환 시켜 주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주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글을 써야 하며 어떻게 이야기를 주고 받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최고의 롤모델로 만들어 줍니다.

 

Walter Hooper는 다음과 말했습니다.

 

모든 루이스의 작품을 모와 보면, 그의 명확하고 재치가 가득한 산문과 시 속에서 동일한 사람이 발견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의 놀라운 상상력은 길을 인도해 주는 실과 같습니다. 이것은 계속적으로 작품 속에 드러나며, 이와 같은 요소들이 (제가 생각하기에는), 바로 그의 추종자들이 지금까지는 별로 관심 받지 못했던 주제들에 대해 루이스가 글을 썼을 때 열광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루이스가 건드리는 모든 영역들은 모두 그의 마술에 흠뻑 빠져들고 맙니다.

 

 

 

최고 수준의 비유자에게 가르침을 받고,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건 대단히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이미지와 비유 그리고 창조적인 실례와 은유 그리고 어구를 사용하는 놀라운 방식들은 모두 즐겁고 유쾌합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언 25:11)

 

솔로몬은 심지어 이미지가 가져다 주는 기쁨을 기념하기 위해 이미지를 활용합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요점으로 삼고자 하는 바는 비유가 가져다 주는 pleasure(유희)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유가 일으켜 주는 조명’(illumination)의 힘에 있습니다. 즉 비유는 진리’(truth)를 드러내 주는 힘이 있습니다.

 

 

 

 

 

[가장 심연한 의미를 지닌 열쇠]

 

루이스의 낭만주의합리주의(그의 깊은 갈망과 그의 타당성을 요구하는 논리체계들) 세상이 과연 어떠한지를 이해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서 세상이 아닌 그 바깥 너머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 세상에 대한 가장 심연한 의미를 담은 열쇠가 이 세상 바깥에 존재한다면(세상의 창조자 그리고 구속자인 예수 그리스도), 세상은 그 자체로 세상 그 자체를 묘사함으로써 단순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아닌 그 무언가로 비유되어짐으로써 더욱 깊이 있는 조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

 

루이스의 그칠 줄 모르는 비유에 대한 헌신 (이미지와 유추 사용 그리고 은유와 놀라운 수준의 병렬 구조, 심지어 그의 가장 논리적인 진리에 대한 설명 체계에까지) 은 단지 큰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는 차원에서만 이뤄졌던 작업이 아니고, 이와 같은 비유가 드러낼 수 있는 더 깊은 차원의 진리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주된 이유는 유희를 누리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진리를 잘 드러내 주는 비유의 속성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루이스는 진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객관적인 실재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에 대한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진리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성을 활용하는 것은 진리를 알아가고, 변호해 나가는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성보다도 더욱 깊고 심연한 영역을 드러내 줄 수 있는 비유만이 드러낼 수 있는 실재의 깊은 차원과 깊이도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경이로운 것들을 바라본다는 것]

 

이 세상이 궁극적인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경이로움을 가지고 바라보거나 음미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루이스는 [기적]에 나와 있는 이 문단에서 image를 활용한 산문을 가지고 이 부분을 설명하고 있는데 아마 그의 은유적 표현의 최고봉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어의 영어됨은 다른 언어들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만 오직 생생하게 들려질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같은 논리를 가지고 접근해 볼 때, 오직 초자연주의자들만이 진정한 자연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은 당신이 진정 보고자 하는 자연으로부터 조금은 거리를 유지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시 그 자연을 되돌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진정으로 실재하는 아름다운 광경이 보일 것입니다. 당신은 자연적인 해류로부터의 뜨겁고 짠맛을 뚜렷하게 의식할 수 있기 전에 이 세상 너머로부터 발원한 순수한 물 그 자체’(pure water)를 맛 봐야 합니다.

여기서 그것 God으로 또는 모든 것으로 인식하기 위해 자연에 대한 모든 핵심적인 요소들즐거움을 잊는 것입니다. 나오십시오. 그리고 뒤돌아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곰과 아기들과 바나나들의 향연: 주체할 수 없는 원자들과 난초들과 암들과 카나리아 벼룩, 기체, 토네이도, 두꺼비들의 향연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궁극적 실재였노라고 생각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도대체 당신은 어떻게 이것들이 단지 남자와 여자를 위한 한 편의 도덕 드라마를 위한 무대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자연은 자연 그 자체입니다. 자연을 경배하지도 마시고, 경멸하지도 마십시오. 그리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고 알아가십시오…. 신학자들은 우리에게 자연은 (마치 우리 인간들과 같이) 구속받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자연이 예속되어졌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의 본질이라기 보다는 자연의 질병과 같은 것입니다. 자연은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격 안에서 회복되어질 것입니다. (천국에서 금지된 것처럼) 누군가로부터 길들여지거나 살균되어지는 개념의 회복은 아닐 것입니다. 그 때가 되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오랜 원수나 친구, 놀이 상대, 유모 등을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족함 없이 완벽한 시간이 될 것이고,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오직 초자연주의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을 볼 수 있다.”

 

세상에 대한 놀라운 경이(핵심과 유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은 세상이 가장 아름답고 놀라울만한 경이는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의 비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낭만주의의 길은 루이스에게 세상은 일종의 비유임을 가르쳐줬습니다. (우리의 갈망의 궁극적인 충족은 이 세상에서 이뤄지지 않는 다는 것을 가르쳐줬습니다.) 그리고 합리주의의 길은 루이스로 하여금 세상이 비유임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우리의 사고에 대한 궁극적 타당성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비유이기에, (우리의 갈망의 목적지도 아니요, 우리가 지닌 논리의 기반도 아닌), 이 세상은 비유에 의해 가장 심오하게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자]

 

루이스가 자신의 모든 작품들에서 했던 작업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모든 비유들에서, 그리고 그의 모든 비유들이 가미된 합리적 추론 속에서..), 그는 계속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적으로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께 직면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인도했습니다. 그가 가장 잘 알았던 두 길은 바로 낭만주의합리주의였습니다.(‘갈망함논리적 사고’). 그리하여 이 두 가지 길은 루이스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길로 활용되었습니다.  

 

교리적인 측면에서는 저와 상당히 다른 노선을 걷고 있음에도 (그 이슈들은 상당히 중요하고 논쟁적인 부분들입니다.) 제가 루이스를 존경하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의 명백하고, 부끄러움 없는(과감한) 신념에 있습니다.(예수 없는 이들에겐 결여되어 있는.. 그리고 모든 크리스천들은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들 -> 세계적인 수준의 학식을 포함한…). 그리고 많은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숨어 있고, 모호하고 인정받기만을 바라는 지성적인 크리스천들과는 달리 루이스는 늘 과감하고 전면에 설 줄 알았습니다.

 

한 영혼의 구원은 이 세상의 모든 서사시를 보존하고 만들어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우리고 우리가 그를 영화롭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영광을 볼 수 있게 도와주다]

 

 

 

이것이 결국 그가 자신의 모든 비유와 합리적 추론을 통해 행했던 작업입니다. 그리고 Norman Pittenger 1958년도에 크리스천의 믿음에 대한 그의 지나치게 단순화된 묘사를 비판했었을 때, 루이스는 그가 자신의 모든 작품에서 보여줬던 것을 우리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비판에 응답했습니다. 

 

 

 

제가 처음 믿음 생활을 시작했을 때 기독교는 굉장히 교양 있는 수도사들의 이해할 수 없는 언어 또는 부흥사들에 의해 제공되는 극도로 감정적인 형태를 띄며 내 앞에 거대하게 다가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둘 중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임무는 간단했는데 결국 가방끈이 짧은 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활용하고, 각 지역의 특색에 맞춰서 기독교의 교리를 잘 이해시켜 주고 전달해 주는 것이었다.

Dr. Pittenger 는 그가 많은 질병들을 주장하는 것에 덧붙여서 치유책도 조언해 줬었더라면 훨씬 유용하고 훌륭한 비평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잡화점 주인, 변호사, 부동산업자, 장의사, 경찰, 장인들과 같이 그가 속해 있는 지역 내 곳곳에 존재하는 수 많은 사람들 모두를 회심시키고자 할 때 어떻게 그와 같은 작업을 해 낼 것이란 말인가? 어떠한 방법론을 사용하여서, 어떠한 성공요소를 가지고 말인가?

 

 

 

루이스는 낭만주의합리주의가 수렴하는 길인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 왔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으로서,(그가 이와 같은 길들을 걸으며 배운 요소들 때문에), 그는 놀라운 사유자가 되었고 비유가가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그의 모습이었고, 이게 바로 그가 알아왔던 것들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복음을 전할 때도 이와 같은 요소들이 잘 활용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낭만적인 시도들을 잘 활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합리적인 논증을 통해서도 결국 그가 보았던 것을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게 해 주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그가 지닌 모든 갈망함의 최종점이었으며 그의 모든 사유의 굳건한 근원이었던 것입니다.

 

C.S Lewis: 낭만적이고, 합리주의적이며, 비유가이며, 복음 전도자. 하나님의 영광의 작품이며, 우리를 향한 선물, 여기에 존재하고 있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Peter Kreeft, C.S. Lewis: A Critical Essay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69), 4.

 

2C.S. Lewis, Surprised by Joy (New York: Harcourt, Brace, & World, 1955), 135.

 

3Surprised by Joy, 181.

 

4Surprised by Joy, 179,

 

5Alister McGrath, C. S. Lewis: Eccentric Genius, Reluctant Prophet (Carol Stream, Illinois: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2013), 210.

 

6Ibid. 166.

 

7http://ncronline.org/news/art-media/cs-lewis-couldnt-touch-anything-without-illuminating-it (accessed 9-12-13)

 

8He wrote to his friend Arthur Greeves on October 1, 1931, “I have just passed on from believing in God to definitely believing in Christ — in Christianity.” The Collected Letters of C.S. Lewis, Vol. 1, Family Letters 1905–1931, ed. Walter Hooper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2004), 974.

 

9C. S. Lewis, The Pilgrim’s Regress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ty, 1958), 5.

 

10Ibid. 7.

 

11In Surprised by Joy, 17–18, Lewis said that this Joy is the experience “of an unsatisfied desire which is itself more desirable than any other satisfaction. . . I call it Joy, which is here a technical term and must be sharply distinguished both from Happiness and from Pleasure. Joy (in my sense) has indeed one characteristic, and one only, in common with them; the fact that any one who has experienced it will want it again. Apart from that, and considered only in its quality, it might almost equally well be called a particular kind of unhappiness or grief. But then it is the kind we want. I doubt whether anyone who has tasted it would ever, if both were in his power, exchange it for all the pleasures in the world. But then Joy is never in our power and pleasure often is.”

 

12Ibid

 

13Ibid. 8.

 

14Ibid. 10.

 

15Ibid.

 

16C.S. Lewis, Mere Christianity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60), 106.

 

17Surprised by Joy, 238.

 

18Ibid.

 

19Alan Jacobs, The Narnian: The Life and Imagination of C.S. Lewis (New York: HarperOne, 2006), 42.

 

20Clyde S. Kilby, The Christian World of C.S. Lewis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4), 187.

 

21Surprised by Joy, 17.

 

22Devin Brown, A Life Observed: A Spiritual Biography of C.S. Lewis (Grand Rapids: Brazos Press, 2013), 5.

 

23C.S. Lewis, The Problem of Pain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62), 145-146.

 

24C.S. Lewis, “De Futilitate” in Essay Collection and Other Short Pieces (London: HarperCollins, 2000), 674.

 

25C.S. Lewis, The Pilgrim’s Regress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58), 10.

 

C.S. Lewis, “Is Theology Poetry?” in Essay Collection and Other Short Pieces (London: HarperCollins, 2000), 21.

 

27C.S. Lewis, The Abolition of Man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47), 56.

 

28 “Is Theology Poetry?”, 21.

 

29Ibid., 20.

 

30Walter Hooper, editor, The Collected Letters of C. S. Lewis: Narnia, Cambridge, and Joy, 1950-1963, Vol. III (San Francisco: HarperCollins, 2007), 1523. Emphasis added.

 

31Walter Hooper, editor, The Collected Letters of C. S. Lewis: Narnia, Cambridge, and Joy, 1950-1963, Vol. III (San Francisco: HarperCollins, 2007), 516-517

 

32Walter Hooper, editor, The Collected Letters of C. S. Lewis: Books, Broadcasts and War, 1931-1949, Vol. II (San Francisco: HarperCollins, 2007), 445. Emphasis added.

 

33C. S. Lewis, “On Stories,” in Essay Collection and Other Short Pieces, 501.

 

34Walter Hooper, editor, The Collected Letters of C. S. Lewis: Narnia, Cambridge, and Joy, 1950-1963, Vol. III, 371.

 

35Ibid., 971-972

 

36The Pilgrim’s Regress, 13.

 

37Alistair McGrath, C.S. Lewis, 108.

 

38Walter Hooper, Poems, vi.

 

39C.S. Lewis, Miracles: A Preliminary Study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47), 67-68.

 

40C.S. Lewis, “Christianity and Literature,” in: Christian Reflections, 10.

 

41C.S. Lewis, “Christianity and Culture” in: Christian Reflections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7), 14.

 

42C.S. Lewis, “Rejoinder to Dr Pittinger,” God in the Dock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70),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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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저자는 루이스의 자유의지론에 힘을 실어 주고 있으며,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설명체계로서는 루이스가 쉐퍼를 압도해 보인다. 하지만, 루이스의 이론이 온전한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지는 좀 더 고민해 봐야 한다. 연옥의 존재 등에 대한 그의 개념은 성경적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다소 힘을 잃기 때문이다.

 

[변증적 고려 사항]

 

 

 

책 제목: 루이스와 쉐퍼의 대화

 

저자: 스콧 버슨&제리 월즈 지음

 

162~167page

 

 

 

앞서 세 장에서 우리는 쉐퍼와 루이스의 구원론적 체계를 상세히 살펴보며 공통적인 기반과 분기점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파악했다.

 

그러면 이 모든 내용이 변증적 과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이제 우리의 구원론적 연구를 다섯 가지의 변증적 고려 사항들을 통해 결론짓고자 한다.

 

 

 

  1. 양립론은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 그리고 선하심을 훼손한다.

 

약한 경정론이나 양립론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그것들이 문제가 될만한 의미들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첫째, 이 입장은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한다.

 

모든 행동과 생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결정론적 뜻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결정해 놓으신 것 외에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둘째, 이 입장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데,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제 2원인에 의한 죄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제 2원인에 의한 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선택받은 자에게는 제 2원인에 의한 행실에 대해 점수를 줄 수 있다는 것인가?

 

이 입장에 근거한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자들을 벌하시는 하나님은 불의하시거나, 아니면 인간은 자신의 행실을 자랑할 수 있다.

 

셋째, 이 입장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자유로운 인간의 선택을 결정하실 수 있다면,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결정해 놓지 않으셨나?

 

만일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기 위하여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필요가 없다면, 완전한 사랑과 전적인 선하심을 갖추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모든 인간이 그분의 구원 선물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게 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아직 이러한 비판적 질문에 대하여 설득력 있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자유의지론은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자유 모두를 제대로 보여 주는 유일한 자유론이다.

 

 

 

 

  1. 우리의 구원론은 자유의지론적 자유관을 반영해야 한다.

 

만일 자유의지론이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자유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공하는 데 정말로 필요하다면, 우리의 구원론은 자유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일관되게 붙잡아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루이스의 변화론 모델이 쉐퍼의 형법적 모델보다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이것은 세 가지 근거를 들 수 있다.

 

첫째, 자유의지론적 구원은 인간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구원 선물을 받을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무조건적인 예정과 자유의지론적 자유는 전혀 양립할 수 없다.

 

둘째, 자유의지론적 자유는 구원을 위해서는 단회적인 회심이 아닌 지속적이며, 역동적인 신앙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만약 구원이 회심 때에 결정되었다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영역인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서 인간의 자유는 불필요한 것이 된다.

 

셋째, 자유의지론적 자유는 변화의 과정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한 이중적 행위라는 관념을 제시한다.

 

그리고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이는 이 과정이 끝나기 전에 죽은 사람들을 위한 무덤 너머의 정결 과정이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반드시 내포한다.

 

 

대부분의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이 마지막 주장은 소화하기가 힘들 것이다. 이 교리는 중세에 모금 수단용으로 쓰이던 비성경적인 사상을 연상케 한다. 그것만이 아니라, 형법적 모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교리는 전적으로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의를 전가해 주시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를 용서하시며, 죽음의 순간에 우리가 일방적으로 변화할 것을 약속하셨다면, 도대체 왜 우리에게 연옥의 교리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러나 변화론 모델의 관점에서 보면, 루이스의 사후 정화론은 논리적 필연성을 갖고 있다. 만일 구원이 무엇보다 변화에 관한 것이고, 이 변화의 과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면, 정화의 과정이 완료되기 전에 죽은 이들에게 무덤 너머에서도 진행되는 변화의 기회가 있다고 보는 편이 논리적으로 맞을 것이다.

 

즉 루이스는 면죄부, 혹은 전통적으로 면죄부와 연루된 비성경적 개념들을 인정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변화론적 구원론을 논리적인 결론까지 이끌고 갔을 뿐이다.

 

 

따라서 연옥에 대한 질문은 단순히 성경해석적 토대에서만 답변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적 자료들을 그 논리적 결론까지 밀어 붙여야 한다. 만일 자유의지론적 자유와 루이스의 변화론 모델이 성경의 내용을 가장 잘 이해시켜 준다고 믿는다면, 이러한 정화론도 논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죽음의 순간에 변화를 완수하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정화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더 이상의 정화 과정도 불필요할 것이다.

 

 

 

 

  1. 우리는 진리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만일 우리가 논리적 일관성 기준에 다른 신앙의 체계를 맞추려 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바로 위의 진술을 신실하게 붙잡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쉐퍼의 역설적인 입장에서 본 것처럼 이는 언제나 일어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논리와 질서,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이시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진실하지만 총체적이지 않은 진리를 구현하는 자기 일관성을 갖춘 체계를 소유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신비의 문제에 관해 더욱 철저하게 생각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당연한 긴장점과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루이스를 따라 잠정적 불가지론의 진영으로 따라가거나, 아니면 우리의 교리적 입장을 재고해야 한다.

 

역설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유의지론적 자유를 보존해야 할 필요가 드러난 마당에, 우리는 독자들이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문제를 미해결의 바다에 던지기에 앞서 성경의 내용과 하나님의 성품을 바르게 보여 주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관한 대안적 체계를 탐구할 것을 권한다.

 

 

 

[1]신학적 진솔함은 변증의 필수이다.

 

무조건적인 예정론을 오로지 구원의 확신을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의도적으로 이러한 교리를 불신자들에게 감추려는 시도에는 뭔가 의심쩍은 부분이 있다.

 

이는 쉐퍼가 안고 있던 문제다. 만일 정말로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일부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고 나머지는 내어 버리기로 하셨다면, 우리는 쉐퍼의 방법론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이 교리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이 교리에서 함축하는 내용들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쉐퍼는 다른 신념 체계 안에 있는 대화 상대자들에게도 솔직함을 요구하지 않겠는가? 분명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동일한 기준에 우리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하더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열어야 한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우리는 그 진리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쉐퍼로 하여금 예정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불신자들과 나눌 수 없게 했던 바로 그 본능적 요인이 이러한 교리가 의심스러움을 직관적으로 보여 주는 상징이나 경고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우리의 신앙 체계를 솔직하고 성실하게 나눌 수 없다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같은 취지에서, 우리는 조직 신학과 목회 신학을 이원화하는 형태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쉐퍼는 전적이고 무조건적인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적 자유의 긴장 관계라는 모순된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목회적인 상황에서 그의 전략은 바뀌었다.

 

완벽한 균형대신, 쉐퍼는 미심쩍은 내용을 지닌 신념들을 간과하면서 더 안전한 교리를 강조한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루이스는 목회적 혹은 영적 조언이라는 기치 아래 자신의 실용적 제안을 정당화했다.

 

특별한 교리를 강조하는 것이 목회적 차원에서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믿는 바를 왜곡하면서까지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면밀함을 갖추지 못한 목회적 조언을 제시하는 것도 정당하다 볼 수 없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실재하는 모든 것의 주님이시라면, 우리의 목회 신학과 조직 신학 사이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쉐퍼는 분명히 이 점에 부응하는 주장을 했다. “만일 내가 나의 지적인 무결성을 유지하고 나의 인격적, 영적, 그리고 지적인 삶의 통합성을 지키려면대답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한 사람의 신학적 무결성을 진단하는 방법은 그 신학의 내용들이 막상 현장에 적용되었을 때 진실하게 인정받을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살해를 당했다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하나님이 그러한 어린아이의 죽음을 의도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완전한 무결성과 신학적 일관성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이가 신앙을 버릴 때, 우리는 완전한 무결성과 신학적 일관성을 갖고 하나님이 이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며 어떻게 해서든 그 분의 품으로 데려오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비극적 죽음이 일어나거나 불신자가 신앙을 거부하는 등의 일이 일어날 때 우리의 사상에 걸림돌이 생기는 것인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어린아이에게 일어나는 야만적 행위나 선택받지 못한 자들에게 가해지는 무조건적 저주 같은 모든 일을 결정해 놓으셨다고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는 실제 세계에서 이러한 예상 결과들과 더불어 지낼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에서 우리의 조직 신학을 적용할 수 없다면, 우리의 교리적 입장에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필자: 양자역학과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가 등장한 현대 사회에는 이와 같은 상식적인 주장도 때론 반론에 부딪힐 수 있다.)

 

[2]변증학은 체계적 사역이다.

 

 

 

변증적 과제와 조직 신학 간에는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어떤 이들은 변증학을 농구 시합이나 축구 경기와 같이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많은 점수를 얻는 자가 승리하는 식이다. 이는 단순히 양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변증학은 복잡한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다고 봐야 한다.

 

여기서의 목표는 뒤범벅이 되고 혼란스럽게 널린 조각들을 하나의 일관성 있고 질서정영한 실체로 조합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기는 사람은 조각이 가장 적게 남아 있는 자이다. 우리가 할 일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엄청난 증거 자료들을 단순히 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증거들이 어떻게 합리적이고 실존적으로 만족할 만한 실재의 모습으로 조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조각들을 잘 엮어서 알쏭달쏭한 인생의 퍼즐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는 이들에게 기독교의 일관성과 아름다움을 명쾌하게 제시하는 일이 조직 신학과 변증학의 몫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의 구원론적 비전은 일관되고, 포괄적이며, 거부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3]최대의 충돌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

 

 

쉐퍼는 일관되고 포괄적이며 거부할 수 없는 비전의 필요성을 이해했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보면 그는 우리에게 실재에 대한 통합적 관점이 부족하며,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곤 단절된 파편들뿐이라고 지적한다.

 

실재는 책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책의 미미하고 훼손된 부분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는 겨우 각 페이지마다 1인치 정도의 활자화된 내용일 뿐이다. 이 정도로는 어떠한 저자가 있다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따름이지 이야기를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만일 우리가 잃어버린 부분들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파편들을 일관된 메시지로 조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쉐퍼가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의 관계를 구상했던 방식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하나님의 우주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대답의 일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의미 있는 삶을 살기에 충분한 정보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 간격을 매우고 인생의 부조리함을 해석하기 위해 성경의 관대한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가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의 파편들을 한데 엮을 때, 실재에 관한 일관되고 포괄적이며 유력한 구상이 떠오른다.

 

그러나 쉐퍼에 따르면 이와 같은 명료한 이치가 많은 기독교 진영에서는 구름에 가리어졌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본문을 쪼개고 둔갑시키는 성경 비평가들의 새로운 조류가 등장했다. 따라서 성경 본문은 자연 계시의 파편들과는 어울릴 수 없게 되었다.

 

실재에 대한 통합적 구상과 인간의 곤경에 대한 하나님의 해법을 묘사하는 이야기는 한쪽에서는 신앙과 특별계시의 해체되고 이원화된 병렬 관계로, 다른 한쪽에서는 검증된 사실과 자연계시의 병렬 관계로 대치되었다.

 

그렇기에 쉐퍼가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한 것이다.

 

실재에 대한 통합적 비전은 이러한 교리를 집요하게 고수할 때만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쉐퍼에게 있어서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이는 분열된 지식 세계와 동강난 세계관으로 치달을 뿐이다.

 

필자들의 구원론 연구를 통해 쉐퍼와 루이스 사이에 존재하는 몇 가지 핵심적인 균열이 드러났다. 속죄의 성격, 영원한 구원, 예정론, 영혼의 정화, 그리고 역설에 대한 의존 등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쉐퍼가 성경의 영감에 관한 루이스의 일부 주장을 불편하게 여겼음은 확실하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오랫동안 미국 IVP 편집인으로 있었던 제임스 사이어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사이어는 1973년에 신시내티에서 열린 기독교 서점 협회에 쉐퍼와 대동했던 때를 술회한 바 있다. 어느 날 저녁 두 사람은 유람선과 작은 배들이 유유히 오가고 있는 오하이오 강변을 거닐고 있었다. 신시내티레즈 팀의 야구 경기가 없는 저녁의 야구장은 강 둑 위에 은은한 자태를 드러내었다. 두 사람은 호텔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는데, 쉐퍼는 늘 그렇듯 차분했다.

 

진중한 성격인 그는 흥겹게 웃는 시간에도 별로 미소를 짓거나 잘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지성과 의지, 그리고 감성을 활용해 소통하는 데에는 능했지만, 그다지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이어는 쉐퍼가 성경의 영감에 관한 루이스의 입장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창조 기사에 대한 신화적 해석이나 구약의 기적들의 시공간적 사실성에 대한 의문,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의 오류 가능성 등은 성경무오성 교리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쉐퍼는 특히 루이스의 [시편 사색]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지만, 이 작품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를 꺼려했다. 왜냐하면 루이스의 성경관이 갖고 있는 결함을 부각시키면 그의 다른 저작이 갖고 있는 매우 긍정적인 변증적 영향력이 위축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대화가 잠시 뜸해지자, 사이어는 흥미로은 시나리오를 하나 구상했다. 그는 쉐퍼와 루이스를 같은 방에 데려다 놓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밖에 몰래 엿듣고 싶다고 했다.

 

쉐퍼의 엄숙한 얼굴에 평소와 달리 밝은 미소가 번졌다. 쉐퍼는 사이어에게 이렇게 응수했다. “, 우리가 진작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루이스는 분명히 전향했을텐데.”

 

추측컨대 우리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변증가들이 이 중요한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것을 지켜보고 싶은 이는 비단 사이어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만남이 성사됐다면 그날 밤 신시내티 강변의 야구장은 북적대는 사람들로 가득 찼을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 토론은 단지 쉐퍼와 루이스 뿐 아니라, 복음주의 세계를 갈라놓은 큰 간극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다음 장은 사이어의 흥미로운 소원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


참고: 이 책의 그 다음 챕터도 쭉 읽어 보시는 게 좋습니다. [굉장히 완성도 높은 책으로서 두 인물들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꼭 정독 하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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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우익을 담당하며, 정통 기독교를 수호하려 했던 프란시스 쉐퍼와 기독교 변증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근현대사 속에서 기독교 변호에 앞장 섰던 C.S 루이스는 서로 격렬한 논쟁을 벌인 적은 없으나 한번쯤 한자리에 앉혀 놓고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핵심적인 신학을 비교해 보자. 자세한 내용은 [루이스와 쉐퍼의 대화] 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책이 상당히 두껍지만 두 저자를 좋아하고, 신학적인 내용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잘 쓰여진 책이다.

 

 

 

 

 

 

 

쉐퍼의 입장 (근본적인 것들이라는 책에 따르면)

(그리고 B.B. 워필드, 제임스 오르, W. H.그리피스 토머스, 캠벨 몰간도 같은 견해)

  1.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2.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출생

  3.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속죄

  4. 그리스도께 죽음으로부터(문자 그대로) 부활하심

  5. 그리스도의(문자 그대로) 재림.

 

 

루이스의 입장 (순전한 기독교에 따르면)

  1. 성경의 영감과 속죄의 효력에 대해서는 인정함. 그러나 성경이 어떻게 영감을 받았으며 속죄로 인해 타락한 피조물들이 어떻게 회복되는지에 관한 것은 본질적인 문제로 취급하지 않음.

  2.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반대함.

  3.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출생

  4.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문자 그대로) 부활하심

  5. 그리스도의 (문자 그대로)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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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가 행위 구원론자인가?]

 

 

 

책 제목: 루이스와 쉐퍼의 대화

 

92~96PAGE

 

 

 

 

 

루이스는 쉐퍼가 주장한 것처럼 우리가 마치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상태로있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보다 우리는 완전한 겸손으로 우리의 죄악 된 선택들에 대한 영원한 지식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천국을 즐길 수 있는 피조물이 될 것이다.

 

 

 

루이스는 천국을 죄 사함을 받은 자라면 누구나 즐겁게 동참할 수 있는 천상의 디즈니랜드로 제시하기보다, 오직 정화와 적절한 준비를 갖춘 자들만이 천국 도시의 기쁨을 소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최근 읽었던 권영경 교수님의 [위선]이라는 책을 보면 갈라디아서, 로마서에서 바울의 일관된 입장과 사복음서에 제시된 예수님의 메시지는 모두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행위와 은혜는 서로 양자택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는가? 루이스는 속죄론을 그 열쇠로 제시했다.

 

 

 

루이스에 따르면 인간은 심각한 도덕적 수렁에 빠져 있다.

 

사실, 우리가 처한 곤경은 너무 심각해서 단순한 개선안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총체적인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실제적으로 도덕적인 변화를 겪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고통스럽다.

 

 

 

[순전한 기독교]에서 루이스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삶 속에 도덕적 변화를 일으키시려고 끈질기게 일하셨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원한다면 내가 너희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겠다. 너희 자신을 내 손에 맡기는 순간, 나이 목적은 오직 너희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밖의 다른 것은 없다. 너희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으며, 너희는 나를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이 일을 완성할 것임을 명심하여라. 너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떠한 고생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죽음 뒤에 어떠한 상상조차 못할 정화의 과정이 오더라도, 내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너희가 진실로 완전해지기까지 나는 결코 쉬지 않을 것이며, 너희도 쉬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구절을 읽고 루이스의 구원론은 행위를 통해 의로움을 얻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전혀 맞지 않다. 이 구절에서 루이스가 강조하는 것은,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손에 자신을 맡겨 드림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성부의 형상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힘으로는 구원을 결코 이룰 수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거룩함을 위해 그분이 내리시는 처방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 일을 시작하셨고 종국에는 완성하실 거룩하신 의사에게 지속적으로 믿음을 두는 것이다.

 

루이스에게 있어서 믿음은 분명히 신뢰를 수반하고 있으며,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정말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행해야 한다 

 

 

(필자: 아르뱅주의니, 4차원 복음이니 해서 한국 기독교는 행위를 집어 던지고 구원티켓을 획득한 이후 세속에 기반한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예배도 안 빼먹고, 헌금도 잘 하니 신실한 성도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은 성경적인 참 복음이 아니다) 

 

 

루이스가 인간의 의지나 어마어마한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호감을 얻을 수 없으며, 자신을 치료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루이스는 정반대의 해법을 제시한다. 구원의 열쇠는 기꺼이 항복하고, 회개하며, 심지어 그리스도의 성품과 대립되는 모든 것에 대해 죽고자 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반역자들이다. 따라서 출발점은 우리의 무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직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 적의 영토에서 빠져나온 뒤에 하나님의 진영으로 귀순해야 한다.

 

탈출로에는 지뢰, 철조망, 포탄의 파편들이 널려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중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과정은 다음 세계에서도 이어질 것이다. 우리의 지휘관께서는 이 길 혹은 다른 길, 이생 혹은 다음 생에서도 우리가 그의 명령을 따르기만 한다면 우리를 반드시 귀환시키겠노라고 약속했다.

 

 

 

다시 말해 회개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단순히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다. 이는 사실상 죄인의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자기중심적 기질들을 모두 제거하는 과정이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되찾으려 할 때에 요구하시는 전제 조건이 아니다. 그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변화의 과정이 끝나기 전에 죽는다 해도, 정화의 과정은 무덤을 지나서도 지속될 것이다.

 

 

 

[개인 기도]에서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영혼은 연옥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은가?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 아들아, 사실 너에게서 악취가 나고 네 낡은 의복에서 진흙과 오물이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너를 불쌍히 여기고 있으니 아무도 그런 것들로 너를 비난하지 않고 너를 배척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기쁨에 동참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루이스는 하나님께서 죽음의 순간에 일방적으로 우리를 완전한 존재로 변화시킨다고 믿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충분히 성결케 되고, 변화되며, 완전해질 때까지 이와 같은 성품 형성의 과정에 자유롭게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는 진실로 천국을 즐길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피조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다.

 

타락한 인간은 완전한 회개와 복종을 행할 능력이 없다. 그들은 교만으로 가득하여 겸손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 루이스는 이 점에 있어서 흥미로운 아이러니 하나를 지적한다.

 

오직 나쁜 사람만이 회개할 필요가 있지만, 오직 선한 사람만이 완전하게 완전하게 회개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회개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선하시다. 그러나 그 분은 회개할 필요가 없으시다. 사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존재 안에서 회개와 복종, 죽음을 경험하실 수 없다. 그분은 불변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그분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여기서 바로 루이스는 성육신을 이상적인 해법으로 본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회개자가 되시기 위해 인간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인간의 속성을 받아들이심으로 완전한 겸손 가운데 회개하시고, 복종하시며,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

 

 

 

이는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으로는 하실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속죄가 의미하는 바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해 완전한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행의 모델이나 도덕론에서 주장하듯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완전한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진짜 이유는,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 분이 우리를 통하여 같은 일을 하기 위함이셨다.

 

여기에는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믿음이 수반된다. 속죄는 법적인 형벌의 행위라기보다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속죄를 통해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한 회개를 이루셨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회개와 복종, 그리고 죽음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교만을 극복하시고 완전한 겸손으로 구원에 이르셨다. 완전한 겸손은 영원한 생명에 필요한 유일한 성품이다.

 

 

 

이처럼 구원을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는 변화의 과정으로 구상하는 것은 루이스의 저작에서 되풀이되는 주제이다.

 

그는 우리의 성품 형성과 궁극적인 구원을 가로막는 유일한 것이 내키지 않는 태도라고 못 박았다. 루이스는 구원이 비록 우선적으로는 과정이지만, 결정과 항복을 요구하는 중요한 순간들이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는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 나오는 인상 깊은 장면에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루이스는 자기 어깨 위에 놓인 빨간 작은 도마뱀의 간섭 때문에 천국 생활에서 주눅이 든 한 혼령을 그리고 있다. (욕망을 상징하는)이 도마뱀은 그의 귀에 대고 절망적인 말들을 속삭인다.

 

도마뱀은 그에게 자기가 없이는 행복하게 살지 못할 뿐 아니라, 더 이상 살 수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 천사가 나타나 도마뱀을 침묵하게 하자고 제안한다. 처음에 그 혼령은 동의한다. 그러다 그는 천사의 그 말이 도마뱀을 없애자는 말임을 알게 된다.

 

그러자 혼령 뒤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도마뱀을 죽여야 할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소. 어쩌면 내가 저 녀석을 잘 다룰 수도 있을 것 같소. 나는 지금 당장 죽이는 것보다는 찬찬히 두고 지켜보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천사는 그에게 그런 점진적인 과정은 이러한 경우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 설득한다. 천사는 다음과 같은 방안을 내놓는다.

 

나는 네 의지가 없이는 저 녀석을 죽일 수가 없네. 허락해 줄 수 있겠나?” 결국, 극적인 갈등을 거친 다음 그 혼령은 천사에게 도마뱀을 죽이도록 허락한다. 천사가 일을 수행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 도마뱀이 눈부신 종마로 변신한 것이었다. 또한 그 혼령 역시 화려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품위 있는 사람으로 변신하여 그 말을 타고 천국의 영광으로 임하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내놓는다.

 

그 어느 것도, 가장 좋고 가장 고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 있는 그대로 나아갈 수 없다. 그 어느 것도, 가장 저열하고 가장 상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죽음에 굴복한다면 다시 부활할 수 없다. 욕망은 그것이 죽었을 때 떠오를 갈망의 풍부함과 에너지에 비교하면 가난하고 빈약한 불평의 하소연이다.”

 

 

 

이는 마치 죄가 그 매혹적인 약속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궁극적인 파괴와 비참함을 대표하듯이 참된 성품 형성은 우리의 궁극적인 만족과 성취를 대표한다는 중대한 원리를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가 천국을 누리려면, 완전한 도덕적 변화는 타협할 수 없는 선행조건이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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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터 맥그라스의 [Mere Theology] 책 Ch4. 를 보면 이 둘의 신학을 비교해 둔 부분이 나온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신학 여정은 내가 신학을 바라보는 여정과 흡사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약 13년 전,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 등을 보면서 모든 세상이 다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희열과 기쁨에 가득찼던 시절이 있었다.  실제로 죽음을 경험하면서 [헤아려본 슬픔]과 같은 반응이 나오는 순간이 있었다.

 

 

 

존 비버슬루스(John Beversluis)의 논평

 

"[헤아려 본 슬픔]은 고통스러운 책이다. 그것은 이 책이 고통, 죽음, 위태로운 신앙을 다루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루이스가 그동안 반드시 대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 질문, 그의 이전 신앙에 결정적일 정도로 중요했던 그 질문에 대해 반응도 없고, 대답도 없는 상태로 남겨진,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재발견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이성으로 모든 것이 다 설명될 것 같았던 계몽주의적 세계관이 좀 더 실존주의적이고, 경험론적인 방향으로 인식을 전환한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루이스가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 보기 전에 썼던 [순전한 기독교]는 내 인생을 바꿔 놓을 만큼 훌륭했지만, 사랑을 경험하고 나서 썼던 [네 가지 사랑]은 나를 전율하게 했고, 루이스가 고통을 합리주의로 적절히 버무려 놨던 [고통의 문제]는 내 신앙을 바꿔 놓을 만큼 훌륭했지만, 그가 고통을 영혼 깊숙한 곳까지 경험하고 나서 썼던 [헤아려본 슬픔]은 나의 영혼을 움직였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지닌 역설적인 면모는 쟈크 엘룰의 세계관처럼 이율배반적인 우리들의 삶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굉장한 힘이 숨어 있다.

 

실제로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나면 그와 같이 '설명되지 않는', 그러나 너무도 생생한 '실존적 신학'이 내 삶에 들어오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을 활용한 논리 정연한 '신학'이 부정되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전의 루이스도 이후의 루이스도 모두 존중 받아야 하며 실존과 이성이 함께 어우러져서 궁극적으로 온전한 빛 되신 하나님을 보게 될 날을 고대해야 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담이지만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를 보면 칼빈주의적 세계관과 마틴 루터의 이율배반적 세계관이 서로 대비되어 등장한다. 낸시 피어시의 [완전한 진리]를 읽을 때 느끼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전율은 대단하다. 세상을 승리할 것만 같은 십자가의 힘에 전율한다. 그러나, 실존적이고 경험적인 삶의 무대에서 책의 메시지는 쉽사리 발현되지 않는다. 그 때 우리는 마틴 루터 또는 쟈크 엘룰의 메시지를 떠올리게 된다. 이율배반적이고, 역설적인 세상 속에서의 삶을 감내해야 하는 우리의 삶은 새로운 세계관을 요구할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배척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되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매꿔줄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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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C.S 루이스

출판 홍성사

발매 2010.12.15

 

 

 

 

 

 

 

  생일 선물로 받아서 기억에 남는 책이다.

 

 

  365일 묵상집 형식으로 C.S 루이스의 글을 만나볼 수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그의 저서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을 성경 묵상과 병행하는 것도 유익한 면이 있을 것이다.

 

 

  기존의 묵상집처럼 말씀 자체에 귀를 귀울이게 해 주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도움을 주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러나 그가 명료한 논증과 깔끔한 문체로 전달해 주는 다양한 주제의 기독교 이슈에 대해 짤막짤막 하게 혜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이 묵상집의 차별화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의 효력', '기도와 예정', '스크루테이프, 민주주의를 말하다', '교만과 허영심의 차이' 등과 같은 제목을 봐도 그가 어떤 논의를 펼칠지 궁금해 지기 시작할 것이다.

 

 

  "인간은 기차가 여러 역을 통과하는 것처럼 여러 단계를 통과해 버리지 않는다. 살아 있는 한, 인간은 언제나 움직이면서도 지나온 것들을 그대로 간직하는 특권을 누린다. 과거의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현재의 우리 안에 남아 있다."

 

 

  금세기 기독교가 낳은 최고의 인물을 한 명 꼽으라면 C.S LEWIS를 꼽고 싶다.

 

 

  그 만큼, 그의 이야기는 계속 반추해 보고 싶어지고, 계속 들어보고 싶다.

 

 

  그의 가치를 알고, 도움을 받아본 이들에겐 이 묵상집이 더 없이 소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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