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를 말하다'에 해당하는 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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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라이트

출판 에클레시아북스

발매 2011.05.12

 

 

톰 라이트가 나타났다. 그의 가장 논쟁적인 책이다.

 


 

'칭의'(Justification) 는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가장 애지중지하는 개념 중 하나다.

 


 

 그런데, 그는 이 부분을 종교개혁자들이 성경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한다.

 


 

 예상했던 대로 존 파이퍼 목사님은 눈에 불을 켜고, 톰 라이트와 vs 구도를 그리면서 배틀 도서를 냈고, 라이트는 그에 대해 여유롭게 응수하며 다음과 같은 화답서를 출간한다.

 


 

승패를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파이퍼가 쓴 [칭의 논쟁] 과 톰 라이트가 쓴 [칭의를 말하다]를 통해 두 인물의 이야기를 거의 처음 들어봤다.

 


 

제 3자가 봤을 때 라이트의 압승이었다. 파이퍼는 계속 뒤에 가면 그 부분을 격파시켜 주겠다고 호언장담 하지만 결국 싱겁게 책을 끝내 버린다. 그냥 "종교개혁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 때 정립된 교리와 개념을 그렇게 바꾸려고 하면 안되는 거야~ 그건 잘못된 거야 ~ 알지? 그건 진짜 중요한 거야" 라는 말을 하고 끝내버리는 느낌이다.

 


 

라이트의 주장은 사실 계속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성경 속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자'였다! 라는 나의 기본 개념마저도 흔들어 놓는 그의 대담한 '역사적 눈으로 성경 읽기'는 마음을 심히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칭의' 논쟁에 대해 이 책만 읽고 나면 라이트의 주장에 설득 당하지 않기가 정말 어렵다.

 


 

무슨 마법을 쓰는 것 처럼, 그의 주장은 정교하고 논리가 탄탄하며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힘이 있다.

 


 

일단 몇 가지 지식을 나눠보자.

 


 

  존 파이퍼는 '의'(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가 죄인에게 '전가'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처음 믿는 순간부터 마지막으로 하늘나라에 도달하기까지 죄인을 그와 같은 상태로 옷 입히는 것을 '칭의'라고 본다.

 


 

  그러나 라이트의 주장은 바울은 파이퍼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 세부적인 내용을 자세히 풀어 쓴 책이 바로 [칭의를 말하다]이다.

 


 

 그는 먼저 '전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통이란 극히 세심하고 경건하며 박식한 사람들의 전통이라 할지라도 결국 사람의 전통이다. 내가 루터와 칼뱅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 특별히 칼뱅을 읽었을 때, 나는 그들이 말하는 내용 전부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진술하고 실천한 성경 읽기 방법만은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방식이란 나 자신을 성경 속에,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구약성경과 그리스어로 된 신약 성경 안에 푹 담그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성경이 나의 혈액을 따라 흐르게 하는 것으로서, 나는 내가 교회와 세상에 성경을 신선하게 가르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소원했었다. 우리가 종교개혁자들에게 보내야 할 가장 위대한 경의는 그들에게 오류가 없다고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그들에게도 섬뜩한 일일 것이다), 그들이 행한 대로 우리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의 수준에서 상당한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존 파이퍼는 내가 '교회가 1500년 동안 곤경에 빠져 있다는' 식의 말을 했다고 암시한다. 내가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파이퍼의 영웅인 루터와 칼뱅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말로 공격했었다. 그때 루터와 칼뱅은 성경을 통한 대답을 했고, 트렌트 공의회는 전통에 의거하여 대응했다."

 


 

  아직 책은 28page로서 제대로 된 논의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지만 이 말만 읽어도 라이트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가 보여주는 자신감의 근원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전통으로 덤빈다면 나는 나의 명검인 '성경'으로 너희를 격파해 주겠노라"

 


 

  그토록 '진리'를 강조하며, 기존 체계를 흔드는 라이트의 등장에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내는 '파이퍼', 보수 기독교 측은 이 황당한 말에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라이트의 위대한 공헌은 그가 정말로 성경과 역사의 엄밀성을 가지고 자신의 논리를 설득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사실, 나같은 초보 신자는 반대측 진영이 라이트의 주장을 성경대로 격파해 주는 걸 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이승구 교수님, 존 파이퍼 목사님 등의 적극적인 시도는 책의 내용으로 볼 때 전혀 라이트를 이겨내기 어려워 보였다)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기존 기독교에 폭탄을 날린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먼저 내가 다루고 싶은 핵심 본문들뿐만 아니라 구할 수 있는 신학 사전과 성경 사전들에 수록된 '칭의'에 대한 내용들도 꼼꼼히 읽어보았다. 그때 반복적으로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저자들이 성경 본문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보일 때에도 바울의 교리에서 핵심적인 요소들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시된 주제들을 나열하면, 아브라함과 하나님께서 그와 맺으신 언약,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 부활과 새 창조,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 역사를 통해 지속된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계획이라는 의미에서 종말론, 그리고 특별히 성령과 기독교적 인격의 형성이다. 이 주제들은 어디로 가 버렸나?"

(제임스 패커의 글에서는 이런 것들을 예외적으로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바울에 대한 논의는 그의 후속작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에서 더욱 자세하게 이어진다.

 


 

그가 말하는 '칭의'는 아직 들어가지 않았지만, 굉장히 천재적인 비유가 나온 부분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선작업에 동의가 되어야 이후에 펼쳐질 논의를 받아들일 마음 문이 열리게 된다.

 


 

"후대의 교리와 경건한 의지가 자체적으로 새로운 일련의 사고를 만들어낸 것이다. 다시 음악과 관련된 비유를 들어보겠다. 피아노의 댐퍼 페달을 누르고 낮은 '라' 건반을 눌러보자. 피아노가 조율이 잘 되어 있다면 곧 다음 옥타브의 '라'가 공명되어 울리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 위의 '미'가 들리고 그 다음 '라'가 들린다. 그 다음은 '올림 도', 그리고 또 '미'가 들릴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조금 혼란스럽다. 화성진행에 따르면 다음 음은 약간 내린 솔 제자리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가능하다. 이 모든 음들, 몇 개의 '라'가 원래 '라' 음을 강화해주고, '미'와 최소 1개 이상의 '올림 도'는 실제로 원래 음들의 일부를 이룬다. 피아노와 같은 악기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그 음들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실제로 그 음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을 듣다가 '미' 음만 귀에 들어와서 '미' 건반을 누르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들어봐! 이게 바로 우리가 듣고 있던 그 음이야!") 물론 '미' 음도 원래 '라' 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미' 건반을 누르는 순간 이전과는 다른 상이한 조합의 공명이 시작된다. 즉 다른 '미' 음이 들리고, '시', 또 '미', 그리고 '올림 솔' , '시' 와 같은 음이 공명하기 시작한다.

 

 


종교 개혁 이후 수 세기 동안 교회에서 바울을 적용하려 했을 때 발생한 일이 바로 이러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잠시 동안 루터와 칼뱅이 (물론 그들 사이에는 주요한 차이가 있다. 성급하고 때로는 분노한 반-새관점 운동에서는 이러한 차이도 얼버무리곤 한다) 바울이 이야기했던 내용에서 진짜 배음을 실제로 들었다고 치자. 바울이 댐퍼 페달을 밟고 '라' 건반을 누르자 울려 퍼진 화성의 다섯 번째 음인 '미'를 그들이 들었고 그 '미'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말이다. 그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개신교 내부에서 상황은 계속 변화했다. 다양한 형태의 운동들이 오고 갔다. 18세기 대륙의 계몽주의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완전히 개신교적인 운동이었다. 즉, 권위적인 종교를 제거하고, 분명하고 합리적이며 역사적인 질문들을 던졌다. 그 후 건조한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낭만주의 운동은 개신교의 정서가 지닌 또 다른 흐름을 담게 되는데, 이번에는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이 아니라 내적인 감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다양한 종류의 경건의 모습들이 나타나서 번성하다가 변형되고 그 유산을 남겼다. 마지막에는 (물론, 지금의 설명은 긴 역사를 과도하게 단축시킨 이야기이다) 실존주의가 나타나서 진정한 신앙의 핵심으로서 그리고 진정한 신앙을 판정하는 척도로서 본래적 사람의 경험을 들여다보았다. 그 기간 동안 순전하게 종교개혁자들에게 돌아가려는 흐름 같은 것은 없었다. 그들의 반향실(Echo chamber) 속에 들어가 반복해서 그들 자신의 말을 듣고 또 들었을 뿐이며, 반향실이 존재하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들의 바울 읽기는 그러한 반향실을 통해 계속 전달되었기 때문에, 결국 사도 바울의 원래 목소리는 완전히 들을 수 없는 정도가 되어버렸다. 결과적으로 피아노의 모든 음들이 명랑하게 울려 퍼지고 있는 상태가 되어, 처음에 울렸던 음을 알아내보려는 어떤 노력도 가망이 없어 보인다.

 

 


  물론 우리가 역사로 되돌아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울은 그 역사속에서 그 이야기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었던 이야기의 뿌리를 들여다보았다. 후대 교회 지도자들의 신망 있는 전통이나 좀 더 최근의 학자들의 그보다는 덜 신망 있는 각주들보다, 성경 그 자체에 귀를 기울이려 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향해야 할 곳이 바로 역사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16세기의 문제들과 19세기의 시각들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왔다. 이제 21세기의 문제들과 1세기의 시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을 때가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의 말을 어떤 재주로 반박할 수 있을지 모르겟다.

 


 

만약 파이퍼의 주장대로 '전가된 의'가 기독교에 핵심적이고 목숨을 걸만큼 중요하다면 바울이 왜 그에 대해 드러내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는지에 대해 고민을 해 봐야 한다고 라이트는 주장한다.

 


 

파이퍼는 16세기 기독교 갱신 운동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는 거라면 라이트는 1세기로 돌아가서 성경을 보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난감하다. 이 두가지가 대립관계에 놓이면 기독교인은 당연히 '진짜'에 기준점을 두는 게 맞지 않나?

 


 

  라이트는 칭의에 대한 논의를 전개함과 동시에 파이퍼의 주장들의 비논리성을 반박하고, 2부에서는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고린도서, 에베소서, 로마서를 세밀하게 주해한 뒤 결론에 도달한다. (성경 해석과 역사 지식으로 무장해 버리면 정말 쉽지 않다)

 


 

놀라운 그의 주해는 생략하고, 끝 자락의 이야기를 몇 가지 들어보자.

 


 

"우리가 많은 개신교에서 전통적으로 생각해온 방식을 따라 '이신칭의'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현재 행하고 있는 행위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우리는 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으로만' 이라는 요소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에 부딪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울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셨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전 세계와 맺으신,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바울의 성경적 신학이라는 더 큰 틀에서 이신칭의를 바라본다면, 결과적으로 완전히 바울과 부합하는 그 큰 틀로부터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행위들'의 위치(때때로 이런 식으로 언급된다)를 이해할 수 있는 쉽고 곧은 길을 발견하게 된다. 이 길은 어떤 방식으로도 '이신칭의'와의 연대를 위협하는 형태를 띠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스라엘이 엣 종교개혁이 주장한 의미에서 '행위로 얻는 의'를 추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이스라엘은 선한 도덕적 행위를 행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호의를 얻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상기하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 구출한 백성이었고, 그들이 지닌 율법은 이미 구속받은 백성들을 위한 삶의 방식으로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렇다: 이스라엘의 실수는 하나님의 목적을 오해한 데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전-세계를-위한-이스라엘-통한-단일-계획으로 보지 않고, 세상과는 무관한-이스라엘을-위한-단일-계획으로 보았다.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된 악한 것이라는 루터의 틀도 아니며, 그리스도가 율법에 순종하여 그 결과 '의'(행위로 얻는 의 라는 면에 주목하라)를 획득했고, 그 의가 믿는 사람들에게 '전가'된다는 칼뱅의 틀도 아니며, 하나님과 그의 이스라엘에 대한 신실함에 관한 내러티브가 메시아 안에서 그 종착점에 도달했다는 바울 자신의 유대적 사고 틀 안에서 진정한 의미가 파악된다."

 


 

 상당히 충격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으로 라이트는 율법을 부정적으로 간주하려던 루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율법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려뎐 칼뱅을 뛰어넘어 더 정확한 관점에 도달한다.

 


 

 신광은 목사님의 [천하무적 아르뱅주의]에서도 루터의 '이신칭의'가 우리로 하여금 믿음과 행위를 서로 대립관계로 여기게 만들어 기독교의 윤리관에 타격을 주고, 신앙이라는 것을 이상한 수준으로 쪼그려 놨다고 말했었는데 라이트의 성경적, 역사적 맥락 안에서 우리가 바른 '지식'을 지니게 되면, '행위'도 자연스레 회복시키면서 참된 하나님과의 신앙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오직 의로우신 분은 하나님 뿐이다! 라는 그의 선언은 빛이 난다.

 


 

의는 '전가'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고백 또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명증한 방법이다.

 


 

성경 주해를 세밀하게 하는 부분에서는 꽤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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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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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라이트

출판 에클레시아북스

발매 2011.02.10

 

 

톰 라이트의 [칭의를 말하다]에 이은, 그의 대표저작 중 하나이며 역시 논쟁적인 저서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을 한다.

 


 

1. 바울은 '복음'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나?

2. 바울은 예수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3.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 이방종교에 도전하였나?

4. 이스라엘에게 던진 바울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5. 바울은 '칭의'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나? (이 부분은 [칭의를 말하다]와 겹치는 부분이다)

6. 바울은 진정 기독교의 창시자였나?

 


  제임스 던의 말처럼 라이트는 본문이 말하는 내용을 단순히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열정과 예리한 지성을 활용하여 문제의 옮고 그름을 따진다. 그러다 보니 라이트의 주장이 다 동의되는 건 아니더라도 그의 논리에 감탄을 하게 된다.


  이 책에서 그는 바울서신인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를 집중적으로 주해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그는 다음과 같은 화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기들은 위대한 사도인 바울에게 충실하며, 그가 자기들의 진정한 길잡이라고 큰소리로 떠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바울의 사상 중 일부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바울이 똑같은 관심을 쏟은 나머지 부분은 관심 밖으로 내던져 버리거나 심지어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래도 칭의 논쟁의 연장선 상에서 기존의 기독교 계가 걸어왓던 행보 구석구석의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는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아니~ 우리가 종교개혁의 취지를 잘 반영하면서 철저하게 개혁주의적 신앙을 구축해 놨는데 우리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라고 느낄 것이다)

 


 

라이트는 바울 신학에 대한 대표적인 입장들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주는데


1) 슈바이처

2) 불트만

3) 데이비스

4) 케제만

5) 샌더스


의 입장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슈바이처만 잠깐 살펴보면 슈바이처는 '이신칭의' 바울신학의 주장처럼 로마서 1~4장이 로마서의 진정한 핵심부라는 의견에 반대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 바울 신학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5~8장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고 슈바이처는 다음과 같은 질문 4가지를 우리에게 남겨주게 된다.

 


 

1. 바울을 1세기 종교의 역사 속 어느 지점에 둘 것인가?

2. 그의 신학을, 그 신학의 출발점과 핵심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3. 바울 자신이 각각의 편지들 속에 집어넣으려 했떤 내용을 거꾸로 끄집어 내면서, 어떻게 그 편지들을 읽을 것인가?

4. 그리고 이런 작업의 결과와 부산물을 우리 자신의 삶, 우리 자신의 직업과 관련지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슈바이처의 공헌이 있다면 그는 바울을 유대교의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고 바른 주장을 한다. (이 부분이 요즘 너무 무시되고 있다고 라이트는 이야기 한다) -> 그러나 슈바이처 박사는 바울을 세계에 종말이 곧 닥칠 것이라고 믿었던 묵시적인 유대인으로 바라봄으로써 너무 과하게 나아가 버렸다.

 


 

  불트만의 주장은 어느 정도 반박되며 배제된다.(그 당시 시대 상황에 통용되던 실존주의 철학 등에 의존하여 바울을 해석한 점에서 한계가 드러난다, 즉 유대교 맥락으로 바울을 읽기보다는 헬레니즘 적 방법론으로 바울에게 접근하여 문제를 드러냄)

 


 

  데이비스는 유대교 랍비와 바울을 비교 연구하는데 장점도 있었지만 전폭적인 지지를 받진 못했다. (랍비 관련 자료들의 상당수가 바울이 살았던 시대보다 몇 세기 후의 것들이었다)


  케제만에 대해서는 앞선 선배들의 정신을 적절히 혼합하여서 그나마 나은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라이트는 말한다.


  라이트가 말하는 케제만은 이러하다.

 


 

"무인도에 함께 가면 좋을 한 명의 바울 해석자를 고르라면 나는 케제만을 택할 것이다. 힘찬 기세와 주해에 있어서의 솔직함과 철저함, 진리와 자유를 향한 열정으로 가득한 그의 저작들은 훌륭한 읽을거리이며, 언제나 신선한 눈으로 바울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나를 이끈다. 나는 그의 견해에 상당 부분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를 향한 큰 존경과 감사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라이트는 현재 바울 신학계에서 1)~4) 까지의 학자를 다 합친 것보다 영향력이 큰 학자가 있으니 그는 바로 '샌더스'라고 말한다.(과거 옥스퍼드에서 라이트의 동료였다)

 


 

바울 연구를 하는 사람은 누구도 샌더스의 자료를 피해갈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사실 샌더스가 주장했던 '언약적 율법주의' 가 내겐 큰 충격이었다. 그가 주장했던 것은 바울 당시의 유대교는 행위로 말미암은 의를 주장하는 율법주의적인 종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개신교 주해가들과 의견이 다른 것이다. 대부분의 개신교 주해가들은 유대교를 옛 이단 중 하나인 펠라기우스주의의 한 형태로 이해하고 있는데(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사람의 노력과 행위로 의와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샌더스는 반대하는 것이다.

 


 

  즉 그가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으로서 감사의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지, 그러한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겠다고 행하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언약 백성으로 들어가기 (get into)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머물기 (stay in)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샌더스는 바울 사상의 중심이 칭의나 이스라엘에 대한 어떤 비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바울 사상의 중심은 '참여' 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슈바이처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초점 삼아 바울의 사상을 복합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라이트는 샌더스가 이렇게 중요한 틀을 제시했으면서 바울 서신의 구절들에 대한 상세한 주해를 하지 않은 점을 비판한다. 어떤 틀이 실제로 얼마나 효과를 발휘하는지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주해 작업은 필수라고 주장하면서 라이트는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라이트의 주장대로라면 나는 아직도 보수 주의 신학파가 되어 버린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특별히 보수 학파에 있는 이들은 샌더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반응했다. 그들은 유대교를 최초의 펠라기우스주의로 보는 옛 관점, 즉 구원을 얻는 방법 측면에서 사람의 자기 노력('율법의 행위')을 거부하고 이신칭의를 설파한 교사로서 바울을 보는 관점을 사력을 다해 부활시키려 했다."

 


 

그리고 라이트는 샌더스를 이렇게 평가하며 마무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더스는 바울 신학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정직한 학자라면 그의 중심 논제에 대한 중대한 반박이 가해지기 전까지는 그를 무시하고 작업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런 반박은 일어날 수도 없고, 나는 그가 주장하는 기본 논점이 이미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바울을 1. 역사, 2. 신학 3. 주해 4. 적용의 측면에서 분석해 들어가는데

 


 

 예를 들어 역사적 측면에서는 바울을 헬레니즘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은 거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고, 정확한 분파는 논쟁이 붙어 있지만 극히 유대적인 사상가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의 생애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바울이 사울이었던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사울'이라는 유대인도 좀 전의 논의처럼 행위로 의를 얻으려고 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이 바란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죽었을 때 천국에 가는 것'에 대해서도 사울과 같은 유대인들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부활을 믿었는데 그 부활은 하나님이 약속한 새로운 이스라엘과 새로운 세계의 생명을 함께 누리도록 모든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사건이며, '천국'에 대한 서구의 일반적인 견해와는 그 의미가 매우 다르다)

 


 

그러던 사울이 회심을 하게 되는데 이 전환의 핵심은 이러하다.

 


 

"다소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눈이 멀고 아마도 멍이 든 채 엎드려서 품었을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의미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역사의 한 중간 지점에서, 사울이 생각하기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역사의 마지막에야 행하실 그 일을, 한 사람 나사렛 예수를 위해 행하셨다는 것이다. 사울은 이스라엘이 이교도들의 손에 고난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옳다고 판결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이교도들의 손에 고난을 받은 후에 예수가 옳다고 판결하셨다."

 


 

  그 이후에 사울은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는데 그 관점은 이전에 지니고 있었던 언약 신학에 깊고 확고하게 계속 뿌리박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스라엘의 숙명이 메시아이신 예수 안에서 집약되고 성취된 것이다)

 


  즉, 바울은 다른 무언가를 위해 유대교를 포기한 게 아니라는 점을 라이트는 강조한다. 즉 바울은 유대교의 오랜 이야기가 나사렛 예수 안에서 그 이야기의 절정과 성취에 이르렀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인이 되어 박해를 받은 것이지 유대교를 버리고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에 대한 새관점을 지지한 톰 라이트)

 


 

그 다음으로는 바울의 '복음'을 이야기해 보자.

 


 

  바울은 하나님과 세계의 이야기가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 안에 집중되고 요약되었으며, 그 예수의 이야기가 바로 전 세계를 위한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믿었다. 바을 신학에서 핵심은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 였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복음'에 대한 논의는 '부활'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는데 바울이 훈련 받았던 바리새인의 배경에서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

 


 

  단지 시체가 다시 살아나는 개념의 '육체의 부활'이 아닐 뿐인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전 15장 44절에서 '영적인 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는 플라톤 철학의 관점에서 (즉 비물질적인) '영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말은 '영'으로 구성된 (어떤 면에서는 물리적인) 육체라는 의미이다.

 


 

  '복음'에 대한 라이트의 말을 들어보자.

 


 

  "바울은 그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어떤 방법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한 것도 아니며 '예수'라는 이름과 '그리스도'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졌던 한 인물이 우연히 달성해 낸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한 것도 아니다. 그는 메시아의 구원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개인적이고 비역사적인 의미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바울의 복음 요약]

1.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꼭 집어 이야기하자면 그의 십자가 안에서, 죄와 사망을 포함한 모든 악의 권세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2. 예수의 부활 안에서 새로운 시대가 동텄다. 모든 예언들이 성취되고, 이스라엘의 유배 생활이 끝나며 모든 세계가 유일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날이 시작되었다.

3.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예수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메시아, 즉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이었다.

4. 따라서 예수는 주이시다. 즉 그는 이 세상의 참 왕이시며, 또 모든 무릎이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바울은 복음이 그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정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복음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실제로 그 힘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와 같이 바울에 대해 살펴보고 나서는 그가 유대교의 유일신론에 충실하면서 그 속에서 삼위일체를 자연스레 바라보고 있었던 점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논증을 펼치고 '칭의'에 대한 논의를 덧붙인다.

 


 

  의의 '전가'라는 개념을 반박하는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하지만 그들이 얻게 될 의가 하나님 자신의 의는 아닐 것이다. 그 의가 하나님 자신의 의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나님 자신의 의는 언약에 대한 그분의 신실하심을 말하며, 그 신실하심 때문에 (이스라엘이 소망하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정당함을 입증하시고, 그들의 정당함이 입증된 혹은 무죄가 입증된 피고가 소유하는 '의'의 상태를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여전히 하나님 자신의 특징이다. 하나님의 의는 자신의 백성이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그가 행동하시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시는 가운데 이스라엘에게 부여하는 상태가 하나님의 의는 아니다."

 


 

(이런 부분에서 기존 개혁주의 신학의 엄청난 반발을 얻었다)

 


 

[하나님의 의 라는 개념을 해석하기 위한 편리한 구성]

A. 하나님 자신의 '의'

 A1. 도덕적인 특징으로서의 의('하나님의'를 소유격 속격으로 본다)

   A1a. 분배적 정의 (마틴 루터)

   A1b. 언약에 대한 신실함 (톰 라이트)

 A2.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의 능력으로서의 의 ('하나님의'를 주격 소격으로 본다)

  A2a. 언약에 대한 신실함에서 오는 행위 (A1b와 이걸 융합시켜야 한다는데?)

 A2b. 언약과 무관한, 세계를 정복하는 행위 케제만)


B. 사람에게 주어지는 '의'

  B1.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로운 상태로서의 의 ('하나님의'를 기원의 속격으로 본다)

   B1a. 전가된(imputed) 의

   B2b. 분여된(imparted) 의

  B2.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혹은 '하나님께 가치가 있는' 특성으로서의 의('하나님의'를 목적격 속격으로 본다)

   B2a.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타고난 특성

   B2b.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특별한 선물로서 차후에 인정되는 특성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책을 참고하도록 하고, 결론을 말하자면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신의 의를 지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실제로 유대교 배경은 매우 강력하게 이런 내용을 찬성하는 전제를 만들기 때문이다. 만일 이에 반대되는 주장을 바울이 했다면 그건 바울이 유대교 배경을 저버렸다는 말이 되므로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라이트는 지금 이 시대에도 참된 바울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되어질 수 있고 이를 통해 믿음과 행함의 온전한 일치와 사회 속으로 뻗어 나가는 실천적 신학이 가능하다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가 논증을 해 나가는 구석구석을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바울 서신에 입각하여 철저한 주해 작업을 해 나가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는 신뢰성이 더해진다.

 


 

  그 동안 교회에서 들어오던 것과는 너무 다른 주장을 하는 것 같아서 어리둥절 하고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그는 철저히 성경과 역사에 기반해 있음을 기억해 보면서 설득 당할지, 거부할지를 선택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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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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