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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도에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단연코 렌고쿠 쿄주로다.

 

일본 애니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편' 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그는, 강단 있고 올곧으며

약자를 돌볼 줄 알고, 자신의 신념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정의를 지녔던 사람이다.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정의로운 사람을 찾기가 힘이 든다.

 

정의와 상식을 지키면 손해를 보고, 공격을 당하기 일쑤다. 이 싸움은 사람을 상당히 지치게

만든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고 싶어도, 받을 사람 찾기도 힘들다.

 

 

최근 오은영 선생님이 파이터 김동현에게 해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진짜 용감한 것은 부당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눈에 안 보이는 것에 대해 잘 

놀라는 건 겁쟁이라서가 아니고, 안전에 대한 욕구가 크고 통제, 예측을 더 잘하려는 신중함의 결과일 뿐이다.

 

약한 자를 괴롭히고, 유린하는 이들에게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건 멋진 일이다. 세상에선 인정받기 어렵고,

오히려 고난을 당하지만 말이다.

 

요즘들어 이런 이슈를 다루는 애니나 웹툰을 찾게 된다.

 

[다이의 대모험], 웹툰 [캐슬], 웹툰 [참교육] 을 보면서 그저 위로 받는다. 

 

도움 받을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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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스타의 가성비..  (0) 202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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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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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셔머의 <도덕의 궤적> 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뒤에 Reference 를 제외하고도 650page에 달하는 상당한 볼륨을 자랑하는 책입니다.

 

이야기의 요지는 '과학'과 '이성'이 인류에 혼란을 초래하거나, 비도덕을 유발한 게 아니라 오히려 '진리', '정의', '자유'를 이끌어 냈다는 대담한 주장을 하는 책입니다. 대개 종교, 신앙 등의 기준이 '도덕과 윤리' 등의 '가치'를 지탱해 주고, 과학은 '객관적 사실'의 영역을 지탱해 준다는 논점들이 주를 이뤘었는데요.

(데니얼 데닛, 리처드 도킨스 등의 강성 유물론적 무신론을 지향하는 이들은 이러한 이분법적 논거도 반대를 하며, 종교는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허구'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등의 책을 보면, 그의 강경한 어조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쓴 [도킨스의 망상]과 함께 보면 재미있습니다. 최근에 읽고 있는 존 레녹스의 [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을 보면 기독교적 변증이 상당히 잘 되어 있습니다. 도킨스와 레녹스, 맥그라스가 토론을 한 영상은 유투브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온건한 무신론 지지자들은 대개 종교의 역할을 일부 남겨두는 절충안을 지지해 왔었는데요. (개인적으로 이러한 이분법은 논리적이지 않고, 사실이라고 보기엔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셔머는 이젠 '도덕' 등의 '가치'의 영역도 과학과 이성으로 모두 설명이 가능하다 주장하며 그나마 남아 있던 종교의 자리를 가져가는 주장을 합니다.

책이 상당히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유신론을 지지하는 분들이 본다면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내용들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과학과 이성이 가져다 주는 순기능에 대해선 즐겁게 읽어 내려가면 되겠지만 이 두툼한 책을 다 읽으면 과연 전체 논리에 설득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해 집니다. 하지만 도킨스의 저서,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 데니얼 데닛의 저서들을 읽으면서 느꼈던 건 전제 자체가 달라서 그런지 논리가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맥그라스나 C.S Lewis가 쓴 변증서적이 훨씬 논리적이고 치밀해 보였습니다.

과학의 정의 자체가 생각보다 간단치 않은지라 여러 가지 논란이 있겠지만 이 책에 나온 내용을 간단히 고찰해 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과학]

과학은 과거나 현재에 관찰 또는 추론된 현상을 기술하고 해석하는 방법 체계로, 가설을 검증하고 이론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방법 체계라고 한 것은 과학이 사실들의 집합이라기보다는 과정에 가까움을 강조하는 것이고, 기술하고 해석한다는 것은 그 사실들이 자명하지 않음을 뜻한다.

관찰 또는 추론된 현상은, 자연에는 코끼리와 별처럼 우리가 볼 수 있는 대상들이 존재하지만 코끼리와 별의 진화처럼 우리가 추론해야 하는 대상들도 존재함을 뜻한다.

(개인 의견: 과학의 정의를 임의적으로 정하여서 자신들이 원하는 논거를 획득하고 있는데, 과연 직접 볼 수 없는 현상을 '추론'할 때, 그 가능성이 과학적 사실이라 불릴 만큼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과거나 현재라고 표현한 것은 과학의 도구들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뿐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과학에는 우주론, 고생물학, 지질학, 고고학, 그리고 인류 역사를 포함한 역사학이 있다.)

가설을 검증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 타당한 과학적 진리가 되려면 반드시 검증 가능해야 함을 뜻한다.

 

검증을 할 수 있어야 참임을 확증하거나 거짓임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을 구축한다는 것은, 과학의 목표가 수많은 검증된 가설들로부터 포괄적인 설명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과학적 방법을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관찰하고, 그것을 토대로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예측을 한 다음, 추가적인 관찰을 통해 그 예측이 맞는지 틀렸는지 검증함으로써 처음에 세운 가설을 확증하거나 반증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이 과정에서 관찰, 결론의 도출, 예측의 검증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그런데 관찰을 통한 데이터 수집은 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과학자는 가설에 따라 어떤 종류의 관찰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데, 이러한 가설들 자체는 관찰자의 교육, 문화, 특정한 편향을 통해 형성된다. 열쇠는 관찰이 쥐고 있다.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스탠리 에딩턴(Arthur Stanley Eddington) 경은 법적 은유를 사용해 그 점을 지적했다.

"물리학의 결론들이 참인지 가리는 최종 법정은 관찰이다."

과학은 모든 사실은 잠정적인 것으로서 언제든 도전받고 바뀔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은 그 자체로 '어떤 것'이 아니라, 잠정적 결론들을 이끌어내는 발견 방법이다.

[이성]

 

 

 

이성이란,논리와 합리성을 사용함으로써 사실을 확인하고 입증하며, 그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리고 믿음을 형성하는 인지 능력이다.

 

합리성(rationality)은 추측, 의견, 느낌 대신 이성을 사용해 사실과 증거를 바탕으로 한 신념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본인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실인 것을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인지심리학 분야에서 지난 몇 십년 동안 이루어진 연구가 보여주듯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합리적인 계산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감정에 좌우되고, 편향에 눈멀고,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도덕 감정들에 이끌리는 존재다.

확증 편향, 사후 확신 편향, 자기 정당화 편향, 매몰비 편향, 현상유지 편향, 거점 효과, 근본적 귀인 오류는 우리가 증거를 무시한 채 사실이기를 바라는 것을 실제 사실로 믿게끔 만드는 뇌의 수많은 '동기화된 추론' 방식들 가운데 단 몇 가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성과 합리성은 우리 뇌의 특징적 요소로 자리 잡았는데, 패턴과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일(이것을 학습이라고 부른다)을 위해 진화한 그러한 능력이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환경에서 생존과 번성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인지 구조의 일부가 된 이성이라는 능력은 일단 생긴 뒤에는 애초에 진화할 때는 의도하지 않았던 문제들을 분석하는 데 투입될 수 있다.

핑커는 이것을 열려있는 조합적 추론 체계라고 부른다.

"이성은 식량을 마련하고 동맹을 다지는 것 같은 일상적 문제들을 위해 진화했지만, 다른 명제들의 논리적 귀결로서 따라 나오는 명제들에 쓰이는 것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이러한 능력은 도덕에 중요하게 쓰이는데, "만일 어떤 종의 구성원들이 이성을 이용해 서로를 설득하는 능력을 갖고 있고, 그러한 능력을 발휘할 충분한 기회가 있다면, 그 종은 조만간 비폭력을 포함한 호혜적 배려가 서로에게 이익임을 발견하고 그러한 능력을 점점 더 광범위하게 활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 의견: 핑커의 설명은 진화 생물학을 '참'으로 전제한 상태에서 '이성'의 진화를 설명해 내고 있다. 독창적인 '가설' 정도로 간주하고 넘어가도 될 것 같다.)

 

수렵-채집인들이 하는 것처럼 발자취로 동물의 움직임을 추론하는 것은 명백히 생존에 도움이 되고, 우리는 자동차를 몰고 상점에 가는 것에서부터 달에 로켓을 쏘아 올리는 것까지 모든 일에 그러한 추론 기술을 활용할 수 있다.

과학사가이자 동물 추적 전문가인 루이스 리벤버그(Louis Liebenberg)는 우리의 과학적 추론 능력은 조상들이 발전시킨 사냥감을 추적하는 기술의 부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리벤버그가 찾아낸 추적과 과학적 방법의 유비 관계는 흥미롭고도 중요한 사실들을 드러낸다.

"추적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 정보가 수집되면 가설은 수정되거나 더 나은 가설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동물의 행동에 대한 가설이 세워져 있으면, 이 가설로부터 그 동물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들이 맞는지 틀린지 점검하면서 가설을 검증하는 작업이 계속된다."

리벤버그는 조직적인 추적('그 동물이 무엇을 하고 있었고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자세히 알 때까지 단서에서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것')과 사변적인 추적('단서들에 대한 초기 해석, 그 동물의 행동에 대한 지식, 그리고 지형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작업 가설을 세우는 것'으로, 이러한 작업 가설은 검증된 이론적 가설이 되거나, 확증되지 않을 경우 그 동물의 행방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이끌어낸다.)을 구별한다.

사변적인 추적에는 '마음 이론'(theory of mind, ToM)' 또는 '마음 읽기(mind reading)'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인지 과정이 수반되는데, 그 과정에서 추적자는 자신이 쫓고 있는 동물의 마음이 되어 그 동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상상함으로써 그 동물의 행동을 예측한다.

리벤버그는 고고학 및 인류학 증거를 토대로 인간은 적어도 200만 년전부터(호모 에렉투스 때부터) 사냥을 하고 조직적인 추적을 했으며, 적어도 10만 년 전부터 사변적 추적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러한 인지 능력이 언제 생겼든, 사자가 어젯밤에 여기서 잤다는 사실을 유추하는 신경 구조가 일단 자리를 잡으면, 사자를 다른 동물이나 사물로, '이곳'을 '저곳'으로, '어젯밤'을 '내일 밤'으로 대체할 수 있다.

이러한 추론 과정의 대상들과 시간 소요들은 서로 교환 가능하다.

오늘날의 예를 들면, 우리가 구구단을 외워서 7 곱하기 5가 35임을 알면, 5 곱하기 7도 35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이 방정식에서 5와 7은 교환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잡아먹을 동물을 추적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추론 능력들을 위해 진화한 신경계의 부산물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목적을 위해 진화한 뇌가 다른 목적에 쓰일 수 있으며, (먹잇감에서부터 사람들까지) 수많은 조합과 옵션을 아우르는 한 방정식의 X항과 Y항을 대체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은 우리가 다른 도덕적 행위자의 관점을 취할 수 있게 하고 따라서 도덕적 추론의 바탕이 되는 인지 구조다.

-[도덕의 궤적] 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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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런은 힘 센 캐릭터들이 나와서 서로 자웅을 겨루는 SF 물로 볼 수도 있지만 깊은 철학이 담겨져 있다는 게 가장 큰 강점이다. 정주행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으나 존재의 정의, 참된 선의 기준, 복수와 용서 등 민감한 이슈들을 피하지 않고 고민하는 주인공들의 모습 속에서 삶의 진실을 발견해 나가는 묘미가 있다.

 

주인공인 엔 마이어가 늘 고민하는 '옳은 길', '더 나은 선택' 에 대한 고민은 읽는 독자에게도 깊은 몰입감을 선사해 주며 엔 마이어의 고민에 함께 동참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이트 런 366화


-본성을 변화시키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 존재를 정의하는 건 '행동과 선택'이야~ 라고 말하며, 모모를 위로해 주는 엔 마이어...

 

-"너의 본성은 엔 마이어와 다르다.. 너의 안에는 악성이 존재하지 않느냐? 라고 반문할 때, "그래도 난 엔 마이어와 동일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모모의 모습을 본다.


-스칼렛 요한슨이 나오는 공각기동대를 보면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건 우리의 기억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라고 이야기하는 대사가 생각난다.

 

-우리가 취하는 선택의 축적이 곧 우리 자신을 규정하며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 나간다는 장 폴 사르트르의 일갈이 떠오르기도 한다.

 

-결정론적으로 fixed되어 진 듯한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삶의 긍지와 의지를 주는 고백이다.

 

-자신의 본성적, 기질적 속성으로 인해 괴로워 하거나, 지난 날의 아픈 기억과, 괴로웠던 사건들로 인해 힘들어 하는 이들에겐 다시 한번 앞을 바라보고 걸어갈 수 있는 존재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 모든 밑 작업에는 '행동과 선택'이 존재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보면 옛 연인과의 아팠던 기억을 지우고 싶어서 기억을 지우는 시술소를 찾는 주인공(짐 캐리)이 등장한다. 우리의 '기억의 축적'이 우리의 존재를 규정할 것만 같은 숙명적인 인생의 번뇌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를 새롭게 규정해 나갈 희망을 얻게 된다.

 

-성경에서도 우리가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행동'이 우리의 믿음을 증명한다고 말하지 않던가. (물론 부연설명이 필요한 영역이긴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존재'를 정의하는 중요한 요인은 무엇인가?


 

나이트런의 마지막 대사로 갈무리를 해야 겠다.


"우리는 선택한다. 그렇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해가고 미래를 바꾼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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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베빙턴(David Bebbington)이 정의내린 복음주의의 특성은 이렇습니다.

 

 

 

 

1. 회심주의: '거듭나는' 체험을 바탕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2. 행동주의: 선교나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노력을 통해 복음을 드러낸다.

 

3. 성경주의: 궁극적인 권위를 성경에서 찾는다.

 

4. 십자가 중심주의: 인류가 구원받을 길을 여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셨음을 강조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복음주의 진영에서 수십 년을 일해온 필립 얀시는 복음주의 핵심을 세 문장으로 정리한다.

 

1. 세상은 아버지 하나님의 소유다.

 

2. 하나님은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인류의 역사 속에 친히 들어오셨으며(성육신) 독생자의 생명을 중보의 제물로 삼으셨다.(대속)

 

3.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님의 능력에 기대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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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에 대해 간단하면서도 꽤나 잘 summary 된 글이 있어서 여러분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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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는 역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난폭한 논쟁주의와 영향력 있고 효과적으로 전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수용적 태도 사이에서 찢겨 있다.


흔히 그것은 타계적이고 사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강력한 애국주의와 국가의 도덕적-정치적 복지에 대한 관심을 보유하고 잇다.

근본주의는 개인적이지만 강력한 공동체들을 만들어 낸다.


근본주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반지성적이지만, 올바른 사고와 참된 교육을 강조한다.


근본주의는 주관(the subjective)에 대한 부흥사들의 호소를 강조하지만, 빈번히 인식론적 차원에서는 합리적이고 귀납적이다.


근본주의는 한 고대의 문헌에서 기원한 기독교이지만, 또한 기술문명의 시대에 형성된 기독교이다.


근본주의는 반 근대주의적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근대적이다.


아마도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근본주의가 명백하게 모순된 답을 너무 쉽게 제공하지만, 그것은 너무 복잡한 전통들이 혼합되어 있어서 근본주의 옹호자뿐만 아니라 반대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모호성과 역설로 가득 차 있다.


-George M. Marsden, Understanding Fundamentalism and Evangelicalism, 1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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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년 전에 근본주의, 세대주의 관련하여 정리해 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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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세대주의가 양산해 낸 폐단]

요한 계시록과 다니엘서의 짐승’, ‘적 그리스도’, ‘666’, ‘음녀’, ‘동방’, ‘열 뿔등을 임의로 해석하며, 임박한 종말론을 주장하며, 이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의 두 대결구도로 보는 이원론적인 주장을 하기도 하며, 양태론과 기독론, 구원론에서 이단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P.S: 기독교는 하나님과 사탄의 힘을 동등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강력한 영적 존재라 해도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시대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서 사탄이 최후의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시대라고 보는 게 더 성경적입니다.)

(P.S2: 양태론을 주장하는 건 모든 세대주의자들이 그러는 건 아닙니다. 일부만 그러고 있습니다. 양태론은 정통 기독교가 주창하고 있는 삼위일체와 다른 개념입니다. 양태론이란 three person in one nature(한 본질을 지니신 세 분의 다른 존재)라는 삼위일체의 특성과는 달리 한 분 하나님만이 단일하게 계시고 때에 따라 다른 모습(양태), 즉 어쩔 때는 성령, 어쩔 때는 성자 예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다는 이론으로서 사벨리우스가 주창했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님 이라는 구분이 사라지다 보니 삼위일체 하나님의 독특한 인격성은 사라지고, 신비주의적이고 막연한 신성만 남게 된다는 치명적 오류가 있어서 개신교 진영에서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세대주의]

 

(1)19세기 말 플리머스 형제의 초기 지도자였던 존 넬슨 다비에 의해 주장된 일련의 신학적 사조입니다.

(2)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3)19세기에 미국 교회사, 정치사의 독특한 토양에서 생겨난 근본주의라는 노선의 일부라고 보면 됩니다. (근본주의 중에서 가장 지적인 형태로 나타났던 게 세대주의다. 그래서 세대주의자들이 복음주의 지성에 끼친 악 영향이 실로 대단했습니다.)

(4) 세대주의 중에서도 극단적인 세대주의는 굉장히 위험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대주의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5) 이러한 세대주의는 구원파 등의 한국 이단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들도 있습니다.

(아래 댓글로 구원파와 세대주의는 관련이 없다는 글을 올리신 분이 있으니 정확한 진위 여부를 확인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관련 단체와 세대주의가 전혀 상관이 없다면 기존에 알려져 있는 교리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반박 등을 댓글로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반적인 특징은

(1)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엄격한 구별

(ex) 그래서 마지막 때에는 이스라엘 12지파에서 12000명씩 회심하여 144000명을 이룰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을 읽어 보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렸으며[3:29], 그리스도인을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기록한 부분도 있는 걸로 볼 때, 이와 같은 이스라엘과 다른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구별 시키려는 시도는 성경적 근거를 확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2) 문자적인 해석

(ex) 세대주의자들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천년을 정확히 1000년으로 해석합니다.-> 요한 계시록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건 아주 위험합니다.)

(그러나 일관성이 없어서 ‘1은 또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천년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원칙과 기준이 딱히 없는 것이죠)

(3)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근원적 목적으로서 구원의 완성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에 더 주목하는 태도

 

좀 더 구체적인 특징

세대주의:

(1) 하나님이 인류와 맺으시는 관계를 몇 개의 예리하게 분리되는 시대로 나누어서 성서를 이해하는 태도.

(2) 성서가 아담으로부터 신약 성서의 마지막까지 또 성서에 예언된 종말의 세대까지, 이러한 시대들 혹은 세대들에 대한 분명한 신적 해석을 제공한다고 봅니다.

(3) 하나님이 역사를 초월적으로 다스리신다는 믿음을 옹호합니다.

(4)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성서관과 그에 따른 성서 해석(그러다 보니 성서 비평에 취약했음)

(5) 예언 해석에 초점을 맞추는 강경한 성서 문자주의

Ex) 그래서 그들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재림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이중 재림을 주장합니다. 즉 대환난 이전에 예수님이 한 번 재림하시고, 그 이후에 천년왕국의 통치 이전에 다시 한번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것입니다. -> 이단적인 종말론을 태동시키는 촉진제로서 작용했고, 이와 같은 이중 재림은 성경적 근거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6)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반박: [19:23~24]을 보면 천국하나님의 나라는 병행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두 용어는 서로 호환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대주의의 방법론: 성서적 진리(특히 세상의 종말에 대한 진리)를 입증해 내기 위해 성서 전체에서 뽑아낸 구절을 적절히 배열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문자주의를 수용합니다.

 

세대주의가 인기 있는 이유:

(1)성서의 예언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고 현재 상황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석해 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예언이 나름 해석 되는 것 같으니까 신이 나는 것이죠)

(2)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인기 있었던 이유는 통제를 벗어난 세상 속에서 미래에 대한 전천년주의적 관점을 지니게 해 줌으로써 복된 소망과 더불어 왜 상황이 이렇게 나쁘게 흘러가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줬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몇 백년 전에 현재의 혼란을 예언했다는 것을 알고 묘한 위안을 얻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성경의 무오성이라는 중요 교리를 철저히 지켜 내려고 학문적인 노력도 나름 많이 했습니다. -> 정통 신학에서 유일하게 긍정하는 세대주의자들의 업적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긍정할 만한 요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악영향이 더 많았거든요.)

 

진보적인 세대주의자는 그나마 역사적 개신교와 비슷한 개념을 많이 취하려고 하지만, 일반적인 세대주의자들은 기성 교회의 쇠퇴나 배교, 그에 따른 문명의 타락,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지 않은 기존의 제도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할 필요성 등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이단들이 아주 좋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이론을 적극 수용해서, 기성 교회들을 싸잡아서 비난하는데 사용했죠)

 

 

 

근본주의(또는 세대주의)가 미친 영향들

 

(1)  반지성주의를 만연케 만들었습니다. 즉 임박한 재림과 예언의 은사를 강조하여 학문의 필요성을 경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지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싸잡아서 종교주의자로 매도해 버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단에 빠지는 분들을 보면 가방끈이 좀 짧은 어머님들이나, 순진한 분들이 참 많아요. 배우지 못함에 대한 열등감 등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립니다. 잔인하게도…)

(2)  성서 해석이 지나치게 단순하다 보니 성서 비평앞에 취약함을 보입니다.

(3)  성서 구절을 신적 진리라는 완성된 그림을 얻어내기 위해 골라서 끼워 맞추는 데만 필요한 퍼즐 조각처럼 취급해 버립니다.

(4)  극단적인 본질주의를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특정한 공식으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나 인간의 상태, 세상의 운명과 같은 모든 문제에 관한 성서적 진리의 본질을 포착해 낼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그에 따라 특정 시대에 가장 중요해 보였던 문제를 이해하고 정의하는 데 역사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5)  이전 세대로부터 내려온 지혜를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교만에 가까운 자기 확신을 지녔습니다.

Ex) 루이스 스페리 체이퍼(Chafer)는 말했습니다. “신학계에서 정해 놓은 과정대로 연구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편견 없는 마음으로 신학을 연구하고 성서가 실제로 가르치는 바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반박-> 굉장히 객관적이고, 엄밀한 태도를 취한 듯 하지만 사실 자신이 생각한 바가 진리라고 독단적으로 주장하는 것과 다름 없다. 자신의 해석법에는 검증의 잣대를 대지 않겠다는 것이다.

 

è 이런 독단적인 태도의 맹점: 자신의 신학 사상을 포함한 모든 신학 사상이 교육이나 경험과 같은 개인적, 문화적 요소와 그 신학자가 속한 전통에 의해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다는 것을 간과한 태도입니다.(자체적인 논리적 오류를 지닌 주장입니다.)

 

(6)  대중에게 매우 퍼뜨리기 쉬운 극단적 형태의 초자연주의를 전하느라, 자연적 영역을 고려할 만한 시도가 없었고, 진리의 내용 자체가 상당히 영지주의적이게 되어버렸습니다. (, 자연, 세상 정치, 윤리, 인간 존재 등에 대해서는 성경적인 답안을 거의 내 놓지 못했습니다. 맨날 종말 이야기만 하고, 이상한 단어 해석에만 집착하느라 성경의 Quality 를 땅으로 떨어뜨려 버렸습니다.)

(7)  시대 자체를 들여다 보는 불편하고 중요한 작업은 하지 않고, ‘시대를 해석해 보려는 기이한 시도였습니다.  

(8)  세계적인 사건이 터질 때마다 성서를 복잡한 국제 윤리를 풀어 가는 지침으로 활용하기 보다는 수정구슬처럼 사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모호한 성경 예언의 세부사항에 대한 성취라고 자부하면서..)

 

[몇 가지 알아둘 내용들]

지난 10년간 일부 세대주의자들은 소위 전통적인 세대주의에서 극단적인 요소를 많이 제거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들이 세대주의의 주류는 아닙니다. 그러니, 그다지 받아들여 주기 어렵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서를 방어할 때, 성서 원본의 무오성을 주장했습니다.(성서의 저자들이 인간임을 완전 망각하고 고려도 안 하고 있습니다. 성서 저자들의 삶의 경험과 문화적 배경 등에 대한 고려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실수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은 전혀 생각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근본주의(특히 세대주의) 비판하기

(1)  이 운동이 미국에서 각광 받는 동안 복음주의 공동체는 하나님 아래에서 자연 세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인간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왜 인간의 본성은 그런 모습인지, 문화의 축복과 위험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통찰을 거의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대한 이해력을 놓여주지 못함.)

 

근본주의자들의 공헌점: 그래도 무신론주의, 유물론주의 토양에서 초자연주의를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성서에 정말 충실했다는 점은 칭찬할 만 합니다.

(그들이 끼친 악 영향을 생각하면, 이런 칭찬도 해 주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100번 양보해서 힘겹게 칭찬해 줄 순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

성서 예언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의 정서적이며 우주적인 차원을 계시하는 것이지 신자들에게 세상의 종말에 대한 완전하고 상세한 미리보기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은 역사적으로(문화적,인간적 요소 고려), 자연적으로(상징,상상력,서술 양식 고려), 그리스도 중심적으로(성서의 통일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에 있다는 관점) 해석해야 합니다.

(그냥 단어에서 단어로 jumping 해서 쉽게 쉽게 해석하려고 하다가는 세대주의자들의 말에 완전 매료될 수 있고, 신천지 같이 비유 풀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덥석 잡히는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는 기회로서 읽는 것이지 퍼즐을 풀듯이 예언을 찾아 가는 방식으로 읽는 게 아닙니다.

 

-마크 놀 교수님, 이인규 권사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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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면서 인격장애(성격장애)가 있다는 말들을 종종 듣는데, 이는 단순히 성격이 이상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일까? 아니면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일까? 사실 정신과 영역에서 '인격장애'는 함부로 진단 내리지 않는 진단명이며 다른 모든 진단이 배제되면서 특정 조건을 만족할 때만 부여할 수 있는 기술적 정의라고 볼 수 있다.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DSM) 4판에 의하면, 성격장애란 한 문화에 속한 사람들의 일반적 기대 범위를 현저하게 벗어나는 편향되고 지속적인 내적 경험과 행동의 양상 때문에 현실 적응에 어려움이 빚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성격장애는 한 개인의 삶에 전반적으로 고정화되어 있다. (즉, 변화하기 힘들다)

 

또한 반영구적이며 대인관게에서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큰 지장이 된다.

 

정의 자체에도 나오듯이 성격장애는 본인과 주변 사람 모두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경계성 성격장애는 대부분 부정적인 언어로 설명되기 때문에 경계성 성격장애로 진단 받은 사람은 큰 낙인이 찍힌 것처럼 느낀다.

 

그러므로 경계성 성격장애를 다룰 때, 그 장애 자체와 장애를 지닌 사람은 별개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경계성 성격장애는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어떤 것이지, 그것을 지닌 사람 자체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당신이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과 함께 살고 있다면, 머리로는 장애와 그것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별개라는 사실을 이해하더라도, 그 둘을 따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을 터이다.

 

분명히 경계인들은 나을 수 있다.

 

변덕스러움이나 극단적 분노, 자해행위같이 문제가 되는 증상들은 적절한 약물 투여와 심리치료를 통해 상당히 호전될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행동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경계인 자신이다.

 

이러한 사실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이해하는 일은 경계인과 당신 자신의 회복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잡았다, 네가 술래야]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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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에서는 잘 활용되고 있지 않으나, 철학적인 깊이를 더하며 삶의 무의미/의미를 탐구하는 심리 치료 접근법인 '실존치료'를 소개합니다. Cooper 의 저서인 [실존치료]도 좋고, 인간 중심 치료가 접목된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 도 명저입니다. 다양한 심리 접근법을 통합적으로 활용한다면 한 사람을 더욱 깊이 있게 분석하고 도와줄 수 있을 터인데 그 기저에 기본적으로 '실존적 개념'을 깔아두고 출발한다면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존치료가 지닌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관점들은 다양한 환원적이고 전문적인 심리 기법을 적용할 때 든든한 토대이자 균형추가 되어줄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실존치료는 사람들이 빼앗겼던 자신의 인생을 되찾아 그들의 삶을 다시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치료법이다.


실존치료의 기본원리들은 외적이고 기계적인 변화에 대해 강조하는 일반적인 치료접근들을 넘어서 모든 치료법들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예를 들어, 실존치료는 의학적 개입법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반영해 보게 함으로써 이러한 개입법에 대해서도 적용범위를 확장시킬 수 있다.


만약 내향적인 사람이 보다 사교적인 사람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프로작(Prozac, 항우울제인 프로작)을 사용한다면, 실존치료자는 그 변화가 주관적으로 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도록 할 것이다.


이 변화는 과연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과는 상관없이 그(녀)의 또래집단, 문화, 혹은 고용자에 의한 변화인가? 만약 자신이 간절히 바란 것이 아니라면, 이 변화는 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가? 이에 따른 결과를 다루고자 하는 개인의 의지는 무엇인가?


또는 이와 유사하게,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기 위해 인지 재구조화와 같은 인지행동적 전략을 사용하는 경우라면 어떨까?


이와 같은 경우에 실존치료자는 그 사람에게 "긍정적인"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지속적인 변화를 의미하는가? 질을 높이는 것을 의미하는가? 정서적 및 신체적으로 충족되는 변화를 의미하는가? 혹은 편의주의적 변화를 의미하는가? 편리한 것을 의미하는가? 동화되기 쉬운 것을 의미하는가? 이런 변화에 대한 결과는 무엇인가? 보다 단순하지만 덜 반추하는 삶인가?

다루기 쉽지만 지칠 대로 지친 삶인가?


실존치료자는 이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지만 이러한 질문을 다룰 수 있게 도와준다.


실존치료자들이 내담자로 하여금 이런 문제들을 다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역시 우리 접근법의 독특한 부분이기도 하다.


앞의 문단을 보면 마치 우리가 내담자와 주로 지적인 대화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도리어 우리는 살아 숨쉬는 순간, 그 안에 펼쳐지는 삶의 과정에 집중한다.


우리에겐 분명히 보이지만 아직 내담자가 알아차리지 못한 그들 삶의 이모저모를 적절하게 반영해 줌으로써, 내담자들이 자기 자신 그리고 우리와 관계 맺는 방식이 어떠한지 조심스럽게 찾아나간다.

 

 


 

우리는 내담자가 자기 비판적인지 우유부단한지에 주목한다.


내담자가 우리와 독립적인 방식으로 관계하고 있는가? 혹은 분리되거나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관계하고 있는가?


내담자가 개인적인 공간을 차지하는 방식은 망설이거나 제약적인가 아니면 자신감과 결단력으로인가 등에 관심을 둔다.


우리는 왜 이런 방식으로 내담자에게 주목하는가?


이는 우리 앞에 있는 대상을 단지 내담자라 여기지 않고, 살고 싶은 바람과 죽음에 대한 인식,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열망과 거절에 대한 두려움, 변화에 대한 갈망과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포함하는 그의 삶 전체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담자가 겪은 과거 경험에 대한 의미와 삶의 조건들은 현재의 삶에서도 존속되고, 그것들을 의식하는 정도는 각기 다르며, 내담자의 신체, 목소리, 행동, 가치관과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고 믿는다.

 

대체로 내담자가 말하거나 행동하는 모든 것은 내담자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만약 우리가 내담자와 깊게 마음을 맞추어 보다 현존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면, 내담자는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이 깨달음은 그(녀)의 인생에 다시금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어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실존치료가 실제로 행해지는 보다 넓은 차원에서의 치료적 틀이다.


약물치료, 논리적 논쟁, 또래집단, 또는 자기 자신 등 누가 또는 무엇이 변화를 만들었는가와 같은 질문은 실존적 관점의 중심이기도 하지만, 윤활제나 중간매체가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것과 같이 변화가 어떻게 추구되는가의 질문도 중요하다.


이제 우리가 앞서 제기한 모든 질문들을 아우르는 실존치료의 실제 핵심으로 논의를 이어가 보자.

 

당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당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당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들이지만, 특히 온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열망하는 내담자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중요한 질문이다.


편리하고 기계적인 것을 넘어서, 사랑에서 죽음, 두려움에서 즐거움에까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최대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이 책의 초점은 실존치료의 특정한 표현인 현대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이다.


전세계적으로 무수히 많은 형태의 실존치료가 논의되며 적용되고 있지만,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는 명백히 미국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우리는 전체적으로 이러한 부분에 집중하여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란 무엇인가?


이 책을 통해 그 개념을 자세히 설명해 나갈 것이지만, 간략히 말하자면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는 유럽식 인본주의 철학과 실존철학, 그리고 미국식 인간 중심 심리학의 혼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는 1960년대 초에 유럽의 자아탐색, 분투, 책임감의 개념과 미국의 자발성, 낙관론, 현실성을 통합하면서 생겨났다.


이 결합으로 인해 역동적이고 시의성을 갖춘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현재 이 분야가 급속히 성장하며 다양성을 더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의 역사, 이론적인 틀, 실제적 응용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상담자와 내담자로 이루어진 이 구성원은 놀라울 정도의 광범위한 문화와 진단 분야에 확장되어 가면서 점점 더 기존의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있다.

 

실존적 인간 중심에 대한 한가지 고정관념은 이것이 문화적 엘리트에게만 적절한 '식자층' 형태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다른 고정관념은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가 사람들 간에 연결을 인정하지 않고, 과도하게 개인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 다른 추정과 오해는 실존적 인간 중심 심리치료가 불규칙적이고 잘 정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이 특히 1960년대에 일어난 인간 잠재력 개발운동과 괘를 같이하는 측면이 있었던 영향을 고려해보면 언뜻 타당해 보일지 몰라도, 그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곧 보게 될 것이지만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는 다양한 환경, 진단집단, 인종에 적용될 수 있으며, 개인적이고 대인 관계적인 맥락이 실존적 인간 중심 훈련의 핵심이기 때문에, 치료 전문분야 전체에 갈수록 더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멘델로비츠(Mendelowitz)와 슈나이더(Schneider) (2008)는 다음과 같이 썼다.

 

"현대 실존심리학이 거듭된 발전을 통해 그 지평을 넓혀 왔지만, 여전히 공유되는 근본가치가 있다. 즉, 실존의 심장부에는 초자연적인 핵심이 있고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는 진정한 앎에 대한 탐구심이 있다."


이제 이 '초자연적인 핵심'과 문학적, 철학적, 심리학적 깊이의 유산에 대해 알아보자.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 서문-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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