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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아'라는 정체성에 별다른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

아마 남들 앞에 나서서 자기소개를 하라는 요구를 받으면 머릿속에 재빨리 자아에 대한 심상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면서 나라는 존재는 자명한 것이고, 타인은 타인이라고 생가한다.

​그러나 과연 나와 타자의 구별이 그렇게 분명한가?

​오히려 자아 역시 나에게 낯선 타자이자 자꾸 변하는 대상이 아닐까?

​거울 단계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라캉의 답이다.

라캉은 ​자아가 외부로 투영된 신체 이미지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동일시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 말한다.

​거울 단계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인식의 기준이 되는 자명한 자의식이나 선험적이고 절대적인 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자아는 어느 순간 나의 이미지를 다른 대상 이미지로부터 분리하고, 그것에 고착됨으로써 가능해진다.

거울 단계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이미지에 열광하는 것은 그것이 외부 세계에서 처음으로 가시화된 ​자신의 신체를 보여주면서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외부로 가시화된 이미지는 내 것이기도 하지만 실은 주체의 나르시시즘이 투사되는 타자적 대상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단지 신체가 가시적 공간에 반영된 것으로 나와 마주해 나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 그림자다.

​그런데 신체 이미지는 나의 내면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한갓 대상일 뿐이기에 주체에 대해 언제나 타자로만 머물며 이상화되기 쉽다. 이처럼 최초 주체의 구성 순간이 타자적인 거울상에 의해 매개되는 것은 주체의 욕망을 소외된 구조로 만든다.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체가 스스로를 발견하고 제일 먼저 느끼는 곳은 타자 속에서다. .... 헤겔의 사유가 말해주는 것은 인간의 욕망 자체가 ​매개된 욕망, 즉 자신의 욕망에 대해 알게 하려는 욕망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라캉 [정신적인 인과성에 관한 설명, 에크리]-

여기서 타자는 실제 타자를 의미할 수도 있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주체가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모든 대상으 ​주체의 타자​다. 예컨대 어린아이는 장난감을 던지거나 훼손하면서 그러한 놀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느낀다. 인간은 타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때만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조적으로 인간의 욕망은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과 그것이 겨냥하는 대상을 향하게 된다. 욕망은 순수하게 나의 내면적 의지를 표현하는 것 같지만, 타자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는 점에서 소외의 표현이기도 하다.

​나중에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고,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라고 정식화한다. 인간이 타자에 대해 의존적이 되는 것은 최초로 주체를 구성할 때 타자화된 이미지라는 매개를 통해 구성된다는 것과 관련이 깊다.

​자아는 대상화된 나의 신체 이미지를 매개로 구성되기에 본질적으로 타자이고 안정적이지 못하다. 자아 구성의 이러한 역설을 라캉은 ​오인(misunderstanding)의 구조 ​라고 말한다.

내가 나 자신을 알아보는 것은언제나 ​오인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자아가 타자라는 말은 이런 소외된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다.

 

 

다음으로, 거울 단계는 ​소외에서 발생하는 공격성을 유발한다. 공격성이 발생하는 것은 이미지와 현실의 분열 때문이고, 이상화된 자아가 육체적인 불안과 미숙을 완전하게 덮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라르의 이론과 접점이 있는 듯)

​거울 단계의 ​나르시시즘적 동일시는 안정된 자아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최초 분열의 순간이다. 거울 이미지는 실제 육체의 현실이 아니라 이상화된 나의 모습만을 상상적 공간에 투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생후 6개월~1년 된 아이는 운동 신경의 발달이 미숙해 아직 자신의 몸을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하며 몸이 주는 감각들도 파편화된 형태로 느낀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모습은 이상화된 전체로 나타나기 때문에 아이는 자신의 몸이 보여주는 완벽한 조화에 환호하면서 끌리게 된다. 그러나 아이가 이미지에 끌리면 끌릴수록 아이가 느끼는 실제 몸의 현실은 완벽한 자아의 상에 균열을 낳는다. 이렇듯 실제 몸의 불완전성과 이미지의 완벽함이 최초의 분열과 불안을 낳으면서 자아의 일체감을 위협하는 게 거울 단계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 때 파편화된 몸과 통일된 이미지의 대립을 위태롭게 봉합하는 것이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나르시시즘은 언젠가 실현될 완벽한 자아를 환상적으로 기대하게 만드는데, 이러한 환상적 예견은 이후 모든 대상 관계에 깊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거울 단계가 상상계를 구성하는 것은 이러한 환상과 관계가 깊다. 인간이 욕망의 대상에 도달하지 못하면서 언제나 완벽한 욕망의 충족을 꿈꾸는 것도 거울 단계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은 ​자아의 분열을 완전하게 봉합하지 못한다. '조각난 몸'의 느낌은 환상적 형태로 주체를 위협하며, 그러므로 주체는 이상화된 자아에 대해 끌리면서도 무의식적 공격성을 드러낸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죽음 충동의 파괴적 성향과 성애에 깔린 양가성(사랑과 미움)의 분석을 통해 강조한 공격성을 거울 단계와 연관 지어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주체는 한편으로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자기애를 갖지만 동시에 불안감을 느끼면서 그것을 파괴하고자 한다. 이미지는 나이면서 동시에 이질적인 타자이기 때문이다.

마치 나르키소스(Narkissos)가 샘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잡으려다 죽은 것처럼, 자아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애착에는 ​이러한 자살적 성향이 깔려 있다. ​이러한 관계는 모든 외부적인 대상 관계에 적용된다. ​타자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사실상 긴장과 갈등의 관계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공격성에 대한 ​방어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도덕률이 강조된다.

도덕 규칙과 박애의 강조는 사실은 견딜 수 없는 타자의 존재에 대한 공격성과 불안에 대한 일종의 도피이자 방어다.

​주체는 언제나 타자에 대해 이중적인 감정을 갖는데 이러한 불안감과 상상적 안정감이 기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 상상계의 본질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이 체질적으로 공격성을 많이 보이는 것은 거울 단계에서 느끼는 조각난 몸의 환상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분열은 인간이 언어를 배우고 상징계에 들어가면서 더욱 심화된다.

-[프로이트&라캉, 무의식에로의 초대]에서 -​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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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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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모건 스콧 펙

출판  열음사

발매  2007.03.20

 

 

스캇 펙 박사의 명저. 그리고 엄청나게 많이 팔린 저서.

 

 

우리의 인생은 '정신의 성숙' 을 이루기 위한 여정으로서 실패한 게 아니다. 이렇게 끝나 버린 게 아니다.

 

아직도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남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함축적인 메시지만 이해하고 있어도 이 책은 상당한 통찰력을 제공해 줬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전반적으로 훌륭한 책이다.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로서 스캇 팩의 '인간의 내면 성찰' 능력 이라든지,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 솜씨'는 역시 '스캇 팩' 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 준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며 그가 얻게 된 '소중한 지식' 들이..

 

내겐 참 많이 공감이 되고,새롭게 배우거나 생각하게 되는 부분도 많은 것 같다.(8년 전에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닌 세계관 자체에서 난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그가 정의 내리는 '사랑'. 그가 주장하는 인생의 '궁극적 목표', 그가 지닌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내겐 좀 위험해 보인다. 성경과 잘 매치가 안 된다고나 할까.(정확히 조사하진 못했지만 이 책을 쓸 당시에는 스캇 팩 박사님이 크리스천이 아니었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딱히 논란이 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사람의 정신을 다루는 이들이 범하기 쉬운 우를 잘 따라가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고나 할까?

 

프로이트 등의 유물론자들의 사고가 은연 중에 깔리게 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심지어는 입으로는 '하나님' 을 말하지만, 그 '단어'는 그저 하나의 term으로서 '하나님' 을 의미하는 것이지, 만유를 창조하시고 , 지금도 살아 역사 하시는 살아계신 '실존적 하나님' 을 의미하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러한 '신식학' 을 경고한다. 이것은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라고....

(그러나 이 책을 읽은 8년 전에는 쉐퍼의 세계관을 많이 동조했었기에 이와 같이 추론했었지만, 지금 다시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좀 더 관대한 평가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좀 더 공부하고 이 분에 대해 논하고 싶다.

 

 

[8년 전에 기독교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한 부분들]

<아직도 가야 할 길> 외에도 다수의 저서를 남긴 , 훌륭한 기독교 의학자이자 영성

 상담자로 알려져 있는 스캇 팩 박사님.

 

저는 아직 <아직도 가야할 길> , <영혼의 부정> 밖에 보지 않은 상태구요. 앞으로 더욱 부지런히 그의 저작들을 읽어 보려 합니다.(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도 진보가 없습니다.;)

 

참 ,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책입니다. 꼭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최근에 옥성호 집사의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에서 심리학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들을 우려하는 내용과 더불어 스캇 펙이 비판을 받았었습니다. (정확히 어디에 적혀 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 이 집사님은 스캇 펙은 기독교인이 아닌데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고 설명해 두고 있습니다.)

 

2권의 책만 읽은 상태에서 제 생각은 그는 훌륭한 심리학자 , 유망한 정신과 의사라는 칭호를 받을 만은 하겠지만 , '크리스천' 인지는 정말 모르겠다는 겁니다.

(지금에 와서는 옥성호 집사의 주장에 별로 동의하지 않고 있고, 스캇 팩 박사가 나중에 크리스천으로 회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좀 더 신중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스캇펙의 고백>

 

나는 대체로 별 볼일 없는 학자일 뿐만 아니라 특히 성경에 대해서는 형편없는 학생이란 점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하느님의 양육에 대한 두 번째 예를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여태 껏 신약성서를 요한 계시록까지 읽어 본 일이 없다. 그리고 사도들의 서한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더구나 구약성서는 한 번도 읽어 보지 못했다.

 

나는 구약성서의 다니엘서가 어떤 이야기인지 알고 있었다. 많은 초등학생들이 알고 있듯이 다니엘은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어떤 이유로 사자 굴에 던져졌다가 하느님의 은혜로 목숨을 구하게 된 사람이었다.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그리고 평생 다니엘서를 읽어 본 일도 없었다.

 

 

어린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귀엽게 넘어가 주겠지만 ,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 기독교적 마인드를 지닌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이런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것을 '정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 이렇게 '진리' 에 대한 열망이 없고 , 알고 있는 것이 없는 사람이 주장하는 영혼의 개념 , 내세의 개념 , 하나님에 대한 지식 등이 과연 바른 것을 제시할 수 있을까? 라고 질문을 던져 봤을 때 ,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진다.

 

 

<그가 말하는 심리학>

즉 신학과 심리학의 문제에 종속된 것도 알게 될 것이다. 그 두 문제가 분리되어 온 것은 실상 허울 뿐이다. 나는 이미 생존적 , 정신적 고통을 심리적 , 영적 현상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모든 논쟁을 종결시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독자들이 나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독자들에게 요청하는 것은 신학적인 차원과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그 두 가지를 통합하는 노력을 경주해 보라는 것이다.

 

 

투철한 직업 정신은 인정해 주겠지만 , 이런 면에서 보면 심리학을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단 심리학이 추구하는 '자기 발견' , '자아 사랑' , '긍정적 마인드' 등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기 부인' , '십자가 은혜' , '인간의 죄의 깊이' 등에 대한 개념 습득에 매우 큰 장애물이 됨을 고백해야 겠다. 분명 [베전2:9] 등에서 말하듯이 ,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됨이라는 놀라운 특권을 누리는 존재임에 틀림 없지만 , 인간이 '자신의 죄의 본질' 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서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다는 것은 거의 100% 불가능하다. 이건 '거듭난 이들' 의 수 많은 증언들이 크나큰 근거가 되어 줄 것이며 성경적으로도 이건 매우 정확한 진실이다. 하지만 , 스캇 펙 박사는 영혼과 정신을 동등한 개념으로 취급해 버림으로써 , 심리학과 신학도 함께 묶어 버릴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차이점을 제외한다면 '심리학'은 전반적으로 '신학'과 함께 '인간 이해'를 위한 중요한 밑바탕이 되어 준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판단을 함에 있어서  그의 '진화론 적 사고' 가 큰 역할을 하는데 , 단순히 '진화론' 을 믿는다는 그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니다. 유신론자이면서도 진화론을 믿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 이 '진화론적 사고' 가 초래하는 심각한 문제점을 극히 일부만 언급해 보겠다. 

 

<진화론 적 발언>

우리 뇌의 가운데 부분에 신경세포가 뭉쳐 있는 중추가 있는데 , 이 중추를 자극하면 우울증이라는 고통스러운 감정이 생긴다. 그리고 중추에는 분노와 유포리아(행복감) 같은 특정의 감정을 만들어 내는 다른 중추들도 위치하고 있다. 이 각기 다른 신경중추들과 마찬가지로 우울 중추도 수천년 간 인간의 진화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뇌 속에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정교하게 진화되어 왔다. 어떤 목적일까?

 

나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짝을 구하려는 성적 본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짝짓기를 통해 아이를 낳고 이리하여 종족의 보존을 이어 가려는 것으로 , 사랑에 빠져 일시적인 자아 영역의 붕괴를 일으키는 것은 내부의 성적 충동과 외부의 성적 자극 상황에 대한 인간 본능의 전형적인 반응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소 우스꽝 스럽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랑에  빠지는 것은 유전자가 정신을 속이는 하나의 속임수로써 결국은 결혼이라는 덫에 걸리게 만든다. 이런 계략이 잘 통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성적인 충동이나 자극에 동성애적이거나 다른 요인-부모의 간섭 , 정신 질환 , 책임에 따른 갈등 또는 자기 훈련 등- 이 끼어 들어 결합을 방해하는 경우가 그 것이다. 반면에 이런 계략 , 즉 세상이 다 자기 것 같은 환상적이고 유아기적 결합과 퇴행이 없었다면 , 행복하든 불행하든 현재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공포감마저 드는 현실 때문에 결코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았을 것이다.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신화의 경우 , 그것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아마도 그 신화에 지독한 거짓말이 필요한 이유는 사랑에 빠지는 경험이 결혼으로 향한 우리의 음모를 격려하고 또 정당하게 하여 인류의 존속을 보장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러한 고백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 '영적 본성' 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 순간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는 듯 하다. 크리스천이 아니다. 정말 심각하게 그에게 제안하고 싶은 건 , '성경' 을 읽어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사랑' 이 그저 '신화' 요 , '거짓말' 이 되어 버리다니....후반부에 가면 그는 '낭만적 사랑' 은 '일종의 환상' 이긴 하지만 , 유용하기 때문에 '존속할 가치' 가 있다고 말한다. 이게 바로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진화론적 사고' 에 흡수 당한 전형적인 모습이다. '종족 보존' 을 취우선에 두는 비기독교적인 사고. 그리고그의 마음은 '물질주의' 에 찬성하지 않는다면서 , 그가 말하는 '성장해 나가는 영혼' 은 결국 , '진화해 나가는 정신' 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손으로 만질 수 없다 뿐이지 , '눈으로는 보이는 듯한 육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 로 충만하게 짜여져 있다. 한 마디로 '말장난' 이 많다는 것이다. 영혼을 인정하고 ,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말하지만 그가 입술로 고백하는 '하,나,님' , '영,혼' , '사,랑' 이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도통 일치하지 않는다.

(이 책을 쓸 당시 스캇 팩이 크리스천이 아니었다는 포인트를 감안해 준다면 너그러이 봐줄 수 있긴 합니다만, 기독교 서적에서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건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사랑에 대하여>

 

사랑을 받는 것이 당신들의 목적이라면 그걸 성취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확실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 자신이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첫 번째 생의 목적이 수동적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라면 당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 인간 사회에서는 , 그리고 기존의 심리학에서는 적절한 상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한 사람의 영혼을 치료할 때 , 이런 식의 발언을 계속 고수한다면 , 그 영혼은 '하나님' 을 만날 수 없다. '죄의 깊이' 를 인지 하지 못한다면 , '십자가의 은혜' 는 내 것이 될 수 없다. 내가 구원받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음을 가슴으로 시인하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힘을 자기의 신으로 삼는 '호세아' 가 말하는 부류의 사람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저와 같은 말을 하며 , "당신의 영혼의 성장을 위해 힘차게 전진하세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았답니다.." 라고 이야기 해 줄 때 , 이 모든 핵심적인 메세지에는 '나' 란 존재가 주인공이지 , '하나님' 은 굳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 오캄의 면도날 법칙에 의해 '하나님' 이라는 개념은 그냥 잘라서 없애 버리는 게 더 논리적이다. 굳이 '하나님' 을 끼워 넣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랑의 참된 목적이란 오직 정신적 성장이나 인간의 발전입니다."

 

-> 이게 기독교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아닐 것이다.

 

"사랑은 자기 희생이란 잘못된 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랑은 자신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 이것은 자기 희생이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확대인 것이다. 뒤에서 논의하겠지만 순수한 사랑은 자기를 채워 나가는 활동이다. 그것은 자신을 위축시키기 보다는 확대시키고 , 자신을 메마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한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과 같이 자기 중심적이다. 여기에는 사랑은 '자기중심적이면서 동시에 자기 중심적이지 않다' 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자기 중심적이라는 문제가 사랑을 사랑 아닌 것으로부터 구분해 주지는 않는다. 그 구분은 행동의 목적에 있다. 진정한 사랑은 그 목적이 항상 정신적 성장이고 , 사랑이 아닐 때는 그 목적이 항상 다른 것에 있다.

 

-> 하나님의 역할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주장은 내 힘으로 저러한 궁극적 사랑을 성취해 나갈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물론 그는 '공동 창조자' 라는 표현으로 신과 내가 함께 '공동 사역' 을 해 나간다고 말하지만 , 그의 마인드 속에는 '나는 곧 하나님이 된다' 라는 개념이 숨어 있다.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 '자신의 정신적 성장' 에 가장 큰 가치를 두는 이상 그의 주장은 '범신론' 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나는 사랑에 대해 정의하기를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키려는 의지' 라고 했다.

 

-> 그에게는 한 영혼의 구원이 가장 중요한 개념이 아니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그는 이미 '기독교인' 이 아니다. 자신은 기독교인이 되고 싶겠지만 , 애석하게도 '잘못된 지식' 을 가지고 있기에 '기독교인' 이라는 단어가 함축하는 의미에 부합되는 사람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정신과 영혼을 제대로 구분 못 한다면 프로이트 등의 트릭에 평균치 이상의 영향을 받아 버린 건 아닐까?

 

"아이가 셋 있는 서른 다섯 살의 부인이 있었다. 독재적이고 남을 무시하며 융통성이 없는 사람과 결혼을 한 그 부인은 날이 갈수록 남편에게 의존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면서 이런 의존은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도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남편은 그들 관계의 본질을 변화시켜 보려는 부인의 모든 시도를 막았다. 하지만 그 부인은 용감하게 남편의 반대와 이웃의 비난을 무릅쓰고 남편과 이혼해 아이들을 데리고 홀로 지내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 모험 덕에 그 부인은 자기 일생에 처음으로 자신의 주인이 된 듯한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는 그 가련한 여인의 단호한 결정에 박수를 쳐야 마땅하지만 , 이 행동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인가?.. '나의 자아' , '나의 인생 여정' 에 큰 가치를 부여하다 보니 , 결국 '이제껏 감당해 본 적 없는 어려움' 앞에 쉽사리 도피해 버리는 나약한 영혼을 양산해 내는 꼴이 되어 버렸다. 두 사람의 만남은 아버지가 개입하신 일이었으며 , 심지어 아이가 셋이나 있다. 3자가 말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 힘들어도 이러한 시간들을 통해 그녀가 눈물로 하나님 아버지께 힘을 구하며 , 위로를 구할 때 하늘 아버지가 그녀를 더욱 강하고 지혜로운 여자로 세우시며 , 그 남편마저도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을 터인데........

(그녀의 '고통' 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 발언을 한다고 비난할지도 모르지만 , 이게 성경적으로 맞는 경로인 걸 어떻게 하겠는가? 비기독교인이면 할 말이 없지만 , 기독교인이 이런 지침을 조장한다는 건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남아나는 가정이 도대체 몇 가정 되겠는가?)

 

"어떤 정신 치료자들은 환자와 성적인 관계를 가진 치료자를 비난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런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오히려 환자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치료자이며 성적인 욕구에 대한 이해심이 적어서 그럴 것이라고 여겨진다. 더욱 깊이 생각해서 환자의 정신적인 성장이 성적 관계를 가짐으로써 진전된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 나는 서슴지 않고 그런 관계를 가질 것이다.

 

-> "인생의 궁극적 목표를 '정신의 성장' 으로 두다 보니 , 이런 끔찍한 결론 도출도 주저함 없이 하기에 이른다. 환자를 사랑하고, 포용해 주는 듯 한 느낌.... 참 따뜻한 사람...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고 칭찬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 크리스천은 아니다. 그건 인정하자.(심지어 도덕적으로도 낮은 점수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이들이 바로 모든 종교는 하나로! 를 외치며 '다원주의 신앙' 을 조장하는 것이다. '진리의 토대' 가 없다시피 하기에, 자신이 어떤 입장을 정하고 , 어떤 주장을 함에 있어서 일관성이 없다. 또는 그 '기준' 이 너무 세속적이어서 , '진리' 에 위배된다.

 

그 외에도 기적적인 '질병의 치유' 대한 그의 발언. '범신론의 냄새' 가 다분히 느껴지는 글을 아무 거리낌 없이 인용하는 태도. 때론 프로이트보다 융을 지지하면서 그가 말하는 '무의식' 의 개념을 거의 '신' 의 자리에 올려 놓는 그의 태도.

 

"사실 무의식은 모든 면에서 의식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현명하다"

 

라는 둥의 발언을 하고 , '집단 무의식' 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는데 그 2가지 근거는 너무 빈약한 그대....

 

"우리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이 질문에 접근하더라도 , 사랑을 베푸는 하나님이란 존재를 가정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탐구하다 보면 결국은 한 가지 무서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같게 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곧 진화의 목적이다. 하나님이 바로 진화시키는 힘의 원천이자 도착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은 알파이며 오메가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이다."

 

-> 스캇 펙은 꼭 충격적인 주장을 하고 나서 , 뒷 문장에서 한 발 물러선 말들을 하면서 안전망에 들어가는 경우가 참 많다. 이 발언은 '그리스도의 형상' 을 닮아가는 '은혜로 구원 받은 죄인들' 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나도 곧 신이요!' 라는 범신론에 아주 가깝다. 단지 이 문장만 봐서 그렇다는 게 아니고 , 그가 하는 발언들을 종합해 보면 , 앞으로 봐도 , 뒤로 봐도 '범신론' 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  그때야말로 "자, 일은 끝났어. 나는 목적을 이룬 거야" 라고 말하며 쉴 수는 절대로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더욱 지혜롭고 , 더욱 현명해지도록 밀고 끌어올려야 한다. 이 믿음을 따른다면 자기 향상과 영적 성장을 위한 끝 없는 노력을 죽는 순간까지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책임은 우리의 책임이다. 하나님이 된다는 가능성을 인간들이 끔찍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 영혼의 개념.....그 영혼의 구원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  "내 힘" , "내 의" 를 신의 경지에 까지 올리려는 시도를 해 나가는 삶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의 무게' 가 너무 무겁고 부담스러워서 인간은 '하나님이 된다는 가능성' 을 끔찍해 한다라고 말한다.

기독교적 마인드를 계속 깔고 봤을 때는 , '정말 성경을 안 본 사람이구나. 뭘 정말 모르는 구나'라고 밖에 말 못 하겠다.(스스로도 인정했다.)

또는 기독교인 뿐만 아니고 , 일반인들의 마음도 치유해 줘야 하기에 그 두 가지 세계관을 뒤 섞다 보니 이런 말도 안 되는 비 논리적인 주장들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차라리 이 책을 썼을 당시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면, 이런 껍질 뿐인 기독교식 포장은 안 했으면 더 고 퀄리티의 작품이 탄생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게으름은 사랑의 반대말이다."

 

-> 이 개념 자체가 "나의 행동 , 나의 의" 를 극대화시키는 발언이다.

 

"나는 오랫동안 원죄라는 개념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고 부정해 왔다. 나는 섹스를 특별히 죄악시하지 않았다. 그 밖의 다양한 욕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종종 맛있는 음식을 지나치게 탐닉했고 그 결과 복통에 시달리곤 했지만 , 죄의식 따위가 주는 고통 때문에 시달린 적은 없었다.'

 

-> 미안하지만 , 그는 십자가의 놀라운 은헤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고집과 아집을 버리지 않는 이상은...... 자신이 느끼고 있다고 주장해도 그건 본질의 그림자에도 미치지 못할터....

 

"그는 창세기를 신화로 보고 있으며 아담과 하와의 잘못은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문을 묻지 않은 게으름 때문이란다. 그래서 원죄가 있다면 그건 '게으름' 이라고 주장하는데 아주 황당한 주장이다.

 

"나는 앞에서 게으름이 바로 원죄이며 , 우리 속에 병든 자아의 형태로 존재하는 악마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에 , 그 자리가 너무 공허하며 , 그러기에 그 분을 하나의 '인격체' , '실존' 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 '하나님' 은 '특정 대상' 이 아니고 , '불순종' 이라는 개념은 '특정 대상' 에게 적용하는 것이기에 , 그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개념조차 지니고 있지 않다.

 

"나는 악이란 영적 성장을 촉진할 목적으로 자아를 확대하는 것을 회피하는 정치적 권력 행사-노골적이거나 은밀히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로 본다.

 

-> 그가 말하는 '영적' 은 성경이 말하는 '영적' 과 다르다. 그저 '육적인 정신의 성장' 을 촉진시키지 못하게 하는 개념들은 다 싸잡아서 '악' 이라고 정의 내린다. 자칫 잘못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 도 이 '악' 과 밀접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태가 심각하다.

 

<그가 말하는 은총,은혜>

 

우리가 은총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장소는 바로 나 자신의 내부이다. 지금의 자기 자신보다 좀 더 현명해지고 싶다면 자신의 내부에서 길을 찾아라. 이 말은 곧 하나님과 인간이 마주 보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의식과 무의식이 마주 보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무의식이 바로 신이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다. 우리는 언제나 신의 일부이다. 하나님은 어제도 ,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

 

-> 충격적이네요.

 

"독자들이 무의식이 곧 신이라는 개념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이 결코 이단적인 개념이 아님을 상기하기 바란다. 그것은 우리 안에 내재하는 성령 또는 성신이라는 기독교적 개념과 근본적으로 같은 개념이다."

 

-> 당신은 틀렸습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십니다. 설령 당신이 초자연적인 신의 음성을 실제로 들었다던 몇 번의 고백이 실제로 일어났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한 '기적' 의 영역을 어떻게든 물질 또는 정신의 영역으로 예속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 결국 성령님 마저 , '무의식' 이라는 감옥에 가둬 버리는 군요.

 

"나는 영적 성장의 궁극적 목표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데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즉 , 신이 아는 만큼 인간도 알게 되는 것이다."

 

-> 마틴 루터가 울고 가고 , 칼빈이 기가 막혀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형상을 닮아간다고 해서 , 창조자와 피조물 간의 '넘사벽' 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건 매우 심각한 신학적 오류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동물의 개념>

"내가 다른 동물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영혼을 갖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들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모두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어떤 동물은 영혼이 있을 것이다."

 

-> C.S LEWIS 도 동물의 구원을 언급한 적이 있지만 , 자신의 '희망 사항' 이 '비 성경적' 임을 잘 알고 그냥 '혹시 그러면 좋겠다' 정도로 이야기 했었는데 , 스캇 펙은 노골적이다. 진화론적 사고는 이러한 일도 가능하게 만든다. 그 기본 토양이 되어 준다.

 

<육체의 부활>

 

"나는 중도적 입장의 크리스천임에도 육체의 부활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편이다. 내 생각에 이 교리는 육체와 영혼을 혼동하고 있다. 그 둘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육체는 매체이다. 즉, 물질이다. 우리의 영혼은 혼이다. 그리고 혼은 육체와는 전적으로 다른 법칙을 따른다. 우리는 우리 육체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물질주의자들에게는 육체가 없는 어떤 존재를 상상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상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욕을 먹는 이유는 , 그는 자신이 자신 있어 하는 개념에 대해서는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고 , 자신이 없어하는 '십자가' , '천국과 지옥' , '말세' , '은혜' 에 대한 개념들은 거의 언급하지 않아 버리는 특성이 있다.(아얘 알려고 하질 않는다). 스캇 펙도 '하나님의 상상의 초월성' 은 익히 잘 알고 있어서 능수능란하게 인용하며 쓰고 있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이 '부활' 에 대해 어떻게 언급하고 계시는지를 먼저 돌아봤어야 했다. 영혼과 혼의 개념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고 , 왜 특정 인들이 '육체의 부활' 을 주장하는지 , 그 이유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물질주의' 에 물들어서 그런 걸까? ㅅ사실 그런 이들은 '부활' 자체를 주장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어떻게 말하는지 알고 나면 , 자신이 이렇게 글을 쓴 것을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성>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부분에 관한 한 나는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다."

 

"영혼의 창조는 하나의 실험이다. 많은 과학자들은 그들의 여러 실험이 처음에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의 예감과는 다른 결과를 낳는 것에 대해 이젠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실험을 실패한 실험이라고 부른다. 비록 우리가 그 실패한 실험을 통해서 성공했을 때만큼 무엇인가를 얻을지라도 그 실험은 실패했다고 한다. 이런 실패한 실험들은 우리들에게 계획을 다시 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영혼의 창조에 관한 신비를 모두 제거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결국 하나님의 '창조' 는 불완전했기에 , 실패의 구석이 있으며 이러이러한 연유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 않다라고 말하고 싶은 가 보다. 이 말을 들으면서 리처드 도킨스 , 버드런트 러셀 등은 덩실덩실 춤을 추겠지만 , 그는 하나님을 모른다. 접근하는 방법이 무신론자와 다를 바가 없다. '특정 현상' 을 보고 , '그 현상을 일으킨 존재' 에 대해 논증하고 있다. 하지만 , '현상을 일으킨 존재' 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 '그 특정 현상' 을 설명해 내는 게 기독교 아닌가? '믿음' 의 힘은 이 때 발휘되는 것이고 말이다..

 

또 충격적인 고백을 들어 보자.

 

"성인 사도 바울은 '죄악의 신비성' 을 '인간 악의 신비' 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 서게 되면 더욱 큰 신비는 인간의 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선에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될 것이다. 나의 견해로는 보통의 인간들은 그냥 우연히 그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점잖고 영웅적이라고 생각된다."

 

-> 이웃을 격려해 주고 , 높여 주는 용도로서는 이러한 '인간에 대한 견해' 가 참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 이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정의' 가 아니다. 그도 역시 '인간' 이기에 , '자신의 죄의 깊이' 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저 수건이 가려진 상태로는 '십자가' 가 나의 것이 될 수 없고 , 그 놀라운 은혜를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며 , 그러기에 그에게 있어서 '삶의 최고 가치' 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달리심'[고전2:2] 에 없는 것이다. 그 선하심을 한 번만 맛 봐도 , 자신의 활동에 , 자신의 고백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음을 알게 될텐데.....

 

 

스캇 팩의 이 저서가 일반 심리학으로 분류되면 좀 더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요? 워낙 기독교의 개념을 잘못 '활용'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보니, 일반 심리학으로 넣기에도 애매하고, 기독교 심리학 저서로 보기에는 아주 낮은 점수 밖에 줄 수 없는 저서입니다.

 

당혹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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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계라는 말은 그 자체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우리는 흔히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머리속에 그릴 때 보통 '~을 상상한다'고 말한다.

아니면 ​'상상력이 풍부하다'라는 말처럼 과거의 지각이나 경험을 근거로 존재하지 않는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재생하거나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도 상상에 포함시킨다.

어쨌든 상상이란 ​지금 이곳에 있는 현실보다는 가상 혹은 허망한 것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된다.

​하지만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는 이와 차원이 다르다.

​라캉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를 ​상상계의 산물이라 설명하는데, 이는 상상계라는 말이 가상보다는 이미지에 매개되는 대상 세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라캉은 상상계의 본질을 심리학자 앙리 왈롱(Henri Wallon)이 사용한 '거울 단계'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심리학자들은 거울 단계가 이미지를 매개로 해서 아동이 정체성을 형성하고 대상과의 관계를 자아를 중심으로 구성하면서 성숙해나가는 심리적 발달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거울단계는 대략 생후 6~18개월 정도에 아동이 경험하는 사건이다.

처음에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외부 대상과 구별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카오스처럼 하나로 뒤엉켜 있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는 자신의 이미지를 알아 보게 되고 자신의 이미지에 매료되어 그것을 붙잡으려 하고 떠날 줄 모른다. 반대로 침팬지는 아이보다 더 빨리 거울 속 이미지가 자신의 것임을 알아차리지만 쉽게 싫증을 내고 다른 놀이에 열중한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거울 이미지에 대한 어린아이의 집착은 이후 모든 심리과정과 인식의 원형처럼 작용하는 중요성이 있다.

 

거울단계란 한마디로 자신의 신체 이미지를 자아로 알아보고, 그것을 중심으로 대상화된 세계를 구성하는 경험이다.

​동물이 이미지의 지배와 영향을 직접 받는 반면, 인간은 이미지를 매개로 환경 세계를 자신에 맞게 재구성한다.

 

이 ​재구성 단계에서 주체가 애착을 갖는 대상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거울 단계는 인격 발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다.

라캉은 거울 단계를, 주체성의 구조를 이미지에 종속시키고 이를 토대로 상상계가 본격적으로 작용하는 첫 번째 단계로 본다.

여기서 단계(stage, phase)라는 말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주체가 거치는 과정의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라 '원초적인 구조'에 가까운 말이다.

 

거울 단계의 효과는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지식 일반과 현실에 대한 관계에 지속적으로 작용한다.

​라캉은 거울단계를 통해 자아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의 역할과 자율성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정신분석을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거울 단계의 본질을 몇 가지 주제를 통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프로이트&라캉,무의식에로의 초대] 에서 - ​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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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에리히 프롬

출판  홍신문화사

발매  1991.07.01

 

 

 

 

이건 아주 저렴한 책이다.

 

좀 더 깔끔하게 개정된 책도 절찬리 판매 중이니 그 책으로 보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에리히 프롬은 , 프로이트의 인간 정신에 대한 견해+ 마르크스의 사회 경제적인 입장 들을 통합하여 '사회 심리학' 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는데......

 

특히 , [자유로부터의 도피] 는 , 프로이트의 이론의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 프로이트의 대부분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는 , 모든 인간의 성격은 사회와 역사, 그리고 그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인간의 심리를 '개인의 내부' 에 제한시키려고 하는 일련의 사조에 대해 반기를 든다.

 

(물론 , 사회,역사 등이 인간의 성격에 의해 형성되기도 한다는 '역' 주장을 하면서 , 이와 같은 모순을 해결하는게 '사회 심리학' 의 역할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약간은 아리송하다.)

 

그는 일단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 성서의 이야기를 '신화' 로 축소시킨다.

 

그리고 나서 '종교 개혁' 등의 과정을 '심리학적' 으로 분석하고 있다 보니 , 나름의 설명들이 '심리 분석적' 으로는 그럴싸할지 몰라도 , 성경적으로는 바르지 못한 부분들이 종종 보인다.

('성경', '기독교'를 완전히 배제시켜 놓고, 이와 같은 설명 체계를 구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가령 , 인간이 '자유의 첫 행위' 를 한 것이(즉,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 '죄' 의 시작이라고 이야기 하는 부분에서 , '자유' 그 자체를 '죄' 로 보는 게 아니라 , '순종과 불순종' 의 개념 속에서 , '죄' 가 태동한다는 기존의 성경적 견해를 곡해시키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종교 개혁 시대의 자유] 부터 해서 , [나치즘의 심리 분석] 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더 나아가 , [민주주의와 현대사회] 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내는 그의 시도는 매우 과감하고 , 매우 도발적이며 , 신선하기 까지 하다.

 

'개인의 내면' 에 한정되어 있던 '소극적인 심리학' 을 벗어나 , 더욱 현실에 발을 내딛은 듯한 그의 심리학은 나름의 일관성을 띈 해석 체계를 통해 , 각각의 상황을 꼼꼼하게 분석해 나간다.

 

프롬 스스로가 유대인으로서 , 나치의 횡포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과거력이 있었기 때문에 , '나치즘의 심리' 에 대해서나 , '국가,사회 전반' 에 대한 고민들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자유' 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자유로부터의 도피' 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 우리는 외부 세력에 대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유' 라 생각하고 , 그러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프롬은 이것을 '소극적 자유' 라고 부른다.

 

하지만 , 우리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분리되는 순간 , '고독' ,'불안' 을 경험하게 되고 , 그로 인해 다시 다른 어떠한 것에 종속되어 그들과 같이 행동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와 같은 '획일화' 로 인해 , 이 시대의 '다양성' ,'개성' 이 진정한 의미를 잃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 '적극적 자유' (집단 속에서의 소외, 반복되는 일상에서 느끼는 권태와 같은 정신적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 를 얻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는데 , 많은 현대인들은 '소극적 자유' 를 얻기 위해 '적극적 자유' 를 희생하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 진정한 자유를 누릴 때 , 개인의 '자아' 가 손상되지 않으면서 , 전체 자연과 함께 아우러지는 유기적인 '통일성' 또한 손상되지 않음을 이야기 한다...... 상당히 역설적으로 들리고 , 어렵다.)

 

어쨌든 , 타자로부터 분리되어서 , '자유' 를 누리긴 누리는데 , '고독' 하고 ,'외롭다' 면?

 

그 때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적극적인 자유' 를 택함으로써 , 자신의 '자아' 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타자와 관계 맺고 사랑하며 , 일을 하고 그리하여 사회 속에서 '고립' 되지 아니하고 , 그들과 '통일된 관계' 를 맺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 다른 한 가지는 '도피' 하는 방법이 있다.

 

그리하여 , 그의 책에 나오는 '도피의 메커니즘' 이 빛을 발하는데..

 

1)'도피' 하는 방법 중 한 가지는 내겐 없는 '힘' 을 바깥에서 끌어 와서 얻는 SM(사디즘,마조히즘) 틱한 방법들이다.

 

\마조히즘은 자신을 열등하게 , 무력하게 인식하며 외부의 힘에 의존할 것이며 , 사디즘 역시 자신이 학대하고자 하는 외부 대상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의존적이다.

 

2)그리고 그 다음으로 나오는 것이 '파괴성' 인데, 이 '파괴성' 은 외부의 대상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냥 막 나가자는 것이다.

 

3)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은 , '자동 순응성' 이다.

 

이것은 자신의 '자아' 를 포기하고 , '외부 사람들의 반응' 에 온 힘을 집중하고 , '사회적 성격' 을 그대로 따라가 버리는 로봇과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본 이러한 '자유' 의 개념은 아주 신선하고 , 흥미롭다지만.....

 

여러 부분에서 비판하고픈 것도 사실이다.

 

가령 종교개혁을 '루터' 라는 개인의 심리만 파고들어 분석을 해내다 보니 , '하나님' 이라는 절대자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많은 무신론자들이 기독교의 참/거짓 여부를 분석할 때 범하는 오류이기도 하다.)

 

인본주의적인 해석 방식을 적용하다 보면 , <종교 개혁> 과 <나치즘> 의 모습이 유사해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실제로 저자는 '칼빈 교리' 와 '나치즘' 의 유사성을 논하고 있다. 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또한 , 모든 현상을 '심리학적' 으로 분석해 내려는 그의 '심리 환원주의' 적인 태도는 현상을 제대로 설명해 내지 못하게 만드는데...

 

그는 개신교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불신하도록 가르치며 , 인간을 하나의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고 이야기 하는데 , 그는 '자기 부인' 의 개념을 오독하고 있다.

('인간의 원죄' , '그리스도의 사랑' 등의 개념을 통해 설명되어져야 할 부분이 , 다른 설명 체계를 통해 분석 당하면 이와 같은 해석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심리학을 펼친다.

 

굉장히 희망적인 메시지를 많이 나누며 , 사회의 이상향을 다시 이룩해 낼 만한 주장들을 많이 한다.

 

'상대주의' 를 승인하지는 않지만 , '선과 악' 은 상식과 이성으로 쉽게 분별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그의 메시지는 역시 '인간이 중심이자 기준' 이 된다.

 

그리고 , 인간에게 온갖 일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역사의 모든 과정에 걸쳐 , 존엄.용기.품위.친절 과 같은 선한 것들을 보존하고 있음을 통해 , 인간의 능력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문제 제기' 는 그럴싸하며 , 숙고해 볼 여지가 많지만 그 해결책을 제시함에 있어서는 너무 막연하고 , 맥이 빠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힘 내!' 라고 말한다고 , '힘' 이 생기면 좋겠지만 , 그러한 자원을 인간에게서 찾아 낼 수 있을런지....

 

그가 정의내리는 '자유' 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 인지.....

 

'소극적 자유' , '적극적 자유' 가 전부는 아닌 듯 하다.

 

'진정한 자유' 의 개념을 공유하려고 한다면 , 이 책의 전반적인 접근 방법은 모조리 갈아 치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접근 방법으로는 결코 '자유' 를 볼 수 없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하지만 , 책 자체는 굉장히 Informative 하기 때문에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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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프로이트의 이론적 대전환과 이드, 자아, 초자아의 2차 정신 기구 모델은 이후 그 계승을 둘러싸고 ​프로이트주의 운동사에서 크게 대립되는 두 가지 흐름을 만든다.

​하나의 경향은 이드의 절대성과 정신 기구의 분열 및 상호 작용을 강조하면서 정신의 본질을 순화되지 않는 역동성에서 찾으려고 하는 입장​이다.

​또 하나의 경향은 자아의 자율성과 방어 기능을 강조하면서 정신분석의 방향을 자아의 실질적인 강화와 현실 적응을 돕는 데 두려는 입장​이다.

전자는 프로이트가 후기 충동 이원론에서 강조한 죽음 충동의 중요성에 주목하면서 자아의 불안정성을 인정하는 입장으로,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의 영국 정신분석학파와 라캉에 의해 대표된다.

후자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하인츠 하르트만(Heinz Hartmann) 같은 2세대 분석가들이 주축이 된 '자아 심리학(ego psychology)'과 프로이트주의의 공시적 계승자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에 의해 대변된다. 언뜻 보면 두 경향의 대립은 단지 ​강조점을 자아에 두느냐, 이드에 두느냐의 사소한 차이 같지만 정신분석의 성격과 목표를 두고 확연하게 갈라진다.

라캉은 자아심리학이 프로이트가 메타심리학을 통해 강조한 무의식의 과학이라는 본래의 방향을 왜곡하면서 그것을 심리주의로 환원했다고 격렬하게 비판한다.

​라캉의 사상은 실로 자아심리학과 교조적인 프로이트 해석에 대한 투쟁을 거치면서 만들어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캉은 1950년대부터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전면적인 구호로 내걸면서 자신이야말로 프로이트의 충실한 계승자라고 말한다.

 

라캉은 자아란 이미지에 대한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만들어지는 허구적 산물이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은 ​자아의 강화가 아니라 무의식 주체를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라캉의 사상은 크게 세 가지 개념을 축으로 해서 전개된다.

1.1930~1940년대에는 상상계(imaginaire, imaginary)

2.1950~1960년대 초까지는 상징계(symbolique, symbolic)

3.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실재계(reel, real)가 라캉 사유의 중심축을 형성한다.

 

​하지만 이 구분은 단지 이론적 강조점에 차이가 있는 것이고, 실제로는 세 범주가 유기적으로 작용하면서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삶의 영역을 역동적으로 만든다.

​철학을 경계했던 프로이트와 달리, 라캉은 ​철학과 언어학을 적극 차용해 정신분석을 새롭게 개조하면서 정신분석을 인문과학의 핵심에 위치시키고자 했다.

​라캉이 보기에 정신분석이야말로 ​진리를 새로운 시각과 지평에서 사유하고 인간 욕망의 본성을 무의식 주체의 지위와 연관 지어 설명하기 때문이다.

​라캉이 최초로 관심을 기울인 상상계는 유명한 ​거울 단계(stade du miroir, mirror stage)를 중심​으로 이론화된다.

-[프로이트&라캉, 무의식에로의 초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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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석 박사님의 쉽게 쓴 정신분석 관련 책입니다. 부담없이 접근 가능하며, 본인의 경험이 잘 녹아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에 대해 이해하길 원한다면 입문하기 좋은 책입니다.

 

 

 

분석 시작 무렵에 피분석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분석가인 나의 역할은 '이 사람의 고통이 무엇일까? 그것은 어디서 온 것일까? 를 이해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 사람에게 정신분석이 적당한가?' 를 판단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누구나 정신분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을 받기에 적당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우선 자기 마음을 잘 읽고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정신분석에서는 '마음 중심적임'(심리적 역량)(Psychological mindedness) 사람' 이라고 한다.

"그 때 나는 이런 감정을 느꼈어요. 그리고 이러이러한 생각이 떠올랐어요." 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기자처럼 사건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 속에서 느낀 자기 감정과 마음을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이다.

정신분석이 자기 마음을 탐구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이런 능력이 필수적이다.

예컨대 Ms A는 내 진료실에 처음 온 날 화분을 보며 "화분의 저 식물은 아마도 난 같은데, 참 행복해 보이네요." 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보이세요?" 라고 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작은 난이 혼자서 넓은 화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참 좋겠어요. 풍요로워 보여요." 라고 했다.

나는 그녀가 난을 보며 느끼는 자기감정과 상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후 분석 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녀는 난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넓은 화분, 풍요로운 토양을 독점하고 매일 나의 보살핌을 받고 사는 난이 부러웠던 것이다.

내가 매일 난에게 물을 주고 잎을 손질해 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녀는 그렇게 자상한 아버지를 원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고 그녀의 비의식은 남동생에게 아버지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상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Ms A  는 난을 보며 떠오른 생각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분석은 최소한 2년 이상 걸리는 긴 항해이다. 그래서 분석을 받는 사람에게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인간관계를 한 번 맺으면 오래 유지하는 사람이 분석에 좋다.


작은 일로 삐치고 절교하는 사람은 분석에 적당하지 않다.

 

분석과정에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중단해 버릴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석가는 "오랜 친구가 있는가?"에 관심을 기울인다.


사람을 고용하는 사람이라면 "수년간 함께 일하는 직원이 있는가?" 라는 것도 관심사항이다.


Ms A 는 남편과 10년 째 비교적 화목한 가정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도 분석에 적당한 사람이라는 판단의 이유가 되었다.


분석에 적당한 환자인가를 판단할 때는 현실적인 여건들도 고려해야 한다. 우선 시간을 낼 수 있어야 한다. 분석은 보통 한 번에 45분간, 일 주일에 4일을 만난다.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내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분석은 불가능하다.


또한 거리상 두 시간씩 차를 타고 와야 한다면 분석을 받기가 어려울 것이다.


Ms A 는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고 직장도 진료실에서 가까웠다.


아침 일찍 분석을 받고 직장으로 출근할 수 있는 거리였다.


또한 정신분석에 적당한 사람들은 분석에 대한 동기가 강해야 한다.


분석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보통 노이로제 증상인 경우가 많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 때문에 잠 못 자고 시달리다가 분석가를 찾기도 한다.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성공했지만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도무지 행복하지 않고 우울한 사람들도 분석가를 찾는다.


늘 뭔가에 쫓기는 것 같은 기분으로 사는 사람들도 정신분석을 원한다. '이런 기분에서 제발 벗어나고 싶다.'고 호소한다.


대인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분석을 받는 사람도 많다.


사람을 만났을 때 지나치게 긴장하는 사람들은 전화도 마음 편하게 못한다.


전화기를 들고 몇 번이나 망설이고 다짐한 후에 비로소 다이얼을 돌린다.


상대방이 싫어할 것 같아서이다. "귀찮게 왜 전화질이야?"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전화기를 들 때마다 마음은 긴장한다.


'제발, 이 바보 같은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다.' 는 소원이 간절하다. 이런 사람들이 분석실의 문을 두드린다.


북미나 유럽에서는 심리학자나 사회사업가들이 분석을 많이 받는다. 또 인류학자, 연예인, 시인이나 예술가들도 많다.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사람들이라 갈등도 그만큼 많고 그래서 분석의 효과도 잘 알기 때문이다. 분석을 받는 사람을 지적인 사람으로 보는 사회도 있다.

 


Ms A도 대인관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겉으로는 사교적으로 보였지만 속마음은 늘 긴장하고 있었고 외로웠다.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가 없었다.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웠다.


전문직도 가졌고 비교적 성공했지만 마음은 행복하지 못했다.


이것이 분석을 받게 된 동기였다.


Ms A 뿐만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친밀함(intimacy)에 대한 갈망이 있다. 그런데 친밀함을 가로막는 요소들이 있다. 친밀함을 가로막는 원인들에 대해서는 다른 장에서 다루겠다.


대인관계의 어려움이나 불안, 우울, 강박관념 같은 증상이 심할수록 벗어나고 싶은 동기도 강해진다.


동기가 강한만큼 분석의 어려움도 잘 이겨낼 수 있다. 그래서 고통이 심할수록 분석에 적합한 조건이 된다. 반대로 증상이 쉽게 호전되어 버리면 분석의 동기가 약해져서 분석이 어려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정신분석에서는 진정제나 항우울제로 증상을 없애주는 처방을 하지 않는다. 힘들어도 인간은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것이다.


이무석 박사님 책
정신분석에로의 초대
이무석 저
친밀함
이무석 저
자존감
이무석 저
예스24 | 애드온2


-[나를 행복하게 하는 친밀함]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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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말러의 분리-개별화 시기와 멜라닌 클라인의 투사, 투사적 동일시 개념 등을 활용해서 학교 폭력 사태를 간단하게 고찰해 봅시다.

 

 

 

[학교 폭력과 투사’,‘투사적 동일시’, '분리-개별화']

-청소년기는 제2의 분리-개별화 시기로서 자신만의 심리적 형태를 멋지게 만들고 싶은 시기이다.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기이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나쁜 부분들은 없애고 싶어진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나쁜 부분을 학교 내의 가장 약한 사람에게 투사(Projection)하게 된다.

(일종의 발달적 투사 작용함)

Ex) 부산 여고생 폭행 사건

비유를 하자면 아직 분리-개별화가 확고하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더러운 을 해치워 버리고 싶은데 자꾸 자신의 엉덩이에 이 묻어 있는 것처럼 찝찝한 것이다.

 

 즉, 자신이 괴롭히는 약자와 자신간의 연결성이 계속 유지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자신의 더러운 부분을 태워서 없애 버리고 싶은데 태워도 태워도 계속 남아 있는 것 같은 찝찝함을 느끼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가해자는 자신을 열등하다고 인식하다 보니 혼자서 그 더러운 것을 제거할 자신이 없을 것이고, 여럿이서 무리를 지어서 더러운 똥을 태워 버리면 마음이 더 편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부정적인 내면 요소를 약한 타인에게 '투사'하여 타인이 '문제가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만들어 버림)

 

그러나 너무 과도하게 태우다 보면 자신의 더러운 부분이 사라지고 멋진 부분만 남는 게 아니라 다 타서 없어져 버린다.

 

즉, 가해자도 자신의 인간성을 상실하고 더욱 인간 이하의 상태로 추락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청소년들에게는 break를 걸어 주고, 누군가가  도움 및 제제를 가해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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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에서는 잘 활용되고 있지 않으나, 철학적인 깊이를 더하며 삶의 무의미/의미를 탐구하는 심리 치료 접근법인 '실존치료'를 소개합니다. Cooper 의 저서인 [실존치료]도 좋고, 인간 중심 치료가 접목된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 도 명저입니다. 다양한 심리 접근법을 통합적으로 활용한다면 한 사람을 더욱 깊이 있게 분석하고 도와줄 수 있을 터인데 그 기저에 기본적으로 '실존적 개념'을 깔아두고 출발한다면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존치료가 지닌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관점들은 다양한 환원적이고 전문적인 심리 기법을 적용할 때 든든한 토대이자 균형추가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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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치료는 사람들이 빼앗겼던 자신의 인생을 되찾아 그들의 삶을 다시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치료법이다.


실존치료의 기본원리들은 외적이고 기계적인 변화에 대해 강조하는 일반적인 치료접근들을 넘어서 모든 치료법들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예를 들어, 실존치료는 의학적 개입법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반영해 보게 함으로써 이러한 개입법에 대해서도 적용범위를 확장시킬 수 있다.


만약 내향적인 사람이 보다 사교적인 사람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프로작(Prozac, 항우울제인 프로작)을 사용한다면, 실존치료자는 그 변화가 주관적으로 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도록 할 것이다.


이 변화는 과연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과는 상관없이 그(녀)의 또래집단, 문화, 혹은 고용자에 의한 변화인가? 만약 자신이 간절히 바란 것이 아니라면, 이 변화는 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가? 이에 따른 결과를 다루고자 하는 개인의 의지는 무엇인가?


또는 이와 유사하게,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기 위해 인지 재구조화와 같은 인지행동적 전략을 사용하는 경우라면 어떨까?


이와 같은 경우에 실존치료자는 그 사람에게 "긍정적인"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지속적인 변화를 의미하는가? 질을 높이는 것을 의미하는가? 정서적 및 신체적으로 충족되는 변화를 의미하는가? 혹은 편의주의적 변화를 의미하는가? 편리한 것을 의미하는가? 동화되기 쉬운 것을 의미하는가? 이런 변화에 대한 결과는 무엇인가? 보다 단순하지만 덜 반추하는 삶인가?

다루기 쉽지만 지칠 대로 지친 삶인가?


실존치료자는 이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지만 이러한 질문을 다룰 수 있게 도와준다.


실존치료자들이 내담자로 하여금 이런 문제들을 다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역시 우리 접근법의 독특한 부분이기도 하다.


앞의 문단을 보면 마치 우리가 내담자와 주로 지적인 대화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도리어 우리는 살아 숨쉬는 순간, 그 안에 펼쳐지는 삶의 과정에 집중한다.


우리에겐 분명히 보이지만 아직 내담자가 알아차리지 못한 그들 삶의 이모저모를 적절하게 반영해 줌으로써, 내담자들이 자기 자신 그리고 우리와 관계 맺는 방식이 어떠한지 조심스럽게 찾아나간다.

 

 


 

우리는 내담자가 자기 비판적인지 우유부단한지에 주목한다.


내담자가 우리와 독립적인 방식으로 관계하고 있는가? 혹은 분리되거나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관계하고 있는가?


내담자가 개인적인 공간을 차지하는 방식은 망설이거나 제약적인가 아니면 자신감과 결단력으로인가 등에 관심을 둔다.


우리는 왜 이런 방식으로 내담자에게 주목하는가?


이는 우리 앞에 있는 대상을 단지 내담자라 여기지 않고, 살고 싶은 바람과 죽음에 대한 인식,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열망과 거절에 대한 두려움, 변화에 대한 갈망과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포함하는 그의 삶 전체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담자가 겪은 과거 경험에 대한 의미와 삶의 조건들은 현재의 삶에서도 존속되고, 그것들을 의식하는 정도는 각기 다르며, 내담자의 신체, 목소리, 행동, 가치관과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고 믿는다.

 

대체로 내담자가 말하거나 행동하는 모든 것은 내담자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만약 우리가 내담자와 깊게 마음을 맞추어 보다 현존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면, 내담자는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이 깨달음은 그(녀)의 인생에 다시금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어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실존치료가 실제로 행해지는 보다 넓은 차원에서의 치료적 틀이다.


약물치료, 논리적 논쟁, 또래집단, 또는 자기 자신 등 누가 또는 무엇이 변화를 만들었는가와 같은 질문은 실존적 관점의 중심이기도 하지만, 윤활제나 중간매체가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것과 같이 변화가 어떻게 추구되는가의 질문도 중요하다.


이제 우리가 앞서 제기한 모든 질문들을 아우르는 실존치료의 실제 핵심으로 논의를 이어가 보자.

 

당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당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당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들이지만, 특히 온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열망하는 내담자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중요한 질문이다.


편리하고 기계적인 것을 넘어서, 사랑에서 죽음, 두려움에서 즐거움에까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최대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이 책의 초점은 실존치료의 특정한 표현인 현대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이다.


전세계적으로 무수히 많은 형태의 실존치료가 논의되며 적용되고 있지만,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는 명백히 미국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우리는 전체적으로 이러한 부분에 집중하여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란 무엇인가?


이 책을 통해 그 개념을 자세히 설명해 나갈 것이지만, 간략히 말하자면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는 유럽식 인본주의 철학과 실존철학, 그리고 미국식 인간 중심 심리학의 혼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는 1960년대 초에 유럽의 자아탐색, 분투, 책임감의 개념과 미국의 자발성, 낙관론, 현실성을 통합하면서 생겨났다.


이 결합으로 인해 역동적이고 시의성을 갖춘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현재 이 분야가 급속히 성장하며 다양성을 더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의 역사, 이론적인 틀, 실제적 응용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상담자와 내담자로 이루어진 이 구성원은 놀라울 정도의 광범위한 문화와 진단 분야에 확장되어 가면서 점점 더 기존의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있다.

 

실존적 인간 중심에 대한 한가지 고정관념은 이것이 문화적 엘리트에게만 적절한 '식자층' 형태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다른 고정관념은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가 사람들 간에 연결을 인정하지 않고, 과도하게 개인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 다른 추정과 오해는 실존적 인간 중심 심리치료가 불규칙적이고 잘 정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이 특히 1960년대에 일어난 인간 잠재력 개발운동과 괘를 같이하는 측면이 있었던 영향을 고려해보면 언뜻 타당해 보일지 몰라도, 그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곧 보게 될 것이지만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는 다양한 환경, 진단집단, 인종에 적용될 수 있으며, 개인적이고 대인 관계적인 맥락이 실존적 인간 중심 훈련의 핵심이기 때문에, 치료 전문분야 전체에 갈수록 더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멘델로비츠(Mendelowitz)와 슈나이더(Schneider) (2008)는 다음과 같이 썼다.

 

"현대 실존심리학이 거듭된 발전을 통해 그 지평을 넓혀 왔지만, 여전히 공유되는 근본가치가 있다. 즉, 실존의 심장부에는 초자연적인 핵심이 있고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는 진정한 앎에 대한 탐구심이 있다."


이제 이 '초자연적인 핵심'과 문학적, 철학적, 심리학적 깊이의 유산에 대해 알아보자.


-[실존적 인간 중심 치료] 서문-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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