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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우익을 담당하며, 정통 기독교를 수호하려 했던 프란시스 쉐퍼와 기독교 변증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근현대사 속에서 기독교 변호에 앞장 섰던 C.S 루이스는 서로 격렬한 논쟁을 벌인 적은 없으나 한번쯤 한자리에 앉혀 놓고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핵심적인 신학을 비교해 보자. 자세한 내용은 [루이스와 쉐퍼의 대화] 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책이 상당히 두껍지만 두 저자를 좋아하고, 신학적인 내용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잘 쓰여진 책이다.

 

 

 

 

 

 

 

쉐퍼의 입장 (근본적인 것들이라는 책에 따르면)

(그리고 B.B. 워필드, 제임스 오르, W. H.그리피스 토머스, 캠벨 몰간도 같은 견해)

  1.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2.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출생

  3.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속죄

  4. 그리스도께 죽음으로부터(문자 그대로) 부활하심

  5. 그리스도의(문자 그대로) 재림.

 

 

루이스의 입장 (순전한 기독교에 따르면)

  1. 성경의 영감과 속죄의 효력에 대해서는 인정함. 그러나 성경이 어떻게 영감을 받았으며 속죄로 인해 타락한 피조물들이 어떻게 회복되는지에 관한 것은 본질적인 문제로 취급하지 않음.

  2.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반대함.

  3.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출생

  4.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문자 그대로) 부활하심

  5. 그리스도의 (문자 그대로)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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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한 논의를 이어 나가서 경계선상의 신학자로 불리며 보수 신학에서는 거의 이단시 취급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세속 철학자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던 그의 철학적 실존 신학은 세상과의 소통을 고민해 보는 신학자, 목회자들이 한번쯤 참고해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들도 많으며 말년에 동양의 종교에 심취하여 상당한 위험수위의 발언을 하긴 했으나 그가 세상과 연결되려 했었던 깊은 고뇌를 지닌 신학자였다는 점은 존경스러우며 배울 점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박만 저 <폴 틸리히:경계선상의 신학자> 는 그의 1차 서적인 [존재의 용기] 등을 보기 전에 먼저 읽어 보기 좋은 책이다. 가독성도 좋고, 설명도 시원시원하며 중요 이론도 잘 제시해 주고 있다.

 

 

 

 

<틸리히의 인간 이해> <그가 말한 용기>

 

 

 

[비실존의 위협 앞의 인간]

 

 

 

우선 다른 신학적 주제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인간 이해 역시 성경이나 교회사의 증언이 아닌 인간의 상황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시작한단다.

 

앞에서 보았지만 틸리히는 인간이란 생래적으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오늘날 왜 이런 모습으로 살게 되었는가?

 

나의 궁극적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주장한단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인간은 자신이 끊임없이 비실존(non-existence) 의 위협 아래 있는 유한한 존재임을 알게 되고 존재론적 불안(ontological anxiety) 을 경험하게 되지.

 

 

 

하지만 이런 존재론적 불안 앞에서 인간은 자유(freedom) 를 사용하여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자 하지.

 

즉 자유를 통해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할 어떤 것을 확보하는데, 틸리히는 이를 인간은 존재해야 할 이유 혹은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 를 확보하려고 한다고 표현하지.

 

하지만 그 가운데 인간은 유한성과 의존성과 제한성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을 받아들여 그것에 만족하여 살아가기를 거부하지.

 

 

 

(신경증적 불안은 적절한 치료를 통해 극복가능 하지만 , 존재론적 불안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불안이기 때문에 , 회피하지 말고 정직하고 용기 있게 받아 들이자.)

 

 

 

 

 

  • 박만 지음 , <폴 틸리히: 경계선상의 신학자>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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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터 맥그라스의 [Mere Theology] 책 Ch4. 를 보면 이 둘의 신학을 비교해 둔 부분이 나온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신학 여정은 내가 신학을 바라보는 여정과 흡사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약 13년 전,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 등을 보면서 모든 세상이 다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희열과 기쁨에 가득찼던 시절이 있었다.  실제로 죽음을 경험하면서 [헤아려본 슬픔]과 같은 반응이 나오는 순간이 있었다.

 

 

 

존 비버슬루스(John Beversluis)의 논평

 

"[헤아려 본 슬픔]은 고통스러운 책이다. 그것은 이 책이 고통, 죽음, 위태로운 신앙을 다루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루이스가 그동안 반드시 대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 질문, 그의 이전 신앙에 결정적일 정도로 중요했던 그 질문에 대해 반응도 없고, 대답도 없는 상태로 남겨진,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재발견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이성으로 모든 것이 다 설명될 것 같았던 계몽주의적 세계관이 좀 더 실존주의적이고, 경험론적인 방향으로 인식을 전환한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루이스가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 보기 전에 썼던 [순전한 기독교]는 내 인생을 바꿔 놓을 만큼 훌륭했지만, 사랑을 경험하고 나서 썼던 [네 가지 사랑]은 나를 전율하게 했고, 루이스가 고통을 합리주의로 적절히 버무려 놨던 [고통의 문제]는 내 신앙을 바꿔 놓을 만큼 훌륭했지만, 그가 고통을 영혼 깊숙한 곳까지 경험하고 나서 썼던 [헤아려본 슬픔]은 나의 영혼을 움직였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지닌 역설적인 면모는 쟈크 엘룰의 세계관처럼 이율배반적인 우리들의 삶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굉장한 힘이 숨어 있다.

 

실제로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나면 그와 같이 '설명되지 않는', 그러나 너무도 생생한 '실존적 신학'이 내 삶에 들어오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을 활용한 논리 정연한 '신학'이 부정되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전의 루이스도 이후의 루이스도 모두 존중 받아야 하며 실존과 이성이 함께 어우러져서 궁극적으로 온전한 빛 되신 하나님을 보게 될 날을 고대해야 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담이지만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를 보면 칼빈주의적 세계관과 마틴 루터의 이율배반적 세계관이 서로 대비되어 등장한다. 낸시 피어시의 [완전한 진리]를 읽을 때 느끼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전율은 대단하다. 세상을 승리할 것만 같은 십자가의 힘에 전율한다. 그러나, 실존적이고 경험적인 삶의 무대에서 책의 메시지는 쉽사리 발현되지 않는다. 그 때 우리는 마틴 루터 또는 쟈크 엘룰의 메시지를 떠올리게 된다. 이율배반적이고, 역설적인 세상 속에서의 삶을 감내해야 하는 우리의 삶은 새로운 세계관을 요구할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배척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되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매꿔줄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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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 논쟁'은 기존의 관점과 N.T. Wright 등의 새 관점을 같이 살펴보고, 제 3의 대안을 제시한 권영경 교수님의 의견까지 잘 참고해 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종말론적 유보의 구조를 띱니다.

 

그러므로 구원(의인됨) 의 "첫 열매" 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이제 진입했다는

말입니다. 그 구원(의인됨)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진입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곧 "의인" 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의 구원(의인됨) 의 완성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진입한 "의인" 의 상태에 머무른다는 것은 우리의 실존의 순간마다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에부과된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 모든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 ( 즉 "은혜") 로 , 그리고 그것을 "믿음" 으로 "의인됨" 은 윤리적 의무와 분리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의" (즉 "은혜") 로 우리가 "의인" 이 되었으므로 , 우리는 "의인" 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은혜로만" 그리고 "믿음으로만" "의인됨" 의 복음을 강해하고는(롬 1:11 , 갈 1:4) ,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우리의 "믿음으로" "의인"된 우리가 어떻게 "의인" 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힘주어 가르친 것입니다.

(롬 12:15 , 갈5:6).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옮겨졌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사단에게 순종해서 살지 말고 , 하나님께 순종하고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에서 이 윤리적 권면의 부분을 여는 첫 마디(롬 12:1) 의 "그러므로" 에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우리의 "믿음으로" "의인" 이 되었기 때문에 ,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통치하는 "이 세대" 의 정신과 가치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변하여 좇아야 하며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다른 모든 종교들은 "의를 행하라(명령형) , 그러면 의인이 될 것이다(서술형)" 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너는 의인이다(서술형) , 그러므로 의를행하라(명령형) " 라고 가르칩니다. 개신교가 인간은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인" 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과 그러기에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인" 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 전반부를 잘 표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전반부의 구원의 서술은 후반부의 윤리적 명령을 구조적으로 동반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여 , 하나님의 "은혜" 를  "싸구려 은혜" (본회퍼 왈) 로 만들고 무효화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 이 되었다는 것은 "그러므로 의인으로 살아야 한다" 는 요구와 함께 , "그러므로 이제 의인으로 살 수 있다" 는 가능성도 포함합니다.

 

우리가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옮겨졌기 때문에 , 우리는 숙명의 힘으로 오는 사단의 죄의 통치를 거부할 수 있고 , 우리의 믿음을 유발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게 하고 그 뜻에 순종케 하는 하님의 영(성령) 에 힘입어 하나님께 올바른 순종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성령의 인도하시고 힘 주심에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우리는 "육신의 열매들"(갈 5:19~21) 이 아니라 "의의 열매들" (빌 1:11) 또는 "성령의 열매들"(갈 5:22~23) 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여 우리를 "의인" 되게 하는데 , 이 "은혜" 는 "은사" 로 구체화하고 개별화하여 우리로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게 하는 힘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의 재판석 앞에서 우리가 "첫 열매" 로 받은 "의인됨" 이 재확인되어야 할 것을 상기시키면서(고전 3:13~15 , 고후 5:10) , 우리가 믿음으로 진입한 "의인" 의 상태에 계속 머무르며 "의의 열매들" 을 맺어감으로써 그 최후의 심판석에서 "흠이 없는" 자들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고전 1:7~8 , 빌 1:9~11) . 이것은 최후의 심판석에서의 우리의 "의인됨" 의 재확인에 대해 우리의 책임을 강력히 상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고 꾸짖으면서 , 그들이 계속 죄악을 저지르면서 살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 위협도 합니다.(고전 6:9~10) .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 즉 사단의 통치 아래서 지은 죄에 대해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옮겨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 (고전 6:11), 계속 불의를 행하고 죄를 짓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진입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속에 머무르지 않고 , 도리어 그곳에서 튀쳐 나온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부과하는 의무-즉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일을 하지 않고 , 도리어 사단에게 돌아가 그의 뜻을 행한다는 뜻이 아닌가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머무르지 않은 자들 , 곧 하나님 나라 속에 머무르지 않은 자들, 그의 통치를 받지 않은 자들이 최후의 심판 때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즉 어떻게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인간들을 바라보았을 때 이 점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

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동시에 성령으로 계속 우리를 "의인" 의 상태에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곧 하나님의 "의" 로우심) 을 상기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의 완성에 대해 확신을 주고 자기도 위안을 받습니다(롬8:1~39 , 고전 1:9 , 빌1:6).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의로우심" , "은혜") 에 대한 신뢰에서 오는

"안도함" 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석에 서야 함을 늘 생각하면서 "두렵고 떨림" 의 자세로 "의인" 의 삶을 사는 것 , 바로 이 두 측면들이 서논리적 긴장을 일으키면서 우리에게 함께 있을 때 우리는 건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 간의 논리적 긴장은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긴장의 요소를 풀어 버리려고 하다보면 결국 한쪽을 경시하게 됩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전자(안도감)가 없어서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후자(두렵고 떨림)가 없어서 방종하며 "의의 열매" 를 맺않는 것도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정통적인 옛 관점 신학의 견해를 무난하게 잘 따라가는 견해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요즘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N.T WRIGHT의 새로운 '칭의'에 대한 논의도 더 다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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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 교회 교의학(KD) 73개 명제 강의 세미나

강사: 김재진 교수 / 한국칼바르트 학회 회장 / 케리그마신학연구원 원장

[You tube 영상을 보며 필기함]

명제1. 교의학은 신학적 원리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교회가 고유한 방식으로 진술한 내용에 관한 그리스도 교회의 학문적 자기검증이다.

 머리말에서 이 책에 대한 outline, 신학적 방향 혹은 신학적 특징을 제시하곤 한다.

바르트는 자기가 교의학을 집필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한다. 내가 생각한 대로 일이 이뤄지지 않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일반 사람들은 운명이다.’ ‘재수 없다라고 말하지만,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이 책을 저술하게 된 것이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한다.

이전에 썼던 교의학 책을 다 폐기하고 새롭게 다시 쓴 게 [교회 교의학]이다.

칼 바르트가 스콜라 신학을 공부하다가 안셀무스? 의 글을 잘못 이해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스콜라 신학으로 끌고 갔다는 걸 알게 됨. 그래서 이걸 다시 안셀무스?(안셈?) 연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으로 옮겨 놓으려는 시도를 함.

 

나는 그것을 이전에 말했던 것 처럼,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새롭게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바르트의 모든 신학은 [교회 교의학]에서 정점을 찍게 된다. [그 이전에는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신학도 연구하고 그랬었지만, 그러한 과정도 지나와서 이젠 말씀 위에만 기반을 세우기로 결정함]

각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각주 자체가 바르트 신학을 규정 짓는 것은 아니라고 보면 된다.

큰 글씨로 써져 있는 본문에 충실해 달라고 바르트는 부탁한다.(작은 글씨로 써져 있는 각주는 참고용이다.)

교회 교의학은 교회라는 공간 안에서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의도적으로 기독교라는 말을 쓰지 않고, ‘교회의라는 단어를 사용함.

신학이 가지고 있는 학문과 일반 학문이 가지고 있는 것과에는 전적인 차이가 있다. 신학의 현장은 교회이지, 사변적이고 인간의 철학적인 무언가가 신학의 장이 될 수는 없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신학이 공헌해야 할 것은 교회를 위한 공헌이어야 하지, 객관적 진리, 보편적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 신학이 할 일은 아니다. -> 그래서 교회 교의학이라는 책 제목을 바르트는 선택한다.

 

 

 

말씀이냐, 실존이냐? 라는 양자택일에서 그는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을 택한다.

1922~1933년 사이에 변증법적 신학의 바람을 불게 만든 잡지(쯔비쎈덴짜이트)가 있었다.(불트만,고가르텐,트루나이젠,바르트 등이 활동)

 

-> 1927년도부터 루터교 전통에 있던 사람들이 불트만의 실존적 성경 해석과 바르트의 성경 중심의 성경 해석이 갈리게 되고, 에밀 브루너와도 결별을 하게 된다.(에밀 브루너는 자연 신학도 어느 정도 믿었다.) [바르트는 늘 말씀 중심이었다.]

철학적 논의, 신학적 계보 등을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안에 들어가서 신학을 하겠다고 다짐한 것이 [교회 교의학]을 쓰게 된 동기다.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 리츨 등의 자유주의 신학은 내 버리겠다고 말한다.

히틀러 당시에 독일의 유명한 선생인 하르낙이 히틀러와 타협하는 것을 보면서 바르트는 마음을 고쳐 먹게 됨.

바르트의 신학은 20세기의 종교개혁 신학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할 수 있다.

카톨릭 신학과의 관계 속에서 폴 틸리히 등이 존재의 유비를 많이 강조하게 된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형상론에 기초한 존재의 유비를 과감히 버리고, 신앙의 유비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황덕형 교수님이 이 부분은 말씀해 주실 것이다.]

 

나는 존재의 유비를 반 그리스도의 창안물이라고 여겨서, 우리가 바로 그 때문에 카톨릭 신자가 될 수 없다. 카톨릭 신학자들은 존재의 유비’ , 특히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강조하는 방법론을 사용한다.

5년전 바르트는 자신이 스콜라주의자로 불렸던 적이 있었다.

그는 안셀름, 토마스 아퀴나스 등도 성경의 말씀을 이야기할 때 유용하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주제를 연구하겠다고 말한다.

아타나시우스 신조가 삼위일체가 끝나고 논의가 되지 않는데,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을 새롭게 거론하면서 나옴.

그 당시 바르트가 신학을 할 때는 동정녀 탄생을 불트만 처럼 신학으로 간주하고 일축해 버렸었다. -> 그러나 이제는 동정녀 탄생을 다시 잡기 시작함.

혹자들은 바르트를 숨은 카톨릭 주의자로 비난할 수도 있지만, 그는 고대 교회에서부터 현대 교회에서까지 총망라해서 다룰 만한 주제를 다 다루기로 함.

마지막 5장에 가서 성령론을 다루려고 했는데, 미처 다 저술하지 못하고 끝내 바르트는 세상을 떠난다. (교회 교의학을 다 정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 토마스 아퀴나스, 칼빈, 루터도 모두 실패함.)
바르트는 늘 항상 책을 낼 때, 순수하게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다. argument가 많았었다. 칼 헨리나 코넬리우스 반틸 같은 사람들이 바르트를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심하게 공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매일 같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기도하고 그들 앞에서 때로는 내 책을 좀 읽어 보고나 비난하라라고 말할 때도 있었다.

바르트가 좋아했던 것은 자기 책을 끝까지 읽어 주는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이 책이 나의 신학에 대해 정확히 소개해 주는 책은 아니지만 주마간산 식으로라도 이 책을 읽어 주면 그 책은 [의미]가 있다] 라고 바르트는 말함.

3page -> 바르트는 자신이 변증법적 신학자로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교회 교의학]은 변증법적 신학이 아니다. // 자신이 저술한 교회교의학은 신학적 방법을 특성화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교회를 위한, 교회에 의한, 교회에 대한 교회 신학이 되기를 바람.

바르트의 신학을 말씀의 신학,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부르지 말아달라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교회에서 선포되는 걸 말씀에 비추어서 어떻게 선포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해 볼 뿐이었다.[새로운 신학을 만들 의도가 없었다.]

한 가지 사건이 있을 때, 바르트가 침묵했다고 해서 미국에 있는 리처드 니버가 뭐라고 말함.

è 바르트 왈, “정치에 대해서 한 번쯤 말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교회 교의학의 문제는 아니다. 교회가 사회 속에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를 논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건 교의학의 역할이 아니다.  정치신학적으로 끌고 가는 걸 원치 않았었다.” (물트만은 정치 신학 쪽으로 갔었다.)

è 우리가 말씀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è 그러다 보니, 창조론이 끝나도 윤리가 나오고 예정론 파트 끝나도 윤리가 나오고 화해론 끝에도 꼭 윤리가 나온다. [복음과 율법] -> 마틴 루터는 [율법과 복음]이라고 말한 것과는 대조적.

è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람은 이렇게 살아라라는 걸 제시하기 위해 꼭 윤리론이 등장한다.[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실천적으로 고민하는 파트들이 나온다.]

[교의학 1] : 말씀론이 등장하고, [3] 부터는 창조론이 나오고 [4]은 화해론(그리스도론), [5]은 성령론과 종말론 이야기다.[5권의 구원 관련 이야기는 미완성됨]

바르트는 총 13권을 저술하고 전체 20000page에 달하는 [교회학]을 저술하고 미완성인 상태로 돌아가심.

세계 바르트 신학 모임이 스위스에서 매년 열린다 -> 정미현 박사[연세대 교목] 분이 여기 참여하고 계심.

 

명제1 분석: 교의학이라는 개념/교회/신학적 원리/신학의 학문성/-> 이것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서술할 것이다.

è 교회와 신학과 학문의 문제를 다루고 나서

è 신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신학과 교의학의 차이점에 대해 다룬다.

è 교의학을 한다는 것은? 신앙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교의학을 실현할 수 없다.

 

교회와 신학과 학문은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가?

è 교의학은 한 신학적 훈련이고, 신학은 교회의 한 기능이다.

è 교회는 하나님에 관하여 말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신앙 고백을 한다.(비유: “당신이 매우 아름답게 보입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상대에 대한 이해와 마음을 토로한 것처럼, 교회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증언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가 설교하는 내용이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검토하게 해 주는 것이 교의학이다.)

è 교회는 하나님에 대해서 설교를 통해 말한다.

목회자가 교의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그 내용이 성경과 실체이신 하나님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교회 안에서도 허다하다.

 

 

그가 말하는 설교를 검토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교의학이다.

교회에서의 선포 속에는 이미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이 담지되어 있다.

교회의 행위가 광의의 의미이건 좁건 다 신학이다. [모든 교회의 설교자는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 꼭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만 신학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말에서만 그치지 안하고, 그 사람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증언된다. [그래서 바르트는 늘 모든 논의 뒤에 윤리론을 집어 넣어둠]

 

목회자는 그의 삶 자체가 신학이다. -> 그가 선포하는 것 자체가 신학이고, 그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고백하는 신학이다.[목회적 책임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학자다 à 그것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서라도…. -> 그러나 모두가 바른 신학자는 아니다.[그 사람이 한 선포와 그 사람의 삶을 통해서 바른 신학을 검토해야 할 필요성은 충분하다]

 

신학: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논의다. -> 하나님의 논의가 아니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하여 선포된, 언설된 것에 대한 비판과 수종의 과제를 담고 있다.

우리가 하는 설교에 대해서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 -> 성경이 증언하는 바와 일치하는지를 [그러나 우리 나라는 그런 비판을 금하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학문이란? 옳고, 그름이냐를 분석하는 것이 학문이라면 교회에서 선포되어지는 가르침, 말씀 등을 분석하는 것도 일종의 신학 행위가 되는 것이다.

 

신학이 무슨 간증이나 하고, 다른 사람 것을 베껴 와서 하는 게 아니다.

신학은 철저한 자기검증이다. -> 기준이자 잣대를 만드는 작업이 바로 [교의학]이고, [교의학]은 성경에 기초하며, 성경은 그리스도에 기초한다.

 

신학 <- 교의학 <- 성경 <- 예수 그리스도 가 되는 것이다.

 

교회가 무엇을 기준으로 자기 검증을 하는 것일까?

è 교회의 존재 ,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다.

è 예수 그리스도에 비춰 봐서 우리가 행하는 행동,우리가 말하는 설교, 주장 모든 것들을 검증해 봐야 하는 것이다.

è 바르트 신학의 [교회 교의학]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 우리가 비참한 모습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우리 모습을 비춰볼 때 참 모습 그대로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에 가깝게 다가갈수록 우리는 죄인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교회 교의학 -> 화해론 [4] 끝 부분에 [칭의론]을 다룸. 바르트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내용을 먼저 다룬다.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인 것이다. 그 이후에나 칭의를 고민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것이 판단되고, 측정된다는 것이 교회 교의학의 핵심이다.

신학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한다. //

신학이 구체적인 기준에 따라서 자기 검증을 한다는 면에서 신학도 학문이라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 않는다. [신학도 학문이라는 학문성을 바르트는 논증한다.]

è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그리스도교적 철학은 될 수 없다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è 신학과 철학을 같이 한 사람을 부러워 하지 말아라. 철학은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한계가 분명하다.[인간의 이성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게 철학이다.]

신학을 하다가 철학으로 빠지지 말고, 철학을 하다가도 신학으로 넘어와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다 알고 있을까? 성경을 최소한 10독 정도는 해야 성경이 보인다.

è 신학교 가서는 신학자의 신학을 배우지, 참된 신학을 배운 적이 없다.

è 칼 헨리의 신학, 물트만의 신학, 판넨베르그의 신학, 칼빈의 신학 등…. 성경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배운 적이 없는 우리들….

è 바르트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논해보겠다고 야심차게 [교회 교의학]을 저술한 것이다.

말씀에서 주제를 찾아야 하는 게 목회 설교다. -> 성경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è 말씀으로 되돌아가라!! -> 이게 바르트의 주장이다.

20세기의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칼 바르트. -> 성경 읽기에 집중해 보자.

 

신학이 학문인 이유를 3가지 제시한다.

è 하나님에 대해 논하고 있는 학문인 신학이 다른 인간의 한계에 기반한 학문으로부터 판단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다.

è 무한은 유한을 품을 수 있지만, 유한은 무한을 품을 수 없다.[마틴 루터 왈]

è 무한한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얼마든지 논할 수 있지만,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논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è 신학은 모든 학문의 왕자다.

1)    신학도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이며

2)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의 학문 개념과 이교도가 규정하는 학문 개념을 거부하며

3)    신학의 과제를 고려해 볼 때 신학은 죄사함에 대한 과제를 간과할 수가 없다. [그 어떤 학문도 인간의 문제를 다룰 수 없다.]

교의학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è 교의 또는 교리

è 교리의 학문(교의학의 개념)이 명제7에서 더 자세히 다뤄질 것이다.

[8page] 탐구로서의 교의학은 하나님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올바른 진술이 인간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인식할 수 없다면 신비주의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전제를, 교의학은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계시하면서, 화해하면서 인간을 향해 오시는 에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면서 세운다. //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합할 때만 그 교의는 바른 내용을 가지게 된다.

 

모든 성경은 직, 간접적으로 에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다 -> 바르트 신학

 

 

 

[24] -> 구약에 있는 것이나 신약에 있는 것이나 모든 성경이 지향하고, 가르치는 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 성경이 이야기를 풀어주고 선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 존재에 설교 말씀을 비춰 봐야 한다.

특정 본문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의 연관성은 무엇일까? 이걸 고민하다 보면 막히는 성경 본문이 뚫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성경=cannon= 정경 -> 잣대(기준)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 -> 말씀은 3가지로 구분된다.

1)   기록된 말씀=성경

2)   화육된 말씀= 예수 그리스도

3)   선포된 말씀= 교회 안에서 목사님에 의해 선포되는 말씀

3가지 말씀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성경과 연관되어 있지 않으면 그건 설교가 아니다.

 

2번째 전제: 1.탐구로서의 교의학은 하나님에 관한 진술의 올바른 내용이 인간적으로 인식되어져야 한다는 것. (계시 일방적인 교의학은 있을 수 없다.) // 2.그러나 인간의 지식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현존해 있는 게 아니라 도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

내가 그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순간,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하는 것이다. 성령이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어떻게 바르트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이 될 수 있는 걸까?

진리가 모든 사물에 알려진 척도로서 신앙 안에서 전제됨으로써, 그로 인해 진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현존해 있는 것으로 전제되지 않는다.

진리는 도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아래로 꿰뚫고 들어오는 신학= 바르트 신학 = 도래하는 예수의 신학

 

[로마서 1:17]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느니라.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교의학은 십자가의 신학으로만 존재한다!! -> 바르트의 주장

 

교의학은 단지 계시의 진리들을 조합하거나, 반복하거나 복사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이런 2가지 전제 속에서 교의학은 다뤄진다.

 

 

 

[신앙의 행위](44page)

교의학은 인간의 인식 작업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 작업의 이 부분은 한 특수한 결정적 조건 하에 설계된다. 주시와 집중과 이해와 판단 등 지적 능력이 요구되는 게 사실이다. [교의학이 성령의 도움이라 해서, 퀘이커 교도들처럼 성경 읽고 나서 기도 하면서 신비주의적으로 답을 찾는 방식은 아니다.]

è 철저하게 말씀을 분석하고 신학적 작업을 해야 그 말씀의 진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è 그러나 인간의 이성에 결코 제한되지 않는다.

è 믿음은 없고, 학문적으로 따져서 (역사비평학자들처럼), 비판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말씀을 깨달으려는 믿음이 없다 보니,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성경이 증언하는 바를 깨달을 수가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살아서 나를 믿으면 영원히 살 것이고 죽어도 살리라.” ->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이게 내게 적용되고 실제적인 효과를 나타내려면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 [아무리 바른 이야기를 해도 그것을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효과가 아무것도 없다.]

è 성경에 있는 글들을 철저하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연구하고 탐구는 해야 하는데 믿음이 없으면 객관적 발견만 했을 뿐이지 내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교의학은 그 말씀을 실제 삶에서 실현해 나가야 하는 것이므로 이 결과는 치명적이다.)

바르트는 신학자로서, 지도의 문제를 매우 강조한다.

è [복음주의 신학 입문] 이라는 책에 노 신학자가 제자들에게 핵심적인 요소를 간략하게 요약해 둔 글이 있다.

è 기도하지 않고는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 바르트의 주장.

교의학은 신앙의 행위.

교의학은 인간적 인식 작업의 한 부분이지만 특별하고 결정적 조건을 전제하는데, 지적 능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궁극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전제한다는 것이다.[바르트 왈]

 

성서 신학자 -> 고등비평 하는 방법, 문헌 비평 방법, 사본 연구

è 이런 건 객관적 사실만 찾아내면 되므로 믿음이 없어도 연구 가능하다.

è 그러나 하나님의 종으로서 교회에서 말씀을 선포하려면 지적 능력도 요구되지만, 기독교 신앙이 전제되는 게 훨씬 중요하다. [바르트 주장](그러므로 목사에게는 학문적 지식보다는 믿음이 더 중요하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성경이 나타내고 있는 바를 정확히 전달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지는 것은 기도하고 말씀 보는 행위로 인해 가능해 진다.

메마른 신학자가 되지 말고, 뜨거운 신학자이자 목회자가 되자

è 바르트가 마치 그와 같았다.

 

교회는 이런 교회학적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자기 검증을 수행한다.

è 이런 자기 검증이 가능한 것은 이미 교회에 기독교적 언설의 기준이 되는 약속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다. -> testament 의 라틴어 어원은 약속’,’유언이다. 

교회 밖에서의 교의학은 불가능하다.

교의학의 전제가 되는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대한 순종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 이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인정되고 하나님의 은총이 찬양을 받으신다.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려고 함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신앙 안에서 자기 검증이 요구된다.

 

믿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 신앙을 통한 인식이 복음주의 기독교이지, 인식을 통해 믿음과 신앙을 얻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교의학은 신앙의 행위 이외에는 가능하지 않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공동체다. 그리고 들었으면 그 들은 말씀을 흩어져서 전하라.

교회는 와서 먼저 들어야 하고, 받은 은혜를 세상 속에 전해야 한다.

è 교회는 말씀을 들었으면 가서 전하는 것이다.

è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옥한흠 목사님의 제자 훈련 목적]

è 듣는 것만 신앙 생활이 아니다.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잘 안 나가려고 한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듣고 나면 신부가 이젠 세상에 나가 전하십시오라고 말한다.

파송사를 안 하더라도 들었으면 전하는 건 기독교의 기본이다.

왜 이토록 교의학에서 신앙이 필수적일까? 신앙이 무엇이기에 교의학의 전제가 되는가?

è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앙은 예수 안에서 인간에게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인격적 현존이다.

è 오히려 신앙 그 자체는 하나님의 인간에게로의 다가오심이고, 신앙은 인간의 소산이 아니다. 우리의 의지적 행위가 아니다. 결단도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로 다가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현존이 곧 신앙이다.

신앙은 나의 의지의 소산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의 행위를 보고 신앙을 판가름 하는 것도 아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바르트에 있어서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의 모든 교의학적 진술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자기가 애굽 사람에게 가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여호와가 누군지 알아야 이야기를 하지 않겠는가? ->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묻는다. “뭐라고 말하죠?” ->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갈 것이다. 라고 하나님은 말씀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묻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è 우리의 입을 통해 전달은 되어도 사실 우리의 말이 아닌 거다.

10년간 목회를 하면서 바르트가 최소한 성경을 3번은 통독을 하고(자세히 주석 해 나가면서) 설교를 함. [독일 교회에도 새벽 기도회가 있다.]

è 마틴 루터도 성경 전체를 꿰뚫고 있었고, 칼빈도 그랬다.

매일 아침 1장 씩 읽어 가면서, 주석해 나가다 보니 10년 정도 그렇게 하고 나자 하나님의 말씀이 부드럽게 이어지더라. -> 바르트가 이렇게 함.

è 일단 말씀으로 돌아가라. 말씀을 깊게 읽으라.

성경책을 새로 하나 사기. ->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만 선별해서 읽어보기.

(ex) 성령에 관한 것, 인간에 관한 것 등)

바르트도 성경을 처음부터 쭉 읽어 나가다 보니 교의학 적 주제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었을 것이다.[인간이 쓴 책은 작은 글씨로 각주가 되어 버리고, 그 어떤 책보다 성경이 최고임을 알게 되어서 교의학 책은 성경 중심으로 쓰여짐]

 

일본은 우리 나라보다 교회 숫자도 적고, 신학 거장도 적다 -> 그래도 기타모리와같은 유명한 고통의 신학자들이 존재한다. (우리 나라 신학자들은 신학을 깊게 공부하지 않고, 학위 중심으로 하다 보니 세계적인 대가가 나오질 않는다.)

è 우리 나라에서는 학자가 잘 못 나온다.

è 암기식으로 공부하다 보니

독일에선 한번 강의를 시작하면 끝까지 나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용두사미가 되어 버린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없이는 어떠한 교의학도 불가능하다.

루터 vs 에라스무스 : about 자유의지 // 에라스무스가 헬라어로 성경을 번역함.

è 루터 왈, “당신이 번역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면 무엇이 남느냐?”

è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 보려 한다.

è 성경을 제대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è 성경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를 보지 못한다면 성경을 헛 읽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누군가의 이 일치하느냐를 비교해 봐야 한다

 

교의학은 오직 신앙의 행위로만 가능하다라는 명제를 반복할 수 밖에 없다.

è 기도도 학문의 한 방식이다. 특히 교회 교의학에서는 기도도 학문의 한 요소다.

è 설교 준비에 기도는 매우 핵심적이다.

è 기도가 교의학을 함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전제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è 공부할 때 기도를 빼 놓으면 안 된다. (우리를 깨닫게 해주는 건 성령님이지, 우리의 IQ가 아니다.)

교의학적 작업 안에 기도의 중요성이 강조된 경우는 바르트의 교의학 책 밖에 없다. [루터나 토마스 아퀴나스 등도 그렇게 사용하질 않았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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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알리스터 맥그래스

출판 IVP

발매 2014.04.03

 

 

 

 

  이 책은 Mere Theology 를 표방하며, 신학의 강력한 효능과 기능을 삶의 구석구석에 적용해 주는 책이다.

 

 

  신학은 신학자의 전유물이고, 사변적 논쟁에만 쓰인다는 고정관념을 깨 주면서 기독교 신학의 목적, 위치, 타당성을 바르게 세워준다.

 


 

 그와 같은 밑작업을 한 후에 그는 독특한 전개를 해 나가는데 조지 허버트의의 시를 통해서 '신학을 렌즈나 창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얻어낸다.

 


 

 그리고 다음 챕터에서는 십자가, 고난, 신학적 당혹감이라는 제목으로 마틴 루터와 C.S 루이스를 숙고하는데 마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으로 '고난'을 묵상하며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와 [헤아려본 슬픔]을 통해서 '고통'의 실존적 차원까지 서술해낸다.

 


 

 예를 들어 C.S 루이스가 쓴 [고통의 문제]를 읽을 때 그는 이성적으로 빛이 임하는 걸 경험하긴 했찌만 실존적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이후에 [헤아려 본 슬픔]을 읽으면서 그 결핍된 부분이 회복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맥그라스는 말한다.  루이스 스스로도 표면적 인간이 아닌 '깊이 있는 인간'을 다루는 사람으로 변모했던 게 아닌가 싶다.

 


 

 여기까지는 흥미로우면서도 약간 무난하다. [워낙 훌륭한 논의를 많이 해 와서 그렇다]

 


 

 그 이후에 '자연관'에 대한 설명과 함께 part2 의 문화와 관계를 맺는 챕터가 시작되는데 여기부터 맥그라스의 진가가 드러난다.

 


 

 '자연과학' vs '신학'이라는 잘못된 대결구도를 바르게 지적해 주고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한 사례를 가지고 설명을 시작하는데, 아마 이런 논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신학자가 아닌가 싶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그리고 창조와 진화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다루고, 뒤에서는 [신 없는 사람들]에서도 언급되었던 '신 무신론 운동'에 대한 설명을 추가적으로 하면서 현재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잘못된 대결 구도를 타파하고자 한다.

 


 

 이 책은 초반에는 참신하고 신선한 아이디어가 빛나며 약간은 뻔한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책에 비하면 상당히 밋밋한 감이 있다), 후반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논의, 그리고 맥그라스가 아니면 해줄 수 없는 논의를 해 줌으로써 그 기능을 다한다.

 


 

 '자연과학과 신앙'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공격적인 신 무신론 운동에 대해 관심이 가는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신학을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도 있으니 사실 모든 평신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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