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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정치학]에서 존 하워드 요더가 설명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을 휘두른 구절 등은 때론 폭력적인 행동들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근거로 많이 활용되곤 합니다. 다른 성경 강해서와 함께 살펴봐야 할 내용입니다만 존 하워드 요더의 해석이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과 달리 신선한 부분이 있어 발췌해 봅니다.

 

폭력의 정당화로 이 구절이 사용되는 건 위험성이 있으나, 때론 불의한 일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와 확고한 신념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사랑과 정의]를 보면, 성경에 나온'사랑'의 정의는 상당히 파격적이며 존 하워드 요더가 제시하는 내용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진정한 정의,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지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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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의 초창기부터, 예수가 성전에서 채찍을 휘둘렀던 사건은 예수의 생애 중 그리스도인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가장 좋은 선례로 간주되어 왔다.


오래된 번역들은 마치 그 채찍이 상인들을 향한 것처럼 옮김으로써 그런 해석의 여지를 제공해 주었다.


"....그는 그들 모두를 그리고 양과 소들을 성전 바깥으로 내어쫓으셨다.." (벌게이트역을 좇은 흠정역)


독자들은 "그들 모두"를 돈 바꾸는 자들과 가축을 판매하던 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소지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 초기부터, 이 본문을 신중하게 연구한 학자들은 이런 해석을 배제하고 현대의 새로운 번역들이 채택한 입장을 옹호했다.


"... 모든 짐승을, 양과 소 모두, 성전 바깥으로 내어 쫓으셨다..." (Today's English Version, Moffatt, Goodspeed, the Zurich Bible, 그리고 McGregor, Temple, Plummer, Strachan 등의 주석가들)


접속사 '테 카이'(te kai)의 통상적 기능은 새로운 목록을 시작하는 것이지 "그들 모두" 에서 이미 시작된 목록을 계속 이어 주는 것이 아니다.


문법적으로 "그들 모두"(pantas)는 선행하는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 혹은 뒤따르는 "양과 소" 중 어느 것과도 연결될 수 있다.


또한 "내어쫓으시며"(exebalen)는 결코 폭력을 상정하지 않는다. 신약 성경 다른 곳에서 이 단어는 단지 "내어 보낸다"는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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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윌라드의 지식을 빌려 왔습니다. 사복음서를 읽다 보면 가끔씩 봉착하게 되는 이 구절은 '뱀 같이 지혜로우라고?' 라는 낯선 느낌을 풍기면서 읽는 이들에게 상당한 혼란을 주곤 한다. 달라스 윌라드가 [하나님의 모략]에서 제시한 설명을 참고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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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웃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도와주는 것"을 이웃사랑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족과 이웃과 "접촉 반경 내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보았다.

 

과연 맞는 말이다.

 

대체적으로 말해, 사람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다 분명한 것은, 우월적 태도나 정죄는 이웃 사랑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천국의 섬김으로 인간의 필요를 채우도록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당부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10:16)

 

이 소박한 이미지는, 남을 정죄하거나 도움이 안 될 좋은 것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대인 접촉의 긍정적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뱀의 지혜란 무엇인가? 행동할 시점이 이를 때까지 잘 관찰하고 주시하는 것이다. 적시를 포착하는 것이다. 뱀은 그저 겁이나 주려고 먹이를 쫓아다니거나 먹잇감과 엎치락 뒤치락하지 않는다.

 

일단 한번 움직이면 신속하게 결정타를 날린다.

 

비둘기는 어떠한가?

 

비둘기는 꾸미지 않는다.

 

술책을 쓸 줄 모른다. 교활함이란 비둘기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 온순한 동물은 이중성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순결한" 것이다.

 

성경은 교활하지 않은 마음을 아주 중요하게 가르친다. 천국에서 큰 자인 어린아이들의 특성 중 하나가 속이지 못하는 것이다. 성인인 우리도 그와 같아야 한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라는 사복음서의 구절과 대비했을 때, '진실함'이라는 특성이 지닌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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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윌라드의 견해는 오스왈드 챔버스의 저서, 권영경 교수님의 저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 있다. 상당히 중요한 관점이며,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관, 팔복을 통해 얻는 교훈이 전혀 달라 질 수 있다.

 

 

 

 

팔복은 복 받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다.

 

팔복은 우리 쪽에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아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좋아하시거나 인간에게 유리한 조건들을 제시해 주는 것도 아니다.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 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 형편이 좋다는 말은 사실상 어디에도 없다.

 

여덟 가지 조건이 하나님이나 사람 앞에서 행복을 얻는 길로 제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팔복은 "혁명 이후" 누가 높은 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지적도 아니다.

 

팔복은 예수와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지금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 나라를, 눈앞의 현실 상황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예시한 말씀이다.

 

인간이 모든 희망을 포기한 현실 상황들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천국 통치가 예수 안에서 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 사례를 팔복은 하나하나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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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복 있다" 하신 것은 그들이 자격이 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가 아니다.

 

정확히, 그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상태 속으로, 그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천국의 통치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 그들에게 임했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에더샤임(Alfred Edersheim)의 말이 정확히 옳다.

 

"산상수훈에서....예컨대 소위 "팔복"에 붙어 있는 약속들을 각 복과 연결된 영적 상태에 대한 보상이나 결과로 보아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는 것은 그의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의 상태가 다른 상태로 자라거나 서로 인과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보상은 더욱 더 아니다.

 

각 경우마다 연결 고리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분이......'모든 믿는 자에게 천국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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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팔복을, 복을 얻는 방법의 조건으로 보는 통상적 해석이 옳다면 복 있는 자 중에 들기 위해 우리도 가난해져야 하고 애통해야 하고 핍박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해석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자라면 당연히 가난해지고 슬퍼하고 핍박 받으려 해야 하건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by 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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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가복음 10장은 누가복음 팔복의 첫째 내용인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 흥미로운 의미를 던져 준다.

 

이후 많은 시대가 그러하듯, 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표시라는 것이 그 시대의 일반적 통념이었다.

 

이 땅의 부를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일진대 달리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청년은 하나님보다 부를 더 사랑했다.

 

사업을 계속할 것인가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선택의 기로가 주어지자, 그는 고민 끝에 부를 택했다.

 

 

 

이어 예수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즉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말씀해 주셨다.

 

부는 곧 하나님의 은총을 뜻한다는 일반의 통념 때문에 제자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이 놀라는 반응을 보이자 예수는 이런 설명을 덧붙이셨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설명'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심히 놀라' 서로 수군거렸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26절)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 분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사실 그 분은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도움, 즉 누구를 막론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통해서 말이다. 그 분은 또한 '구원받는'일에 관한 한, 전체적으로 볼 때 가난한 자가 부자보다 유리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다만 그 분은 눈 앞의 사례를 활용하여 하나님과 부에 대한 일반의 뿌리 깊은 통념을 뒤집으신 것 뿐이다.

 

아무리 부자라 한들 하나님을 부보다 덜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좋게 보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자라고 해서 곧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가난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은총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부자 청년의 사례가 세간의 통념을 바로 잡아주고 있다.

 

듣는 자들에게는 충격이었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좀 더 정확하게 생각하게 해 준 사례다.

 

by 달라스 윌라드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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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를 통한 구원을 얻는 체계가 아닌,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삶이 강조됨에도 마태복음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그리스도인의 의가 더 나아야 한다고 써 있다.

 

이 말의 의미를 달라스 윌라드는 이렇게 풀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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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우리의 소관이나 책임이 아니다. 결과에 필요한 우리 몫의 일, 그것만이 우리의 책임일 뿐이다.

 

우리의 마음은 화해를 갈망하고 있는가?

 

우리의 몫을 다했는가?

 

정직히 그런가?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행위를 의식의 행위 정도로 때우려는 마음을 거부하고 있는가?

 

형제의 분노가 그 자신의 영혼과 우리의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 입히는 해를 인하여 우리는 아파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 하나님의 길을 온전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굳이 율법적 행동 목록이 주어지지 않아도 그런 마음으로 행할 수 있는 적절한 길을 우리는 반드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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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권영경 교수님의 [위선]이라는 책에서는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행위를 약화시키거나 은해와 행위가 서로 대비되는 개념인 것처럼 서술하고 가르치는 모든 사조를 거부한다. 성경적인 요소가 많아 보이며 성경을 바르게 독해한 좋은 설명이라 생각한다. 이는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성경 속에서 일관 되게 강조하는 표현들이며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표현들에서 '율법의 행위'는 겉으로 보여지는 할례, 제사 등의 몇 가지 '외현적 활동'에 국한된 내용임이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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