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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튤리안 챠비진

출판 두란노

발매 2013.09.09

 

 

 

 

예수로 충분하다

 

 

Jesus+ Nothing = Everything

 


 

이라는 간단 명료한 공식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빌리그레이엄의 외손자이자 주목받는 차세대 목회자인 튤리안 차비진의 신앙의 정석이라고 한다.

 


 

  이 책은 복음의 핵심을 강하게 강조해 주며 '복음'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도와준다.

 


 

  상당히 좋은 책이라서 뭔가 '진리의 본질'을 되찾고 싶다면 꺼내들어도 좋을 책이다.

 


 

  신학자 터툴리아누스의 이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따왔다는 저자는 대형교회와 통합하는 과정에서 인생의 큰 위기를 겪게 되며 그 과정 중에 예수 외에 다른 것들을 덧붙였던 지난 사역의 모습을 회개하며 은혜의 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책은 쉽게 읽히지만 챕터 하나하나가 굉장히 멋지게 조직되어 있다.

 


 

  목차만 읽어도 은혜가 되는 책이다.

 


 

part1. 살 소망이 바닥났다.

1. 살 소망이 바닥났다.

2. 내가 쌓은 삶은 'nothing 인생'이었다.

 


 

part2. '내 힘'만으로 사는 '블랙홀'에 갇히다.

1. '예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소리에 설득되다

2. 자기중심적인 신앙의 블랙홀에 갇히다.

 


 

part3. 끝없는 초라함, 오직 예수로 덮다

1. 세상의 초라함을 알면 충만한 예수가 보인다.

2. 세상을 내것이라고 선포하신 분이 '나의 주님'이시다

 


 

part4. 세상에 빼앗긴 시선, 예수께로 돌리라

1. 날마다 은혜의 자리에 머물라

2. 예수의 법이 아닌 것은 눈길조차 주지 마라

 


 

part5. 가서 외치라, "나는 예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1. 예수의 '복'으로 충분합니다.

2. 예수의 '생명'으로 충분합니다.

3. 예수가 주신 '현재'로 충분합니다.

4. 예수의 '소망'으로 충분합니다.

 


 

  저자의 삶이 복음의 본질로 들어온 과정과 긴밀하게 얽혀 있는 이 목차 모든 신앙인들이 구체적인 양상만 다르다 뿐이지 거의 동일하게 경험한다는 중요한 흐름을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삶을 통해서 진행되는 이 '영적 flow'를 잘 주목해 보고, 자신의 삶에 적용해 보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이다.

 


 

'신앙의 본질'을 생생한 힘을 가지고 잘 담고 있는 책은 흔치 않다.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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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라이트

출판 에클레시아북스

발매 2011.02.10

 

 

톰 라이트의 [칭의를 말하다]에 이은, 그의 대표저작 중 하나이며 역시 논쟁적인 저서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을 한다.

 


 

1. 바울은 '복음'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나?

2. 바울은 예수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3.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 이방종교에 도전하였나?

4. 이스라엘에게 던진 바울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5. 바울은 '칭의'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나? (이 부분은 [칭의를 말하다]와 겹치는 부분이다)

6. 바울은 진정 기독교의 창시자였나?

 


  제임스 던의 말처럼 라이트는 본문이 말하는 내용을 단순히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열정과 예리한 지성을 활용하여 문제의 옮고 그름을 따진다. 그러다 보니 라이트의 주장이 다 동의되는 건 아니더라도 그의 논리에 감탄을 하게 된다.


  이 책에서 그는 바울서신인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를 집중적으로 주해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그는 다음과 같은 화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기들은 위대한 사도인 바울에게 충실하며, 그가 자기들의 진정한 길잡이라고 큰소리로 떠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바울의 사상 중 일부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바울이 똑같은 관심을 쏟은 나머지 부분은 관심 밖으로 내던져 버리거나 심지어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래도 칭의 논쟁의 연장선 상에서 기존의 기독교 계가 걸어왓던 행보 구석구석의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는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아니~ 우리가 종교개혁의 취지를 잘 반영하면서 철저하게 개혁주의적 신앙을 구축해 놨는데 우리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라고 느낄 것이다)

 


 

라이트는 바울 신학에 대한 대표적인 입장들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주는데


1) 슈바이처

2) 불트만

3) 데이비스

4) 케제만

5) 샌더스


의 입장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슈바이처만 잠깐 살펴보면 슈바이처는 '이신칭의' 바울신학의 주장처럼 로마서 1~4장이 로마서의 진정한 핵심부라는 의견에 반대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 바울 신학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5~8장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고 슈바이처는 다음과 같은 질문 4가지를 우리에게 남겨주게 된다.

 


 

1. 바울을 1세기 종교의 역사 속 어느 지점에 둘 것인가?

2. 그의 신학을, 그 신학의 출발점과 핵심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3. 바울 자신이 각각의 편지들 속에 집어넣으려 했떤 내용을 거꾸로 끄집어 내면서, 어떻게 그 편지들을 읽을 것인가?

4. 그리고 이런 작업의 결과와 부산물을 우리 자신의 삶, 우리 자신의 직업과 관련지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슈바이처의 공헌이 있다면 그는 바울을 유대교의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고 바른 주장을 한다. (이 부분이 요즘 너무 무시되고 있다고 라이트는 이야기 한다) -> 그러나 슈바이처 박사는 바울을 세계에 종말이 곧 닥칠 것이라고 믿었던 묵시적인 유대인으로 바라봄으로써 너무 과하게 나아가 버렸다.

 


 

  불트만의 주장은 어느 정도 반박되며 배제된다.(그 당시 시대 상황에 통용되던 실존주의 철학 등에 의존하여 바울을 해석한 점에서 한계가 드러난다, 즉 유대교 맥락으로 바울을 읽기보다는 헬레니즘 적 방법론으로 바울에게 접근하여 문제를 드러냄)

 


 

  데이비스는 유대교 랍비와 바울을 비교 연구하는데 장점도 있었지만 전폭적인 지지를 받진 못했다. (랍비 관련 자료들의 상당수가 바울이 살았던 시대보다 몇 세기 후의 것들이었다)


  케제만에 대해서는 앞선 선배들의 정신을 적절히 혼합하여서 그나마 나은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라이트는 말한다.


  라이트가 말하는 케제만은 이러하다.

 


 

"무인도에 함께 가면 좋을 한 명의 바울 해석자를 고르라면 나는 케제만을 택할 것이다. 힘찬 기세와 주해에 있어서의 솔직함과 철저함, 진리와 자유를 향한 열정으로 가득한 그의 저작들은 훌륭한 읽을거리이며, 언제나 신선한 눈으로 바울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나를 이끈다. 나는 그의 견해에 상당 부분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를 향한 큰 존경과 감사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라이트는 현재 바울 신학계에서 1)~4) 까지의 학자를 다 합친 것보다 영향력이 큰 학자가 있으니 그는 바로 '샌더스'라고 말한다.(과거 옥스퍼드에서 라이트의 동료였다)

 


 

바울 연구를 하는 사람은 누구도 샌더스의 자료를 피해갈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사실 샌더스가 주장했던 '언약적 율법주의' 가 내겐 큰 충격이었다. 그가 주장했던 것은 바울 당시의 유대교는 행위로 말미암은 의를 주장하는 율법주의적인 종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개신교 주해가들과 의견이 다른 것이다. 대부분의 개신교 주해가들은 유대교를 옛 이단 중 하나인 펠라기우스주의의 한 형태로 이해하고 있는데(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사람의 노력과 행위로 의와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샌더스는 반대하는 것이다.

 


 

  즉 그가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으로서 감사의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지, 그러한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겠다고 행하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언약 백성으로 들어가기 (get into)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머물기 (stay in)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샌더스는 바울 사상의 중심이 칭의나 이스라엘에 대한 어떤 비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바울 사상의 중심은 '참여' 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슈바이처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초점 삼아 바울의 사상을 복합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라이트는 샌더스가 이렇게 중요한 틀을 제시했으면서 바울 서신의 구절들에 대한 상세한 주해를 하지 않은 점을 비판한다. 어떤 틀이 실제로 얼마나 효과를 발휘하는지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주해 작업은 필수라고 주장하면서 라이트는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라이트의 주장대로라면 나는 아직도 보수 주의 신학파가 되어 버린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특별히 보수 학파에 있는 이들은 샌더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반응했다. 그들은 유대교를 최초의 펠라기우스주의로 보는 옛 관점, 즉 구원을 얻는 방법 측면에서 사람의 자기 노력('율법의 행위')을 거부하고 이신칭의를 설파한 교사로서 바울을 보는 관점을 사력을 다해 부활시키려 했다."

 


 

그리고 라이트는 샌더스를 이렇게 평가하며 마무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더스는 바울 신학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정직한 학자라면 그의 중심 논제에 대한 중대한 반박이 가해지기 전까지는 그를 무시하고 작업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런 반박은 일어날 수도 없고, 나는 그가 주장하는 기본 논점이 이미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바울을 1. 역사, 2. 신학 3. 주해 4. 적용의 측면에서 분석해 들어가는데

 


 

 예를 들어 역사적 측면에서는 바울을 헬레니즘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은 거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고, 정확한 분파는 논쟁이 붙어 있지만 극히 유대적인 사상가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의 생애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바울이 사울이었던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사울'이라는 유대인도 좀 전의 논의처럼 행위로 의를 얻으려고 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이 바란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죽었을 때 천국에 가는 것'에 대해서도 사울과 같은 유대인들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부활을 믿었는데 그 부활은 하나님이 약속한 새로운 이스라엘과 새로운 세계의 생명을 함께 누리도록 모든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사건이며, '천국'에 대한 서구의 일반적인 견해와는 그 의미가 매우 다르다)

 


 

그러던 사울이 회심을 하게 되는데 이 전환의 핵심은 이러하다.

 


 

"다소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눈이 멀고 아마도 멍이 든 채 엎드려서 품었을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의미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역사의 한 중간 지점에서, 사울이 생각하기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역사의 마지막에야 행하실 그 일을, 한 사람 나사렛 예수를 위해 행하셨다는 것이다. 사울은 이스라엘이 이교도들의 손에 고난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옳다고 판결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이교도들의 손에 고난을 받은 후에 예수가 옳다고 판결하셨다."

 


 

  그 이후에 사울은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는데 그 관점은 이전에 지니고 있었던 언약 신학에 깊고 확고하게 계속 뿌리박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스라엘의 숙명이 메시아이신 예수 안에서 집약되고 성취된 것이다)

 


  즉, 바울은 다른 무언가를 위해 유대교를 포기한 게 아니라는 점을 라이트는 강조한다. 즉 바울은 유대교의 오랜 이야기가 나사렛 예수 안에서 그 이야기의 절정과 성취에 이르렀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인이 되어 박해를 받은 것이지 유대교를 버리고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에 대한 새관점을 지지한 톰 라이트)

 


 

그 다음으로는 바울의 '복음'을 이야기해 보자.

 


 

  바울은 하나님과 세계의 이야기가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 안에 집중되고 요약되었으며, 그 예수의 이야기가 바로 전 세계를 위한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믿었다. 바을 신학에서 핵심은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 였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복음'에 대한 논의는 '부활'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는데 바울이 훈련 받았던 바리새인의 배경에서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

 


 

  단지 시체가 다시 살아나는 개념의 '육체의 부활'이 아닐 뿐인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전 15장 44절에서 '영적인 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는 플라톤 철학의 관점에서 (즉 비물질적인) '영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말은 '영'으로 구성된 (어떤 면에서는 물리적인) 육체라는 의미이다.

 


 

  '복음'에 대한 라이트의 말을 들어보자.

 


 

  "바울은 그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어떤 방법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한 것도 아니며 '예수'라는 이름과 '그리스도'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졌던 한 인물이 우연히 달성해 낸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한 것도 아니다. 그는 메시아의 구원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개인적이고 비역사적인 의미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바울의 복음 요약]

1.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꼭 집어 이야기하자면 그의 십자가 안에서, 죄와 사망을 포함한 모든 악의 권세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2. 예수의 부활 안에서 새로운 시대가 동텄다. 모든 예언들이 성취되고, 이스라엘의 유배 생활이 끝나며 모든 세계가 유일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날이 시작되었다.

3.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예수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메시아, 즉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이었다.

4. 따라서 예수는 주이시다. 즉 그는 이 세상의 참 왕이시며, 또 모든 무릎이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바울은 복음이 그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정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복음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실제로 그 힘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와 같이 바울에 대해 살펴보고 나서는 그가 유대교의 유일신론에 충실하면서 그 속에서 삼위일체를 자연스레 바라보고 있었던 점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논증을 펼치고 '칭의'에 대한 논의를 덧붙인다.

 


 

  의의 '전가'라는 개념을 반박하는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하지만 그들이 얻게 될 의가 하나님 자신의 의는 아닐 것이다. 그 의가 하나님 자신의 의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나님 자신의 의는 언약에 대한 그분의 신실하심을 말하며, 그 신실하심 때문에 (이스라엘이 소망하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정당함을 입증하시고, 그들의 정당함이 입증된 혹은 무죄가 입증된 피고가 소유하는 '의'의 상태를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여전히 하나님 자신의 특징이다. 하나님의 의는 자신의 백성이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그가 행동하시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시는 가운데 이스라엘에게 부여하는 상태가 하나님의 의는 아니다."

 


 

(이런 부분에서 기존 개혁주의 신학의 엄청난 반발을 얻었다)

 


 

[하나님의 의 라는 개념을 해석하기 위한 편리한 구성]

A. 하나님 자신의 '의'

 A1. 도덕적인 특징으로서의 의('하나님의'를 소유격 속격으로 본다)

   A1a. 분배적 정의 (마틴 루터)

   A1b. 언약에 대한 신실함 (톰 라이트)

 A2.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의 능력으로서의 의 ('하나님의'를 주격 소격으로 본다)

  A2a. 언약에 대한 신실함에서 오는 행위 (A1b와 이걸 융합시켜야 한다는데?)

 A2b. 언약과 무관한, 세계를 정복하는 행위 케제만)


B. 사람에게 주어지는 '의'

  B1.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로운 상태로서의 의 ('하나님의'를 기원의 속격으로 본다)

   B1a. 전가된(imputed) 의

   B2b. 분여된(imparted) 의

  B2.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혹은 '하나님께 가치가 있는' 특성으로서의 의('하나님의'를 목적격 속격으로 본다)

   B2a.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타고난 특성

   B2b.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특별한 선물로서 차후에 인정되는 특성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책을 참고하도록 하고, 결론을 말하자면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신의 의를 지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실제로 유대교 배경은 매우 강력하게 이런 내용을 찬성하는 전제를 만들기 때문이다. 만일 이에 반대되는 주장을 바울이 했다면 그건 바울이 유대교 배경을 저버렸다는 말이 되므로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라이트는 지금 이 시대에도 참된 바울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되어질 수 있고 이를 통해 믿음과 행함의 온전한 일치와 사회 속으로 뻗어 나가는 실천적 신학이 가능하다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가 논증을 해 나가는 구석구석을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바울 서신에 입각하여 철저한 주해 작업을 해 나가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는 신뢰성이 더해진다.

 


 

  그 동안 교회에서 들어오던 것과는 너무 다른 주장을 하는 것 같아서 어리둥절 하고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그는 철저히 성경과 역사에 기반해 있음을 기억해 보면서 설득 당할지, 거부할지를 선택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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