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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물의 발견은 정신병과 인간 본성에 관한 생각에 충격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리의 성격, 지성, 문화 자체를 한 자루의 효소로 축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에드워드 쇼터, [프로작 이전] (2009)에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980년대에 잠시 동안 나는 모노아민 산화효소 억제제(MAOI)인 페넬진을 먹었다. 상표명은 ​나르딜​이다. MAOI 는 나에게 별로 효과가 없었다. 불안이 줄어들지 않은 데다가 오히려 이 약의 부작용 때문에 죽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아주 많이 했다.

 

  MAOI가 특정 성분과 결합하면 매우 위험하고 치명적일 수도 있는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MAOI를 먹는 환자가 와인 등의 발효주, 오래된 치즈, 피클, 특정 종류의 콩,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여러 약 등 아미노산에서 유래한 티라민 함량이 높은 것을 같이 먹으면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심한 두통, 황달, 혈압 급상승, 심한 내출혈을 일으킨 경우까지 있었다. 그러니까 이 계열 약은 건강 상태가 아주 좋을 때에도 ​건강염려증과 건강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적당하지 않다.

 

​  환자에 따라서는 우울, 불안 치료에 MAOI보다 나은 방법이 없는 사람도 있지만, ​부작용 때문에 여러 해 전부터 기분장애 치료에 일차적 치료 방법으로 고려하지는 않는다. ​MAOI가 내 정신병 치료 역사에서는 카메오 출현에 그쳤지만 불안의 과학 문화사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신경화학적 정신병 이론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초기 약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MAOI와 이미프라민 등 삼환계 약물이 등장하며 우울과 불안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기반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MAOI 계열 약은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등장했다. 독일 공군이 영국 도시를 V-2 로켓 미사일로 포격하다가 사용하던 연료가 떨어져서 대신 ​히드라진​이라는 연료로 로켓을 발사해야 했다. 히드라진은 독성이 있는 폭발성 물질이었지만 과학자들은 히드라진을 변형해서 의학적으로 쓸 수 있음을 알아냈다. 전쟁이 끝난 뒤 남은 히드라진을 제약회사에서 헐값에 사들였다. 1951년 뉴저지 주 너틀리에 있는 호프만라로슈 사에서 일하던 화학자들이 히드라진을 변형해서 만든 화합물 ​이소니아지드와 이프로니아지드가 ​결핵균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임상 시험이 뒤따랐다. 1952년에는 이소니아지드와 이프로니아지드 둘 다 결핵 치료제로 판매되었다.

 

  그런데 이 두 항생제에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있었다. 이 약을 투여 받은 뒤에 일부 환자들이 "​행복감에 빠져" 결핵 병동 복도에서 춤을 추는 일이 있었다고 신문에 실렸다. ​이 보도를 읽은 정신과 의사들은 이소니아지드와 이프로니아지드에 기분을 좋게 하는 효과가 있으니 정신과 약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1956년 뉴욕 로클랜드 주립 병원에서 여러 정신질환이 있는 환자들에게 5주 동안 이프로니아지드를 투여하는 연구를 했다. 5주 투약 기간이 끝날 무렵 ​우울증이 뚜렷이 호전되었다. ​이 병원 연구 책임자인 네이선 클라인은 "정신에 활력을 주는" 효과를 보았고 그래서 자기 개인병원의 우울증 환자들에게도 이프로니아지드를 처방했다. 네이선 클라인은 일부 환자들에게서 "증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고했다.

 

  클라인은 "​정신의학 역사에서 이런 약효를 발휘한 치료제는 이프로니아지드가 처음"​이라고 단언했다. 1957년 4월 호프만라로슈 사는 이프로니아지드를 ​마르실리드​라는 상표명으로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 약은 <뉴욕 타임스>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마르실리드는 MAOI 계열 약 1호이자 ​항우울제로 알려진 첫 번째 약​이기도 하다.

 

  20세기 중반은 신경과학의 역사가 일천할 때다.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한 지식이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불꽃"이냐 "국물"이냐를 두고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뉴런 사이에서 자극이 전기적으로 전달되느냐 아니면 화학적으로 전달되느냐를 두고 과학계의 의견이 나뉘었다. 옥스퍼드 대학교 약리학 교수 레슬리 아이버슨은 1950년대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케임브리지에서 학부생일 때에는 뇌 안에 화학적 전달은 없고 뇌는 전기 기계와 같다고 배웠다."

 

  19세기 후반 영국 생리학자들이 뇌 안의 화학물질에 관한 기초적 연구를 해 놓았다. 그렇지만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오스트리아 그라츠 대학교 약리학 교수 오토 뢰비가 ​처음으로 신경전달물질의 존재를 밝혔다. ​뢰비는 1926년에 ​아세틸콜린​이라는 화학물질이 신경 끝에서 다른 신경으로 자극이 전달되는 과정을 중재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  소라진과 밀타운 ​판매가 가속화하는데도 뇌세포 사이에서 자극을 전달하는 물질인 신경전달물질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확실히 입증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이 약을 처방하는 의사들이나 이 약을 개발한 생화학자들이나 약에 왜 이런 효과가 있는지는 오리무중이었다.) 그 때 스코틀랜드에서 두 연구자가 발견한 사실이 평형추를 "국물" 쪽으로 강하게 기울게 했다.

 

  1954년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독일 신경과학자 마르테 포크트가 ​노르에피네프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있다는 증거를 처음 발견했다. ​그해 말 포크트의 동료인 존 헨리 개덤이 여러 변칙적 실험을 통해 이전까지는 소화와 관련된 장내 물질이라고 생각되던 ​세로토닌이 신경전달물질임을 발견​했다.

 

  개덤은 스스로 LSD를 먹어 실험을 했다. 개덤은 48시간 동안 제정신이 아니었고 또 실험실에서 측정한 바에 따르면 뇌척수액 내의 세로토닌 대사 물질 함량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개덤은 이런 애매한 결론을 내렸다. 세로토닌은 정신건강을 유지하게 도와준다. 따라서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정신병에 걸릴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신경전달물질과 관련된 정신건강 이론이 탄생하게 되었고 의학계나 문화 전반에서 불안과 우울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지게 된다.

 


 

p.s 세로토닌의 역사

초기 세로토닌 연구 역사를 간략하게 살피면 이렇다. 1933년에 이탈리아 연구자 비토리오 에르스파메르가 ​위에서 화학물질을 발견하였고 ​이 물질이 장 수축을 촉진하여 소화 작용에 관여하는 듯 보였기 때문에 ​엔테라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47년 미국 클리블랜드 병원에서 고혈압을 연구하던 생리학자 두 명이 혈소판 안에서 엔테라민을 발견했다. 엔테라민이 ​혈관 수축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되어 세로토닌이라고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세로는 라틴어 세룸(serum)에서 나온 말로 '피'를 뜻하고 토닌은 그리스어 토니코스(tonikos)에서 온 말로 근긴장을 가리킨다). ​1953년에 처음으로 뇌에서 미량의 세로토닌이 발견되었지만 연구자들은 위에서 나와 혈류를 타고 뇌로 이동한 잔존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세로토닌이 신경전달물질 역할을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MAOI=모노아민산화효소 억제제=Monoamine oxidase inhibitor

세로토닌=seroto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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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증 환자의 인슐린

 

 

-1953년 프랑스 정신의학자 장 지그왈드가 새로 개발된 약 클로르프로마진(소라진)을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함.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프랑스에서는 의학과 문화에 밀타운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될 약리학적 발견들이 역시 우연하게 이루어졌다.

 

  1952년 파리에서 외과 의사 앙리 라보리는 자기 환자들을 대상으로 클로르프로마진이라는 화합물을 실험해보기로 했다.

 

  클로르프로마진​은 19세기 후반 독일 직물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며 나온 부산물인데 현대에 쓰이는 향정신성 약물 가운데 같은 기원을 가진 약물이 무척 많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880년대부터 화공회사에서 개발한 산업용 염료에서 나왔다.

 

  1950년에 프랑스 연구자들이 페노티아진에서 새로운 화합물을 합성해내며 탄생했다.

 

  원래는 ​더 강한 항히스타민제​를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그런데 ​클로르프로마진이 기존 항히스타민제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폐기해버렸다. 라보리는 클로르프로마진이 항히스타민제 역할보다도 감염 위험을 줄이고 신체의 자가면역반응을 억제하여 수술로 인한 충격을 경감하는 데 효과가 잇지 않을까 생각하고 제약회사 롱풀랑에 이 약물을 요청해서 받았다. 효과가 있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환자들을 ​진정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몇몇 환자는 긴장이 크게 풀려서 곧 겪어야 할 중대 수술 절차에 대해 "무관심"한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라보리는 말했다.

 

​  "와서 좀 보세요." 라보리가 발드그라스 군병원에 있는 정신과 군의관 한 명에게 말했다고 한다. 라보리는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지중해 사람 유형 환자들"이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아주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고 했다.

 

  병원에 소문이 퍼졌고 라보리의 동료 의사 하나가 자기 매제인 정신과 의사 피에르 드니케르에게 새로운 화합물의 약효를 알려주었다. 관심이 동한 드니케르는 자기가 일하는 파리 정신병원 뒤쪽 병동에 있는 특히 증상이 심한 환자들에게 이 약을 투여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심하게 동요되어 있던 환자들이 차분해졌다. 미친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드니케르의 동료 의사 하나는 몇 해 동안 아무 반응이 없던 환자에게 이 약을 투여했는데, 환자가 멍한 상태에서 깨어나서는 다시 이발사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의사가 환자에게 면도를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꼼꼼히 면도를 했었다. 그래서 퇴원시켰다.

 

  환자들이 모두 다 이런 극적인 변화를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약의 진정 효과는 강력​했다. 병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정신병원에서 들려오던 괴성이 현저하게 줄었다고 했다. 다른 곳에서도 소규모 실험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뚜렷한 효과가 나타났다. 1953년 파리에서 정신과 의사 장 지그왈드가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던 환자 여덟 명에게 클로르프로마진을 주었더니 다섯 명이 호전되었다. 지그왈드는 클로르프로마진이 "신경증 환자의 인슐린"이라고 단언했다.

 

  클로르프로마진이 북아메리카로 건너오게 된 것은 1953년 봄 어느 일요일 저녁 몬트리올 맥길 대학교 정신의학자 하인즈 에드거 레먼이 목욕을 즐기면서 어떤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클로르프로마진이 프랑스에서 정신병에 어떤 약효를 발휘했는지에 관한 기사로, 제약회사 영업 사원이 레먼의 연구실에 두고 간 것이었다.("얼마나 좋은 약인지 이 글만 읽어봐도 설득이 될 거예요." 영업사원은 레먼의 비서에게 이렇게 말했다.) 레먼은 목욕을 마치고 나와 약을 주문했고, 이 약을 자기가 임상 관리자로 일하는 베르됭 신교 병원의 정신병 환자 일흔 명에게 투약하여 북아메리카 최초의 클로르프로마진 시험을 시작했다.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몇 주만에 조현병(정신분열증), 주요우울증, 오늘날 양극성장애라고 부르는 것 등을 겪던 환자들이 거의 나은 듯 보였다. ​증상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평생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던 환자들 몇몇이 퇴원하게 되었다. 레먼은 나중에 말하기를 "한 세기 전에 마취제가 발명된 이래 의학 분야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명이 이루어졌다." 고 했다.

 

 


​  미국 제약회사인 스미스, 클라인 앤드 프렌치에서 클로르프로마진 판매 허가를 받아 1954년에 ​소라진​이라는 상표명으로 시장에 내놓았다. 소라진 등장으로 정신병 치료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1955년에는 수십 년만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정신병 입원 환자의 수가 줄어들었다.

 

 


​  소라진과 밀타운은 문화 전반에 스며들던 새로운 생각을 더욱 강화했다.

 

​  정신병은 잘못된 양육이나 해소되지 않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라 생물학적 불균형이나 생리적 교란 때문에 일어나므로 화학 요법으로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CPZ=클로르프로마진=chlorprom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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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타운은 1955년 5월 9일 조용히 시장에 등장했다.

 

​  처음 두달 동안은 매출이 한 달에 7500달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불안, 긴장, 정신적 스트레스"에 효과가 있다는 광고가 먹혔는지 곧 판매량이 급증했다.

 

​  12월에는 미국에서 밀타운 매출이 50만 달러에 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해 수천만 달러어치씩 팔렸다.

 

  1956년에는 밀타운이 문화 현상의 하나가 되었다.

 

  영화배우 등 유명 인사들이 새로운 안정제를 칭송했다. "영화계에 꼭 필요한 게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안정이다." 로스엔젤레스 어느 신문에 실린 칼럼이다. ​

 

  "영화계에서 일단 '알 만한 인물'이 될 만큼 올라왔다면 긴장감과 정신적, 감정적 스트레스에 무릎까지 빠진 기분일 것이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고군분투하며 느꼈던 불안감은 정상에 오르고 나면 여기 계속 머무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불안감으로 바뀐다. 그러니 유명 배우건 무명 배우건 하나같이 약통에 조그맣고 신비로운 알약을 가득 채운다."

 

  루실 볼의 매니저는 시트콤 [왈가닥 루시] 세트장에 늘 밀타운을 구비해 놓았다. 루실 볼이 실제 남편이자 시트콤 속 남편이기도 한 데시 아나즈와 티격태격하고 난 뒤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는 잡지 인터뷰에서 집필과 [이구아나의 밤] 제작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버텨내려면 "밀타운,술,수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영화배우 털룰라 뱅크헤드는 자기가 밀타운을 이렇게 많이 먹으니 윌리스 실험실이 있는 뉴저지 주에 세금을 내야 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지미 듀랜트와 제리 루이스도 텔레비전 시상식에서 공식적으로 이 약을 찬미했다. 코미디언 밀턴 벌은 자기가 진행하는 화요일 밤 텔레비전 쇼를 이런 말로 시작하곤 했다. "안녕하세요, 밀타운 벌입니다."

 

  ​유명인들의 적극 지지를 받으며 밀타운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잡지에는 "행복 알약", "마음의 평화를 주는 약", "행복을 처방하다." 운운하는 글이 실렸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아내 갈라 달리는 밀타운의 열렬한 애호가여서 밀타운을 주제로 한 10만 달러짜리 설치미술 작품 제작을 남편에게 의뢰하라고 카터 사를 설득하기도 했다.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약에 취한 디스토피아를 그리기도 했으니 약물의 위험성을 준엄하게 경고할 것 같은데 오히려 메프로바메이트 합성이 "핵물리학 분야의 최근 발견보다 더 중요하고 더욱 혁명적"이라며 열렬한 전도에 나섰다.

 

  밀타운은 시판 18개월 만에 역사상 가장 많이 처방되고 (아마도 아스피린을 제외하면) 가장 많이 소비되는 약이 되었다.

 

 미국인 가운데 최소 5%는 이 약을 먹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인구의 불안을 집단적으로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신경학자 리처드 레스탁은 나중에 이렇게 평했다.

 

​  밀타운은 불안의 개념 자체를 바꾸어놓았다. 1955년 이전에는 일단 안정제라는 게 없었다. 불안 자체를 치료하기 위한 약은 존재하지 않았다.(영어로 "안정제(tranquilizer)"라는 말을 처음 쓴 기록은 의사이자 독립선언문 서명에 참여한 벤저민 러시의 글이다. 벤저민 러시는 이 말을 정신병자를 구속하는 용도로 만든 의자를 가리키는 뜻으로 썼다.) 그런데 몇 년 만에 미국에서 수십 종의 안정제가 나와 약국 판매대를 가득 채웠고 제약회사에서는 수억 달러를 들여가며 또 다른 약 개발에 매진했다.

 

 

 

  신약에 대한 정신의학계의 믿음은 좀 지나친 감이 있었다. ​프랭크 버거의 친구 네이선 클라인은 1957년 의회에서 증언을 하면서 정신과 약물 등장이 ​"인류 역사에서 원자폭탄 개발보다도 더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런 약들이 인류의 숙원이었던, 사람의 화학적 기질과 심리적 행동 사이 관계의 비밀을 풀 열쇠를 제공하고 병리적 욕구를 교정할 효과적인 수단이 되어준다면 핵융합 에너지를 파괴할 목적으로 사용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  클라인은 <비즈니스위크>기자에게 메프로바메이트는 경제적 생산성에도 (사업가들이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므로), 예술적 창의성에도 (작가나 화가가 신경증을 물리치고 "정신적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므로) 도움이 된닥 말했다.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인 전망이다 싶었지만 약물이 더 나은 삶을 가져다주리란 생각이 널리 퍼졌다. 1960년이 되자 전체 미국 의사의 75%가 밀타운을 처방했다.

 

정신분석가의 소파에서 이루어지던 불안 치료가 이제 가정의학과 진료실로 옮겨졌다.

 

이드와 초자아의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은 곧 뇌 안의 신경화학 조성을 미세 조정하는 문제로 바뀌게 될 것이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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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에도 군은 전투로 신경이 망가져 무너져 내린 군인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두고 아직 고민이다.

 

  이라크 전쟁 중에 비겁함을 이유로 불명예 전역한 미군의 이야기를 다룬 기사가 <뉴욕 타임스>에 실렸다. 이 군인은 명예 전역으로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반발했다. 자기는 겁쟁이가 아니라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일 뿐이라고 했다. 전쟁 스트레스 때문에 공황장애가 생겼고 불안 발작 때문에 제대로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변호사는 이 군인은 겁쟁이가 아니라 홙ㅏ라고 주장했다. 군은 처음에는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나중에는 비겁함이라는 죄목은 취하하고 직무 태만이라는, 강도가 약한 위반으로 바꾸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불안에 시달리는 군인은 언제나 있었다.

 

  결정적 순간에 신경이 무너지고 몸이 배신하곤 했다. 남북전쟁 때인 1862년 연방군인 펜실베이니아 자원군 68사단 소속 병사 윌리엄 헨리는 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렸다. 군의관들이 그것 말고는 건강 상태가 좋다고 판단하여, 윌리엄 헨리는 공식적으로 "군인의 심장(soldier's heart)" 진단을 받은 최초의 사례가 된다.

 

​  전투 스트레스 때문에 일어나는 증후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2차 세계 대전 동안에 미군의 실금률을 조사했는데 장의 통제를 잃는 군인이 5~6% 정도 일정한 비율로 나타났고 일부 전투 분대에서는 20% 가 넘기도 했다. 1945년 6월 이오지마에 상륙하기 직전 미군은 설사병에 시달렸다. ​일부 군인들은 설사를 핑계로 전투에서 빠지려고 했다. 1944년 프랑스에 주둔한 미군 전투여단을 조사했더니 군인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전투 중에 식은땀을 흘리고 현기증을 느끼거나 실금을 했다.

 

  2차 세계 ​때 보병대를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은 7% 밖에 되지 않았다.

 

  75%는 손이 떨린다고 했고 85%는 손바닥에 땀이 고인다고 했다. 12%는 대변을, 25%는 소변을 참지 못했다고 말했다 .(설문에 응한 사람의 1/4이 전투 중에 소변을 지렸음을 인정했다는 말을 듣고 한 육군 대령은 이렇게 말했다. "맙소사.... 그렇다면 네 명 중 세 명은 거짓말쟁이라는 말이네!") 얼마 전 미 국방부에서는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 중 전투 지역에 정찰을 나가기 전에 불안 때문에 구토를 한 군인이 매우 많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나중에 저명한 미국 역사가가 되는 윌리엄 맨체스터는 2차 세계대전 때 오키나와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내 턱이 씰룩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작동 이상 신호를 보내는 불빛처럼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윌리엄 맨체스터​가 직접 전투에 처음 나서서 판잣집에 숨은 일본군 저격병에게 다가갈 때의 경험을 회상하며 쓴 글이다.

 

"배 속에서 여러 밸브들이 열렸다 닫혔다 했다. 입이 바싹 말랐고 다리가 덜덜 떨렸고 눈은 초점이 맞지 않았다."

 

  맨체스터는 일본군 저격병을 쏘아 죽였다. 그러고 나서 구토를 하고 오줌을 지렸다. "이게 사람들이 '혁혁한 무용'이라고 부르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는 맨체스터가 불안 속에서 일으킨 생리적 반응에는 ​도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맨체스터는 상황의 ​실존적 무게감​을 의식했다. ​고맙게도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여러 사람들이 불안을 도덕성과 연결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생리적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은 냉혈한 살인자다. 작가 크리스토퍼 히친스 (거침없는 소신 발언으로 유명해 겁쟁이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사람이다)의 말을 빌리면 "​압박감 아래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훌륭한 군인이 될 자질을 갖춘 것으로 보이겠지만, 전투 피로나 외상 후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는 장교는 무감한 뒤에 사이코패스와 같은 침착함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소대 전체를 철조망으로 가득한 구렁텅이에 몰아넣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고대로부터 문화적으로 용기와 남자다움을 연결 지어왔다. 극한 상황에서 신체 기능을 통제하는 능력에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한 것은 물론이다. 전설에 따르면 나폴레옹이 위험한 작전을 앞두고 "철심 같은 신경줄"을 지닌 군인이 필요해서, 지원자 몇 명을 총살형하는 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공포탄이 발포되었을 때에 "변을 지리지 않은" 지원자를 선택했다.

 


 

  내 동료인 제프는 전쟁 특파원으로 세계 곳곳 전장에 파견되었고 테러 단체에 납치된 일도 있는데, 신참 전쟁 특파원은 다들 처음으로 총구 앞에 섰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궁금해 한다고 말한다.

 

"포화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가장 궁금한 게 바로 이거다. 나도 바지에 변을 지릴까? 어떤 사람은 지리고 어떤 사람은 안 지린다. 나는 안 지렸다. 그래서 그 때 괜찮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겪어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행히도 나는 한 번도 포화 속에 있어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내가 어느 쪽일지는 알 것 같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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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에서 겁쟁이를 비난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불안이라는 병은 당사자뿐 아니라 그 군인이 속한 군에도 재앙이 될 수 있다.

 

 


​  [앵글로색슨 연대기]에는 1003년 영국과 덴마크 사이에 벌어진 전투 기록이 나온다. 이 때 영국 지휘관 앨프릭은 너무 불안해져서 토하기 시작했고 부하들을 지휘할 수가 없었다. 결국 덴마크 군에게 살육당하고 말았다.

 

  불안은 전염되기도 쉽다. 그래서 군에서는 적극적으로 불안을 억누르려고 한다. 미국 남북전쟁 때 연합군은 겁쟁이처럼 구는 병사에게 문신을 새기거나 낙인을 찍었다. 1차 세계대전 때 전쟁 외상 때문에 신경증에 걸린 영국군은 "좋게 봐주어야 기질적으로 열등한 인간이며 나쁘게 말하면 엄살꾼에 겁쟁이다." 라는 소리를 들었다. 당대 의학서에서는 불안해하는 군인을 "도덕적 병자"라고 불렀다. (일부 진보적 의사들 (시인 시그프리드 서순을 치료한 W.H.R 리버스 등)은 전투로 인한 신경증은 도덕적으로 확고한 군인들도 걸릴 수 있는 병이라고 했지만 이런 의사들은 드물었다.).

 

  1914년 <아메리칸 리뷰 오브 리뷰스>에 실린 글에는 "장교가 자기 사병에게 발포하여 공황을 억제할 수 있다."라고 적혀있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영국군에서 탈영병은 사형에 처했다.

 

​  2차 세계대전 때 처음으로 전쟁에서 심리학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투 전에 군인을 선별하는 데에도 참여했고 그 뒤에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는 일도 했다. 미군 100만 명 이상이 전투 후유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입원했다. 그렇지만 일부 고위 장교들은 군인들을 이렇게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게 전투 효과를 높이는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불평했다.​

 

  나중에 미국 국방부 장관이 된 육군 장군 조지 마셜은 ​전선에서 겁쟁이나 꾀병군으로 간주될 병사들이 정신과 환자 취급 받는 상황을 개탄했다. ​정신과 의사들의 "지나치게 배려하는 전문적 태도" 때문에 군대가 응석받이 겁쟁이로 가득하다고 불평했다. 명망 있는 의학 저널에 전투 도중 공포증에 질리는 군인들은 불임 시술을 해야 한다는 영국 장군들의 의견이 실렸다.

 

​"이런 조치를 취해야만 군인들이 공포를 드러내는 걸 막을 수 있고 또 정신적 나약함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일도 막을 수 있다."

 

​  영국과 미국 양쪽에서 고위 장교들은 "전쟁 신경증" 진단을 받은 병사들이 비겁함으로 유전자 풀을 오염시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우리나라가 나약함을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 아무 쓸모없는 자들을 과보호하는 프로그램을 중단해야 한다."

 

  영국군 대령의 말이다.

 

  미 육군 소속 조지 패튼 장군은 전쟁 신경증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조지 패튼은 "전투 피로"라는 용어를 즐겨 썼고 이런 게 단지 "의지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패튼 장군은 전투 피로의 확산을 막기 위해 당시 사령관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전투 피로를 사형으로 처벌 가능하게 하라고 제안했다. (아이젠하워는 거부했다.)

 

 

-3부에 계속-

 

 

 

※ 모든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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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0년, 영국에서 바그다도로 파견한 영사 R. 테일러 대령이 고대 아시리아 왕궁터를

발굴하다가 설형 문자가 가득 적힌 육각 점토 기둥을 발견했다.

 

  테일러 각기둥이라고 하는 이 유물은 오늘날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를 통치한 센나케리브 왕의 정복활동이 적혀 있다. 구약 성서에 나온 사건에 관한 동시대의 기록이기 때문에 역사가나 신학자들 모두 매우 소중한 유물로 생각한다.

 

  나한테는 이 각기둥에 적힌 글에서 아시리아와 엘람(오늘날 이란 남서부에 해당)의 젊은 왕들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이야기가 특히 흥미롭게 느껴진다.

 

  각기둥에 새겨진 글은 센나케리브 왕의 군대가 엘람 군을 압도했을 때 일어난 일을 이렇게 들려준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기 병사들의 시신을 밟고 달아났다. 그물에 걸린 어린 새처럼 용기를 잃었다. 소변으로 전차를 더럽히고 대변을 지렸다."

 

  오늘날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 가운데 하나에, 예민한 장을 경멸하고 불안에 시달리는 ​전사를 도덕적으로 폄하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다.

 

​  영웅적인 태도, 용기, "긴박한 상황에서의 우아함" 따위 운동 경기에 관련된 문구들을 전쟁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다.

 

​  그렇지만 전쟁의 성패에는 운동 경기에서 잘하고 못하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대가가 걸려 있다. 삶과 죽음이 갈리기 때문이다.

 

  긴박한 속에서 평정을 유지하는 군인(과 운동선수)은 사회적으로 가장 큰 칭송을 받고, 압박을 느낄 때 흔들리는 사람은 심한 지탄을 받는다. 불안이 강한 사람은 변덕스럽고 나약하다. 용맹한 사람은 흔들림이 없고 강하다.

 

  겁쟁이는 두려움에 지배당하지만 영웅은 두려움을 모른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스파르타 최고의 전사 아리스토데모스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리스토데모스는 기원전 480년 테르모필레 전투 때 "심장이 그를 저벼러" 후위에 버무르며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리스토데모스는 '떠는 자'라고 불리게 되었고 "치욕이 너무 컸던 탓에 스스로 목을 매고 말았다."

 

​  군대에서는 병사들이 불안에 내성을 갖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바이킹은 사슴 오줌으로 만든 흥분제를 이용해 화학적으로 두려움에 대한 저항을 기르려고 했다.

 

​  영국군 사령관들은 전통적으로 럼주로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웠다. 러시아군은 보드카를 사용했다. (약한 진정제인 쥐오줌풀도 사용했다.). 미국 국방부는 ​싸움 또는 도주 반응​을 막고 전장에서의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을 약학적으로 연구해왔다. 얼마 전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병사들의 ​히드로코르티손 호르몬 ​수치를 측정하여 스트레스 수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시스템을 고안했다. 병사의 스트레스 호르몬이 어느 수치를 넘어서면 전장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관리 방식이다.

 

2부에 계속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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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운동선수 중에도 초크 때문에 극적으로 경기를 망쳐버리거나 수행 불안이 심해져서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 꽤 많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골프 선수 그레그 노먼은 1996년 마스터스 대회에서 무너져 내렸다.

 

​  마지막 몇 홀을 남겨두고 긴장해서 절대 뒤집히지 않을 것 같던 타수 차를 다 까먹고 말았다.

 

​  결국 자기에게서 승리를 앗아간 닉 팔도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체코 테니스 스타 야나 노보트나는 1993년 윔블던 우승을 5포인트 남겨두고 압박감에 무너져 내려 큰 점수차로 리드하던 경기를 슈테피 그라프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결국 노보트나는 켄트 공작부인 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1980년 11월 25일, 당시 복싱 웰터급 세계 챔피언이던 로베르토 두란은 슈가 레이 레너드와 세기의 일전을 벌였다.

 

  8라운드 종료 16초 전 수백만 달러의 상금을 눈앞에 두고, 두란은 심판에게 항복의 뜻으로 두 손을 들고 호소했다.

 

"이제 그만, 이제 그만. 권투는 그만."

 

  나중에 두란은 배가 아팠다고 말했다.

 

  그전까지 두란은 무적의 존재, 라틴계 남성성의 상징이었다.

 

  그 이후에 두란은 불명예 속에서 살아야 했다.

 

  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겁쟁이로 기억된다.

 

  극도의 불안으로 고립된 가운데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너져 내린 초크의 대표적인 예들이다.

 

  더욱 희한한 경우로 대중 앞에서 ​수행 불안​을 드러내는 곤욕을 치르고 초크가 만성이 되어버린 프로 선수들도 있다.

 

  1990년대 중반 올랜도 매직의 가드였던 닉 앤더슨이 그 중 하나다.

 

  닉 앤​더슨은 NBA 경력에서 자유투 성공률 약 70%를 자랑하는 선수였다.

 

  올랜도 매직이 휴스턴 로키츠와 맞붙은 1995년 NBA 결승전 첫 경기, 정규 시간이 몇 초 남았을 때 앤더슨에게 올랜도의 승리를 굳건히 할 자유투 기회가 연달아 네 차례 주어졌다. 단 1점만 기록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  네 번 모두 빗나갔다. 결국 올랜도 매직은 연장전에서 실점해 그 경기에서 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4전 전패로 시리즈를 내주었다. 그 뒤에 닉 앤더슨의 자유투 성공률은 급락했다. 은퇴 전까지 죽 앤더슨은 자유투 라인에서만 서면 재앙이었다. 그러다 보니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지 못하게 됐다. 파울을 당하면 자유투를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앤더슨이 나중에 회상하며 말하기를 결승전에서 놓친 자유투가 "​머릿속에서 맴도는 노래처럼 떠나지 않고 계속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되었다." ​앤더슨은 일찍 은퇴할 수 밖에 없었다.

 

  1999년, 척 노블럭은 2루에서 1루로 야구공을 던지는 능력을 잃었다. 그런데 척 노블럭이 뉴욕 양키스 선발 2루수라는 게 문제였다.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었다. 연습 동안에는 1루로 송구를 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만 경기장에서 4만 관중이 지켜보고 수백만이 텔레비전으로  보는 경기 중에는 자꾸 1루수 키를 넘겨 관중석 쪽으로 공을 던졌다.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전년도 내셔널리그 신인왕이었던 스티브 색스도 노블럭과 같은 증상에 시달렸다. ​연습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심지어 징크스를 깨기 위해 눈을 가리고 1루에 송구하는 연습까지 해냈다.

 

​  가장 유명한 케이스는 스티브 블래스일 것이다. 피츠버그 파이리츠 소속 올스타 투수였고 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구를 하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공을 스트라이크 존 안에 던지지 못하게 되었다. 연습 때에는 전처럼 잘 던졌다. 하지만 막상 경기에 들어가면 제구가 되지 않았다.

 

  스티브 블래스는 ​정신과 치료, 명상, 최면 치료, 온갖 민간요법(헐렁한 속옷을 입는 것 등등)을 써 보았지만 낫지 않자 은퇴하고 말았다.

 

​  더 희한한 경우로 각각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뉴욕 메츠의 포수였던 마이크 아이비와 매키 새서를 들 수 있다. 둘 다 공을 투수한테 돌려보내는 일에 공포증이 생겨서 (초등학교 야구 선수들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일이다) 결국 포수를 그만두어야 했다. (스포츠 정신의학자 앨런 랜스는 반쯤 농담 삼아 이런 상태를 표현하는 용어로 "공 돌리기 공포증"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초크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분명한 감시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인지심리학과 신경과학 연구를 바탕으로 ​운동선수가 수행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오히려 낮은 성취를 보인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  실제로 자기가 하는 행동에 관해 너무 많이 생각하면 수행에 방해가 된다.

 

  집중력에 성패가 달려 있다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과는 정반대의 주장인 듯 하다.

 


 

  사실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집중력을 보이느냐다.

 

 


​  시카고 대학교에서 초크의 심리학을 연구하는 시언 베일록은 망칠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걱정하면 망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한다.

 

  최상의 성취를 올리려면(일부 심리학자들은 이런 상태를 플러(Flow)라고 부른다....쉬운 말로 몰입) 뇌의 일부는 자동조종장치로 작동해야 한다. 하고 있는 일에 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또는 "분명하게 감시" 하면) 안 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아이비나 새서의 "공 돌리기 공포증"이 심해진 까닭은 공을 투수에게 돌려보내는 행위를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해야 하는데 그것에 관해 너무 많이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공을 제대로 잡았나? 오른팔 동작이 제대로인가?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나? 이번에도 또 망치는 거 아닌가? 내가 대체 왜 이럴까?) 베일록은 타격이나 스윙 동작 말고 다른 데에 집중하게 하면 (최소한 실험실 환경에서는) 선수들의 수행이 훨씬 더 좋아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선수들에게 머릿속으로 ​시를 외우거나 노래를 부르게 해서 의식적으로 신체적 과제 말고 다른 데로 주의를 돌리게 하면 수행이 확연히 좋아졌다.

 

 


​  그렇지만 불안증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것에 관해 온갖 잘못된 방법으로 생각하기를 멈출 수가 없다. '만약에 이렇게 되면? 저렇게 되면? 내가 잘하고 있을까? 바보 같아 보일까? 실수하면 어쩌지? 다시 관중석으로 공을 던지면 어쩌지? 얼굴이 빨개졌나? 내가 떨고 있는 게 보일까? 내 목소리가 떨리는 걸 알아차렸을까? 일자리를 잃거나 강등될까?'

 


 

  운동 심리학자 브래들리 햇필드는 ​초크가 일어나기 직전이나 일어나는 도중인 운동선수의 뇌를 스캔해보면 걱정과 자기 감시가 신경계에서 '교통 체증'을 일으킨 게 눈에 보인다고 한다.

 

 


​  한편 초크를 모르는 사람들, 톰 브래디나 페이턴 매닝처럼 초긴장 상황에서 우아함을 뽐내는 이들은 "효율적이고 능률적인" 신경계 활동을 보인다. 뇌 사진을 보면 효율적이고 능률적인" 신경계 활동을 보인다. 뇌 사진을 보면 효율적 수행과 관련이 있는 부분만 활발히 쓰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초크를 일으키는 운동선수들이 느끼는 불안은 얼굴이 붉어지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행동을 하게 된다. ​불안 때문에, 가장 겁내는 바로 그 행동을 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자의식이 강할수록, 부끄러움에 민감할수록 수행이 나빠진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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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선수한테 할 수 있는 최악의 말이 아마 '초커'라는 말일 것이다.(어떤 면에서는 '속임수를 쓴다.'는 말보다도 더 불명예스럽다) 초크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움츠러들고 중요한 순간에 제대로 경기를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시카고 대학교 인지심리학자 시언 베일록은 전문 용어로 "수행자가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정도, 곧 과거에 했던 정도보다 못한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불안한'이라는 단어 anxious 의 어원은 라틴어 angere인데 '목이 조이다'(choke)라는 뜻이다.

 

  라틴어 anxius 는 아마 공황 발작이 일어났을 때 가슴이 조여드는 듯한 느낌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운동 경기 등 무언가를 수행하는 상황에서 초크하다, 곧 '목이 조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패기가 부족하다, 정신이 나약하다는 의미다.

 

  운동 경기에서 초크가 일어나는 까닭은 흔히 '긴장' 때문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운동 경기에서나 전투에서나 일터에서 긴장으로 일을 망치는 것은 불안 때문이고, 불안은 바로 나약함의 징표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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