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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지라르의 이론에 대입해서 해석해 보자.

 

"희생양의 선택은 적절했다. 나사렛이라는 변방 마을 출신의 한 청년, 스스로 선지자인 척하며 어부, 세리 등과 같은 주변적 인물들을 제자로 데리고 다니는 청년에게 희생양의 역할을 맡기는 일은 너무나 간단하다.

 

문제는 이 희생양에게 집단의 모든 갈등의 책임을 떠안기는 것, 즉 유죄화 작업이다.

 

그런데 고맙게도 예수라는 청년은 유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폭력을 한 데 모으기에 적절한 언행을 일삼는다.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제 모든 준비는 다 갖추어졌다. 어찌 보면 이보다 더 쉽고 더 완벽한 조건을 갖춘 희생양도 드물 것이다.

 

공동체는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 자체로 여러 갈등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청년에게 민족의 해방자가 되어줄 것을 기대했지만 정작 청년은 정치적 해방 따위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완벽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사람들이 청년에게 가졌던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결정적인 한 가지 죄명을 덧붙인다면 간단하게 만장일치적 폭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일신교와 선민사상에, 특히 오랜 세월에 걸친 율법주의에 물들어 있는 이 군중들에게 신성모독보다 더 큰 죄는 없다. 사탄은 다시 한 번 성공적으로 일을 수행한다.

 

이번에는 그가 한 일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쉽게 일이 진행되었다. 군중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희생물이 된 존재가 스스로 사탄이 원하는 방식대로 움직여주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사탄은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작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라는 청년의 십자가 처형이 자신의 왕국에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탄의 계산을 철저히 좌절시키게 될 것이다."

 

그가 보기에 신화와 성서는 극명한 차이가 존재했는데

 

성서는 집단적 폭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고, '희생양'을 변형시키거나 왜곡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성서는 희생양의 무고함을 드러내며, 폭력의 책임이 박해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신화가 박해자들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라면, 성서는 철저히 희생양의 입장에서 기록된 텍스트이며 신화가 박해자들의 폭력을 정당화한다면, 성서는 희생물의 무고함을 입증하고 박해자들을 단죄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신화가 공동체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온 근간으로 집단적 폭력을 칭송한다면, 성서는 처음부터 집단적 폭력을 금지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결국 성서는 신화적 희생양 메커니즘의 해체를 가르치고 있으며 무고한 희생양의 위치를 복권시킨 후 박해자들에 대한 '용서'와 '복수 금지'를 한결같이 주장한다. 특히 구약성서는 한결같이 인간 공동체가 숨겨진 희생자들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이 희생자들에게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희생양 이론

 

그리고 성서는 복수가 아닌 '용서'를 통해 폭력의 연쇄고리를 끊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신화와 구별된다.

 

그러다 보니 지라르는 인류 역사에서 유일하게 신성과 집단적 폭력 사이의 철저한 거리가 유지되고 있는 경우는 성서 뿐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성서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2차 변형 작업처럼 희생양을 신격화하는 일도 없었다.

(기독교는 일신교이기 때문이다.).

 

성서 속 희생양은 처음부터 무고한 존재로 그려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화 속 희생양은 1차 변형 작업으로 유죄화 되고, 2차 변형 작업으로 신격화 된다.)

 

결국 지라르의 이론은 종착점에 다다르는데 '복음서'의 승리가 결론이 난다.

 

예수는 인간의 종교와 문화가 초식적 폭력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 폭력은 진짜 좌 있는 자들, 즉 박해자들의 책임임을 분명히 폭로하면서 세상 설립 이후부터 감추어져온 것에 대한 금기를 단번에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기존의 신화적 성스러움에 종지부를 찍는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여느 희생양의 신성화 작업과는 다른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에게 폭력을 행사한 박해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박해자들을 '용서'한다. [누가복음 23장 34절]

 

예수 그리스도는 폭력에 전혀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폭력의 굴레를 해체시킨다. 그는 폭력의 규범에 따라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항상 '용서'와 '사랑'에 집중했다.

(더군다나 희생양 메커니즘 파트에서 공부했듯이 희생양의 조건은 '복수를 할 수 없는 자'여야 하는데, 예수는 스스로 복수의 가능성을 포기해 버린다. 그가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고 선언한 이상, 복수는 이미 포기된 것이다.)

 

지라르는 이러한 놀라운 결론에 이르고 나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의 마지막 말들을 좀 더 들어보고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겠다.

 

요약하면 인간의 욕망은 모방적인데 이를 통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과 폭력을 막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대상에 대한 금지, 욕망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모방 경쟁에 귀착되지 않는 다른 욕망 모델을 제시하는 것인데 이 때 지라르가 제시하는 결론인 '좋은 모방'의 모델이 바로 그리스도다.

(사탄에서 그리스도로 모방 모델을 갈아타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철저히 기독교의 영향이 일부분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무고한 자에 대한 일방적인 왜곡 작업과 집단적 폭력은 사실상 불가능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있다면 기독교인은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희생양 메커니즘이 통하지 않는 시대라는 건 모방 경쟁으로 인해 초래되는 폭력과 갈등을 미봉책으로나마 막아줄 수 있는 보호책이 사라진 것을 의미하므로 이 시기를 조심해야 한다.

 

결국 이 불안하고 위험한 상황을 타개하려면 다시 결론으로 돌아가서 좋은 모방을 모델로 삼는 것인데 이 때 '그리스도'를 모방하면 된다.

 

소유 욕망과 경쟁적이고 상호적인 폭력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남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모델인 그리스도를 모델로 받아들이고 그의 욕망을 모방할 때 우리는 희생양 메커니즘 자체가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공동체 질서를 확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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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희생양 메커니즘의 한계점을 정리하자.

 

1. 폭력에 의해 폭력을 제어하는 방식이다.

2. '선한' 폭력도 문자 그대로 '선한' 폭력은 아니다.

 

결국 희생양 메커니즘은 인류가 안고 있는 폭력적 속성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건 단지 '임시방편'일 뿐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나아가기 전에 '희생양의 조건'이 몇 가지 나오고, 그 조건에 부합하게 만들기 위한 '변형 작업'이 이뤄지는데, '희생양'은 복수할 수 없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 희생양을 유죄로 만장일치 정죄할 수 있도록 변형시킨다면 그 다음에는 그 유죄성을 씻겨 버리는 변형 작업을 거친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이렇다.

 

"갈등과 위기의 원인으로 여겨졌던 희생물이 희생당한 뒤, 즉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한 뒤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단합을 통해 희생물은 역설적으로 사회를 위기에서 구원하고 화해를 가져오는 존재로 신성화 된다."

 

결국 위기와 극복, 갈등과 화해, 희생양과 신성한 존재, 폭력과 성스러움은 하나의 메커니즘의 양면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폭력이 근거 없는 폭력이었다는 사실, 무고한 자에 대한 폭력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기 위해서, 그리고 희생양에 대한 폭력이 실제적인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서 희생물에 대한 두 번째 변형, 즉 신성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사람들은 모두 이 작업에 참가하여 실제로 희생물을 신성한 존재로 받들게 되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남는 건 '폭력' 뿐이다.

 

그리고 지라르는 이러한 폭력의 반복적 메커니즘을 '사탄'의 존재에 비유한다.

 

이제 지라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결론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다.

 

그는 신화는 박해자들의 관점에서 폭력을 정당화하고 진실을 숨기려고 했지만, 성서, 특히 복음서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희생양의 관점에서 희생양 메커니즘의 진실을 드러내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 그 진리성을 믿는 프로세스 자체가 상당히 파격적이다) 

 

잠시 요약 정리하면 지라르는 모방 욕망 -> 희생양 메커니즘 에 이르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뒷받침 할만한 다양한 문학 작품, 인류학 자료, 신화 등을 활용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대-기독교의 성서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일부 비평가들은 지라르가 이미 '기독교'라는 답을 정해 놓고, 그에 맞는 내용들만 추려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 건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지라르는 자신은 결코 그런 식으로 작업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지적인 발검음이 결국 유대-기독교의 성서에 이르게 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 점이 정말 인상깊다.)

 

르네 지라르-작업하는 모습-

 

"제 연구 결과들이 저를 기독교로 향하게 했고, 그 진실을 믿게 했습니다. 제가 이러한 사유를 펼친 것은 제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이러한 사유를 펼치고, 또 기독교인이 된 것은 연구 결과 덕분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실제 신학의 눈으로 지라르의 이론을 바라보면, 성서 해석이 특정 이론에 치우쳐 있어서 불완전한 부분도 있고, 그 영역 이외의 기독교에 대해서는 지라르가 주목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한계점도 보일 수 있지만, 최소 지라르는 현대 세계에서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를 알렸고, 세상의 모든 법칙과 역사를 초월하는 유일한 계시로 기독교 복음을 제시했으니 긍정적인 측면도 많다고 볼 수 있다.

 

(ex) 사탄에 대한 해석은 성서와 많이 다르다. 지라르는 박해자와 희생양에 대한 진술을 숨기고 끊임 없이 반복되는 폭력의 실체, 그 자체를 사탄으로 본다. 즉, 사탄은 희생양 메커니즘의 무의식이자 그것의 구조 자체, 경쟁적 모방 시스템 자체를 의미한다.)

 

그는 성서 속에 나오는 인류의 원죄는 타인의 욕망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모방적 속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즉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자체에 대한 욕망보다는 그것을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욕망에 빠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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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멋진 사상가다. 이 책은 설명이 굉장히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추천한다.​

 

수년 전 어디선가 들어서 주목하게 되었고 가장 처음 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2차 서적을찾던 중 발견한 책이다.

 

김우현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등에도 등장했었고, 라캉 등의 정신분석학자와 비교 연구되기도 하는 그는 아주 독특한 사상가다.

 

알아두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서 그의 생애와 작품 활동은 이 책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따로 글로 올릴 예정이다.

 

대략적으로만 나누자면 그는 '욕망의 삼각형'과 '희생양 이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문학 및 문화 연구가다.

 

그의 이론은 난점이 많은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그는 하나의 주제를 논증하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다 보니 그가 문학 평론가인지, 문화 인류학자인지 철학자인지 정신분석학자인지 신학자인지 분류하기가 애매해 진다.

 

그의 분석은 문학작품-세르반테스부터 도스토예프스키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의)에서부터 원시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자료들, 신화, 성서 현대사회의 여러 현상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인류 역사를 다 포함한다. (대단하다)

 

그의 이론을 몇 가지 나눠 보면 그는 '인간의 욕망'은 결코 자연 발생적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욕망은 항상 제 3자와의 '관계'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욕망의 주인은 내가 아니게 된다. 어떤 대상을 욕망한다고 할 때 그것은 나의 내부에서 생겨난 감정이 아니라, 나의 외부에서, 그 누군가로부터 빌려온 감정이 된다.

 

-> 그래서 그는 욕망을 '매개자'라고 하는 제 3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대상과의 관계로 정의한다.

 

 

그러다 보니 욕망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직선적인 도식이 매개자를 사이에 둔 삼각형 도식으로  대체되게 되는데 그 근거를 여러 군데에서 찾아낸다.

(가령 돈키호테가 광기 어린행동을 하는 것은 그가 전설의 기사인 아마디스를 은연중에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아마디스는 '매개자', 즉 욕망의 '모델'이 되며 돈키호테는 '추종자'가 된다)

 

이런 식으로 지라르는 모방 경향이 인간 욕망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욕망의 모방적 속성은 인류의 역사와 문화 전체의 근간으로 제시된다고 주장한다.

 

 

[잠시 용어 정리]

모방 욕망: 타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 타인의 속성을 자기 것으로 삼음으로써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타인의 위치에 이르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욕망

 

지라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모방 욕망을 통해 동물적인 본능에서 벗어날 수 있고, 정체성을 만들 수 있다. 인간의 정체성은 결코 무에서 나온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더 나아가 인간을 환경과 문화에 적응하게 해주는 것도 욕망의 모방적 속성으로 본다. 

 

'적응한다는 것'이 인간이 문화에 참여하고 그것을 누릴 수 있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는 능력이라고 할 때 결국 우리는 "인간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모방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는 '낭만적 거짓'이라는 개념을 주창하기도 하는데 이는 욕망의 자율성이라는 환상(욕망은 그의 주장대로라면 자율적일 수 없으므로 그것은 '환상'이다), 자율적인 주체성과 자연발생적인 욕망이라는 환상을 이르는 표현이다.

 

이 책은 다양하고 풍성한 예시로 지라르의 이론을 뒷받침하는데 가령 한국 사회의 키워드인 명품 찬양, 외모 지상주의, 성형 열풍 등도 모방 욕망에서 그 원인을 찾아낸다.

 

여기서 그는 논의를 좀 더 심화시켜서 우리는 그 욕망의 매개자 자체보다는 그 이면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우러러 보게 된다고 말하며 그러다 보니 모방은 항상 모델이 되는 존재의 우월성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매개자의 우월성은 자연스레 주체를 열등감으로 던져 넣게 되고, 그로 인해 모방의 추종자들은 자신이 누군가를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 한다.

 

그리고 그는 매개자를 외적 매개, 내적 매개로 구분하는데 주체와 대상이 직선 관계가 아니라 매개자를 통한 삼각형 도식을 이루므로 중요한 건 매개자와 주체의 거리인데 이게 너무 멀면 이를 외적 매개라고 부른다.

 

이렇게 매개자와 주체의 거리가 멀어지면 매개자가 주는 형이상학적 위력이 약해지므로 이 자리는 뭐든 대체 가능해 진다. 대신 멀리서 그저 바라만 보고 흠모하면 되기 때문에 주체는 한결 부담 없이 편하게 매개자를 즐길 수 있다.

(마음에 안들면 다른 걸로 대체하면 되고)

 

내적 매개는 단지 주체와 매개자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면에서 외적 매개와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이 때는 모방 욕망이 지닌 부정적 요소들이 많이 부각된다. 왜냐하면 주체와 매개자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고, 경쟁이 심화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집단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폭력'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라르는 내적 매개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소설 속 인물을 인용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대상'이 풍족하다 해도 '욕망'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체에게 중요한 건 그 '대상'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매개자, 모델, 경쟁자를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외적 매개: 주체의 형이상학적 욕망은 위대한 모델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는 것

내적 매개: 모델을 넘어서는 지점까지 가는 게 내적 매개에 해당하는 '욕망'이다.

 

외적 매개: 주체가 매개자에 대한 모방을자랑스럽게 여긴다.

내적 매개: 주체가 모방의 진실을 감추려 한다.

 

르네 지라르

 

삼각형을 그려가면서 이해하면 지라르 이론이 이해하기가 쉽다.

 

외적매개에선 매개자와 주체의 거리가 내적매개일 때보다 더 멀다. 이 때는 대상을 다른 것으로 대체 가능하고, 매개자를 존경, 도달하기 힘든 존재로 본다. 반면에 내적 매개에서는 주체와 매개자의 거리가 짧고, 대상은 대체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이 때 대상의 형이상학적 위력이 높기 때문이다.

(실상은 대상보다는 매개자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이 더 커지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내적 매개에서는 주체가 매개자를 존경도 하지만 대개 매개자와 경쟁하려 하고, 이길 수 있다고도 본다.

 

그리고 매개자가 가까워질 수록 대상에 대한 욕망은 집착으로 변하는데 이 때 대상을 향한 욕망은 대상이 지닌 실제 가치와는 무관하게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주체의 욕망이 향하는 진정한 목표는 바로 매개자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소설 속 인물과 사회 현상을 가지고 자신의 이론을 멋지게 해석해 내며 욕망의 삼각형 도식을 가지고, 더욱 실천적인 적용을 모색하기도 한다. 저자의 해석을 들어 보자.

 

"욕망의 삼각형이라는 도식 하에서 주체와 타자, 즉 추종자와 모델 사이의 궁극적인 화해의 가능성, 합일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 경우에도 경쟁자들 가운데 한 명이 자신의 욕망을 고백하고 자만심을 꺾으면 투쟁은 곧 끝나게 된다.

 

하지만 그때부터 모방의 역전, 즉 주인과 노에 사이의 관계 역전은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노예의 표명된 욕망이 주인의 욕망을 파괴하고 그의 실제적인 무관심을 확고하게 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주인의 무관심은 노예를 절망에 빠뜨리고 그의 욕망을 배가시킨다. 이 두가지 감정은 동일한 것인데, 왜냐하면 서로를 복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감정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더욱 강화될 수 밖에 없다."

 

그는 사디즘과 매저키즘(SM)도 자신의 이론으로 해석해 낸다.

 

지라르에 따르면 이 두가지 이슈는 정신 분석학적 문제나 성적 도착의 문제가 아니라 삼각형의 욕망에 따른 결과가 된다.

 

사디즘: 매개자의 역할 놀이에 해당하는데 욕망의 주체가 매개자의 역할을 연기하기 시작할 때, 추종자가 아니라 타인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내려다 보기를 선택할 때 그는 학대의 주체인 사디스트가 된다.

 

매저키즘: 싫증을 느낀 주인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모방의 모델이 되는 주인은 자신의 연속적인 성공에 싫증을 느낀다. 지라르의 이론에서 '주인'은 자신의 욕망을 적절히 숨기고, 무관심을 가장하여 대상을 사이에 둔 경쟁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 그리고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매개자의 자리에 위치한 자를 의미하는데 주인은 곧 '실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상을 소유해도 그 대상은 그의 존재에 충족감을 안 주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 주인은 자기보다 훨씬 우월한 매개자가 가지고 있는 대상, 그리고 추종자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대상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지라르의 크고 작은 이론들을 더 공부해야 한다. 그는 세부적인 term을 만들어서 그 용어에 definition 을 만듦으로써 자신의 이론에 살을 붙여 나간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은 잠시 생략하고 '모방 욕망'의 결과를 알아보자.

 

결국 모든 것은 모방 욕망에서 시작되었다는 지라르의 주장대로라면, 끊임 없이 인간 사회를 괴롭히는 크고 작은 폭력, 갈등, 집단의 흥망성쇠의 기원에는 인간의 욕망이 가진 '모방적 속성'이 자리잡고 있게 된다.

 

또한 욕망은 '전염성'이 강해서 주체나 매개자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욕망이 누군가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욱 그 욕망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모방 욕망이라는 속성이 어떤 한 개인, 혹은 한 집단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게 된다.

 

여기까지가 그의 초기 작품들을 이용한 이론이자 분석이다. 여기까지는 그가 문학 비평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 줬다면 (다양한 문학 작품을 분석함), 그 이후에 [폭력과 성스러움]을 쓸 때부터는 그는 문화 비평가, 문화 인류학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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