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이 시기부터 그는 민족학, 신학, 고전 비극, 성서 등 광범위한 영역을 근거로 활용하기 때문에 그의 연구의 폭이 넓어진다.

 

그는 현대 사회의 문화 형성, 학습에도 모방이 중요한 기여를 하지만 '폭력'을 초래한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차이의 상실'로 인해 더 큰 폭력이 초래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차이는 모든 자연적, 문화적 질서의 원칙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관계속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주고, 조직화되고 위계질서를 갖춘 총체 가운데에서 사물들이 의미를 갖도록 해주는 게 바로 '차이'인데, '폭력'은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모방 경쟁' -> '차이 소멸' -> '전염된다' -> '집단 전체의 위기'

 

이 도식을 막아야 '폭력의 메커니즘'이 예방된다고 지라르는 주장한다.

 

차이의 소멸, 유사성으로 인해 '잠재적 폭력'이 표출되는 수 많은 예시로서 그는 성서 속 카인과 아벨이나 신화 속 오이디푸스, 이오카스테의 근친상간을 근거로 든다.

 

모방이론-퍼옴-

 

여기서 근친상간은 차이 소멸의 극단적인 양상이 되는데 그것은 한 가족 내에서의 중대한 차이, 즉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차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프로이트의 이론과 대립되므로 지라르는 프로이트를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비판한다. 프로이트가 직관적으로 자신의 이론에 근접해 왔지만 아쉽게도 그걸 끝까지 끌고 나가지 못하고, '모방 욕망'과 '콤플렉스 이론' 중 후자를 선택했다며 지라르는 안타까워 한다. 그리고 프로이트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된 이유까지도 설명해 낸다.) 

 

그 다음 [경쟁, 짝패] 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다시 정리하면

 

차이의 소멸 -> 경쟁적 폭력 야기 -> 전염되어 -> 차이 소멸이 더 심화된다.

 

그런데 경쟁에 빠져 있는 이들은 서로가 '쌍둥이'와 같은 존재가 된다는 사실, 즉 차이 소멸과 경쟁의 동일한 희생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지라르는 말한다. 그들은 차이 소멸의 주역이고, 폭력 전염의 주범이면서 동시에 상호적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즉, 경쟁자들 사이에 차이가 전혀 없어지면 모든 차이가 사라져 '동질성'만 남게 되어 그 둘은 완벽한 '짝패'(double)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지라르는 이 '짝패'는 항상 '괴물'의 존재와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화에서 묘사되는 '괴물'도 어떤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묘사라기 보다는 차이 소멸과 짝패에 대한 상징아라고 말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좀 부족하지 않나?)

 

이제 그의 이론 체계 전반부인 '모방 욕망' , '경쟁' 이라는 개념을 파악했으니 후반부 이론인 '희생양 메커니즘'을 살펴보자.

 

저자의 표현을 빌려보자.

 

모방 이론2 -퍼옴-

 

"차이 소멸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는 욕망, 즉 상호적 폭력에 의해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 집단과 그 구성원들을 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은 구성원들 모두의 폭력을 단하나의 대상에게로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의 모방 이론도 훌륭하지만, 희생양 이론은 실제적으로 와닿는 부분이 많다. 특히 가정 내에서 한명의 희생양을 만드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므로 잘 공부해 보자.)

 

"희생의 진정한 성격은 사회적이다. 그것은 폭력의 집단 전이를 의미한다."

 

"희생은 폭력을 일정한 방향으로 배출시키는 일종의 '대체 폭력'이다."

 

결국 인간에게서 '모방 욕망'은 근본적인 속성이다 보니 필연적으로 갈등, 폭력에 봉착하게 되고 이 폭력은 이러한 필연적 조건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기도 하는데 그게 바로 희생의 폭력, 대체하는 폭력이다.(폭력의 이중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결국 희생양에 대한 집단 전체의 폭력은 한 공동체가 파멸에 이르지 않고 번영해 나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하나의 단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좋은' 폭력, '대체하는' 폭력이 '나쁜' 폭력을 막는 이상한 모양새가 생겨 버린다. '폭력으로 폭력을 제어하는 것'이 희생양 메커니즘의 정의가 되다 보니, 이 희생양 메커니즘은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엄청난 딜레마 속에서 지라르는 '폭력 자체를 극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다가 기독교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자면 희생양을 만들 때도 모든 인간은 만장일치의 태도를 보여야 하는데 한 명이라도 이 규칙을 거부하면 전체 틀이 깨지고 말기 때문이다.

 

즉 위기를 맞이한 인간이 희생양에게 모든 책임을 전이시키는 과정에서도 모방이 개입되어 '저 녀석은 벌을 받아야 한다' 라는 유죄성에 대한 확신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린다. 그러면서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그 희생양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이다.

 

이러한 모방과 차이소멸은 희생물에 대한 폭력적 만장일치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상당히 멋진 사상가다. 이 책은 설명이 굉장히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추천한다.​

 

수년 전 어디선가 들어서 주목하게 되었고 가장 처음 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2차 서적을찾던 중 발견한 책이다.

 

김우현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등에도 등장했었고, 라캉 등의 정신분석학자와 비교 연구되기도 하는 그는 아주 독특한 사상가다.

 

알아두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서 그의 생애와 작품 활동은 이 책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따로 글로 올릴 예정이다.

 

대략적으로만 나누자면 그는 '욕망의 삼각형'과 '희생양 이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문학 및 문화 연구가다.

 

그의 이론은 난점이 많은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그는 하나의 주제를 논증하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다 보니 그가 문학 평론가인지, 문화 인류학자인지 철학자인지 정신분석학자인지 신학자인지 분류하기가 애매해 진다.

 

그의 분석은 문학작품-세르반테스부터 도스토예프스키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의)에서부터 원시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자료들, 신화, 성서 현대사회의 여러 현상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인류 역사를 다 포함한다. (대단하다)

 

그의 이론을 몇 가지 나눠 보면 그는 '인간의 욕망'은 결코 자연 발생적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욕망은 항상 제 3자와의 '관계'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욕망의 주인은 내가 아니게 된다. 어떤 대상을 욕망한다고 할 때 그것은 나의 내부에서 생겨난 감정이 아니라, 나의 외부에서, 그 누군가로부터 빌려온 감정이 된다.

 

-> 그래서 그는 욕망을 '매개자'라고 하는 제 3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대상과의 관계로 정의한다.

 

 

그러다 보니 욕망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직선적인 도식이 매개자를 사이에 둔 삼각형 도식으로  대체되게 되는데 그 근거를 여러 군데에서 찾아낸다.

(가령 돈키호테가 광기 어린행동을 하는 것은 그가 전설의 기사인 아마디스를 은연중에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아마디스는 '매개자', 즉 욕망의 '모델'이 되며 돈키호테는 '추종자'가 된다)

 

이런 식으로 지라르는 모방 경향이 인간 욕망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욕망의 모방적 속성은 인류의 역사와 문화 전체의 근간으로 제시된다고 주장한다.

 

 

[잠시 용어 정리]

모방 욕망: 타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 타인의 속성을 자기 것으로 삼음으로써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타인의 위치에 이르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욕망

 

지라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모방 욕망을 통해 동물적인 본능에서 벗어날 수 있고, 정체성을 만들 수 있다. 인간의 정체성은 결코 무에서 나온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더 나아가 인간을 환경과 문화에 적응하게 해주는 것도 욕망의 모방적 속성으로 본다. 

 

'적응한다는 것'이 인간이 문화에 참여하고 그것을 누릴 수 있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는 능력이라고 할 때 결국 우리는 "인간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모방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는 '낭만적 거짓'이라는 개념을 주창하기도 하는데 이는 욕망의 자율성이라는 환상(욕망은 그의 주장대로라면 자율적일 수 없으므로 그것은 '환상'이다), 자율적인 주체성과 자연발생적인 욕망이라는 환상을 이르는 표현이다.

 

이 책은 다양하고 풍성한 예시로 지라르의 이론을 뒷받침하는데 가령 한국 사회의 키워드인 명품 찬양, 외모 지상주의, 성형 열풍 등도 모방 욕망에서 그 원인을 찾아낸다.

 

여기서 그는 논의를 좀 더 심화시켜서 우리는 그 욕망의 매개자 자체보다는 그 이면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우러러 보게 된다고 말하며 그러다 보니 모방은 항상 모델이 되는 존재의 우월성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매개자의 우월성은 자연스레 주체를 열등감으로 던져 넣게 되고, 그로 인해 모방의 추종자들은 자신이 누군가를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 한다.

 

그리고 그는 매개자를 외적 매개, 내적 매개로 구분하는데 주체와 대상이 직선 관계가 아니라 매개자를 통한 삼각형 도식을 이루므로 중요한 건 매개자와 주체의 거리인데 이게 너무 멀면 이를 외적 매개라고 부른다.

 

이렇게 매개자와 주체의 거리가 멀어지면 매개자가 주는 형이상학적 위력이 약해지므로 이 자리는 뭐든 대체 가능해 진다. 대신 멀리서 그저 바라만 보고 흠모하면 되기 때문에 주체는 한결 부담 없이 편하게 매개자를 즐길 수 있다.

(마음에 안들면 다른 걸로 대체하면 되고)

 

내적 매개는 단지 주체와 매개자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면에서 외적 매개와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이 때는 모방 욕망이 지닌 부정적 요소들이 많이 부각된다. 왜냐하면 주체와 매개자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고, 경쟁이 심화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집단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폭력'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라르는 내적 매개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소설 속 인물을 인용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대상'이 풍족하다 해도 '욕망'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체에게 중요한 건 그 '대상'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매개자, 모델, 경쟁자를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외적 매개: 주체의 형이상학적 욕망은 위대한 모델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는 것

내적 매개: 모델을 넘어서는 지점까지 가는 게 내적 매개에 해당하는 '욕망'이다.

 

외적 매개: 주체가 매개자에 대한 모방을자랑스럽게 여긴다.

내적 매개: 주체가 모방의 진실을 감추려 한다.

 

르네 지라르

 

삼각형을 그려가면서 이해하면 지라르 이론이 이해하기가 쉽다.

 

외적매개에선 매개자와 주체의 거리가 내적매개일 때보다 더 멀다. 이 때는 대상을 다른 것으로 대체 가능하고, 매개자를 존경, 도달하기 힘든 존재로 본다. 반면에 내적 매개에서는 주체와 매개자의 거리가 짧고, 대상은 대체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이 때 대상의 형이상학적 위력이 높기 때문이다.

(실상은 대상보다는 매개자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이 더 커지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내적 매개에서는 주체가 매개자를 존경도 하지만 대개 매개자와 경쟁하려 하고, 이길 수 있다고도 본다.

 

그리고 매개자가 가까워질 수록 대상에 대한 욕망은 집착으로 변하는데 이 때 대상을 향한 욕망은 대상이 지닌 실제 가치와는 무관하게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주체의 욕망이 향하는 진정한 목표는 바로 매개자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소설 속 인물과 사회 현상을 가지고 자신의 이론을 멋지게 해석해 내며 욕망의 삼각형 도식을 가지고, 더욱 실천적인 적용을 모색하기도 한다. 저자의 해석을 들어 보자.

 

"욕망의 삼각형이라는 도식 하에서 주체와 타자, 즉 추종자와 모델 사이의 궁극적인 화해의 가능성, 합일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 경우에도 경쟁자들 가운데 한 명이 자신의 욕망을 고백하고 자만심을 꺾으면 투쟁은 곧 끝나게 된다.

 

하지만 그때부터 모방의 역전, 즉 주인과 노에 사이의 관계 역전은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노예의 표명된 욕망이 주인의 욕망을 파괴하고 그의 실제적인 무관심을 확고하게 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주인의 무관심은 노예를 절망에 빠뜨리고 그의 욕망을 배가시킨다. 이 두가지 감정은 동일한 것인데, 왜냐하면 서로를 복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감정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더욱 강화될 수 밖에 없다."

 

그는 사디즘과 매저키즘(SM)도 자신의 이론으로 해석해 낸다.

 

지라르에 따르면 이 두가지 이슈는 정신 분석학적 문제나 성적 도착의 문제가 아니라 삼각형의 욕망에 따른 결과가 된다.

 

사디즘: 매개자의 역할 놀이에 해당하는데 욕망의 주체가 매개자의 역할을 연기하기 시작할 때, 추종자가 아니라 타인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내려다 보기를 선택할 때 그는 학대의 주체인 사디스트가 된다.

 

매저키즘: 싫증을 느낀 주인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모방의 모델이 되는 주인은 자신의 연속적인 성공에 싫증을 느낀다. 지라르의 이론에서 '주인'은 자신의 욕망을 적절히 숨기고, 무관심을 가장하여 대상을 사이에 둔 경쟁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 그리고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매개자의 자리에 위치한 자를 의미하는데 주인은 곧 '실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상을 소유해도 그 대상은 그의 존재에 충족감을 안 주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 주인은 자기보다 훨씬 우월한 매개자가 가지고 있는 대상, 그리고 추종자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대상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지라르의 크고 작은 이론들을 더 공부해야 한다. 그는 세부적인 term을 만들어서 그 용어에 definition 을 만듦으로써 자신의 이론에 살을 붙여 나간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은 잠시 생략하고 '모방 욕망'의 결과를 알아보자.

 

결국 모든 것은 모방 욕망에서 시작되었다는 지라르의 주장대로라면, 끊임 없이 인간 사회를 괴롭히는 크고 작은 폭력, 갈등, 집단의 흥망성쇠의 기원에는 인간의 욕망이 가진 '모방적 속성'이 자리잡고 있게 된다.

 

또한 욕망은 '전염성'이 강해서 주체나 매개자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욕망이 누군가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욱 그 욕망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모방 욕망이라는 속성이 어떤 한 개인, 혹은 한 집단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게 된다.

 

여기까지가 그의 초기 작품들을 이용한 이론이자 분석이다. 여기까지는 그가 문학 비평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 줬다면 (다양한 문학 작품을 분석함), 그 이후에 [폭력과 성스러움]을 쓸 때부터는 그는 문화 비평가, 문화 인류학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2부]에 계속-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