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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이기도 한 자크 라캉의 대표 저서 [에크리]를 김석 님이 분석해 둔 책이다.

1차 서적으로 라캉의 저서를 접하기엔 너무 난이도가 높아서 2차 서적으로 살펴봤다.

(철학자들의 1차 서적은 왜 이리도 읽기가 힘든걸까?)

 

심리학을 다루며 스스로를 프로이트의 온전한 계승자로 주장하는 라캉이지만, 그럼에도 철학자적인 마인드가 강하게 박혀 있다 보니, 분류를 할 때 '철학자'로서의 라캉이 더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도 자신의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해서 정신 치료도 하고 임상적인 부분을 아얘 놓진 않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정신 분석 치료는 어떠했을지 상당히 궁금해 진다. 실제로 치료 받으면 치료가 될까?)

 

 

프로이트의 딸인 안나 프로이트 등이 자아 심리학에 경도되어 있을 때, '진정한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주창했던 그는 정신분석협회에 반기를 들고 정신분석이론에 새로운 혁신을 주장한다.

 

그는 철학, 언어학, 인류학의 성과를 접목시켜 정신분석을 '말하는 주체'의 과학으로 재창조시켰다.

 

그리고 무의식의 '언어적 본성'과 '욕망'을 새로운 시각으로 설명함으로써 정신분석이 오늘날 인문학과 예술비평의 토대이론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한 성깔 하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이론을 인정 받고자 세미나에서 발표를 열심히 했으나 그 세미나의 의장이 도중에 중지를 시켜 버리며 제대로 인정을 해 주지 않자, 세미나 도중에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리기도 했다고 하는데..

 

요즘들어 라캉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이 시리즈 책들이 다 읽기가 좋고, 재미도 있다.

 

뭔가 너무 과하다 싶은 푸코나 데리다의 철학이 싫은 이들이, 참신한 이론적 토대 위에서 실천과 삶을 배제하지 않는 라캉의 이론이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일까?

 

그러나 그의 저서는 너무 어렵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저서를 '읽을 수 없는' 저서라고 평했을 정도이니 말 다하지 않았는가?

 

구조주의 선구자로 등극한 라캉.

 

상징계, 대타자, 시니피앙 등의 개념을 가지고 전통적인 주체 개념을 전복시키는 혁신을 드러냈지만 도무지 그의 1차 서적은 읽히질 않는다.

 

그 사람의 성격이 반영된 듯한 괴짜같은 문체는 어떻게 설명할 방도가 없다. (물론 잘 이해되고, 지적인 희열을 느끼는 이들도 있긴 할 것이다.)

 

기존의 정신분석적인 마인드를 넘어서 철학적인 사고로(언어 철학적인 요소 가미) 무의식을 탐구하다 보니 그의 무의식에 대한 서술은 언어적 유희를 통해 반복되고 빗나가며 고정된 의미화를 벗어나는 시니피앙의 논리 지배를 받게 되는 건 아닐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대상으로 삼아 사유하고, 그것을 설명하고 싶지만 언어에 의해 왜곡될 소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리 저리 피해가고 비틀어 가면서 쓴 책 [에크리]를 알고 싶다면 이 책으로부터 시작했으면 한다.

 

텍스트는 텍스트로 머무는 게 아니라 '나의' 욕망의 언어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에크리]가 던지는 메시지라고 하는데... (이게 뭔 x 소리야! 라는 유명한 GIF 짤이 생각난다.)

 

그는 특이한 성격, 특이한 삶, 특이한 이론을 지니고 맹위를 떨쳤는데 그러다 보니 구조주의자이면서도 구조주의자로 분류되기 애매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기존의 구조주의자들은 주체 혹은 의미적 차원보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영역인 상징적 질서가 더 본질적이라고 주장하는데, 라캉은 '주체'라는 개념을 버리지 않는다는 특이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리고 주체와 상징계의 관계에 욕망을 위치시키고, 욕망의 윤리를 강조함으로써 여타의 구조주의자들과는 다른 특이성을 보여 준다.

 

그리고 [에크리] 이후에는 상징계를 벗어나고 그것에 저항하는 실재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론적인 전환을 보이기도 한다.

 

[에크리는] 는 '상징계와 주체의 관계'를 핵심주제로 삼으면서 욕망, 충동, 결여, 반복, 죽음, 대상 등의 용어들로 이 관계를 설명한다.

 

그는 서두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철학과 언어학을 중요시함으로써 철학에 거리를 두려고 한 프로이트와 대조를 이룬다.

 

그가 철학, 인류학, 언어학 이론의 새로운 성과들을 결합시켜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을 다듬고 이를 통해 프로이트를 재해석하면서 정신분석을 새로운 학문적 위치에 올려 놓는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라캉이 여러 사상들을 적당히 조합하거나 맹목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라캉은 다양한 광물들을 녹여서 새로운 합금으로 제련하는 용광로 같은 사람이라고 저자는 표현한다.

(라캉 같은 완성형 퓨전 학자가 나오니, 라캉에 마르크스에 헤겔도 접목된 슬라보예 지젝도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그는 자신을 언제나 프로이트의 자유로운 독자로 소개했지 프로이트의 제자나 충실한 주석가로 평가하진 않았었다.

 

독자는 작품을 비판할 권리를 지닌다. 그리고 비판적 지성은 독자의 미덕이기도 한다.

 

이 책은 [에크리]에 제시된 라캉의 필수 개념들에 대한 이해도 도울 뿐더러 라캉이라는 사람을 공부하는 데도 친절한 텍스트다.

읽는 재미가 상당하고, 역사적인 배경이나 부연 설명도 재미있으니 꼼꼼하게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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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발매되었을 당시 전국 어느 서점에 가도 가장 앞에 진열되어 있던 화제작이다.  (소위 말하는 '베스트 셀러'다.)

 

이 책은 심리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볼 때 열광할 만한 요소들이 상당히 많이 담겨 있다.

 

일단 등장인물로 프로이트와 칼 융이 출현하며, 그들의 이론을 바탕으로 '살인사건' 을 '해석' 나간다.

 

(부가 지식: 칼 융은 프로이트의 제자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됩니다. 혹자들은 융이 프로이트의 '성'에 대한 집착에 염증을 느껴서 떠났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견해로는 융이 어떤 영적인 존재인 '벤야민'의 인도를 받아서 새로운 노선을 걷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정신분석', 융의 이론은 '분석 심리학'이라고 불린다.)

 

책의 분량은 상당한 편이다.

 

하지만 , 프로이트와 융이 실제로 어떤 관계였으며, 그들의 이론이 어떻게 실제 삶 속에서 적용될 수 있는지 궁금해 했던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었을 때 상당히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순 소설이 아닌 ,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라서 그런지 교육적인 측면도 많이 가미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종의 팩션같은 느낌이랄까?

 

필자처럼 이들에 대해 알아가고 있고, 알아가고 싶은 욕구가 있는 분들이라면, 굉장히 몰입해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취향만 맞는다면 미친듯한 몰입도를 보여줄

것을 확신한다)

 

소설 자체만 놓고 봐도 매우 흥미로운 스릴러 물, 추리물에 가깝기 때문에 1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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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아니라 에밀 크레펠린이라고 하는 학자도 많다.

 

정신분석학은 일시적 현상일 뿐이고, ​크레펠린의 정신병 분류 체계는 프로이트주의보다 먼저 이룩되었을 뿐 아니라 또 그 뒤까지도 이어졌다는 것이다.


​1890년 프로이트가 빈에서 개업할 무렵, 서른네 살의 내과 의사였던 크레펠린이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정신의학 교수직을 맡는다.

 

크레펠린은 재직하는 동안 여러 정신병 증상에 관심을 갖게 된다.

크레펠린은 레지던트들과 함께 병원에 오는 환자마다 한 장씩 카드를 만들어 증상과 1차 진단을 적어 넣고 각 카드를 '진단 상자'에 넣었다.

 

 

 

​새로운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진단을 수정할 때마다 환자 카드를 상장에서 꺼내 바뀐 내용을 추가했다.

 

환자가 퇴원할 때에는 기질과 최종 진단을 기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카드가 수백 장이 모이자 크레펠린은 휴가를 내고 이것들을 검토했다.

"이런 방식으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어떤 진단이 부정확한지, 왜 이런 오류를 범하게 되었는지를 볼 수 있었다." 크레펠린은 이렇게 적었다.

환자의 증상과 진단을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일이 오늘날에야 특별할 것 없어 보이겠지만 크레펠린 이전에는 ​정신병을 이렇게 철저하게 관찰하고 분류하려는 시도가 아예 없었다.

 

(사실 예외로 점성학자들의 작업이 있긴 하다. 계몽주의 시대에 점성학자들은 의학 기록을 아주 꼼꼼하게 기록했는데 천체의 정렬에 따라 증상을 도표로 만들어 그 상관관계를 밝혀서 진단과 치료에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기록 덕에 체계적 관찰보다 직관에 의존하던 의사들보다 점성학자들이 병의 진행을 오히려 더 잘 예측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점성학자가 의사보다 더 잘 맞는 약을 내어줄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체계 없이 자의적으로 진단이 내려지곤 했다.

 

 

크레펠린이 이런 자료들을 모은 까닭은 증상을 구분해 각 정신병의 특징이 되는 증상 모둠을 확인하고 병의 발전 경과를 그려보기 위해서였다.

 

(정신병이 의학적 병인지 사회심리적 '적응' 문제인지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했던) 프로이트와 달리 ​크레펠린은 정신의학은 의학의 하위 분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서장애를 홍역이나 폐결핵처럼 구분해서 확인할 수 있는 생물학적 실체라고 보았다.

​크레펠린은 카드에 모은 증상 데이터를 기반으로 삼아 1883년 정신의학 교과서를 출간했다.

 

여러 해를 거치며 여러 차례 수정한 [정신의학 개론(Compendium der Psychiatrie)]은 지금까지 나온 정신의학서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1899년 6차 개정판이 나왔을 무렵에는 정신병 분류의 기준이 되었다.

​정신분석학이 크레펠린의 생물학적 정신의학을 주변부로 몰아낸 20세기 중반에조차 크레펠린 체제와 프로이트 체제가 나란히 공존했다.

1952년 DSM 초판이 발행되었을 때에는 병들을 질병 모둠에 따라 여러 범주로 나누었다.

 

크레펠린의 19세기 정신의학 교과서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병을 설명하는 용어는 대체로 정신분석학적이었다. 그래서 ​DSM 초기 두 판에는 의학과 정신분석학 용어 체계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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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스스로 불안을 조절하기 위해 약물에 크게 의존했다.

프로이트의 초기 학술 논문 가운데 여섯 편은 코카인의 효능에 관한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1880년대부터 거의 10년동안 규칙적으로 코카인을 투여했다.

"최근에 심한 우울증이 왔을 때 다시 코카인을 썼소. 놀랍게도 적은 양으로도 기분이 최고로 좋아졌어요. ​지금은 이 마법의 물질을 칭송하는 글을 쓰려 참고 문헌을 모으는 중이오."

1884년 아내에게 보낸 편지다. 프로이트는 코카인의 의학적 특성을 연구하여 명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코카인이 커피 정도의 중독성 밖에는 없다고 생각해서 예민한 신경, 우울, 소화불량, 모르핀 중독 등 모든 병의 치료제로 자기 자신과 다른 환자들에게 처방했다.

 

프로이트는 코카인을 "마법의 약"이라고 불렀다. ​"나는 우울증이나 소화불량이 올 때 정기적으로 아주 조금씩 흡입하는데 효과가 탁월하다."

 

파리에 있는 스승 장마르탱 샤르코의 살롱 모임에 참석할 때도 사회불안을 달래기 위해 코카인의 힘을 빌렸다. 프로이트의 코카인 사랑은 자신이 코카인을 처방한 절친한 친구가 치명적인 중독 상태가 되었을 때에야 수그러들었다.

 

그렇지만 ​프로이트는 코카인 직접 경험을 통해 일부 정신질환은 뇌에 물리적 원인이 있다는 확신을 굳게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 의학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프로이트는 후기 작업 덕에 정신병은 무의식의 심리적 갈등에서 나온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는 현대 정신역학 치료법의 선구자로 생각되지만, 또 한편으로 ​초기에 코카인 관련 연구를 썼기 때문에 정신병은 물리적, 화학적 기능이상에 따른 것이므로 약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보는 생물학적 정신의학의 선구자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현대 정신약리학 역사를 훑어보면 프로이트의 코카인 실험처럼 우발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지난 60년 동안에 상업적 성공을 거둔 항불안제나 항우울제 대부분이 우연히 발견되었거나, 본디는 결핵, 수술 쇼크, 알레르기 치료약, 살충제, 페니실린 보존제, 염료, 살균제, 로켓 연료 등등 불안이나 우울과 전혀 상관없는 용도로 개발된 물질이었다.

P.S: 프로이트는 자기가 니코틴 중독이라는 것도 인정했다. ​거의 평생 동안 시가를 하루에 스무 대 이상 피웠고 결국 60대에 구강암에 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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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정의에 대해 다루는 상당히 흥미로운 책입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과학철학자들의 답변이 궁금하다면 꼭 읽어 봐야 할 좋은 개론서입니다. 칼 포퍼는 '반증주의'로 이름을 알린 학자인데 그의 이론에 입각해서 프로이트의 심리학이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 점성술을 바라본다면 이들은 '과학'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이 책에서는 특정 학자의 정의가 '과학의 참 정의이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가 소개되어 있으며 저마다의 정의가 지닌 독창성을 중립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과학을 정의하는데도 이와 같이 단일한 결론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과학의 구체적인 내용들에 있어서는 더더욱 많은 논의와 수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상당히 유익한 책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포퍼는 자신의 반증주의에 기초하여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과학이라 믿었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을 사이비라고 비판했다.

                             -칼 포퍼-

 

예를 들어 어린이를 익사시키려고 물 속에 집어던지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어린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물속에 뛰어드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두 행동에 대해서 프로이트는 첫 번째 사람의 행동은 억압 본능으로 인한 고통에 그 원인이 있다고 설명할 것이다.

반면 두 번째 사람의 행동은 억압 본능이 '승화(sublimation)'된 것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프로이트를 이은 정신분석학자 아들러도 이렇게 서로 상반된 행동을 똑같은 원리로 설명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에 따르면 첫 번째 사람은 열등감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죄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었던 반면, 두 번째 사람은 열등감 때문에 고통은 받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 아이를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하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보일 필요가 있었다.

 

즉 프로이트와 아들러 모​두 상반된 행동을 동일한 원리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포퍼는 바로 이 점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정신분석학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설명하기 때문에 어떤 개별 사례들과도 양립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이론을 반박할 수 있는 사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반박할 수 없는 이론이라면 그것은 진짜 과학이 아니다. 사이비요, 짝퉁이다. 포퍼는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한때 아들러 밑에서 방치된 아이들을 위한 사회사업을 펴기도 했지만 정신분석학을 사이비로 규정하고 그들과 결별했다.

포퍼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도 반증 불가능한 사이비 과학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가령 19세기 영국에서 노동자의 안전과 복지를 위한 정책이 도입되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지배 계급은 빈민 계층의 후생 복리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마르크스 이론과 상충되어 보였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오히려 그런 사례가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우겼다. 그런 정책의 도입이야말로 자본가들이 곧 일어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저지하거나 지연시키기 위한 당근에 불과하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지도 않은 러시아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것은 마르크스 이론의 명백한 반증 사례인데도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얼버무렸다.

포퍼는 대학 시절 사회주의 학생연맹에 가입하여 한때 마르크스주의자로 살기도 했지만, 마르크스 이론이 갖는 경직성 때문에 그 이론을 사이비 과학으로 규정할 수 밖에 없었다.

포퍼가 사이비라는 딱지를 붙인 또 한 가지는 점성술(astrology)이다.

 

 

별의 위치, 모양, 밝기 등을 통해 국가의 안위나 개인의 운명을 예견하는 점성술은, ​서양에서는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지금 우리로 치면 생시로 사주팔자를 보는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서양의 점이든 동양의 점이든 개인의 운명을 예견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포퍼는 점성술은 너무나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반박할 수 있는 사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가령 '올 한 해 운수 대통할 팔자야' 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하자. 이 점괘가 정말로 맞는지 틀린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그 점괘를 받은 사람이 1년 내내 힘겨운 삶을 살다가 연말에 다시 점성술사를 찾아가 점괘가 틀렸으니 환불해 달라고 따진다면 점성술사는 어떻게 대응할까? "올해 큰 사고를 당할 뻔했는데 그걸 막은 게 운수대통이지 뭐냐?"라고 발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변명이 가능한 이유는 점성술 체계가 반증 불가능한 진술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포퍼는 점성술이 사이비 과학의 전형이라고 비판했다.

 -[쿤&포퍼,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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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지그문트 프로이트

출판  홍신문화사

발매  1992.10.01

 

 

15년 전에 쓴 글이다 보니, 현재 입장과는 좀 다른 느낌을 풍기는 글입니다. 프로이트의 다양한 이론적 공헌과 그의 이론이 현세에 미친 큰 영향력에 대해서 좀 더 강조를 해주고 싶은데 다른 지면을 통해서 소개할 기회가 더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예전 끄적임을 그대로 남깁니다.

 

 

 

 

프로이트의 명저.

 

<정신분석 입문> 에서도 , [꿈] 에 대한 개략적인 논지가 정리되어 있지만 , 이 책은 노골적으로 [꿈] 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책이다.

 

다양한 신경증 환자를 상대했던 그는 , 풍부한 실례를 바탕으로 , 차근 차근 [꿈] 을 설명해 나간다.

 

그 이전까지는 [꿈] 은 일종의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었으며 , 과학적인 설명이 쉽지 않은 개념이었는데 , 그는 꿈을 '억압된 소망의 성취' 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공간이 바로 [꿈] 이며 ,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유아기 때 지녔던 일종의 성적 충동이 이 '소망' 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함으로써 , 자신의 [무의식] 개념과 [리비도 이론] 을 잘 융합시켜 , [꿈] 을 정복해 나간다.

 

당시 시대 상황을 조망해 보면...

 

행동주의 심리학 등이 득세를 하는 상황이었고 , 조건반사 , 자극과 강화 등의 물리적인 방법을 통해 인간을 설명하는 방법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 생리학이나 신경학 등의 루트를 통해 각종 '정신 질환' 을 다뤄 보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 그러한 시도들이 일종의 한계를 경험케 했을 것이다.(인간이 '눈에 보이는 물질' 로만 구성된 게 아니기에...)

 

하지만 , 프로이트가 [무의식] 이라는 개념을 바로 세우고 , 자신의 욕구를 채우지 못한 부분들이 때로는 '실수' 로 나타나기도 하며 , 더욱 노골적인 방식인 [꿈] 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도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 한 사람의 '컴플렉스' 를 심리학적으로 접근하여 치료하는 방법을 대중화 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해 보자면...

 

기존의 철학계는 [의식] , 인간의 [인식] 에 많은 집중을 해 왔다면(논리학에서 출발하여 , 인식에 집중하고 , 그 뒤에는 언어에 집중하는 일종의 흐름을 보여옴) ,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인식] , [의식] 하지도 못하는 영역을 자신의 몸 안에 지니고 있으며 , 그 개념을 [무의식] 으로 명명했기에 , 그들은 '철학' 의 전반적인 개념을 대폭 수정해야 할 기로에 서게 되었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다양한 사조들이 작게나마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렇다.

 

프로이트는 실로 대단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의 연구로 인해 이젠 인간의 마음과 생각의 영역까지도 충분히 검증할 수 있으며 , 체계적인 연구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미친 영향력을 설명할 때...

 

코페르니쿠스의 혁명과 , 마르크스의 혁신과 대등한 위치에 두는 것이리라...

 

일단 이 책은 <꿈 해몽서> 로 읽힐 가능성이 많다.

 

실제로 많은 예들이 나와 있어서...

 

"이러이러 한 현상을 목격하면" -> " 아마 ~~ 할 것이다"

 

라는 식의 꿈 풀이도 어느 정도 해 주고 있는게 사실이다.

 

이런 부분을 읽다 보면 , 그의 리비도 이론이 연결됨으로써...

 

'한 인간의 소망' , '한 인간의 욕구' 가 거의 대부분 '성'(Sex)로

 

귀결된다는 그의 주장이 굉장히 거북할 수도 있다.

 

(거북하다 못해 , 말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 프롬이나 마르쿠제가 프로이트의 이론에 반기를 들 만도 하다.  그의 이론이 주류라고 보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저 , 하나의 '기초'가 되어 주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변혁'들이 많이 이루어 지고 있다고 보는게......)

 

(하지만 , 그와는 반대로 '말이 되는 듯한 부분' , '그럴싸한 부분' 도 많은 게 사실이긴 하다.)

 

설령 이러한 부분에서는 공감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가 , 이러한 [무의식] 의 현상들을 과학적 설명이 가능한 체계로 만들어 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며 , 책을 읽는 게 좋을 것이다. (사실 , 이 현상은 좋다기 보다는 인간의 힘으로 모든 세상을 설명해 내려는 위험한 시도라고 보는 게 맞겠지만... 그러다 보니 , 논리적으로 정연해 보이지 않는 부분도 많이 발견될 것이다.)

 

아무튼 , 그의 발칙한? 도전은 가상하지만 , 세상은 그렇게 가벼이 설명되지 않을 것 같다.

 

더군다나 광대한 우주보다도 더욱 깊고 , 넓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다 공식화 시켜낼 수 있을 지는 정말 의문이다.

 

[무의식] 이라는 미지의 개념을 통해 , 기존에 설명할 수 없던 현상들을 어느 정도 설명해 내는 듯 보였지만....

 

더 많은 샘플이 모와지고 , 다양한 문화와 배경에 속한 이들의 실례들을 모으다 보면 , 그의 [꿈의 해석] 은 대폭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 이러한 논란은 끝이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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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프로이트의 이론적 대전환과 이드, 자아, 초자아의 2차 정신 기구 모델은 이후 그 계승을 둘러싸고 ​프로이트주의 운동사에서 크게 대립되는 두 가지 흐름을 만든다.

​하나의 경향은 이드의 절대성과 정신 기구의 분열 및 상호 작용을 강조하면서 정신의 본질을 순화되지 않는 역동성에서 찾으려고 하는 입장​이다.

​또 하나의 경향은 자아의 자율성과 방어 기능을 강조하면서 정신분석의 방향을 자아의 실질적인 강화와 현실 적응을 돕는 데 두려는 입장​이다.

전자는 프로이트가 후기 충동 이원론에서 강조한 죽음 충동의 중요성에 주목하면서 자아의 불안정성을 인정하는 입장으로,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의 영국 정신분석학파와 라캉에 의해 대표된다.

후자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하인츠 하르트만(Heinz Hartmann) 같은 2세대 분석가들이 주축이 된 '자아 심리학(ego psychology)'과 프로이트주의의 공시적 계승자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에 의해 대변된다. 언뜻 보면 두 경향의 대립은 단지 ​강조점을 자아에 두느냐, 이드에 두느냐의 사소한 차이 같지만 정신분석의 성격과 목표를 두고 확연하게 갈라진다.

라캉은 자아심리학이 프로이트가 메타심리학을 통해 강조한 무의식의 과학이라는 본래의 방향을 왜곡하면서 그것을 심리주의로 환원했다고 격렬하게 비판한다.

​라캉의 사상은 실로 자아심리학과 교조적인 프로이트 해석에 대한 투쟁을 거치면서 만들어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캉은 1950년대부터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전면적인 구호로 내걸면서 자신이야말로 프로이트의 충실한 계승자라고 말한다.

 

라캉은 자아란 이미지에 대한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만들어지는 허구적 산물이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은 ​자아의 강화가 아니라 무의식 주체를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라캉의 사상은 크게 세 가지 개념을 축으로 해서 전개된다.

1.1930~1940년대에는 상상계(imaginaire, imaginary)

2.1950~1960년대 초까지는 상징계(symbolique, symbolic)

3.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실재계(reel, real)가 라캉 사유의 중심축을 형성한다.

 

​하지만 이 구분은 단지 이론적 강조점에 차이가 있는 것이고, 실제로는 세 범주가 유기적으로 작용하면서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삶의 영역을 역동적으로 만든다.

​철학을 경계했던 프로이트와 달리, 라캉은 ​철학과 언어학을 적극 차용해 정신분석을 새롭게 개조하면서 정신분석을 인문과학의 핵심에 위치시키고자 했다.

​라캉이 보기에 정신분석이야말로 ​진리를 새로운 시각과 지평에서 사유하고 인간 욕망의 본성을 무의식 주체의 지위와 연관 지어 설명하기 때문이다.

​라캉이 최초로 관심을 기울인 상상계는 유명한 ​거울 단계(stade du miroir, mirror stage)를 중심​으로 이론화된다.

-[프로이트&라캉, 무의식에로의 초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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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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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예술은 우리의 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수 많은 예술가들은 음악,그림,

,건축 등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왔고, 자신이 지닌 신념이나 사상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그와 같은 매체를 활용해 왔다.

 

예술에 대한 관점들은 시대에 따라 변천해 왔는데 특히 헤겔(Hegel:1770~1881)이 예술을 철학(학문), 종교와 더불어 인간의 고등 정신활동의 하나로 간주한 이후로 예술의 권위는 격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한 예술의 을 논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술의 변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실존이 지니는 감춰진 의미를 발견하기도 하고, 삶의 복잡다단함이 예술을 통해 말끔하게 서술되는 듯한 경험들을 하기도 하며, 우리의 감정과 마음이 예술이라는 수단을 통해 때론 강렬하게, 때론 부드럽게 회복되는 걸 느끼기도 한다. 그 만큼 예술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심대하다.

 

하지만 너무 방대한 지식을 함께 나누기는 어렵기 때문에 미학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미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작게나마 소통해 보고 싶다.

 

우리가 어떠한 그림 작픔을 해석함에 있어서 개개인마다 해석하는 방식이 다를 터인데 그렇다고 해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그림의 해석을 맡길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해석에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다양한 견해들이 공존할 수는 있지만, 그와 같은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논리와 합리성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때론 미술은 과학과 교묘하게 손을 잡는다. 일반적인 견해처럼 미술가들은 영감이나 직관, 감정에만 의지해 작업하고, 과학자들만이 지성과 이성으로 탐구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미술과 과학은 역사적으로 상당한 동맹을 맺던 시절들이 있었다.

 

중요한 미술사의 역사를 언급하는 것도 정보를 제공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르네상스 시대 때미술은 중세 시대로부터 벗어나 창의성과 나름의 독창성을 내세우는 모더니즘의 길로 입문하게 되었고, 자연을 더욱 합리적이고 이상적으로 구현하고자 노력했기에 수학적인 사고와 지식이 근간이 되는 원근법이나 인체에 대한 생리학적 지식으로 연결되는 해부학의 발전이 미술가들을 통해 이뤄졌었다.

 

대표적인 미술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술을 과학과 동일시 했으며, 당대의 지도적인 인문학자들도 미술을 응용과학으로 정의하거나 자연철학과 수학에 포함시켰다.

 

레오나르도는 미술가로서도 천재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과학에 있어서도 시대를 앞선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지식은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해서 지동설을 예측하기도 했으며, 뉴턴의 중력의 법칙이나 하비의 혈액순환이론도 예견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회화는 화가의 마음을 자연의 심성 그 자체로 전환시켜 그를 자연과 미술 사이의 해설가로 만든다. 그것은 자연이 그 법칙에 따라 현현하는 원인을 설명한다라고 말하며 실상 미술을 과학처럼 취급했다. 이 시기는 16,17세기 즈음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와 같이 미술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인식되던 당대의 분위기는 18세기 이후에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이 즈음을 기점으로 해서 순수미술 개념이 태동하기 시작하면서 작가의 주관성이 강조되고 미학과 낭만주의 사조가 대두되어 지금의 시대에 이르렀다고 보면 될 것이다.

 

특히 현대에 와서는 좀 더 다양한 해석학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같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류를 따른다고도 볼 수 있겠고, 수 많은 이성주의, 합리주의의 논의 속에 염증을 느낀 학문의 반란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조금이라도 규정되고, 규율화 되고, 제도화 되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하는 현대 사조 속에서 하이데거의 제자이기도 했던 가다머라는 철학자는 예술작품 앞에는 무한한 해석이 펼쳐져 있기에, 단 하나의 절대적으로 옳은 해석을 내리려 하는 것은 작품의 영원한 생명을 끊어 버리는 짓이라고까지 말했다.

 

합리성과 단단한 동맹관계를 유지하며 굳건히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있던 미술은 이런 식으로 심판대에 오르기 시작한다.

 

가령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등장하면서, 무의식을 활용하여 그림을 해석하는 방식도 등장하게 되었다. 정신분석학적 해석의 전제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면에 감추어진 인간의 무의식이 그림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이론을 펴기 위해 먼저 예술가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곤 했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다빈치가 지닌 기질적 특징인 왕성한 호기심을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성욕의 변형으로 해석해 버린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다재다능함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강한 성적 욕구(동성애)가 예술적으로 승화된 형태라는 것이다. 결국 다빈치는 강한 정력의 소유자로 규정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다빈치가 여자를 많이 그렸지만 그들에게서 성적 매력을 느끼지 않았고, 여인과 정신적 혹은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다는 기록도 없으며 단지 선생인 베로키오 집에 머무는 동안 다른 젊은이들과 동성애를 누렸다는 기록만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프로이트의 해석이 묘한 설득력을 지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16~17세기로 다시 돌아가서 다빈치의 그림을 해석하라고 한다면 어느 누가 감히 이와 같은 해석을 꿈꿀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 정도의 변화는 급진적이라고 표현할 수 조차 없다. 그 이후에 전개되는 미술사의 변모는 더욱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좀 더 수려한 비유를 빌려 보자면, 과거의 미술은 세계를 창조하려 했다면, 현대의 미술은 세계를 빨아들여 블랙홀이 되고 싶어 한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1915년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라는 화가는 하얀 바탕 위에 검은 사각형 하나만 그려 넣고 이 작품을 미술 작품이라고 버젓이 내밀었다. 이와 같이 회화 속에 대상성이 사라져 버리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진리 미학은 힘을 잃게 되었고 고전 회화와 달리 현대 회화는 내용자체를 지니지 않는 방향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대상성이 사라진 추상적인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그림의 본질을 내용의 올바름에서 찾기 보다는 형식의 아름다움에서 찾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추상이 극한에 이르다 보니 칸트의 형식미학으로도 서술될 수 없는 모양의 끝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곳에는 하얀 바탕 위에 검은 사각형만 남을지도 모른다. 그림 속에서 세상을 끌어 내고, 의미를 부여 하고, 해석을 하려는 모든 시도는 해체되고 그저 모든 세상이 사라지고, 의미는 소멸되며, 해석은 부질 없는 짓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물론 19세기 즈음인 현대 미술사의 역사 속에서 과학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려 했던 인상주의와 같은 분파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문자언어로 쓰인 과학이론을 미술이라는 메타언어로 옮겨서 세계를 재현해 보려는 그들의 작업은 가상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 자체는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거부했으며, 일상의 사물과 예술작품의 경계는 모호해 져만 갔다.

 

요제프 보이스는 모든 사람이 다 예술가다.” 라는 대담한 주장까지 한 걸 보면, 이젠 미술을 바라보는 관점도 크게 바뀌어야 하는 건 아닐까?

 

미술의 역사, 그리고 미학은 철학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화가들이 자신들의 머릿속에 체계를 미리 정해 놓고 그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려는 표상주의’, ‘재현주의지니고 그림을 그려왔었던 과거와는 달리, 쟈크 데리다나 질 들뢰즈와 같은 해체주의 철학자들은 표상주의적 태도자체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표상주의는 현실의 모든 존재에 잠재해 있는 저마다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목소리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이미지를 도식(Scheme)이라고 불렀다.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라는 원의 정의가 개념이라면 그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머릿속에 떠올리는 동그란 형상의 이미지가 바로 도식이라고 볼 수 있다.

 

들뢰즈 같은 철학자들은 개념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도식을 새롭게 바꿔 주면 기존의 개념은 파괴되고 새로운 개념이 들어설 것을 기대했다. 그리고 진부하고 일정한 개념을 거부하는 그의 철학이 미학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쟈크 데리다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학자들은 칸트가 근대 미학을 대변하는 철학자라고들 말한다. 그는 다빈치의 그림처럼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는 예술 작품을 보고도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떤 편견이나 사념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었다. 칸트에겐 나름의 기준이 있었고, 절대성이 있었다.

 

 

      -쟈크 데리다-

 

 

또한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그 작품 자체를 에르곤(ergon)이라 부르고, 그 작품을 둘러 싸는 장식들이나 액자 등을 파레르곤(parergon)이라 부름으로써 이 두 가지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바로 칸트를 포함한 전통적인 사상가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데리다는 미술작품의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을 반대한다.

 

 

데리다는 결국 파레르곤이 에르곤에 포함됨을 나름의 방식으로 증명해 낸다. 이와 같은 철학적 논의는 결국 미술 작품 그 자체를 구성하는 어떠한 고정된 의미도 쉽게 해체시켜 버린다. 이와 같은 해석학적 기법 또한 미학 속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일찍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에서 이런 구절로 끝을 맺었었다.

말할 수 없는 것, 그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이렇게 언어가 침묵하는 곳에서 예술은 시작되며, 언어가 세계에 대해 말을 한다면, 그림은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세계를 보여준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모든 이해는 결국 언어적 이해라고 볼 때, 우리는 언어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림을 감상하며 미적인 경험을 강렬하게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언어로 돌아온다.

 

하지만 해체주의 앞에선 모든 텍스트 또한 그림 작품이 해체되듯이 해체될 것이 자명하다.

 

이와 같은 해체주의 철학미학에 미친 영향을 염두에 두면서 다시 현대 미술의 포스트 모더니즘적 분위기로 돌아가 보자.

 

앞에서도 서술했던 것처럼 현대 미술 그 자체는 너무도 추상화 되어 버리고, 주관성이 강화된 나머지 비평가의 근사한 해석의 도움을 받든지, 아니면 예술가 스스로 이론가가 되어 자기 작품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해 줘야지만 이전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드넓은 바탕 화면에 점을 하나 찍어 두고, 이게 바로 놀라운 미술 작품이라고 주장한다면 어찌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

 

결국 현대 미술에선 단 하나의 진리가 강요되기 어렵다. 미술 작품을 보는 란 존재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 미술 작품완성되는 것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고정되고 고착되는 것을 거부하는 미학의 길’. 더 나아가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는 것 조차도 언어의 빚을 지고 엉거주춤 움직여야 한다면 그 해석마저도 해체시켜 버릴 수 있는 시대.

 

그게 바로 작금의 미학이 걷고 있는 이 아닐까 싶다.

 

미술이 걸어가고 있는 은 과연 이전보다 더 발전된 것일까? 아니면, 더욱 퇴보하게 된 것일까?

 

모든 것이 해체되고, 모든 진리가 상대화되고 나면 우리는 진정한 미학의 아름다움에 심취할 수 있게 될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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