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형 보수'에 해당하는 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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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주의 국가론은 낡은 이론이지만 앞으로도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민주주의 선진국에서 주권재민 사상에 입각한 선거제도와 권력분산 시스템이 정착되기 전까지 국가주의 국가론은 오랜 세월 민중과 권력자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20세기에도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제국주의 일본,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스페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루마니아,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이러한 국가론을 체현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체제도 그 '약한 변종'으로 볼 수 있다.

냉전시대 미국 사회를 휩쓸었던 '매카시즘' 광풍의 이면에도 이 이론이 작용하고 있었다.

 

              <메카시즘>

 

21세기 문명국가의 시민들은 국가주의 국가론을 위험한 '전체주의 국가론'으로 간주한다.

나치 정권이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는 등 참혹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독일에서는, 정당이 이런 국가론을 내세울 경우 연방헌법재판소의 해산명령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은 다르다.

4.19혁명 직후 1년과 외환위기 이후 10년을 제외하고, 정부 수립 이후 50년 넘게 국가권력을 장악했던 정치세력은 국가주의 국가론을 신봉한다.

그들이 마키아벨리 방식의 철권통치를 철두철미하게 실행하지 않은 것은 단지 '통치권자의 힘'이 '국민 전체를 합친 힘'보다 우세하다고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충분한 자신감만 있으면 그들은 언제든지 시민을 국가에 종속시키려는 국가주의적 행태를 재현해낼 것이다.

1987년 이후 주요 선거결과와 정치사회적 쟁점에 대한 국민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대한민국 국민 셋 가운데 한 사람 정도는 국가주의 국가론을 확고하게 지지한다.

 

그래서 소위 보수를 자처하는 정치세력은 아무리 상식에 어긋나는 짓을 해도 잘 무너지지 않으며, 외환위기를 일으키거나 차떼기 선거부정을 저지르거나 대통령과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이 들통나 무너지는 경우에도 그리 어렵지 않게 세력을 재건한다.

치안과 국방을 유일한 국가목표로, 또는 적어도 다른 모든 가치나 목표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국가목표로 여기는 유권자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유권자들은 자유, 인권, 노동권, 평등권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지만 국방과 치안을 위해서는 일정 수준으로 시민의 기본권을 제약할 수 있다거나 심지어는 반드시 제약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당시 간첩단, 반국가단체, '북괴 찬양' 등의 혐의로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사형을 당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법원에서 재심 무죄판결을 받는 것을 보면서도, 그리고 국가보안법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국가보안법은 국가안보를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견해를 굳건히 유지한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사회절수유지와 국가안전보장이다.

다른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해도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는 않다. 가난한 아이들과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 장애인과 중증질환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복지지출을 확대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나쁠 것은 없지만 국가가 꼭 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이 직접 그 혜택을 보는 경우에도 이런 정책을 펴는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다.

진보를 표방하거나 개인의 자유를 국가의 권위보다 앞세우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국가관을 의심한다.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부동산 투기를 하고, 술에 취해 사람을 때리고, 여성을 추행하고, 권한을 남용하고, 탈세를 한 사실이 확인된 경우에도 그 사람이 국가안보를 중시하는 보수당에 속해 있을 경우에는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되는 데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잘못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런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으며, 국가운영은 국가관이 확실한 사람이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다.

​국가주의 국가론을 신봉하는 이들은 사형제를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찬성한다. 국가는 그 정도 힘을 가져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철거민들의 거리시위는 물대포를 쏘고 헬기를 동원해서라도 강력 진압해야 한다.

해고 노동자와 철거민들의 처지는 이해가 되지만 질서파괴를 방관하는 것은 국가답지 못하다.


'용산참사'에 대해서도 사람이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믿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사회의 질서와 기강을 바로 세워야 제대로 된 국가라고 본다.


어린이와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깎아야 하며 잘못이 있으면 회초리로 맞아야 한다. 학교에도 기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 체제와 권력자들을 비난하지 않는 정치인은 사상을 의심받는다.


국가안보를 도와주는 미국과 미군을 비판하는 정치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선거를 할 때 후보와 정당의 개별적인 정책을 꼼꼼히 따져보지 않는다. 정책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국가관'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성향의 정치세력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개성의 발현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까지도 '빨간 물'이 든 사람으로 간주하는 때가 많다.

이 모든 생각들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국가주의 국가론이다.


이를 따르는 사람과 정치세력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이념형 보수'가 적당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국가주의 국가론은 강력한 경쟁력을 지닌 이론이다.

논리적으로 단순명료해서 긴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가장 강력한 감정인 두려움을 정서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내부 혼란과 침략의 위험이 상존하는 '국민국가'의 시대, 이데올로기적/군사적 대결을 동반한 한반도 분단체제가 계속되는 한 대한민국에서 홉스의 국가론은 앞으로도 위력을 떨칠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부는 이런 국가론을 추종하면서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했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는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현저하게 약화되었지만, 이명박 정부에서 부활의 기지개를 켰으며 박근혜 정부에서 다시 한번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국가권력 사유화와 헌법파괴, 부정부패, 직무유기에 가까운 태만의 실상이 분명하게 드러난 시점까지 박근혜 정부는 국가주의 국가론을 따르는 일부 국민들의 견고한 지지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고 국민들이 집권 보수정당에 등을 돌렸기 때문에 유사한 사태가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단언하기는 어렵다.


​자유주의 국가론이나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이념형 보수'를 무식하다고 경멸하거나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것으로 기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현실과 희망사항을 잘 구별하지 못한 소치일 가능성이 높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생명력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끈질기다.

 

-[국가란 무엇인가]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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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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