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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만약 엄마들이 남편에게 아버지 고유의 역할을 찾아주기보다 '당신 왜 애들 공부 안 봐줬어? 옆에 붙어서 공부 좀 가르쳐' 라고 일방적으로 지시한다면?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만족스런 역할을 해줄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질 것이다.

그런데도 ​아빠가 아이 공부를 봐주면서 '세상의 꿈이란 말이다~' 하고 있으면 아내들은 '당장 성적 떨어지는데 무슨 꿈타령이야?' 하면서 잔소리를 한다.

​서로가 잘 자극할 수 있는 동기를 갉아먹는 행위다.

​이와 관련해 조선미 교수의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빠가 엄마 없이 아이를 키우는 상황이 아니라면 양육에 참여할 때 엄마라는 중간 존재를 거치지 않을 수는 없어요. ​엄마가 '여보, 이렇게 해줘, 그건 아냐.', 이런 말들을 종종 하죠. 그런데 중간에 있는 엄마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아빠가 역할을 잘할 수도 있고 잘 못할 수도 있고, 아이들에게 모델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요.

 

 

엄마들은 아이를 직접 품고 낳았고 모성도 있기 때문에 아이에 대해 굉장히 예민하고 뭘 원하는지 바로 알지만 아빠들은 훨씬 둔감해요. 그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양육을 하기 위해서는 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아빠의 자리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아빠는 결코 엄마처럼 못 놀아주거든요.

 

아빠들은 조금 거칠고 일방적일 수 있죠.

엄마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참 함부로 다룬다는 생각이 들죠.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엄마가 계속 ​섬세하게 돌본 아이들이 어떻게 크는지 봤어요. 세상에 대한 내구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금방 나에 대해 다 알아차려줬거든요. 그런데 세상에 나가면 친구가 나를 알아차려주지 않고 선생님이 나를 알아주지도 않아요.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오히려 조금 거칠고 투박한 아빠의 방식은 아이가 나중에 컸을 때 세상에 적응하는 데 교육이 됩니다.

 

 

그래서 부모가 서로 다른 역할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엄마가 아빠 자리를 만들어주는 게 매우 중요해요.

아버지의 양육은 자녀가 어른이 되어 세상을 마주할 때 겪게 될 것을 가르쳐준다. 연구에 따르면, ​자녀는 엄마에게 일상적 보살핌과 감정적 지원을 기대하는 반면, 아버지에게는 사실적 정보를 원한다고 한다.

​아버지가 전해준 정보들은 훗날 어른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지식이 된다.

이와 관련해 영국 BBC의 다큐 프로그램 <Biology of Dads>에서 실시한 실험을 보자.

엄마와 아빠가 자녀와 껄끄러운 대화를 할 때 어떻게 하는지 관찰하는 실험이다.

 

먼저 엄마와 딸의 대화. 엄마와 아이의 대화에서는 관계, 감정, 배려 등에 대한 표현이 나온다.

예컨대 집에 와서 컴퓨터게임만 하는 딸에게 엄마는 "네 행동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라고 말한다.

법칙이나 규칙을 위반한다는 게 아니라 '엄마'가 싫어하는 뭔가를 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엄마의 대화 특성은 한 가지 더 있다. ​아이와 대립하는 와중에도 아이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 하고, 때때로 미소를 짓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감정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에는 화려한 옷을 입고 외출하려는 딸을 막아선 아빠다.

 

"제가 이 옷을 입었다고 왜 뭐라 그러세요?"

"몸이 너무 많이 드러나는 옷이야."

아빠가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은 '맞서기'다.

아빠는 아이를 이해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애써 동의하려 하지 않은 채 곧바로 문제를 제기한다.

"이렇게 입는 게 뭐가 문제예요?"

"파티에 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럼 파티에 갈 때는 그렇게 입어도 된다는 거예요?"

"어떤 파티에 가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이처럼 아빠는 ​이성적으로 논박​한다. 이 부녀는 어떤 자리에 어떤 옷차림이 맞는지에 대한, 즉 규칙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대화다.

딸을 이해하거나 엄마의 심정을 내세우는 감성적인 대화와는 전혀 다르다.

정해진 규칙이 있으니 아이더러 따르라고 통고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대화는 세상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다. 세금을 내기 싫어도 내야 하고, 빨간불에서는 멈춰야 하는 것이 세상의 규칙이다.

본인이 좋거나 싫은 것과 규칙을 지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아버지는 대화를 통해 분명히 인식시키고 있다.


-[파더 쇼크] 에서 -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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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다른 아빠만의 역할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아빠가 타고난 본성으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역할은 무엇일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아주대학교 연구진과 함께 실험을 해봤다.

엄마와 아빠가 아이의 접근동기와 회피동기를 자극하는 데 특징이 있는지 알아보는 실험이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심리학자 토리 히긴스(Tori Higgins)는 인간의 동기를 '접근'과 '회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접근동기는 무언가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을 말하는 반면, 회피동기는 무언가 좋지 않은 것으로부터 벗어나거나 회피하기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다.

즉 접근동기란 뭔가를 적극적으로 해보겠다는 동기이고, 회피동기는 안정적인 지금 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불안요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살면서 겪게 될 위험도 제거해야 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도 가져야 하므로.

그렇다면 남성은 ​접근동기가 강하고 여성은 회피동기가 강할까? 이런 성향이 아이를 키우는 데도 영향을 미칠까?

​제작진은 아버지와 아이, 어머니와 아이 짝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첫 번째는 해야 할 일 또는 하고 싶은 일 목록을 적고 아이의 미래 모습을 그리는 실험으로 진행되었다.

두 번째는 컴퓨터 실험으로, 모니터에 보이는 두 사선의 각도가 같으면 1번 키를 누르는 실험이다.

이 실험은 ​두 번에 걸쳐 하는데, 한 번은 맞힐 때마다 점수가 올라가는 접근동기 조건 하에서, 다음 번은 틀릴 때마다 점수가 깎이는 회피동기 조건 하에서 진행되었다.

​그 결과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치가 나왔다.

 

아버지와 함께 온 아이들은 접근동기 조건의 컴퓨터 실험에서 좀 더 정확하게 과제를 수행하는 경향을 보였다.

아버지와 함께 온 아이들은 평균 59.5의 정확도를 보였는데, 접근동기 조건에서는 61.7의 높은 정확성을 보였다.

 

 

 

반면 어머니와 함께 온 아이들은 같은 조건에서 53.5의 정확성을 보였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아이에게 '못하면 안 돼'라는 회피동기보다는 '잘하고 싶다'는 접근동기를 북돋아주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대로 회피동기 조건에서는 어머니와 함께 온 아이들의 정확도가 더 높았다.


​이러한 경향성은 첫 번째 설문조사 실험에서도 나타났다. 아버지와 함께 온 민기는 아버지와 활발히 이야기를 나누며 여행, 캠핑, 놀이동산, 축구 등 '하고 싶은 일' 위주로 적었다.

동진이도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는 운동, 기타 연주, 프라모델 수집 등 '하고 싶은 일' 중심으로 적었다.

딸과 함께 온 재은 아버지는 "재은이 하고 싶은 것 많지? 또 뭘 하고 싶어?" 라고 물으며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도록 유도했다.

반면 석재와 석재 어머니는 '취직하기, 부모님 말씀 잘 듣기' 처럼 '해야 할 일'에 치중해서 적어 전형적인 회피동기적 모습을 보였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줄 수 있는 동기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남성은 접근동기가 강하고 여성은 회피동기가 강하다는 식의 일반화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엄마들은 주로 아이와 밀착해서 생활하기 때문에 아이의 안전을 위해 회피동기를 자극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아버지들은 상대적으로 아이와 떨어져 있으니 접근동기를 자극하기에 적합하다.

-[파더 쇼크]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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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교회 전통을 제대로 보는 데는 시간 거리가 필요합니다. '시간 거리(Zeitabstand)' 는 철학자 가다머(Hans-Georg Gadamer)에 따르면 무엇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더 잘 알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예수의 가르침과 능력을 보고서는 어디서 왔는가 물음을 던졌지만 곧장 누구의 형제, 누구의 오빠가 아닌가 하면서 자기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가다머-

 

 

예수가 누군지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에야 사람들이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200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예수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담은 현실, 교회 현실은 정말 상상력으로 거리 두기를 하지 않으면 제대로 보기 힘들 거예요.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비판적 관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지식인에게 소명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동시대와 시대적 거리 두기가 아닌가 해요. 그렇지 않고서는 볼 수 없어요.

동시대와의 거리 두기가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얘기해 보지요.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근대를 다시 보게 되었어요.

그 이전에는 극히 소수만이 근대의 문제를 깨달았어요.

데카르트나 칸트를 보면 근대를 형성한 사람이면서도 근대의 문제를 동시에 본 철학자들이 아닌가 해요.

독특한 경우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큰 철학자라고 할 수 있지요. 근대를 형성하면서 그 한계를 벗어날 다른 면을 드러내지요. 그렇게 본다는 것이 쉽지 않아요.

​양희송: 현실의 교회 구조에서 일차적으로 거리두기는 누구의 역할일까요?

강영안: 신학자들이지요. 목회자는 현장에 워낙 깊숙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동시대와 거리 두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요. 떨어져 있으면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못하는 거지요. 목회자들의 마음을 다해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면 상상력의 눈이 열리고 현실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는 눈이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와 달리 신학자는 교회의 구체적 상황에서 한 걸음 물러선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신학자들이 전체를 더 잘 볼 수 있어요. 그러나 현실 교회에서 받는 이익에 너무 익숙해져 버리면 그런 눈을 잃어 버려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게 현실이 아닌가 해요.

양희송: 우리 현실에서 그 과제가 만족스럽게 수행되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원인이랄까, 그 이유를 지적할 수 있을까요?

강영안: 글쎄요, 그것이 뭘까요? 신학자의 경우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신학자들이 대부분 교단 신학자라는 점이에요. 교단의 목사를 양성하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쏟고 있고 그로 인해 금전적인 이득이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교회 정치로 부터 희생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한 발을 빼고 볼 여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요.

두 번째는 신학자라는 본질적인 위치와 관계가 있습니다.

 

칸트가 지적하는 점인데 신학자들은 철학자들, 인문학자들과 달리 한 '기관'에 관련된 사람들이거든요. 그 기관이 교회인데, 일반 교인들과 교인들을 가르치는 목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요.

 

칸트는 지적했지요. 대중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고 목회자들은 가능한 한 그런 이익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일하기에 자신들이 원하는 수단이나 충고를 신학자들에게 기대한다고 말이죠. 신학자들의 연구나 발언도 교회 현실이나 사회문화적 현실과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관조하고 발언하기 보다는,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죠. 이것이 칸트의 진단이에요.

양희송: 신학자들은 매우 불행한 위치에 놓여 있군요? (웃음)

강영안: 신학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칸트가 지적한 또 다른 두 직업, 의대 교수와 법대 교수도 동일한 범주에 들어갑니다. 의과 대학 교수들은 의사들을 양성하는데, 의사들은 환자들과 연관되어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법대 교수들은 변호사나 판사를 키워 내고, 변호사나 판사는 고객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단 말이죠.

중세 대학의 세 중심 대학, 중심 학부(faculty)인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는 각각 영혼의 질병, 사회 질병, 신체적 질병, 이렇게 모두 질병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니 대중의 이익과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밖에 없어요.

칸트는 이제 그런 비판적 역할을 좁게는 철학자들이, 넓게는 인문학자들이 감당해야 한다고 봐요.

칸트가 말년에 저술한 <학부간의 논쟁> 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

 

 

양희송: 상당히 재미있는데요.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법학이나 의학은 여전히 전문가 집단으로서 사회의 공적 역할 수행자로 여겨지는데, 신학은 종교 분과 혹은 특정 종교의 성직자 양성기관으로 축소되면서 그만큼 공적 영역에서 사라지고 있잖아요.

강영안: 배제되었죠. 그건 계몽주의 문화의 소산이에요. 사실 계몽주의 이전까지만 해도, 아니, 계몽주의가 한참 유행할 때만 해도 유럽에서는 공적 역할을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했거든요.

 

​정치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높았고 먹혀 들어갔습니다.

​칸트가 활동한 18세기 말만 해도 프로이센 제국에서 경건주의파 출신 목사들의 목소리가 엄청 컸어요.

 

빌헬름 2세 치하에 종교 검열이 생기고 종교 문제에 심한 억압이 있었지요. 지금은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역할이 공적 영역에서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나 언론인의 의견이 더 중요해졌지요. 영적 문제, 정신적인 문제는 대부분 심리적인 문제로 환원되고 정신의학자나 정신분석가, 심리상담가가 신학자나 목회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지요. 서양의 상황에서 보면 이런 것들은 기독교의 세속화가 초래한 현상입니다.

양희송: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비판과 방향 제시 기능을 하려면, 교단 신학자들이 공공의 영역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할까요, 아니면 주로 종교적 영역에 관심사를 국한시키고, 기독 철학자나 기독 인문학자들이 공적 영역에 기독교 담론을 제공하는 구조로 힘을 기울여야 할까요?

강영안: 둘 다 가능하리라고 생각해요.

 

현실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기독 인문학자들과 기독 사회과학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 좀 더 확대한다면 기독 학자들이 교회와 사회와 문화 전반에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기독교 전통과 세속 문화 전통을 모두 고려한 뒤 나오는 온당한 목소리여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연세대나 이화여대 같은 대학 신학부가 있거든요.

그 경우 왜 교회에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가? 이 경우에는 교회와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이 또 문제입니다.

교단 신학의 경우, 교회와 너무 밀착해서 동시대와 거리 두기가 불가능하고, 교단 신학과 관계없는 일반 대학의 신학자들의 경우, 교회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설득력을 발휘할 공통의 바탕(common basis)를 잃어버리지 않았나 해요.

​.........

동시대와 거리를 두려면 교회에 문제가 있더라도 교회에 몸을 담아야 해요.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고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분명히 있으면서, 동시에 거리 두기를 해야 현실 교회를 제대로 볼 수 있고 말씀에 합당한 교회를 위해 몸부림 칠 수 있죠. 그렇지 않다면 빈들의 소리에 그치겠지요.

신학자나 기독 학자들은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고 믿어요.

 

삶 전반에 대한 신학적 검토나 철학적 논의를 시도한 예를 지난 세기에서 찾자면 두 전통이 있어요. 하나는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카이퍼 전통(Kyuper tradition)이에요. 아브라함 카이퍼와 네델란드 중심으로 한 이 전통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삶의 모든 분야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논했어요.

          -아브라함 카이퍼-

 

​카이퍼 이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를 중심으로 도이어베이르와 폴른호븐과 그 후예들이 이 작업을 했어요. 경제학 분야에서는 봅 하웃즈바르트, 기술 철학 분야에서는 반 리슨과 스후르만, 에술 분야에서는 한스 로크마크르 등을 들 수 있을 거예요.

다른 하나는 영국에서 등장한 '급진정통주의'(Radical Orthodoxy)를 들 수 있겠지요.

그레이엄 워드(Graham Ward)나 존 밀뱅크(John Milbank)등이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이들이 내건 기치는 주목할 만합니다.

카이퍼나 도이어베이르트 전통은 사실 철학을 중심으로 경제학, 미술, 기술철학 등 삶의 모든 문제를 기독교적으로 성찰하자는 것이고 신학이 토대가 아니에요.

오히려 철학이 토대에 있죠. 그런데 급진정통주의는 신학 자체가 모든 영역을 성찰해야 한다고 봐요. 그러니까 성경 연구나 기독교 전통 연구에 머물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영성 등 전통적으로 신학적 성찰에서 제외된 영역 전체를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이 점에서 카이퍼 저너통과 급진정통주의는  비슷한 데가 있어요.

...

- [묻고 답하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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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지금 말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죠. 한기총이나 NCC가 한국 교회를 대변하는 기관으로 지목되고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은 1980년 이후 상황이지요. 교계연합기구의 등장 이전에는 각 교단이나, 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가 그 역할을 상징적으로 했지요.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이나, 고신이나 합동 측에서도 그런 분들이 계셨지요. 그분들이 돌아가신 뒤에는 한기총이나 NCC가 마치 한국 교회를 대변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어요.

이같이 한국 교회를 대변하는 것은 그야말로 목사들의 모임이지요. 장로들도 별로 관여하지 않고 더욱이 일반 성도들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양희송: 그리고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 연합기구들은 그 구조상 아래로부터 위임의 절차가 일관되게 연결되지 못하고 중간 중간 연결고리가 다 끊어져 있기 때문에 상징적 수준을 넘어서는 실질적 대표성을 말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강영안: 가톨릭의 경우에는 위에서 위임을 하지요. 교황에서 추기경으로, 추기경에서 대주교로, 대주교에서 주교로, 주교에서 각 본당 신부로 내려옵니다. 일종의 위임이고 명령이며 권면 방식으로 내려옵니다.

 

그러나 사실 개신교는 그런 구조 자체도 없잖아요. 위아래 소통할 수 있는 통로 자체가 없으니, 정부에서도 편의상 한기총이나 NCC를 통로로 삼아 업무를 진행하는 것이 쉬웠지요.

목사들도 나름의 통로로 교단의 목소리를 내봐야 들리지 않으니까 연합의 이름으로 교회의 의견을 발표하고 정치적 입장을 취해 온 것이 사실이지요.

얼마 전에 방송국에서 기독교에 비판적인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어요. 한기총을 중심으로 거세게 항의했더니, 방송국에서 그 프로그램 마지막에 한기총 대표의 의견을 이야기하도록 했다고 해요. 그런데 나오지 않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의견을 들었어요. 전혀 설득력 없는 이야기였다지요.

그런 상황을 보면서 "목사님들이 다 선수가 됐구나" 라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목사님들이 모두 선수가 되어 공도 차고, 운동장을 누빈다는 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적 목소리를 내는 주요 역할을 목사님들이 맡으려 해요.

마치 현장에서 뛰는 선수처럼, 대단한 착각입니다.

 

목사님들은 선수가 아니라 성도들을 키워 내고 양육하는 코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축구로 말하자면 벤치에 앉아서 코치 일을 보아야 해요. 선수로 뛰는 것은 성도들이에요. 경제나 정치나 문화 영역은 그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춘 성도들이 해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개혁주의 관점에서 목사들의 영역을 중심에 그렸죠.

그러니까 정치, 경제, 사회, 언론, 문화 영역 등 각 분야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 공동체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 성도 그룹이 해당 분야에 의견을 내고, 필요할 경우 법 개정을 요구하거나 시민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목사들은 성도들을 선수로 키워서 전문 분야로 내보내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교회의 개념이 너무 넓기는 한데, 그때 교회는 목사만 말하는 건 아니거든요.

- [묻고 답하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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