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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본 것처럼 지젝은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놀란다.

그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관찰의 향락에 빠질 수 있게, 일반적인 경우라면 반드시 느꼈을 죄의식 없이 향락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마치 '물론 나는 화장실이나 사도마조히즘, 그리고 발기에 관한 이 모든 이야기가 지극히 외설적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모든 삶의 측면들을 이론화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지젝은 죄의식 속에서 향락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의 자기 책망을 덜어주어, 좀 더 즐겁게 그의 책을 읽을 수 있게 만든다.


그래서 앞의 '거의' 라는 단어는 지젝이 '물신주의적 부인'(fetishistic disavowal)'이라고 부른 것으로 기능한다.


지젝은 자신이 말한 것이 '너무 노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부정어법(apophasis)이라 불리는 부인의 논리와 유사한 수사적 장치가 있다. 부정어법은 '어떤 것을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바로 그것을 말하는 장치'다.


가령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는 목사님의 부정을 언급하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진술이 이에 속한다.


그래서 부정어법은 담화 내부의 구멍을 드러낸다.


어떤 것을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바로 그것의 윤곽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처럼 부정어법은 내가 한 말의 한계, 혹은 지평을 드러낸다.


이를 지젝에게 대입시켜보면, 일상생활의 천박한 측면과 대중문화를 이론화 하는 가운데 지젝은 전통 철학의 한계를 드러낸다.


전통 철학이 언급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말한 것, 자위행위나 멜 깁슨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지젝이 다루는 대상은 철학 담론 내의 구멍, 곧 보통 적합한 이론적 제재를 구성하기 위해 이론의 영역에서 배제해온 것들이다.


이런 구멍을 다루는 행위가 일탈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가 철저하게 보수적인 관점, 즉 전통적인 철학의 관점을 견지하며 그것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만야갸 지젝이 엄격한 철학적 관점도 없이 문화적 파편들을 분석한다면, 달리 말해 그의 이론이 그가 다루는 제재만큼이나 '저급'하다면, 그의 전체 기획은 따분해지고 우리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지젝의 저작이 지닌 첫 번째 매력은 정확히 이와 같은 영역의 혼합, 즉 철학에서 언급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는 것에서 비롯한다.


이는 19세기 중엽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Charles-Piere Baudelaire)(1821~1867)가 사용한 공감각과 유사하다.


공감각은 '나는 푸름을 듣는다.' , '나는 큰 소리로 사물들을 본다' 처럼, 하나의 감각을 다른 감각과 이미지를 연합하여 묘사하는 것이다.


공감각은 낭만주의 시인들의 개별 감각 묘사가 무미건조해지고 세속적이 됐을 때 비로소 수립되었다.


고상한 철학과 저급한 대중문화를 혼합하는 지젝의 작업은 일종의 공감각, 즉 서로 다른 유형의 담론들을 혼합하여 그것들 각각의 특성을 더 뚜렷이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말해지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 철학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 는 관점이 정확히 독자의 관점, 철학의 대상을 미리 설정해온 우리 자신의 관점이라는 점을 놓치지 말하야 한다.


철학 자체는 자기 대상에 무관심하다.


차갑고 냉철한 지젝, 즉 '거의'라는 단어가 필요없는 이의 관점은 이 무심한 관점이다.


그래서 철학의 부정어법, 혹은 철학에 대한 '공식적' 담론에 뚫린 구멍은 철학 자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구성한 것이다.


끊임없이 대중문화를 참조하여 철학을 더럽힘으로써, 아무것도 회피하지 않는 열정을 철학에 다시 불어넣음으로써, 지젝은 독자들의 공식적 편견에서 철학을 구해낸다.


이런 의미에서 지젝의 이론적 전복성은 정통 이론보다 훨씬 더 정통적인 성격에서 나온다.


그는 철학을 무겁고 진지하게 대했다.


문화에 대한 가볍고 유희적인 논의는 그것을 증명하는 징후이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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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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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철학자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퓨전된 문화인 같은 느낌이 좋다.

 

그의 주장들은 비판적으로 고찰해 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며,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자신의 철학체계를 만들어 나가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 깊다.


자크 라캉을 공부하다 보니, 지젝이 라캉의 정신분석을 적절히 활용해서 또 다른 사유를 전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요즘 득세하고 있는 해체주의, 구조주의 철학자들의 책보다 일단 재미가 있고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도 좀 더 통통 튀는 매력이 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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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1949~)은 철학자이다. 하지만 지극히 유희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글을 쓴다는 점에서 여느 철학자와 다르다.


지젝은 철학을 끊임없이 오락거리로 만든다.

 

비판적 사유 특유의 고답성을 유쾌하게 무시하는 그의 접근방식은 열정적이고 전복적이다.


정치적 무관심에 빠진 현대인들의 생활을 꾸짖는가 하면, 다음 순간 이웃집 닭에게 잡아먹힐 걱정을 하는 남자에 관한 농담을 하고, 영화 <스피드> 속 키아누 리브스의 윤리적 영웅주의를 역설하는가 하면, 비아그라의 철학적 토대와 마르크스주의에서 기독교가 갖는 역설적 가치를 폭로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젝은 정신분석학과 철학의 목덜미를 붙잡아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면시킨다.


영국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지젝을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럽에 출현한 사람 중 가장 놀라운 명민함으로 정신분석학, 혹은 문화이론을 해설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지젝의 이 '놀라운 명민함'은 그의 놀람에서 비롯된다.


정말이지 그는 끊임 없이 놀라서 묻는다.


 

왜 모든 것이 이와 같은가?


물론 지젝의 놀람은 일종의 전략이다.


그의 주장대로 비판적 사고의 토대는 의혹과 경계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이것은 그와 같다' , ;법은 법이다' 등)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 순간, 우리가 현실로 대면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는 순간, "철학은 시작된다."


부모에게 하늘이 왜 파란지 묻는 어린아이의 엉큼함으로 지젝은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그것을 하는지에 관한 통상적인 지식 전체를 의문에 부친다.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

 


 

지젝의 매력 중 하나는 그 자신의 표현대로 "영화나 대중문화의 사례들과 때로는 고상한 취향의 한계를 위험하게 넘어서는 농담이나 정치 일화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방법으로 대중문화와 일상생활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은 죽음이나 고매한 시적 극단을 메마르고 잔잔한 어조로 설명하는 일부 철학고 달리 매우 풍부한 호소력이 있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그가 '고상한 취향의 한계'와 협상하여 그것을 자기 저작의 일상생활과 통합시키는 방법이다.


지젝 스스로 지적하듯이, 타란티노나 화장실에 관한 논의에서 발생하는 미세하게 역겨운 향락은, 실제로는 "소위 인간적 고려라고 하는 병리학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기계적' 사유의 전개"를 은폐한다.


가령 지젝이 영화 <에얼리언>의 지하 동굴에 대해 "이 동굴이 불러 일으키는자궁-질의 이미지는 거의 노골적이다" 라고 말할 때, '거의'라는 단어는 확실히 그의 저작을 관통하는 차갑고 냉철한 이론가의 면모와 그가 겨냥하는 독자 사이의 분열을 시사한다.

 


자궁-질의 암시가 '거의 노골적'이라면 정확히 누구에게 그렇다는 것인가?


답은 물론 우리, 지젝의 독자들이다.


이런 진술로 지젝은 우리를 소외시킨다.


다시 말해서 이런 자궁의 환기는 너무나 음란해서 거의 외설에 가깝지만, 동시에 지젝이라는 '이론가' - 그것이 독자의 감각에 미칠 충격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문화적 파편들을 자신의 이론적 제분기에 집어넣는 이론가-에게는 전혀 외설스럽지 않다.


따라서 '거의' 란 단어는 지젝의 작업 속에 감춰진 분열, 일종의 '떨림점'을 지시한다.


독자의 감각을 알고, 마찬가지로 그 감각을 지니고 있는 지젝은, 오직 이론적 요점과 엄밀성만을 따지는 지젝에게 공명하여 떨린다.


요컨대, 지젝의 문체가 지닌 트릭은 이러하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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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저서를 읽다가 intro-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인물 정보라도 간략히 알고 접근하시라는 취지에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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