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만과 르메트르가 개발한 우주론의 출발점은 1915년 11월 25일에 아인슈타인이 독일의 물리학 학술지 <물리학 연감(Annalen der Physik)>에 제출한 한 편의 논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거의 10년에 걸친 수학적 여행 끝에 그의 일생을 통틀어 최고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일반상대성이론(Theory of General Relativity)을 완성했다.
그는 이 아름답고 완벽한 이론을 통해 아이작 뉴턴(Issac Newton)의 고전 중력이론을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시켰다.
일반상대성 이론의 기초와 우주론과의 상호관계를 어느 정도 아는 독자들은 앞으로 이어지는 세 개의 절을 건너뛰어도 상관 없다. 그러나 간단한 복습을 원한다면 계속 읽어보기 바란다.
아인슈타인은 1907년부터 일반 상대성이론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아이작 뉴턴의 이론이 중력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지금도 전 세계의 고등학생들은 뉴턴이 1600년대에 발견한 중력, 즉 만유인력법칙(Universal Law of Gravity)을 배우고 있다.
이것은 자연에 존재하는 힘을 수학적으로 표현한 최초의 이론이다.
NASA 의 연구원들과 천문학자들은 아직도 뉴턴의 중력법칙을 이용하여 우주선의 궤적을 계산하거나 혜성과 별, 그리고 은하의 운동을 예측하고 있다. 뉴턴의 중력이론은 그 정도로 정확하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아인슈타인은 지난 250년 동안 수많은 실험을 통해검증된 뉴턴의 중력이론에서 심각한 결함을 발견했다.
이 문제는 간단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아인슈타인 스스로 자문해보았다.
중력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태양과 지구 사이에는 1억 5천만 km 에 걸쳐 거대한 공간이 놓여 있다. 태양의 중력은 이 먼 거리를 어떻게 날아와서 지구의 운동에 영향을 주고 있는가? 지구와 태양 사이를 밧줄이나 체인으로 연결시켜 놓은 것도 아닌데 중력은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뉴턴이 1687년에 발표한 불후의 명저 <프린키피아, Principia>를 보면 그도 이 문제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발견한 중력법칙으로는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뉴턴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무언가가 전달된다고 확신했으나, 그 '무언가'의 정체를 밝히지는 못했다.
그는 <프린키피아>에 "독자들이 각자 생각해보기 바란다"고 장난처럼 적어놓았다. 그로부터 근 250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뉴턴의 책을 읽었지만 아무도구체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이 예외였으니, 그가 바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의 저변에 깔려 있는 수학적 특성을 10년 동안 연구한 끝에, 1915년에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개념적 비약이었고 수학도 엄청나게 복잡했지만, 핵심은 처음 떠올렸던 질문만큼이나 간단명료했다. 중력은 어떤 과정을 거쳐 빈 공간을 통해 전달되는가? '텅 빈 공간'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바로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중력의 매개체가 바로 텅 빈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기본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다.
여기 금속으로 만든 커다란 테이블 위에 작은 구슬이 굴러가고 있다.
테이블 면은 평평하기 때문에, 구슬은 직선경로를 따라 얌전하게 굴러간다.
그런데 누군가가 테이블 면을 토치램프로 가열하여 울퉁불퉁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구슬은 면의 요철에 영향을 받아 이전과는 다른 구불구불한 경로를 그리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이 원리가 공간에도 거의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텅 빈 공간은 평평한 테이블과 비슷해서, 그 안에 있는 물체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똑바로 나아간다.
그러나 질량을 가진 물체가 공간 속에 포진해 있으면 이들의 존재 자체가 공간의 모양을 왜곡시키는데, 이것은 울퉁불퉁해진 테이블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태양은 자신의 주변공간에 음푹 파인 홈을 만들어서 그 근처를 지나가는 물체의 운동에 영향을 미친다.
음푹 파인 곡면 위에서 구슬을 굴리면 곡선궤적을 그리는 것처럼, 태양 주변에서 움직이는 행성들은 휘어진 공간의 영향을 받아 지금과 같은 곡선궤적을 그리는 것이다.
대략적인 설명은 이렇다. 그러나 그 안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더욱 심오한 사실들이 굴비처럼 줄줄이 엮어 나온다.
휘어지는 것은 공간만이 아니다. 질량은 시간까지 휘어지게 만든다.(그래서 '시공간의 곡률(spacetime curvature)'이라는 용어가 탄생한 것이다.). 테이블 위를 굴러가는 구슬은 지구의 중력 때문에 표면을 이탈하지 않지만(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의 휘어진 형태를 굳이 다른 것에 비유하지 않았다. 그는 휘어진 시공간 자체가 곧 '중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간은 2차원이 아닌 3차원이므로 사정이 많이 다르다.
공간이 휘었다는 것은 물체를 떠받치는 아래쪽 면이 휘었다는 뜻이 아니라, 물체를 에워싸고 있는 공간 자체가 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공간을 2차원으로 단순화시켜서 금속 테이블에 비유해도 아인슈타인의 아이디어를 이해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
일반상대성이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중력이 공간을 가로질러 먼 곳까지 전달되는 원리가 커다란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역사에 길이 남을 아이디어를 제안한 이후로 중력은 "물체의 질량이 주변환경을 왜곡시키는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이 아이디어에 의하면 지금 당신의 몸은 지구가 만들어 낸 시공간의 굴곡을 따라 아래로 움직이려 하기 때문에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수학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몇년을 더 고생한 끝에 마침내 일반상대성이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아인슈타인 장방정식(Einstein Field Equation)'을 유도해냈다. 이 방정식에 질량의 분포상태를 대입하면 시공간의 휘어진 정도, 즉 곡률을 알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질량뿐만 아니라 에너지도 고려해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방적식 E=mc^2 에 의하면 질량은 에너지로, 그리고 에너지는 질량으로 언제든지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E는 에너지이고, m은 물체의 질량, c는 빛의 속도(광속)이다.
뿐만 아니라 휘어진 시공간이 그곳으로 이동해오는 물체(별과 행성, 혜성, 심지어는 빛까지)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미래를 세세한 부분까지 예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점쟁이여서가 아니라, 바로 이 방정식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상대성이론이 발표된 후, 이론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관측도 비교적 빠르게 수행되었다.
당시 천묵학자들은 수성의 공전궤도가 뉴턴의 이론으로 계산된 값에서 조금 벗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1915년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방정식으로 수성의 궤도를 다시 계산하여 관측과 일치하는 결과를 얻었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그의 동료 에이드리언 포커(Adrian Fokker)는 너무 흥분하여 몇 시간 동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1919년에 영국의 물리학자 아서 에딩턴(Arthur Eddington)과 그의 동료들은 태양 주변을 스쳐서 지구로 날아오는 별빛을 직접 관측하여 빛의 경로가 휘어진 정도를 계산했는데, 이들이 얻은 값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예견된 값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이 소식은 <뉴욕타임즈>의 헤드라인에 "열광하는 과학자들-빛은 하늘에서 구부러진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되었고, 그날부터 아인슈타인은 과학의 새로운 천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아이작 뉴턴의 계보를 잇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일반상대성이론의 가장 극적인 검증은 그 후에 이루어졌다. 1970년대에 일단의 물리학자들이 수소 메이저 시계(maser, 메이저는 레이저와 비슷하지만 가시광선이 아닌 마이크로파를 증폭하는 장치이다.)를 이용하여 지구의 중력에 의해 나타나는 시공간의 왜곡을 1만 5000분의 1까지 측정하는데 성공했고, 2003년에는 카시니-호이겐스 우주선(Cassini-Huygens spacecraft)이 태양 근처를 지나가는 라디오파의 궤적을 정밀하게 측정하여 일반상대성이론이 예견한 시공간의 왜곡이 옳다는 것을 5만 분의 1이라는 작은 오차범위 안에서 입증했다.
이제 일반상대성이론은 이론물리학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최상의 도구로 자리 잡았다.
요즘 우리는 거의 끼고 살다시피 하는 스마트폰이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지구 위치 추적 시스템)는 위성과의 교신을 통해 자신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는 장비인데, 이 위성에 탑재된 장치는 지구의 중력에 의한 시공간의 왜곡을 고려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GPS는 오차가 계속 누적되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1916년에 아인슈타인이 추상적인 수학방정식으로 재구성한 시공간과 중력의 개념이 지금은 주머니 안에 들어가는 소형 단말기 속에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밤 하늘에서 관찰할 수 있는 성운들(nebulae)-안드로메다자리에 있는 M31이나 오리온자리에 있는 M42 같은 것들-이 은하수(Milky Way)의 일부이며, 우리가 속한 태양계도 이 은하수 안에 자리해 있다고 추측했다.(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추측하지는 않았다.)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은 캘리포니아 윌슨 산에 새로 세운 100인치짜리 망원경으로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이런 것들(즉 안드로메다자리에 있는 M31이나 오리온자리에 있는 M42 같은 것들)이 우리가 속한 은하와 다른 은하이며 우리 은하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주장했다.
Ediwn Hubble
허블은 스펙트럼에 나타나는 이 은하들의 적색 이동을 토대로 연구를 진행해, 어떤 두 은하 사이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들이 서로 멀어지는 속도도 더 커진다는 주장을 내놓을 수 있었다. 우주는 팽창하고 있었다. 팽창 속도는 더 커지고 있었으며, 팽창에서 수축으로 돌아설 가망성도 분명 없어 보였다.
당시에는 이런 주장이 받아들이기 힘든 생각이었다. 이런 주장은 우주가 틀림없이 엄청나게 압축된 첫 상태로부터 발전해 왔다는 것-다시 말해 우주에 시작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블의 이런 주장은 단지 주장으로서 관찰 결과를 설명하는 한 가지 방식에 불과했다.
달리 생각하는 것도 틀림없이 가능했다.
1948년 프레드 호일(Fred Hoyle)과 몇몇 사람들은 '정상' 우주론(steady state theory of the universe, 우주가 계속 팽창하긴 하지만 우주의 평균 밀도는 늘 변함이 없다는 이론)을 펼쳐 보였다.
이 우주론은 우주가 비록 팽창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주에 시작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물질이 끊임없이 만들어져 우주팽창으로 생겨나는 빈 공간들을 채워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우주론의 주장이었다.
1960년대 들어와 견해가 바뀌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우주배경복사(cosmic background radiation)를 발견한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1965년, 아노 펜지어스(Arno Penzias)와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은 뉴저지의 벨 연구소(Bell Laboratories)에서 실험용 극초단파 안테나(microwave antenna)로 연구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몇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안테나 방향을 어느 쪽으로 돌려도 쉭쉭 소음을 내며 불쑥 끼어드는데 도통 제거할 수 없는 불청객인 히싱 잡음을 발견했다.
처음에 그들은 이 현상을 안테나 위에 둥지를 튼 비둘기들이 안테나 전파를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새들을 강제로 제거해 버린 뒤에도 쉭쉭 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
이 골치 아픈 배경의 쉭쉭 소리가 지닌 엄청난 의미를 완전히 인식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랠프 알퍼(Ralph Alpher)와 로버트 허먼(Robert Herman)은 1948년에 그 소리를 우주에서 일어난 첫 폭발-뜨거운 '빅뱅'-의 '잔광'(afterglow)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이 열복사는 그 근원은 알 수 없지만 절대온도 2.7K 상태에서 우주 공간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광양자들(photons)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배경복사는 다른 증거들과 더불어 우주에 시작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반대설인 정상 우주론에는 심각한 난점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중대한 증거 역할을 했다.
그 뒤로 과학계에서는 표준우주론 모델의 기본 요소들이 분명하게 밝혀져 이 요소들이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심각한 논쟁이 벌어지는 영역이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모델이 관찰 결과와 가장 잘 일치한다는 데 널리 동의한다. 이제 과학자들은 우주가 약 140억 년 전에 생겨났으며, 그 뒤로 계속해서 팽창해 식고 있다고 믿는다.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증거는
1. 우주 극초단파 배경복사와
2. 빅뱅 직후에 결합한 빛의 핵들[수소, 중수소(deuterium)], 그리고 헬륨 같은 것들]이 상당히 풍부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결국 우주의 기원이 어떤 유일무이한 사건이라는 것-결코 되풀이할 수 없고, 따라서 일부 사람들이 과학적 방법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정확한 실험 분석이 불가능한 독특한 사건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음을 인식시켜 준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것이 이치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다.
예측 능력이 없어 보이는 자연신학을 두고 그 자연신학이 어떻게 '설명을 해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과학 이론의 타당성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 중 하나는 그 이론이 새로운 현상들을 예견할 수 있느냐 여부다.
이 점에서는 자연신학이 다소 한정된 잠재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곧 자연신학이 결함이 있고 수준이 낮은 '설명' 형태를 대변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설명'이라는 개념으로 생각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지레 짐작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이 문제는 과학 방법으로서 귀납법의 역할을 둘러싸고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과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서 중요한 이슈로 등장했다.
휴얼은 과학 방법에서는 새것을 예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밀은 단지 새로운 관찰 결과들을 예측하는 것과 기존 관찰 결과들을 이론에 수용하는 것(theoretical accommodation)을 심리적으로 구분하는 것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문제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중요하다.
히치콕(Christopher Hitchcock)과 소버(Elliott Sober)는 근래 이 문제를 논하면서, 때로는 예측이 수용보다 우월할 수 있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고 주장했다.
수용이 예측보다 우월한 상황들을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늘 변함없이 수용보다 예측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삼위일체 자연신학이란 것이 이미 알려진 관찰 결과들을 든든히 수용할 수 있다면, 이 자연신학이 새로운 관찰 결과들을 반드시 예측해 주지 않더라도 이 자연신학 자체가 이 신학이 내세우는 개념들에 충분히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수용이 과학 이론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상황들을 역사 속에서 쉽게 사례를 찾아 제시할 수 있다.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아마도 가장 쉽게 살펴볼 수 있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주로 광범위한 관찰 데이터를 새롭게 설명해 주었는데, 이 데이터 중 일부는 다윈 자신이 결합한 것이었고, 다른 일부는 그보다 앞선 시대 사람들과 같은 시대 사람들이 한 일들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다윈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문제는 이런 관찰 결과들을 어떻게 커다란 발전 이론 안에 담아낼 수 있을까라는 문제였다.
자연선택설은 생물학 세계를 이전보다 더 심오하게 이해할 수 있는 유리한 지적 관찰 지점을 제공함으로써 놀랍거나 수수께끼 같은 현상들 - 가령 흔적 기관들이 계속해 존재하는 현상 같은 것-을 상당히 쉽게 이론으로 담아낼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예측은 이론을 선택할 때 어떤 역할을 하지만, 어떤 이론들은 예측이 부적절하거나 말 그대로 불가능한 실재나 상황들과 관련되어 있다. 자연신학이 주로 수용에 의존한다면, 그 자연신학은 과학의 좋은 벗이다.
그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지구상의 친숙한 운동(대포알의 궤도)부터 멀리 떨어진 하늘의 운동(행성궤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자연현상을 단일한 수학 공식으로 기술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너무나 단순했다!
너무나 우아했다!
뉴턴이 과학계 최초의 슈퍼스타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극적 돌파구는 성경적 통찰을 통해 열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와 부패의 영역인 지구와 불변하고 영원한 곳으로 여겨지던 하늘을 날카롭게 구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둘이 전혀 다른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판단했다.
지구상에서 작동하는 물리학의 원리를 별과 행성 같은 하늘의 천체들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은 거의 2000년 가까이 사실상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렇듯 유서 깊은 지적 전통이 어떻게 무너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성경의 창조 개념을 숙고한 결과였다.
클라인은 "하나님이 우주를 설계하셨으므로 모든 자연현상이 단일한 기본 계획을 따를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우주를 설계한 단일정신이 한 묶음의 기본 원리를 활용해 연관된 현상들을 다스릴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생각은 자연스러웠다.
뉴턴은 그러한 생각에 입각해 연구를 진행했고, 결국 하늘이 다른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우주는 통합된 코스모스다. 우주 어디서나 동일한 수학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
뉴턴은 신학을 과학 안에 엮어 넣었을 뿐 아니라, 과학을 이용해 신학을 옹호했다.
그는 과학의 '본업'이 기계적 인과관계의 사슬을 거슬러 올라가 '기계적이지 않은 것이 분명한 제 1원인', 곧 인격적 창조주에게까지 마침내 이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뉴턴은 이러한 추론의 몇가지 사례를 제시했는데, 태양계의 절묘한 균형을 설명하려면 "맹목적이거나 우연적인" 자연의 원인만으로는 부족하고, "역학과 기하학에 대단히 능통한" 지적 원인을 상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 중 하나다.
뉴턴이 볼 때는 그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과학적 성과물인 중력 개념조차도 하나님의 증거였다.
중력은 질량과 전충성(물질이 공간을 메우는 성질) 같은 물질의 고유한 특성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뉴턴은 중력을 하나님이 세상을 직접, 적극적으로 다스리시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뉴턴은 시간과 공간을 포함한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이 사실 하나님의 특성이라고 보았다.
절대시간은 "영원부터 영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지속이었다. 절대공간은 "무한부터 무한에 이르는" 하나님의 무소부재였다.
뉴턴 물리학이 본 우리는 말 그대로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
하지만 결국 계몽주의 이론가들이 손을 썼고, 뉴턴의 새로운 과학도 세속화의 부식 과정을 거쳤다. 볼테르는 뉴턴의 연구 결과를 유럽 대륙에 소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위대한 과학자 뉴턴의 성경적 시각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주도면밀함을 보여주었다.
대신에 그는 뉴턴의 물리학을 끌어다 계몽주의의 입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했다.
뉴턴의 중력 개념이 유물론적으로 해석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우주를 붙드시는 창조주의 능력이 나타나는 방식이 아니라 물질 안에 내재하는 힘에 불과했다. 뉴턴의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은 논리적 범주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의 이론은 결국 그가 반박하려 했던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흡수되었다.
얄궂게도, 유물론적 세계관은 '뉴턴 세계관'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뉴턴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을 세계관인데 말이다. 이 세계관은 우주를 변하지 않는 수학 법칙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기계로 그렸다. 수학적 모델은 과학뿐 아니라 사회, 정치, 도덕에도 적용되었다. 너무나 간단해 보였다. 갈릴레이는 경사면에서 공이 굴러 내려오는 것을 관찰한 끝에 움직이는 모든 물체의 가속도를 밝히는 수학 법칙을 발견했다.
뉴턴은 떨어지는 물체(일설에 따르면 사과)를 관찰하여 모든 물체에 작용하는 수학적 중력 법칙을 계산해 냈다.
동일한 방법론을 사회과학에 적용해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몇 가지 단순한 사례를 관찰하면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보편법칙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한 역사가에 따르면, 18세기에는 "보편적 물리학의 관점에서 만물이 설명될 때가 멀지 않았다고 많은 이들이 믿었다."
물리학에서 통했던 수학적 방법이 다른 모둔 분야에서도 통할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되면 자연뿐 아니라 인간 본성을 지배할 수단까지 확보하게 될 터였다.
그는 하늘이 '완전'하고 원이 '완전한' 형태이므로 천체는 원운동을 할 것이 분명하다고 추론했다.
(그리스인들이 과학에서 연역법을 사용한 사례)
케플러는 2000년 동안 지배력을 행사했던 원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었을까?
화성의 공전궤도를 그리다가 어려움을 겪은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케플러가 관찰에 근거하여 내놓았던 가장 정확한 원은 약간 기우뚱한 형태였다. 그가 그리스적 사고방식에 붙들려 있었다면 그 정도의 사소한 오차는 무시했을 것이다.
원래 물리적 대상은 기하학적 이상과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케플러는 독실한 루터파 교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선이 원을 이루기를 원하신다면 정확한 원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것이 정확한 원이 아니라면 무언가 다른 것임이 분명했다. 이상적인 원에서 제멋대로 벗어난 것으로 대충 정리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이러한 신학적 확신에 힘입어 케플러는 6년에 걸친 지적 분투와 수천 쪽이 넘는 과학적 계산 끝에 마침내 타원 개념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나중에 케플러는 화성 궤도의 사소한 오차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부르며 고마워했다.
그것이 그가 최대의 과학적 돌파구를 열도록 박차를 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의 주된 목표가 "하나님이 부과하시고 수학의 언어로 우리에게 계시하신 합리적 질서와 조화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갈릴레이도 케플러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수학적 구조로 창조하셨다고 믿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 확신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 유명한 '갈릴레이 논쟁'의 핵심에 바로 이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흔히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옹호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는 식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당시에 태양중심설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을 측정 도구로만 쓴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태양중심설과 지구중심설(천동설)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할 만큼 경험적 자료가 충분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당시 천문학의 주된 실용적 용도는 항해였는데, 두 체계 모두 항해에 활용하기에 무난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들어맞기만 하면 지동설이든 천동설이든 사용할 의향이 있었고, 그것이 물리적으로 옳은지의 여부는 염려하지 않았다.
갈릴레이가 논쟁에 말려든 이유는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유용한 측정 도구일 뿐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옳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관건은 수학적 진리의 지위였다. 수학은 물리계에서 무엇이 옳은지 말해 주는가? 이것은 신학적 질문이 아니라 철학적 질문이었다. 그리고 갈릴레이의 주된 적수는 교회 사람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를 신봉하는 대학교의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드는 데 수학이 크게 기여했다고 보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핵심 특징이 양이 아니라 뜨거움과 차가움, 젖음과 마름, 부드러움과 단단함 같은 '질'이라고 보았다. 당시 대학에서는 수학의 지위가 물리학보다 훨씬 낮았다. 수학자 따위가 물리학자에게 어떤 이론을 받아들여라 마라 지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갈릴레이의 적수였던 피사 대학 철학교수의 말에서 당시의 사고방식을 읽어낼 수 있다.
"자연은 사실을 수학적 추론의 방법으로 입증하려 하는 이들은 진리에서 멀어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수학적 논증으로 자연의 특성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정신이 나간 사람이다. 두 과학은 성질이 전혀 다르다."
강연 시간에 이 인용문을 읽어 주면 청중들은 어김없이 웃음을 터뜨린다. 오늘날에는 수학 공식을 써서 자연을 설명하는 일이 과학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기 때문이다.
갈릴레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이 수학의 언어로 자연의 책을 쓰셨다고 선언했을 때, 그것은 도발적인 언사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갈릴레이 이야기는 흔히 과학과 종교의 갈등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올바른 자연철학이 무엇인가를 놓고 그리스도인들끼리 벌인 싸움이었다.
톰슨에 의해 ‘전자’가 발견되고, 골드슈타인에 의해 ‘양성자’가 발견되고 , 채드윅에 의해 ‘중성자’가 발견되고 , 러더퍼드에 의해 ‘원자핵’이 발견됨.
(러더퍼드가 제안하기를, 이 질량이 양성자 질량의 2배 더라. 그래서 채드윅이 그걸 찾아낸 거다)
중성자가 발견되던 해에 미국에서 엔더슨이 ‘양전자’를 발견함 (전자는 전자인데 + 를 띄는 전자다…원자에는 양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디렉이 그 전에 ‘반입자’설을 예언했었다. (엔더슨이 우주로부터 날라온 입자로부터 양전자를 찾아냈고 말이다.)
‘양전자’는 일반 상태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이건 바로 전자와 합쳐져서 2r 광자가 되어 버린다.
1934년도 즈음에 ‘핵’속에, 핵자들을 뭉쳐 있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함 -> ‘중간자’를 예언한 것이다…어떤 일본인이…-> 이게 중간자(파이온) 으로서, 핵력의 매개체라고 본다.
양성자,중성자-> ‘중입자’다. (여기서 ‘중’은 무거울 ‘중’자다.) , 중간자에서 ‘중’은 가운데 ‘중’자를 쓴다. 질량이 양성자와 중성자의 중간인 입자인 것이다.
앤더슨이 ‘뮤온’을 발견해 냄 -> 전자보다 질량이 훨씬 크다.
중성미자-> 지금도 이게 뭔지 잘 모른다. (베타 붕괴시, E 보존을 성립시키기 위해 뭔가 필요한데, 그래서 파울리가 질량도 없고, 전하량도 없고 , 보이지도 않고 단지 E를 지닌 무언가를 상정하기에 이름) -> neutrino(중성 작은 입자) -> 이 이름은 페르미노가 지어줌(이게 30년 후에 실험적으로 증명됨)
전자에 대한 중성미자 -> Ve , 뮤온에 대한 중성미자 -> Vu , 타우에 대한 중성미자 -> Vt
[입자동물원] 뭔가 규칙이 있을 거라 믿고, 미국의 머리겔만이 이 모든 것들의 기본 입자로 ‘쿼크’를 가정함. 실험적으로 밝혀짐
‘중입자는 쿼크 3개로 이뤄짐’
Up 쿼크, down 쿼크, strange 쿼크 , charm 쿼크, bottom 쿼크 , top 쿼크 로 총 6가지다.
(쿼크는 ‘부수전하’다.) (주로는 up, down 쿼크만을 논한다) (U,C,T 쿼크는 + 2/3 을 띄고 , D ,S , C 는 -1/3 전하를 띈다.) (bottom 과 top쿼크는 수명도 짧고 존재하기가 어렵다.)
프랑스 태생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는 물리적 세계가 거대한 기계이며, 식물과 동물 역시 기계와 유사한 자동장치(automaton)라고 주장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에 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자신이 받아들인 기계론적 철학을 당대의 종교적 회의주의자들을 논박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기계적 우주와 인간의 영혼을 예리하게 구분함으로써, 데카르트는 인간 영혼에 대한 믿음을 보전하고, 이를 신에 대한 믿음을 위한 전진 기지로 삼고자 했다.
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는 종교적 확언이었다. 사고는 종교적 활동이었으므로, ‘코기토’(Cogito)는 인간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답변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코기토’에서 출발한 데카르트는 즉각적으로 신의 존재에 도달했다.
이런 데카르트의 철학적 유산이 신이나 인간 영혼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되지 못하고, 단지 거대하고 비인격적인 우주에 대한 기계론적 개념에 대한 증명이 되어 버린 것은 이상한 일이다.
기계론적 철학의 확산은 과학사회의 형성에 의해 더욱 촉진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갈릴레오의 추종자들이 그룹을 형성하였고, 프랑스에서는 갈릴레오의 저작을 불어로 번역한 탁발수사 마린 드 메르센느(Marin de Mersenne, 1588~1648)를 중심으로 그룹이 형성되었다.
영국에서는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이 왕립협회(the Royal Society)라고 불리는 과학사회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를 따르는 다수의 무리들에 의해 둘러 싸여 있었지만, 이 그룹들은 선교적 열정을 지니고 자신들의 기계론적 철학을 장려하였다.
또한 이들은 기계론적 철학을 종종 종교적 변증과도 연관시켰다. 예를 들면, 왕립협회의 회원인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1703)은 그처럼 ‘엄청난 장치들’에 의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자연을 보고도 “이 모든 것을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보았다.
혹은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이처럼 탁월한 기계장치들은 “전능자의 작품이다”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